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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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는 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 ,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스스로 죽거나 타협하거나다. 차선으로 망명의 길을 택할 수도 있었겠지. 아마도 그건 배반이고, 체제에 순응하는 것 이상으로 역겹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양분된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선택한 서방 체제에 충성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터이니 말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 작곡가는 자본가들이 열광하고, 서방 체제가 선호하는 곡을 써야 했을 지 모른다. 얼마 전 읽은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도 망명을 택할 것인지, 작품 활동을 금지당한 채로 전제 정권이 망할 때까지, 혹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살아 남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던 스탈린 시대의 수많은 문학가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었는데, 예술가들이 스탈린 공산 치하에서 '양심껏 '살아남는 일은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었을 테다. 공산진영에서는, 노동을 찬양하지 않아서 감옥에 가고,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노동을 찬양해서 감옥에 가고(70~80년대 한국), 예술가들이 정치 선전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살아남기가 어려웠던 냉전 시대, 망명을 선택하지 않은 한 위대한 예술가들 초상이 일기장에 쓴 글처럼 띄엄띄엄 그의 삶을 조명한다.



포르테시모에 장조로 끝나는 음악, 낙관적이고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음악이 당이 원하는 음악이다. 러시아 인민의 진짜 삶은 비관적이고 어둡다. 형식주의라는 비판아래 예술가들이 하루 밤사이에 체포되어 사라지는 예술가 대숙청 시기에 쇼스타코비치는 프로크피예프를 비롯한 몇 안되는 음악가들과 함께 살아남았다. 문제는 스탈린 스스로가 예술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었다. 이 독재자는, 예술을 사랑하고 장려했다. 첫 불은은 그렇게 찾아왔다.


이미 당 예술 기관지<프라우다>에 호평을 받은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보러왔던 스탈린과 측근은 그들이 보고 있다는 긴장감에 금관악기를 시작으로 소리가 커져버린 연주를 보다 중간에 나가버리고, 이후 <프라우다>지는 그의 음악이,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며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 일을 계기로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둘씩 처형되어 버리고, 그의 차례가 오자, 스탈린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올가미가 쒸워졌고, 함께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은 대원수는 이미 처형되었다. 이제 심문을 받기 위해 매일 밤마다 승강기 앞에 스스로 가서 기다리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를 기대리는 심문은 더이상 없었고, 살아남는다. 


4번으로 끝날 뻔했던 그의 교향곡이 5번을 붙여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고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다. 숙청의 공포를 경험한 후 보란 듯 내놓은 권력이 원하는 음악, 프로테시모에 장조로 끝나는 음악에, 매체는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 답변'이라는 평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말이 음악을 더럽힐 수는 없으며, 음악은 음악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음악을 모르는 권력층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거기에 그 권력의 더러운 말들을 갖다 붙일 수 있게 해 주는 눈속임, 혹은 귀속임일 뿐이다. 그의 음악의 난해함, 끽끽거리는 아이러니는 음악의 그 순수함이 갖는 승리의 조롱이다. 교향곡 5번의 대성공에 대한 분석적 설명은 '낙관적인 비극'이라 불린 것을 보면 그의 의도를 권력은 알아챘다는 것일까.


어쨌든 그가 살아남게 된 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예술을 탄압했던 스탈린이 예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점이었다. 또한 당의 선전 도구로 이용하기를 원하고, '썩은 마인드를 가진' 예술가들을 탄합했던 했던 스탈린이 특별히 사랑해서 더 듣고 싶었던 음악가들 중에 그가 속해 있었다는 점이었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대가. 그는 당의 선전 도구에 철저히 이용당한다. 그러나 괜찮았다. 당이 써준 연설문,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연설문을 서방 세계에서 그대로 앵무새처럼 읽는 것도, 당이 원하는 음악, 형편없는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것도 괜찮았다. 어쨌든 그는 음악은 음악일 뿐이며, 그 음악을 말이 소유하고, 정권이 소유하고, 인민이 소유하고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나보코보와의 만남은 그 인생에 최대의 치욕을 안겨준다. 쌀벌한 냉전의 그늘 아래 당의 선전도구로서 친선 연주를 위해 북미 여행을 간 그가 공개석상에서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그곳에 온 자신을 비판하는 인터뷰 질문을 받았을 때,  세계가 보고 있는 그 인터뷰 상에, 질문은 쇼스타코비치의 심장을 찌르고 양심을 찌른다. (나중에  작가 노트에서인가 보니 나보코보가  CIA에서 지원을 받았다고).  


진실을 말하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세상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질문에 또박 또박 대답한다.  "예 개인적으로 그런 의견에 동의합니다. " "예 그런 조치에 동의합니다. ".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스트라빈스키를 공격하는 연설문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대중 앞에서 (성의없게) 읽지만, 나보코보는 확인 사살을 시도한다. 연설문 원고를 검토하지도 않고 읽으면서 예리게 찔린 양심은 이제 나보코보의 질문에 무참하게 짓이겨진다. 오늘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대하여 당신의 연설에서 피력한 견해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십니까?" "예 그런 견해에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심정으로 그는 전세계가 보는 대중 앞에서 비굴하고 겁쟁이인 자신의 민낯, 발가벗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야 만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싸우기를 바랐고, 싸워서 피흘려 쓰러질 순교자를 원했고, 그리고 그렇게 많은 순교자로 그 체계의 끔찍함과 잔혹함과 사악함을 입증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피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권력층과 더 닮았는지 생각한다.



