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문학동네. 2018. 328쪽)

: 헤어지는 이야기. 그들이 함께하게 된 시작이 사랑이었든 우정이었든 영원한 관계란 없다. 헤어짐의 과정은 길고 고통스러우며 먼저 알아챈다해도 덜 상처받는 건 아니다. 


읽기에 쉽지 않아서 오래 읽었다. 잘 쓴 글들이지만 마음이 많이 아려와서 깊고 긴 한숨을 내쉬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2. 블랙케이크(샤메인 윌커슨, 서재인 역. 열린책들 2023. 584쪽)

: 엄마 엘리너는 돌아가시면서 냉동실에 블랙케이크 한 개와 긴 녹음 파일을 남겼고, 8년간 왕래가 없던 남매 베니와 바이런은 유언에 따라 함께 녹음 파일을 들어야 한다. 녹음은 1967년 카리브해 어느 섬에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블랙케이크는 결혼을 위한 것. 오랜 시간 럼에 절인 과일들과 검은 설탕을 이용해서 만드는. 오래전 카리브해의 섬에서 아빠의 도박빚에 팔려간 커비라는 소녀의 결혼식을 위해 구워진 블랙케이크는 정작 소녀의 입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커비는 나이 많고 폭력적인 신랑의 살해 혐의를 피해 도망을 쳤다.


작은 섬 출신 검은 피부의 소녀는 3중의 억압을 견뎌야 한다. 출신지, 피부색, 성별. 소녀의 수학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든 소녀가 아무리 많은 책을 읽든 소녀는 그냥 흑인 여자애일 뿐이다. 어쩌면 이전에도 늘 이야기되던, 흔한 스토리일 지도 모르지만 읽을 때마다 새삼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커비의 인생은 여러 사람들 특히 여러 여성들의 도움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게 내겐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너와 에타의 이야기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들은 괜찮았을까? 마음이 함께하니까? 서로가 무사하니까? 더이상은 이런 희생은, 이런 외면은 없었으면.



3. 들끓는 꿈의 바다(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역. 창비. 2023. 352쪽)

: 성공한 건축가인 첫째 애나와 역시 성공한 사업가 막내 터조는 엄마 프랜시를 모시고 있는 형제 토미의 연락을 받고 고향 태즈매니아로 돌아온다. 프랜시는 위독하다. 프랜시는 환각을 보고,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데 애나와 터조는 엄마가 연명치료를 거부했다는 토미의 말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엄마를 살리고자 인맥과 경제력을 총동원한다. 이 와중에 애나는 정말 해야할 업무상 연락 대신 SNS를 보는 걸, 최악의 산불 사태 때문에 멸종되는 동식물들을 헤아리는 걸 멈출 수 없고, 어느날 자신의 새끼 손가락이 사라진 걸 발견한다.


(스포)

애나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면서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애나가 들여다보는 SNS는 단순히 회피의 수단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사회, 자연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엄마의 병세와 산불의 확산 및 생태계 파괴, 생물 멸종이 같은 곡선을 그리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나에게 화가 났던 건, 삶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살아있는 한 생활은, 인생은 이어져야 하므로. 그래서 가장 약했던 토미가 끝까지 살아남아 프랜시의 뜻을 이뤄준다는 게 다행이면서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서글프기도 했고. 삶이, 나라는 인간의 멸滅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4.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유영광. 클레이하우스. 2023. 328쪽)

: 고등학생 세린은 가난한 집이 지겹다.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와는 얼굴도 보기 힘들고, 동생은 집을 나가버린 지 오래다. 입시 학원은커녕 세린이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곳은 문화센터 태권도 교실 뿐이다. 세린이는 오래된 폐가에 자신의 불행을 적어 보내 당첨이 되면 불행을 팔고 행복을 살 수 있다는 도시전설을 적은 책을 읽으며 꿈을 꾼다. 어느날 정말로 세린에게 초대장이 도착한다.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올드한 배경과 분위기에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그건 시대적 배경이 정확히 나온 게 아니라서 그냥 읽었는데, 젠더 감수성 부족(60쪽), 미숙한 서술, 딱히 틀렸다고 할 것까진 아닐지라도 맥락이 맞지 않는 어색한 문장들(39쪽, 53쪽, 89쪽 등등... 더 기록하지도 않았다), 디테일 부족(137쪽) 등이 계속 거슬렸다. 게다가 세린은 나이에 비해 현실감도 부족하다. 구슬에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청할 때 보면 초등 고학년 정도 되는 거 같다. 


