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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게 무해한 사람(최은영. 문학동네. 2018. 328쪽)

: 헤어지는 이야기. 그들이 함께하게 된 시작이 사랑이었든 우정이었든 영원한 관계란 없다. 헤어짐의 과정은 길고 고통스러우며 먼저 알아챈다해도 덜 상처받는 건 아니다. 


읽기에 쉽지 않아서 오래 읽었다. 잘 쓴 글들이지만 마음이 많이 아려와서 깊고 긴 한숨을 내쉬어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2. 블랙케이크(샤메인 윌커슨, 서재인 역. 열린책들 2023. 584쪽)

: 엄마 엘리너는 돌아가시면서 냉동실에 블랙케이크 한 개와 긴 녹음 파일을 남겼고, 8년간 왕래가 없던 남매 베니와 바이런은 유언에 따라 함께 녹음 파일을 들어야 한다. 녹음은 1967년 카리브해 어느 섬에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블랙케이크는 결혼을 위한 것. 오랜 시간 럼에 절인 과일들과 검은 설탕을 이용해서 만드는. 오래전 카리브해의 섬에서 아빠의 도박빚에 팔려간 커비라는 소녀의 결혼식을 위해 구워진 블랙케이크는 정작 소녀의 입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커비는 나이 많고 폭력적인 신랑의 살해 혐의를 피해 도망을 쳤다.


작은 섬 출신 검은 피부의 소녀는 3중의 억압을 견뎌야 한다. 출신지, 피부색, 성별. 소녀의 수학적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든 소녀가 아무리 많은 책을 읽든 소녀는 그냥 흑인 여자애일 뿐이다. 어쩌면 이전에도 늘 이야기되던, 흔한 스토리일 지도 모르지만 읽을 때마다 새삼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커비의 인생은 여러 사람들 특히 여러 여성들의 도움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게 내겐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너와 에타의 이야기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들은 괜찮았을까? 마음이 함께하니까? 서로가 무사하니까? 더이상은 이런 희생은, 이런 외면은 없었으면.



3. 들끓는 꿈의 바다(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역. 창비. 2023. 352쪽)

: 성공한 건축가인 첫째 애나와 역시 성공한 사업가 막내 터조는 엄마 프랜시를 모시고 있는 형제 토미의 연락을 받고 고향 태즈매니아로 돌아온다. 프랜시는 위독하다. 프랜시는 환각을 보고,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데 애나와 터조는 엄마가 연명치료를 거부했다는 토미의 말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엄마를 살리고자 인맥과 경제력을 총동원한다. 이 와중에 애나는 정말 해야할 업무상 연락 대신 SNS를 보는 걸, 최악의 산불 사태 때문에 멸종되는 동식물들을 헤아리는 걸 멈출 수 없고, 어느날 자신의 새끼 손가락이 사라진 걸 발견한다.


(스포)

애나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면서 그녀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애나가 들여다보는 SNS는 단순히 회피의 수단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사회, 자연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엄마의 병세와 산불의 확산 및 생태계 파괴, 생물 멸종이 같은 곡선을 그리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나에게 화가 났던 건, 삶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살아있는 한 생활은, 인생은 이어져야 하므로. 그래서 가장 약했던 토미가 끝까지 살아남아 프랜시의 뜻을 이뤄준다는 게 다행이면서 조금 허무하기도 했다. 서글프기도 했고. 삶이, 나라는 인간의 멸滅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게.



4.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유영광. 클레이하우스. 2023. 328쪽)

: 고등학생 세린은 가난한 집이 지겹다.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와는 얼굴도 보기 힘들고, 동생은 집을 나가버린 지 오래다. 입시 학원은커녕 세린이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곳은 문화센터 태권도 교실 뿐이다. 세린이는 오래된 폐가에 자신의 불행을 적어 보내 당첨이 되면 불행을 팔고 행복을 살 수 있다는 도시전설을 적은 책을 읽으며 꿈을 꾼다. 어느날 정말로 세린에게 초대장이 도착한다.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올드한 배경과 분위기에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그건 시대적 배경이 정확히 나온 게 아니라서 그냥 읽었는데, 젠더 감수성 부족(60쪽), 미숙한 서술, 딱히 틀렸다고 할 것까진 아닐지라도 맥락이 맞지 않는 어색한 문장들(39쪽, 53쪽, 89쪽 등등... 더 기록하지도 않았다), 디테일 부족(137쪽) 등이 계속 거슬렸다. 게다가 세린은 나이에 비해 현실감도 부족하다. 구슬에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청할 때 보면 초등 고학년 정도 되는 거 같다. 


(약스포)

전체적으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와 비슷하다. 설정만 다르고... 그래도 도깨비 이야기를 살린 건 맘에 들었다. 애시당초 그것 때문에 읽은 거지만. 



5. 우리의 열 번째 여름(에밀리 헨리, 송섬별 역. 해남. 2022. 488쪽)

: 뉴욕의 여행 잡지사에서 일하는 파피와 고향 린필드에서 교사로 일하는 알렉스는 같은 대학 출신이다. 파티에서 처음 만났지만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여름 방학 때 카풀을 하게 되면서 친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여름 휴가는 함께 보내기로 약속했다. 열 번째 여름인 올해는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둘이 오랜만에 함께 하기로 한 휴가다. 파피는 이전 휴가에서의 실수와 어색한 둘의 사이를 만회하려 한다.


