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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를 안아 준다 - 잠들기 전 시 한 편, 베갯머리 시
신현림 엮음 / 판미동 / 2017년 3월
평점 :
시가 주는 함축적 의미는 결국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몫이다. 어릴 때부터 암기 위주의 교육을 받아온 내 세대에게 문학적 사고는 정해진 틀에 갇혀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릴 때 교과서에 나온 시들은 그 시들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해볼 틈도 없이, 교사가 혹은 참고서가 알려주는 대로 시의 주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형태였다. 그 시를 통해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에 상관 없이, 그 시를 통해 받았어야 했을 감정에 동그라미를 쳐야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대였다. 요즘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시가 시인을 떠나 독자에게 왔을 때, 독자의 어떤 주관적 해석에도 작가가 개입할 수는 없다. 누가 뭐라겠는가.
함축적 의미라는 말을 꺼낸 건, 이 책의 구조가 다섯 개의 주제 하에서 서로 묶였음을 주목해서다. 신경림 시인은 밤, 고독, 사랑, 감사, 희망이라는 다섯 개의 주제에 해당하는 시들을 고르고 추리고 번역해서 분류하였다. 외국 시들이라 번역 중 떨어져나가고 남겨진 의미들이 잠언집같은 느낌을 주었다. 잔잔하고 편안한, 주제에서 볼 수 있듯 격정적이지 않고, 피로를 잊을 수 있는 시들, 잠이 솔솔오는 시들이다.
한편의 시와 한 편의 그림이 짝지워져있다. 파울 클레, 헨리 마틴,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이 대부분인데, 다른 화가의 그림도 있다.
체로키 인디언의 노래 -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또 한 사람의 여행자가
우리 곁에 왔네
그가 우리와 함께 지내는 날들이
웃음으로 가득하기를
따뜻한 하늘의 바람이
그의 집 위로 부드럽게 일기를
위대한 정령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기를
…
이 시는 작가가 따로 있는 것 같지 않고, 체로키 인디언들의 노래를 번역한 듯한데, 갓 태어난 아기를 여행자로 노래하는 첫 구절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살면서 겪게될 그 모든 희로애락은 삶이 끝난 후 뒤돌아볼 때 하나의 여정으로 성찰할 수 있는 여행자로 보는 것이다. 삶의 여정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만, 그 작은 생명이 우리와 함께 하라고 주어진 만큼 인연을 소중이 여기고, 그 아기의 인생 여정이 축복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생명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 단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도 생각난다.
폴 짐머의 완다와 폭설은 <사랑>이라는 주제에 묶여있는데, 눈쌓인 풍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아름다워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원어도 찾아보았다. 탄광 하면 검은 색이 떠오르는데 하얀눈과 대조를 이루며, 일탈처럼 찾아온 폭설에서 생긴 세상과의 고립이 완다와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준다. 눈도미 속에 굴을 뚫고 철조망 담을 넘어다니며 먹을 것이 떨어져 소라도 잡으려 했던 그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속에서 오롯이 사랑을 느끼지만, 눈은 그치고 제설차가 도착하고, 꿈결처럼 둘만의 시간은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한 마디, 요즘은 눈이 그렇게 오지 않는다는 것. 그런 일탈적 사랑이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
완다와 폭설
-폴 짐머
몇년 전,
타일러스벅 근처 노천광산에서 일했었거든.
하루는 눈이 오기 시작하더니 두 시경엔
허리까지 내린거야
“집엘 가겠습니다.” 반장에게 말했어.
“다섯 시까지 기다려보지 그래?: 하길래
“소들을 돌봐야만 해요” 둘러댔지.
완다가 집에 잘 있는지 봐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어.
네 시쯤 집에 다다랐는데 그사이 눈은 가슴까지 쌓였고 내리고 또 내렸어.
완다와 나는 사흘 내내 아무도 만나지 못했지.
눈 더미 속에 굴을 뚫고 철조망 담을 넘어 다니며
눈을 녹이는 심장 소리에 얼마나 웃어댔던지.
먹을 것이 떨어져 소라도 잡을까 생각했었지.
