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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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신념이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중심의 가치가 있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흔들리지 않게 그것이 옳음을 믿고 숭배하는 어떤 것이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인지혁명, 농업혁명, 그리고 최근의 과학혁명으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해가면서 숭배해온 종교적 가치들을 탐구하면서, 국가와 민족과 자본주의와, 회사 등 인류가 만들고 적응해 온 사회적 시스템들을 ‘상상의 질서‘라고 불렀다. 

새 책 <호모데우스>에서는 이러한 상상의 질서가 숭배하는 가치들을 더욱 심화시켜,종교에 비유하였다. 


전작 사피엔스를 다 읽고 덮으면서도, 한 숨이 나오도록 글 정말 잘쓴다고 느꼈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호모데우스에서도 인류라는 스스로의 얼굴을 비추어보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매우 먼 생물학적 조상이 시작되는 호모 사피엔스를 기점으로 한 거시적인 역사다. 전작 사피엔스가 현재를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보았다면, 이번 작품이 인류의 거시적 역사를 통해 조명을 비춘 곳은 다름 아닌 인류의 미래,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류다. 유발 하라리의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사회적 속성들을 유려한 문학적 비유로 기술하는 것이다. 


복잡도가 증가하는 세상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쉽다. 누구도 예측된 미래가 100퍼센트 들어맞을 것이라고 전적으로 믿게 할 재간이 없기 때문에, 예측자는 그저 자신의 예측 혹은 조망한 택한 전략은 어떤 근거인지에 대해 납득시키면 된다. 독자는 그 근거의 정당성을 판단할 뿐이어서, 아님 말고의 말고의 전략이 실패한 예측자에게 비난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먼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인류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해온 가치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어떻게 무엇에 의해 붕괴되어 왔는지의 과정을 통해 현재 모든 인종과 국가, 종교와 정치방식에 걸쳐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대의 가치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불멸, 신성, 행복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고, 이 최우선 과제지만 실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격변들이 어떻게, 왜, 우리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를 전망한다. 즉 우리 시대의 최고 가치인  인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이며, 왜 인본주의 꿈을 이루려는 시도가 그 꿈을 해제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현재의 최고 가치가 그 어느 과거의 가치보다 낮을 수 없고 궁극의 가치는 항상 미래의 현재에 선택하게 될 가치이다. 고대 이집트를 수천년간 지배했던 파라오의 붕괴가, 과거 천년을 지배했던 신의 죽음이 인본주의로 이어졌지만 이 인본주의는 고작 이제까지 3백년을 지배해온 종교로서, 언젠가는 신의 죽음을 이끈 것과 같은 논리 즉 새로운 가치가 낡은 가치를 몰아내는 원리에 의해 몰락할 것이고, 그게 더 좋은 것이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일 무엇을 선택하든 내일의 신이 궁극의 신이 될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오늘 알고 이해하는 것과는 완전하게 다른 차원이 되더라도 현재로서는 경험하지 않은 세계가 형성한 그 보이지 않는 가치 체계를 이해할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동물은 나무, 바위, 강 같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와 두려움, 즐거움, 욕망 같은 내부의 주관적 경험이라는 두가지 커다란 이중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에 비해 사피엔스는 돈, 신, 국가, 기업과도 같은 상상의 질서가 추가되어 삼중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데, 역사는 바로 이러한 허구의 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전작 사피엔스에서도 커다란 주제 중의 하나였다. 고대와 중세 도시에서 신들은 법적 실체로 기능했는데,  예를 들어 나일 계곡의 실질적 통치자는 수백만 이집트인이 공유한 이야기들 속에 존재한 상상의 파라오였다는 것이다. 문자와 돈 같은 강한 허구적 실체들의 출현은 추상적 상징을 통해 인간의 삶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실재를 기술하는 문자 언어는 서서히 실재를 고쳐쓰는 강력한 방법이 되었으며, ‘공식 보고서와 실재가 충돌할 때 물러나야 하는 것은 대개 객관적 실재(p232)였다. 


