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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창작물은 수용자의 경험 위에서 재건축된다

텍스트와 영상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읽히고, 보이고, 해석되는 순간마다 

작품은 각자의 기억과 윤리, 삶의 조건을 덧입는다

감상되지 않는 작품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벽의 박물관에 놓인 전시물과 다르지 않다

 

이 전제가 필요한 이유는

내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내 멋대로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내 방식대로 재건축하면서.


원작 소설에서 메리 셸리는 창조주와 피조물(크리처) 모두에게 

윤리적 질문을 분산시킨다

빅터는 무책임한 창조주로 출발하지만,

크리처 역시 단순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민가에 숨어 살며 언어를 익히며 자신의 처지를 사유하기 시작한다

관찰하고, 비교하고, 인간 사회의 규범을 이해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크리처는 점차 판단과 선택이 가능한 주체로 이동한다

델 토로의 영화는 이 설정을 삭제하지 않는다


영화 속 크리처 역시 숨어 살며 책을 읽고 세계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러나 차이는 

‘사유의 유무’가 아니라, 사유가 작동할 수 있는 구조에 있어 보인다

 

원작에서 독서와 사유는 크리처를 인간 사회의 윤리 영역 안으로 끌어올려 창조주와 인간에게 맞서게 하지만, 영화에서 크리처는 원작의 피조물에 비해 최소한의 사회적 발화권도 갖지 못한다. 원작의 크리처보다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말했으나(수용자는 장님) 훨씬 더 말할 수 없고, 응답 받지 못한다. 여기서 델 토로의 질문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사유하고 판단했으나 끝내 응답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

우리는 그 생에 어디까지 책임을 지을 수 있는가.

 

원작이 '사유했음에도 왜 이해에 실패했는가'를 묻는다면

델 토로의 영화는 

'사유했으나 끝내 응답받지 못하는 존재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서로 다른 시대의 윤리를 비추는 방식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비극적 정서가 아니라 구조적 갈등에 있다


피조물은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능력으로, 어떤 결핍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될지도 결정한 바 없다. 이 모든 결정권은 창조주에게 집중되어 있다. 창조는 철저히 일방적이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결과에 대해 후회한다. 창조주 빅터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후회는 감정의 표현일 뿐, 책임의 수행은 아니라는 것-.

 

한마디라도 더 하면 기적이라고 해 놓고

왜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창조자를 대면한 크리처의 절규다.

이것은 권력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다

창조주는 전능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피조물은 제한된 능력만을 받았다.

언어 능력, 사회적 위치, 자기 해명의 수단 모두가 창조주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자신과 동일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공정하지 않다.

 

이 대사는 비애의 토로가 아니다. 권력의 비대칭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다

창조주는 전능에 가까웠고, 피조물은 제한된 능력만 받는다

언어 능력, 사회적 위치, 자기 해명의 수단 모두가 창조주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자신과 동일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이 예정된 비극적 불균형이라니...

 

델 토로는 이 갈등을 개별 인물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상징화한다

시체의 절단 장면이 전혀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살인'이나 '훼손'이 아니라 '제작'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빅터가 절단하는 것은 사람의 다리가 아니라 재료의 일부였다.

 

원작을 읽었을 때보다 확실히 이 부분에서 시청자(독자)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영화는 감정 대신 구조를 드러낸다. 생명체의 복제란 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책임이 유예되는 '구조'를 시체 절단, 이 장면으로 구현한다.

 

원작과 영화가 가장 확연히 다른 바는 인물에서 이루어진다.

여인, 엘리자베스이다.

 

원작에서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여자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했고, 잃었고, 그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명분을 제공한다

이전 크리처에서는 소거된 '감정'이 개입되면서 

빅터의 창조가 오만적 욕망으로만 보이지 않게 역할한다

정서적 알리바이인 셈이다.

 

이 알리바이로 빅터는 '나는 신이 되려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방패를 자처한다.