그것은 배신이었다. 그는 스트라빈스키를 배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음악을 배신했다. (162)


윤년마다 치욕을 겪는 쇼스타코비치에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 치하에서 가장 큰 사건이 기다린다. 당에 가입하라는 압력이다.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회유와 압력을 받던 그는 스탈린 치하에서도 타협하지 않았던 당원으로서의 길을 가게 되고, 이제 순교자가 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한다. 승강기 문 옆에서 심문과 처형을 기다리던 시절, 공포 속에 한편으로 제거되어 버리고 싶었던 가슴 두근거리던 욕망을 기억했다.

늙어서는 젊은 시절에는 가장 경멸했을 모습이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233)

전기는 굉장히 많이 따로 있고, 그것들을 참조하여 쓴 소설이다.  우리는 어떤 위대한 예술가의 생을 읽으며 한쪽 귀만 보이고 반대쪽 귀는 가려서 보이지 않는 택시 운전사를 상상해야 한다.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지 않는 부이 주변에 남긴 여운들을 통해 시대가 남긴 소음을 만난다. 그 소음과 협력한 한 음악가의 치열했던 삶, 삶속의 양심, 자존감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스탈린 시대에 탄압의 주체가 되거나 권력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고 협력함으로써 비겁자로 남아야 했던 한 예술가가 남긴 음악을 들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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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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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는 기억의 누적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잃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누적된 시간 속에 켜켜히 박혀 있는 추억과 경험과 생각의 사슬들이 엮어낸 현재의 나가 그 현재를 가능하게 한 모든 과거를 잊는다면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노아와 할아버지가 길을 잃은 것은 기억을 잃어 가는 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유일 것이다. 기억을 잀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 축적되는 시간과 시간이 갭 없이 연속되고 있으므로, 그 연속성이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이유를 밝혀주며 삶의 방향을 알려주지만 만일 기억의 결함으로 그 연속이 점점이 여기 저기 끊기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길을 잃는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 기억은 과거와 연결되지만 과거는 미래를 향해가는 방향을 결정한다. 기억은 과거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 시간을 예측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새로운 경험을 덧씌워서 합치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돤전 별개의 경험이 아닝 것이기 때문이다. 걷다가 문득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즉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던 방향을 상실한 것을 말하며 이것은 과거에 어디로 갈까 정했던 기억을 잃음으로 인해 미래가 사라진 미래의 상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억의 상실 즉 과거의 상실은 길을잃음을 뜻하고 미래의 상실을 뜻한다. 


매우 짧고 동화책 같은 포맷에 그림도 예쁘고 술술 잘 읽히기는 하는데, 문맥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노인이 손자와 대화를 나눈다. 손자를 끔찍히 사랑해서 이름을 두 번 노아노아라 부르는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실제로 이루어지는 대화라기보다는 치매(이 말은 옳지 않다고 하는데 대치할만한 단어가 마땅치가 않다)에 걸린 할아버지의 머리 속을 오가는 환상이나 혹은 꿈 혹은 회상으로 여겨진다.

반전처럼 아이의 나이가 밝혀지고 노인의 병상이 밝혀지는 마지막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이 모든 몽환적이고도 길을 잃은 듯한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둘은 어디에 있는 건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지 눈치채기 어렵고 현실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노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어디가 현실인지 어디가 환각인지 알 수 없다. 노아는 본문의 대부분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기로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환각 속인 대화 속에서는 아주 어린 아이이지만 실제로 병실에 누워있는 노인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현실이 맨 마지막 페이지에 공개될 때에는 실제로 아이가 있는 청년이고 그를 그토록 된 모습으로 아끼던 노인은 손자 노아에게 치매 레퍼토리인 '댁은 뉘슈?' 하는 노인이었던 것이다. 

