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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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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베스트셀러란 이 소설을 드디어 완독했다.

오래 전에 읽었을 때는 완독도 못했지만, 

내 상태가 이 대단한 책을 받아들일 만큼이 안 되었다. 

그래도 읽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독서에 '때'는 있어도 "때'를 후회할 필요는 없다.


이르고 늦은 독서는 있어도 읽어서 나쁠 일은 없다는 뜻이다.

그럴 게 있을 게 뭔가.


(아니다, 있다....생각났다...'때'를 잘못 만난 소설 한 편으로

어떻게 내가 소설과 담을 쌓았는지. 그 사연은 다음에)


분량도 꽤 되고, 담긴 사유도 넓고 깊어 리뷰 쓰기도 만만치가 않다.

할 이야기가 많으니 쓸 이야기가 많은데, 그걸 다 하자면 날 새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무엇보다, 조르바님이 그걸 원치 않을 것 같아서다. ^^


뚜렷하게 보인 것만 이야기고 말자.

그게 조르바란 인물을 만난 사람다운 태도일 지도 모른다.

뭘 길게~~~~복잡하게~~~~

따지고 해석하고 엉겨붙는 걸 이분은 아주 싫어하신다.


그냥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보고, 그대로 즐겨!


먹물들아, 그대들은 쓰잘데기 없는 잡생각이 왜 그리도 많은가!


조르바의 일갈일 것이다.


이 소설에 뚜렷하게 보인 거 하나.


'위대한 개츠비'와 플롯이 많이 닮았다.

두 소설의 뚜렷한 상통은 무엇보다'화자'에 있다. 


닉 캐러웨이

바실(나)


두 화자는 이햐하긴 힘들지만 위대한 인물들에 매료된다.


개츠비

조르바


(뭐야, 한글로 이름도 세글자란 공통점)


닉과 바실은 주변에서 '위대하다'고 인정해주기 힘든 인물을 멘토로 받아들인다.

이게 두 화자의 또다른 '위대함'이다.


나 말고 70억의 타인.

우린 그 속에서 특별해뵈는 멘토를 찾는다.

누가 봐도 위대한 사람을 찾는다.


그런 사람은 찾기 쉽다.

대부분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고 조회수 높은 유튜브나 팟캐스트의 주인장이거나 

초대손님이다.


아주~~~찾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하지 않다.

세상엔 위대할 지 모르나 '나'에겐 위대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에게 위대한 멘토를 찾는 것이다.

'나'한테 없는 무엇, 그걸 갖췄거나 그걸 알아보는 사람.


그게 '나'의 멘토다.

누가 뭐래도, '나'만의 멘토인 것이다.


닉과 바실은 그걸 알아봤다. 개츠비와 조르바에게서.

그러려면 그들이 먼저 위대해야 한다.

자신의 '결핍'을 알아보고 인정해야 하니까.


이거, 은근 어렵다. 아니, 노골적으로 어렵다.

외모적, 능력적 결핍을 알아보는 건 쉽다.


문제는 감정적 결핍이다.

감정적 결핍은 스스로도 알아보기 힘들다.

인정하면 그 순간부터 안 그래도 결핍된 감정이 빈 주머니가 되어버릴 테니까.

그 결핍이라도 품고 바닥이 보이더라도 남은 양을 끌어안고 버터내야 하니까.


감정적/정서적/영혼적 결핍을 알아본다는 건

일단 자신을 내려놓는, 막중하고도 험난한 작업이다.


그게 완벽하게 되면 '구루'다.

당장 종교 하나 만들어도 될 거다.


소설 속에서 별 일 안하는 것 같지만,

일은 개츠비하고 조르바가 다 하는 것 같지만

닉과 바실이 해낸 일은 위대하다.


소설 속 화자로서도 위대하고 한 인간으로서도 위대하다.


그래서 둘은 그 위대함으로 자신들의 '결핍'을 채울 수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와 위대한 조르바의 '위대함'을 알아본 근본은

두 사람이 자신의 결핍을 제대로 알아보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깥의 위대함이 '나'의 안으로 쏙쏙 빨려온다.


'나'가 인정 않는 결핍은 견고한 막을 만들어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섣부르게 간절한 마음으로 '죽은 지식'만 쓸어담을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먹물'이 되어갈 뿐이다. 


닉과 바실이 실행한 그 '위대한' 방법은 좀 다르다.

닉은 '관찰'이다. 이 사람은 두 손 두 발 다 스스로 묶고 눈만 치켜뜬 격이다.

눈 부릅뜨고 개츠비를 관찰한다. 자기가 그 위대한 멘토로부터 뭘 받았는지

'깨달음'이란 결실을 제대로 풀어주지도 않는다. 결말에서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정도로

나눠준다. 물론, 소설 속에 다 있지만.