무난한 로코. 내용이야 뻔할 수 있지만, 난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다. 파피의 시점이라서 얼핏 읽기에는 파피가 알렉스를 너무 좋아해서 계속 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렉스의 마음 또한 감춰지지 않는다. 긴 시간 동안 둘의 마음이 어떻게 2차원 소용돌이 무늬처럼 바깥에서 안으로 스며들어가는지 지켜보는 간질간질함이 있다. 따뜻한 봄날 벚꽃 아래에서 읽기 좋은 소설. 난 15층에서 벚꽃을 내려다보며 읽었지만.



6. 수면 아래(이주란. 문학동네. 2022. 200쪽)

: '나'는 고등학교 동창인 우경과 결혼했다 이혼하고 지금은 고향 고물상에서 일하고 있다. 우경과는 아직도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편하게 지낸다. 같이 저녁을 먹고 산책도 하고. 


이 작가의 인물들은 다 착하다. 나쁜 맘을 먹지 않는다. 나쁜 일을 겪고 어쩌면 나쁜 행동을 할지언정. 아픔은 수면 아래 묻어둔다. 물론 파문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곧 깊은 호수처럼 파문은 가라앉고 다시 고요해 질 것이다.



7. 나비 정원(닷 허치슨, 김옥수 역. 소담출판사. 2018. 440쪽)

: 도시 한가운데 커다란 유리 정원에서 불이 난다. 그 안에서 등에 나비 날개를 문신한 13명의 소녀와 3명의 남자가 발견되고, 이 사건을 담당하는 FBI 빅터는 생존한 소녀들이 의지하는 소녀 마야를 심문하기 시작한다. 마야는 그 이상한 정원에서 무슨 역할을 한 걸까?


『양들의 침묵』을 잇는 사이코 스릴러 맞다. 이렇게 기괴한 이야기라니, 역겨웠다.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낸 작가의 심리가 궁금하기도 하고. 마야의 역할은 궁금하지 않았다, 너무 뻔해서. 이야기의 전말 특히 이들이 어떻게 구출되었는지가 궁금해서 읽었는데, 사실 번역문체가 너무 별로였다. 워싱턴대 학생이나 결손가정 출신 10대 여자애나 식당 잡역부 등 모든 등장인물들의 어투가 똑같은 건 차치하고라도 '~해서 그랬다'가 아닌 '~해 그러했다','~터이니 ~한다'는 식의 문체는 이런 장르에는 특히 안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중반 이후에는 비문과 오타가 너무 많아서 짜증마저 났다. 잦은 쉼표 사용은 흐름을 끊기 일쑤였다. 



8. 꿰맨 눈의 마을(조예은. 자음과모음. 2023. 192쪽)

: '타운'에는 이전 그대로의 신체를 가진 사람들만 살고 있다. 인류를 멸망케 한 '저주병'. 신체 기관이 엉뚱한 곳에 생겨나는 이 병에 걸리면 타운에서 쫓겨난다. 미트파이 한 판만 손에 들린 채. 이교의 친구 램도 뒷통수에 입이 생겨나 쫓겨났다. 이교는 램과 함께 나가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자신이 숨긴 꿰맨 눈을 떠올린다.


세 편의 단편이 있는데, 연작이다. 다른 것을 틀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독선에 관한 이야기. 그들이 내세우는 기준이, 선이 얼마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지. 


히노, 나는 그 무수한 별의 수만큼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해. 우리의 손에 묻은 피와 파이를 먹은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시간과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걸 생각해. 우리가 지금껏 믿어온 것에 대해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오늘은 꼭 파이를 완성하고 싶어.

할 수 있겠지? (127~128쪽) 「히노의 파이」 



9. 모리스 씨의 눈부신 인생(앤 그리핀, 허진 역. 복복서가. 2023. 328쪽)

: 여든네 살 모리스. 오래전 마을의 지주댁 돌러드 가이자 가장 큰 저택이었던 호텔의 바에 앉아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다섯 명에 관해 회상한다. 형 토니, 태어나지 못한 딸 몰리, 정신질환을 앓던 처제 노린, 아들 케빈 그리고 아내 셰이디. 아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이지만 독백이다. 모리스는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돌러드 가에서 일했다. 늘 모리스를 돌봐주고 위해줬던 형 토니가 스물한 살에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 돌러드 가에서 일하던 엄마와 모리스는 허락을 받지 못해 임종도 못했다. 모리스는 돌러드 가의 망나니 아들에게 작은 복수를 한다.


죽음이 임박한 80대 노인의 심정을 알 수 없기에, 모리스의 마지막 행보 - 금화에 관한 - 가 조금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그 긴 세월 자체가, 그리고 모리스 해리건의 지난 행적이 돌러드 가에게 충분한 복수가 되었을 거라 생각됐다. 결말은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모리스 씨의 일생은 정말 눈부셨다. 그 힘들었던 삶이 이렇게라도 빛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10. 유령의 벽(세라 모스, 이지예 역. 프시케의숲. 2021. 203쪽)

https://blog.aladin.co.kr/yujin/15509182



11. 7인의 집행관(김보영. 폴라북스. 2023. 560쪽)

: '나'는 조직의 두목에게 버림받았다. 겉으로는 임무인 듯 보이는 하지만 사실은 나를 죽이려는 덫 안으로 걸어들어가 결국엔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건 내 첫 번째 사형 집행이다. 나는 중죄를 지었고 내 죄는 한 번의 사형으로는 부족하여 내겐 총 일곱 번의 사형 집행이 선고된다. 하지만 집행관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세계에서 난 번번이 살아남는다.