문서 기록의 힘은 수천년동안 권위를 유지해온 성경의 출현으로 절정을 이루었다고 보는데,  성경은 일신론적 역사이론을 널리 집요하게 퍼뜨리며 실재의 진정한 본성을 오도했다. 그렇다면 진정한 본성은 무엇이며, 성경과 일신론이 어떻게 본성을 오도했다는 것일까. 성경은 좋은 일은 내 선행에 대한 보상이고, 재앙은 내 죄에 대한 처벌이라는 사상을 퍼뜨리는데, 당연하게도 이 인과관계는 상호관계의 모순 때문에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유년기에 보이는 특징일 뿐이다. 성경 의 구약 시대에 고대 유대인들의 가뭄과 네부카드네자르의 추방이 기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믿은 것은 그들이 지구 생태계, 바빌로니아의 경제, 페르시아의 정치 체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오류가 넘처나는 책은 아직까지도 미국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할 때 손을 얹어 진실을 맹세하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강력한 힘으로 인류의 대규모 협력을 도왔다. 


성경시대에 신들은 인간에게만 불멸의 영혼을 주었다. 불멸의 영혼을 주는 것이  그리스도교 세계가 존재하는 목적이므로 창조의 정점은 인간이었고, 영혼이 없는 동물들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애니미즘에서 유일신으로 넘어갔을 때 40억 세월을 함께 진화해온 사피엔스 이외의 동물은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가축화된 동물만이 인간의 생존을 목적으로 지구 동물의 주류를 이루게 된 거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작가 하라리가 인본주의를 종교라고 규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를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사회적 기능이다. 종교는 인간의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으로 거기에는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하는데, 불교와 도교부터 공산주의 나치즘, 자유주의에 이르는 다른 종교들은 이 초인적 법칙을 자연법이라고 주장한다. 나치 친위대 장교는 아들이 왜 유대인을 죽이냐고 물으면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라고 설명했다. 그들을 살려두면 인류가 타락해 멸종할 것이며, 히틀러는 그 작동원리를 해독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를 미신이나 초자연적인 힘과 동일시하며 그 이념을 종교라고 말하면 싫어하겠지만, 그들이 믿는 것 역시 복종해야 하는 어떤 도덕법 체계이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각각 체계가 추구하는 믿음, 신념, 가치를 숭배하는 도덕적 체계가 있으며, 왜 라고 질문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작동원리가 세계와 우주를 지배하는 단일한 규칙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므로 이념은 종교라는 것이다. 


근대사에 등장한 과학은 필연적으로 전통적인 종교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각기 다른 진리를 지지하므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둘은 실제로는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타협하고 공존하고 협력한다. 진리는 개인에 의해 우선시될 수 있으나,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는 것이 하라리의 통찰이다. 더 나아가 근대사를 과학과 종교의 계약과정으로 본다. 여기서 종교는 인본주의라는 근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종교를 뜻한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다.(p275) 인본주의는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하지만 이 계약은 21세기에 깨지고 매우 다른, 어떤 ‘포스트인본주의’ 종교 사이의 계약이 될 것이라는 거다. 


