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 노동의 풍경과 삶의 향기를 담은 내 인생의 문장들
강광석 외 지음, 박지홍.이연희 엮음, 노순택 사진 / 봄날의책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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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풍경과 생활의 향기를 담은 글. 노동과 생활. 이질적이다. 일과 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활은 노동으로 인해 고단해지는 무엇이다. 노동의 풍경과 삶의 속내,라면 또 모르겠다. 그래서 구입했다. 이놈의 노동을 통해 삶에 향기를 입힐 수 있다면, 싶어서


노동 이야기는 3장에 일부 나온다.


적다.


대부분 고향과 가족, 일상 이야기다.

여기다가 왜 '노동'을 넣었을까?

그리고 부제에 왜 제일 앞에 '노동'을 넣었을까?


그제야 출판사 제공 책소개를 보니 (유명)작가들의 글 모음이다.


'노동의 풍경과 생활의 향기'를 테마로 해서 글을 모은 게 아니라

이미 어느 지면들에 발표된 글들을 이후에 모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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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어떻게 준비되었나?
시작은 단순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작가 S의 글을 보았다. 제목이 <대보름>이었다. 참 좋았다. 그런 글들이 모아진 책은 없나, 찾아보았다. 볼만한 시 선집은 많은데 괜찮은 산문 선집은 별로 없었다. 있어도 대개는 문학 교과서, 국어 교과서의 보조 노릇을 할 따름이었다. 특히 삶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글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글들을 모아보자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 책은 준비되었다. 대다수 생활인이 공감하고 즐길 만한 산문들을 한곳에 모아보고 싶었다.
드디어 작업에 들어갔다. 난관은 곳곳에 있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다루어야 할지, 누구를 넣고 누구를 넣지 말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하는 문제 등 끝이 없었다. 뭔가 선별의 기준이 필요했다. 최소한의 기준.

누구의, 어떤 글을, 왜 수록했는가, 하는 기록
우선, 다루는 시기를 최근 10여 년으로 한정했다.
모든 산문을 한없이 살펴볼 수 없기에 현실적으로 작업 가능한 시기를 정해야 했으므로. 대략 2000년 이후부터, 동시대의 것이라 부를 만한 글들을 담았다.
다루는 내용에는 별 제약을 두지 않았다. 노동, 생활, 취미와 취향 등 넓은 의미에서 ‘인생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최대한 망라하고자 했다. 생활과 노동에 대한 존중, 타자(사람일 수도 있고 또 자연일 수도 있겠다)에 대한 배려심이 담긴 글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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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진들은 보니 기라성같은 동시대 작가들이다.

시인, 소설가.


'노동의 현장' 혹은 '생활의 향기'를 주제를 사전에 정하고

그에 맞는 글을 써달라 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좋은 글을 모았다면 그냥 '좋은 산문의 향연'이 나았겠다.

테마가 각각 달라도 무안하지 않을 정도로

테마를 알아서 세우는 일은 독자의 몫이 되어도 좋았겠다.


부제에 제일 먼저 나온 단어가 '노동'이라 '노동'을 흠씬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 책에서 '노동'의 부제는 실로 적다.

부제에 달릴 정도가 아닐 정도로. 


대다수는,

그냥 '삶의 향기'다.


부제 이야기를 좀더 해야겠다.


[노동의 풍경과 삶의 향기를 담은 내 인생의 문장들]


여기서 '내'는 누구인가?

필자들?

그렇다면 그들이 선택한 문장들이 나와줘야 하지 않나?


아니면 독자들이 받아들, 필자들의 문장들이란 소린가?


어떤 쪽이든 도착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필자들의 문장들이라면, 소개된 문장들이 없고,

독자들의 문장들이라면, 도드라진 문장보다는 어우러진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므로.


따로따로 본 글의 수준은?


잘 쓰는 작가들답게, 좋다.

그러나 신문의 한정된 지면에 복닥이며 넣어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짧아서 

여운을 남기기엔 조금 무리 있다.


쉽게 읽고 싶지 않은 테마였는데,

쉽게 읽힌다.


장점일까, 단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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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1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이야말로 삶의 향기
일까요...

역주행의 시대에 다시 한
번 노동탄압으로 위기정
국을 돌파하려는 모습에
십수년 전으로 돌아가 버
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젤소민아 2022-07-2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과 삶의 향기는 저한텐 왜 그리 이질적으로 들릴까요...제러미 리프킨이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리라면서 인간은 노동에서 해방되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한 말이 깊게 남아서일까요. 노동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대상같고 삶은 그 해방으로 도입해야 하는 무엇같고 말이죠.