(약스포)

전체적으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와 비슷하다. 설정만 다르고... 그래도 도깨비 이야기를 살린 건 맘에 들었다. 애시당초 그것 때문에 읽은 거지만. 



5. 우리의 열 번째 여름(에밀리 헨리, 송섬별 역. 해남. 2022. 488쪽)

: 뉴욕의 여행 잡지사에서 일하는 파피와 고향 린필드에서 교사로 일하는 알렉스는 같은 대학 출신이다. 파티에서 처음 만났지만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여름 방학 때 카풀을 하게 되면서 친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여름 휴가는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다. 열 번째 여름인 올해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둘이 오랜만에 함께 하기로 한 휴가다. 파피는 이전 휴가에서의 실수와 어색한 둘의 사이를 만회하려 한다.


무난한 로코. 내용이야 뻔할 수 있지만, 난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다. 파피의 시점이라서 얼핏 읽기에는 파피가 알렉스를 너무 좋아해서 계속 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렉스의 마음 또한 감춰지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 둘의 마음이 어떻게 2차원 소용돌이 무늬처럼 바깥에서 안으로 스며들어가는지 지켜보는 간질간질함이 있다. 따뜻한 봄날 벚꽃 아래에서 읽기 좋은 소설. 난 15층에서 벚꽃을 내려다보며 읽었지만.



6. 수면 아래(이주란. 문학동네. 2022. 200쪽)

: '나'는 고등학교 동창인 우경과 결혼했다 이혼하고 지금은 고향 고물상에서 일하고 있다. 우경과는 아직도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편하게 지낸다. 같이 저녁을 먹고 산책도 하고. 


이 작가의 인물들은 다 착하다. 나쁜 맘을 먹지 않는다. 나쁜 일을 겪고 어쩌면 나쁜 행동을 할지언정. 아픔은 수면 아래 묻어둔다. 물론 파문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곧 깊은 호수처럼 파문은 가라앉고 다시 고요해 질 것이다.



7. 나비 정원(닷 허치슨, 김옥수 역. 소담출판사. 2018. 440쪽)

: 도시 한가운데 커다란 유리 정원에서 불이 난다. 그 안에서 등에 나비 날개를 문신한 13명의 소녀와 3명의 남자가 발견되고, 이 사건을 담당하는 FBI 빅터는 생존한 소녀들이 의지하는 소녀 마야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마야는 그 이상한 정원에서 무슨 역할을 한 걸까?


『양들의 침묵』을 잇는 사이코 스릴러 맞다. 이렇게 기괴한 이야기라니, 역겨웠다.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낸 작가의 심리가 궁금하기도 하고. 마야의 역할은 궁금하지 않았다, 너무 뻔해서. 이야기의 전말 특히 이들이 어떻게 구출되었는지가 궁금해서 읽었는데, 사실 번역문체가 너무 별로였다. 워싱턴대 학생이나 결손가정 출신 10대 여자애나 식당 잡역부 등 모든 등장인물들의 어투가 똑같은 건 차치하고라도 '~해서 그랬다'가 아닌 '~해 그러했다','~터이니 ~한다'는 식의 문체는 이런 장르에는 특히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중반 이후에는 비문과 오타가 너무 많아서 짜증마저 났다. 잦은 쉼표 사용은 흐름을 끊기 일쑤였다. 



8. 꿰맨 눈의 마을(조예은. 자음과모음. 2023. 192쪽)

: '타운'에는 이전 그대로의 신체를 가진 사람들만 살고 있다. 인류를 멸망케 한 '저주병'. 신체 기관이 엉뚱한 곳에 생겨나는 이 병에 걸리면 타운에서 쫓겨난다. 미트파이 한 판만 손에 들린 채. 이교의 친구 램도 뒷통수에 입이 생겨나 쫓겨났다. 이교는 램과 함께 나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자신이 숨긴 꿰맨 눈을 떠올린다.