경제 성장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인본주의의 교의다. 이에 대해 하라리는 경제 성장에 대한 집착은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 앞에서 제로섬 게임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모든 곳에서 당면한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주는 구원자로 여겨지며 종교적 지위를 획득했는데, 특히 요즘에는 장기적 성장을 확보하는 특정 형태의 자본주의가 인정받음에 따라 탐욕스러운 재벌, 부농, 표현의 자유가 보호받고, 생태환경, 사회주의 전통가치들은 해체되고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방대한 텍스트들을 통해 하라리는 계속해서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가 지위를 획득해서 과학과 타협하며 새로운 교의들을 탄생시켰는지를 고찰하고, 나아가 다음 장의 수백 페이지를 통해 과학이 이 인본주의를 밟고 어떠한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킬 것인가를 전망한다. 즉 유전자 과학과 신경과학, 빅 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 등의 새로운 과학이 그 어떤 속도보다 빠르게 대다수의 인류를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잉여로 전락시키고, 자원을 획득한 지극히 소수의 인류가 신의 지위에 오르게 될 것임이 자명하다는 것, 우리가 종교처럼 철썩같이 인본주의적 사상에 따라 자아 내부의 목소리들이 유전자와 생화학의 결합이 만들어낸 알고리즘임을 인정하고 결국은 세상은 대다수의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알고리즘과 빅데이터가 만들어내는 무엇이 될 것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역사 고찰과 미래의 전망이 전속력으로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이 세상에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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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언트 - 영어 유창성의 비밀
조승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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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해당 언어권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몇년 전 <이방인>의 번역 논쟁으로 이 곳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는데, 내가 불어를 아는 것도 아니고, 문학 번역에 무슨 생각이나 신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충 흘려 보면서 다 잊어버렸다. 얼핏 생각나는 게 siren(?) 대한 국내 모든 번역을 비교한 내용이었는데, 내게 들은 생각은 논쟁 자체에 대해 좀 시니컬했다. 그 글이 쓰이던 당시 공간, 당시 시간에서 통용되는 그 말의 뜻을 어떻게 정확하게 국내어로 1:1 대응시키는 표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한자어랑 자주 사이는 순수어랑 그 설명 불가능한 미묘한 차이를 다른 모든 언어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그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들의 차이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많을 거다. 하나의 언어와 표현이 자아낼 수 있는 천차만별의 뜻이 있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 톤과 공기의 미세한 흐름과 웃을 때 나타나는 주름의 차이와 같은 아주 사소로운 차이 속에서도 전혀 반대의 뜻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 그 자체로서 완벽하게 다른 언어로 1:1 번역될 수 없으며, 정확한 기준이 있기도 어렵다.  번역은 원전에 대한 번역자 개인의 해당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해석과 그 해석을 유려하게 현지어로 번역하는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번역을 잘 하려면 어떤 문장의 문자 그대로의 뜻이 아닌, 전체 작품 내에서의 의미를 알아채야 하고, 그 알아챔은 해당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을 무시하고, 모든 단어와 뜻을 1:1로 매치시키고 하나의 문장을 하나의 또다른 문장으로 바꾸는 식민지식 영어 학습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이 책의 취지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영어를 배울 때 그토록 어려움을 겪는 언어는, 언어의 구조가 달라서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언어는 문장의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정확한 문법은 천천히 배워도 (상대적으로) 쉽게 말 자체를 배우고 따라할 수 있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의 관계는 매우 다르다. 그 다른 점을 그냥 문장의 순서 라고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정확하게 무엇의 차이가 이토록 문장 구조를 다르게 느끼는지를 알려준다. 즉 영어는 동사중심의 언어이고, 우리는 명사 중심의 언어라는 건데, 우리가 주어+동사라는 초간단 문장을 만드는데도 그토록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아마도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언어순으로 배열되면서 어떤 말을 영어로 옮기기 위해 명사를 먼저 생각하고, 그 명사를 어떻게 했다는 동사를 그 다음에 생각한 다음 그 명사를 수식하는 동사를 역으로 찾기 위해 여러 단계를 거치는 사고의 지연 때문인 것 같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영어가 주어+동사의 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동사가 문장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 정보를 전달하고 있음을 생각하라는 거다. 책을 읽은 지 꽤 되어 상세한 사항은 잊었지만, 이 부분을 다루는 장은 가볍게 설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영어를 대해왔음에도 영어 문장을 대하면, 주어와 동사를 찾은 후, 목적어들이 어디에 있나 그 구성관계에 연연했던 걸 생각하면, 동사 그 자체를 먼저 인식하고, 동사 위주의 사고를 하면서, 굳이 목적어를 찾아 한국말로 거꾸로 옮기지 않고 읽어나가는 것이 전체적인 뜻을 한눈에 파악하기에 훨씬 빠르다는 걸 늘 주지하고 있어야 겠다.