그리고 레삭매냐님이 말씀하신 노동탄압...기득권/권력층이 존재하는 한 질기게 살아남을 행태겠죠. 슬픈 일입니다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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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恥の多い生涯を送っ て来ました。


주 인물인 '요조'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민음사의 번역은 이러하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허.....................................


번역자는 독자와 다르다.

이미 책을 다 읽은 사람이다.

독자는 이제, 읽는 사람이다.


번역자는 다 아는 사람이다.

독자는 이제부터 알아갈 사람이다.


출발부터가 다르다.


'인간실격의 '출발'은 '화자(narrator)'의 말하기부터 시작된다.

요조의 수기(노트)를 얻었고 그 수기를 읽기 전인지, 후인지는 모르나

그 수기를 쓴 남자(요조)에 대한 인물 감상을 '서문'에 담고 

그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 서문이 끝나면 요조의 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恥の多い生涯を送っ て来ました。


이게 그 수기의 첫문장이요, 요조의 첫 고백이다.

독자와 만나는 지점이다.


독자는 앞서 화자의 '서문'에서 어느 정도 요조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석 장의 사진으로.

저마다 다른 나이의 사진 속에서, 웃기는 웃는데 그 웃음의 분위기가 각각 다른 사내.

그게 요조의 '남'이 본 요조의 첫인상이다.


독자는 이제, 요조가 생각하는 요조를 만나러 갈 참이다.


恥の多い生涯を送っ て来ました。


요조는 스스로를 이렇게 우리에게 고백한다.

27년을 살아본 현재의 고백.

스물 일곱밖에 안됐지만 머리도 희끗하고 누구나 사십대로 비치는 자신이 표피에 대한

역사도 녹아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감정의 주체는 누구인가?

'나'다.


그렇다면 부끄럽게 만든 이는 누구인가?

'바깥'이다.


'나'가 부끄러우면 '바깥'은 죄가 있는가?

('죄'는 '인간실격'의 주요 모티프다)


없다.


바깥은 온당한데 '나'가 죄를 지은 것이다.


그렇다면 다자이 오사무가 선택한 단어를 보자.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이런 뜻이다.

역자는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것이다. 


역자는 '부끄럽다'를 선택했다.

요조의 선택과 일치하는가?


스물 일곱살(현재)이 되기 전의 요조라면 부끄러웠을 수도 있다.

바깥은 법이요, 요조는 죄였으니까.

그 죄를 무마할 요량으로 '익살(이 또한 민음사 번역어지만 아쉬운 단어)'을 선택했으니까.


스물 일곱살이 되기 전의 요조는 부끄러운 인간이었다.

바깥은 죄가 없고, 자신은 죗덩어리였던.


그러나 지금은?

이런 저런 여자들의 정부 노릇이나 하고 야한 그림을 그리고

여자들 물건을 팔아 술이나 사먹고 자살 시도에

모르핀 중독으로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고 만 지금은?


지금도 여전히 요조가 부끄러운가?


'인간실격'의 첫문장은 소설에서 대단히 독특한 첫문장이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가 아니다.


이야기는 사실, 첫문장에서 다 끝났다.


이미 나름대로는 살만큼 살아본 요조의, 

회한섞인 대갈일성(大喝一聲)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대갈일성-.


지금의 요조는 부끄럽지 않다.

죗성 없다고 착각했던 바깥의 실체를 죄다 알아 버렸다.


정신병원에 갇힌 요조가 인간실격자인가?

정신병원 밖의 바깥이 인간실격임을 다사이 오자무는 자신의 아바타같은

요조를 통해 우리에게 대갈일성하고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


당연히 독자는 아직 모른다.


그러니 요조가 '부끄럽다'고 해도 넘어갈 수 있을 지 모른다.

모르니까.

그러나 지금의 요조가 '부끄럽다'고 고백한 기억을 소설의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


마지막에서 만난 요조는 부끄럽지 않다.

수치스러울 뿐. 


뒷문장을 보자.


저는 인간의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으므로 부끄럽다?


여전히 부자연스럽다.


을유출판사의 번역자는 '수치스럽다'를 택했다.


스물 일곱의 요조는 지금, 돌아본 자신의 삶(생애)가 부끄러울까, 수치스러울까?


'인간실격'이란 명작을 끝까지 읽어본 이는 알 것이다.


바깥을 이해할 수 없어, 인간을 이해할 수 없어,

당신의 생애는 부끄러운지,

당신의 생애는 수치스러운지...


당신은 뭘 그리 잘못했나 말이다.

바깥은 뭘 그리 잘했나 말이다. 


잘 나지도 못한 바깥이 온당한 줄로만 알고 

'광대짓('익살'보다 '광대짓'이 슬픔이 개입되어 더 적절하다)을 하며

살아온 우리의 생애는,


부끄럽기보다 수치스러워야 하리라.


