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범한 재난 소설로 읽히지 않았다. 재난 소설이라면 재난은 극복되어야 한다. 재난 소설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대재난이고 그 재난은 휴머니즘으로 극복한다. 거대한 재앙이 물밀듯 밀려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비극이 산처럼 쌓이지만, 그 가운데에도 살아있는 인류애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고 한두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로 다시 평화를 찾는다. 이 소설이 재난이 아닌 것은 그들에게 닥친 재난이 극복되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서사를 채우는 방식이 차갑게 인류의 본질을 응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장르 소설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반대한다. 

 

우리가 종교처럼 믿고 있는 인류애라는 것의 본질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소설에서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나타난 탄압과 학살, 은폐의 자취를 흐름을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인간-개 상호간 바이러스를 개가 퍼트리는 바이러스로 잘못 이해하는 일은, 재난을 다루는 방식을 정의한다. 인간이 개에게 퍼뜨려서 개가 죽어나간다고 해서 개를 위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개가 매개자가 되어 인간에게 퍼뜨린다는 전제가 개의 학살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재난을 다루는 방식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비슷한 소설로, 카뮈의 페스트가 생각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죽어간다는 사실, 도시가 폐쇄되었다는 사실은 두 소설에서 매우 비슷한 요소이다. 28은 사실감이 높다. 바이러스가 막 퍼져가는 도시에서 고립된 채 아비규한 속에 처한 생생한 현실감을 그대로 전달한다.  간호사는 간호사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수의사는 수의사대로 개는 개대로, 모두 피해자이다.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도시민이 모두 다 죽기를 기다리며 정부에게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 긴 시간들이 세월호의 알레고리로도 읽혔다. 저런 상황에서 국가에서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통신을 끊고, 국경수비대가 도시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공공연히 죽이는 일조차도 허락되는 세상이 과거 어떤 정권이라면 있을 법한 시나리오라는 생각은 떨쳐낼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 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껏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라고 알려졌던 것들 - 의식, 본능 억제, 거울이미지, 수학, 언어 등은 다른 동물도 가지고 있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징징대는게 페미니즘은 아니다.  불공평하다고 억울하다고 호소하거나 고발하는 게 페마니즘인 시대는 지났다. 여성 주인공이 기존의 남성이 해왔던 영웅적인 전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고 해서 그게 페미니즘도 아닐 것이다. 무엇이 페미니즘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상속에서 자각하지 못했던  불합리한 울타리. 여성이라는 틀. 그것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해주는 것.먼저 태어나 부당한 세상에 저항했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선거권을 인권을 동등한 권리를 쟁취했던 선배들이 덜부순 것들 혹은 도저히 부술 수 없어 보이는 뿌리박힌 인습들 그런걸 알아가기 하는 게 페미니즘 소설이 아닐까 싶다. 그런 사상들을 글을 통해 전달하기는 쉽지만, 삶 속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소설을 통해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소설을 통해 주제의식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지겨운 계몽이나 선동 문학이 되기 쉽다.   


분명 우리에겐 틀에 박힌 여성의 이미지가 있는데 때로 그것아 문화적 틀 내에서 시대의 도덕이나 윤리 같은 걸로 몇겹씩 곱게 포장되어 있다.  그러한 문화와 착붙이된 여성에게 요구되는 이미지의 틀은 때때로 인간의 자유와 펑등과 정의를 지속적으로 훼손함에도 불구하고  부수기 힘들다. 내 세대의 퀘퀘묵은 성적 순결 문제가 그랬었고, 아직도 진행중인 시부모와 친정 부무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의무감의 차이가 그렇다.  더 말하자면 끝이없다. 시대가 결혼과 동시에 여성에게는 가사와 육아와 시가에 대한 의무가 차곡 차곡 쌓이며 차례를 기다린다. 이런 문제들은 이미 수없이 일상 속에서 제기되는 것이어서, 기존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맥락으로 이해될 필요성도 있다.  불만과 성토의 장이 된 커뮤니티,  미러링이란 이름으로 페미니즘을 왜곡하는 곳까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은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악용되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시 여성에게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어쨌거나 시대가 요구하는 성적 역할은 지배적 성이 결정했다. 힘이 센 남자가 힘이 덜센 여자를 지배하는 전통은 더이상 힘이 세상살이를 결정하지 않는 문명의 시대에 와서 정교하게 다듬어져 윤리와 도덕과 문화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성의 틀을 부수는 데는 시대가 이건 도덕이야 라고 부르는 것들을 의심해야 한다. 그 의심은 갈등을 부른다. 뭐야 여자가. 왕세자와 유명 철학가덜의 청혼도 마다하고 과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자유와  인권의 상징인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여성 수학자 히타피아가 머리털이 뽑히고 굴껍질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끝에 죽임을 당한 이유는 분명히 그의 성과 관련이 있다. 