세 편의 단편이 있는데, 연작이다. 다른 것을 틀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독선에 관한 이야기. 그들이 내세우는 기준이, 선이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 


히노, 나는 그 무수한 별의 수만큼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해. 우리의 손에 묻은 피와 파이를 먹은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시간과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걸 생각해. 우리가 지금껏 믿어온 것에 대해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오늘은 꼭 파이를 완성하고 싶어.

할 수 있겠지? (127~128쪽) 「히노의 파이」 



9. 모리스 씨의 눈부신 인생(앤 그리핀, 허진 역. 복복서가. 2023. 328쪽)

: 여든네 살 모리스. 오래전 마을의 지주댁 돌러드 가이자 가장 큰 저택이었던 호텔의 바에 앉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다섯 명에 관해 회상한다. 형 토니, 태어나지 못한 딸 몰리, 정신질환을 앓던 처제 노린, 아들 케빈 그리고 아내 셰이디. 아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이지만 독백이다. 모리스는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돌러드 가에서 일했다. 늘 모리스를 돌봐주고 위해줬던 형 토니가 스물한 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 돌러드 가에서 일하던 엄마와 모리스는 허락을 받지 못해 임종도 못했다. 모리스는 돌러드 가의 망나니 아들에게 작은 복수를 한다.


죽음이 임박한 80대 노인의 심정을 알 수 없기에, 모리스의 마지막 행보 - 금화에 관한 - 가 조금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그 긴 세월 자체가, 그리고 모리스 해리건의 지난 행적이 돌러드 가에게 충분한 복수가 되었을 거라 생각됐다. 결말은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모리스 씨의 일생은 정말 눈부셨다. 그 힘들었던 삶이 이렇게라도 빛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0. 유령의 벽(세라 모스, 이지예 역. 프시케의숲. 2021. 203쪽)

https://blog.aladin.co.kr/yujin/15509182



11. 7인의 집행관(김보영. 폴라북스. 2023. 560쪽)

: '나'는 조직의 두목에게 버림받았다. 겉으로는 임무인 듯 보이는 하지만 사실은 나를 죽이려는 덫 안으로 걸어들어가 결국엔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건 내 첫 번째 사형 집행이다. 나는 중죄를 지었고 내 죄는 한 번의 사형으로는 부족하여 내겐 총 일곱 번의 사형 집행이 선고된다. 하지만 집행관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세계에서 난 번번이 살아남는다.


아니, 종국에는 죽는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만 그 과정이 설계대로 무난하지 않고, 나는 조금씩 깨닿는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진짜 죄는 무엇인지. 그냥 이렇게만 흘러가면 더 좋았을텐데, '시스템'이라는 개입이 있어서 조금 삐끗했다(독자로서의 내 마음이).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흑영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개정 전의 작품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 



12. 모두 다른 아버지(이주란. 민음사. 2017. 276쪽)

: 작가의 첫 단편집. 난 이 작가의 이후 작품집들을 먼저 읽어서 이 작품집이 꽤 신선했다. 최근 작품들이 더 순해진 느낌이고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아무래도 덜 다듬어지고 살짝 더 매콤하다(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이 작가의 작품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보이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에듀케이션」.



13. 처녀들, 자살하다(제프리 유제니디스, 이화연 역. 민음사. 2011. 300쪽)