바실이 실행한 위대한 방법은 '관찰'이 아니다.

질문이다. 이 사람은 정말 집요하게 묻는다. 묻고 또 묻는다.

조르바님이 짜증낼 정도로 묻는다.

그런데 유심히 보자. 바실은 질문이 많은 만큼 질문을 잘 한다.

뭘 빼먹을 수 있는 답을 끌어내는 질문의 달인이다.


바실은 자기가 한 질문으로 조르바에게서 위대함을 뽑아낸다.

'인터뷰'에 관해 자기계발서 같은 거 보지 말고 이 소설을 잘 연구하면 대가될 듯.


자문자답이 아니라 자문타답이긴 한데, 그 소득이 엄청나다.


독자인 우리는 닉과 바실의 위대함을 둘 다 취하면 된다.

일거양득, 일타쌍피인 셈이다.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것 물론.


관찰하고

질문하면 

우리도 위대한 멘토로부터 '나'에게 결핍된 것을 뽑아낼 수 있다.


단 선결조건은?


'나'의 정신적/정서적/영혼적 결핍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나도 못했고 못하고 있다. 흉내만 내보려 몸부림 중이다(굿럭!).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뚜렷하게 보인 거 둘.


나는 편지를 집어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 역시 행복했다.

계속 걸어서 산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510p)


그러고는 곧바로 베개에 기대 일어나서는 침대 시트를 벗어던지고 위로 펄쩍 뛰었습니다.

(538p)


똑바로 서서 죽었습니다.

(538p)


이것은 '오름'이다. '상승'이다.


조르바는 '오름의 인간형'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오름'과 그 질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그리스인 조르바'의 위대한 화자, 바실은 위대하게도,

제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전과 동일한 인물이다.

오죽하면 조르바가 유언처럼, 바실에게 전하라며 시골교사에게 "이제는 정신 좀 차릴 때가 됐다고 쓰슈."라는 말까지 듣는 인물이다. 


그런데 우린 '질문의 달인' 바실 역시 상승하리란 걸 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완독은 기쁨에 겨움을 보장한다.


그에겐 조르바가 남긴 산투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실은 저 높은 곳에 있는 조르바의 집으로 갈 것이다. 


어쨌든 올라갈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었으니 당분간은 나도, 어딜 자꾸 올라갈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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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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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끌며 헤어지는 것은 독약이다. 단칼에 자르고 인간 본연의 상태대로 외로움 속에 홀로 남는 것이 차라리 낫다. 하지만 그날 새벽 빗속에서 나는 친구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불행히도 아주 늦게야 그 까닭을 깨달았다.) 나는 그와 함께 배에 올라 그의 선실로 가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가방들 사이에 앉았다. 나는 그가 딴 곳을 보는 동안 마치 그의 특징을 하나하나 모두 확인하려는 듯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와, 둥글고 젊은 그의 얼굴과 자신감에 넘치는 고매한 표정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족적인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고집스럽게 찬찬히 뜯어보았다.


한순간 친구는 자신을 빨아들이듯 훑어보는 내 눈길을 의식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감정을 감출 때 흔히 하듯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내게 몸을 돌렸다.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 나서 친구는 금방 눈치를 채고는 이별의 슬픔을 떨쳐내기 위해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언제까지 그럴 거야?"

"언제까지라니?”

"언제까지 종이에 파묻혀 잉크를 뒤집어쓰고 지낼 참이냐고? 나와 함께 떠나자. 캅카스'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가 위험에 처해 있어. 같이 가서 그들을 구하자."


그는 자신의 드높은 이상을 비웃으려는 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우리가 그들을 구할 수 없을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들을 구하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가 구원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않나? 나의 선생이시여, 그건 선생의 주장 아니었던가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투쟁하는 거'라고. 자, 그런 걸 가르치셨으니, 선생, 같이 갑시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곳, 신을 낳은 동쪽의 높은 산들, 바위에 못 박힌 프로메테우스의 외침..그 시절 몇 년 동안이나 같은 바위에 못 박힌 동포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 민족이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자신의 아들 한 명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고통이 꿈이라는 듯이, 그리고 삶이란 현존하는 비극이라는 듯이, 그리고 망루에서 뛰어내려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지극히 촌스럽고 순진한 것이라는 듯이 꼼짝도 않고 듣기만 했다.

친구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어섰다. 배는 벌써 세 번째 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잘 있어, 이 책 벌레야"

그가 감정을 숨기기 위해 빈정거리며 말했다.



