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걸작인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크누트 함순 아닌가. 

무려, 노벨문학상.

무려 자전적 소설.

빈농의 아들로 15세 때부터 거리로 나섰던.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는 배고픔에 거리로 나선다.

집에 아무것도 먹을 게 없어서.

수중엔 돈도 없고.

전당포에 잡힐 건 다 잡혔다.

누군가에게서 얻은 초록담요와 안경뿐.


업은 그럴싸하다.

신문에 글 내는 자유기고가.


딱, 함순 자신의 이야기다.


글이 채택되면 몇 푼 얻는다.

신문사로 글을 내러 가는 중에 참 여럿을 만난다.

지겹도록 만난다.

만나는 인간들이 하나같이 배고픈 자들이다.


'나'는 '배고픈 주제에' 또 그들을 돕고 싶어 안달이다.


그 바람에 '나'의 굶주림은 계속되고

배채우기는 지연된다.


제발 밥, 좀 먹자.


기다리다 소설 읽던 내가 배고파 지칠만하면 '나'의 손에 돈이 들어온다.

그거로 배를 채운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장은 또 이내 며칠이 흐르고 '나'는 또 배가 고프다.


이 명작의 명작 포인트는 바로 이 '지연'과 '충족'의 기막힌 타이밍.

독자가 소설을 읽는 속도를 타이머로 잰 듯, 정확하다.


소설을 읽어보라.


배가 고플 것이다.

배가 고파지는 지점에서 배 채울 '구원'을 만날 것이다.


소설 속의 '나'처럼.


당신은 독자가 아니라 '나'가 된다.

함순이, 된다.


나는 온 나라에서도 비길 데 없는 머리와 하역 인부라도 때려눕히고 콩가루로 만들 만한 두 주먹을 가지고 있다(신이여 용서하소서), 그런데도 크리스티아나 도시 한복판에서 인간의 모습을 잃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세상의 질서와 순서가 그런 것인가? (137p)


*명작모멘트


굶주리다가 노숙자로 위장하고 경찰서에 찾아 들어가 노숙자 숙소에서 밤을 보내는 '나'.

특별한 암흑 속에서 기묘한 어둠을 만난다.

그러자 어처구니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들어차면서 물건 하나하나가 두려워진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모든 소리가 예리하게 들린다.

그러다 '나'는 새로운 단어를 하나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쿠보아.


암흑 속에서 그 단어가 눈앞에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즐거워서 웃는다.

'나'는 굶주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광기에 이른다.

텅 빈 상태가 되면서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생각의 고삐를 놓으면서 떠오른 그 신조어.


쿠보아.


죽을 떄까지 잊지 못할 명작 모멘트.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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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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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기 전에 두 가지 태도를 접할 수 있었다.


1. 재미도 없고 별로인데 왜 좋다는 거죠?

2. 엄청 좋은데 뭐가 좋은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 의문을 머리에 달고 첫 페이지를 폈다.

나는 어디에 서게 될까,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짧기도 하고.


완독 후 3번의 태도를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3. 사소해서 좋다, 라고.


거대 악을 고발하는 소설이 아니라 

사소한 선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 같다.


어떤 인간이 되려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사소하기 그지없어서 세상 모든 걸 사소하게 보고

그렇기에 자기 삶에서 사소하게 남더라도 

그런 인간이 어째서 우리에게 중요한지.


이 소설의 소재인 막달레나 세탁소의 여성 착취를 파헤치며

고발 소설로 썼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긴장감과 자극, 재미를 만들 수는 있었을 지 모른다.


독자의 분노와 정의감이란 선명한 공감도 몇 배는 더 쉽게 끌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 방식이 지금의 이 소설보다 더 문학적이었을까. 


소설가는 철저하게 그 길을 벗어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사소한 것들을 다루는데 그 방식조차 사소하다.

그게 이 소설의 메타적 미학 같다. 


심지어 펄롱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생부의 존재조차 크게 다루지 않을 정도다. 

지나치듯,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태도로 흘려보낸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태도...


출생의 비밀조차 드라마로 만들지 않겠다는 절제.


이 일관성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에는 크고 작은 사건이 생기기 마련이고, 

중요해 보이는 장면, 강조하고 싶은 순간이 반드시 등장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오히려 썼던 문장을 땀흘려 지워내는 키건을 느낀다.


