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인간과의 구별이 어려운 인간 기계가 나타나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을 위협하게 된다면? 작가가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질문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이 인간인가, 무엇이 현실인가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과 소설이 결합하면 뭔가 디저트처럼 달콤하고 포근한 걸 기대하기 쉽다. 이승우 작가가 썼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사랑, 그게 대체 뭔데, 진짜 정체가 뭔지 한번 들여다보자, 며 덤벼들어 낱낱이 해부하고,  재단하고, 사랑과 싸우고 그러는 과정 중에서 사랑이 뭔지,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던 것과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성찰한다.


사랑과 사랑이라는 두 글자 말은,  참으로 복잡하고 많은 감정과 행동을 담는다. 가장 흔하게 쓰인 말, 널리고 널린 게 사랑이지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 객관적 실체를 모른다. 사랑에 사실 객관적 실체라는 것이 있는 건지 혹은 찾는다고 찾아질 수  있기나 한 건지도 알 수 없다.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 폭력도 사랑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미움도 사랑의 한 형태일 수 있다고 간주되는 걸 상기한다면, 남녀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의 그 진실한 의미는 복잡 미묘하고 말로 혹은 글로 표현하기 가장 어려운 개념일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사랑을 하나의 생명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그 생명은 주어가 되고 주체가 된다.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덮치는 것이다. 사랑이 사람에게 기생하기 시작하여 사랑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짧던 길던 그 자신의 생애를 모두 끝마친 후에야 그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작가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고, 큰 공감을 만들었다.


사랑과 사람의 관계가 역방향으로 서술되는 것처럼 소설의 형식 역시 서사와 철학이 역방향이다. 이야기 속에서 사랑의 철학적 이해와 해석이 동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탐구와 관념적 사유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랑은 세 사람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찾아와 각기 다른 개인의 삶에 큰 충격을 만들며 기생을 시작하는데 그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사랑은 하나의 이야기로 모여진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사랑의 또다른 모습을 실천하고 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사랑이 사랑이라고 말해졌을 때, 사랑은 사랑을 발화시키거나 혹은 잠재된 사랑의 불씨를 영원히 꺼뜨리기도 한다. 누가 봐도 커플이라 생각되는 두 사람에게 진정한 양방향의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은 사랑이라는 말이 발화되는 시점이다. 하지만 거기엔 위험이 뒤따른다. 한 사람에게서 발화되는 사랑이 반대쪽 사람이 꺼뜨리면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이전의 관계로 돌이킬 수 없다. 엎질러진 물을 주어 담을 수는 없다.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일단 한 번 알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사람을 사랑하던지, 그 사람과의 이제까지의 친밀했던 관계마저 단절하던지. 겉보기에 쿨한 관계로 되돌아갈 수는 있겠지만,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무참히 깨졌다는 자괴감은 관계의 균형이 깨뜨릴 것이다.


사랑이라는 놈은 자기가 기생해서 살게 되는 숙주의 품위와 위엄, 그리고 편리함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둘이 만났는데 동시에  같이 좋아하고 함께 행복하게 살면 세상이 얼마나 편하겠으며, 문학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엇갈린 사랑은 2년 전에 나를 사랑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향한 사랑이 아직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남거나 혹은 불씨를 되살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의 오만과 이제 그를 향한 사랑을 완전히 몰아냈으니 그가 제안한 야식 만남을 부담없이 여기는 사람 간의 비껴간 사랑이 조소를 보내고 있을 때, 사랑의 크기가 너무 커서 활활 타오르고 남는 에너지가 엄청난 크기의 불안과 질투를 유발한 그녀 남자친구와 만나는 순간에 절정을 이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기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대체로 엄마라는 말을 가장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맘마 응가 등과 함께 아빠를 배운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아기 때 성립된 그 따스한 보호자와 위안적 존재인 아빠-딸의 관계에서 평생동안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대체로 그렇지 않다.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오는 나이를 시점으로 해서 대개 아빠라 부르는 걸 멈춘다. 아빠가 아버지가 되면 아기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어르고 달래고 받아주는 아빠로서의 역할은 끝나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가부장적 권위가 전면에 부상한다. 기성 세대의 아버지들은 어쩌다 보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그에 따른 (별로 알아주지 않는) 권위로 인해 가족의 유대에서 스스로 소외시키는 역설적 위치에 선다. 이 가여운 아버지들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틀을 깨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가장의 위치와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는 가정에서의 남자의 위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지 못한 채 자주 길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유리된다.

