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빛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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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존 밴빌의 '바다'를 읽고 빠졌다.

그의 바다에 풍덩. 

그의 문장은 길다. 정신 잘 차리고 읽어야 한다. 

호흡도 길고, 사유도 길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은 시를 닮았다.

시처럼 짧거나 운율이 있어서가 아니다. 

시처럼, 그의 소설은 '보여준다'.


조금 과장해서 보여주지 않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다.


그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런 단순한 문장이 그에게로 가면 이렇게 된다.


그가 의자에서 앞으로 몸을 너무 기울이는 바람에 

나는 그의 안경 렌즈에 반사된, 이중으로 반사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쓸까.


보기에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쓰는 사람들은 안다.

이런 '보여주는' 문장은 바로 그것을, 그것도 수백 번 보지 않고서,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서 써 내기 힘들다는 것을.


작가는 상상력에 의지해 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은 '없는 것'을 그럴듯하게 적어내는 게 아니다. 


분명히 겪은 것이니 그렇게 해내는 것이다.

똑같은 그것은 아닐지라도, 똑같은 그것처럼 가까운, 

다른 밀착된 경험을 했고, 작가는 그 경험에서 상상력을 발휘해 

문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우주 어느 공간의 밀키웨이를 생생하게 

문자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은 한 번 쯤은 가 보았을, 

다른 사람의 발길은 닿지 않은 다락방 한 구석을 체험해보았기 때문인 것처럼.


<오래된 빛>은 <바다>와 유사한 설정이 뚜렷하다.

의도적일 것이다.


'바다'에서도 친구의 어머니에게 연정을 품었더랬다.

오래 가지 못하고 이내 친구의 누이에게로 시선이 돌려졌지만.


'오래된 빛'에서는 친구의 어머니와 꽤 장기적인 밀애를 한다.


도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는 눈살 찌푸려지는 설정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롤리타'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듯,

그래서 '롤리타'의 도덕적 거스름보다 문학적 가치가 우위에서듯,

이 소설 또한 그렇다.


친구의 어머니와 즐기는 밀회는 이 소설의 백미다.

그게 없으면 이 소설은 전개도, 절정도, 결말도 아무 의미가 없다.


오래된 빛, 이기 때문이다.


그 밀회에서 출발한 빛이 오십 년이 지난 '나'에게 와 닿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별빛이 이미 몇 년, 아니, 몇 천년, 아니, 몇 백만년 전에 출발했듯.


우리가 보는 별빛은 모두 오래된 빛이듯. 


나는 '과거'를 이다지도 철학적이지 않은 듯 철학적으로 풀어낸 소설을 본 적 없다.


그에 따르면 우주에는 우리가 보거나 느끼거나 측정할 수 없는 사라진 질량이 있다. 그게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훨씬 많으며 눈에 보이는 우주,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그에 비하면 성기고 보잘 것 없다. 나는 그것을, 무게 없고 투명한 물질이 들어 있는 눈에 부이지 않는 바다를 생각했다. 이 물질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가 탐지할 수 없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그 속에서 움직이고

그것도 우리를 통과해 움직인다.


소리 없고 은밀한 본질.


이제 그는 백만-십억-일조 마일을 거쳐 우리에게 도달하는 은하의 오래된 빛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 이 테이블에서도 내 눈의 이미지라는 빛이 선생님 눈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 아주 작은 시간, 극소량이기는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어디를 보든, 어디에서나, 우리는 과거를 보고 있는 겁니다."


(254p)


자꾸 읽게 된다.

이 대목을 자꾸 되뇌게 된다.


그러면 소중했으나 내가 잊어버리고 만 과거의 오래된 빛이

내 눈에 와 닿을 것 같아서.


그러면 그 시간 속의 비어 있던 내가 지금의 질량으로 채워질 것 같아서.


사라진 질량을 회수할 수 있을 지도 몰라서.


오래된 빛을 찾는 이야기.

슬펐거나 아팠거나 고통스러웠거나 관계없이

지금은 모두 그립기만 한, 


아, 오래된 빛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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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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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싶지 않다. 

(7p)


여자(한나)는 글을 쓴다.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간다.

죽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쓴다고.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자는 겨우 서른 살이다. 

결혼했고 아들도 있다. 

여자는 십년 전, 남편과 처음 만났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어느 겨울날 아침 아홉시에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다.

한 낯선 청년이 내 팔꿈치를 잡아주었다.

(7p)


어제 내가 일하는 도서관 동료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미국은 술자리를 갖는 게 일상적이지 않아서 콜라와 사이다가 든 컵으로

건배했다. 페파로니 핏자를 앞에 놓고.


6명의 동료 중 한 명만 빼고 결혼했거나 사귀는 사람이 있다.


나만 빼고 모두, '온라인'에서 만났단다.

그들은 젊은 축이니까.