별 뚜렷한 이유 없이, 책꽂이에서 근 십년은 케케묵고 있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조르바, 조르바, 조르바...

이름 석 자만 알고 있던 그 추상적 인격에 드디어 '물성'이 더해지려는 순간이다.
귀동냥으론 뭐가 엄청나게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던데...

반 정도 읽은 지금, 나는 처음부터 '바실'에 끌렸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의 '위대함'을 알아본 닉 캐러웨이처럼,
바실은 첫눈에 조르바의 위대함을 알아본다.

조르바를 한눈에 알아보기는 쉽지 않...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도자기 만들려다 손가락이 걸리적거린다고 그걸 잘라 버리는 노인네에게서
순수와 열정과 자유를 끌어다 담은 '위버멘시'함을 알아볼 이가 흔할까 말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35세의, 돈 좀 있는 '먹물'이다.
책으로만 머리를 키운 이론형 지식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 '먹물형 인간'이 '초인형 인간'을 만나서 일정 기간 동행하는
로드 픽션이다. 

바실은 있던 곳을 떠난다.
모든 '발견'과 '성장'은 이 '떠남'에서 비롯된다.
하긴, 어딘가로 떠나지 않는 소설 속 인물이 어딨던가.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고기를 못 잡다가 85일째 다른 바다로 나간다.
같은 멕시코 만류지만, '좀 더 멀리' 나간다. 그것도 역시, 새로운 '떠남'이다.

어린왕자는 화산을 청소하고 자신의 별을 떠난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는 주인이 바뀌면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저택을 나와 주인이 빌려준 포드 차에 오른다.

많이들 떠난다. 소설 속 인물은. 
하다못해, 한 뼘 고시원 방 안에서도 '떠남'은 이루어진다.
정적인 떠남도 있는 법이다.

동포를 구한다는 소명을 스스로 뒤집어 쓰고 바실의 친구는 떠난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바실은 선 곳에 그대로 철벽같이 발 고이고 서 있다.
35년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바실은 그러다 급기야 '떠남'을 단행한다.
그날, 친구가 한  이 말 때문이다. 

"잘 있어, 이 책벌레야."

이 짧은 문장 속에 담긴 파행적 서브텍스트.

"언제까지 그렇게 '있기'만 할래. 이 머리만 자라는 안타까운 먹물아."

이건, 호명이다. 숙명적 에피파니를 담보한, 호명.

누구야.

누가 누구를 부르는 호명 행위. 
우리는 호명 속에서, 호명하는 이에 의해, 자의적으로 정의된 개념에다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맞추게 마련이다.

엄마, 아빠, 어머니, 아버지, 선생님, 00아, 아저씨, 아줌마, 
언니, 오빠, 형, 매형, 자형, 매부, 처제, 처형,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사장님, 부장님, 대리님...

하다못해, 저기요...
누가 나를 '저기요'라고 부르면 나는 '저기요'가 된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렇다.

호명된 이름은 그래서 '굴레'다. 
자유롭게 광활한 대지를 활보하던 우리 영혼은 호명이 일어나는 찰나적 순간,
대번에 사지를 붙들리고 결박당한다.

굴레를 끊어낼 방법은, 다행히, 있다.
호명되는 순간, 딱 한 사람 들어가 찰 만한 그 공간 속에 누각되는
콘텍스트와 서브텍스트를 잘 읽어내면 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바실처럼.

"잘 있어, 이 책벌레야."

이걸 이렇게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기'만 할래. 이 머리만 자라는 안타까운 먹물아."

그래서 우리를 호명하는 이는 우리에게 누구든 스승이다.
우리를 호명하는 사람과 그 소리를 홀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아직, 끝까지 완독하지 않았지만 아마 바실은 이루어낼 거다.
적어도, 카잔차키스가 그리도 천착했다는 니체의 '위버멘시' 인간이 되는, 
시작은 해 낼 거다. 

조르바는 바실에게 스승이 아니다. 
스승은 한 과목 전담이다.
조르바는 전 과목에 능숙하다.
그래서, 그는 학교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래서, 교과서다.

왜 전 국민이 다 읽는 줄 알겠다.
왜 그리도 조르바, 조르바 하는 지 알 것 같다.
명실공히, 명문학교다.