아빠가 아버지가 되면 아버지는 고독해지고 아들은 독립적이 되어간다. 아버지의 모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한다. 극복은 쉽지 않다. 오이디푸스도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했다. 예언을 피해, 자신의 왕국조차 포기하고 떠돌던 오이디푸스가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야 말았던 이유. 그것은 동서양을 떠나 아들에게 아버지는 분리될 수도 극복될 수도 있는 대상이 아니고, 그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 시대의 아버지들

망국과 해방과 전쟁과 독재를 경험했던 아버지들은 ‘공회전하는’ 역사 속에서 온 몸을 갈았다. 살아남기 위해, 가족의 밥벌이를 위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무거운 역사의 하중을 견디고 또 견디며 자신의 씨를 뿌렸고, 견고한 고독 속에서 사회의 얹어리에서  천천히 스러저갔다.  김훈 작가는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실린 <광야를 달리는 말>에서  ‘술주정뱅이에다 돈은 안 벌어오고 집에도 안 들어오는’ 아버지가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던 말을 기억하며 이렇게 회상한다.


말을 달릴 선구자의 광야가 이미 없다는 것은 나는 좀더 자라서 알았다. 아버지는 광야를 달린 것이 아니고, 달릴 곳이 없는 시대의 황무지를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 광야를 달리는 말(라면을 끓이며) 에서

작가는 여러 매체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쓰고 있다고, 썼다가 지웠다고,  혹은 쓰다가 못썼다고 전했다. 작가가 말하는 아버지는 비단 김훈 작가의 아버지로서만이 아니라, 시대의 얹어리를 살다 간 수많은 당대의 아버지들, 시대와 부딪치고 시대에 저항하며 그 몸서리치게 반복되는 시대의 황무지를 좌충우돌 하면서 몸을 갈던 시대의 아버지들이다. 몇 안남은 김훈 작가 세대의 아버지들인 몇 안남은 그들은 지금 몇 줌 안남은 마지막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내 쉬며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언뜻 언뜻 소설 속에 내비치지만, 작가의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더 많은 아버지들이 작품 내에 녹아 있다.

작가 스스로 작품을 초라하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작품이 긴 호흡을 가진 서사를 만드는 대신 작은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인 듯 싶다.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생의 긴 인생 행로를 종으로 비추지 못하고 그들의 옆구리를 이곳 저곳에서 찔러 단면만을 보여주다가 말아 버린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은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거나, 아버지와 타협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와 화해하지 못한채 서로 분리되지도 유리되지도 못한 채 서로의 삶의 얹어리들을 스친다.

죽음의 시간들

죽음을 직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문학적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작가의 위대함을 본다. 소설은 아버지가 죽어가는 시간에서 시작한다. 아버지 마동수는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전방에서 휴가나온 아들은 가정을 지키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둘 사이를 흐르는 불편한 기운을 느낀다. 죽음 직전의 무력과 아들을 향한 어쩔 수 없는 미안함을 본다. 그리고 죽음과 삶 사이를 오가는 의식의 흐름을 그토록 아름답게, 김훈다운 언어로 표현하였다.


시간은 마동수의 생명과는 무관하게, 먼 변방으로 몰려가고 있었는데, 마동수의 육신은 그 시간의 썰물에 실려서 수평선 너머로 끌려가고 있었다. 마동수의 마지막 의식은 죽음이 이끄는 썰물에 실려서 먼 수평선 너머로 흘러갔다가 다시 밀물에 얹혀서 이승의 해안으로 떠밀려 오기를 세 번 거듭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에 혼백이 먼저 육신을 떠나서 멀어졌고 다시 몸속으로 돌아왔다.