더는 수치스럽게 살지 않기 위해서.


부끄러움은 오로지 당신만이 책임져야 할 감정이다.

수치스러움은 바깥의 몫도 기여된 단어다.


요조는 이제 안다.

자신의 생애는 부끄러웠던 게 아니라

수치스러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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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1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 독서 모임 회원 분이
다자이 오사무의 지독할
정도의 우울함에 팬이 되
었다는 말이 문득 생각났
습니다.

대표작인 <인간 실격>은
분명 읽었는데 기억이 하
나도 나지 않네요.

젤소민아 2022-07-21 12:01   좋아요 3 | URL
레삭매냐님~고전이나 명작의 다른 말은 ‘읽었는데 생각나지 않‘거나, ‘읽은 줄 알지만 사실을 읽지 않‘은 책과 동의어라는 말이 있더군요~ㅎㅎ 저도 그래서 재독하고 있습니다. 읽는 시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책이 되는 게 특히 이런 명작소설 같아요.

요조의 인간실격화보다는 요조를 인간실격자라고 생각하게끔 만든 주변인과 세상이 인간실격화...

이제사 발견하게 됐습니다. 읽으시면 리뷰 공유해주세요~

다자이 오사무의 우울에 더해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를 가하고 거기에 오에 겐자부로의 사유(성적인 메타포의 특이성까지)를 추가하면 한동안은 좀 넋이 나가게 돼서...일본소설은 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는...ㅎㅎ
 
망작들 2 - 당신의 영화를 살 수 없는 이유 망작들 2
노혜진 지음, 정우열.이지영 그림 / 꿈꾼문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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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작들 1편의 반응이 괜찮았던 걸까. 

[망작들1]의 저자가 아닌 한국인 다른 저자가 2편을 잇고 있다.


부제가 '이 영화를 살 수 없는 이유'이다.

한 번 더 짚자.


이 영화를 살 수 없는 이유,이다.


이제 내용(코멘트)을 보자.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에 

'그 해변에 사람이 너무 몰린다. 책임지라'? 

이 영화를 이미 샀고 그래서 돈 많이 번 코멘트.


이게 '망작'이란 코멘트인가?


히치콕의 '사이코'는 또 어떤가?


무서워서 샤워를 못한다??


이건 서스펜스물로 압도적인'대작'이란 소리 아닌가?

그러니까 '망작'의 반대.

그래서 '당신의 영화를 못 사겠다'고??

뭔 소린지.

바로 사야지.

그러니까 이 코멘트 역시, '서스펜스'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자기고백이나 매한가지.


저자가 '망작'의 단어 뜻을 알고 썼는지,

'당신의 영화를 살 수 없는 이유'란 부제를 보고 썼는지,

가늠이 안 된다.


이건 그냥 '살짝 삐딱한 영화 감상기',

그러니까 그 코멘트가

좋다는 말일 수도 있고,

안 좋다는 말일 수도 있는...


적어도

'당신의 영화를 살 수 없는 이유'는 추호도 아니다.


아니, '쇼생크탈출'을 보고 사람들이 그 해변에 밀려 든다는데,

그 영화를 왜 또 사고 말고 한다는 말인지?


이 책의 1편은 '명작'을 '망작'으로 돌려보는,

'틀어보기' 편집으로 승부한 작품이다.


이런 컨셉의 책은

그 컨셉이 모든 내용을 이미 담보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저자는 '틀어본' 명작을 '틀어서' 풀기만 하면 된다.

정말 길 잘 든 얼레에서 실이 풀려나가듯 스르르, 스르르.


그런 책이 '틀어보기' 자체가 안 된 느낌.


얼레에 실이 너무 엉켰다.


이런 '틀어보기'에 매력을 느끼거나 

어떤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백스테이지 스토리가 궁금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웃긴 글이 필요하다면


카밀리앵 루아의 '소설 거절술'을 추천한다.

이 책에서 씁쓸했던 입맛을 돌려 주리라 본다.

소설 거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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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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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로든 상대가 부재 중인데 통화를 한다,고?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던.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남미대륙 최남단.

세상의 끝.


부재 중 통화에 담긴 목소리는 그곳에서 바람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고.


2018년에 기획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전시에서

모아진 부재 중 통화는 10만 통.

들어준 귀는 50 만 개 이상.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 중 하나로 역할된 셈이다. 


부재중 통화는, 

할 필요 없는데 하는 통화일까,

할 필요가 있는데 상대가 없어서 할 수 없는 통화일까.


이 책에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부재중 통화가 들어 있다.


읽다가 건너 뛰는 통화들이 생겼다.