우리에게는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은는이가'의 사용이 외국인들에게는 문법적 틀 내에서 매우 어려워하는 문제인 것처럼 우리에게 관사의 사용은 정말 어렵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고, 대개 들 다 어려워한다고 한다. the와 a 를 사용하게 된 어원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훨씬 그 까다로운 사용법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한국어가 직관적인 데 비해 영어는 추상적 언어라는 설명이 무척이나 공감되었다. 화면에 검은 소들이 너른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다. (1)Cows are black, (2) The Cow is black. 무엇이 맞을까, 우리는 그냥 소들은 검다라고 말하면 되지만, 그 한국말을 그대로 영어에로 옮겨 (1)로 쓰면 전세계에 있는 모든 소들이 검다는 뜻이 된다. 


한국문학을 읽을 때 마음을 만져주는 느낌을 종종 받는데, 한국어는 감각적이고 직관적이어서 하나의 어근에서 비롯된 작은 어미의 차이가 무수히 많은 다른 직관적 느낌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국문학의 풍요로운 감각적 언어의 선택이 낳은 미학적 우수성이 번역어로 표현 불가능한 관계로,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기 어려운 점도 이해하겠다. 반면 추상명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한자어에서 얼마든지 만들어 쓸 수 있고, 일본에서 열성적으로 만들어 쓰는 말도 가져다 쓰고 있으므로 뭐가 문제가 될 게 있나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나 학술용 문장에서 한국어가 오히려 어렵게 생각되는 이유는 바로 그 추상적 언어라는 영어의 특성에 있다. 


라틴어와 칼트어 등 다양한 어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어는 그 때문에 단어의 종류도 굉장히 많고, 어근이 라틴어냐 아니냐에 따라서 문장의 품격도 달라지고 그 의미의 배경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는데, 이런 차이를 단어 사전만으로 인식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당연히 다양한 종류의 영어에 얼마나 노출되었느냐가 관건인데, 영어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는 방법으로 연관어 사전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과 시를 읽으라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문법적 틀 내에서만 영어 해석이 가능한 나로서는 시를 읽으면 당췌 이게 뭔뜻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시를 읽으라니. 하지만 시는 축약된 형태로 느낌을 전달하는 서정적 언어로서 시를 많이 읽으면 언어의 사용이 더욱 융통성있게 됨을 강조한다. 


내가 뭐 갑자기 영어 공부를 하려고 이 책을 읽은 건 아니고, 집에 있는데 표지도 산뜻하고 가볍게 읽기에 좋겠다 싶어 집어 들었는데 평소 관심있던 언어학에 관련된 내용도 나오고, 영어 학습서라기 보다는 언어와 문화의 이해라는 차원에서 기술된 책이어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재미도 재미지만, 몇몇 부분은 영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두고 두고 참고할만한 내용도 많기에 추천한다.


#플루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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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마리 여기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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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을 뛰쳐나온 노라의 뒷 이야기는 아마도 이 책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어찌 저찌 하다보면 고등 교육을 받고도 가정이라는 굴레에 갇혀 존재감없이 지내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여성들이 많은데, 여성들이 사회생활이 단절되는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기혼 여성에게는 양육이라는 대업이 또아리를 틀고 기다리고 있고 이를 완수한 후에 뒤돌아보면 날마다 새로와지는 사회에 뒤떨진 듯한 좌절감이 큰 이유 중 하나다. 