그 중 나이 많은 축인 누가 그랬다.


이제 더는 버스 안에서 실수로 여자가 남자 무릎 위에 앉게 되면서 벌어지는

로맨틱한 사건(romantic accident)은 없다고.


한나와 미카엘은 '로맨틱한 사건'의 주인공들이다.

미끄러지는 여자를 잘 생긴 청년이 잡아주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남자에게는 어지간하면 빙판길에도 미끄러지지 않는 자제력이 있다.

자제력 있는 남자는 여자에게 다쳤냐고 묻고, 자제력 없어 보이는 여자는

발목을 삔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나는 늘 '발목'이란 말이 좋아요.


이 남자, 발목 좋아하는 남자다.

그리고 이 남자는 거뭇한 수염을 가졌다. 


여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세상 어느 남자보다도 사랑했기에 그 수염이 만져보고 싶다.

남자의 이름은 미카엘 고넨. 지질학과 3학년생. 


-댁의 예루살렘은 춥군요.


(9p)

댁의 예루살렘? 

남자는 여자가 예루살렘 출신임을 대번에 알아본다.



남자는 아까 그 계단을 다시 올라가게 되자 아예 여자의 옷 소매를 붙잡아준다.


-오늘 아침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고 바람도 세게 불더군요.

-나의 예루살렘에서 겨울은 겨울이거든요


(10p)


한나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의'라는 단어가 나온다. 

미카엘의 입을 빌어 한나는 '예루살렘'이란 단어에 '나의'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한나의 언어가 빚어지는 순간이다.


그 언어를 준 사람은 남자, 미카엘이다. 


이 소설은 이 '나의'를 천착한다. 집요하게 파고든다. 악착같이 놓지 않는다.


나의 미카엘.


도무지 '나의' 것이 되어주지 않는 남자를 향해 여자는 끊임없는 구애를 펼친다.

남자는 첫만남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 주었을 뿐, 소설이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의 겨울처럼, 차갑다. 


이게 이 소설의 미학이다. 


독자에게 남자는 일상적인 인물이다. 딱히 차갑지도, 딱히 따스하지도, 딱히 비뚤어지지도, 딱히 군자같지도 않은.


다만, 여자에게 그렇다.


소설은 '개인과 개인의 서사'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나 같으면'이란 생각을 자주 하게 되지만 그럴 필요없다. '나의 렌즈'를 눈에 장착하고 소설을 읽지만 그럴 필요 없다. 그런 작업은 자연스레 따르게 되지만, 소설 독서는 그러지 않는 게 좋다. 


이왕이면 소설은 그 인물이 되어 보는 게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무지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면 '독자 렌즈'의 배율이 너무 큰 것이다.

도무지 화자나 인물의 마음이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소설의 진가를 누릴 수 없다.


인물의 편에 서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소설 속 인물이 늘 옳기만 한 건 아니니까. 

소설 속 인물은 다만 옳을 수 있는, 옳고자 하는 가능성을 품고 있을 뿐이다.


내가 처음부터 독자 렌즈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나의'란 단어 덕분이었다.


<나의 미카엘>은 순전히 한나(여자)에게 미카엘이란 남자를 세운 이야기다.


그 누구의 미카엘도 아닌 '한나의 미카엘'.


이 소설에서 사람과 사람이 일대일로 서서 마주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 마주봄에 따라 두 사람의 주변이, 학교가, 가정이, 사회가,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감지할 수 있었다. 


그냥 <미카엘>이 아닌 것이다.


<나의> 미카엘,인 것이다. 


어쩌면 두 사람의 '마주보기'보다 더 작아진, 한나의 '바라봄'인 것이다. 


한나는 미카엘을 '나의 예루살렘'이 되어주길 원했다.

미카엘은 그저 겨울엔 추운 예루살렘일 뿐이었다. 


한나는 '예루살렘'을 '나의 예루살렘'으로 인식하기까지,

그래서 '나의 미카엘'을 열망하는 여정을 이 소설에서 글로 펼친다.


아모스 오즈가 쓰는 게 아니라 한나가 쓰는 것이다.


한나, 정말 글 잘 쓴다.


밑줄 긋다가 포기했다. 

문장도 좋지만, 이 소설을 자기가 쓰는 일기인 양 마음 놓고 쓴다.

오죽하면 아모스 오즈(이 소설의 저자)가 '40년 뒤 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할까.