중요한 것을 강조하는 대신 덜어내는 쪽을 택한 선택들, 그

그 과감함과 노련함이 읽는 내내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뚜렷하게 남는다.
“아, 사소한데 좋다, 아니, 사소해서 좋다."


알고 보면 이 소설의 바탕에는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무거운 실화가 깔려 있다. 


키건은 그 거대한 덩어리를, 마흔도 채 되지 않았고 

생부의 얼굴도 모르며 어머니마저 잃은 한 소시민, 펄롱에게 조용히 얹어 놓는다. 


하지만 펄롱은 그 짐을 지고 허우적대지 않는다. 


세상을 구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에게 딱 맞는 무게만큼, 

자기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만큼만 짐을 진다.

그래서 그는 수녀원에 감금된 소녀를 ‘구출’하지 않는다. 

구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도록, 그냥 데려온다. 


사람들은 묻는다. 딸이냐고. 

어느 범죄 집단에서 빼내 온 아이냐고 묻지 않는다. 

소녀 역시 그 침묵에 조용히 동참한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당나귀였다.

(119p)


광장에서 크리스마스 전등이 켜진 구유 앞에 멈춰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요셉의 밝은 옷도, 무릎 꿇은 동정녀도, 동방박사와 아기 예수도 아니다. 

크리스마스라면 당연히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들은 모두 주변으로 밀려난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옆에 서 있던 당나귀다. 

말 없고, 사소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존재.


집요하게 사소해지기로 한 작가의 태도-.


펄롱은 소녀를 구한 게 아니라 곁에 남긴다.


단발적 '구제'보다 

사소해 보이지만 지속적이란 면에서 오히려 '구원'에 다가든다.

그래서 사소하지만 결코 시시하지 않은 감동이 와 닿는다.


사소해서 좋다.

거창하게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대신, 

사소하게도

사람 하나를 인간으로 남겨두는 이야기라 좋다.


정말로 사소한데, 그래서 더 좋다.

키건은 바로 그걸 해 낸 것 같다.


--------------------------------------------------------------



펄롱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네드가 심히 힘들어했던 것, 

어머니와 네드가 늘 같이 미사에 가고 같이 식사하고 밤늦은 시간까지

불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을 생각하며

그게 무슨 의미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략)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111p)


이 부분은 소설 쓰기적 관점에 봤을 때, 시점의 오류처럼 보인다.


이 소설 전체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쓰였으나

초점 인물은 펄롱이다. 

화자가 펄롱의 눈을 통해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전지적 작가(제3의 누구/내포작가)는 펄롱을 내려다보며, 

혹은 옆에서 동반하며 펄롱에 관해 쓴다. 

펄롱이 보는 것 생각하는 것도 꿰뚫어본다.


펄롱이 슬프고 기쁜 때도 알아본다. 

정확하게, 때로는 일부러 '믿을 수 없는 화자'로 만들어 비뚜름하게.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이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그런데 여긴 시점이 이상하다.


네드의 행동이 은총이 아니었나.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이건 펄롱의 느낌이다.

고로, 그 문장의 주체와 화자는 명백히 펄롱인데 펄롱이 타자화되어 

'펄롱의 곁에서',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나의) 곁에서

(나의) 구두를


이라고 바꿔서 읽었다. 내 경우는, 더 좋았다. 


혹시, 자유간접화법으로 전지적 작가가 개입한 것이라면, 

오류나 실책까진 아니지만 과히 설득적이진 않다. 

왜 갑자기 전지적 작가가 이 모든 걸 정리하려 하는가.

거리감 느끼게시리.


더구나 그 다음엔 또, 바로 주어도 없이 


잠시 멈춰서 생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떠돌게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로 이어지지 않나.


의도적이라고 하면 그 의도가 잘 읽히지 않는데,

물론, 이건 독자인 내쪽의 빈약함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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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정원 -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주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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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의 <겨울정원>을 읽다가 가장 먼저 감지한 건 

이 소설엔 제스처가 별로 없다는 것-.

인물은 의미심장한 몸짓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소설의 시작은 '반복되는 일상'이다.
이건 특히 소설의 서두에서 잘 안 쓰는 건데...

봄과 여름 내 만개했던 것들이 모두 진 십일월부터,

하루 중 가장 볕이 따뜻한 오후 한 시간 동안 난 꼬박 텅 빈 정원을 바라본다.