물이랑 너머에서 죽음의 세상은 펼쳐져 있었다. 생명의 맨 끝자락에서 모든 감각이 바스러졌고, 그 자리에서 죽음의 세계에서만 작동되는 낯선 감각이 돋아났다. 그것은 청각도 시각도 아니었지만 그 감각으로 마동수는 물이랑 너머의 세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시간은 발생 이전의 습기로 엉겨 있었고 진행의 방향이 정립되지 않은 채 안개로 풀어져서 허공에 밀려다녔다. 그 뿌연 시간의 안개가 갈라지는 틈새로 물이랑 저편의 세상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풍경은 오직 적막했다. 거기에서 죽은 자들은 끝없는 벌판을 제가끔 건너가게 되어 있어서, 서로 만날 일이 없었다. 바람이 불어서 안개의 틈새가 메워지고, 마동수는 다시 이부자리 위로 떠밀려 왔다. 그때 마동수는 얼핏 혼수에서 벗어났다. 천장의 도배지 무늬가 마동수의 의식을 잠깐 붙들어주었다. 그 도배지는 저승의 무늬로 보였다.

내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그 분들의 의식의 바닥은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속을 있을까가  하염없이 궁금하고 슬펐었다.

아버지의 아들

아버지의 롤모델이 없는 아들은 아버지를 인생에서 끊어내는 것만이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고, 인생을 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버지를 피해, 가족을 떠나 살아가는 아들의 인생은 아버지의 것과 그닥 달라보이지 않는다. 배경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삶. 가족을 떠나 베트남에 참전하고 괌에서 성공적인 비지니스를 하는 듯 보이는 큰아들 마장세는 아버지를 극복하려다가 스스로 아버지가 된다.

가난으로부터 구제되지 못한 두번째 아들 마차세는 스스로 사랑으로 일군 가정에서, 아버지를 극복하는 듯하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추운 전방에서 휴가를 받았던 동생은 형 없이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치매 어머니의 요양원 비용을 댄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그에게 일자리가 주어질 리 만무여서, 결혼 후 오랜 실직과 오토바이 배달을 하기도 하는 등 위태롭고 고단한 시간이지만 그에게는 따스한 그의 아내 박상희가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족과의 끈을 잡으려는 박상희의 노력은 실질적으로 형과 동생 사이의 어떤 관계의 개선을 이루어낸 것은 아니지만, 결국 가족이라는 정신적 덫과 마음의 짐에서 벗어나고 자유롭게 하는 데 기여했을 거라는 생각이다. 즉 가족을 끌어안고자 하는 박상희의 정신이 가족을 극복하도록, 현실을 살아내도록, 주저 앉거나 밀려나지 않고 그대로 현실 속에 버티고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을 거라고 나름대로 해석해본다.

