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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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청소년 소설 같은 느낌이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운영하던 사진관을 정리하던 중 자신의 과거와 비밀을 밝히고 결말을 맺는 방식이 한 아이의 성장담처럼 읽혔다. 한 장의 사진이 한 개인의 인생을 망처놓고, 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작별을 준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다. 최초의 사진이 그토록 빠르게 인터넷에 유포될 지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사진작가가 되고자 했던 본인 역시 다시는 사진을 찍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사진관을 운영하는 할머니의 가게에조차 발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니시우라 사진관을 운영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작가인 엄마는 딸에게 유품 정리를 맡기고 나몰라라 한다. 작은 섬에 위치한 니시우라 서점은 마을 사람들이 자주 들르던 곳이다. 유품 정리중 미수령 사진들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전달하는중 의문의 사진 몇 장을 발견하는데, 이 사진에 얽힌 한 가족의 진실을 캐는 내용이다. 


유품 정리중 마유는 두 개의 진실과 맞닥뜨린다. 하나는 미수령 사진 속 가족의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이고, 또 하나는 한 때의 실수로 사진을 그만두게 된 자신의 과거다. 미수령 사진 속 가족의 미스터리는 흥미롭긴 했지만 치매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사고를 당한 아들의 얼굴을 할아버지의 얼굴과 똑같이 만들었다는 설정이 일본풍 만화를 떠올리게 한다. 더욱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찾겠다며 잘생기고 호감이 가는 그 얼굴을 다시 원래대로의 평범한 얼굴로 또다시 성형수술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듯한 결말 역시 억지스럽고 비현실적이다.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인 어머니의 그늘에서 크게 인정받지 않았던 어릴적 자신이 할머니에게서 사진을 배우고 우연한 기회에 찍은 소년 루이의 사진이 엄마의 책표지로 채택되자 이를 계기로 루이가 배우로 발탁되고 그의 사진을 독점하면서 자신감을 찾았으나 이후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게 된 과정이 마유의 비밀이다.  그녀는 사진을 포기하고 경리일을 하면서 그 일을 입에 담지 않은 채 원래의 소극적이고 조용한 인물로 되돌아와 없는 듯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미수령 사진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마유는 지금은 작가가 된, 루이의 사진을 유출했다고 의심했던 한 선배가 할머니의 집에서 한동안 살면서 일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사진 유출 사건 후 은퇴하고 자취를 감추었던 루이의 흔적 또한 미시우라 사진관에서 발견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잊고 살았던 그 4년동안의 시간, 자신에게 공백같았던 섬에서의 시간들을 발견한다.


생각보다 짧아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미스테리와 성장소설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사건을 캐는 당사자가 탐정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과거와도 대면하게 되는 시간들을 잘 풀어나간 것 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뭔가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교훈적인 듯한 일본 대중 소설 특유의 감각은 어쩔 수 없이 취향에 잘 안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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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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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정신은 양분될 수 없다.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정신을 관장하는 것과 같은 기관에서 이루어지므로, 정신의 모든 작용이 끝나면 육체 역시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시몽의 심장이 뛴 이유는 시몽의 심장을 관장하는 뇌가 시몽의 다른 모든 정신적 조건들과 소통하며 심장의 박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뇌가 정신을 처리하지 못할 때, 뇌는 육체의 기관인 심장을 처리하지 못하고, 심장이 스스로의 몸에서 내는 에너지와 호르몬과 화학작용으로 뛰지 못할 때, 그 심장은 이미 죽은 자(뇌사자)의 통제하에서 벗어났으므로, 시몽의 것이 아니라고 간주한다(누가?)


불과 몇시간 전에, 쿵쾅거리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파도 소식을 듣고 백킬로미터를 달려 집채만한 파도를 넘나들던 활력 넘치는 시몽이 돌아오던 길 교통 사고로 죽어가고 있을 때,  아직도 푸른 파도를 향해 달려들던 그 쫄깃한 심장이 쿵쿵거리고 뛰고 있지만, 뇌가 더이상 기능하지 않아 뇌사 판정이 나자,  그 생명의 중지로 인해 반대로 꺼져가던 생명에 희망이 되는 사람이 있다. 뇌는 멀쩡한데 신체에 이상이 생긴 가람이다. 치명적인 장기 기능 장애로 기증 말고는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들은, 기증자가 생겨야 삶이 지속된다. 