사둔 책들 중 페미니즘과 관련된 소설이 하나 있어 앞부분을 조금 들여다 보았다. 이갈리아의 딸들, 아마도 메갈리아의 용어가 이갈리아에서 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구 문화에서  보조적 성으로서의 여성의 롤은 언어에 그대로 스며있다. 그 책의 첫페이지가 첫줄이 용어 설명인데 여성과 남성을 지칭하는 용어가 바뀌었다.   wom(움)은  여성과 인간을 동시에 지칭한다. 영어의 man에서 대부분의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 합성되어 spokesman, policeman 등의 단어가 나오는 대신 이곳은 반대로 spokeswom, seawom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성은 바로 여성 wom에 man 접두어가 붙어서 manwom이 된다. 그리고 남성은  페호라 부르는 성기 보호기를 찬다. 아무튼 이런 역설적 설정이 남성들에게 여성의 겪는 불공정함, 불편함 등을 간접경험하는 기회이기는 할테지만,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굉장히 불편해할 것은 뻔하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나는 지금 시점(남녀 갈등이 심화된 시점)에서,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남녀 양진영에서도 공격받지 않으면서도 할말을 하려면 어떤 말을 쓸 수 있을까 라는 것. 82년생 김지영을 쓴 작가처럼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대한 민국 평균의 여성의 삶의 일부(부당한 부분)를 도려내 마치 카메라로 다큐를 찍듯  찍고 편집하는 방법과  암시와 상징으로 모호하게 페미니즘를 나타내는 방법, 이 책의 단편들은 이 두 가지 중 하나다. 조남주의 <현남 오빠에게>와 최은영의 <당신의 평화>는 전자이다. 여자들끼리 모여 앉아 한 줌 얘기로 끝나는, 끝나고 돌아가면 모두가 각자 잊혀지고 다시 그 현실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현남 오빠는 지방에서 올라와 현남오빠와 캠퍼스 커플이 되어 현남오빠의 주도로 두 사람의 관계에서부터 주인공 여성의 삶과 미래까지 모두 결정되고 결국 결혼 코앞까지 갔다가 막판에 깨닫고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청혼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이제라도 깨달았거든 강현남 이 개자식아!' 하고 통쾌하게 끝나는 내용. 이기적인 남자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그가 베푸는  '보호'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심지어 자기 직업까지도 남성의 요구에 맞춰 결정하는 그런 멍청한 여성상이 21세기 지금 현실에도 존재하는 현대적 여성상이라면, 이건 남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그런 남자에게 계속 의지한 여성의 잘못이 크며, 여성의 자각이 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걸 말해주는 것 같다. <당신의 평화>는 대를 이어 인간대접도 못받는  마지막 며느리였던 정순이, 늘 외식하던 남편 생일날 결혼 예정인 아들 약혼녀를 집으로 불러 시켜먹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을 딸 유진이 묘사한 내용이다. 김이설의 <경년>도 비슷하게 주변의 있을법한 현실의 이야기인데, 고딩 아들의 문란한 성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 아버지의 태도, 자신의 이중적인 잣대를 다룬다. 그 이중적 시선은 자기 아들로서 옹호하고 싶은 약간의 마음과, 여성으로 느끼는 남성의 성적 지위에 대한 불편함 등이 있다. 즉 이 세 작품은 여성의 틀을 깨지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들이며, 주인공이면서 동시에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는 여성들이다.