슬프다. 현대인이 장수하는 대가로 발병률이 높아진 무서운 질병이지만 이미 기억을 잃어 가기 시작하면 광장의 한복판에서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어딜 향해 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청년은 누구슈라고 묻고, 거울에 비친 낯선 자신의 모습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을 삶을 기억하지 못한채 얼음이 되어버린다. 그레고 이제 죽을 수조차 없다. 천천히 기억이 숨쉬는 것조차 이러을 때까지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견딜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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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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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멋진 경험을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치자. 욕망을 충족할만큼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돈을 많이 벌면 그 돈을 '제대로' 쓸 시간은 줄어든다. 돈이 쌓여 있으면 뭘하나, 돈을 쓸 시간이 없는데.. 바쁜 사회 유흥점들이 판치는 이유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하면서 살겠다고 해보자. 이번엔 돈이 없다. 뭔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의식주가 기본으로 먼저 충족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그 뭔가를 위한 자본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무슨 운동을 하려 해도 각종 장비가 필요하고, 시골에서 농사 지으며 유유자적 삶을 즐기고 싶어도 땅과 시골집이라는 기본이라고 할 수 없는 비용이 소비된다. 더욱이 뭔가를 ‘제대로’ 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돈을 버는데 그 시간을 쓰지 않았다는 소리인데, 이 경우 요행이 따르지 않는 한 인생을 즐기고자 했던 광활한 시간을 지배하는 것은 궁핍과 불안이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며 아무리 큰 돈이 주어져도 시간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을 돈과 바꾸는 건 손해보는 짓이라 생각하기 쉽다.  돈은 요행이 따르거나 구조적으로, 합법적으로 남을 약탈하는 방법으로 벌 수 있는 방법이 차고 넘치니 역시 시간이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라고 해야 옳겠지만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역시 오판이다. 요행은 일부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며 그 특별한 요행이 신화가 되고 책이 되고 희망이 될 만큼 큰 성공을 이루려면 대다수의 불운을 모두 합쳐 한사람의 그 요행에 기여해야 하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폴의 창백한 청춘은 이 시간과 돈의 시이소오에서 극단을 오갔다. 작가와 이름도 같은 주인공 폴이 작가의 페르소나의 일부임을 부인할 할 수 없는 이 소설 바깥쪽에서  볼 때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 오판마저도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짧고, 그의 무명의 작가로서의 고생은 길었다.


젊은 날, 돈 대신 자유로운 시간을 선택한 그는 그 자유가 글을 쓰는 시간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동안도 실존의 시간은 흘러가고 글을 쓰기 위해 먹고 입으며 잠을 자는 생존의 책임에서 면책되지 않았으며 글이 되돌려주는 금전적 가치는 너무 하찮아서 먹고 살기에 빠듯핬다.  먹고 살만큼 글을 쓰기 위해 그는 너무 많은 글을 써야 하고, 그렇게 글을 쓰는 일이 더 이상은 즐거운 일이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일은 지극히 일부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한국에서도 외국 어느 곳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도 생존에는 궁핍하게 숨을 이어갔던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모두 잘살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누군가는 쓰고 누군가는 읽지만 읽는 사람들의 다수는 소도 키우고 종이도 펜도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정말로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폴과 같은 개고생이 앞날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쩔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회에서는 교수들의 월급이 일용 노동자들의 월 급여만큼 짠 곳도 있다. 조용남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몇억에 팔 그림을 대신 그린 예술가는 딱 먹고 숨쉴수 있을 만큼만의 돈을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밤을 새며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길을 선택하여 사는 것의 그 상세한 실체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폴 오스터의 실제 그대로의 경험인지 소설적으로 많이 극적인 부분이 가미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을 지키고 추구하기 위해 잃는 것이 추구하는 것과 점점 더 멀어져갈 때의 초조함이라는 것의 일반성에 공감을 느낀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먹고 사는 일이 충족되어야 하고, 먹고 사는 일을 좋아하는 일을 해서 충당하기에는 좋아하는 일이 좋아하는 일이 아닌 피곤한 일이 된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가장 중요한 청춘의 시간들은 서서히 내 삶에서 빠져나가고, 남는 것을 초조해하면서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돌아보는 동안, 그 방황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며 먹고 살아야 하고 시간을 잃어버려야 한다.


원제는 조금 다른데 한국에서 번역하면서 책 제목을 빵굽는 타자기로 바꿨다. 타자를 쳐서 빵을 구워 먹고 사는 이야기라는 절묘한 제목이 내용과 잘 들어맞는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 폴 오스터의 이런 류의  이야기, 그러니까 어떤 평범해 보이는 상황을 극단에까지 몰고 가는 이야기에는 묘하게 힐링을 주는 데가 있다. 이렇게 치열하게 먹고 사는 이야기임에도, 그는 사회 질서에 저항한다.  처참히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비참해지지만, 그럼에도 남아있는 그 무언가, 타협하지 않고 버티고, 무너지지 않는 주인공의 어떤 힘이 수많은 타협된 현실속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걸까 혹은 그 험난한 가지 않은 길, 집중하지 않았기에 고생도 덜했던 인생을 돌아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걸까. 어쨌든 우리는 노력하지만 끝내 우리를 배신하는 것들의 일반적인 속성을 작품을 통해 확인하고 동질감을 느끼고 다독이는 듯한 위로감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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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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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거지 뭐. 

100번 이상 등장하는 이 문장은 떼죽음이거나 개인의 죽음이거나 어떤 비극이거나 피할 수 없는 순간에 죽어간 사람들을 묘사한 모든 문단에서 등장한다. 어차피 다 가버릴 인생 허무한가.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사람들은 한 번 죽지만 죽지 않은 모든 순간은 살아있는 것이니 죽음 역시 삶의 일부이며, 그것은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라고. 모든 시간을 1초 단위로 잘라서 넓은 평면위에 널어놓으면 죽음에 해당되는 순간은 티끌만큼 작으므로, 죽음 말고 활발하게 살아있는 상태를 생각한다면 삶이 허무하기만 한 건 아니라고. 빌리 필그림은 그렇게 시간의 축이 부재한 삶속에서 유영한다. 유영하는 수많은 조각의 삶 속에서 체념을 담은’ so it goes’는  비극을 비껴갈 수 없는 운명론적 체념을 담고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으로 다룰까.