14p)


지금이 언제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십일월부터 화자는 한 시간 동안 텅 빈 정원을 바라본다. 아무 것도 없는 정원을.

이렇게 되면 소설을 끌고 가기 힘들어진다.


너무 가라앉았다. 거기서 '동요'를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동요없는 소설을, 특히 요즘 독자들은 읽으려 들지 않는다.
물론, 소설은 읽히기 위한 게 목적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제스처'보다는 상태/상황 설명이 위주다.

작은 행동을 개별적으로 나열하기보다는 그 행동들을 뭉뚱그려 진술한다.

가라앉은 분위기엔...어울린다.

분위기는 가라앉았는데, 사소한 움직임이 뚜렷하면 텍스처가 깨진다.

이 소설에서 삶은 그래서 '장면'으로 존재하기보다

점으로 찍히는 편이다.


어제의 점, 오늘의 점, 내일의 점이 이 소설에서는 서로 크게 다르지가 않다.

독자는 다르길 기대할텐데...읽으면서 걱정이다.

'겨울정원'의 서사는 도통 진행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된다. 

그런데 이 반복은 짐짓 독특하다.

무기력이나 서사적 실패의 결과로 읽히지 않는다.

아하, 오히려 그것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형식일까.


말하자면, 이 소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 

소설가가 아주 많은 일을 한 소설 같다.

배제하기-.


금주 언니가 과메기가 있다면 화자(혜숙)을 집으로 초대하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과메기는 이 가라앉은 소설에서 동요를 일으킬 만한 ‘특별함’의 기표다. 

계절적이고, 누군가와 함께 나눠야 하며, 일상을 벗어나는 식탁을 암시한다. 


그러나 혜숙은 그 초대마저 오늘,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다른 날로 미룬다. 

그 결과 혜숙의 ‘오늘’에는 역시 별 사건이 추가되지 않는다. 

과메기는 가능성으로만 남고, 실현되지 않는다. 


치밀한 배제가 다시 일어난다.


'겨울정원'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지점들을 이렇게 의도적으로 유예한다.

이 유예가 반복될수록 독자는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란 것을.


난 단순하게 산다. 오피스텔에 가서 청소하고 집에 와서 씻고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다가 잠을 잔다.

(15p)


(아...진짜 소설을 얼마나 힘들게 써나가려고 이러시나...)


'겨울정원'에서 이룬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은 현재에 대한 집착이다.

정말 많은 소설이 오늘을 설명하려 과거를 호출하길 즐긴다.

'겨울정원'은 과거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 한 번 등장하는 과거—오인환과 함께 용궁사에 갔던 기억—마저도 회상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 기억은 설명되지 않고, 의미화되지 않으며, 현재를 변형시키지도 않는다. 


이주란은 '겨울정원'에서 소설 속 과거의 기능을 새롭게 발견했다.

과거는 지금과 그저 조금 다를 뿐이라는-.


혜숙에게 오인환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 부재 역시 극적인 상실로 처리되지 않는다.

또 다시 철저한 배제-.


과거를 최소화한 자리에 남는 것은 당연히 현재다.

현재의 미세한 흔들림이다. 


그 미세한 흔들림의 종류는 이러하다.


겨울 정원에 까치가 날아든다.

초등학교 동창회 단톡방에 보낼 연말 인사말을 ‘교양 있게’ 쓰고 싶어 한다.


이런 식이다.

이 소설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우연히 걸려드는 작은 변화를 

붙잡는 방식을 즐겨 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떨림은

딸 미래에게 찾아온 설렘이다.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혜숙의 감정이다. 


지금 미래에게 생겨난 저 마음이, 

언젠가는 내게도 다시 찾아올 날이 있을까 생각하면 

이미 겪은 일도 지금 겪고 있는 일도 아닌데 조금 슬프다.


44p


혜숙은 그 설렘이 자신의 미래에도 올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그러다 조금 슬퍼진다. 이 슬픔은 설명되지 않는다. 원인도, 결론도 없다. 다만 그날의 일상에 아주 작은 금이 간다. 이 균열은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흡수된다. 


하지만 독자는 느낀다.

이 소설에서 허용된 최대치의 사건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겨울정원'의 미학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다. 

그건 너무 지루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굉장히 분주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도록 소설 속 모든 것을 장악한 

소설가의 성실한 자제력 떄문이다.