제1교시/순수를 지키는 법
제2교시/내 의지로 선택하는 법
제3교시/자유인이 되는 법
제4교시/열심과 열정을 구분하는 법

크레타 섬 한 귀퉁이에서 점심

제5교시/지중해 바다에서 헤엄치며 체육
제6교시/몸을 정신 아래에 둘지 않는 법
제6교시/선악을 구별해 둘 다 끌어안는 법
제7교시/천국에 집착하지 않고 구원 받는 법
제8교시/성교육 특강(부제:뜨겁고 자유롭되 그것의 노예는 되지 않는 성)

과목이 너무 많아,
아무래도 야간학습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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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10-16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을 때, 조르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내용도, 조르바라는 사람도요.
지금보다 훨씬 맘이 경직되어 있은 듯 해요.
요즘 재독하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요.
난 지금 어디쯤 있는가를 알고 싶은 맘 때문예요^^

젤소민아 2024-10-17 00:31   좋아요 1 | URL
완전 공감요, 페넬로페님! 소설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뭐든...예술은 ‘재체험‘같아요. 예술작품을 처음 대할 때는 그야말로 첫대면인데...껍질만 본 거 아닐까 싶어요. 재독, 삼독, 사독할 때마다 떠오르는 새로운 발견~~.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작가는 그렇게, 독자의 ‘재독‘에도 그런 발견의 기쁨을 줄기차게 줄 수 있는 작가죠~~. 그게 ‘난해함‘과 ‘복잡함‘과는 분명 다른 개념이겠지만요.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은 짧고 여백적인데도 재독이 말할 수 없이 즐겁거든요.

저도 난 페넬로페님처럼 재독하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요.
다음에 읽을 땐 지금의 내 자리를 기억할 수 있길~그러려면 독서로그나 녹음이라도 남겨놓을까봐요~ㅎㅎ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4-10-1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부터 내 반드시 <조르바>를
완독하리라 생각하고 이 책 저 책
잇달아 읽다말다를 거듭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열린책들 번역은 조금 거시기하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조르바 아재랑
화자가 불가에 앉아서 밤을 구워 먹
었나 하는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아마 틀릴 수도 있구요...

아마 영화에서는 앤소니 퀸이 조르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기억하구요.

젤소민아 2024-10-18 21:58   좋아요 1 | URL
‘열린책들‘은 이윤기님이 하셨죠. 영어중역본으로 알아요. 유재원님 번역을 일부러 고른 건 그리스어 원전 최초 번역이라! 지금 두 권 다 갖고 있고 완독했기에 처음부터 번역을 비교하며 보고 있어요. 열린책들 버전은 바실(나)이 소설 속에서 조르바의 회고담을 ‘쓰는‘ 동기를 밝힌 ‘프롤로그‘가 아예 빠져있어요. 이건 너무나 큰 손실이죠!

첫페이지에 열린책들은 바실이 ‘샐비어 술‘을 마신다고 되어 있고, 유재원님 번역서에는 ‘세이지 차‘를 마신다고 되어 있어요.

첫 대목에 등장하는 ‘장소‘도 ‘카페‘예요. 두 버전 모두. 그럼 ‘선술집‘이 아니라 ‘카페‘인 모양인데..때는 동트기 직전. 그런데 느닷없이 ‘샐비어 술‘이라뇨..?
카페에서 술을 팔지도 않을 뿐더라 동트기 직전에 웬 술..

뿐만 아니라 ‘세이지 차‘는 이 엄청난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를 절묘하게 담아낸 메타포거든요. 화자인 바실의 ‘행동이 결여된 지적 한계‘에 조르바를 통한 ‘행동‘과 ‘열정‘이 더해지는 ‘영혼일지‘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서두에 바실이 세이지 차를 마시는 장면은 아주 중요하죠.
세이지 차는 ‘바실의 그런 한계점을 드러내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니까요.
‘술‘을 마신다면 그런 이미지를 돋우기 어렵고요.
술이야말로 ‘열정‘ 아닌가요? ㅎㅎ

아무튼 ‘조르바‘를 완독한 지금, 솔직히 제 영혼이 1cm는 채워진 느낌이 듭니다.
왜 명작인지 알겠어요. 마지막 장에서 눈물 났어요. 조르바가 죽어서(앗, 스포?) 슬퍼서가 아니라 뭔가 ‘완성‘된 느낌에요~. 그렇게 늙는 거, 죽는 거 싫어하던 조르바가 급기야 다 이루어 낸 것 같아 좋아요~완독 리뷰 곧 쓸게요~

전야제 2024-11-07 0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도 넘넘 축하드립니다! 이번 기회에 이렇게 글 잘 쓰시는 분을 알게 되서 넘 기뻐요ㅎㅎ 그리스인 조르바 안 읽었는데 반드시 읽어야겠어요. 서평을 생생하고 유쾌하게 쓰셔서 저는 책보다 이 글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앞으로 좋은 글 읽으러 자주 방문할게요!!

젤소민아 2024-11-07 02:31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저도 전야제님 서재에 ‘단골‘할게요~~. 전야제님도 이달의당선작, 축하드려요~
 
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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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부에서 어부 올라이의 아들, 요한네스가 태어난다.