긴 통화들.

내용이 시시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짧은 통화가 더 눈에 들어왔다. 


예로부터, 통화는 간단히,니까.


사실, 전화로 할 말은 할 줄이면 될 것이다.

할 말은 한 줄인데 곁말이 많은 게 통화일 것이다.


전화로 할 말은 그렇게, 간단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엄마야.

너 간 지 벌서 4년 하고 7개월 정도 되네.

김 서방이 연애를 시작했나 봐.


1년치 카드밗 누가 두번만 내주세요.

힘들어 죽을 거 같아.


나 사실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싶어.

엄마 나 되고 싶은 게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쉬워졌어요.


나 사실 오빠 직접 보고 결혼했어요.

가끔 돈으로만 보이기도 해.


어머니, 10년 전 제가 가져갔던 돈은 만 원이 아니라 37만원이에요.

형도 같이 했어요.


내 20대를 너한테 쓴 게 너무 아까워.


신이 있다면 도와주세요. 아빠를 살려 주세요.


그때 살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좀 더 훌륭한 의사가 될게요.


이런 통화...

통화라기보다는 외마디.


살고 싶다는 외마디,

살려 달라는 외마디.


오늘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의 외마디.


설명도, 서사도, 묘사도 개입될 필요 없는,

산 사람이 

더는 살지 않는 이에게 보내는 SOS.


누가누가 더 가여운가.


더는 살지 않는 이

더 살아내야 하는 이


가여운 이들이 모여 피운 불.

이 책을 그래서 봉화같다.


어둠 속에서 타닥타닥,

보아 줄 누군가를 그리며

타닥타닥.


내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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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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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하며 암울한 공상에 빠져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날이 밝기도 전에 잠자리를 빠져나와 운동화를 신고 여름 새벽의 어둠이 깔린 집 밖으로 나섰다.

우이코의 육체를 생각한 것은 그날 밤이 처음이 아니다-18P


나는 어두운 새벽길을 곧장 달렸다. 돌멩이도 나의 발길을 방해하지 못했고, 어둠이 내 앞에 자유자재로 길을 터주었다.


내게는 외부 세계라는 것과 너무도 무관하게 살아왔던 탓으로 일단 외부 세계로 뛰어들면 모든 것이 쉽고 가능해지리라는 환상이 있었다.


숲모기가 내 다리를 물었다.


우이코는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전거 앞으로 뛰쳐 나갔다.

자전거는 위태롭게 급정거했다.


그 순간 나 자신이 돌로 변하고 만 것을 느꼈다.

외부 세계는 나의 내면과는 무관하게 다시금 내 주위에 확고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장편소설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삽화'이다.

이 소설의 다음 긴 분량은 이 삽화의 끊임없는 변주에 불과하다.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불과하다'고 해서 폄하될 수 없...

아니, 추앙받아야 마땅한 이유는 그 '천재성'에 있다.


한 마디로, 美쳤다.

이 소설을 처음 대하는 독자는 변주임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글자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목을 울려 소리로 발음해 내 귀로 확인하는 과정을

서너번은 거쳐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단어와 프레이즈와 텍스트를 낱낱이 해체하고 모았다가 다시 해체하고서야 겨우 짚어낼 수 있었다. 그마저 성공적이라고는 장담 못하지만.


'금각사'를 유미주의, 탐미주의란 단어로 가려 '미의 추구'로 읽으려 한다면

절반만 읽는 것이다.


'말더듬이'인 마조구치(나/화자)가 자신을 거부하는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려는

몸부림. '금각'은 그 몸부림을 방해놓는 존재일 뿐이다.

그 몸부림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금각'이 될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그 정도 할 수 있으려면 '절대 미'여야 한다고,

그래서 '금각'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쓰고 있는 듯하다.

(''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닌 것이다)


초반의 '우이코 스캔들'이 드러나는, 고작 서너 페이지만 떼놔도

걸작단편으로 완성되기에 손색 없을 지경이다. 


걸작단편이기에 이 삽화는 실로 꽉찬 이야기를 잉태했고

그 결과,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스스로 변주가 가능해졌다. 무수한.


그 무수한 변주들이 장편의 분량을 이루었다.


그 어떤 소설에서도 이런 기막힌 변주를 목격한 적 없다.


소설이기에 이룰 수 있는 그 무엇을 '금각사'는 이루었다.

금각사는, 너무나도 소설다운, 그래서 쉬이 볼 수 없기도 한 소설이다.


소설의 변주를 공부하고 싶다면, '금각사'를 눈여겨 볼 것.


이제껏 리뷰 쓰면서 단 한 번도 주지 않은 별 다섯개, 아낌없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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