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에게 말 걸기 - 옆 사람과 대화하면서 세계를 바꾸는 방법
박동수 지음 / 민음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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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에 관한 책이지? 대화? 커뮤니케이션? 심리? 분류가 ‘철학‘이다. 저자는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책 편집자. 철학자보다 더 빠르게 ‘장바구니에 담기‘를 클릭했다. 헤밍웨이가 그랬댄다. 편집자는 항상 옳다. 철학책 편집자의 철학 이야기는 무조건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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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1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1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축들 - 동물이 만든 인간의 역사
김일석 외 지음 / 이케이북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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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자꾸 인간 이야기가 된다! >>이런 친근하기 짝이 없는 책 소개 문장이라니! 편집자에게 기립박수를 치고 싶다. ‘동물‘이란 키워드는 내 독서 예정 책 목록과 겹칠 일이 별로 없는데 정작 내 책꽂이에 ‘동물‘이 수두룩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긴 우리도 동물인데 어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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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31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31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창작물은 수용자의 경험 위에서 재건축된다

텍스트와 영상은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읽히고, 보이고, 해석되는 순간마다 

작품은 각자의 기억과 윤리, 삶의 조건을 덧입는다

감상되지 않는 작품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벽의 박물관에 놓인 전시물과 다르지 않다

 

이 전제가 필요한 이유는

내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 

내 멋대로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내 방식대로 재건축하면서.


원작 소설에서 메리 셸리는 창조주와 피조물(크리처) 모두에게 

윤리적 질문을 분산시킨다

빅터는 무책임한 창조주로 출발하지만,

크리처 역시 단순한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민가에 숨어 살며 언어를 익히며 자신의 처지를 사유하기 시작한다

관찰하고, 비교하고, 인간 사회의 규범을 이해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크리처는 점차 판단과 선택이 가능한 주체로 이동한다

델 토로의 영화는 이 설정을 삭제하지 않는다


영화 속 크리처 역시 숨어 살며 책을 읽고 세계를 이해하려 애쓴다.

그러나 차이는 

‘사유의 유무’가 아니라, 사유가 작동할 수 있는 구조에 있어 보인다

 

원작에서 독서와 사유는 크리처를 인간 사회의 윤리 영역 안으로 끌어올려 창조주와 인간에게 맞서게 하지만, 영화에서 크리처는 원작의 피조물에 비해 최소한의 사회적 발화권도 갖지 못한다. 원작의 크리처보다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말했으나(수용자는 장님) 훨씬 더 말할 수 없고, 응답 받지 못한다. 여기서 델 토로의 질문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사유하고 판단했으나 끝내 응답 받지 못하는 존재에게

우리는 그 생에 어디까지 책임을 지을 수 있는가.

 

원작이 '사유했음에도 왜 이해에 실패했는가'를 묻는다면

델 토로의 영화는 

'사유했으나 끝내 응답받지 못하는 존재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같은 프랑켄슈타인이 서로 다른 시대의 윤리를 비추는 방식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비극적 정서가 아니라 구조적 갈등에 있다


피조물은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능력으로, 어떤 결핍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될지도 결정한 바 없다. 이 모든 결정권은 창조주에게 집중되어 있다. 창조는 철저히 일방적이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결과에 대해 후회한다. 창조주 빅터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후회는 감정의 표현일 뿐, 책임의 수행은 아니라는 것-.

 

한마디라도 더 하면 기적이라고 해 놓고

왜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창조자를 대면한 크리처의 절규다.

이것은 권력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다

창조주는 전능에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피조물은 제한된 능력만을 받았다.

언어 능력, 사회적 위치, 자기 해명의 수단 모두가 창조주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자신과 동일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이 요구는 공정하지 않다.

 

이 대사는 비애의 토로가 아니다. 권력의 비대칭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다

창조주는 전능에 가까웠고, 피조물은 제한된 능력만 받는다

언어 능력, 사회적 위치, 자기 해명의 수단 모두가 창조주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럼에도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자신과 동일한 윤리적 기준을 요구한다

 

이 예정된 비극적 불균형이라니...

 

델 토로는 이 갈등을 개별 인물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상징화한다

시체의 절단 장면이 전혀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살인'이나 '훼손'이 아니라 '제작'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빅터가 절단하는 것은 사람의 다리가 아니라 재료의 일부였다.

 

원작을 읽었을 때보다 확실히 이 부분에서 시청자(독자)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영화는 감정 대신 구조를 드러낸다. 생명체의 복제란 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책임이 유예되는 '구조'를 시체 절단, 이 장면으로 구현한다.

 

원작과 영화가 가장 확연히 다른 바는 인물에서 이루어진다.

여인, 엘리자베스이다.

 

원작에서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여자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사랑했고, 잃었고, 그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

이때 엘리자베스는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명분을 제공한다

이전 크리처에서는 소거된 '감정'이 개입되면서 

빅터의 창조가 오만적 욕망으로만 보이지 않게 역할한다

정서적 알리바이인 셈이다.