그때 그만 날이 개고 사과알같이 달콤한 달이 떠올랐어.
다음 날 아침 제설차가 도착했는데, 슬프더군.
요즘은 눈이 그렇게 오지 않아, 다 그런거지 뭐.
Lester Tells of Wanda and the Big Snow - Paul zimmer
Some years back I worked a strip mine
Out near Tylersburg. One day it starts
To snow and by two we got three feet.
I says to the foreman, "I'm going home."
He says, "Ain't you stayin' till five?"
I says, "I got to see to my cows,"
Not telling how Wanda was there at the house.
By the time I make it home at four
Another foot is down and it don't quit
Until it lays another. Wanda and me
For three whole days seen no one else.
We tunneled the drifts and slid
Right over the barbed wire, laughing
At how our heartbeats melt the snow.
After a time the food was gone and I thought
I'd butcher a cow, but then it's cleared
And the moon come up as sweet as an apple.
Next morning the ploughs got through. It made us sad.
It don't snow like that no more. Too bad.
마지막으로 로버트해스의 미술관이다. 매일매일 테러가 일어나고 고통이 일상이 되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대에, 어느날 캐테 콜비츠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의 식당에서 젊은 남녀가 아기를 안고 아침 식사를 하는 풍경을 고스란히 시에 담았다. 몇년 전 여름, 미국 여행을 했는데, 여행의 성격이 약간 미술관 투어 비슷했다. 도시에서 가장 예술적이고 의미있는 건축물이 대개 미술관인 경우가 많고, 그런 미술관에 교과서에서나 보았을짐한 예술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미국의 식당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는 미술관 내의 식당을 즐겼었는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비교적 깔끔하고 지역적인 음식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미술관 답게 식당의 분위기도 개별적으로 모두 특색있었다. 그 때의 수많은 미술관 식당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였다. 콜비츠는 독일의 목판화가로 가난과 전쟁의 피해자들을 사실적으로 포착해서 굉장히 어두운 작품들을 주로 많이 그렸는데, 그 때문에 현실 속 평화로운 부부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세부적인 묘사가 어떻게 될까, 무슨 이야기가 있을까 하며 작은 긴장을 주는데, 아기를 서로 교대로 안으며 버터를 바르고 빵을 먹고 신문을 보는 하나 하나의 동작들 그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교대로 아기를 안으며 서로 눈길을 자주 나누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이 평화롭다. 길지만 베껴쓰는 마음으로 전문을 타이핑해본다.
미술관
-로버트 해스
캐테 콜비츠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의 아침
젊은 남녀가 식당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아이를 안고 있고
남자는 일요일판 뉴욕타임스를 들고 있다.
여자는 등받이가 높은 버드나무 의자에 앉아
아이를 감싸안는다. 남자는 쟁반가득
신선한 과일과 빵을 가져오고,
흰 컵에 커피를 따른다. 남자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여자의 눈은 부석부석하다.
공기를 마시러 물 위로 솟아오른 잠수부처럼
잠 속으로 내동댕이쳤다가
순식간에 끌려나온 듯하다.
남자가 아이를 받아 안는다. 여자는
커피를 마시고 신문의 첫 페이지를 훑어본다.
태양 아래 조그만 그들의 자리에서
버터를 바르고 빵을 먹는다.
잠시후, 여자가 아이를 받아 안는다.
남자는 북 리뷰를 읽으며 과일을 먹는다.
여자가 과일 먹고 담배 피우며 신문을 뒤적이는 동안
남자가 다시 아이를 받아 안는다.
서로 눈길을 자주 나누지도 않는 두 사람,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저 공평한 풍경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아기조차 잠에 빠져 돕고 있지 않은가.
주변엔 캐테 콜비츠의 목판화가 가득하다.
고통을 견딜 재능도 능력도 없는 얼굴들,
무감각해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얼굴들,
배고픔, 가공할 테러,
그러나 이 젊은 부부는 햇살 아래서
일요일 신문을 읽고 있다.
아이는 잠들었고,
벗겨 놓은 멜론 겁질에서 푸른 싹이 돋기 시작한다.
이제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