: 1970년대 한 작은 마을에서 열 세 살 서실리아가 욕조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리즈번 가의 다섯 딸들 중 막내인 그녀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부모는 아이를 위해 동네 남자아이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어 주지만 파티 도중 서실리아는 다시 창 밖으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13개월 후, 서실리아의 네 언니들은 차츰 학교와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고 어느날 이들을 탈출시키고자 집에 들어온 남자아이들이 집안을 서성이는 동안 차례로 자살한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어서 마음이 덜 아플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녀들을 가두고 스스로도 갇혀 버린 리즈번 부부의 어리석음은 차치하고라도, 서실리아의 죽음 이후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고 해석해서 이용하려는 어른들의 무신경함은 책 밖의 내게도 큰 상처였다. (게다가 역자 해설의 무배려까지). 책의 마지막 문장은 "(전략)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291쪽)"이고, 나 또한 애타게 그들을 불렀다. 하지만 리즈번 자매들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지붕에서 몸을 던지고 오븐에 머리를 넣고 손목을 그을까.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14. 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벤저민 스티븐슨, 이수이 역. 아르테. 2024. 496쪽)

: 소설가 어니스트는 가족 모임에 소환된다. 가기 싫다. 3년 전 형 마이클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시신 처리를 도와주다, 아직 죽지 않은 그를 형이 다시(?) 죽이는 걸 목격하고 경찰에 진술한 이후로 가족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왕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모임은 형의 석방을 축하하는 자리. 눈 쌓인 휴양지로 가니 이미 형과 자신의 전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족들이 모여 있다. 다음날 아침 휴양지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재밌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주는 즐거움이 컸다. 어찌 보면 막장 가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어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고. 범인은 처음부터 예상하던 사람이긴 했지만 그 사람의 정체는 뜻밖이었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긴 했는데 화자를 비롯한 가족들이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게 한국인으로서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15.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조예은. 안전가옥. 2023. 364쪽)

: 3년전 야무시에서는 묻지마 테러가 터진다. 야무시 최고급 아파트 '씨더뷰파크'에서 이사떡으로 가장한 독이 든 꿀떡을 먹고 9명이 사망한 사건. 이 사건으로 아파트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화영의 엄마도 돌아가셨다. 화영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 음침하고 오래된 레인보우 아파트의 셰어하우스에 들어간다. 알바를 몇 개씩 하며 악착같이 집 보증금을 모아 이 수챗구멍에서 나갈 계획을 하던 화영에게 집주인이 거액을 벌 수 있다며 원조교제 협박 알바를 제안하고, 안 하면 월세를 올리겠다는 윽박지름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한 화영은 갑자기 돌변해서 자기를 죽이려는 킬러와 마주한다.


재밌고 끔찍했다. 책 속에서의 빌런은 한 사람이지만, 그의 욕망이 정말 그 한 사람만의 것일까? 그만한 지위와 돈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굴복했을 수 있는, 그런 욕망 아닌가? 테디베어와 화영은 서로를 구원하지만 현실에서의 우리에게 테디베어는 없다. 소설 속 해피엔딩이 소중한 이유이다.



16. 사서일기(앨리 모건,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3. 464쪽)

https://blog.aladin.co.kr/yujin/15511105



17. 여행자와 달빛(세르브 언털, 김보국 역. 휴머니스트. 2023. 396쪽)

: 이탈리아에서 신혼 여행중인 미하이와 에르지. 이들 앞에 갑자기 미하이의 학창시절 친구 세페트네키가 나타나 미하이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미하이는 아내에게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발작 증세와 그 증상이 불현듯 사라지게 됐던 순간 옆에 있던 터마시와 친구가 되고 터마시의 여동생 에버와도 함께 어울리던 시절, 그리고 세페트네키와 에르빈이 합류한 이후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이동하던 중 중간 기착지에서 아내가 탄 기차를 놓치고 엉뚱한 도시로 향한다.


사실 중반을 넘어서자 문득 결말을 알 것 같았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이건 늙은 소년의 이야기. 미하이가 대학 친구이자 이제는 종교사 교수인 발트하임을 만나 터마시의 생각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장면에서 나는 미하이가 과거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전혀 성장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어쩌면 퇴행인지도. 그래도 결말에서 아주 약간의 희망이 보이기는 했다. 늙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8. 축복을 비는 마음(김혜진. 문학과지성사. 2023. 292쪽)

: 집을 소재로 한 8편의 단편들. 집은 단순히 사는 곳 이상이다. 신분과 재산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때로는 직업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 좁은 나라에서 집이란 정말 애증의 대상이기에 사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사람이 있어 가느다란 한줄기 희망이라도 건질 수 있다. 