63세의 브릿마리의 평생 직장이라는 것은 결혼 전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것이 전부이다. 40여년간을 남편의 아이들을 돌보고, 커트러리를 정리하고, 과탄산소다를 이용해서 집안을 구석구석 정리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장을 보고, 반짝 반짝 윤이나게 식기와 집안 물건들을 닦고, 남편의 옷을 다리고, 6시 정각에 저녁을 차리고, 그렇게 집안을 관리하는 일이 그녀의 일이고, 그녀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남편이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렇게 살림만 하며 살아가던 브릿마리가 집을 나와 직업 소개 센터를 찾아가는데, 그가 일해야 하는 이유가 서늘하다. 늘 반짝반짝 닦고 정리하고 매일 같은 시각 해가 뜨듯 모든 것이 정해진 자리에 정해진 시간에 있어야 하는 그녀지만, 혼자가 되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면, 주위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혼자 썩어가게 된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언젠가 죽음이 찾아왔을 때 혼자 죽어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매일 같은 시간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게 되면 어느날 자신이 사고로 죽더라도 그녀가 일하던 일터는 어제와 다른 오늘이 될 것이고, 그녀의 죽음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1주일 이상씩 주위에 냄새를 풍기며 홀로 썩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그녀가 직장을 찾는 이유다. 


요즘 아이들은 경제가 불황이라는 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듣는 것 같다. 90년대 정도에 세계 경제가 활황일 때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경제 상태에서 미래를 찾아야 하는 청춘들을 볼 때마다 미안해지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 때 좋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불황 앞에서는 누구나 움추려든다. 좋은 사회 제도와 안전망을 갖추어 잘사는 나라라고 부러워하는 북유럽이라고 해도, 불황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직장을 찾으러 센터에 갔지만, 그 연세에 직장을 잡는 건 어렵겠다는 걸 직원은 돌려 돌려 말하지만, 40여년간 집구석에서 청소와 십자말 풀이에 온 인생을 바쳐온 꽉 막힌 브릿마리에게 무슨 말이든 통할 리가 없다. 눈치도 없고 자기 멋대로인 구석이 있어야 일이 풀리는 경우가 있다. 거절의 완곡한 표현으로 다음에 연락드리겠다고 하는 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여 끈덕지게 쫓아다니며 밥까지 해주며 얻은 직장이 보르그라는 쇠퇴해가는 마을의 언제 문닫을지 모르는 레크레이션 센터 관리인이다. 


마을의 집들마다 매물 표지판이 내걸려져 있고 시와 구청에서 운영하던 거의 모든 시설들이 철거되고, 주민들의 편의시설이라고는 브릿마리가 관리하게 될 레크레이션 센터와 상점 하나가 전부인데, 이 상점은 구멍가게와 우체국과 커피숍과 피자집과 자동차 수리점까지 겸하고 있으며, 주인은 휠체어를 탄다. 까칠하기 짝이 없고 꽉 막혔지만, 하루 하루 보르그의 사람들과 레크레이션 센터 주차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남아있는 보르그 사람들과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며 브릿마리는 서서히 새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수줍고 친절한 마을 경찰관인 스벤과 썸을 타는 중 갑자기 나타난 남편은 브릿마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조금씩 알아가는 사람과 이미 모든 것을 알아 더이상 알 필요가 없이 친숙한 사람 사이에서 그녀가 켄트에게 갖는 익숙함과 편안함 그리고 스벤에 대한 미안함과 애잔함이 마음아팠다. 구청에서 아파트 부지로 내놓아 빼앗긴 축구장 대신 레크레이션 센터 앞의 주차장에서 축구를 하는 동네 아이들과 온갖 일들을 겪게 되고, 결국 선택 앞에서 흔들리게 되는 브릿마리. 60세에 다시 만난 보르그 사람들과의 작은 인연은 브릿마리에게 어떤 선택을 가져다줄까. 