이제 우리 이만 가지요, 늙은 산파 안나가 말한다.

(29p)


산파가 떠난다면 탄생은 종료된 것이다.

늙은 산파 안나는 떠나고 요한네스는 태어났다.


그리고 2부가 시작된다.



1부와 2부 사이의 여백.


이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에 박수 보내고 싶다. 

이 여백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이 소설의 미학을 아는 편집자가 만든 여백이 분명하니까.


소설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는 행간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서브 텍스트가 있다.

소설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서브 텍스트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드러내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드러내고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

혹은 하기 싫은 이야기...


여백이니 서브 'text'라고 하기 뭣하고...


서브 'picture'라 해보자.

이 여백에는 서브픽처가 숨어있다.


어부 올라이는 아들 요햔네스를 낳고, 아들 요한네스는 그 아비 올라이처럼

어부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2부를 펼치면서 어부 요한네스의 삶을 구경할 것이다.

그의 여행에 동반할 것이다.

그의 바다가 바야흐로 펼쳐질 것이다.


그런데...


2부의 시작에서 어부 요한네스의 아내는 이미 늙어 죽었다.

요한네스도 늙어 죽기 직전에 있다.

아니, 그는 죽어간다.

아니, 이미 죽었다.


2부를 끝까지 읽고 나면 1부와 2부 사이를 가른 여백에

서브픽처, 즉 '바다'가 숨었음을 알게 된다.


크림빛 빈 종이에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늙어 죽기 직전의, 아니, 이미 죽었는지도 모를 요한네스가 평생에 걸쳐 누볐던 바다-.


그 굴곡진 사연이 그 여백의 종이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말이다.


이 소설은 울지 않고 읽어낼 재간이 없다.

'죽음'을 다뤘기 때문만은 아니다.

'탄생'을 지척에 둔 거리감 때문이다.


이제껏 소설에서,

우리는 탄생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분하다면 충분하다 할 시간적 거리를 벌었다. 


인물은 태어나 부지런히 한 시대나 한 시기를 살아주었다.

우리는 그걸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한다.

인물이 부지런히 살았던 한 시대나 한 시기를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된다고 한다. 충분하다고...


이거면 충분하다고 한다.


우리 오랜 세월 서로 머리를 잘라줬지, 요한네스가 말한다

내가 지금 막 계산해봤더니, 요한네스가 말한다, 세상에 그래 벌써

사십 년 가까이 됐구먼, 페테르가 말한다


(63p)


사십 년 간 머리를 잘라준 어부 친구면 된다고 한다.


친구는 어깨까지 치렁대는 요한네스의 머리를 계속 걱정한다. 

친구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도...

죽어서도 친구는 요한네스의 긴 머리를 걱정한다.


내 머리가 어떻다고 마음 쓰는 친구가 있다면...

죽어서도 그 걱정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런 생각만으로도 눈물은 흐르고도 넘친다.


작가는 어부 요한네스의 지난하고 고달펐던 삶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거면 충분하다고 한다.


제발 여기서 물에 빠지지는 말라고, 자네도 알잖아, 자네가 수영 못한다는 거,

페테르가 말한다


과연, 충분하다.


평생 바다를 벗삼아 가족을 먹여살린 어부 요한네스의 곡진하고 신산한 삶은

이걸로 충분하다. 충분하고도 남아서 울컥하게 만든다.


어부인데, 수영을 못한다, 요한네스는...


뭐가 더 필요한가 말이다. 


1부와 2부를 가르는 여백의 종이에서 

어부 요한네스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물에 가라앉는 그림이 떠오른다.

말하지 않아도 떠오른다.

그러고도 남는다. 충분하다.


그리고 요한네스는 페테르에게 얘기해도 될까 생각한다,

루어가 가라앉지 않고 배 밑바닥에서 일 미터쯤 아래 계속 멈춰 있다는 걸,

아무 이유도 없이

루어가 내려가지 않는 건가? 페테르가 묻는다

안 내려가, 요한네스가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젓는다

그거 고약한 일이군, 페테르가 말한다

그리고 요한네스가 올려다보니 페테르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정말 고약한 일이야, 페테르가 말한다

바다가 더이상 자네를 원하는 않는구먼, 그가 말한다

그리고 페테르는 눈물을 닦아낸다


81p)


바다가 더이상 원치 않는 어부가 되었다, 요한네스는.


언젠가 나는 내가 써온 글이 나를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쓰기 시작한 소설이 

나를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 날을 맞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떤 의미로든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때, 말하지 않아도 충분할 수 있으려면,

어부 요한네스처럼 눈물을 흘려주는 친구...