나는 그냥 한나가 내게 불러주는 대로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확한 말은 아니다.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추측을 다해 그녀와 싸웠다고 하는 편이 맞다. 한 번 이상, 두 번 이상까지도 나는 스스로 그녀의 말을 들으려 했다. "그것은 적절치 않아. 그것은 너의 본성이 아냐. 난 그렇게 쓰려는 것이 아냐." 그러면 그녀는 나를 꾸짖었다. "내 본성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 아닌지 내게 말하지마. 입 다물고 쓰기나 해." 나는 고집을 부렸다. "나는 널 위해 쓰려는 게 아냐. 미안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 여자에게로 가 줘. 난 더 이상 못 쓰겠어. 난 여자가 아니란 말야. 난 여성 작가가 아니란 말이지." 그녀는 더없이 완강하게 굴었다. "내가 말하는 걸 쓰란 말야. 참견하지 말고." "그런데 난 네 비서가 아니잖아. 넌 단지 내 책의 인물일 뿐이야. 마주나기가 아니란 거지."


우리는, 그녀와 나는 밤새도록 싸웠다. 종종 나는 그녀가 가고 싶은 대로 가게 놔줬고, 종종 나는 절대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내가 한나에게 했던 것보다 좀 더 혹은 좀 덜 그랬다 해도 이 책이 더 나았을지 혹은 더 나빴을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작가의 서문 중에서


한나의 문장들은 얼핏,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다가도 이내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자꾸 되돌아가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나는 그의 미소와 손가락이 좋았다. 그의 손가락은 각각이 개별적인 생명을 갖고 있다는 듯이 찻숟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찻숟가락은 그 손가락에 쥐여 있는 것을 좋아했다.

(9p)


한나는 문장을 책임질 줄 안다.


전에 쓴 문장의 여지를 나중에 받아서 자신의 글을 읽는 내 손에 꼭 쥐여준다.


푸른색 울 옷감을 통해서 나는 그의 다섯 손가락을 전부 느낄 수 있었다.

(10p) 


손가락의 여지. 찻숟가락은 경험했던 그 여지.

나중엔 여자도 마침내 경험하는 그 여지.


문장의 여지는 소설의 가능성을 만들고,

독자에게는 그게 소설을 종내는 다 읽어낼 이유가 된다.


놀라운 문장, 놀라운 인물, 놀라운 관계, 놀라운 시각, 놀라운 사랑,

놀라운 <나의 미카엘>이어라.


아버지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달래서 자기가 받을 자격이 없는 동정심을 얻어내야 한다는 듯이 말을 하는 분이었다. - P14

아직까지도 나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운명의 젊은 학자하고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답니다. - P19

어떻게 하면 미카엘을 조금 더 붙잡아둘 것인가. - P20

한번은 그가 손가락 하나를 뻗어서 내 턱 끝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내었다. - P22

"오늘 당신 정말 이상하군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마치 다른 날에도 그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 P26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서도 나는 그 나무가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완전히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 P28

대답할 수 없을 때마다 그는 어른들이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는 것을 알아차린 어린애처럼 미소 짓는다-당혹해하면서 남도 당혹스럽게 하는 미소를. - P31

미카엘이 말했다. "우리가 어릴 때 만났더라면 당신은 나를 완전히 때려뉘였을 거예요. 저학년 때에는 나보다 힘센 여자애들한테 늘 얻어맞곤 했거든요." - P33

"당신이 결혼할 사람은 아주 강한 사람이어야겠군요." - P35

어째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아주 강해야 한다는 걸까? - P36

내가 실체가 없는 자기 생각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듯 멀리 떨어져 자기 안에 몰두해 있는 그림자. 나는 실재예요, 미카엘. 춥다구요. - P39

말을 하자마자 그는 다시 커다란 자기 외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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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2-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또 이렇게 소중한 소설 강의 읽고, 느낄 수 있어 넘 감사합니다.

<한나의 언어가 빚어지는 순간이다.
그 언어를 준 사람은 남자, 미카엘이다.
이 소설은 이 ‘나의‘를 천착한다. 집요하게 파고든다. 악착같이 놓지 않는다.>

->웅장하고 섬세한 포착에 설레면서 읽었어요.
젤소민아님의 소설 사랑은 정말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ㅎㅎ
읽는 사람이 뽑아낸 ‘나의‘라는 두글자로 이 소설이 재탄생하는 느낌이에요.

‘이왕이면 소설은 그 인물이 되어 보는 게 좋다.‘

->진짜 공감해요. 모든 인물에 들어가서 마음껏 여행하다가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의 기분이란!!