핍진성이 강하여 계속 옛날 생각을 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작가는 늘 기대를 충족시킨다.



19. 3인의 명탐정(레오 브루스, 김예진 역. 엘릭시르. 2023. 424쪽)

: 나 타운젠드는 서스턴 저택의 주말에 초대받아 머물고 있다. 의사였던 주인 서스턴 박사와 서스턴 부인, 변호사 샘 윌리엄스, 소설가 노리스, 경마를 좋아하는 젊은이 레오먼드 등이 머물고 있는 이 저택의 저녁 시간, 갑자기 들린 여자의 비명 소리에 뛰어가 보니 완전히 잠겨 있던 서스턴 부인의 방에서 부인이 살해당했다. 당시 노리스와 레오먼드는 각자 자기 방에 있었고 서스턴 박사와 타운젠드, 윌리엄스는 함께 있었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3인의 유명 탐정 - 귀족 플림솔 경, 프랑스인 아메르 피콩, 스미스 신부 - 이 달려와 각자 추리를 시작한다.


윌리엄 비프 경사 시리즈의 첫 권이라고 했기에 사건을 누가 해결하는지는 처음부터 명백하다. 다만 비프 경사의 활약은 거의 안 보인다. 이 작품의 초점은 세 탐정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비프 경사 시리즈가 있다는 걸 몰랐다면 각각 도로시 세이어스의 피터 윔지 경,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와르, 길버트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를 패러디한 이 세명의 논리를 따라가며 과연 누가 맞을까를 지켜보는 게 흥미진진했을텐데. 물론 누가 범인인지 나름 추정해 보긴 했지만, 역시나 맞추지 못했다. 게다가 난 피터 윔지 경은 안 좋아하고 브라운 신부는 안 읽었어... 비프 경사의 추리도 추리라고 할 수조차 없는 게, 그가 활용한 증거는 결말에서 그냥 싱겁게 오픈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왔으면 이 소설은 아예 쓰여지지도 못했겠지. 경사도 처음부터 범인은 명백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가 최소 한 권 정도는 더 나와줬음 좋겠다. 그걸 읽어야 판단이 될 거 같다.



20. 각각의 계절(권여선. 문학동네. 2023. 276쪽)

: 첫번째 작품 「사슴벌레 문답」을 절반 못 되게 읽었을 때, 너무 좋아서 계속 도그지어를 만들었다. 이 작가가 가끔씩 드러내는 이런 순함을 나는 좋아하므로. 그러다 이 작품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내가 화자처럼 눈을 가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후로 읽은 작품들은 다 아팠다. 기억을, 과거를 그리고 현재를 직시해야만 그 아픔이 의미가 있으리라. 



21. 밤은 내가 가질게(안보윤. 문학동네. 2023. 276쪽)

: 연작인 듯한 7편의 단편들. 사건 이후를 이야기한다. 성범죄를 저지른 오빠가 구속된 이후의 여동생을(「어떤 진심」), 아동 학대를 당하고 자라서 어머니의 다른 아동 학대를 마주한 딸을(「미도」), 학교폭력 가해자의 죽음 이후를(「애도의 방식」). 


읽기가 쉽진 않았다. 안보윤이라 각오는 했지만. 중간에 유영(「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때문에 한숨 돌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22.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서점들에 붙이는 각주(밥 엡스타인 글, 그림, 최세희 역. 현대문학. 2019. 192쪽)

: 저자가 선별한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서점들을 소개한다. 사실 그림이 예뻐서 골랐다. 머리 식히는 기분으로 읽다가 하버드 서점에서 기분이 상했다. 책의 구성이, 왼쪽에는 서점의 간단한 약력과 서점 주인이나 직원, 손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글이 있고 오른쪽에는 저자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있는데, 하버드 서점 직원의 그 행동은 범죄 아닌가? 법적인 책임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도의적인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꽤나 불쾌했다. 이와는 별개로 저자의 그림들은 예쁘기는 했다. 하지만 하버드 직원의 에피소드를 굳이 책에 넣은 저자의 젠더의식은...