한 사람의 친구면 족할 지 모른다.


어부 요한네스는 바다에서 밀려나 바다를 떠나지만 

딸 싱네가 있다.


어부 요한네스의 바다내음은 싱네를 관통해 싱네의 딸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죽었지만 죽지 않을 것이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저녁이 가면 또 아침이 오듯이.

이 소설의 제목이 '아침 그리고 저녁'이듯이.


참 잘 산 거예요, 어부 요한네스.



* 아, 인간적으로 이 소설, 너무 울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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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20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너무 좋았어요.
이 글에 담긴 젤소민아님의 느낌을
저도 똑같이 받았습니다.
말해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게 엄청 많았어요^^

젤소민아 2024-08-21 05:17   좋아요 3 | URL
그래서 걸출한 것 아닐지요. 사실, 말로 다해서 주는 감동은 쉬우니까요. 말로 다하는 동안 감동,이란 주머니에서도 찔끔찔끔 누수가 생기는 것 같고요. 압축도 아니고...이건 ‘스킵‘인데요. 그걸 배웠어요. 오히려 쳐냄으로써 채워지는 서사도 있다는 것을요. 쳐낸 부분을 독자가 감지할 수 있도록 또 나름의 치밀하게 지독한 배려가 있었을 거고요..

페크pek0501 2024-08-20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이길래 페넬로페 님과 젤소민아 님이 극찬하시는지(별 다섯 개) 궁금하네요. 검색 들어갑니다.^^

젤소민아 2024-08-21 05:21   좋아요 3 | URL
이 소설은 ‘중간‘이 없고요~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같은 경우는 주인공이자 화자의 장례식부터 시작하죠. 결말도 장례식이고요. 책 껍질을 펴서 두개를 이어붙이면 중간은 사라지죠. 그런데 그 중간을 책 한권으로 풀어놨다는 거고요...ㅎㅎ 작가들, 머리가 참 비상해요~~~작가적으로요~~이혜경 작가의 ‘길위의 집‘도 그렇죠. 잃어버린 엄마를 찾았는데 서사는 되짚어 가고, 결말에서 엄마를 잃어버리는...말하다 보니, 새삼 멋지네요!
 
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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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좀 이상한 소설이다.

소설에서 익히 본 문장으로 시작된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9p)


소설에서 누가, 특히 아버지가 돌아온 이야기는 물릴만치 많다.

새로울 게 없다. 더 읽고 싶다는 감흥이 일어나지 않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떠난 이유와 돌아온 이유를 따져 묻기에 

이미 지난 숱한 소설들이 진력나게 말해 주었다.


더 떠날 아버지가 있고, 더 돌아올 아버지가 있을까 싶을만치.


아버지는 어머니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남겨 놓고 떠났다.

(중략)


"더러운 인간! 포기하겠다는 거야, 전부 다."


9p)

이 또한 새로울 게 없어서 별로 궁금하지가...


아버지는 십 년 전에 다 놓고 갔고, 오죽하면 조부가 물려준 오래된 만년필도 챙겨가지 않았단다. 그리고 그 조부가 죽어 장례를 치르러 미국에서 귀국했다. 조부는 아버지가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흘 간 대신 울어달라며 고용된 사람처럼 보였다. 

열심히 울어서인지 아버지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혼자였다.


11p)


솔직히, '있어 보이는' 문장은 이게 고작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겉이 번지르르한 문장들이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하나 번지르르할 것 없는데 번쩍이는 문장들이 있다.


이 소설은 둘 다 아니다. 

그냥 번지르르할 것 없는...문장들이다.

소설이 끝나지 않은 아직까지는.


어지간히도 비유를 쓰지 않는다. 

요즘 소설에서 판 치는 '~처럼'조차 거의 없다. 

그냥 할 말을 담백하게 한다. 비유 같은 것에 의탁하지 않고.


그래서 '울어달라며 고용된 사람처럼'처럼 신중하게 쓴 비유가 좀 귀하게 느껴진다.

다른 소설에 썼다면 흔하거나 낯익을 수도 있는데.


요즘 소설답지 않게 이 소설의 '아버지'는 '교수 씩이나' 된다.

대개, 무직에 무능해서 집을 나간 소설 속 흔한 아버지들과 다르다. 

그 점이 계속 읽게 만들었다.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이렇게 '있어 보이는' 아버지들은 집을 잘 나가지 않으니까.


'나(아들)'는 아버지를 공항으로 배웅하면서 '가벼운 점심'을 함께한다. 

벚꽃이 핀 봄날이다.