 

이 알리바이로 빅터는 '나는 신이 되려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방패를 자처한다.

 

그에 비해, 델 토로의 영화에서는 이 알리바이가 철저히 제거된다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여자가 아니라 더구나 동생의 여자이다.

여기서는 사랑도(거기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혼자 썸 타는 정도), 

소유도, 회복의 환상도 생략된다. 그 결과 창조 행위는 감정으로 가려지지 않은 채 

그 자체의 윤리적 문제로 불거진다. 

영화에서 빅터의 창조는 더 이상 '사랑했기 때문에'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없다

오로지 그의 '도덕', '책임'만 남는다.

 













확연히 다른-사과의 받아들여짐

 

소설에서는 창조자와 크리처가 끝내 화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메리 셸리는 '사과'를 유예한 채 서사를 닫는다. 빅터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기 연민에 가깝고 명시적인 사과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빅터는 인간들 틈에서 죽는다. 크리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빅터와 마지막이 어긋난 채, 그래서 영원히 이해 받지 못한 채 빙산의 황무지로 사라진다. 파국은 봉합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절대적 비극이다.

 

델 토로의 영화는 확연히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에서 빅터는 사과한다. 그것은 변명도, 후회의 독백도 아닌, 창조주로서의 명시적 책임 인정이다. 그리고 크리처는 얼굴을 마주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 받아들임은 화해라기보다, 더 이상 관계에 매이지 않겠다는 결정에 가깝다. 크리처는 떠난다. 도망이 아니라 이탈이며, 파괴가 아니라 분리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원작이 '왜 이해에 실패했는가'를 묻는다면,

영화는 '사과가 가능했다면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실험한다.

델 토로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최소 조건을 장치한다

 

바로, 사과이다.

빅터와 크리처는 얼굴을 마주하고 분명히 말한다.

 

I am sorry. 

Accepted.

 

책임이 언어로 발화되는 순간, 폭력의 순환은 종료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희망적이라기보다 

내게는 다분히 윤리적이다

 

크리처는 머무르지 않고 떠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복원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희극적이지는, 당연히 않다.

 

그 중간의 어디쯤이다.

 

슬프면서 희망적이면서 가여우면서 기특하고 

너 같으면서도 나 같다는 느낌...

 

무엇보다, 뿌듯하다.

책임이 한 번이라도 제자리를 찾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나는 얼마간 평온해졌다.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구조가 잠시 멈춘 게 느껴져서.

일방적 권능과 무방비 상태로 그 권능에 희생되어야 하는

보나마나 2026에도 이어질

불가해할 정도로 편파적인 힘의 구조가 

 

잠시 멈춘 게 느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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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1-0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켄슈타인, 사 놓고 읽지 못하고 모셔 두고 있어요. 새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땐 고이 모셔 두죠.
아마 읽고 나면 리뷰를 쓸 것 같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올해엔 읽어야지, 하고 있어요.^^

젤소민아 2026-01-01 12:53   좋아요 1 | URL
18세에 이런 소설을 쓰다니...참...나...천재들이란! 페크님 리뷰, 기대됩니다!
 
극한 생존 -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
알렉스 라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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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다...하다가 미안해지는 책. 세상에서 제일 추운 곳을 다룬 유튜브를 보았다. 밤새 자동차 엔진을 끄면 안 되는 곳. 저런 데서 왜 살지? 그 생각하다 바로 죄인 되었다. 영상 마지막에 나온 자막 때문이다. 그들은 혹한 속에서도 먹고, 살고, 사랑한다.. 다른 이의 생존에 감히 시비 걸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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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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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설작법서나 소설에 관한 책들을 찾게 된다.
그 목록에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와 함께 이 책을 비켜 가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소설 관련서 가운데 가장 유익하다거나, 

최고의 작법서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유익하다’거나 ‘베스트’라는 말로는, 

이 책을 읽은 경험을 제대로 옮길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책은 좀 특별했다.
기존의 소설작법서에서는 만나지 못한, 낯선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중심부.


이 책이 터키 어로 쓰였으니 원어로는 어떤 단어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무튼 파묵은 이 책에서 소설의 '중심부'를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그걸 위해 소설을 '그림'에 빗댄다.


작가가 세밀하게 엮어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고, 우리가 읽으면서 염두에 두었던 많은 세부 사항이 모여 이 장면에서 순식간에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독자는 소설 속 단어들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어떤 풍경화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작가가 시각적인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묘사하듯, 독자도 상상 속에서 단어들을 커다른 풍경으로 전환한다는 점입니다.


15p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것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소설가들 대부분은 은연중에, 아니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18p


파묵은 소설을 다른 장르의 문학과 이 '중심부'란 것으로 선명하게 나눈다.


소설과 다른 문학 서사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습니다.

