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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 ㅣ 펭귄클래식 64
니콜라이 고골 지음, 이기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학 시절, 광고회사에서 인턴 비슷한 걸 했다. 알바에 가깝겠지만.
시안을 잡던 '보스'님들이 갑자기 손모델이 필요하다 하면서
모두의 손이 회의 탁자 위로 모아졌드랬다.
마치, 선상님, 큰 죄를 지었으니 어여 작대기로 손등을 때려주세요, 하듯.
제일 젊은 나답게 내 손등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고 가늘고 길었....
아니, 그냥 그들의 구미에 맞았다.
그때부터 촬영을 하기 전까지 며칠 간 내 손은 황금손이 되었다.
그들은 내 손에 동동구리무를 처발처발해가며 마구 마사지를 해주었고
뜨거운 타올로 스팀도 해 주었고
알바생답게 쓰레기통 같은 걸 들어 내가려고 하면
"야! 누가 얘한테 이거 시켰어?"했다.
'미생'에서 '우리 애'라고 하는 걸 장그래가 들었을 때 느낌 같은 게 몰아닥쳤다.
3일 천하.
내 황금손은 촬영이 끝나자 3일만에 다시 알바생의 손으로 전락했다.
그 3일 동안, 내 손은 내 존재의 층위, 그 맨 위로 올라섰다.
나보다 내 손이 더 고귀했다. 아니, 나는 고귀하지 않을지언정, 내 손만큼은 고귀했다.
그때의 내 손을 '코'로 바꾸면 니콜라이 고골의 '코'가 된다.
인간의 총합보다 더 고귀해져버린 코.
왜?
잃어 버렸으니까.
그 코는 더 고귀해버린 존재답게 고급 관리의 외피마저 입는다.
더 이상 코가 아닌 것이다. 잃어버린 코는.
3월 2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기기묘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발사 이반 야코블레비치는 두 가지 음식을 동시에 차리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당연하지!)
아내가 던져 준 빵을 먹으려 그걸 자른 후 무언가 하얀 물체를 발견한다.
아는 사람의 코!
수요일과 일요일마다 면도를 하는 8등관 코발료프의 것.
아침에 일어나 코가 실종된 것을 안 코발료프는 코를 찾아 나선다.
마차에서 내리는 제목을 입은 신사! 그의 코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제 코란 말입니다!
귀하께서는 뭔가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저는 저 자신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전혀 친밀한 관계일 리가 없는 것 같은데요.
(46-47p)
그는 곧장 신문사로 가서 사건의 전모를 상세히 알리는 광고를 내기로 결정했다.
(49p)
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52p)
이쯤 읽고 나면 어째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니콜라이 고골을 찬미했는지 알 수 있다.
이쯤 읽고 나면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을 죄 긁어 모으게 되는 심정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고골은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유머마저 갖췄다.
사실, 당신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게 몹시 유감스럽습니다. 코담배라도 맡으시면 어떨까요? 두통도 걱정거리도 사라질 겁니다. 그뿐 아니라 치질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지요(55p) / 신문사 광고 담당 관리의 말
이 대목에서, 아무도 없는데 혼자 소리내서 웃었다.
그러다 곧 누가 볼새라 웃음을 싹 걷어냈다.
코가 없는 사람에게 코담배라니.
코가 없는 나에게 코담배를 건네던 사람들이 몇 생각나서 말이다.
웃다가 울면 안되는데...
이 슬픔은 코발료프가 천신만고 끝에 코를 찾았지만 코를 붙이지 못해 끙끙대다
찾아간 의사가 하는 말에서 분노어린 울음이 되고 만다.
지금 있는 그대로 계신 편이 훨씬 더 좋을 겁니다. 찬물로 자주 씻으십시오. 그러면 코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건강하게 지내실 거라는 점을 확신합니다.
당신의 코는 오늘도 안녕하신가.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간수하시길.
혹시 잃더라도 너무 울진 마시길.
어차피 세상은 당신 코 같은 건 코만큼도 안 여길 것이므로.
이때부터 사건은 미궁에 빠져버렸고, 그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6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