참으로 푸근하고 따뜻한 소설이었다. 저자 프레드릭 베크만은 아직 30대로 아직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노년을 사랑스럽게 그리고 있다. 작가의 세 개의 소설 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은 문체가 간결하고,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감정을 과잉되게 표현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또한 크게 드러내지 않는 문체였지만, 몇 번이나 울컥하곤 했다. 브릿마리를 포함해서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소외된 계층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맹인이거나, 부모가 없거나, 휠체어에 의지함에도 불구하고 전투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그 해학과 유머가 참으로 긴 여운으로 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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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생활 속 수학 지식 100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수학 지식 100 시리즈
존 D. 배로 지음, 전대호 옮김 / 동아엠앤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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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이전으로 돌아가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언어가 될까. 인간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언어가 소통의 수고와 오해에서 오는 고통을 말끔히 해결하고 명료하게 의사 전달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언어가 있다면 인간의 사고 자체가 변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 그런데 수학의 언어는 오해의 여지가 남겨놓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 만일 말로 설명 불가능한 세상의 이치를 명료한 공식으로 수학적으로 밝히고 그걸 수학적인으로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왜 인간이 진실을 알기 위해, 혹은 진실을 알기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할까. 


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감정을 기호로 표시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컴퓨터 인공지능이 펑펑 울고, 까르륵 웃는 날이 될 것이다. 그 사이에 인간은 세상의 모든 진리를 터득했기에 삶이 시시해져서 벽면하고 있을까. 어쨌든 수학적 언어는 명료하지만, 기호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복잡함을, 평범한 사람들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 없기에 궁극적인 언어가 될 수는 없다.


예술과 수학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예술은 감정을 다루고 수학은 이성을 다루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생각해보면 예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수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음악을 표현하는 기호들은 다분히 수학적이다. 명료하고 거짓이 없다. 적혀진 대로 테크닉을 연마하면 기본은 된다. 


대중에게 수학 대중서는 수학 언어를 일상 언어로 번역한 걸 뜻하는 경우가 많다. 수학적인데, 수학 공식은 경기나게 싫고, 은유나 비유를 통해 그 속에 있는 통찰을 읽고 싶은거다. 이것이 윤리적이고 저것이 도덕적이고 또 이런 것은 불공평하고 저런것은 자유를 빼앗고 그런 시대에 따라 갈대처럼 변하는 정신적 요소들 말고 영원히 우주 끝까지 가도 변하지 않을 어떤 진리가 명료함의 언어로 전하는 것을 일상 언어로 읽고 싶다는 욕망.. 그것은 살아있는 동안엔 결코 충족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이런 책이 나오면 자꾸 미련을 가지게 된다. 


100가지 주제를 다루는데, 350여 페이지니까, 한 가지 주제당 그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는 않는다. 깊이가 충족되지 않을 것 같겠지만, 너무 깊어 혹은 너무 충실한 설명이 가볍게 수학을 일상 언어로 읽으려 했던 불찰을 깨닫게 해준다. 세상에 그런 건 없거든!!! 얼마나 더 깨져야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텐가. 그래도 주제들 자체는 재밌다. 


예를 들어보자. 미루기가 바람직한 경우는 언제일까? 하고 콕 집어서 문제를 내면 뭐 대략  A = D+(A X 2^-D/18)이라는 공식을 더럭 내민다. 물론 설명을 잘 읽어보면 이해가 안될 것도 없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계산 대한 답은 일상 언어로도 나와있으니까. 일을 지연시킴으로써 효과를 보는 대형 프로젝트들의 경우, 시작을 미룬다면 일의 양을 필요한 시간으로 나누는 것으로 정의되는 생산성이 훨씬 높아진다. 무슨말이냐. 때로 일을 미뤄도 된다. 라는 뜻이지만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끝나는 일이 현재 26개월보다 적게 걸리는 일이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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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4-2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 그런데 수학의 언어는 오해의 여지가 남겨놓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

→ CREBBP 님의 윗글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생각 거리를 던져줍니다. 그중에 우선 위 인용문에서 거론한 언어(적 기호)와 수학(적 기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CREBBP 님은 먼저 (소통의 수고와 오해에서 오는 고통을 말끔히 해결해주는) 명료한 의사 전달이 가능한 단 하나의 언어를 상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후보의 하나로 수학적 기호를 언급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으로 언어 혹은 말에 관련된 물음이 수학(적 기호)에 관련된 물음과 같은 차원의 범주인지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언어적 기호와 수학적 기호가 과연 동일한 범주 혹은 동일한 차원의 비교 수준에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는 겁니다.