장기 기증자는 스스로가 죽어야 기증할 수 있고, 죽은 자는 기증할 수 없으므로 장기 기증이라는 말은 상호 모순이다. 수혜자는 타인의 죽음으로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삶을 절실하게 원한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그것도 뇌사 판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급작스러운 비극적인 죽음, 사고를 원한다는 것에 도달한다. 심장이 꺼져가고 있다는 것은 그럼에도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죽기를 원하며 자연사가 아닌, 죽기 전에 신체 기관들이 곱게 보존되어 있을 수 있는 상태의 충격적 죽음이어야 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겠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기증자의 가족이다. 잠자듯 누워있는 아들의 심장이, 아직도 힘차게 뛰고 있는데, 그래서 아침에 전해들은 그의 사고 소식을 인정하기조차 어려운 부모들이, 뇌사 상태인 아들에 대해 과거가 아닌 현재 형으로 말하고 있는 부모들이, 장기 기증 권유에 대면한다는 것은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다. 기증 여부는 평소, 사망자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를 추론해서 보호자가 최종 결정한다. 


장기 적출 절차는.. 그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읽어낼 수 있는가로 이어지지요. 예를 들자면 시몽이... 너그러웠는지를 자문해볼 수 있습니다. 147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결정일까. 사망자는 아직 열아홉 아이이고, 그 아이의 평소 행동들에 유추해 아이의 정신으로 부모가 대신 결정해주어야 하는 기증 여부. 엄마는 눈물을 흘린다. 아빠는 면담자에게 말한다. 만일 아이가 만일 이기적이라고 말한다면, 이 면담을 끝낼 수 있는 거냐고. 


시몽의 육체는 마음대로 약탈해도 되는 장기저장고가 아닙니다. 가족과 함께 고인의 의사를 드러내기 위한 노력을 해 본 뒤 거부로 결론 나면 절차는 중단됩니다. 


미국에서는 18세가 되어 면허증을 발급할 때, 장기기증에 동의하는지의 여부를 표시함으로써,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쉽게 장기기증 의사를 밝힐 수 있다. 유럽에서는 면허증 발급시, 별도로 표시하지 않으면 장기 기증에 자동으로 동의표시를 하도록 되어 있어, 더욱 장기 기증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우리나라는 면허증에 선택적으로 장기 기증 의사를 표시할 수 있도록 한 것 같은데, 찾아보니 그냥 면허시험소에 가서 면허증 바꾸면 되는 게 아니라, 병원에 가서 이런 저런 서류들을 떼고 동의하고 그걸 가지고 다시 면허시험소에 가는 등 절차가 까다로와서, 기증 표시를 하기조차 어렵다고 한다. 


쉽게 생각하면 쉽다. 어차피 죽을 인생, 아니 뇌사 상태라면 사망 상태라고 하니, 어차피 죽은 생, 신체 기관의 재활용이 많은 환자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갑작스런 비극, 도저히 그 죽음 자체를 납득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가족의 신속한 결정 상태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유럽의 현대 소설들이 조금 어렵게 읽히는 면이 자주 있는데, 그래서, 시작하려면 늘 한숨을 먼저 쉬고 시작하게 되는데,  장기 기증이라는 다소 자극적이면서도 르포르타쥬 형식을 연상시키는 소재를 보고 읽기 전, 살짝 망설였었다. 그러면서도 결국 읽기로 한 건, 그것들이 주는 낯설음에 기대감 때문이었고, 진부할 수 있는 소재를 정말 새롭게,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그려내면서 동시에 시적인 감동을 주었기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첫시작부터 강렬한 시적인 언어가 시몽의 심장을, 그 심장이 처음 뛰었을 때부터  그 심장이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주요 순간들을 노래하는데, 가슴이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역사에 남을만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심장이 의미하는 것이 곧 비극적 소재가 될 것을 직감하는 독자들에게는 엄청난 무게의 감정을 싣게 된다. 