(중략)


이 중심부는 우리가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 좇아간 소설의 표면과는 멀리 떨어진 배후 너머에서 있어서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는,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32p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작은 관찰로부터 출발하여, 처음에 약속했던 감춰진 진실로, 중심부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49p


여기까지 읽어도 솔직히 '중심부'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과연 이 중심부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소설에서 이 중심부는 소설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러면 우리가 중심부라고 하는 것도, 사실 우리 자신이 만든 허구라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면서-숨겨 두는 것입니다. 모든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원하는 곳에서 중심부를 찾습니다


165p


이 책의 후반부다.

책이 거의 끝난 것이다.


책의 초반에는 '중심부'를 소설가가 숨긴 '의미’쯤으로 생각했다.
작가가 어딘가에 감춰 둔 핵심, 독자가 끝내 찾아내야 할 정답 같은 것 말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나 그런 기대를 품는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말하려는 게 뭘까.” 

중심부라는 말은 그 질문을 정당화해 주는 단어처럼 보였다.


하지만 파묵의 말을 따라가다 보니,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심부는 보이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없으며,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무엇이라고 했다. 


그 설명을 읽고 나면, ‘의미’라는 단어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의미라면 붙잡을 수 있어야 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고정되어 있어야 하니까.


소설 쓰기란 세상이나 삶에서는 끝내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을 하나 설정해 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중심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대신, 풍경 속에 숨겨 둔다. 

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듯이, 한 수 앞을 보여주는 대신 여러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둔다. 여기에도 있을 것 같고, 저기에도 있을 것 같은 상태로.


무엇보다, 중심부는 그 이름은 고정된 듯 여겨지나, 결코 고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독자는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도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린다. 

같은 문장을 읽고도 어떤 이는 한 장면에서 중심부를 느끼고, 

어떤 이는 인물의 침묵에서, 또 어떤 이는 소설을 덮고 난 뒤 오래 남은 기분에서 그것을 짚어낸다.


말하자면 중심부란 '의미'와 달리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독서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파묵에 따르면 말이다.


중심부는 작가가 숨겨 둔 메시지가 아니라, 

독자가 끝내 놓지 못하는 감각에 가깝다고 이해해 본다.


그래서 이걸 연결한 거다.

소설/그림/감각

 

설명하려 하면 빠져나가고, 

요약하려 하면 흩어지고

그런 한편

읽어내기만 하면, 

결국엔 끝까지 다 읽기만 하면

우리가 어딘가에 닿아 있다고 말하게 하는 것-


파묵이 말하는 중심부란 그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


이 책을 읽고 앞으로의 내 소설 읽기가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의미를 파악하려 하기보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자리가 보이면 

잠시 머물기.

감각의 안테나를 펴고 쉬기. 

그리고 느끼기. 

뇌보다 촉수를 가동하기.


소설 쓰기는 이걸 반대로 위치하면 되겠다.


의미를 전달하려 하기보다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자리를 마련하기-.


중심부가 고정되지 않아 끝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마다 다른 자리에 남는다면,


그 소설은 성공한 것이다.


그 '다름'이야말로, 소설이 계속 읽히는 이유일 테니까.



*지금 병행 독서하고 있는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하여>와 

어째 결이 딱딱 맞아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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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2-28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혹하는 글쓰기 너무 좋았던 책이예요. 오르한 파묵 읽고 싶네오. 한때 그의 소설에 빠져있었는데,,, 중심부!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것은 풍경속으로 들어가는 것!
공감합니다.

젤소민아 2025-12-28 22:4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도 파묵 좋아하시는군요~~터키의 감성이 우리와 잘 맞는 것 같아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선 2025-12-29 0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심부는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소설가가 말하고 싶은 게 있기는 하겠지만, 꼭 그것만 알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그런 거 모를 때가 더 많은 듯합니다


희선

젤소민아 2025-12-30 23:08   좋아요 0 | URL
네~~그점이 조금 헛갈리긴 해요. 독자의 자유로운 감상여지를 존중하면서 또 작가가 달려가는 중심부를 주장하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중심부라고 하는 것도, 사실 우리 자신이 만든 허구라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면서-숨겨 두는 것입니다. 모든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원하는 곳에서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 문장은 부딪힘을 지녔는데요...쓰는 사람의 중심부와 읽는 사람의 중심부가 합치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희선님이 딱 짚어주신 듯해요~

모나리자 2025-12-30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소설을 쓰시는군요! 소설 쓰시는 분들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파묵은 만나보지 못했는데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최근 읽은 책에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을 알게 되었는데 1순위로 읽으려고요.
편안한 연말연시 보내세요. 젤소민아님.^^

젤소민아 2025-12-30 23:09   좋아요 1 | URL
저는 아직 대단한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ㅎㅎ 열심히 달려가려 합니다~
모나리자님도 그 특유의 미소를 내내 간직하시는 2026년이 되세요~
자주 뵙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