소설가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을 하나씩 차단한다. 

감정이 커질 수 있는 지점에서는 문장을 낮추고, 

서사가 확장될 수 있는 순간에는 시간을 멈춘다. 


그 결과 독자는 누군가의 지루한 삶이 아니라, 

완벽하게 통제된 평온 같은 걸 마주하게 된다.


이 소설은 묻는다. 


우리 삶이 반드시 극적으로 변화해야만 의미가 있는가. 

감정이 꼭 폭발해야만 진짜인가. 


그리고 소설은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그렇지 않다고. 


어떤 삶은 반복되기 때문에 성립하고, 

어떤 감정은 이름 붙이지 않기 때문에 유지된다고.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남는 것은 감동이라고 할 수 없다.

감동 '꺼리'는 없는데, 이상하게 감동적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소설의 형식이 되는 경험. 


'겨울정원'은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소설이다.


소설가에게 묻고 싶다.

대체, 어떻게 참았느냐고.


엄마는 단순한 게 아니라 성실한 거였어.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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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5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26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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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철학가는 학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금속공학과 철학/문학/신학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무엇이 징검다리가 되어 한병철을 이끌었을까.


그 사이, 한병철의 녹녹치 않았을 고민의 두께가 느껴진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금속공학과 철학의 관계를. 물론, 내 멋대로.


금속공학은 '물질'을 다룬다.

아마도 금속이 어떤 압력과 온도를 거쳐 어떤 성질을 갖게 되는지, 

외부 힘이 가해질 때 어떻게 변형되고 피로해지는지, 연구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얻어지는 단어가 있다.


강도

내구성

피로감

변형


(그가 '피로사회'를 썼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이 단어들은 언뜻 봐도, 이미 철학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다.


철학은 인간과 사회를 다룬다.

철학 속 인간은 지속적인 압력 속에서 닳아가는 존재이다.


성과를 요구 받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끝내 피로해지고 마는 현대인.


어느새 금속공학과 이어져 버렸다.

.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금속공학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철학은 “왜 이렇게까지 견뎌야 하는가”를 묻는 것 아닐까.


어쩌면 한병철은 금속을 연구하다가 '견딤'에 천착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이 뭐든간에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한병철의 책은 모두 갖고 있다. 

두께가 얇고 판형이 작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가더라도

쏙 넣고 다니기에 딱 좋다. 누군가를,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릴때,

즉 '견뎌야 할 때' 동반하기 좋다.


한병철의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서사의 위기', 그리고 '사물의 소멸'


내가 소설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이 책의 서문 첫문장은 '소설'로 시작한다.

얼마나 반가운지.


소설 <은밀한 결정>에서 일보 작가 오가와 요코는 이름 없는 섬에서 벌어지는 일을 서술한다.

기이한 사건들이 섬 주민을 불안하게 한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라진다. (중략) 이 모든 사물이 어떤 좋은 점을 가졌었는지 사람들은 이제 더는 모른다. 사물과 함께 기억도 사라진다.

(7p)


오늘도 계속해서 사물들이 사라진다. 

(8p)


사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소통 도취와 정보 도취다.

(8p)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 (9p)


독일어 번역도 기막히게 잘 한 것 같다.

한굴로 쓴 책인듯 자연스럽다.

한병철의 용어는 아주 특별하다.

일상적인 동시에 대단히 적확하다.


용어를 굳이 풀이할 필요 없을 정도로 이해가능하면서 강하게 꽂힌다.


이 책에서 '사물'은 곧 '자극성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극성이 없는 것은 지금같은 정보화 사회에서는 폐기 대상 1순위다.

세상 모든 것(예술포함)들은 더,더,더, 자극적이지 못해 안달한다.


이 책에서 논하는 사물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개인적으로,

<연속성>이다.


사물을 인간의 삶에 연속성을 제공하는 한에서 삶을 안정화한다.


(11p)


'연속성'은 다름 아닌, 서사의 핵이다. 

연결이 없다면 서사는 없고, 서사가 없다면 소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책에 소설 이야기는 없지만 소설 이야기로 서문을 시작하는 것부터가

이 책은 소설을 진하게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물 없는 소설이 어디 있던가.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사물을 공전한다. 사물이 인물을 공전하기도 한다.

소설은 사물로 인해 사건이 진행된다. 