시몽 랭브루의 심장이 무엇인지, 그 인간의 심장, 태어난 순간부터 활기차게 뛰기 시작해서 그 일을 반기며 지켜보던 다른 심장들도 덩달아 빨리 뛰던 그 순간 이래로 그 심장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것을 튀어 오르고 울렁대고 벅차오르고 깃털처럼 가볍게 춤추거나 돌처럼 짓누르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는지(사랑), 시몽 생브루의 심장이 무엇인지, 스무 살 난 육신의 블랙박스, 그것이 무엇을 걸러 내고 기록하고 쟁여 뒀는지,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p7)


시간 배경은 서핑보드를 시작한 이른 새벽 6시가 채 되지 않은 때부터, 사고가 나고, 병원의 간호사와 의사들의 일상이 시작되고,  부모에게 사고소식이 통고된 아침과, 장기 이식 결정이 난 오후, 그리고, 숨가쁘게 시작된 수혜자 선정 작업과 각 병원의 담당의들이 활동을 개시해서, 적출과 이식이 이루어진 다음날 새벽까지의 24시간이다.  그 시간동안 르포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개입되지만, 깊이있는 감정의 세부적 변화와 내면의 세계들이 다루어지고, 전문적 사건의 전달 역시 매우 정교하고 핍진한 묘사에 기반한다. 전문적이란 것이, 새벽에 아이들이 서프를 하는 과정인데, 파도를 타는 세부 묘사가 압권이고, 장기 이식에 따른 절차적 과정 역시 이식자와 면담자, 의사들 사이의 묘한 긴장들과 감정선들이 세부적으로 다루어진다. 이식 수술 및 처리 과정 등의 의학적 절차는 말할 것도 없다. 


신파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울컥하는 부분이 여러군데 있었는데, 시몽의 심장 적출의 마지막 과정에서 의사가 부모의 부탁으로 그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mp3를 들려주는 장면, 그리고 심장 이식자에게 그 심장이 이식되면서, 작가가 그 심장이 듣던 노래를 언급하는 장면에서 그랬고, 아들이 사랑한 여자친구 쥘리에트에게 소식을 차마 알리지 못하고 늦게까지 지연시키다가, 결국 말하고, 그녀가 추운 겨울 티셔츠 바람으로 뛰어 오던 장면 등등이다. 시간이 되면 한 번 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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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20세기 - 고리키에서 나보코프까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이현우 지음 / 현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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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 투르게네프, 도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 기라성같은 문학 작가를 낳은 19세기 러시아가 20세기에도 많은 문학가를 낳았다. 19세기 문학가에 비해 우리에게 낯선 작가들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구소비에트 시대에 자유 진영과의 원활한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20 세기 러시아 문학은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대량학살이다. 말이 2천만이지, 우리나라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인구가 스탈린 통치 기간 중 2차대전 중 독일과의 전투와 정치적 탄압으로 죽어갔다고 하니 압도되는 비극의 양에 먼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대를 뒤덮은 비극은 문학과 예술 속에 스몄을 것이다. 전쟁과 혁명과 내전과 숙청과 탄압, 그 모든 삼켜버릴 듯 휘몰아지는 역사의 광풍을 통과한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까.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살펴본다는 것은, 20세기 역사상 가장 큰 사건들을  겪은 러시아의 역사의 편린들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정 시대의 부패와 가난과  항거와 혁명과 압제와 피튀기는 전쟁을 겪었고, 혁명의 완수 후에도 압제의 칼끝에서 날마다 날마다 죽어갔다. 어떠한 형태로든 역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개인의 삶을 결정한 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 시대가 요구를 캐어내고 구석 구석에서 숨쉬는 사람들의 정신에 반향한 예술이기에 러시아 예술이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내가 학생 시절이었을 때, 지리 시간에 국가 단위의 러시아는 없었다. 대신 사회과 부도라는 지도 교과서에 커다랗게 자리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만이 기억난다. 그토록 큰 나라가 우리에겐  미지의 장소였다. 공포의 나라였다. 대부분의 헐리우드 액션 영화는 미국과 소련의 선과 악 대결에서 선인 미국이 악인 소련을 물리치는 내용이었다. 1917년부터 1991년까지 70년의 역사가 연방국으로서 소련이 존재했던 기간이다.  1917년 제정 러시아는 10월 혁명의 성공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 문학은 1917 혁명이라는 이 문제적 시간과 사건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듯했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문학이다.