 

그에 비해, 델 토로의 영화에서는 이 알리바이가 철저히 제거된다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여자가 아니라 더구나 동생의 여자이다.

여기서는 사랑도(거기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혼자 썸 타는 정도), 

소유도, 회복의 환상도 생략된다. 그 결과 창조 행위는 감정으로 가려지지 않은 채 

그 자체의 윤리적 문제로 불거진다. 

영화에서 빅터의 창조는 더 이상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없다

오로지 그의 '도덕', '책임'만 남는다.

 













확연히 다른-사과의 받아들여짐

 

소설에서는 창조자와 크리처가 끝내 화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메리 셸리는 '사과'를 유예한 채 서사를 닫는다. 빅터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연민에 가깝고 명시적인 사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빅터는 인간들 틈에서 죽는다. 크리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빅터와 마지막이 어긋난 채, 그래서 영원히 이해 받지 못한 채 빙산의 황무지로 사라진다. 파국은 봉합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절대적 비극이다.

 

델 토로의 영화는 확연히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에서 빅터는 사과한다. 그것은 변명도, 후회의 독백도 아닌, 창조주로서의 명시적 책임 인정이다. 그리고 크리처는 얼굴을 마주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 받아들임은 화해라기보다, 더 이상 관계에 매이지 않겠다는 결정에 가깝다. 크리처는 떠난다. 도망이 아니라 이탈이며, 파괴가 아니라 분리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원작이 '왜 이해에 실패했는가'를 묻는다면,

영화는 '사과가 가능했다면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실험한다.

델 토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소 조건을 장치한다

 

바로, 사과이다.

빅터와 크리처는 얼굴을 마주하고 분명히 말한다.

 

I am sorry. 

Accepted.

 

책임이 언어로 발화되는 순간, 폭력의 순환은 종료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희망적이라기보다 

내게는 다분히 윤리적이다

 

크리처는 머무르지 않고 떠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복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희극적이지는, 당연히 않다.

 

그 중간의 어디쯤이다.

 

슬프면서 희망적이면서 가여우면서 기특하고 

너 같으면서도 나 같다는 느낌...

 

무엇보다, 뿌듯하다.

책임이 한 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나는 얼마간 평온해졌다.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구조가 잠시 멈춘 게 느껴져서.

일방적 권능과 무방비 상태로 그 권능에 희생되어야 하는

보나마나 2026에도 이어질

불가해할 정도로 편파적인 힘의 구조가 

 

잠시 멈춘 게 느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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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1-0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켄슈타인, 사 놓고 읽지 못하고 모셔 두고 있어요. 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땐 고이 모셔 두죠.
아마 읽고 나면 리뷰를 쓸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올해엔 읽어야지, 하고 있어요.^^

젤소민아 2026-01-01 12:53   좋아요 1 | URL
18세에 이런 소설을 쓰다니...참...나...천재들이란! 페크님 리뷰, 기대됩니다!
 

알라딘 서재를 시작한지는 오래~~~됐다.

거의 못 썼다.

찔끔댔다.


2025년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


자꾸...잊...어...버린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이 책? 내가 읽었던가?

펼쳐보면 밑줄 좍좍.


이래선 안 되겠다. 기록장이 필요해졌다.

혼자만 보는 기록장은 영원히 혼자만 보게 된다.

혼자 보니 외로워서 그마저 안 본다.


그래, 알라딘 서재에 한 줄이라도 쓰자.


어차피 매일 기어들어와 일단 신간 훑어주시고 와장창 장바구니로!

보관함에 넣었던 책들 중에서 또 골라서 장바구니로!


올린 리뷰 수로는 자신 없지만 구매한 책 볼륨으로는 내가,

꽤 자신 있다. 물론, 구매했다는 건, 꼭 읽었다는 건 아니지만. 험험.


아무튼 알라딘 서재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페이퍼가 뭐하는 건지도 알았고...


다른 서재에 좋은 리뷰가 많다는 것도 알았고,

'이웃'도 생겼다. 