아버지가 남긴 모든 정신적 유전자적 유산을 끊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자신만의 인생, 자신만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일은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결혼을 하는 이유는, 세대와 세대를 흐르며 끊임없이 유전자들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서로와 서로에게 거울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변화하도록, 세계가 늘 새로와 지도록 하는 이유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렉산드로 마르초가 쓴 맛의 천재와 주제와 글의 성격이 유사하다. 다른 점은, 마초니의 책이 이탈리아 요리를 대상이고, <음식의 언어>는 식문화를 포함한 전세계 요리가 그 대상이다. 케찹이나 피쉬앤 칩스 같이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음식의 언어학적 기원을 찾는다. 음식이 음식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그 음식을 지칭하는 말과 함께 변화하는 진화적 흐름에 무게를 두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작가는 대학에서 The Language of food 라는 책 원제와 동일한 과목을 가르치는 유일한 교수이다.  작가의 동일 제목의 블로그에도 내용이 일부 공개되어 있다. 언어라는 말이 시간이 지나고 공간이 확장되면서 새로운 문화와 융합되어 변하는데, 음식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음식과 언어의 변화와 흐름을 역사와 공간적 맥락에서 쫓는다. 어떤 한 언어 혹은 단어라는 것의 기원을 생각하면, 생명체가 어느날 갑자기 완성된 형태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최초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진화 상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생명의 진화가 화석과 같은 물리적인 자취와 화학 법칙에 기반한 증거들을 남기는 데 비해 글자 이전의 언어는 추적하기 거의 불가능하므로 상상력의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저자가 말하는 음식의 언어란 이런 거다. 첫째는 음식 자체에 대해 우리가 소리내어 발음하는 발화 언어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케찹’은 케찹이다. 아마도 케찹이라고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와 입에 감도는 맛의 느낌은 전세계적으로 동일하게, 빨간색의 끈적끈적하고 묽으며 새콤달콤한, 대표 브랜드 병에 담겨져 있거나 하며, 프랜치 프라이 같은 기름진 음식에 뿌려진 것 등일 것이다. 이 케찹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푸첸성과 광동성에서 염장생선으로 만든 생선 젖갈에서 비롯된 음식이라고 한다. 생선 소스를 뜻하는 이 음식이 세대와 세대를 지나 계속해서 유라시아 전역과 신대륙으로 퍼져나가면서 말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조리법은 더 많이 변해 여러가지 재료가 들어가고 나중에는 주재료였던 생선이 빠지고 토마토가 들어가면서 케찹은 토마토 케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잘 모르더라도 앙뜨레(Entree)라는 말이 코스 요리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짐작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짐작과는 달리 북미에서 앙뜨레가 고기가 나오는 무거운 메인 요리에 해당한다. 반면 영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프랑스 요리에서는 짐작과 같이, 앙뜨레가 에피타이저의 역할을 한다. 저자의 친구인 한 프랑스인은 미국인들이 앙뜨레의 뜻도 모르고, 코스 요리에서 엉뚱하게 사용해서 헷갈리게 한다고 투덜거리는데, 따지고 보니, 이 당뜨레가 언어의 문법이 시대와 공간을 흐르며 계속 변화하면서 북미와 그 이외의 지역에서 다르게 굳어진 것이었다.


문화의 전파는 오랫동안 시간과 공간을 타고 전이되는 것이므로 당연하게도 변하는 법이고, 따라서 프랑스어 앙뜨레(Entree)가 영어의 엔터런스(Enterance)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틀렸다'는 건 아니라는 거다. 언어와 요리 문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어떤 단면을 잘라 보면, 식문화에서 앙뜨레라는 말이 현재 미국에서 사용하고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었고, 또 반대의 때가 있었다. 14~16 세기에 프랑스에서 코스요리는 앙뜨레->스프->로스트->마지막코스로 분명 시작 요리를 뜻했다. 하지만 그 시작이란 게, 지금 처럼 스프가 아니라 소스를 뿌린 육류요리, 파이, 페이스트리 등이었는데, 이후 100년 동안 스프부터 먼저 먹는 방향으로 바뀌어 17세기에는 스프 다음 앙뜨레가 나왔고, 로스트 코스와는 구별되었다. 이후 18세기에는 두 코스로 나뉘어져 식탁 가득 모든 요리가 차려져 나왔는데 주된 요리는 가운데에 놓고 앙트레는 여기저기 흩어져 놓였다. 사소한 요리라는 의미의 오르되브르는 식탁 가장자리에 놓였다. 현재와 같이 손님들에게 개별접시에 담아 하나씩 서빙하는 방식은 19세기 러시아에서 시작되었고, 이 방식을 전파받은 프랑스는 식탁 가장자리에 놓여있던 오르되브르를 스프보다 먼저 내왔고, 이후 스프-생선-앙트레-휴식-로스트-다른코스-디저트 등으로 이어졌다.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영국,프랑스, 미국 모두 앙트레는 스프와 생선요리가 끝나고 서빙되는 알찬 육류 코스라는 의미를 유지했는데 미국의 경우, 생선 및 로스트 코스 등 여러 단계의 코스요리가 앙트레와 합쳐지면서 앙트레는 점차 메인요리가 되어갔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1921년까지도 앙트레가 고전적인 메뉴의 중심인 육류 요리였는데, 1930년대에 단어의 의미가 변하여 달걀이나 해산물로 요리한 가벼운 요리가 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