그동안 소련은 북한과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먼 땅,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상기시키는 춥고 황폐하고 차가운 공산주의의 나라였다. 그래서 러시아 문학 하면 19세기 문학과 망명 문학을 주로 떠올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에 마무리된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리얼리즘 문학이고, 이후 체호프의 과도기를 거쳐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은 마감된다. 얼어붙은 먼 땅이라는 막연한 상상의 나라에서 꽃피운 문학들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를 비껴가지 못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8명의 작가 중, 노벨상 수상작가가 다수 있는데, 대부분 반체제 인사로 찍혀 작가 활동을 금지 당하거나, 망명의 길을 선택해, 외국어로 글을 쓰거나 하는 고초를 겪는다. 20세기 초반 정치적 격동기에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보다 더 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왔으나 혁명 이후 흐름이 바뀌기 시작해서, 스탈린의 권력 구조가 안정된 이후 창작에까지 사회주의 이념이 강조되었고, 이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위세를 떨치며 문학은 위축된다. 1953년 스탈린 사후부터 흐루쇼프가 실각하여 브레즈네프 집권까지 이어지는 대략 10년간의 해빙기를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완화되며 반체제 작가들이 활동하지만 결국은 솔제니친과 같이 추방되는 운명을 맞는다.


20세기 러시아 문학을 선도한 작가로 막심 고리키를 맨 처음에 다루고 있는데, 완독하지 못해서 내내 찜찜하고 궁금했던 <어머니>와 그의 문학적 세계를 저자는 일부 평론가들이 작품에 드러난 세계관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이라고 비판한다고 전하면서, 그 시대야말로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회였기에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다양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며 따라서 그런 비판이야말로 도식적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옳은 말이다.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보편적인 시대적 요구가 있기 마련이다. 격동기였지만, 그 숱한 피를 뿌린 러시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었다고 믿는 우리 나라에서만도 70년대의 낭만적 문학과, 80~90년대 초반의 저항의 문학과 그 이후의 나른한 나르시스적인 문학, 그리고 이 시대의 문학이 시대적 요구와 흐름을 따라 함께  호흡하고 있는데, 세계 그 어느 역사의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격동적 혁명의 전야에 어떻게 다른 문학이 더 위대할 수 있었을까.


이와는 반대로 혁명은 혁명의 당위성과 혁명의 잔인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개인의 희생을 낳기에, 반혁명 작가를 낳을 수밖에 없다. 자먀틴과 파스테르나크는 반혁명 대열에 선 작가들로서, 그들의 대표작인 <우리들>과 <닥터지바고>는 공식적으로 출간되지 못하는 작품, 그들 속에서는 부재하는 작품이었고, 대중들은 읽을 수 없었다. 숄로호프를 제외한 여기에 실린 나머지 작가  불가코프, 솔제니친, 나보코프 모두 작품이 출간금지 당해, 망명하거나, 고립된 삶을 살았다. 문학에 대한 탄압은 국외 출간 및 망명 문학으로 이어지며 닥터지바고 같은 일부는 자유진영의 자의적 해석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당의 반대로 끝내 거부해야 했던 경우가 닥터지바고를 쓴 직후의 파스테르나크이다.


플라토노프의 <코틀로반>과 <체벤구르>를 계속 못읽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룬 플라토노프의 작품 세계를 읽으니 가장 읽고 싶은 책이 되있다. 러시아 철학은 논증이나 이론적 체계와 무관하게 진지한 문제를 사고하는 것을 철학으로 규정하므로 19세기 철학사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한 장씩 차지하는데,  20세기 철학자에 아마도 플라토노프가 들어가지 않을까 예상될 만큼 문학 속에서 깊이 있는 사유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한 사회주의였음에도 불구하고 반혁명주의라는 이유로 근 60년 가량 출판을 금지당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회주의자 중에서도 이상주의자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현실 타협주의자였던 스탈린은 트로츠키 같은 극좌파를 비롯해 플라토노프 같은 투철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 역시 제거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정신, 사회주의적 영혼이랄 게 없으니 사람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할 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갖게 되는 정서가 슬픔과 연민입니다. 플라토노프는 바로 그 정서에 가장 깊이 천착한 작가죠. (p92)