'갸벼운 점심'은 가벼운 점심답게 패스트푸드점에서 이루어진다. 

뉴요커가 다 된 아버지는 뉴요커답게 햄버거를 주문한다. 

'무거운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던 '나'는 못내 아쉬워하지만.


나와 아버지 사이에 두 장의 사진이 오간다.

나는 아버지에게 연인의 뱃속에 자리한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사진 속 아기가 자신을 닮지 않길 바란다.

아버지는 나에게 연인의 사진을 보여준다.

금발의 파란 눈을 한.


나는 대번에 아버지에게 그 사람이 아버지의 진짜 사랑임을 알아챈다.

그래서 아버지는 행복해 보인다.


아버지는 나를 낳고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부자 간의 '가벼운 점심'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야기를 가볍게 주고받기에 더없이 적절한 매개가 되어 준다.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이야기.

아버지의 연인 또한 아버지와 사랑을 하면서 일도 가족도 잃었다는 식의.


학자였던 아버지는 뉴욕에서 연인과 세탁 일을 한다.


학자였을 때 아버지의 손은 말랑했지만 왠지 삭막하고 창백하고 무뎠던 걸로 기억한다. 시든 손. 그러나 세탁을 한다는 현재 아버지의 손은 거칠지만 부정하기 힘들 만큼의 생기가 감돌았다.

활짝 핀 손이었다.


35p)


이런 식이다. 

그 흔한 비유가 고집스럽게 없다.

세상 말로 '흔한' 작가라면 "~처럼' 말랑거리고 '~처럼' 거칠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독자를 편하지만 게으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활짝 핀'이 고작이다.


이상한 소설이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려다 문득 서게 된다.


손이 피다니. 손이 활짝 피다니.

아, 봄 꽃? 봄 꽃처럼 활짝 핀 다섯 손가락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작가는 독자더러 하라는 것 같다.

비유는 직접 알아서 생각하라는 것 같다.


"봄이 왔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인 거야."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분홍 빛으로 물들었다. 즐겁게 나이를 먹어서 생긴 주름이었다.


"열 번의 봄은 열 번 환생한 느낌이었어."


41p)


자식이고 아내고 다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서 연인과 저 하고 싶은 대로 살며

분홍빛 주름을 달고 봄마다 환생한 느낌으로 사는 아버지.


있어 보이는 아버지는 다 그런 건가.


도대체 이 아들은 어째서 이런 아버지와 '가벼운 점심'을 나누며

가벼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인가.

이 아들은 어째서 다 버리고 집 나간 아버지에 이다지도 호의적인가.


이제 소설의 결말에 이르렀다. 

도대체 독자로 내가 얻어가야 하는 건 뭔가 밑진 느낌이 들 참이다.


반전을 도모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이제 겨우 한 장 남았으니.

앞의, 새로울 것 없는 그 모든 걸 뒤집거나 흔들기에 한 장은 역부족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소설이다.


한 장으로 그걸 해 내고야 만다.


턱을 괴고 소설을 읽다가 결말을 다 읽고 턱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맨 앞으로 돌아가 양손에 책을 쥐고 다시 읽었다.

전에 읽었던 거의 모든 단어가 새롭게 읽혔다.


특히, 여기.


"더러운 인간! 포기하겠다는 거야, 전부 다."


집 나간 아버지들에게 던지는 어머니들의 흔한 개탄사.

그런데 결말까지 읽고 돌아오면 이 문장의 진의를 알게 된다.


'더러운'의 서브텍스트를 알게 된다.

'포기한 것'의 대상을 알게 된다.

'전부 다'의 스펙트럼을 알게 된다, 이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비유가 필요 없었는지 모른다.

혹시 작가는 비유를 썼다가 다 지웠는지도 모른다.

비유가 해 낼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단어가 지닌 본연의 의미만으로도 얼마든지 서브텍스트가 품어질 수 있다는 걸 

이 소설은 보여준다.


봄, 봄 꽃, 아버지, 어머니, 연인, 손, 주름, 행복, 사랑 같은 단어가 

이다지도 품이 넓었던가.


내가 단어들마다 얼마나 졸렬한 고정관념으로 대했던지를 절감하게 해 주었다.


참, 이상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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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17p)

아는 분이 아이를 대학에 보내보니 이제 어지간히 알겠더라고 했다. 

아이를 명문대 보내는 걸 실패해 보니 명문대 보내는 비결을 이제 알겠더라고.

성공이 아니라 실패해 보니 더 잘 알겠더라고.

그런데 문제는, 대학 보낼 아이가 더는 없다는 사실.


그리 말하며 그분은 씁쓸하게 웃었다.


밀란 쿤데라의 문장이나 그분의 웃음이나 하는 말은 같다. 