아니, 종국에는 죽는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만 그 과정이 설계대로 무난하지 않고, 나는 조금씩 깨닿는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진짜 죄는 무엇인지. 그냥 이렇게만 흘러가면 더 좋았을텐데, '시스템'이라는 개입이 있어서 조금 삐끗했다(독자로서의 내 마음이).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흑영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개정 전의 작품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 



12. 모두 다른 아버지(이주란. 민음사. 2017. 276쪽)

: 작가의 첫 단편집. 난 이 작가의 이후 작품집들을 먼저 읽어서 이 작품집이 꽤 신선했다. 최근 작품들이 더 순해진 느낌이고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아무래도 덜 다듬어지고 살짝 더 매콤하다(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이 작가의 작품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보이지만. 가장 좋았던 건 「에듀케이션」.



13. 처녀들, 자살하다(제프리 유제니디스, 이화연 역. 민음사. 2011. 300쪽)

: 1970년대 한 작은 마을에서 열 세 살 서실리아가 욕조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리즈번 가의 다섯 딸들 중 막내인 그녀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부모는 아이를 위해 동네 남자아이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어 주지만 파티 도중 서실리아는 다시 창 밖으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13개월 후, 서실리아의 네 언니들은 차츰 학교와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고 어느날 이들을 탈출시키고자 집에 들어온 남자아이들이 집안을 서성이는 동안 차례로 자살한다.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어서 마음이 덜 아플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녀들을 가두고 스스로도 갇혀 버린 리즈번 부부의 어리석음은 차치하고라도, 서실리아의 죽음 이후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고 해석해서 이용하려는 어른들의 무신경함은 책 밖의 내게도 큰 상처였다. (게다가 역자 해설의 무배려까지). 책의 마지막 문장은 "(전략)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291쪽)"이고, 나 또한 애타게 그들을 불렀다. 하지만 리즈번 자매들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지붕에서 몸을 던지고 오븐에 머리를 넣고 손목을 그을까.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집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14. 우리 가족은 모두 살인자다(벤저민 스티븐슨, 이수이 역. 아르테. 2024. 496쪽)

: 소설가 어니스트는 가족 모임에 소환된다. 가기 싫다. 3년 전 형 마이클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시신 처리를 도와주다, 아직 죽지 않은 그를 형이 다시(?) 죽이는 걸 목격하고 경찰에 진술한 이후로 가족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왕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모임은 형의 석방을 축하하는 자리. 눈 쌓인 휴양지로 가니 이미 형과 자신의 전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족들이 모여 있다. 다음날 아침 휴양지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재밌었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주는 즐거움이 컸다. 어찌 보면 막장 가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어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고. 범인은 처음부터 예상하던 사람이긴 했지만 그 사람의 정체는 뜻밖이었다. 사실 그 부분이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긴 했는데 화자를 비롯한 가족들이 심상하게 받아들이는 게 한국인으로서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15.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조예은. 안전가옥. 2023. 364쪽)

: 3년전 야무시에서는 묻지마 테러가 터진다. 야무시 최고급 아파트 '씨더뷰파크'에서 이사떡으로 가장한 독이 든 꿀떡을 먹고 9명이 사망한 사건. 이 사건으로 아파트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화영의 엄마도 돌아가셨다. 화영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 음침하고 오래된 레인보우 아파트의 셰어하우스에 들어간다. 알바를 몇 개씩 하며 악착같이 집 보증금을 모아 이 수챗구멍에서 나갈 계획을 하던 화영에게 집주인이 거액을 벌 수 있다며 원조교제 협박 알바를 제안하고, 안 하면 월세를 올리겠다는 윽박지름에 어쩔 수 없이 가담한 화영은 갑자기 돌변해서 자기를 죽이려는 킬러와 마주한다.


재밌고 끔찍했다. 책 속에서의 빌런은 한 사람이지만, 그의 욕망이 정말 그 한 사람만의 것일까? 그만한 지위와 돈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굴복했을 수 있는, 그런 욕망 아닌가? 테디베어와 화영은 서로를 구원하지만 현실에서의 우리에게 테디베어는 없다. 소설 속 해피엔딩이 소중한 이유이다.



16. 사서일기(앨리 모건,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3. 464쪽)

https://blog.aladin.co.kr/yujin/15511105



17. 여행자와 달빛(세르브 언털, 김보국 역. 휴머니스트. 2023. 396쪽)

: 이탈리아에서 신혼 여행중인 미하이와 에르지. 이들 앞에 갑자기 미하이의 학창시절 친구 세페트네키가 나타나 미하이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미하이는 아내에게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발작 증세와 그 증상이 불현듯 사라지게 됐던 순간 옆에 있던 터마시와 친구가 되고 터마시의 여동생 에버와도 함께 어울리던 시절, 그리고 세페트네키와 에르빈이 합류한 이후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이동하던 중 중간 기착지에서 아내가 탄 기차를 놓치고 엉뚱한 도시로 향한다.