문학은 시대의 운명과 함께 한다. 실제 수용소의 경험으로 생생한 수용소 현장을 문학으로 쓰고 실상을 널리 알리며 반체제 활동을 해온 솔제니친은 막상 체제가 무너지자 반체제가 설 장소를 잃었다. 그는 소련이 가장 서방 세계에 악날함의 극치로 알려질 때에는 언론에서 가장 많이 언론에서 다루어졌지만 체제 비판이 자본주의에까지 이르자 서방세계는 그를 꺼려했으며 체제가 무너진 무너지고 20년의 추방 생활이 끝내자 이제는 비판할 체제가 없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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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 오랜만에 들어왔더니, 2017 서재 결산 배너가 있어서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더니, 역시나 탈락이다. 이달의 평가단 제도가 없어진 이후 확실히 활동이 위축된 것도 사실이지만, 책읽는 시간 자체가 많이 줄었다. 나름 2017년을 결산해본다면, 온라인 서점가에 종이책의 정가제가 정착된 이후 개인적으로는 전자책 위주의 구매활동에 정착했다. 김영사와 열린책들, 다산북스 와이즈베리 등의 출판사 평가단 혹은 서포터 등등 의 리뷰어 활동을 간간히 했으나, 다산북스의 VVIP 나나검 활동 여부 응답에 의사 표시를 안한 무심함덕에 짤린 이후 서점 기반의 리뷰 역시 모두 끊었다. 자발적 강제적 책읽기의 종말의 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시작 그 출판사 활동이란 것도 뭐 2016년과 2017년에 몰려 있으니, 책일기인생에 있어서는 잠시 해봤다에 불과할 것이다.   


전자책은 대여와 할인 등 여러가지 이벤트가 많아 읽는 재미보다 사모으는 재미에 더 빠지게 된다. 덕분에 가벼운 책들도 꽤 샀는데,  쉽게 읽히는 만큼 바로 잊혀지기 쉽상이라 리뷰를 쓰지 않으면 읽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또 나중에 읽는 책들이랑 내용이 헷갈릴 것 같아서, 리뷰부터 써두어야 싶은데, 역시 쓰는 것보다는 읽는 게 더 좋다. 써서 뭐하나.. 애드온 수입이 쏠쏠했던 적이 있긴 하지만(아 쏠쏠했다는 것의 의미는 심리적인 것임, 한 때 동사의 맛 같은 경우, 책한권 사서 한줄 평 하나 달랑 올렸는데  100원 씩 수십건이 적립돼서, 잘 하면 (그래 봐야 약 40% 정도?) 본전도 빼겠다 싶던 시절도 있었으나, 요즘은 책들을 잘 안사는지 방문자가 없는 건지 영 재미가 없다.


이 분 특강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몇 번 봤는데, 무엇보다도 웃기면서도 가끔 슬프고, 아주 평범한 것들에 삶을 비유하는 게 기가 막혀서 책을 사봤다. 내용은 좋은데, 이런 책들의 특성이 다 그렇듯이 듬성듬성, 텍스트의 빈곤. 그러니까 너무 후루룩 읽힌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 엇? 신간이라고 해서 샀는데, 알고보니 2016년 책이구나 했는데, 전자책은 2017년 출간이다. 







이 책은 조금 읽다가 김창옥님의 책의 리뷰를 다 쓴 다음에 마저 읽기로 했다. 다른 성격의 책이기는 하지만 둘 다 뭔가를 가르치려 드는 책이라, 리뷰 쓸 때 쯤이면 두 개 책의 내용이 막 섞이게 될 까봐 그렇다. 실제로 자주 그런 일을 겪는다. 하나의 책을 다 읽으면 비슷한 류를 읽기 전에 리뷰를 쓰던지 아예 리뷰를 안쓰던지 해야 한다. 