젤소민아님, 언젠가 알라딘 서재의 소설 리뷰들 모아서 ‘소설 감상법‘같은 책 내주세요!!
여기에서만 읽기엔 너무 아까워요ㅎㅎ

제가 올 11월까지 수험생이라서 소개해주신 책들 자주 읽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시간 내서 틈틈이 읽어볼게요ㅎㅎ
젤소민아님의 글은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재밌고 배우는 게 많아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으러 올테니깐 걱정 마세요^^

젤소민아 2025-02-08 02:51   좋아요 1 | URL
앗, 저, 부끄러워서 쥐구멍 찾아요~~전야제님의 과찬, 온몸으로 받습니다. 심장이 발끝에서 콩쾅거리는 것 같아요 ㅎㅎ 혹시 미혼이시라도, 기혼자시더라도 이 ‘부부의 열정 로맨스‘에 뛰어들어 보세요. 아니, ‘아내‘ 혼자만의 뜨거움이지만요 ㅠㅠ

사실,그게 현실의 실상이기도 하죠. ^^

요즘, 얼굴은 절대 안 되고 ‘손‘하고 ‘책‘만 나오는 유튜브를 오픈하려고 준비중이에요.필요한 건 휴대폰과 책! ^^ 편집도 절대 안하고 자막도 안 넣고 그냥 혼자 떠들어보려고요. 오픈되면 전야제님껜 귀띔할 테니 왕림해 주세요~. 아마 아무도 없고 혼자이실 지도 몰라요 ㅋㅋㅋ 늘 읽어주시고, 응원 댓글 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요즘처럼 책 안 읽는 시대에.

전야제 2025-02-06 17:16   좋아요 1 | URL
유튜브라니!!! 넘 축하드려요ㅎㅎ 저 열혈 시청자될게요^^
꼭 알려주세요~~
젤소민아님의 책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면 좋겠어요ㅎㅎ

ㅎㅎㅎㅎ 저는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열정 로맨스,,꿈 속에서는 열렬히 꾸고 있습니다^^
이제 한달만 더 버티면 봄이 오네요.
새로운 시작 화이팅입니다!!
 
지하에서 쓴 수기 창비세계문학 10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근식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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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다. 


1865년에 쓰인 소설이,

160년 후를 내다보고 있을 줄 알았다.


'걸작'은 그럴 줄 알았다.

'거장'은 그럴 줄 알았다. 


그릇된 구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상식과 과학이 인간을 완전히 재교육해

인간의 본성을 정상적으로 통제하는 날이 오면 "인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터득하게 되고, 자발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이며,

정상적 이익을 고의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여러분은 여전히 확신하고 있다.


더욱이 그때가 되면 여러분은 "과학이 직접 인간을 가르치기 때문에 인간은

의지라든가 변덕 따위와 같은 감정을 실질적으로 모를 뿐 아니라 앞으로도 모르게 될 것이며, 인간 자신은 피아노 건반이나 오르간의 음전에 불과할 따름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자연 법칙이 있는 관계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소망이 아니라 자연 법칙에 의해서 저절로 행해지게 된다" 라고 말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자연법칙들만 발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일도 없어져 앞으로는 살아가기가 무척

용이해질 것이다. 이러한 자연 법칙에 의거해 수학적으로는 마치 로그 표에 의거하듯 모든 인간의 행동은 십만 팔천 가지로 분류되어 인간의 행동 목록으로 등록될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경우로는, 요즘의 백과사전 용어를 정리해 놓은 것과 같은 교화 서적이 출판된다는 것이다. 


그 서적에는 

모든 것이 자세하게 계산되어 있고 설명되어 있어서, 

이 세상에 사건이나 모험 따위는 더는 있을 수 없게 된다.

(44p)



자연 법칙에 의거해 수학적으로는 마치 로그 표에 의거하듯 모든 인간의 행동은

십만 팔천 가지로 분류되어 인간의 행동 목록으로 등록될 것이다. 


160년이 지나 인간은 인간의 성격 유형을 십만 팔천 가지도 아닌,

딱 16개로 분류했다.


2025년을 사는 인간은 이름 바로 뒤에 네 개의 영어 알파벳 대문자로 조합된

성격 유형을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은 점차 이름의 중요성을 앞지르고 있다. 이미 앞질렀는지도. 그 사람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INTP(논리적인 사색가형)'이었던 건 또렷이 기억나니까.


모든 것이 자세하게 계산되어 있고 설명되어 있어서, 

이 세상에 사건이나 모험 따위는 더는 있을 수 없게 된다.


전화기가 있는 집을 떠나면 연락할 길이 없어 

사전 약속 없이 길거리에서 아는 이를 만난다는 건 '사건'이었다.

아는 이가, 마침 이쪽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인물이라면 사건은 커졌다.


택시 기사들은 그 지역의 곳곳에 통달해서 택시를 타면 

뒷좌석의 손님은 안심한 나머지 잠들곤 했다.


지금의 택시는 나 만큼이나 지리를 모른다.

뒷좌석에서 잠들었다간 집에 못 갈 수도 있다.


모든 건 '목록'으로 등록된 기계가 해치운다.

우리는 그저 기계를 믿고 기대면 된다.

물론, 기계 오작동이 발생하는 경우, '사건' 아닌 '참사'를 각오해야 하지만,

뭐 그 정도야. 어쩌다가, 정말, 아주 어쩌다가 생기는 일인걸.