예컨대 위 인용문 중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라는 문장에서처럼 언어적 기호와 수학적 기호를 동일 범주 차원에서 비교 논의하는 것이 《인간은 과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물음의 맥락과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의문스럽다는 것입니다. CREBBP 님은 “언어는 기호”라고 하셨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언어를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형태 등등의 지각 가능한 체계로 나타낸 글자 · 문자 등을 기호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수학적 기호는 그런 글자 · 문자를 가지고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학적 기호는 문자 기호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수학적 기호는 문자 기호의 하위 범주에 속한다는 얘깁니다. 즉 수학적 기호와 문자 기호(CREBBP 님의 문장에서는 ‘언어’로만 잘못 표현된)는 서로 대등한 비교 관계가 아니란 것이죠.

위와 같은 이해에 기반해 판단한다면, 《언어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언어이다.》라는 CREBBP 님의 문장은 매우 불분명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자는 기호이고, 수학적 기호도 일종의 문자다.》라고 대략 바꿔 이해하려고 해도 요령부득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죠. 추리/추론이 결론을 향해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형국이란 것입니다. 일종의 사고의 착종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죠.

해서 위 인용문에서 CREBBP 님께서 《그런데 수학의 언어는 오해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둘 중 하나다.》라고 말씀하신 것도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수학적 기호는 대략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아라비아 숫자 기호, 라틴어 기호, 그리스어 기호, 히브리어 기호, 영어 기호, 앞의 것 어느 것도 아닌 인공적인 국제 표준 기호 등등이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섞인 형태로 쓰입니다. 해서 수학의 언어에 오해의 여지가 없다는 선입견은 말 그대로 선입견일 뿐이라고 봅니다.

CREBBP 2017-04-24 15:00   좋아요 0 | URL
긴 답글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조금 바빠서, 긴답글 못드림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이오닉맨 - 인간을 공학하다
임창환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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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백만불의 사나이라는 미국 티브이 드라마 시리즈가 있었다. 600만 달러를 들여 신체를 개조한 사람이 활약을 펼치는 시리즈다. 그의 여자친구 소머즈도 있다. 그들의 힘세고 빠른 신체적 능력과 먼 곳까지 보고 들을 수 있는 감각은 환상적이다. 제목이 말하듯, 그들의 능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큰 돈을 들여 만들어 붙인 것이다. 첫 방영이 1970년였는데, 불의의 사고로 두 다리와 팔과 눈 등의 여러 신체 기관에 장애를 입은 요원에게 미 과학수사국은 당시 돈 육백만 달러로 고성능 인공 기관을 장착하고 사이보그 요원을 만든다. 그는 장착된 인공 다리로 시속 90킬로 이상으로 달릴 수 있다. 인공 팔이 장착된 한쪽 손은 무적의 힘을 자랑한다. 레이저 눈빛이 먼 곳을 투시할 때 나던 효과음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이십배 줌, 열감지 센서, 그리고 야간 투시와 같은 고기능 고성능 의안으로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

기술이 지금처럼 비약적 발전을 이루기 전인 당시에 이런 사이보그형 인간이 악의 무리와 싸우고 활약하는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아직 과학기술의 한계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잘 모를 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체적 능력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붙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다른 영웅물들과 비교했을 때 언젠가는 실현 가능한 기술 발달이 가져올 수 있는 가능한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적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인간이라는 생물의 한계, 개별 인간이 유전자 조합에서 받은 가진 능력의 한계, 환경과 나이 혹은 불의의 사고 등으로 인해 후천적 퇴화로 인해 줄어든 한계들로 인해 우리가 하고 싶은 것과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아직 인간의 정신적 능력의 한계는 잘 알지 못한다. 한계가 없는 정신적 능력이란 계속 누적되어 가는 지식을 기반으로 신체적 능력을 뛰어넘을만한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누구나 인정하고 또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법이나, 종교적 도취감에서 찾지 않고, 실현 가능한 과학기술과 육백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으로 찾는다는 점에서 세계인을 매료시켰다.