리뷰 이벤트도 하고 해서, 서재 홈에서 자주 보던 책이라 읽기 시작했는데, 반 정도 읽으면서, 2차대전의 노르망디 작전의 미국측 병사 이야기를 일본 사람이 썼다는 사실이, 사실 소설을 누가 무얼 쓰냐에 문제 될 게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캐릭터들이 약간 일본풍의 느낌이랄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본풍 만화적 캐릭터 혹은 히가시노 게이고 풍의 미스터리 적 느낌이 들면서 뭔가 오리지널로 입을 헹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009년에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는데, 종이 책은 교정 교열 이슈 때문인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던 걸로 알고 있다.  작년에 전자책으로 발간되어 세계문학 세트에 추가되었다. 나는 이 책을 고등학교 때 읽었다. 지금에야, 전쟁 영화도 많이 보고 견문이 넓어져 당시 상황에 대한 시각적인 상상이 조금 더 사실에 가깝겠지만, 그 때에는 훨씬 더 막막했기에 끔찍한 사실적 묘사의 단편들만 남아 있다. 이를 잡고, 쥐가 빵을 훔치고, 반토막이 된 병사의 다리가 머리 없이 뛰어가던 장면 같은 것. 지금 반 정도 읽었는데, 당시 읽었던 느낌보다 훨씬 더 풍부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전쟁의 실상 그 이면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비인간적 모습들.





하루키가 좋아하면 똥이라도 살 기세다.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출판계의 하루키 숭배 현상은 조금 이해할 수 없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비롯한 여러가지 미스터리 소설 시리즈를 광고하면서 하루키가 좋아했던 책이라는 광고가 그 대표적인 에이다.  하루키가 수십번 읽었다는 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마케팅 효과라면, 이 책을 과연 좋게 평가해야 할 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하루키가 안읽었어도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주인공 필립 말로는 하드 보일드 소설의 평균이 되었다는데, 암튼 이 책을 읽다가 2017년도 출간 책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주춤하는데, 내가 뭐 문학의 무슨 주의니 하는 거 잘 모르는데 하드보일드는 또 뭐야 했는데, 이 책을 읽으니 확실히 알겠다.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지를 안알라줌 하는 게 하드보일드인 거 같다. 중간 정도쯤까지 읽었는데, 쓸데없는 설명이 없고, 뭔가 일이 계속 일어나는 게 몰입이 비교적 잘되는 편이다. 



노통브의 소설은 문학세계사와 열린책들에서 주로 나오는 거 같은데, 열린책들은 신간을 주로, 문학세계사책은 시간이 좀 된, 더 많이 알려진 책들이 주로 있다.  장편이라 하기엔 매우 짧은 편이고 누벨라 정도의 양이다. 노는 날 몇시간 만에  다 읽었다. 내용 중에 제목에 있는 '적'과 '화장'을 설명하는 대화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제와서 다시 보니 뭔 뜻인지 잘 모르겠고, 저 제목은 적응이 잘 안된다. 분할된 자아와 죄의식에 대해 다룬다. 



 






보트 위의 세 남자는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웃긴 책이다. 읽는 내내 킥킥거리며 돌아다녀서 미친 X로 보였다. 자전거를 탄 세 남자는 보트 위의 세 남자만큼 끊임없는 웃음을 자아내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재밌다. 1/2 정도 읽었는데, 아껴서 읽는 중이다.  이 때 영국 남자 셋이 자전거 여행을 간 곳은 독일로서 생각해보니, 1차 대전이 시작하기 전이다. 두 국가 사이에는 나름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겠지만, 세 영국 신사(?)들은 아랑곳 않고 잘 정돈된 독일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닌다





 

책 제목의 질문에 대한 내 스스로의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 이다. 모든 문장은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것의 의미를 따져가다보면, 이상하지 않은 평균적인 삶은 없으며, 문장 역시 그렇다. 엄청 이상한 문장을 표준의 이상한 문장으로 고치는 것,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가독성과 의미 파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해준다. 이 책을 읽다보면 평범한 하나의 문장이 얼마나 게으르고 불분명한지 알 수 있다. 간간히 읽고 있는데, 아직 조금 더 남았다. 같은 저자의 동사의 맛도 있는데, 이런 책은 글을 조금이라도 쓰는 사람들이라면 붙잡고 서서 묻고 싶다. 이 책 왜 안사세요? 