저자는 발화되는 언어 혹은 음식의 이름 너머에 있는 더 포괄적 범위의 식문화 자체의 문법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흥미로왔는데, 상대적으로 다루는 양은 적었다. 서구에서 모든 코스 요리의 끝에 반드시 디저트를 먹는 경우처럼, 식문화는 단순하게 한 두 가지 특성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각 문화에서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종합적 규모의 문법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인데, 영어의 경우 형용사가 명사 앞에, 목적어가 동사 뒤에 오도록 하는 등의 암묵적 규칙으로, 하나의 문법은 언어적 부분들이 어떻게 언어적 전체를 구축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처럼 식문화에도 그러한 암묵적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요리가 재료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특정 맛의 조합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필요한 조리 기술은 어떠한 것이지 등에 관한 종합적인 규칙이 전체 식문화를 말해준다는 것인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코스요리의 순서, 베이킹과 오븐 화덕 등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요리 시설 뿐만 아니라, 전분음식과 비전분음식과의 조화, 단,신,짠,맵 등의 맛의 조화에 관련된 규칙등이 그것이다.



음식이나 식문화와 관련하여 짧고 압축된 언어가 담고 있는 힘은 수세기동안 이어져내려온 식문화의 역사다. 고추장 이라고 발음하면 단순히 비빔밥 위에 올려진 빨간색 덩어리가 생각나지만, 그 속에는 콩이 자라 열매 맺고 고추가 익어 마르고 빻이고, 이들이 찹쌀과 만나 섞이고 오랜 시간 항아리 속에서 미생물과 함께 화학적 변화를 겪는 길고 긴 시간동안의 과정이 있고, 숙성되는 그 긴 시간과 만드는 사람의 노고까지도 고추장 이라는 이름은 담아내고 있다(인스턴트 고추장은 제외). 음식 뿐만 아니라 사물 혹은 어떤 개념의 이름에는 장구한 인류 문화사가 녹아 있다. 테드 창은 이름이라는 것은 우리가 게임을 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닉네임을 만들어내듯 소모되어 사라지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그 이름 자체에 에너지와 힘을 갖는다는 상상을 했다. 그는 이런 개념을 계속 확장하여 <일흔 두 글자>라는 단편에서 이름과 사물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유사 생명이 실존하는 사회를 그렸다.



‘이름이 물체에 신성한 힘을 부여한다. ‘물질적 우주와는 별도의 어휘적 우주가 존재하며’

‘어떤 물체와 그에 조응하는 이름을 결합하면 잠재된 힘이 발현한다.’

-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일흔 두 글자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덕의 불운 열린책들 세계문학 159
싸드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디즘이라는 말의 어원이 이 책의 작가 사드(Sade, Marquis de)에서 온 것이라 한다. 얻어맞으니 슬퍼져서 그렇게 불르는 줄 알았다는. 사디즘을 만든 사드는 채찍을 휘둘러 두 파트너 간의 주종 관계를 규정하고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의식을 통해 더욱 더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인간의 성적 욕망과 그 실험을 통해 새로운 성문화를 개척한 선구자라고 평가받는 지도 모른다. 결국, 소설을 통해 19세기 20세기 그리고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성 풍속도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그 이름은 인터넷 주소 란에 스펠링 한 번 잘못 쓰면 불쑥 불쑥 뜨는 음란 사이트에서도 성업중이시다.