사이보그라는 용어는 척박한 우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신체를 개조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설사 먼 훗날 우주의 어느 곳에서 천연 자원이 잔뜩 매장된 어느 별을 발견해서 이주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치자. 산소가 풍부하고 온도, 습도, 압력 등이 현재 지구와 같은 조건에서 진화한 인간이 지구와 똑같이 생존 가능한 환경의 별일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있겠는가, 그런 별을 발견하는 것도 희박하겠지만, 그런 별에서 생존하는 것은 더욱 힘들 것이다. 두터운 우주복을 입고 매일 생활하는 것 보다는 그런 시대에는 생체 공학 기술이 더욱 발전했을테니, 인간의 몸을 해당 환경에 맞게 고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어떤 SF 작가가 해냈고, 여기서 사이보그라는 말이 처음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사이보그의 범위를 좀 더 넓혀보면, 훼손되거나 쇠퇴한 신체의 일부를 어떤 방법으로라든지 정상인과 가깝게 동작하기 위핸 보조 장치들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인류는 제한적으로나마 오래전부터 인간의 신체적 능력을 확장하고 싶어했고, 그렇게 해 왔다. 고대 때부터 의안을 이용했던 흔적, 전쟁이 잦았던 시대에 수족을 잃은 군인들이 착용했음직한 의수와 의족들, 하다못해 엄지 발가락 하나가 잘린 고대 이집트 왕족의 미이라는 인공 발가락을 끼웠다는 흔적까지 발견되었다. 예전의 해적들의 이미지에서 한쪽 팔에는 갈고리를 한쪽 다리에는 나무 다리를 끼우고 한쪽 눈엔 안대를 끼운 모습이 이미지로 굳어진 이유도 그만큼 의족과 의수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져 왔다는 반증이 아닐까. 나빠진 눈에는 안경을 끼고, 들리지 않는 귀에는 보청기를 끼던 소극적 보조장치에서, 이제는 전혀 기능하지 않은 신체 기관들을 완전히 대치하여 정상 기능을 기대할 수 있는 인공심장, 바이오닉 눈, 귀, 다리, 팔까지 신경과 직접 연결하여 신호를 보내고 받고, 작동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바이오닉 생체 공학 기술은 어디까지 왔을까. 의수와 의족같은 인공 신체 기관들은 무게 중심을 잡거나 대칭을 맞추는 기능 뿐만 아니라, 직접 뇌신경과 접촉하여 인간의 팔이 하는 일들을 한다. 가령 팔이 잘리더라도, 잘린 팔을 움직이는 뇌 부위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뇌는 팔을 움직이라는 신호를 보내고 남아있는 신체 부위와 연결된 전자 의수(바이오닉 팔)는 이 신경을 신경은 장착된 의수는 남아 있는 팔과 닿는 부분에 전극을 붙여 근육의 근전도 신호를 측정하고 이를 바이오닉 팔에 내장된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연결한다. 전자의수 내부의 컴퓨터는 해당 신호를 해석하여 손목이나 손가락에 연결된 모터를 동작시킨다. 현재 아이람이라는 전자 의수는 다양한 형태의 움켜쥐는 손가락으로 동작이 가능하고, 손가락 끝에 부착된 센서에 의해 압력을 측정하여 적당한 힘을 가할 수 있다. 인공심장과 인공 망막 등에 대한 내용은 더욱 흥미롭다.

책은 바이오닉 기술의 현재를 매우 흥미롭게, 기술적인 내용까지 알기 쉬운 톤으로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현재의 과학이 실제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함으로써 어떻게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통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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