뒤죽박죽이다. 저자의 페르소나인 화자는 이 책을 쓰는 시점에서 23년전에 전장에서 살아돌아왔을 때, 드레스덴 파괴에 관해서 쓰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믿을 수 없게 압도적인 사건이라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큰 돈을 손에 쥘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들이 장성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되풀이되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그는 쓸 말을 고르지 못했다. 마침내 출간된 책은 시간이 뒤죽박죽이고 거슬린다. 그는 출판인에게, 대학살이란 모두가 죽어야 하는 거고, 어떤 말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거고, 다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지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그래서, 뒤죽박죽이고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서사가 시간을 따르지 않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뒤죽박죽 섞이는 서술 방식은 대개 각 인물이 회상을 통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형태로 작품 전체에서 고정된 현재의 시간 시점이 있다. 이 작품은 나뉘어진 시간의 덩어리가 매우 짧고, 현재 시점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의식의 앞뒤로 다니는 기준 시간의 축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독자로서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긴 시간 배경은 1944년 2차대전에 참전해서 군모도 군화도 없이 총도 한 번 못들어보고 낙오되어 헤매다가 포로가 되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드레스덴으로 옮겨져 폭격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의 시간 배경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배열을 따라 조각조각 맞추어 연결한, 퍼즐 조각을 이어붙인 그림 덩어리의 일 뿐으로 기준점이 되는 시간이라 할 수 없다. 


들어보라 : 빌리 필그림은 시간에서 풀려났다. 빌리는 노망이 든 홀아비로 잠이 들었다가 결혼식 날 깨어났다. 1955년에 하나의 문으로 들어갔다가 1941년에 다른 문으로 나왔다. 그 문으로 다시 들어가니 1963년의 자신이 나왔다. 자신의 출생과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그 사이의 모든 사건과 무작위로 만난다. (p39)


시간에서 풀려났다는 표현은, 빌리가 시간이라는 단일 방향의 구속된 차원이 아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빌리 필그림은 누누히 강조한다.  지은탁과 도깨비는 문을 통과해서 캐나다와 메밀밭 등 이곳 저곳으로 임의의 공간과 임의의 시간을 여행하지만 누적되는 시간의 결과가 다른 시간이 된다늠 일반적인 규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도깨비가 판타지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3차원 세계에 살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인과 관계의 연속된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드라마에서 인연은 전생의 업으로 설명이 되며, 운명조차도 과거와 연결되는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이런 세계에서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변형된 형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세상에서 원인을 찾으면 결과를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비극은 원인을 제거하면 더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빌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르다.


빌리는 딸의 결혼식에 트라팔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에 납치되어 동물원에 전시된 상태로 몇년간 지나다가 돌아오는데, 그 때부터 그는 과거와 미래속을 유영하며 살아간다. 시간 여행을 다루는 많은 서사가 과거로 가서 그 과거의 행동을 바꿈으로써 과거의 미래인 현재를 바꾸어 다시 현재의 어떤 재앙을 피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타임 리프는 필연적으로 판타지물, 가능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공상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빌리가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현재라는 축이 없이 과거와 미래가 섞여 있으며, 어느 곳에 시점의 축을 고정시켜 놓고 과거로 간다 해도 그 과거를 변형시키지 않는다. 변형시킬 수 없다. 이미 완성된 그림의 이미지처럼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빌리의 생은 읽기 전용이다. 그는 트라팔머도어에서 외계인이 그를 시간이라는 굴레에서 풀어주었다고 믿는다. 소설은 이 믿음이 사실인지, 혹은 그가 비행기 사고로 뇌가 잘못되어 환각을 보는 것인지 논쟁할 여지를 남겨놓는다. 



트라팔마도어인은 우리가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 눈에 보듯 모든 시간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이 순간'이라는 호박에 갇혀있으며 여기에는 어떤 '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트라팔마도어인의 방식으로 시간이라는 족쇄가 풀린다면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왜'도 없으며 모든 것 사이의 관계는 부재한다. 시작도 끝도 원인도 결과도 없다. 커트 보니것이 이 책에서 드레스덴의 비극의 알레고리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반전(anti-war) 소설이라면 사실적인 묘사로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낱낱이 고발함으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기대하기 쉬운데, 작가는 그런 방식이 오히려 대학살의 본질을 흐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사실적인 묘사가 자극적 소재의 소비로 이어진 상업 영화들을 상기한다면 작가의 이 낯선 방식을 통한 대학살의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동의하게 된다. 특히 출간된 시기에는 베트남전에서 또다른 종류의 폭격이 수많은 도시를 불태우고 있었다. 오히려 전쟁을 극구 반대함으로써 그러한 현상과의 공존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절대로 맞설 수 없는 체념적 심경을 빌리라는 남자로 표현함으로써, 전쟁이 얼마나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인지, 되풀이되는 역사에 개인들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이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작품 전체의 알레고리와도 통한다. 