우리 인생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


이젠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만 너무 늙어 버렸다.

이젠 결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에서 남편(혹은 아내)가 밥 먹고 있다.

이젠 사랑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 떠나고 없다.

이젠, 이젠, 이젠...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8p)


그렇다. 우린 살아봐야만 알게 된다. 알고 나서 사는 게 아니니까.


이 명작소설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그런 가정, 혹은 진리에서 탄생한 존재들이다.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미리 살아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믿는 자들이다.


네 명 중 두 명은 '무거움'을

다른 두 명은 '가벼움'을 그 방도로 믿고 산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될수록 무거움을 택한 이들은 가벼움을 취하고,

가벼움을 택한 이들은 무거움을 취해간다.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맺어진 관계는 서로에게 무게를 더하고 덜어내고자 

고군분투한다. 


혹은, 자신에게서 무게를 더하고 덜어내고자 각성한다. 


그녀가 자기 아파트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 역시 원치 않았다. 

동반 수면은 사랑의 명백한 범죄다.

(26p)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떄 테레자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고 그토록 기겁을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중략) 지난 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더니 자신이 알지 못했던 행복의 향기를 들이마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모두 잠까지 함께 잘 수 있다는 것에 미리 즐거워했다. (27p)


토마시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29p)


여자와 함께 나란히 잠 자는 것이 불안한 남자.

그런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잠드는 여자.


우린 이 두 부류 중에서 어느 한 쪽에는 들 것이다. 

그래서 가볍거나 무거울 것이다. 


쿤데라는 묻는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어느 쪽이라고 답하는 순간, 열패감에 젖을 필요는 없다.

쿤데라는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추어 올리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로 하여금 답할 방도를 궁리하게 만들면서

작가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하긴 했다. 작가가 무거움과 가벼움,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것인지.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고 보면 '가벼움'을 힐난하는 것 같은데 읽어보면 막상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아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와 유사한 상황을 다시 찾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외국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었다.

(49p)


모빌리티. 

문학에서 구현되는 모빌리티(이동성)의 지류다.


우리가 '이동성'을 발휘하려는 시기는 '만족감'과 '자신감'을 느낄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쿤데라는 그리 말한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는 그게 만져지지 않아서. 그럴 때 우리는 이동한다.


외국에 사는 사람은 구명줄 없이 허공을 걷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가족과 직장 동료와 친구, 어릴 적부터 알아서 어렵지 않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지닌 나라, 

조국이 모든 인간에게 제공하는 구명줄이 없다.

(131p)


이 정도면 노골적인 모순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찾아 외국으로 이동한다면서?


외국에 없는 단 한 가지를 들라면 바로 조국이 제공하는 구명줄, 모국어가 아닌가 말이다.

모국어란 절대적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장소에서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외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음의 문장을 가슴으로 읽었다.

카레닌, 날 원망하지 마. 다시 한 번 이사를 가야겠다.

(132p)


외국에 사는 모든 이가 나 같지는 않겠지만, 

조국이 제공한 구명줄을 스스로 놓음으로써

나는 오늘도 곡예하듯 하루를 지나간다.

절반만 이해하는 단어들을 붙잡고 절반만 채워진 것 같은 생을 살아낸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한 번 이사가는 꿈을 꾼다. 

그래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 정착한 밀란 쿤데라의 가슴과 닿았다는 것에 조각같은 만족감을 느낀다.


그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평생 동안 권태의 도시라고 

저주했던 제네바가 이제는 아름답고 모험에 가득 찬 곳처럼 보였다.


147p)


20여년 간 내가 사는 이곳 이국을 권태와 기만의 도시라고 저주했다.

나 역시 이제는 아름답기까지는 안 해도 사람 사는 곳은 맞다고 생각하게 도었다.

20여년 간 해왔던 질문 하나는 접게 된 셈이다.

권태와 기만의 도시라면서 나는 왜 떠나지 않았는가?

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그 질문을 더는 하지 않게 된 것만도 살 만해졌다.


이 작품을 소설로 읽기에는 벅차다.

이 소설은 사건과 사건 간의 인과관계보다는

문장과 문장 간의 인과관계가 중해 보인다.


줄거리가 없다고 불평할 수 있다.

줄거리는 작가의 사유를 펼치는 도구로 쓰일 뿐이다.

많은 작가들이 안 그런 척 할 뿐이지만 쿤데라는 과감하게 그걸 드러내놓고 쓴다.


그래서 소설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갔고 소설 속에서 우리를 내다본다.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을 응시하는 인물로 선다.


이제까지 이런 화자가 있었던가, 소설에.

과감한 용기,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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