사실 중반을 넘어서자 문득 결말을 알 것 같았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이건 늙은 소년의 이야기. 미하이가 대학 친구이자 이제는 종교사 교수인 발트하임을 만나 터마시의 생각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장면에서 나는 미하이가 과거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전혀 성장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어쩌면 퇴행인지도. 그래도 결말에서 아주 약간의 희망이 보이기는 했다. 늙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8. 축복을 비는 마음(김혜진. 문학과지성사. 2023. 292쪽)

: 집을 소재로 한 8편의 단편들. 집은 단순히 사는 곳 이상이다. 신분과 재산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때로는 직업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 좁은 나라에서 집이란 정말 애증의 대상이기에 사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사람이 있어 가느다란 한줄기 희망이라도 건질 수 있다. 


핍진성이 강하여 계속 옛날 생각을 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작가는 늘 기대를 충족시킨다.



19. 3인의 명탐정(레오 브루스, 김예진 역. 엘릭시르. 2023. 424쪽)

: 나 타운젠드는 서스턴 저택의 주말에 초대받아 머물고 있다. 의사였던 주인 서스턴 박사와 서스턴 부인, 변호사 샘 윌리엄스, 소설가 노리스, 경마를 좋아하는 젊은이 레오먼드 등이 머물고 있는 이 저택의 저녁 시간, 갑자기 들린 여자의 비명 소리에 뛰어가 보니 완전히 잠겨 있던 서스턴 부인의 방에서 부인이 살해당했다. 당시 노리스와 레오먼드는 각자 자기 방에 있었고 서스턴 박사와 타운젠드, 윌리엄스는 함께 있었다. 이 사건이 보도되자 3인의 유명 탐정 - 귀족 플림솔 경, 프랑스인 아메르 피콩, 스미스 신부 - 이 달려와 각자 추리를 시작한다.


윌리엄 비프 경사 시리즈의 첫 권이라고 했기에 사건을 누가 해결하는지는 처음부터 명백하다. 다만 비프 경사의 활약은 거의 안 보인다. 이 작품의 초점은 세 탐정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비프 경사 시리즈가 있다는 걸 몰랐다면 각각 도로시 세이어스의 피터 윔지 경,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르퀼 푸와르, 길버트 체스터턴의 브라운 신부를 패러디한 이 세명의 논리를 따라가며 과연 누가 맞을까를 지켜보는 게 흥미진진했을텐데. 물론 누가 범인인지 나름 추정해 보긴 했지만, 역시나 맞추지 못했다. 게다가 난 피터 윔지 경은 안 좋아하고 브라운 신부는 안 읽었어... 비프 경사의 추리도 추리라고 할 수조차 없는 게, 그가 활용한 증거는 결말에서 그냥 싱겁게 오픈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왔으면 이 소설은 아예 쓰여지지도 못했겠지. 경사도 처음부터 범인은 명백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시리즈가 최소 한 권 정도는 더 나와줬음 좋겠다. 그걸 읽어야 판단이 될 거 같다.



20. 각각의 계절(권여선. 문학동네. 2023. 276쪽)

: 첫번째 작품 「사슴벌레 문답」을 절반 못 되게 읽었을 때, 너무 좋아서 계속 도그지어를 만들었다. 이 작가가 가끔씩 드러내는 이런 순함을 나는 좋아하므로. 그러다 이 작품의 후반에 이르러서야 내가 화자처럼 눈을 가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후로 읽은 작품들은 다 아팠다. 기억을, 과거를 그리고 현재를 직시해야만 그 아픔이 의미가 있으리라. 



21. 밤은 내가 가질게(안보윤. 문학동네. 2023. 276쪽)

: 연작인 듯한 7편의 단편들. 사건 이후를 이야기한다. 성범죄를 저지른 오빠가 구속된 이후의 여동생을(「어떤 진심」), 아동 학대를 당하고 자라서 어머니의 다른 아동 학대를 마주한 딸을(「미도」), 학교폭력 가해자의 죽음 이후를(「애도의 방식」). 


읽기가 쉽진 않았다. 안보윤이라 각오는 했지만. 중간에 유영(「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 때문에 한숨 돌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22.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서점들에 붙이는 각주(밥 엡스타인 글, 그림, 최세희 역. 현대문학. 2019. 192쪽)

: 저자가 선별한 지구상에서 가장 멋진 서점들을 소개한다. 사실 그림이 예뻐서 골랐다. 머리 식히는 기분으로 읽다가 하버드 서점에서 기분이 상했다. 책의 구성이, 왼쪽에는 서점의 간단한 약력과 서점 주인이나 직원, 손님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글이 있고 오른쪽에는 저자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있는데, 하버드 서점 직원의 그 행동은 범죄 아닌가? 법적인 책임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도의적인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꽤나 불쾌했다. 이와는 별개로 저자의 그림들은 예쁘기는 했다. 하지만 하버드 직원의 에피소드를 굳이 책에 넣은 저자의 젠더의식은...