하지만 사디즘의 원조격 되는 소설이라고 해서 인터넷에 뜨는 화면 이상의 자극을 원하는 독자는 기대를 버리는 것이 좋다. 생각해 보라. 이 때는 18세기 프랑스였고, 우리나라에서 불과 일이십년 전에도 그랬듯이 여성에게는 순결이라는 이상한 가치관을 미덕으로 가르치던 사회였다. 따라서 혼전 성애에는 파괴와 죄책감이라는 심리적 감수성이 성적 자극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세밀하지 않은 안개처럼 가리워진 행위에서도 충분히 만족스런 새로운 성적 생활로의 가이드라인을 받았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뿌연 안개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마치 대부분의 성애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된 야동을 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나는 이러한 안개 기법이 18세기에 적나라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은 보지 않는다. 쥐스띤느가 겪은 불운은 참혹하고 참담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수녀원에서 곱게 자라던 두 자매 쥘리에뜨와 쥐스띤느는 어느날 부모의 파산과 파멸로 인해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고, 언니와 동생은 서로 정 반대의 길을 걷고자 헤어진다. 종교와 선의 미덕을 배우며 오로지 신의 뜻에 따라 시대가 ‘미덕’이라 칭송하는 대로만 살고자 했던 쥐스띤느는 시대가 요구하는 미덕을 실행하면 할 수록 점점 더 혹독한 현실 속에 내팽개친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하거나 그녀를 갈취하고 약탈하고 범죄에 가담케 하지만, 그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가치에 굴복하지 않고 선행을 쫓음으로써 번번히 더욱 더 인생은 말할 수 없이 짓밟히고 유린된다.


두 자매 중 타고난 아름다움과 음모를 이용하여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은밀하게 남의 재산을 가로채고 살인을 비롯한 여러 범행으로 로르상주 백작부인이 된 쥘리에뜨는 이제 우아하게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데, 우연히 여인숙에서 살인, 절도, 방화죄로 기소되어 경찰 몇 명에게 호송되어 가는 가련한 여인을 발견하고 그 사연을 듣게 된다. 후에 쥐스띤느로 밝혀지는 소피가 겪는 가혹한 현실은 처음 수녀원 기숙사를 나와서부터가 혹독하기만 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쁘고 어린 소녀에게 던지는 추악한 욕망의 손길은 변함이 없다. 그녀가 믿는 종교와 사회적 관습에 의해 선과 악의 구별이 뚜렷한 쥐스띤느는 몸을 파는 일은 마다하고 처녀성을 지키며 선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라지만, 성적 방어는  지키고자 할 수록 더욱 더 유린되고, 선을 행하고자 할 수록 더욱 흉악하고 참혹한 악의 피해자가 되어간다.


줄거리를 길게 쓸 작정이 아니었는데, 선을 행하려고 할 수록 더욱 큰 시련 속으로 빠져드는 쥐스띤느의 운명을 이야기하다보니 말할 수 없게 길어졌다. 그래더 줄거리는 뒤로 뺀다. (이미 썼으니 아까우므로 살려둠)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주의를 이끄는데, 하나는 이렇게 선을 행하면 행할 수록 불운으로 되돌아오고, 악행으로 큰 돈과 명예를 얻은 사람에게는 그 권력으로 다시 선을 행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그 아이러니를 반복 설정함으로써 우화적으로 우리가 가진 선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했던 점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성폭력에 대한 시각이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쥐스띤느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은 대개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축약되는데, 이것이 사디즘이라는 성애의 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점은 여성의 역사 혹은 성의 역사에서 여러 논쟁거리를 시사한다. (내가 생각하기로) 사디즘은 두 사람의 동의에 의해 성적 쾌락을 위해 동의된 만큼의 제한 내에서 신체에 가해지는 자극 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쥐스띤느의 경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한 번도 자신 스스로를 그러한 폭력에 의해 쾌감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한 번도 자신이 동의하에 폭력이 가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성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장애가 있다고 밖에 보아지지 않는 범죄자들의 엄청나게 잔혹한 범죄일 뿐이다.


오 하늘이시여 ! 미덕에 입각한 행위가 제 가슴에서 우러나오면, 즉시 고통이 그 뒤를 따라야 함이 이미 정해진 뜻이오니까?


섭리의 손이 항상 같은 방법으로 저를 괴롭히는 데 싫증을 느꼈음인지 그 새로운 구렁텅이에서 빼내어 곧이어 또다른 구렁텅이로 저를 처넣었습니다.