겉으로 보기에 사건을 움직이는 게 인물의 선택과 행위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행위는 언제나 사물에 의해 촉발되고, 사물에 의해 방향 지어진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인용된 <은밀한 결정>만 해도 사물이 하나씩 사라진다.


사물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고, 인물의 행위는 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소설의 사건은 인물의 의지보다 사물의 배치와 존재 방식에 의해 진행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가만 보면, 인물의 행위 위주로 쓴 소설보다 사물 위주로 쓴 소설이 그래서 더 훌륭해 보이는 이유고, 더 가만 보면, 대개의 걸작 소설은 인물보다 사물을 더 잘 활용하고 있다.


(전부 분석한 건 아니지만, 진실로 그럴 것 같다)


인물은 서사 안에서 움직이고

사물이 서사를 움직여 간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으로 다시 돌아가자.


그 사물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극심한 사물 인플레이션. 

사물에 대한 무관심의 증가.


(이 책에서 따온 표현이다)


우리는 사물보다 정보를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한다.

어느새 우리는 모두 정보광이 되었다.

(12p)


diskrete Ding=은은한 사물


이 책에서 가장 눈에 띈 단어다.


아울러, apprendre par coeur. 심장으로 배우기.


이어 붙이면 이렇다. 은은한 사물을 통해 심장으로 배우기.

이건 두고 저자는 '충심'이란 단어를 또 사용한다.


충심의 사물.


하이데거의 집 현관문 위에는 이런 성경 구절이 적혀 있다.

"온 정선으로 네 충심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중략) 생텍쥐페리도 생명을 산출하는 충심의 힘을 언급한다.

여우는 헤어질 때 떠나는 어린 왕자에게 비밀 하나를 쥐여 준다.

"아주 간단해. 충심으로 봐야만 잘 보여.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112p)


충심이란, '심장'과 연관된다.

심장에 아주 가까이 닿은 상태.


아마도 본질이, 진심이 거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는 '고요'의 챕터가 있다.

우리 시대의 근본 동사가 '닫다'가 아니라 '열다'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는 열려 있다. 열린 곳으로 무언가 쏟아져 들어온다.

그게 너무 양이 많아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간다. 


여기에 다게르의 사진 '탕플대로'가 인용된다.


1838년 프랑스 파리의 탕플대로에서 구두닦이에 자신의 부츠를 맡기고 있는 사람의 모습.


다게레오타이스 사진에 전형적인 극도로 긴 노출시간 때문에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로지 고요히 서 있는 것만 보인다. <탕플 대로>가 주는 인상은 작은 마을의 평온함에 가깝다. (중략) 이처럼 길고 느린 것에 대한 지각은 오직 고요한 사물들만 알아본다. (중략) 고요가 구원한다.


(124p)


사물이 소멸한다 하니 사물에 대한 애도를 배울 때인 것 같다.

나는 어디서 '은은한 사물'을 확보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 무엇을 충심으로 느낄 것인가.


내겐 가장 손쉬운 방법이 소설이다.

이 책 또한 그걸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이 책의 서문과 본문에서 소설과 소설가가 간간이 등장하는 이유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내게 한병철은 철학가인 동시에 지극히 문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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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2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물의 연속성과 서사에 대한 이야기 나오는걸 보니 제가 갖고 있는 서사의 위기 제대로 읽어봐야겠네요.
한병철 교수의 책은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26-01-22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책을 저도 갖고 있는데 완독하지 못했어요. 찾아봐야겠습니다.^^

젤소민아 2026-01-22 13:57   좋아요 0 | URL
대부분 짧습니다~~완독 가치 만발!!

2026-01-22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22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26-01-22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병철 책 5권 갖고 있는데 <피로사회> 한 권 봤습니다. 별루여서 더이상 손이 안간다는..^^;;

젤소민아 2026-01-25 12:40   좋아요 0 | URL
앗 그러셨군요~. 책이야 개인차가 있는 거니까요. yamoo님이 추천하실 책도 기대됩니다~
 
죔레는 거기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30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김보국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2월
평점 :
예약주문


이럴 땐 외국어가 아주 잠깐, 부럽...죔레. 개 이름. 너무 매력적이잖아. 벌써 서브텍스트가 기대되는 느낌. 노벨문학상 작가라서가 아니라, 개 이름 때문에, 험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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