23. 락 에브리 도어(라일리 세이거, 오세영 역. 혜지원. 2022. 400쪽)

: 뉴욕 센트럴 파크 근처의 오래된 고급 아파트 세인트 바트. 사람들에게 바솔로뮤로 불리는 이 건물은 그 역사와 화려함에 비해 매우 폐쇄적이다. 입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지만 누구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 줄스는 회사의 구조조정과 남자친구의 불륜을 한꺼번에 당하고 친구 집 소파에서 신세지는 상황이다. 구인공고를 보던 중 바솔로뮤의 빈 집에서 3개월만 살아주면 큰 돈을 준다는 아파트시터 공고를 보게 되고, 어릴 때부터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으며 바솔로뮤에 입성하는 꿈을 꿨던 줄스는 면접을 보고 합격한다. 화려한 집에서의 첫날 밤, 줄스는 집안에 누가 있는 듯한 소리에 잠을 깬다. 그리고 다음날, 센트럴 파크에서 같은 아파트시터인 인그리드와 마주쳐 친구가 되고, 매일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날 밤 건물을 울리는 비명소리에 인그리드를 찾아간 줄스는 어딘가 이상한 그녀를 보게 되고, 다음날 인그리드는 사라진다.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긴장하며 읽었다. 작품 분위기도 결말도 맘에 들었다. 범인은 처음 짐작했던 그 사람이기는 했지만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는 짐작하지 못했었기에 더 재미있는 한편 씁쓸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나 돈 많은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란. 이 작가의 작품들이 계속 번역출간됐으면 좋겠다.



24. 아홉수 가위(범유진. 안전가옥. 2021. 142쪽)

: 환상적이지만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는 4편의 단편들. 버는 족족 부모님의 편애하는 장남에게 쪽쪽 빨리는 k-장녀(「1호선에서 빌런을 만났습니다」), 다름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쌍둥이 자매(「아주 작은 날갯짓을 너에게 줄게」), 진짜 힘을 숨긴 소년의 이야기(「어둑시니 이끄는 밤」)와 함께 내 맘에 가장 들었던 폐가에서 귀신과의 동거 이야기인 표제작이 실려 있다. 표제작 외에는 속시원하지는 않다. 복수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나서. 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진 삶을 기대할 수 있기에 희망을 가져본다. 



25. 나이트북(J. A. 화이트, 도현승 역. 위니더북. 2019. 296쪽)

: 알렉스는 늦은 밤 부모님 몰래 집을 나선다. 가방 안에는 그동안 써왔던 무서운 이야기들이 가득한 노트들이 들어 있다. 알렉스는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쓰고 평범한 아이로 살고 싶다. 지하로 내려가려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엘리베이터는 4층에 멈추고,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대사가 들려오는 집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 알렉스는 마녀의 손아귀에 잡히고 만다. 


그 유명한 이야기의 오마주인 걸 끝부분에서야 알았다. 잘 쓴 소설이다. 알렉스의 나이트북에 쓰여진 이야기들도 다 재미있었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새로운 관계를 망설이는 마음과 시련 앞에 무너지는 마음, 그럼에도 놓지 않는 희망이 잘 그려진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오마주이지만 세세한 설정들은 다 새로웠고 묘사는 생생했다. 초등 고학년 정도라면 정말정말 좋아할 듯. 물론 어른이 읽어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7인의 집행관
김보영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름다운 흑영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개정 전의 작품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두 다른 아버지
이주란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이 작가의 이후 작품집들을 먼저 읽어서 이 작품집이 꽤 신선했다. 최근 작품들이 더 순해진 느낌이고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아무래도 덜 다듬어지고 살짝 더 매콤하다(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이 작가의 작품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보이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에듀케이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마지막 문장은 "(전략)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291쪽)"이고, 나 또한 애타게 그들을 불렀다. 하지만 리즈번 자매들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지붕에서 몸을 던지고 오븐에 머리를 넣고 손목을 그을까.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
벤저민 스티븐슨 지음, 이수이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밌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주는 즐거움이 컸다. 어찌 보면 막장 가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어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