여기까지가 비교적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의 목록이다. 더 오래 전에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하거나 리뷰를 못쓴 목록은 훨씬 많다. 시작만 한 책도 읽은 책으로 쳐주는 거 없나. 이렇게 열심히 쓰면 내년에는 달인이 되려나. 아놔 플래티넘 등급, 영화할인권, 다이어리, 머그컵... 그게 공짜가 아니었던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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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9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대미술 강의 - 순수 미술의 탄생과 죽음
조주연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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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게 아니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조선 영정조 시대 최고 수집가 석농 김광국의 수집가 정신을 칭송하는 이 말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살짝 비틀어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인용하여 유명해진 말인데, 원문  석농화원의 발문을 쓴 당대의 문인 유한준이라고 한다. 이 책 <현대 미술 강의>의 저자 조주연이 에필로그에서 언급한 말인데, 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미술품을 감상할 때 우리는 유흥준 버전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특히 현대 미술을 접할 때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함의 무지에 비애를 느끼기까지 한다. 이건 무얼까, 무얼 뜻하는 걸까. 왜 이런 걸 전시하는 걸까. 무얼 보라는 걸까. ‘아는만큼 보이는’ 게 예술이라면 알지 못하는 건 보아도 보이지 않는 걸 말한다. 우리는 때로 미술관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는 예술품을 더듬으며 마음으로 감상하려 애쓰지만 알려 한다고 해서 다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려 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 미술만큼 작가의 의도와 평론가의 해석에 대한 앎을 요구하는 것도 드문 듯하다. 음악을 들으면 느낄 수 있고, 좋은 그림이나 예술품을 보면 느낌의 전환을 이끌어 내므로, 알지 못해 보지 못한다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저 말은 전적으로 옳지는 않지만, 유독 현대미술에서만큼은  크게 공감된다. 


모더니즘은 재현의 거부로부터 시작되고, 그 시작점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까지 누드화의 고전주의 전통을 깬 이 그림 속의 누드 여성은 신화 속의 여신이 아니라 현실 속의 창녀였고, 관람자를 도발적으로 쏘아보고 있으며, 풍만한 입체감이 살아나는 명암대신 날카로운 색채 대비를 사용했다. 이것은 3차원 공간을 묘사하는 세계의 재현을 떠나 2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회화 자체의 평평한 미적 구성으로의 이동이다. 이를 기점으로 미술은 3차원 세계의 재현을 떠나 대상의 시각적 효과를 탐구한다. 


일시적인 빛, 순간적인 인상, 인상주의의 탄생과 심화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은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화가들, 모네, 고흐, 쇠라, 세잔, 고갱으로 이어진다. 인상주의의 그림들이 대상의 재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상주의의 그림에서 재현의 흔적을 없앤 것은 아니다. 색채와 선을 묘사의 기능에서 분리시켜 특유의 표현적 효과를 냈고,  이미지들은 ‘묘사의 노역에서 풀려’났다. 여기까지가 초기 모더니즘이다. 저자는 이 초기 모더니즘을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미술’이라는 소제목을 붙여 설명하고 있다. 아는 것이 없어도 보이고, 느끼고, 좋아하고, 모으고 싶어지는 그림들은 오히려 사진처럼 재현해낸 고전주의 그림들보다는 우리가 인상주의라고 뭉뚱그려 알고 있는 재현을 거부하기 시작한 시도의 정점인 듯하다. 


전성기 모더니즘은 마티스와 피카소를 통한 ‘재현 체계의 전복’으로 이어진다. 마티스는 ‘색채와 선을 묘사에서 해방시킨 후 새롭게 재조합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색과 선은 무언가를 묘사하지 않고 그림이 된다. 인상주의를 고루 실험하고 야수주의와 분할주의를 거친 마티스는 <삶의 기쁨은>를 통해 형식, 양식, 주제의 세 가지 면에서 기존 그림에서 탈피했다. 형식 면에서는 대규모의 순색 사용으로 원색간의 과격한 충돌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왜곡한 점, 양식 면에서는 서양 미술의 모든 원천들을 원래의 양식이나 크기와 무관하게 등장시킨 점, 주제 면에서는 목가풍 장르화의 바탕에 성차의 교란을 통해 인체를 사디즘적으로 공격한 점 등이다.  피카소는 단일 원근법을 폐기한 후 대상을 여러 개의 작은 평면으로 잘게 부스는 분석적 입체주의로서 전성기 모더니즘을 대표했다. <칸바일러>를 보면 초상화의 원형은 완전히 사라졌고, 인물의 형상은 작은 평면들로 산산이 쪼개어 후진하여 가라앉은 반면 배경은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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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 1906 캔버스에 유채,176.5x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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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다니엘 헨리 칸바일러의 초상>, 1910