23. 락 에브리 도어(라일리 세이거, 오세영 역. 혜지원. 2022. 400쪽)

: 뉴욕 센트럴 파크 근처의 오래된 고급 아파트 세인트 바트. 사람들에게 바솔로뮤로 불리는 이 건물은 그 역사와 화려함에 비해 매우 폐쇄적이다. 입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지만 누구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 줄스는 회사의 구조조정과 남자친구의 불륜을 한꺼번에 당하고 친구 집 소파에서 신세지는 상황이다. 구인공고를 보던 중 바솔로뮤의 빈 집에서 3개월만 살아주면 큰 돈을 준다는 아파트시터 공고를 보게 되고, 어릴 때부터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읽으며 바솔로뮤에 입성하는 꿈을 꿨던 줄스는 면접을 보고 합격한다. 화려한 집에서의 첫날 밤, 줄스는 집안에 누가 있는 듯한 소리에 잠을 깬다. 그리고 다음날, 센트럴 파크에서 같은 아파트시터인 인그리드와 마주쳐 친구가 되고, 매일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다. 그런데 그날 밤 건물을 울리는 비명소리에 인그리드를 찾아간 줄스는 어딘가 이상한 그녀를 보게 되고, 다음날 인그리드는 사라진다.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긴장하며 읽었다. 작품 분위기도 결말도 맘에 들었다. 범인은 처음 짐작했던 그 사람이기는 했지만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는 짐작하지 못했었기에 더 재미있는 한편 씁쓸하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나 돈 많은 인간들의 사고방식이란. 이 작가의 작품들이 계속 번역출간됐으면 좋겠다.



24. 아홉수 가위(범유진. 안전가옥. 2021. 142쪽)

: 환상적이지만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는 4편의 단편들. 버는 족족 부모님의 편애하는 장남에게 쪽쪽 빨리는 k-장녀(「1호선에서 빌런을 만났습니다」), 다름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쌍둥이 자매(「아주 작은 날갯짓을 너에게 줄게」), 진짜 힘을 숨긴 소년의 이야기(「어둑시니 이끄는 밤」)와 함께 내 맘에 가장 들었던 폐가에서 귀신과의 동거 이야기인 표제작이 실려 있다. 표제작 외에는 속시원하지는 않다. 복수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나서. 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진 삶을 기대할 수 있기에 희망을 가져본다. 



25. 나이트북(J. A. 화이트, 도현승 역. 위니더북. 2019. 296쪽)

: 알렉스는 늦은 밤 부모님 몰래 집을 나선다. 가방 안에는 그동안 써왔던 무서운 이야기들이 가득한 노트들이 들어 있다. 알렉스는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쓰고 평범한 아이로 살고 싶다. 지하로 내려가려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엘리베이터는 4층에 멈추고,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대사가 들려오는 집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긴 알렉스는 마녀의 손아귀에 잡히고 만다. 


그 유명한 이야기의 오마주인 걸 끝부분에서야 알았다. 잘 쓴 소설이다. 알렉스의 나이트북에 쓰여진 이야기들도 다 재미있었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새로운 관계를 망설이는 마음과 시련 앞에 무너지는 마음, 그럼에도 놓지 않는 희망이 잘 그려진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의 오마주이지만 세세한 설정들은 다 새로웠고 묘사는 생생했다. 초등 고학년 정도라면 정말정말 좋아할 듯. 물론 어른이 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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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있었던 존재들(원도. 세미콜론. 2024. 192쪽)

: 현직 경찰관이 과학수사대에서 근무하며 목격한 죽음들을 이야기한다. 뉴스에서 한 번쯤은 언급되어졌을 사연들이긴 하지만, 누구보다 가까이서 들여다 봤기에 더 생생하고 더 절절하다. 현장에서의 어려움도 엿보이고. 읽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는 꼭 써줘야 했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2. 로뎀 입숨의 책(구병모. 안온. 2023. 256쪽)

: 13편의 단편들. 각각은 짧고 위트 있으며 재밌지만 묵직하다. 작품마다 작가가 짧게 작품 의도를 언급해 준 것도 좋았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궁서와 하멜른의 남자」였지만 가장 좋았던 건 「영 원의 꿈」.



3. 로베르 선생님의 세번째 복수(장 클로드 무를르비, 윤미연 역. 북극곰. 2023. 220쪽)

: 로베르 선생님은 이제 정년이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시달리느라 고생한 그는 이제 날듯한 심정으로 자신이 원래 교사가 되기로 한 대로, 아이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한다. 어린 시절 따돌림 피해자였던 로베르는 아이들을 마음대로 휘두르려 교사가 됐지만 아이들 인권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교권이 하락하면서 내내 아이들의 무시와 괴롭힘을 당해왔던 것이다. 그 많은 아이들 중 세 명을 추린 로베르.


정년 퇴직을 한 하얀 머리칼의 인자한 선생님은 없다. 과체중인 몸을 끌고 다니며 옛 제자를 염탐하고 계획을 세우는 선생님이 있을 뿐이다. 앞뒤가 안 맞는 듯 하고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해가 가고 조금은 통쾌하기도 한 복수극이다. 세 번째 복수에 이르러서야 조금 어른다운 모습을 보이는 이 책은, 로베르 선생님의 뒤늦은 성장기이다. 난 이 작가를 다시 읽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재밌을 수도 있겠다.



4. 위치스 딜리버리(전삼혜. 안전가옥. 2020. 180쪽)

: 고등학생 보라는 콘서트 티켓값을 벌기 위해 알바를 찾는데, '위치스 딜리버리'라는 특이한 이름의 택배 회사에 가게 된다. 뜻밖에도 진짜 하늘을 나는 마녀 소윤정에게 고용되어 청소기를 타고 마법 물품들을 배달하게 된다.