나머지는 첫 세 개의 작품과 조금 다르다. 여성이 주도적인 주인공이거나 여성의 위치에 처한 남성이 주인공이다.최정화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에서 주인공은 손에 습진을 앓아 장갑을 끼고 다니는데, 폐건물의 촬영을 맡는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폐건물에서 여자 치마로 보이는 게 떨어져 있어 그걸 치우다가, 하나씩 손을 대 말끔하게 치운 다음 사진을 찍는데, 그런 다음 장갑을 벗으니 자기 손의 습진이 다 나았다는 건데,  이 소설이 무얼 말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상황은 장황하게 묘사하는데, 결국에 아리송 작전으로 끝을 맺는 단편은 나랑 잘 안맞는 거 같다. 손보미의 <이방인>은  SF 추리 소설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권력과 타협하지 않아 불이익을 받고 있으며,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소신있는 여성 수사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소설이 조금 특별했던 이유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제껏 모든 추리 소설에서 남성이 담당했던 내면적 고뇌와 외부의 압력, 그리고 반대성의 추종자(?)동료의 협업 같은 요소들을 그대로 여성 주도적 인물에게 투사하기 때문에, 어? 여성이었어? 하고 의외였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문학 속에서 여성의 역할을 고정시켜놓았는지를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역시나 가장 좋았던 소설은  좋아하는 작가 구병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이었다. 제목에서도 알다시피, 그리고 구병모적  판타지적 세계를 굉장히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천연덕스럽게 묘사하고 특유의 화려면서도 약간 엣스러운 만연체로 풀어나가는 동안, 내용은 다른 것과는 달리 남성이 주인공이다. SF적 판타지와 남성이 등장하면서도 페미니즘으로 태깅된 소설을 쓰는 아이디어 역시 높게 평가한다. 이 남성은 우연히 어떤 섬에서 개최되는 여성분장 미인대회에 출전했다가 봉변을 당한다. 그러면서 벗겨지지 않는 굽 높은 구두와 벗겨지지 않는 꽉 끼는 원피스를 입고, 귀신인지 홀로그램인지 정체모를 것들이 쏘는 화살 습격으로 도망가고 함께 출전한 남성참가자들은 이미 화살이 목에 박혀 죽는 다이나믹한 장면이 포진된 단편이면서도 흥미진진하고, 그러면서도  페미지즘적 메시지를 가장 명료하고 또한 정치적으로도 올바르게 전달하는 소설이다.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 역시 SF 계열인데, 인간도 아닌 어떤 생명체 클론이 우주 탐사를 위해 우주선에 태워져서 보내지는데, 알고 보니 임신했다는 얘기. 나름 흥미롭기도 한데, 김성중의 스타일과도 나는 잘 안맞는것 같다. 너무 심오한 주제와 암시가 심해서 피로감이 나타난다고 할까. 그래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 인간관계가 귀찮은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혼자서 무엇무엇 하기가 유행이다. 혼밥, 혼술, 혼잠, 혼삼겹살 등등, 혼여행. 얼핏 제목을 봐서는 이렇게 혼자서 하는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일 줄 알고 펼쳤는데, 알고 보니, 병적으로 회피형 인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리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소극적이고, 책임을 피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성격 장애로 진단하고, 그러한 성격 장애를 가지게 된 원인과 치유 방법을 여러 역사적 인물들의 경우와 내담 환자의 경우의 예를 들어 소개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일본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는데, 나는 이러한 그들의 성격을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불편을 끼치지 않으려는 이러한 성격을 사회적인 성숙도로 이해한다. 그 이면에는 본인 역시 남에게 눈꼽만큼의 불편도 겪고 싶지 않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공공장소에서는 시끄럽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런 행동은 다른 사람으로 인한 어떤 불유쾌한 접촉이나 관여를 피하겠다는 암묵적 동의이다. 


우리나라에 혼밥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혼자서 밥 먹거나 영화보거나 술 마시러 다니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좀 예외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야 배고픈 걸 못참는 사람이라 어디 가서 배고프면 혼자 들어가서 국수도 시켜먹고 짜장면도 시켜먹곤 하지만 아직까지 내친구들 중에서는 그렇게 혼자 들어가서 뭔가를 주문해서 혼자 먹는 걸 못하는 친구들이 많다. 나는 이렇게 혼자서 뭘 하면 남들 이목이 신경쓰이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뭘해도 떼로 몰려다니며 같이 해야 하는 저급한 문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는데, 혼자서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무 말도 못걸면서 예비군 훈련 같은 곳에 떼로 있으면 지나가는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며 희롱하는 남성들이 생각난다. 


얘기가 딴 대로 샜는데, 이제라도 혼밥 혼술이 유행하고, 남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고 혼자서 여행을 하고 남을 돕는 등 하고 싶은 걸 싫컷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나는 굉장히 고무적으로 보는데 반해, 이러한 문화가 심화된 일본에서는 이를 하나의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데서 두 문화의 갭이 있다고 본다. 지난 일본 여행때 유명한 라멘집에 줄서서 기다리는데, 거기 다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 줄이 길었는데 테이블엔 자리가 없고 카운터엔 자리가 있어도 한국 사람들은 '함께' 먹기 위해 한결같이 테이블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기억나기도 했다. 