모든 것이 자세하게 '계산'되고 '설명'되어

모험이 필요 없어진 세상.


이 말은

어떤 일이 펼쳐질지 다 알 수 있는 세상,과 같은 문장이다.


앞으로 펼쳐질 어떤 일은 이미 모든 게 데이터화 되어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다 알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기대감'을 잃었다.


설렘을 잃었다.


모든 게 계산되고 설명되지 않았던 

160년 전의 소설을 읽다가 나는,

오늘을 본다.


오늘 속에 떨어진 설렘을 한 조각 줍는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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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1-23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에서 쓴 수기 얼마 전에 장바구니 담아놨었는데, 나중에 꼭 읽어볼게요!
160년 전의 통찰이 이렇게나 정확하다니. 놀랐습니다.
모든 원인과 결과를 이어서 필연으로 묶어내려는 법칙들과, 소설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정말 대비가 되는 것 같아요.
젤소민아님께서 들어주신 예에서 저도 어릴 때 생각이 났어요ㅎㅎ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올라오면서 친구들이 핸드폰을 다 장만하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핸드폰을 샀거든요.
그래서 그전까지는 정말 말씀하신대로 약속 없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들이 그렇게 반갑더라구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바로 바로 전할 수 있는 건 지금 시대에서는 너무 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어쩌면 언어를 전하려는 마음이 더 애틋하고 설레어서 손편지나 이메일 같은 수단이 너무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겨지나봐요.
최근에 저도 긴 편지를 써 보았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계산되지 않는 마음을 살려내서 끝까지 간직하고 소중히 여기려구요!
역시 젤소민아님의 통찰과 이야기는 저에게 많은 배움을 선물해줍니다.
이번주에 서울 3일동안 여행하다가 내려왔는데, 이제 또 틈틈이 책을 읽으려구요.ㅎㅎ

젤소민아 2025-01-23 23:00   좋아요 1 | URL
요즘은 전야제님 생각하며 리뷰를 쓰게 된답니다~ㅎㅎ
소설에서도 ‘수용자‘가 아주 중요하잖아요. ‘독자‘와 또다른 존재, 수용자.
독자보다 더 화자의 말을 가까이서 듣는 사람, 화자나 내포작가가 독자 이전에 앞서 말하는 사람...

전 소설의 ‘수용자‘ 개념을 정말 좋아해요.

글이 잘 안 써질 때는 수용자를 제대로 초대하지 못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럴 땐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최근에 쓴 소설을 예로 들면, 유산하고 아이 잃은 상실감을 홀로 견뎌내야 하는 여자들...과거의 저이기도 하고요.

그러고보면, 제가 쓰는 소설도, 이 세상 모든 소설도 작가의 조각들이 분신처럼 배어있을 것 같아요. ‘지하에서 쓴 수기‘는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신사여러분‘을 수용자로 삼고 있는데요, 결국 자신은 ‘신사‘가 아니란 거겠죠.

화자가 수용자를 세우는 게 아니라 수용자를 세워 스스로 화자로 입지하는 느낌이었어요. 전야제님께서 읽으시면 후반부 좀 이야기 나눠요. ‘리자‘에게 하는 그 긴 ‘잔소리‘의 의미를 도통 모르겠네요 ㅎㅎ 책의 절반...

왜 그렇게 길어야 했을까...서울여행 좋으셨나요~~‘무진기행‘이 생각났어요. 고향을 찾으면서 ‘기행‘이라고 말하던. ^^ 따스한 댓글 감사합니다~ 제 리뷰의 수용자가 돼 주셔서 감사해요~

2025-01-24 1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4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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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령은 커피 통 뚜껑을 열고 

커피가 한 숟가락밖에 남지 않은 사실을 확인했다.(7p)


소설은 첫 문장에서 '얼굴'을 보여준다.

소설이 어떻게 생겼는지, 인상을 먼저 보여준다.

대개가 그렇다. 꼭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첫 문장에서 소설의 얼굴을 얼핏이라도 볼 수 있다면 좋다.

생각해 보라. 

소개팅(요즘도 이런 단어를 쓰는 지는 모르겠지만)하면서 

얼굴도 안 보고 그 사람에 관해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호기심이 일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리라 결심하고 첫 장을 펼친 독자에게 호기심을 주지 못하는 소설은...

소설, 자신도 힘들고 독자는 더 힘들게 한다.


아무리 난해한 소설도 호기심은 주게 마련이다.

도대체 이 난해함의 끝은 어디인가, 란 호기심조차 주게 돼 있다.


[커피 통 뚜껑을 열었는데 커피가 한 숟가락밖에 남지 않았다]면 

이 소설의 얼굴은 '결핍'의 인상이다.


이 소설은 '결핍'에 관한 이야기구나.

대령은 '결핍'의 인물이구나.


독자는 대령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나가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대령이 결핍에 무너지지 않고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대령을 알아야겠다.