이 작가는 정말 날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기대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충족시켜 준다. 이번에도 딱 원하는 만큼의 무게감과 가벼움을 조화롭게 분배하여 어디에도 없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표제작만큼 뒤의 연작도 좋았다. 이 시리즈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



5. 중요한 건 살인(앤서니 호로위츠. 이은선 역. 열린책들. 2023. 424쪽)

: 영화배우 아들을 둔 부유한 60대 다이애나는 스스로 장례업체를 찾아가 자신의 장례식을 계획한다. 그리고 여섯 시간 뒤, 자택 거실의 빨간 색 커튼 끈에 목이 졸려 죽은 다이애나를 가사도우미가 발견한다. 다이애나는 죽기 전 점심 식사를 자신의 돈을 투자한 연극 투자자 레이먼드와 함께했는데, 레이먼드는 투자금을 잃고 있다. 아들 데이미언은 아내와 아들이 있지만 사치스러운 생활로 쪼들리고 있다. 게다가 고인은 10년 전 어린 형제 둘을 차로 치여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심각한 뇌 손상을 입어 현재에도 후유증을 앓고 있다. '나' 호로위츠는 이 사건을 수사하는 전직 형사 호손을 따라다니며 책을 쓰기로 한다.


호손이 너무 비호감이라 진도가 잘 안나갔다. 그전에도 성격 나쁘고 사고방식 이상한 탐정들은 꽤 있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 아래 있어서 독자도 어느정도 포용이 가능했는데 이 책은 직접 개입하는 작가 자신이 호손을 싫어해서 그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예쁘게 봐줄 수가 없다.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지었나 보다. 먼저 읽은 이 작가의 작품이 좋았어서 다시 선택했는데, 다음 작품에서는 호손을 보고 싶지 않다.



6. 엘리아스(그라치아 델레다, 나윤덕 역. 마르코폴로. 2023. 260쪽)

: 경미한 절도죄로 감옥에 다녀온 엘리아스 포르톨루. 고향 사르데냐 섬의 누오로로 돌아오니 형은 약혼을 해 두 집안이 한 집인 것처럼 지내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축제일, 모두 함께 산 위의 수도원으로 향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 엘리야스는 형의 약혼녀가 계속 눈에 밟히는데 그녀 또한 엘리아스를 바라본다는 걸 알아챈다.


읽는 내내 답답하고 화도 났다. 하지만 엘리아스의 모습은, 막달레나의 모습은 유혹에 약한 인간 모두의 모습이다. 짜증이 나는 건 엘리아스에게서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나의 경우엔 상대가 밀가루와 초콜릿이지만. 


저자의 글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심리묘사가 훌륭하고 사르데냐 섬의 풍광과 농장의 생활에 대한 묘사도 사실적이다. 낯설지만 매력적인 삶의 모습들. 그래도 이 작품은 결국은 엘리아스의 성장기이다. 답답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이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아가는 모습.



7. 내일 또 내일 또 내일(개브리얼 제빈, 엄일녀 역. 문학동네. 2023. 644쪽)

: 교통 사고로 다리를 다친 샘은 어린이 병원 휴게실 게임기 앞에서 세이디와 알게 된다. 암에 걸린 언니 때문에 늘 병원에 있던 세이디는 샘에게서 게임 치트키를 배우며 친해지지만, 샘과 함께한 시간들을 자원봉사로 기록한 기록지를 샘이 알게 되면서 멀어진다. 한참 후 대학에 진학한 샘은 붐비는 지하철 역에서 세이디를 발견하고 둘만의 농담을 외친다. "당신은 이질에 걸려 죽었습니다." 세이디는 자신이 학교 과제로 만든 게임을 샘에게 건네고, 플레이해 본 샘은 세이디에게 함께 게임을 만들자고 한다.


애정 관계에선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다. 우정도 그럴까? 왜 서로 툭 터놓고 깊이 있는 대화를 안 하는지 내내 답답했지만 사실 그게 현실에선 정말 흔한 상황이라는 거 알지. 한마디만 더 하면, 물꼬만 트면 진심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금세 서로를 안아주게 될 텐데 그 한마디가 어렵다. 


결말은 열려 있긴 했지만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난 많이 서글펐다. 삶의 한 챕터가 닫혔고 그게 너무 분명해서. 돌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반짝임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닫힌 챕터가 있다는 게.



8. 집으로 가는 먼 길(루이즈 페니, 안현주 역. 피니스아프리카에. 2023. 516쪽)

: 스리 파인즈에서 은퇴 생활 중인 가마슈 경감. 매일 아침 언덕 위의 벤치에서 얇은 책을 접어놓은 부분까지만 읽는다. 그런데 마을의 화가 클라라도 매일 아침 그의 곁 벤치에 앉는다. 머뭇거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며칠이 지나고, 마침내 클라라가 그에게 털어놓는다. 1년 전 별거하기로 하고 집을 나간 남편 피터가, 약속한 날이 지났음에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다고. 가마슈와 클라라, 부관 장 기, 그리고 서점 주인이자 클라라의 단짝 머나가 피터의 궤적을 좇는다. 


다시 읽고 싶어지는 추리소설은 이 시리즈가 유일하다. 시리즈를 읽다보면 각각의 에피소드보다 전반적인 분위기나 배경, 인물들에 더 집중하게 되는데 이 시리즈는 특히나 등장인물들이 다 좋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읽다가 스며들긴 했지만. 사실 이 시리즈의 에피소드들이 대부분 이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생긴다. 이번엔 열등감. 피터의 열등감은 그전에도 언급된 적 있지만 이번 에피의 주인공이야말로 피터다. 만족스러웠을까, 피터는? 