(여기부터 줄거리)

초반에는 하녀 일을 시작하는데,  주인이 시킨 도둑질에 협조하지 않자 오히려 그 주인의 음모에 희생되어 갇힌다. 감옥에서는 뒤부아 부인이라는 부인이 사형수가 불을 내고 탈옥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쥐스띤느를 함께 탈옥시키고 선행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자기와 함께 멀리 떠나 행운을 찾아보자고 권한다. 범죄를 암시하는 그 말에 쥐스띤느는 굴하지 않자, 탈옥에 동행한 뒤부아의 세 남자 동료들이 쥐스띤느를 강탈하고자 한다. 서로 먼저 그녀를 취하려고 뒹굴고 싸우는 틈을 타서 도망친 쥐스띤느는 덤불숲으로 도망가 숨어있다가 두 남자의 ‘타락된 장면’을  목격하는데, 목격하는 장면을 그들에게 들켜  나무에 묶이는 수모를 당한 후, 앞으로 자신에게 ‘순종’하면 후회할 일이 없을 거라며,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녀를 데려간 남자는 브레삭 부인의 아들로, 대저택에서 어머니가 가진 재산으로 빈둥거리며 쾌락의 길만을 걷고 있는 아들이다. 쾌락에 빠진 브레삭은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모친 살해 계획을 세워  재산을 함께 나누어가지자며 쥐스띤느를 유혹하여 협조를 구하지만, 선행만이 최고의 가치인 쥐스띤느는 사건을 막기 위해 브레삭 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가 들키고 만다. 다시 숲으로 끌려와 나무에 사지를 묶인 채 채찍질 당하고 혹독한 쇠채찍질로 온몸이 살갖이 떨어져나가 피범벅이 되는 쥐스띤느를 지켜보며 더더욱 흥분하고 절정에 이른 브레삭은 쥐스띤느를 브레삭 부인의 살해범으로 꾸미고 쫓아낸다.


채찍질에 다친 몸을 이끌고 의사 로뎅의 집을 찾아 그곳에서 치료를 받은 그녀는 로뎅의 가정일을 돌보아주는 하녀가 되어 마음의 안정을 찾고 지내지만, 그것도 잠시, 로뎅씨와 그의 의사 동료들이 아이를 납치해와서 생체 실험에 쓰려고 지하실에 가두어놓은 사실을 알게 되고, 아이를 탈출시킨다. 그 대가로, 발가락을 하나씩 자르고 생 이빨을 하나씩 뽑고, 어깨에 죄수의 낙인을 찍는 브레삭에게 당했던 것보다도 더 잔혹한 육체적 고문을 당하고 쫓겨난다.


이후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 숲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을 찾아가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수도사 네 명이 여성들을 납치 감금하여 성노예로  만들어 쾌락을 갈구하는 타락의 끝판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에서 신부들에게 유린당하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긴데, 위에서 언급한 브레삭과 로뎅의 잔혹 행위 부분과 달리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집단 성행위들은 정염의 불길을 태운다거나 탈진할 때까지 괴롭혔다는 형태로 묘사된다. 물론 채찍질과 육체적 학대도 빠지지 않는다.


새 수도원장이 오며 풀려난 쥐스띤느는 이제 선행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버릴 때도 되었건만, 길거리에서 학대를 당한 남자 달빌르를 돕다가, 그의 저택에 다시 노예로 감금되어 이미 갇혀있던 그의 오랜 정부들과 함께, 발가벗겨지고 바퀴에 묶여 하루 종일 땡볕에서 노동을 하며 다시 성적으로 유린당하는 처지로 바뀐다. 그의 범죄가 드러나고 다시 풀려날 기회를 얻게 되지만 몸에 찍힌 낙인 때문에 범죄자 신분이 되고, 그녀를 도와주던 재판관에 의해 다시 풀려나 일자리를 찾으려고 여인숙에 투숙하는 동안 초반에 만났던 뒤브레이 부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연정을 품은 한 돈많은 상인을 이용하여 큰 돈을 벌어보자는 제안을 받고 다시 난처해지면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가, 투숙한 여인숙에서 화재를 만나는데, 함께 다니던 아이를 화재에서 구하려고 뛰어들어 안고 나오다가 넘어져 아이는 죽게 되고, 재산을 노린 방화에 살인죄까지 뒤짚어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