전쟁에서 빌리의 삶은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 적진 깊숙한 곳에서 낙오되어 힘겨운 생을 마감하고 싶어도, 후에 낙오병을 자신의 힘으로 구했다는 영웅담을 꿈꾸는 동료가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때리고 나무에 머리를 박고 흔들어 깨워 굴리고 들쳐매고 욕을 하며 질질 끌고 간다. 죽는 일조차 뜻대로 할 수 없다.  살려고 하는 노력, 살리고자 하는 노력, 인정받고자 복수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무관하게 모두가 곧 어마어마한 대 학살 앞에서 일시에 죽음을 맞게 되고, 거기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소수가 생기는 것과 상관없이 말이다. 안다고 바꿀 수 없고 살려낼 수도 없다. so it goes. 다 그런 거다. 원래 그런거다.  그로부터 미래의 어느 시점에 드레스덴을 기억하는 빌리가 똑같은 종류의 학살과 떼죽음을 베트남전에서 수수방관 목격하게 된 것을 보면 어떤 규모의 희생도 반복을 막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액자 맨 바깥쪽 프레임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소설 속의 작가는 빌리를 주인공으로 하고 드레스덴 폭격을 주제로 소설을 쓴다. 비극적 역사의 상업적 소비가 이루는 문학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조롱하듯 작가를 등장시킨다. 작가인 화자는 소설 내에서 주인공 빌리와 전장에서 종종 만나거나 눈에 띄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소설을 수십년동안 기획했고, 결국은 대박을 터뜨려 많은 돈을 번다. 자본의 생태계 내에서 역사적 비극이 문학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조롱인데, 그러한 문학에 대한 풍자와 조롱은 빌리가 만나는 SF 소설가와의 인연들을 통해서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문학이 역사와 만나는 아이러닉한 지점을 직접적으로 문학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빌리가 만나는 트라우트라는 소설가는 숱하게 많은 SF 소설을 써대지만 서점의 진열대 위에 장식용으로만 꽂혀있을 뿐 아무도 읽지 않고 심지어 서점 주인조차 그의 책을 사러 오는 사람을 믿지 않으며 오직 빌리와 정신 병동 병실에서 만난 로즈워터만이 읽는다. 책을 써서 먹고 살 수 없으므로 신문배달 아이들을 고용해 약탈적 방법으로 먹고 사는 모습, 그리고 그가 만난 소설가들이 이 시대에 소설은 이미 죽었네 묻었네 하는 소리들을 하는 장면 속에서 소설가들을 해학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액자 속 소설로 돌아가 보자. 2차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 시작되며 시간여행 속에서 주로 만나는 때는 2차대전과 베트남전의 기간이다. 현재와 과거, 혹은 현재와 미래의 두 축으로 구성된 시간 속에서 전쟁은 상반된 양상을 띤다. 젊은 날의 그는 혹독한 전장 속에서 총 한 번 못들어보고 낙오되어 죽어가지만, 드레스덴 폭격이라는 어마어마한 학살에서는 살아남았다. 반면 아들이 자원해서 나가 있는 베트남전 때에는 전쟁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 1967년 딸의 결혼식날 변기뚫는 도구처럼 생긴 트라팔마도어인에게 잡혀가 외계행성의 동물원에 갇혀 몇년을 있다가 되돌아오며, 그 몇년 동안의 시간은 지구에서 흐르지 않았다. 외계생물이 빌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자신들이 보는 방식인 4차원의 세계다. 그들의 세계에서 시간은 단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방식대로 본다면 사람이 죽는다 해도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순간은 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늘 존재할 것이다.(...) 모든 순간이 영원하다는 것을 봐서 알 수 있고, 그 가운데 관심이 있는 어떤 순간에도 시선을 돌릴 수 있다. (p43)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 다음에는 또다른 순간이 뒤따르고 그 순간이 흘러가면 그 순간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은 지구 사람들의 착각이라는 것이 이 외계행성에서 트라팔머도어인에게 배워 온 ‘진리’며 능력이다.  '트라팔머도어인은 주검을 볼 때 그냥 죽은 사람이 그 특정한 순간에 나쁜 상태에 처했으며, 그 사람이 다른 많은 순간에는 괜찮다고 생각한다(p44)'. 빌리 역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뒤죽박죽 오간다. 테드 창의 중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자, 외계인의 방식으로 세계를 볼 수 있게된다는 설정과 비슷하다. 빌리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여행한 후 지구인의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빌리가 보는 세계에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죽지 않은 다른 모든 순간에는 살아있다. 시간여행을 한 현재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과거에 살아있으므로 모든 순간은 영원하다. 


현재는 과거의 시간에 대한 결과가 아닌가. 그러니까 미래는 오로지 현재에 혹은 현재를 포함한 과거에 종속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렇듯 모든 순간이 존재하므로 영원하다는 트라팔머도어인들의 상상은 경이롭다. 삶이 유한하다는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명제에 수많은 가정의 세례들이 쏟아져서 생각도 하지 못한 풍부한 상상 속을 유영한다. 