이로써 그림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순수한 미적 구성으로 나아간다.  순수 추상은 입체주의 콜라주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입체주의 콜라주는 그림의 재료가 아닌 재료를 뒤 섞는 것으로 입체주의의 유산을 계승하지만 새로운 효과 하나를 추가했는데 그것이 ‘도상적인 것의 파괴’다.  미술이 언제나 형태의 유사성인데,  브라크가 창안하고, 피카소가 뒤따른 입체주의 콜라주는 유사성에 기초한 재현의 회화와 결별하고 관계의 차이를 바탕으로 의미 작용이 일어나는 언어 기호의 조건을 미술에 도입한다.   유사하게 그리지 않는 미술은 이로써, 기호로 전환했다고 해석된다. 말처럼 어려운 현대화의 알쏭달쏭이 시작되는 것이다.  말레비치가 창안한 절대주의는 더 어렵다. 그것은 지시 대상 없이 조형 요소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바탕으로 의미 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고 하는데, 캔바스를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놓은 검은색 사각형에서 어떤 암시를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연역적 추상). 반면 몬드리안은 회화가 세계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긴장과 균형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구성을 찾는다(구성적 추상). 


추상 표현주의는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와는 다른 방식을 개척하여 순수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대표 주자는 잭슨 폴록이다. 폴록은 미술의 변방 미국 뉴욕을 탁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폴록의 그림을 여행 중 미술관에서 몇 번 본 적 있는데, 그 엄청난 크기에 압도되었고, 아무리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며 뚝뚝 흘린다고 해도, 내가 하면 평생을 시도해도 비슷한 그림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제서야 아직까지 각인된 그림의 다양한 해석을 접할 수 있었다. 기억 이미지 혹은 무의식의 이미지라는 해석,  자연의 그림이자 비밀스럽고 거대한 풍경이라는 해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젤이라는 도구의 틀을 벗어났다는 해석이다. 즉, 수직적 시각장 회화를 수평적 회화로 전복했다는 것이다. 전후 뉴욕에서 이런 류의 시도를 하는 화가들이 더 있었고, 클리퍼드 스틸은 표면의 질감에 대한 촉각적 탐색을,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는 회화의 표면을 얇게 펴서 질감의 촉각적 연상을 없애고 색채와 개방성의 문제를 돌파할 길을 찾아낸다. 색채가 그 자체로서 독자적 발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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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벨 아트 뮤지엄(Fortworth, USA)

여기까지가 1부 모더니즘의 주요 테마들이고, 2부는 순수 미술을 거부하는 반예술 아방가르드, 3부는 반예술의 역설 혹은 곤경으로 표현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아방가르드는 대전 전의 취리히 다다, 베를린 다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전후 미국의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팝을 포함한다. 아방가르드는 페터 뷔르허(1974)에 의하면 예술의 자기비판이다.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어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접속하여 다양한 비판적 반응을 일으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미니멀리즘과 포스트팝으로 나뉘고, 포스트 미니멀리즘은 대상과 형태를 넘어선 과정 미술, 신체 미술, 장소 특정적 미술이 이에 해당되고, 포스트 팝은 언어와 사진의 개입이 관여하는 개념미술, 제도비판 미술, 차용미술 등이 해당되는데 이 마지막 포스트팝이 특히 흥미로왔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성기 모더니즘까지는 이해가 가능했고, 2부 아방가르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제외하고는 더욱 난해하고, 포스트 모더니즘은 신체미술의 경우 역겨운 생각마저 들게 하는 예시들이 있었고, 다시 최근에 가까울 수록 다시 이해가능한 수준으로 복귀하는 느낌이었다. 


강연 형식으로 쉽게 설명되어 있는 책인줄 알았는데, 여러 미술 비평가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매우 밀도높게 비교하면서 현대 미술의 흐름을 저자 특유의 관점으로 배치하였다. 저자가 그린버그 전공이라고 하는데, 그린버그의 비평과 그 비평에 대한 또다른 비평 등이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략이나마 알수 있게 해주었는데, 미술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문장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으며, 미술전공자나 학술적인 서적으로는 밀도 높고 깊이 있는 토론이 이루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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