그러면서 인간인지라...슬그머니 욕심이 생겼다.


이웃서재들에 휘황하게 붙은 '서재의 달인' 뱃지.


좋아 보였다.

난, 저거 언제 달지? 어떻게 받지?

알라딘에 물어보니, 뭐,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엄청 열심히 해야되든데...


그런 있다. 하지는 않으면서 바라기는 하는 거. ^^


매일 100자평이라도 써보자, 했는데 그것도 잘 안됐다.

에잇, 남의 몫은 쳐다보지 말자!


아, 근데 이게 언제 붙은??


방금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지?

남의 서재인가?


허허벌판 같은 아래 여백에 '2025년 서재의 달인' 뱃지가!

위로 올라가 보니 새초롬한 젤소미나가 맞네!


이 모든 영광을 이웃님들께 바칩니다!


아자아자!

한번 달았는데, 2026년에도 달아야지...


또또 욕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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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젤소민아 2025-12-06 11:3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5-12-06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2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서재의 달인, 안에 들면 기분이 좋죠. 아마 이달에 두꺼운 노트-다이어리가 배달될 것이니 주소를 잘 입력하십시오.(따로 있는 주소 입력 칸에 써야 함. 전 이걸 깜빡하길 잘해요.ㅋㅋ)
저는 그 노트를 매년 받아 몇 권 있는데 각각 다른 용도의 메모장으로 씁니다. 신문 보다가 기억해 놓을 기사가 있으면 베껴 써 놓기도 하죠. 볼펜으로 메모해 보는 맛도 괜찮습니다.^^

젤소민아 2025-12-06 11:37   좋아요 0 | URL
별 것 아닌 건가요~~ㅎㅎ 저한텐 별 것 맞습니다. 서재에 등록한 건 정말~~오래됐거든요. 뭘해도 열심히 못해놔서...뭔가 이제 뭐 하난 열심히 했다, 라고 인정받은 거 같기도 하고 그렇네요. 노트, 전혀 몰랐는데 감사해요~잘 챙길게요~

yamoo 2025-12-0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달인 앰블럼을 달고 싶은 분이 있군요! 정말..ㅎㅎ 엠블럼 보면서 달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적이 없어서뤼..ㅎㅎ

젤소민아 2025-12-06 11:38   좋아요 0 | URL
저 완전 달고 싶었나봐요 ㅎㅎ

페넬로페 2025-12-0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저는 앰블럼 보면서 나름 뿌듯한 생각이 드는 사람중의 한 명 입니다.
독후감도 글인지라 그것 쓰려면 시간 내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거든요. 저는 글을 쉽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투자한 제 시간이 소중하더라고요. ㅎㅎ
물론 제가 좋아서 책 읽고 글 쓰지만 연말에 받는 선물이 기분 좋아요.

젤소민아 2025-12-07 06:24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리뷰야 명불허전이죠~~. 저도 늘 읽으며 배웁니다. 자주 들러주셔요 페넬로페님~

bookholic 2025-12-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올해 다섯 손가락 안에 드실 정도로 열심히 하셨어요^^ 축하 드립니다~~

젤소민아 2025-12-07 06:25   좋아요 0 | URL
ㅎㅎ 진짜요?! 다섯 손가락! 5등안에 든닷! ㅎㅎ 그냥 매일 한줄이라고 쓰는 걸 루틴으로 하려고요. 어차피 매일 읽는 책이니~. 북홀릭님 앞으로 자주 봬요~

잉크냄새 2025-12-07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문득 저 금메달 안의 알라딘 램프가 오징어 게임 달고에 나왔다면 아마 그 단계에서 드라마 끝났을 것이라 생각이 드네요. ㅎㅎ

젤소민아 2025-12-08 11:0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네요`~감사합니다, 잉크냄새님~저 잉크냄새 좋아해요~만년필 매니아~

책읽는나무 2025-12-0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욕심냈는데 획득했다면 달콤한 기쁨이겠습니다. 내년에도 통통 튀는 글과 선택하여 읽으시는 책들 눈여겨 보며 잘 읽겠습니다.
파이팅입니다.^^

젤소민아 2025-12-08 11:03   좋아요 1 | URL
책나무님 감사합니다! 책나무님의 남다른 셀렉션도 구경 자주 가겠습니다~

서니데이 2025-12-0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제 서재에도 축하인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알라딘 서재에 요즘 리뷰를 자주 쓰는 편이지만,

거의 쓰지 못했다.