외계행성에 다녀온 후 빌리는 ‘시간의 개념’을 배운다. 시간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시간을 묶은 1차원적 선에서 벗어나 과거와 미래의 모든 방향으로 가는 게 가능한 것을 말한다. 외계 행성에 다녀왔을 때가 1967년 딸의 결혼식이었으며 만일 그 때부터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그의 시간 여행은 현재에서 과거로 흐르게 된다. 하지만 그 스스로 밝히기를 처음으로 시간에서 풀려난 것은 1944년이다(p47). 그러므로 트랄파마도어인은 시간여행의 통찰을 제공했을 뿐이지, 애초부터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와 과거를 지칭할 기준이 될 현재 축이 1944년인 것도 같고, 1968년인 것도 같으며 또 그도저도 아닌 것 같이 모호하다. 


혹독한 겨울 적의 후방에서 낙오병이 되어 군모도 군화도 없이 동료에게 질질 끌려 가는 동안 그가 첫번째로 방문한 곳(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 외계행성에는 미래에 다녀오는데, 현재의 시점에서 이미 시간여행을 하는 것은 이미 미래에 과거의 시간 마저 자유롭게 놓아주었으므로 가능하다. 죽음 이후 다녀간 곳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붉은 빛과 거품이 보글거리는 소리(p63)'가 나던 곳, 아버지가 아이에게 수영을 가르치겠다며 던져버린 수영장 밑바닥이라는 드레스덴 폭격 이전의 과거에서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늙은 건지를 묻는 노모를 만나는 양로원의  1965년의 미래, 파티에서 만난 여인과 세탁소에서 정사를 벌이다 발각되는 또 1961년의 미래로 다양하다. 떠났던 시간으로 돌아온 그는 독일군 방어선 뒤편에서 잠든 채, 그를 흔들어 깨우는 동료에게 끌려가며 계속해서 1967년 얹어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환각 사이를 맴돈다.  


화자가 기술하는 빌리의 인생은 인생을 사는 건지 기록된 인생을 읽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다. 비행기 추락으로 자신을 제외한 승객 전원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비행기에 오른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전쟁과 전쟁의 명분이 행한 무참한 학살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삶이 종속된다. 전쟁의 무수한 명목 앞에서 개인의 삶은 한없이 무력하다. 비극이 일어났던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예정된 비극 앞에서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무력한 한 명일 뿐이다. 전쟁 앞에서 무력한 인간은 제 삶에 개입할 기회가 없다. 그걸 아는 개인은 자국의 북베트남 무차별적 폭격에 항의할 마음도 없이  무심하게 점심을 먹는다. 세상에는 한 개인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1967년도에 검안사였던 빌리의 사무실에 걸려있는 기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빌리의 삶은 현재도, 미래도, 과거도 바꿀 수 없는 것, 고정되어 있는 이미지다. ‘다 그런거지 뭐’는 바꿀 수 없는 비극을 맞는 체념적 상태를 그 거대 비극을 대하는 역사적 사건의 크기 만큼이나 자주, 하지만 역설적으로 경쾌하게 반복한다. 다 그런거지 뭐. so it goes.


빌리는 소설 내 소설 속 주변 인물들에 의해, 망령이 들어 의식의 경계에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인식되며, 그런 맥락에서 그의 시간여행은 정신착란으로 설명될 수 있지는 않을까. 더욱이 그는 비행기에서 추락한 후에 라디오 쇼에서 트라팔마도어 행성에 다녀온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에 딸과 주변인들은 그가 추락 외상으로 인한 뇌수술 후유증이라고 믿는다. 물론 소설 속의 소설가가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남득시키는 것은 아니다. 전쟁을 포함해서 유난히 위기를 많이 겪은 빌리가 의식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면서 수많은 꿈을 꾸고 환각을 보는 것도 사실이지만, 작가는 환각을 비롯한 꿈과 진실을 분명하게 분리한다. 


"이틀간 의식을 잃었고 수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진실이었다. 진실한 것들은 시간여행이었다 (p167)


소설 내에서 인용된 바에 의하면 영.미 폭격기가 1945년 봄 드레스덴 공격에서 살상한 인명은 13만 5천명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은 71,379명을, 고성능 소이탄을 이용한 도쿄 공중전으로 죽인 인원은 83,793명을 죽였다. 역사는 이 사람들을 죽여야 했을 이유는 죽은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전쟁을 끝내야 했으므로, 역사는 이러한 파괴를 승리자의 필연적 선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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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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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이 흩어진다. 거리의 이름, 사람들의 이름, 도시의 이름. 기억에 천착하는 소설가 패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에 무수히도 많은 이름들이 봄날 벗꽃잎처럼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름들을 만나지만  몇몇 특별한 이름들을 제외하고 그 이름들은 상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인생의 어느 순간 함께 했던 어떤 장소, 어떤 거리, 어떤 얼굴들이 퇴적되는 시간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얼마나 묻혀 버렸던가. 그래서 갑자기 떠오른 오래된 사건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기억나?’ 라고 묻는다. 그 통상의 질문 속에서 기대하는 긍정형 대답은 크지 않다. 나는 기억하지만 너는 기억할 지 모르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우리 인생을 다가왔지만 또 그렇게 멀어져갔고 어떤 사실, 어떤 시간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잊혀졌다.