다음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순진한 기대감에 부풀어 

화덕 옆에 앉아 커피가 끓기를 기다렸다.

(7p)


대령은 자신만만하고 순진한...캐릭터

가 아니라 그의 '기대감'에 관한 설명이다.

그의 기대감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기다린다'가 더 중요해 보인다.

대령은 아무래도 '기다리는' 사람일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내전이 끝난 이후 오십육 년 동안 대령은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7p)


이제 우리는 '대령'의 이름도 나이도 뭣도 모르지만 

그에 대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보했다.

그는 기다린다. 무엇을?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찾아 소설로 기꺼이 뛰어들 작정이다. 


아내는 굽고 딱딱한 등뼈 위에 얹힌 보잘것없는 하얀 연골에 불과했다. 

호흡 곤란 때문에 의문문을 긍정문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8p)


대가...답다.


대령이 기다리는 '무엇'을 향해 가는 동안 우리는 대령의 아내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무엇'을 범상치 않게 맞을 수 있다.

대령 혼자서 소설의 목적을 이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대령의 기다림에는 필시 조력자가 있을 터다.


하얀 연골에 불과하고 의문문을 긍정문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아내.


대령에게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처럼 그녀는 병약해 보인다.

대령에게는 어째 '쓸모없는' 존재 같다.

소설에서 대개 그렇듯, 독자에게는 적잖이 유용할 것만 같고.

하얀 연골에 불과하지만 의문문을 긍정문으로 탈바꿈시킬 정도라면야...


이 문장의 서브텍스트는 다층적이다.

그 중 하나를 벗겨보자면.


생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외력에 의해 받아들어야만 하는

'긍정'이 강요화된 무력의 극치.

자발적, 타발적 모두 다.


아내는 아무래도 대령에게 조력하기보다는 대령에게서 조력을 받아야 할 인물 같다.

모기장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만 봐도.


아내는 남편의 신발을 눈여겨보았다.

"그 신발은 이미 버릴 때가 다 되었네요."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계속 에나멜 구두를 신는군요."

대령은 갑자기 우울해졌다.

"마치 고아가 신는 신발 같소." 대령은 투덜거렸다.

"이 신발을 신을 때마다 고아원에서 도망친 느낌이라오."

"우리는 우리 아들의 고아예요." 아내가 말했다.


아, 솔직히 말하자.


나는 이 문장을 읽기 위해 이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아니, 이제껏 읽은 모든 소설이 그런 느낌이다.


우리는 우리 아들의 고아예요.


과연, 나만 이 문장에서 멈춰 한참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마 많은 '우리'가 그랬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의 소명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것의 어떤 의미가 됐든지간에 그런 거라 믿는다.


마르께스는 '고아'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해 우리에게 선사했다.


'부모가 없는 아이'에서 '자식이 없는 부모'로.


부모(어른)도 아이가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어떤 이유로든 자식이 '소거'된 부모는 자식의 고아일 수 있다.


'없음'이란 '부재'로 인해.


마르께스의 '고아'는 기존의 통상적인 '부재'와 '결핍'이란 의미에 한 가지를 더 얹었다.


(대령의) 기다림.


그러고 보니, 그렇다.

'고아'는 기다림이다.

'결핍'과 '부재'를 '있음'으로 치환해 줄 대상을 기다리는.


그렇다.

'고아'는 우리인 것이다. 


우리 중에, 과연,

무언가를 기다리는 '고아'의 상태가 아니라고 항변할 자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말이다.


소설의 중간도 가지 못했는데,

나는 이미 '대령'이 되었다. 

당신은 어떤가.


여기서부터 나는 '우리'란 말을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어디서 난 거요?"

"수탉한데요." 아내가 대답했다.

"아이들이 옥수수를 너무 많이 가져오는 바람에 수탉이 우리와 함께 나누어 먹기로 했어요. 이런 게 인생이에요."

(60p)


죽은 아들이 기르던 수탉은 죽어 무력해진 주인,

그 주인에 의해 '고아'가 된 주인들에 의해 무기력해진 채

침대 다리나 화덕 다리에 매인 신세다.


그 수탉에게 아이들이 가져다주는 옥수수가 대령과 아내를 먹인다.

그리고 대령과 부부는 '그게 인생'이라고 한다.


"인생이란 지금껏 발명된 것들 중에서 최고라오."

(61p)


수탉에게서 나눠 받은 옥수수 죽을 먹고 대령과 아내는 그때까지 가지 않고 있던

죽은 사람의 집에 조문을 간다. 그리고 시계를 팔 궁리를 모색한다. 

그리고 대령은 드디어 수탉을 팔 결심을 한다. 


소설은 전환을 맞는다.


링 한복판에 무방비 상태로 혼자 있는 수탉을 보았다.