어차피 읽는 책이니 독서로그 쓰자는 기분으로, 날 위해 쓴다.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름은 기억하려 애쓰고

댓글 남겨주는 분은 기억하려 애를 쓰지 않아도 기억된다.


그러고 보면, 기억하려 애쓰는 자체보다

저절로 기억하는 게 더 큰 마음인 것 같기도 하고.


알라딘을 이용한지 십수년이 지났는데

오늘에서야 알라딘 서재 '친구 사이' 되는 법을 알았다.


서재관리에서 팔로잉/팔로워를 누르면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오고


팔로워를 누르면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이 나온다.


내가 친구신청한 사람은 까먹었다 치더라도(그걸 다 외우고 있을 순),


내게 친구신청한 사람들한테 응답을 못했다~~~~~~~~.


내게 친구신청한 지 벌써 몇 년 된 경우도 있었다.


몇 년 묵은 답을 뭐라고 생각할지.


무심하거나 거부한 게 아니라(그럴 이유가 없지요!)


제가 기계치라 그래요~~~~~~~~~.


나는 도통 기계가 싫으다.


'친구 신청' 수락하고 나도 거기 그 서재에 가서 뭘 해야 친구 사이가

제대로 되는 건지, 또 그 고민 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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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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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소설의 문장마다 기억하긴 힘들다.

온갖 미디어에 중뿔나게 소개되는 명문장조차 단 한 줄도 외우기 힘들다.


우리가 기억하는 건, 그냥, 소설의 줄거리다.


그래도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니, 

어디 가서 소설의 몇 문장-명문장 아니고, 몇 문장-은 외워서 읊는 척도 하고 해야 할 것 같아

외우려고 해 봤다. 머리가 시멘트처럼 굳었나보다. 안 된다.


그래서 외우기를 포기하고 매달린 게 밑줄이다.

밑줄을 긋기 위해 온갖 펜을 동원했다. 


(요즘 내 독서의 밑줄긋기를 맡아주기 위해 엄선된 애들)


펜을 동원하다 보니 펜에 관해 쫌 알게 되었다.

펜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팬 말고, 펜-.


내 책상을 볼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문구점이냐, 필기구 공장 차렸냐,

하는 말들을 잊지 않고 한다. 난 칭찬으로 듣는다.


뭔 이야길 하다가 펜으로 흘렀나...


아, 밑줄긋기.


문장을 외우지 못해 밑줄을 긋다가 위기에 봉착했다.

어느 책의 어디에 밑줄을 그어놨는지 당췌 알 길이...


책을 일일이 열어봐야만 그어놓은 밑줄을 찾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또 짱구를 굴렸고, 그래서 찾은 방법이 '머리띠' 끼우기다.


책갈피 위에 '머리띠'를 끼우듯  head tab을 하나 붙이는 거다.


끄트머리에 메모를 적어서. 

이렇게.



이게 얼마나 유효한지 모른다.


뭘 찾아야 하는데 어떤 책에서 봤더라???


그러면 책꽂이로 달려가 이 '머리띠'를 훑으면 된다아!!


<미겔 스트리트>에서 그렇게 머리띠를 끼워놓은 문장이다.


내가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해트였다.

그는 팔에 신문 한 부를 끼로 평발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카페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손짓을 하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는 네가 이맘때쯤 하늘 위에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가 어디 다른 나라로 떠났다가 돌아온 게 아니다.
어디 다른 나라(런던)로 가려고 공항으로 갔는데 비행기가 6시간 연착돼서
다시 미겔 스트리트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말하자면, 엄청 민망한...