다라간에게 갑자기 나타난 남녀 질 오톨리니와 샹탈은 다라간이 떨어뜨린 수첩을 주었다며 다라간에게 접근한다. 다라간에게 잃어버린 수첩은 잊어버린 기억이며, 찾고 싶지 않은 수첩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다. 하지만 오톨리니는 그 수첩 주소록 속에 기록된 한 남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 홀로  몇 달째 아무도 만나지 않은 그를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다라간의 기억을 쥐어 짜서 수십년도 전에 무심코 수첩에 적었을 한 남자 기 토르스텔에 대해 알아내고 싶은 것이다.  다라간의 눈에 남자는 의뭉스럽고, 동행했던 여자 샹탈은 혼란스럽다. 오톨리니의 남자친구 샹탈은 남자의 부재 중 홀로 다라간을 찾아와 오톨리니가 모아온 자료를 복사해 주는 등 정보를 제공하고 그를 위해  협조할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방문이 거듭될 수록 샹탈은 오히려 질 오톨리니에 대한 석연찮은 사실들을 얘기하며 남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다라간은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지 혹은 그와 한패로 짜고 치는 것인지 확신하지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여자의 무례한 부탁은 뿌리치지 못하고 그녀의 계획에 끌려가는 듯하다.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은밀히 다라간에게 접근해서 목적을 이루려는 건가 싶었는데, 곧 그녀가 하는 말 중 얼마간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고 그녀가 사용하는 샹탈이라는 이름 역시 본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야기가 흐를 수록 수첩 속 인물을 찾는 두 사람의 목적은 본질에서 멀어지고, 이야기는 더욱 알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의문스러운 기억 조각을 따라 부유한다. 


다라간은 이미 소설가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로, 대인기피증이 있는 것처럼 몇달 째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낸다.  작품은 두 사기꾼이 유명인에게 접근하여 그가 연루된 어떤 사건을 파헤치는 것처럼 전개되지만, 이야기가 진전될 수록 비밀은 점점 더 묻히는 느낌이 들고,  좀처럼 이야기는 앞을 향해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샹탈이 복사해 준 자료 속에는 마치 이름 속에 묻힌 어떤 과거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듯 묻혀있다. 이름과 이름 사이에서 아득히 먼 시간 저편 깨알같이 작은 디테일들이 떠오르고, 그녀가 준 자신의 첫번째 소설의 일부 페이지에 잠시 아무 의미 없는 이름으로서만 등장하는 '기 토르스텔'은 기어이 어떤 날의 다른 기억을 부른다.


어떤 지점에서도 그 남녀가 누구인지 왜 그를 혹은 기 코르스텔을 쫓는지 밝히지 않는다. 이들이 왜 그를 괴롭히는지 그것이 괴롭히는 것인지 혹은 기 토르스텔을 어떤 목적으로 추적하고 있는지 분명치 않다. 기억이 찾아가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끝날 때까지 모호하다. 오톨리니는 샹탈을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등장한 듯이 보이고, 샹탈은 다시 다라간 자신이 쓴 과거의 소설과의 조우를 위해 등장한 듯이 보인다. 즉 그들의 등장은 단지 다라간의 어떤 기억을 환기시킬 목적일 뿐이다. 그들은 단지 그가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을 통해 과거의 어느 가을날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이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다는 듯이 무대에서 사라진다.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 역시 다라간에게 기억의 미끄럼틀 위에서 손을 잡아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는 샹탈이라는 여자의 이름에서 자신이 청춘 시절 함께 있곤 했던 동명의 여자를 떠올린다. 과거의 샹탈과 현재의 샹탈은 유사점이 있는데 하나는 과거의 샹탈이 주말이면 도박하러 다니는 남자친구를 두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들의 파트너가 없는 사이에 어떤 목적으로든 다라간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샹탈의 남자친구가 도박하러 갔던 장소와 질 오톨리니가 간 곳은 공교롭게도 같은 곳이다. 그는 젊은 시절 폴이 샹탈을 떠났을 때마다 그 과거의 샹탈과 자신이 함께 시간을 보냈음을 떠올린다. 대인기피증에 가까운 다라간이지만,  좋았던 기억의 사람과 이름을 공유하는 때문인지, 의뭉스럽고 다소 위험한 현재의 샹탈에게도 좋은 감정을 갖는데, 이러한 다라간의 심리는 독자에게 의문의 조각이다. 


