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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평점 :
불멸의 베스트셀러란 이 소설을 드디어 완독했다.
오래 전에 읽었을 때는 완독도 못했지만,
내 상태가 이 대단한 책을 받아들일 만큼이 안 되었다.
그래도 읽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독서에 '때'는 있어도 "때'를 후회할 필요는 없다.
이르고 늦은 독서는 있어도 읽어서 나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럴 게 있을 게 뭔가.
(아니다, 있다....생각났다...'때'를 잘못 만난 소설 한 편으로
어떻게 내가 소설과 담을 쌓았는지. 그 사연은 다음에)
분량도 꽤 되고, 담긴 사유도 넓고 깊어 리뷰 쓰기도 만만치가 않다.
할 이야기가 많으니 쓸 이야기가 많은데, 그걸 다 하자면 날 새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조르바님이 그걸 원치 않을 것 같아서다. ^^
뚜렷하게 보인 것만 이야기고 말자.
그게 조르바란 인물을 만난 사람다운 태도일 지도 모른다.
뭘 길게~~~~복잡하게~~~~
따지고 해석하고 엉겨붙는 걸 이분은 아주 싫어하신다.
그냥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고, 그대로 즐겨!
먹물들아, 그대들은 쓰잘데기 없는 잡생각이 왜 그리도 많은가!
조르바의 일갈일 것이다.
이 소설에 뚜렷하게 보인 거 하나.
'위대한 개츠비'와 플롯이 많이 닮았다.
두 소설의 뚜렷한 상통은 무엇보다'화자'에 있다.
닉 캐러웨이
바실(나)
두 화자는 이햐하긴 힘들지만 위대한 인물들에 매료된다.
개츠비
조르바
(뭐야, 한글로 이름도 세글자란 공통점)
닉과 바실은 주변에서 '위대하다'고 인정해주기 힘든 인물을 멘토로 받아들인다.
이게 두 화자의 또다른 '위대함'이다.
나 말고 70억의 타인.
우린 그 속에서 특별해뵈는 멘토를 찾는다.
누가 봐도 위대한 사람을 찾는다.
그런 사람은 찾기 쉽다.
대부분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고 조회수 높은 유튜브나 팟캐스트의 주인장이거나
초대손님이다.
아주~~~찾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하지 않다.
세상엔 위대할 지 모르나 '나'에겐 위대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에게 위대한 멘토를 찾는 것이다.
'나'한테 없는 무엇, 그걸 갖췄거나 그걸 알아보는 사람.
그게 '나'의 멘토다.
누가 뭐래도, '나'만의 멘토인 것이다.
닉과 바실은 그걸 알아봤다. 개츠비와 조르바에게서.
그러려면 그들이 먼저 위대해야 한다.
자신의 '결핍'을 알아보고 인정해야 하니까.
이거, 은근 어렵다. 아니, 노골적으로 어렵다.
외모적, 능력적 결핍을 알아보는 건 쉽다.
문제는 감정적 결핍이다.
감정적 결핍은 스스로도 알아보기 힘들다.
인정하면 그 순간부터 안 그래도 결핍된 감정이 빈 주머니가 되어버릴 테니까.
그 결핍이라도 품고 바닥이 보이더라도 남은 양을 끌어안고 버터내야 하니까.
감정적/정서적/영혼적 결핍을 알아본다는 건
일단 자신을 내려놓는, 막중하고도 험난한 작업이다.
그게 완벽하게 되면 '구루'다.
당장 종교 하나 만들어도 될 거다.
소설 속에서 별 일 안하는 것 같지만,
일은 개츠비하고 조르바가 다 하는 것 같지만
닉과 바실이 해낸 일은 위대하다.
소설 속 화자로서도 위대하고 한 인간으로서도 위대하다.
그래서 둘은 그 위대함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채울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와 위대한 조르바의 '위대함'을 알아본 근본은
두 사람이 자신의 결핍을 제대로 알아보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깥의 위대함이 '나'의 안으로 쏙쏙 빨려온다.
'나'가 인정 않는 결핍은 견고한 막을 만들어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섣부르게 간절한 마음으로 '죽은 지식'만 쓸어담을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먹물'이 되어갈 뿐이다.
닉과 바실이 실행한 그 '위대한' 방법은 좀 다르다.
닉은 '관찰'이다. 이 사람은 두 손 두 발 다 스스로 묶고 눈만 치켜뜬 격이다.
눈 부릅뜨고 개츠비를 관찰한다. 자기가 그 위대한 멘토로부터 뭘 받았는지
'깨달음'이란 결실을 제대로 풀어주지도 않는다. 결말에서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정도로
나눠준다. 물론, 소설 속에 다 있지만.
바실이 실행한 위대한 방법은 '관찰'이 아니다.
질문이다. 이 사람은 정말 집요하게 묻는다. 묻고 또 묻는다.
조르바님이 짜증낼 정도로 묻는다.
그런데 유심히 보자. 바실은 질문이 많은 만큼 질문을 잘 한다.
뭘 빼먹을 수 있는 답을 끌어내는 질문의 달인이다.
바실은 자기가 한 질문으로 조르바에게서 위대함을 뽑아낸다.
'인터뷰'에 관해 자기계발서 같은 거 보지 말고 이 소설을 잘 연구하면 대가될 듯.
자문자답이 아니라 자문타답이긴 한데, 그 소득이 엄청나다.
독자인 우리는 닉과 바실의 위대함을 둘 다 취하면 된다.
일거양득, 일타쌍피인 셈이다.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것 물론.
관찰하고
질문하면
우리도 위대한 멘토로부터 '나'에게 결핍된 것을 뽑아낼 수 있다.
단 선결조건은?
'나'의 정신적/정서적/영혼적 결핍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도 못했고 못하고 있다. 흉내만 내보려 몸부림 중이다(굿럭!).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뚜렷하게 보인 거 둘.
나는 편지를 집어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 역시 행복했다.
계속 걸어서 산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510p)
그러고는 곧바로 베개에 기대 일어나서는 침대 시트를 벗어던지고 위로 펄쩍 뛰었습니다.
(538p)
똑바로 서서 죽었습니다.
(538p)
이것은 '오름'이다. '상승'이다.
조르바는 '오름의 인간형'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오름'과 그 질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그리스인 조르바'의 위대한 화자, 바실은 위대하게도,
제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전과 동일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조르바가 유언처럼, 바실에게 전하라며 시골교사에게 "이제는 정신 좀 차릴 때가 됐다고 쓰슈."라는 말까지 듣는 인물이다.
그런데 우린 '질문의 달인' 바실 역시 상승하리란 걸 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완독은 기쁨에 겨움을 보장한다.
그에겐 조르바가 남긴 산투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실은 저 높은 곳에 있는 조르바의 집으로 갈 것이다.
어쨌든 올라갈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었으니 당분간은 나도, 어딜 자꾸 올라갈 것 같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