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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소설을 읽을 때는 저자를 빼고 읽어야 한다.
실제저자를 말이다.
우리는 내포작가만 의식하면 된다.
아니, 그조차 '작가'는 빼고 가도 된다. 빼고 갈수록 유익하다.
그게 소설을 읽는 방법이다.
윌리엄 골딩이 전쟁 경험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소설이 언제 쓰여졌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이야기'만 보면 된다.
실제작가든 집필배경이든,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알아도 늦지 않다.
'파리대왕'이야말로 그렇게 읽어야 한다.
처음부터 다 알고 가면, 재미가 떨어진다.
작가든 배경이든 하는 건, 도대체가 소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 모르곘다면
그때 찾아봐도 된다.
'파리대왕'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몰라도 된다.
읽으면 다 알아진다.
열댓명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떨어져 치고받고 삼박질하다가 끝나는 이야기라면
그렇게만 읽어도 된다.
얼마나 재밌나?!
소설이 꼭 무언가를 말해야 할까?
첫 문장을 읽을 때부터 그 바닥을 파내려가려고 끙끙대는 이들이 많다.
뭔가 심오한 게 있겠지, 형이상학적인 게 있겠지.
난 그걸 놓치지 않을 거야.
대개는, 그러다 놓친다.
[금발의 소년은 몸을 굽히듯이 해서 이제 마지막 바위를 내려와 초호 쪽으로 길을 잡아 조심스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게 그 유명한 '파리대왕'의 첫문장이다.
금발의 소년
마지막 바위
초호
나아가다
여기서 끌리는 게 없다면 한 문장만 더 보자.
[제복이었던 스웨터를 벗어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있었고 회색 셔츠는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풀칠이라도 한 듯 이마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제 됐다. 당신은 윌리엄 골딩이 던진 '후크'에 걸려 들었다.
제복을 입었던 금발 소년이 위기에 봉착했다!
뭘 더 기대하는가. 이제부터 300쪽 가량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당신은 그 바다에 뛰어들면 된다.
'파리대왕'의 '파리대왕'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파리 중에서 엄청나게 큰 '왕'파리를 말하는 줄 아는 사람이 열 명 중 아홉이다.
'파리대왕'을 소문으로 읽었기 때문이리라.
'파리대왕'을 텍스트로 읽은 사람은 안다.
'파리대왕'은 사실 잘린 돼지목, 아니 엄밀히 말하면 돼지머리임을.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인간, 우주에 혼자 떨어진 우주미아가 아니라면
어디서건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군집'을 이룬다.
인간의 본성에서 '폭력성'은 역설적이게도, 그 '군집'이 약화시키기도 하고 강화시키기도 한다.
사람이 많으니 폭력성을 누르니까.
사람이 많으니 폭력성이 불거지니까.
'파리대왕'은 후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혼자였다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소년들의 폭력성을 다룬 소설이다.
법과 질서, 규칙, 어른들의 잔소리가 소거된 세상에서 드러나는 '순수한' 폭력의 근원을
따져드는 소설이다.
'순수'해야 하므로 소년들이다.
읽으면서 '뭐 이런 나쁜 것들이 다 있나!' 하지 못한다.
법과 질서가 사라질 때의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봉화를 고수하려는 랠프를 따를 것인가
사냥을 고수하려는 잭을 따를 것인가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 안에는 랠프, 잭, 돼지, 사이먼, 로저, 자줏빛 반점의 꼬마.
모두 다 있다.
군집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어린이들은 메가폰을 들고 있던 어른들에게 그랬듯이 그에게 순순히 순종하였다.
순서를 가려서 중요한 일도 하지 않고, 또 온당한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구조받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어? - P65
마스크는 이제 하나의 독립한 물체였다. 그 배후로 수치감과 자의식에서 해방된 잭이 숨어버린 것이었다. - P91
지금은 석양이 한쪽에서 비스듬히 비치고 있어서 그림자는 의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다시금 그는 격에 맞지 않게 야릇한 명상에 빠졌다. 만약 위에서 비치는 경우와 아래쪽에서 비치는 경우에 얼굴이 다르게 보인다면 대체 얼굴이란 무엇인가? 아니 얼굴뿐만 아니라 사물이란 무엇인가? - P113
조리가 닿고 수긍이 가며 법이 지켜지던 그런 세계가 이제 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 전엔 이것저것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냐 이제는 배마저도 떠나버리고 만 것이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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