하지만 샹탈과 오톨리니가 밀어넣고 떠난 기억의 미끄럼틀은 직선 코스가 아니라 나선형이다. 최종 목적지는 최초의 방기가 시작된 곳,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리움과 따뜻함의 또다른 이름인 어머니와 버려진 어린 시절들의 분절된 기억이다. 다라간에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죽은 것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닌 채로 방치해, 이 사람 저사람의 손에 맡겼졌던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기 토르스텔이 그의 어머니라고 기억했던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아나 아스트랑이라는 여성이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잠시 돌보아주었던 보호자였음이 뒤엉킨 기억의 한자락 끝에서 드러나게 된 것은 최초 샹탈이라는 여성을 통해 튀어 오른 오래된 샹탈에 대한 기억이 트랑블레 경마장을 다녀오는 차 속의 장면을 환기시킴으로서 시작된다. 기억의 여로를 따라, 그들이 그토록 찾던 ‘기 토르스텔’이라는 사람이 샹탈-폴 커플과 함께 트랑블레에서 돌아오는 길 자동차를 운전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가 그 커플을 내려준 후 조수석에 있던 다라간에게 자신은 한 번도 함께 시간을 보낸 적 없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던 것을 떠올리면서, 꽉 막혀 흐르지 않던 서사가 다시금 과거를 찾는 희미한 여정 속에서 계속되는데, 어느 국경의 도시에서 유기된 어린 아이가 거기에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아나 아스트랑이라는 여인을 찾던 그의 청춘시절의 어느 가을날을 찾아 가서, 그 시절에 자신이 쫓던 아나 아스트랑, 그 과거에 자신이 떠올렸던 더 깊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이중 삼중의 중첩된 기억의 구조를 갖는다. 


다시 말해, 시간의 시점은 6세 정도의 아주 어린 과거, 그 후로부터 15년이 흐른 후의 어느 가을날이라는 과거, 그리고 현재 이렇게 세 개로 분절되어 있으며, 그 기억으로 미끄러져 가는 과정 속에서 처음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지명과 인명들은 그 시간 여행을 더듬는 지팡이에 불과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채로 몇달 동안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으며 홀로 살아가던 그에게, 현재라는 시간 또한 그를 과거 혹은 미래로부터 고립시킨다. 인과 관계 속에서 현재란 누적된 과거들이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를 품지 못하고 덩그러니 섬같이 격리된 현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어 유일한 모성애를 찾을 수 있는 아나 아스트랑이 연결된 것은 결국 다른 형태의 방조와 유기였음이 드러나는 기억보다는 망각이 쉬운 선택이었으리라. 


<지평>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두 편의 패트릭 모디아노 작품을 읽었는데, 전작들이 꽤 오래전에 쓰여진 것에 비해 이 소설은 노벨상을 받던 해에 쓰여진 비교적 최근작이다. 그 전에 읽은 두 편의 소설이 과거의 시간, 잊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기억이라는 주제의 깊이를 더욱 입체적이고 깊이있게 다루고자 했던 것 같다. 여기서 모디아노가, 혹은 다라간이 찾는 것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며 과거의 어떤 날 그가 찾던 과거 혹은 과거에 잊혀졌어야 했던 더 깊은 과거이다. 


삼중의 시점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청춘 시절의 자신, 한 때 어린 자신을 보살피고 또 방기했던 어머니로서의 혹은 연인으로서의 아나 아스트랑의 행방을 찾던 청춘의 모습, 그리고 어린 시절 아나 아스트랑과 함께 이사를 다니고 학교에 입학하고 했던 기억을 찾고자 어떤 이름 붙여진 거리들을 찾아 다니던 청춘 시절의 자신과 현재와의 설명할 수 없는 거리다. 청춘 이후 35년여간 어떻게 그 중요했던 이름들을 모두 잊어 자료 속의 검은 글씨일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들이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 설명도 없다. 현재의 그 아득한 고립적 상태는 오히려 다라간의 인생 혹은 파트릭 노디아노의 인생의 어떤 미세한 부분 혹은 전체일지도 모를 어떤 것을 장황한 삶의 이야기 서서가 말해줄 수 없는 깊이에서 설명한다. 


그에게 청춘 시절은 아마도 아나 아스트랑을 쫓던 날들로 채워져 있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결핍의 상징이 되었지만, 방기하고 내버려둔 어머니 대신 어떤 기억 속에서 어린 소년이 의지했을 대상은 아나 아스트랑이었다. 그의 청춘 어느 가을날 그 사무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 혹은 알 수 없는 감정은 그녀에게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쓰게 만든다.


"다라간은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인물이 일단 거울을 통과하듯 소설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오고 나면 영원히 저자의 수중에서 벗어나고 마는 것을. 실제의 삶에는 존재한적 없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사람들에 의해 무로 환원되고 마는 것을. (p78)"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씀으로서 그녀를 영원히 소멸시키는 선택 대신 그녀와 자신만이 공유했을 어떤 순간을 묘사한다. 국경을 넘기 위해 위조 여권용 즉석 사진을 함께 찍는 장면이 그것이다. 둘이 했던 대화, 미세한 행동, 번쩍이는 플래쉬에 눈을 감아버려 다시 찍던 일 등 둘만 알 수 있는, 소설의 나머지와 어울리지 않는 소설 속 '남몰래 삽입한 현실의 한 조각'은 아나 아스트랑을 그에게 닿게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청춘 시절의 그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가 그 흩러진 이름들 속에서 아나 아스트랑의 이름조차 단번에 붙잡아 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잊고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어린 시절의 그는 절대로 혼자서 방치되면 안되는 나이의 어린 그는 그렇게 낯선 국경지대의 한 호텔 방에 홀로 남겨져 버려지면서 언젠가 그녀를 그런 방식으로 다시 만날 거라고 그리고 또다시 영원할 것처럼 잊혀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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