나도 이런 적 있다.

나도 '나'와 꽤 비슷한 상황이었던 때.
다른 나라로 갈 때.

가족, 친구, 친척 다 모여 울고불고 콧물 짜고 했더랬다.
나는 그들 곁에 내가 있던 자리가 받을 타격을 상상하며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았더랬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여권을 빼놓고 택시를 탔고,
나는 곧 죽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택시를 돌렸다.

이미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고 그랬는데,
내가 다시 돌아가자 내 자리는 이미 거기 없었다.

내가 사라지기 직전까지는 내 사라짐에 대해 하늘 무너지던 사람들이
나의 귀환에 "너, 왜 또 왔어?" 였다.

두번째 이별은 밖에 나와 보지도 않드라...

예전에 지방으로 전보나서 떠나는 직장 동료와 뜨거운 작별 회식자리에서
그 동료가 먼저 뜰 때도 그랬다. 손수건 없이는 볼 수 없는 눈물의 허그와 울먹임.

그러고 먼저 나간 그 동료가 10분 쯤 우산을 두고 왔다며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린 어깨동무를 하고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부르느라 
그 동료가 왔다 간 줄도 몰랐다.

나중에 우산이 있다가 없어진 걸 알고 알았다. 

나는 실망했다. 해트가 이렇게 냉랭하게 맞아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영 이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도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았고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실망했던 것이다.


289p)


내가 이 문장을 외우고 밑줄 긋고 머리띠를 하고 난리치는 건

이 문장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때 얼마나 실망했던지.

나는 영영 그곳을 떠나기 위해 가버렸는데 모든 건 이전과 같았다.

나의 부재를 가리키는 건, 끔찍하리만치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나를, 50여년 전에 쓰여진 문장 속에서 만난다.

내가 언어화하지 못한 나, 내 마음, 내 처지, 나의 무엇-.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태어난 소설가에게 기댄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달라고.


그게,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가진 위력적인 힘이다.


내게 기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의 언어를 좀 찾아줘어어-.


내가 오늘 단 한줄의 소설도 쓰지 못한 이유.

내 언어부터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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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에 관한 생각
김재훈 지음 / 책밥상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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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에 관한 책은 다 산다. 

애정에 더해 무슨 회한 같은 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재 책꽂이에 '피아노' 칸을 따로 마련할 것 까진.


체르니 30번 치다 말았어요. 


내 피아노 실력을 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 마디다.

 어지간한 가요나 팝송을 친다. 요즘은 일본 만화 주제가를 친다. 악보 없이는 한 줄도 못 친다. 죽은 지 백년 넘은 작곡가들의 곡을 하나도 못 친다. 한 두 줄 흉내는 낸다. 넘을 수 없는 벽을 금세 만난다. 그 벽 앞에서 늘 중얼거리게 된다. 

에잇, 저만 아는 천재들...


부제가 '버려진 피아노를 만지며'이다.


내게, 딱 이런 순간이 있었다.

내게서 버려지려는 피아노를, 만지던 순간이.


내 손가락이 한 번도 닿지 않았던 양끝 건반을 제일 먼저 눌렀다.

그쪽은 죽은 지 백 년 넘은 작곡가들이나 감당할 '신'의 구역이다.

건반 청소할 때나 닦개로 눌러봤을까...


음 같지도 않은 음이 났다.

굳이 따지자면,


제일 낮은 라

제일 높은 도


제일 높은 도에는 있어야 할 검은 건반이 없다.

반쪽짜리를 넣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뚜껑을 닫고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손으로 쓸어보았다.

손가락에 먼지가 묻어났다. 

옷방에 있던 수건으로 피아노 몸체를 닦았다.


누구 집에 가더라도, 날 잊지는 마.


이런 오그라드는 생각은 안 했다.