며느리발톱을 누더기로 싸매고 있고, 발을 떠는 것으로 보아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상대는 칙칙하고 창백한 수탉이었다.

(중략)

수탉이 전광석화처럼 깃털이 펄럭이더니 발로 공격하고 목덜미를 물었다....

그의 수탉은 공격하지 않았다. 상대가 공격할 때마다 물리치고는 정확하게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제 수탉은 발을 떨지 않았다.


(84p)


소설의 절정이다.


소설은 이미 결말을 맞은 느낌이다.

대령도 이제 더는 발을 떨지 않을 것 같다.


더는 기다리지 않을 것 같다.


대령의 기다림은 완료될 것 같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싶다.

결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먹죠."

아내는 이렇게 물으면서 대령이 입은 티셔츠의 칼라를 움켜쥐고 힘껏 흔들었다.


투계, 투계의 투영이다. 

대령과 아내는 '투계'를 치른다.


"말해봐요. 우리는 뭘 먹죠."

대령은 이 순간에 이르는 데 칠십오 년의 세월이, 그가 살아온 칠심오 년의 

일각일각이 필요했다. 대답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꼈다.


"똥."

(94p; 소설의 마지막 문장)


나는 앞으로 책을 몇 장 넘겨 이 문장을 찾아 다시 읽는다.


수탉이 전광석화처럼 깃털이 펄럭이더니 발로 공격하고 목덜미를 물었다....

그의 수탉은 공격하지 않았다. 상대가 공격할 때마다 물리치고는 정확하게 똑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제 수탉은 발을 떨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의 고아다.

내게 무언가는 결핍되고 부재한다.

나는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나의 무언가는 무엇인가.

내 기다림은 완성될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대령처럼 더는 발을 떨지 않을 수도,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읽었으니 

이 소설을 읽기 전과 달리,

나는 앞으로 발이 떨릴 때면

의식적으로나마,

수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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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1-12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소설 너무 읽고 싶어지고...젤소민아님 글은 넘 웅장하구요ㅎㅎ
글 읽는 10분 동안 문학 수업, 소설 작법 강의 듣는 기분이었어요.
저에게는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젤소민아님의 기다림은 완성될 것입니다!! 믿어 의심치 않아요.

젤소민아 2025-01-12 03:38   좋아요 1 | URL
꼭꼭꼭, 읽어보세요, 전야제님. 뒤늦게 읽었는데...제 인생소설이 되었어요~제 인생소설 top10에 바로 등극~(졸지에 다른 게 밀려남). 감히, 순위는 못 정하고 지난 4년간 권당 최소한 3번씩은 읽은 명작소설들 중 top10이 있어요.

귀띔해 드릴까요?

노인과바다/남아있는 나날/어린왕자/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전쟁의 슬픔/순수의 시대/외투/아큐정전/필경사 바틀비/바다(존 밴빌)

이 TOP 10은 더 읽어가면서 조금씩 바뀌긴 합니다~.

노인과바다-주제(노인의 투지,는 서브테마. 메인테마는 따로 있어 보여요~. 메인테마가 서브로 깔린 게 압권!)

남아있는 나날-캐릭터의 일관성

어린왕자-주제(세상에 오억 개의 장미가 있어도 단 하나의 내 장미)

전쟁의 슬픔-모든 문장의 슬픔

바다-소설의 ‘은폐‘ 기법을 소설로 강의

아큐정전-캐릭터, 캐릭터! 세상 모든 소설은 고골에서 나왔다...에 이어
세상 모든 캐릭터는 ‘아큐‘에서 나온 듯

전야제님과 소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참 좋습니다~
묻지도 않은 ‘TOP10‘ 수다를..ㅎㅎ

전야제 2025-01-12 12:5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인생소설 T0P20도 환영입니다.
노인과 바다랑 어린왕자 빼고 다 안 읽어봤지만, 짚어주신 포인트들을 생각하면서 읽을 생각에 넘 즐거워요^^
소설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뇌하고 고민한 것이 좋은 통찰을 가져온다는 게 이런거구나를 젤소민아님의 글에서 느껴요. 역시!!!
노인과 바다와 어린왕자 저도 인생작이에요ㅎㅎ
근데 노인과 바다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메인테마를 찾아서!!
루쉰의 소설은 언제고 한번쯤 도전해야지 했는데 역시 젤소민아님의 인생 소설이었다니ㅎㅎ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를 영화로 접해보고 그의 소설도 읽고 싶었는데 남아있는 나날도 그래서 기대되요.
메모해 놓았습니다.
언제나 소설 이야기 환영이에요!
생생히 살아움직이는 유쾌한 이야기 덕분에 넘 즐거운걸요^^
 
폭풍의 언덕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1
에밀리 브론테 지음, 황유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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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초등학교 때 읽었다.

아마도 축약본이었을 것이다.