저자는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길고, 사회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며, 남과의 인간 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의 유형을 회피형 인간으로 보는데, 원인을 애착관계의 부재에서 찾는다. 전형적인 프로이트식 해설인데,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대개 환경적 요인으로 어릴 때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이러한 유형의 인간이 되기 쉽다는 거다. 사회 생활을 하게 된 건 신체적으로는 변변치 못한 인류를 살아남게 한 기본적인 동력이었는데, 어쩌다가 애착 관계에 문제가 생겨 사회 생활을 두려워하고 혼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는지 아마도 개인적 사생활이 중요시되다 보니, 이런 저런 영향을 받아 과거보다 그런 '장애'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론이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성격 유형은 굉장히 다면적으로 분석 가능하며, 애정 부족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적당히 '회피형 인간'인 사람은 여럿이서 할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동안 풍요로운 정신 생활을 할 수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살과 살을 맞닿고 다양한 표정과 신체적 접촉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인터넷의 인간관계는 내보이고 싶은 부분만 내보이는 인간들의 부분적 모습과만 대면하기 때문에 때로 가상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애착 관계의 부재로 이런 저런 문제가 많다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연구에서 뒷받침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성장 단계에 있는 아이를 두신 분들은 온힘을 다하여 사랑합시다. 그런데 과보호나 과한 기대 역시 이런 문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도에 관하여 -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상깊지 않은 책들은 금방 잊힌다. 없던 걸로 되는거다. 그럴까. 단 몇시간이라도 어떤 책을 읽는 시간동안 뇌는 어떤 식으로든 신호를 만들어내고 기억과 사고에 영향을 미쳤을텐데 그것은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 걸까? 그렇다면 별로인 책들은 읽을 필요가 없는걸까 어떻게 좋은 책들만 골라 읽을까.  읽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 책에서 유독 기억나는 게 있다면  이 책에서작가가 제기한 등단 시스템의 문제다. 우선 독자의 입장에서 먼저 한마디 하자면,  등단작가와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이라면 일단 한국 문학 내의 어떤 권위가 인정한 것이니 문학작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퀄리티는 보장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 작가의 글쓰는 시간 못지 않게 소중한 나의 책읽는 시간이 헛되이 돌아가고 마는 것을 막기 위해 우매한 독자가 할 수 있는 차악의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좋은 책은 훌륭한 작가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작품상 심사위원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출판사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베스트셀러 목록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훌륭한 평론가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필독도서목록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좋은 책은 개별 독자가 만든다. 그 책을 읽은 혹은 읽을 가능성이 있는 군집으로서의 독자가 아니라 하나라 한사람 한사람 각각 떨어진 개인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노벨상을 받은 책이라 해도 한 개인에게 아무 공감도 느낌도 자극도 되지 못한다면 공간만 차지하는 쓰레기이다. 세계 곳곳 도서관 추천도서 1위에 있는 책이라고 해도 그것을 읽는 사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그 책의 가치는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생을 바꾼 책이 다른 사람에게는 냄비받침이 되는 이유가 그렇다. 그만큼 다양한 인간의 세상에서 개별적으로 독자적인 인간이 선택해야 할 책이 있는 만큼 책의 선택은 독자의 필요에 따라 다르다.

나는 문학상을 신뢰하지 않지만, 문학상의 권위는 인정한다. 그러니까 어떤 책이 소위 위기에 처했다는 한국 문학계에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건 그 위기에 대한 책임을 절감해서건 심사위원으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건 올해의 책이야 라고 선언한 책에 다소나마 존재할, 작품성이건 예술성이건 그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간에 거기에 투영된 가치를 무시할 수 없다. 한번쯤 들여다본다고 전적으로 시간만 낭비하고 말 작품이 될 가능성은, 광고나 이벤트로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노이즈마케팅 전략으로 떠들썩해진 책들보다는 낮을 것이다. 