이 피아노로 처음 엘리제를 위하여,를 치고 

혼자 박수치고 뿌듯해하던 장면 같은 것도 떠올리진 않았다. 


나는 그때, 내 피아노가 처음으로 그냥 피아노로 보였다.

40만원짜리 중고 피아노.

건반 달린 물건.


그때 눈물이 났다.

거기 스민 기억이나 추억 같은 것과 연관 지을 때보다

그냥 물건으로 보인 피아노가 더 눈물 났다.


피아노의 소명은 누가 치면 소리를 내는 것.

'신의 구역'은 한 번도 쳐주지 못한 주인을 만나 가운데 쪽 건반만 반질거리게 

닳았지만, 내 피아노는 내게 온 제 소명을 다한 물건으로 남았다.


이제 물건의 숙명답게 어딘가로 팔려나가 또 누군가에게 건반을 내어줄 것이다.


그때는 백년 전에 죽은 작곡가들이 칠 수 있다고 장담한 신의구역,

그쪽 건반도 건드릴 수 있는 주인을 만나길.


사용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는 물건으로서의 효용도 누리길.

그래서 언젠가 너 또한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여한없이 최후를 맞길.


아주 유용한 물건으로 잘 쓰였다, 하길.


*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겠지만, 만의 하나, 궁금할까봐,

  피아노 판 돈 40만원은 시어머니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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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18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체르니 30번 치다 말았어요.
지금은 악보도 못보는 닝겡이 되고
말았지만요.

어려서는 헤비메탈만 음악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다가 클래식의 바다에 빠지게
되고는 고전 레코딩에 심취하여
서울의 시디샵을 돌던 시절도 있었
죠.

치지 못하니 듣는 것으로 만족...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는 디누
리파티, 샹송 후랑수와 그리고 코르
토 정도가 되겠습니다.

아, 빌헬름 켐프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도 무척 좋아합니다.

젤소민아 2024-10-18 21:43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남과 헤비메탈~. 어쩐지 어울립니다!
클래식과 헤비메탈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알프레드 코르토!! 이분의 바하 아리아는 첫소절에 눈물 뻑...
오랜만에 또 들으러가야겠어요.

오늘 주신 피아니스트들 연주를 다 찾아서 들어보는 ‘아름다운‘ 하루로 삼고파요~
감사합니다!

stella.K 2024-10-1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민아님 결혼하셨어요? 전 몰랐네요.ㅎ
피아노하면 저죠. 피아노 배우기 싫어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나마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배우기 위해 꾸역꾸역 치다가 그만뒀는데 얼마나 좋던지. ㅎ 근데 저는 악보 보는 게 싫어서 왠만한건 귀로 듣고 맞거나 말거나 그냥 흉내는 내게되던데. 물론 지금은 그런 신경 다 죽었지만요. ㅠㅋ

젤소민아 2024-10-18 21:34   좋아요 0 | URL
그간 보아 오신 제 리뷰가 ‘결혼 전‘으로 보이셨단 거죠? 왜 기분 좋죠? ㅎㅎ
‘젊어보인다‘는 말 같기도 해서요. 젊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인가봐요~

그러고보니 저도 백년 전에 죽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치는 게 있네요??
엘리제를 위하여!! ㅋㅋ

언젠가 다른 에세이에서 제가 ‘엘리제를 위하여‘를 이렇게 표현한 기억이 있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는 나그네의 본향같은 곡...이라고요.
어떤 곡을 치더라도 ‘엘리제를 위하여‘는 ‘나그네의 본향‘처럼 감동적이고 안정감이 있는 것 같아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텔라님. 요즘 스텔라님 읽으시는 책 보러 가야겠어요~


stella.K 2024-10-18 21:51   좋아요 1 | URL
오, 그런 표현을 쓰시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월광소나타도 멋지지 않나요?
암튼 베토벤 아저씨는 위대한 것 같아요.^^

근데 정말이어요. 결혼 안한 줄.
거기엔 서재 프사도 한몫했겠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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