누가 살았어요, 어땠어요, 저쨌어요..하는 식으로 존대말로 된.


그러니 제대로 읽은 게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맘잡고 제대로 읽어볼란다.

번역본이 여럿.


어느 것으로 읽을까.


알라딘의 '미리보기' 기능을 적극 활용했다.

우선, 첫문장 비교부터.


원문은 이러하다.


1801-I have just returned from a visit to my landlord-the solitary neighbour that I shall be troubled with. This is certainly a beautiful country! I do not believe that I could have fixed on a situation so completely removed from the stir of society. 

축약본도 도움은 되었다. 가물가물하지만 여기서 말한 '집주인'이 그 유명한 히스클리프란 게 기억난다. 


화자는 '나'. 나는 히스클리프란 걸출한 소설 인물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solitary neighbour


solitary


이 단어 안에 겹쳐진 다소 이질적 의미를 절묘하게 써먹고 있다는 게 대번에 느껴진다.


1) separated from/따로 떨어진

2) only one/ 단 하나의


1)번은 집주인(히스클리프)의 몫이다.

2)번은 화자인 '나'의 몫이다. 


'solitary'는 '떨어진', '고독한'이 지배적인 의미지만

영미인들에겐 'single'이란 뜻도 유력하다.


집주인은 따로 떨어진(solitary) 집에 혼자 사는데

그러니 나는 그가 유일한(solitary) 이웃이라 아주 좋아.

(the stir of society에서 벗어났으니까)


==>화자인 '나'와 집주인, 히스클리프의 캐릭터를 바로 소개하는 셈이다.

'solitary'란 한 단어로 '나'와 '집주인'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는.


영어는 이래서 짜증 나게 헛갈리기도 하지만 또 이래서 유용하기도 하다.

영어로 글 쓰는 그들에게는. 그 영어를 제대로 읽어내기만 하면 독자에게도.


그렇다면 번역은 이 두 이질적인 의미를 잘 살렸을까?


비교해 보자.

비교하면서 스스로 평가해 보시길.



이제부터 사귀어가야 할 그 외로운 이웃 친구를.-민음사(김종길 역)


흠...완전히 다른 의미.

'사귀다'는 의미는 원문 어디에도 없다.


이제 그는 내가 신경써야 하는 유일한 이웃이다-문학동네(김정아 역)

흠...'신경쓰다'는 의미 또한 원문 어디에도 없다.


몇 킬로미터 내에 이웃이라곤 오로지 그 집 한 채 뿐이다-푸른숲주니어/공경희 역

흠..'solitary'를 '뚝 떨어진'으로 밖에 못 옮겼다. 뒤 'troubled'는 어디갔나...

청소년본 같은데, 그래서 '축약되었을' 수는 있겠다.


그는 앞으로 내가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이웃이다/앤의 서재(이신 역)

'문학동네'와 이하동문.


내가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이웃이다-열린책들(전승희 역)

흠..의역하면 맞다. '유일한'도 살렸다. 그런데 'troubled'는 '내가 신경쓴다'기보다는 누가 나를 귀찮게 하는 뉘앙스다. 귀찮으니 신경 쓰이긴 하겠으나, 귀찮고 성가신 게 먼저다.


그 외에도 더 많은 번역본이 있지만, 여기까지 살펴보고 좀 지쳤다.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번역본이다. 황유원 시인 번역.


앞으로 나를 성가시게 할 유일한 이웃인 그를.--휴머니스트 세계문학/황유원 역


내 생각엔 이 번역문이 가장 원문에 가깝다.


'trouble'을 최대한 살렸다고 봐서.


그런데 굳이, 굳이, 살짝 아쉽다 한다면...


그가 나를 성가시게 할 유일한 이웃이라, 하면

이웃이 많고 이웃 모두 좋은 양반들인데

딱 그, 한 사람이 나를 성가시게 한다는 뜻으로 오독될 우려가 없지 않다.


물론, 뒷문장을 더 읽으면 오해는 풀린다. 


그러나 영미인은 뒷문장을 안 읽어도 제대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좀 더 제대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런 식이 어떨까 싶다.


나를 성가시게 해본들 이웃이라곤 그가 유일하다.


흠, 여기도 딱 그 한 사람이 나를 성가시게 한다고 오독될 우려가 있지만 

오해 소지가 좀 약화돼 보인다.


최선의 번역문은 더 많이 고민해 봐야 한다, 뭐.


아무튼 위에서 살펴본 바로는,

지금껏 한국 독자는 '폭풍의 언덕'을 첫 문장부터 제대로 못 만났다는 느낌적인 느낌.


첫 문장에서 휘청이니 번역본을 더 읽기가 좀 주저된다.

그래도 황유원 번역으로 읽기 시작했다.


번역에 관해서도 독서 후기도,

좀더 읽고 올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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