임경선은 미등단 작가로서 받은 ‘불편’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정통 문학을 중시하는 일부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기도 한다. 가령 한 식사 자리에서 어떤 문학평론가는 내 앞에 앉았다가 소개를 받은 직후 다른 ‘정통’ 작가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갔다. 둘째, 문학 담당 신문기자는 미등단 작가들의 책을 지면에 제대로 다뤄주질 않는다. 셋째, 문인 공동체로 묶이는 여러 모임에 끼지 못한다. (...) 마지막으로 미등단 작가의 네 번째 불이익은 여러 창작 기금의 수혜자가 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팬으로서의 독자에게는 정통작가와 비정통작가의 구별이 필요없고 관심도 없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어떤 작가의 작품을 읽을만한가에 대해 작품상이나 등단 같은 기준이 필요한 건 그 작가의 첫작품 뿐, 그 작가의 글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등단하지 않았어도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좋은 책을 내는 좋은 작가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통작가가 아니어서 받는 첫번째 불편이란, 누구에게 대접받고 싶은 속된 욕망 중 하나일 뿐이다.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면 독자가 대접해주고 인세로 보상벋을 것이다. 셋째 문제도 비슷하다. 등단작가의 모임이 부러우면 미등단작가 모임을 만들면 된다. 한국 문학이 등단작가와 문학상 수상작가들만의 리그로 비쳐지는 이유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한국 문학이 위기에 처해있는 것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그러한 문학계의 관행을 주도해간 소위 문학권력이라 부르는 자들의 책임이란 건 분명하지만 그들의 모임을 불편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작가만을 바라보는 독자에게, 작가가 독자만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생각 즉, 배신감을 불러온다. 

두번째 문제, 미등단 작가의 책이 매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큰 불이익이다. 독자가 책의 선택에 어려움이 많은 것처럼 매체가 출판되는 모든 책을 다 다루기는 어렵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미등단 초보 작가의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는 홀로 힘겨운 길을 개척하는 일이다. 여기서 임경선은 불이익의 대상을 미등단작가로 한정시켰지만 비문학까지 포함하면 무명작가로 확장해서 생각해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유명 작가의 허접한 에세이들을 보었는가. 이름이 알려진 등단작가의 책은 최소한의 판매가 보장되므로 앞다투어 출판사가 작품을 출건하려 하겠지만, 미등단 작가의 책은 내용으로 승부해야 하기 때문에 양질의 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게 매체의 의무고 책임이다. 이런 일을 게을리하고 츨판사가 보내준 유명 작가의 책 홍보기사만으로 책코너를 의지하는 것은 매체의 성실성을 위배하는 행위이다. 무명작가와 미등단작가, 작은 출펀사의 좋은 책을 하나씩 선정한다던가 할당제 같은 제도를 도입해도 될듯하다. 대통령 후보가 여성 할당제를 주장했는데 역차별이 될 소지가 있는 건 당장 리더의 위치에 올라갈만큼 지도자급의 위치에 여성이 포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두배 세배로 뽑는다면 중간리더의 부족으로 질낮은 리더가 포진될 가능성을 배재해볼 수 없는 건데, 희망이 있어야 미래가 있는 것이다. 

창작 기금의 수혜자 문제는 공적 자금을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한 기준의 문제일 것 같다. 연구 프로젝트를 선정할 때에도 SCI 같은 논문의 갯수로 최종 평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그렇게 되면 순수 과학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누가 심사하러 갔다 와서 흥분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안철수 부인 김미경의 논문 실적 만으로 부당 채용이라고 말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SCI 논문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지만 연구자로서 공평성을 위해 채택한 기준에 다른 대안이 없는 이상 그것에 미달된 사람의 다른 판단 근거는 설득력이 설 자리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미등단 작가의 불이익을 징징거리기보다는 창작 기금이 미등단 작가에게 가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다른 대안을 제시한 편이 더 옳은 태도로 보여진다. 

작가 본인은 미등단 작가로서의 불이익과 작가로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이 많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이 작가의 경우 방송 출연 상담 등의 작가 외적 활동으로 잘 알려져 출판서의 러브콜도 많고 책도 많이 팔려 어느 정도는 안정된 생활이 가능한 것 같다. 노벨상 수상작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너무나도 눌변이어서 놀랐다는 말을 김화영의 번역 수첩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말을 잘해 강연 및 및 매체에의 노출의 덕으로 책 판매에 도움이 디는 곳은 또다른 문화적 수혜자에 해당된다는 곳을 잊지 않도록.

여러 에세이들을 모아놓었는데, 1.5배속의 듣기 기능으로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만쿰 가독성이 좋고 택한 주제도 일상적이면서 공감을 갈 만한 주제들이다. 개인적으로 소설 두 권은 낙제점에 해당되지만, 에세이라는 글의 성격상 주제 선정과 풀어가는 과정은 에세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긍정적인 포인트가 많다. 자신의 이야기와 사랑, 직장, 꿈, 건강, 희망 등 다채로운 주제를 엮고 상담했던 이야기들을 간간히 섞어 지루하지 않게 연결했다. 나 정도의 나이가 조언을 받을만한 주제는 적었으나 대체로 공감가는 내용은 많았고, 대학생들과 청년들, 일과 가사 육아 이 모두에 대한 부담감을 혼자 이고 가야 하는 많은 기혼 여성들에게도 도움이 될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