결말은 안타깝지만 맘이 아프진 않다. 내가 마음 아팠던 지점은 올리비에의 말. 먼 곳에서 바라보는 불빛과 그 안 에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지켜보는 심경은 나도 알지. 그래도, 스리파인즈 주민들은 다들 앞으로 나아갈 거다. 속도는 느릴지라도. 



9. 메타버스의 유령(박서련 외. 앤드. 2023. 264쪽)

: 박서련 때문에 읽기 시작했는데, 표국청이 가장 좋았다. 사실 첫 번째인 곽재식의 작품이 너무 짜증나서 읽다가 던져버릴 뻔 했다. IT업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일 지 모르지만 내게는 너무너무너무 현실이라 정말 혈압 오르는 이야기여서. 그래도 꾹 참고 뒤의 이야기들을 읽기를 잘한 거 같다. 김상균도, 박서련도 좋았기 때문에.



10. 사악한 목소리(버넌 리, 김선형 역. 휴머니스트. 2022. 248쪽)

: 세 편의 고딕 소설. 다 재밌었다. 공포 소설이라고 하긴 했지만 많이 공포스럽진 않다. 다만 신비스럽다. 세 편 모두 유약한 남성 캐릭터들과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확실히 드러내는 여성 캐릭터들이 흥미로웠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첫 번째 작품인 「유령 연인」.  그 싸늘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영국 시골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11. 붉은 인형의 집 상. 하(타마라 손,황유선 역. 황금가지. 2005. 368쪽, 428쪽)

: 꽤 유명한 호러 소설가 데이빗은 딸 앰버와 함께 바닷가 마을의 흉가로 소문난 바디 하우스에 이사 온다. 새 작품에 영감을 받기 위해. 그 집은 오래전 부두교 흑마술사인 리찌 보디에 의해 대학살이 일어났던 곳이다. 집을 둘러보던 데이빗은 3층의 어떤 방에 들어가자 기분나쁜 재스민 향과 함께 강한 성적 충동을 느끼고, 함께 있던 부동산 중개업자 테오도 그를 유혹한다, 한편 10대 앰버는 자기 방의 숨겨진 공간에서 인형을 발견하는데...


결국엔 사랑이 승리한다. 편하고 가볍게 읽으려 빌렸는데 은근 잔인했다. 호러보단 슬레셔 느낌. 성적인 요소들을 대놓고 범벅했는데 내 기준 에로틱하진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다 캐릭터가 뚜렷한 건 좋았지만 그만큼 전형적이기도 했다. 말 많고 남을 캐기 좋아하는 가정부 미니, 착하고 눈 밝지만 마을에서 바보취급 당하는 에릭, 전형적인 요부 테오 등. 사실 이 책은 호러에 에로틱 로맨스를 섞으려다 이도저도 아니게 된 느낌이긴 하다. 불량식품 먹은 기분. 어쨌든 해피엔딩.



12. 그녀가 테이블 너머로 건너갈 때(조나단 레섬, 배지혜 역. 황금가지. 2023. 348쪽)

: 인류학자인 필립은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물리학자 앨리스와 연인 사이이며 함께 살고 있다. 요즘 앨리스의 실험실에서는 버블을 통한 새 우주의 생성에 관한 큰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필립은 앨리스를 보러 갔다가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걸 보게 된다. 이 실험의 결과로 '결함'이 생성됐는데, 앨리스는 이 결함을 연구하면서 점점 빠져든다.


(약스포)여러 이론이 등장하지만 결국은 사랑 이야기. 앨리스의 실험실에서는 결함 앞에 테이블을 두고 결함에게 여러 물건을 던져 보는데, 받아들이는 물건과 뱉어내는 물건이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진행은 맘에 들었지만 결말이 맘에 들지 않았다. 모든 사랑은, 적어도 책 속에서는 이루어져야 하는데 말이지. 그러나 작가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으리라 생각되긴 한다. 내 입장에서는 꽤 하드한 SF였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13. 클로드와 포피(로리 프랭클. 김희정 역. 알마. 2023. 620쪽)

: 의사인 엄마 로지와 소설가 지망생인 아빠 펜. 이들은 다섯 명의 아들을 낳는다. 그리고 막내 클로드는 어느 순간부터 드레스를 입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는 쉽지 않다. 아이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해주는 부모님이 있어도 말이다. 


읽는 데 오래 걸렸다. 그저 아이는 아이가 원하는 성별로 살 권리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다섯 살 짜리가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치마를 입고 싶어하는 남자아이인지 아니면 성별 불쾌감을 느끼는 건지 어떻게 바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클로드는 그냥 치마를 입고 싶었을 뿐인데, 어른들은 네가 남자라면 치마를 입지 말아야 하고, 여자라면 여자 화장실을 써야 하며, 놀림 당하지 않기 위해 양호실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계속 한숨이 나왔다. 책 속에 들어가서 클로드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이게 만약 내게 닥친 현실이라면 난 어떻게 했을까? 


매뉴얼은 있지만 감수성은 멀었다. 아이를 규정하려고만 하지 말고 아이의 마음에,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기울여 주면 안 될까? 꼭 그렇게 분류를 하고 정의를 내리고 비슷한 누군가와 묶어야만 하나? 역시 삶은 쉽지 않다. 



14. 푸른 밤(존 디디온, 김재성 역. 뮤진트리. 2022. 264쪽)

: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하다가 내용이 너무 생생해서 새삼 검색해 보았던 책. 사랑하는 딸이 죽고 7년이 지난 후의 에세이이다. 딸 퀸타나는 네 번의 중환자실 입원과 네 곳의 병원을 거친 20개월 동안의 과정을 거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저자의 푸른 밤들이 사라졌다. 하지를 전후로 해질녘의 푸른 색이 점점 짙어져 밤새도록 그 푸르름을 갖고 있던 여름 밤들. 딸은 '그 아이를 두렵게 하는 키츠의 시구(258쪽)'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푸름 속으로 되돌아'(258쪽)갔다. 이후 저자의 푸른 밤들도 사라졌다. 


가슴 안으로 흐르는 눈물이 있다. 담담하기까지는 못하지만 애써 참는 눈물이 행간에서 느껴졌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찢어지는 아픔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천천히 오래오래 읽고 싶었다. 



15. 공존하는 소설(최은영 외. 창비교육. 2023. 272쪽)

: 사회적 약자와의 동행을 주제로 하는 앤솔러지. 가진 게 없어서 소외되고 남들과 달라서 지탄받는 사람들과 가진 게 많든 많지 않든 뻇기지 않으려 부당함을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재가 어떻든 같은 주제로 묶인 만큼 비슷한 느낌이다. 가장 좋았던 건 최은영. 다른 작가들도 다 잘 쓴 작품들이었다. 다만 조남주는 내용이 너무 뻔했다. 이 작가는 늘, 설마 이렇게 전개되는 건 아니겠지 싶은 방향으로 가서 좀 시시하다. 서유미의 작품은 앤솔러지에서만 세 번째인데 같은 작품이 여러 주제로 분류되는 게 흥미로웠다.



16. 변론의 법칙(마이클 코넬리, 한정아 역. RHK. 2023. 560쪽)

: 우리 미키가 이번엔 살인 피의자가 됐다.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6권. 또 한 번 승소한 미키는 바에서 거나하게 축하 파티를 즐긴다. 하지만 술은 한 잔도 안 마신 그는 자신의 링컨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데, 그가 바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걸 본 경관이 음주 측정을 하기 위해 그를 세운다. 그런데 링컨 차 트렁크에서 뚝뚝 떨어지는 액체. 경관은 트렁크를 열게 하고, 거기서 미키의 오래전 의뢰인이자 수임료를 떼어먹고 도망친 사기꾼의 시신이 발견된다.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미키의 기나긴 싸움.


법정물은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다. 말과 자료로 이루어지는 변호사와 검사의 싸움이 이 책처럼 현실적으로 상세히 묘사된다면. 하지만 이 작가는 절대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는 모두 미키의 무죄를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가 자신을 증명해낼 것임을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따라가는 건 한시도 눈을 돌릴 수 없게 흥미진진하다. 미키의 초조함과 불안함 때문이 아니라 이 이야기의 현실감과 캐릭터들의 생생함 때문에. 오랜만에 읽은 시리즈가 재밌어서 정말 좋았다. 은퇴한 해리 보슈가 한자리 차지해서 더 좋았고.



17. 말과 꿈(양선형. 자음과모음. 2023. 268쪽)

: '그'는 꿈에서 만난 말을 알고 있다. 공항 활주로에서 목격된 말. 그는 택시를 타고 말을 찾아 공항으로 향한다. 택시 기사는 계속 그에게 말을 건다. 


못 쓴 소설은 아니다. 분명 괜찮은 문장들인데 이상하게 집중이 되질 않았고 종국에는 지루해졌다. 뒤의 산문은 더했고. 앞으로 이 작가 못 읽을 거 같다.



18. 날 기억하지 말아요 - 2005 오늘의 추리소설(서미애 외. 산다슬. 2004. 265쪽)

: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엮은 앤솔러지. 서미애의 단편을 읽고 싶어서 빌렸다. 역시 서미애의 작품이 가장 맘에 들었다. 2005년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20여년 전이다. 읽으면서 문체가 올드하고 너무 평범하고 무난한 작품들이 많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20년 전 작품들이네... 그래도 판타지소설과 추리소설은 어느정도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 당시에도 그런 지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19. 섬데이(루이스 새커, 김영선 역. 현북스. 2020. 216쪽)

: 앤젤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바다에는 어떤 생물들이 사는지, 고래는 왜 우는지, 피아노는 어떻게 치는지. 심지어는 다음날 날씨까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런 앤젤린은 여덟 살 나이지만 6학년으로 월반하여 나이든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데, 아이들은 어린 앤젤린을 무시하고 괴롭히고, 담임 선생마저 앤젤린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구박한다. 


읽는 내내 앤젤린이 가여워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주위의 가까운 어른들은 앤젤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쓰레기 수거차를 운전하는 아빠는 갑자기 아내를 잃은 슬픔과 똑똑한 딸에 대한 부담감에 딸을 멀리하고, 담임은 답도 없고. 그나마 아빠의 직장동료 거스 아저씨가 앤젤린이 원하는 걸 알지만 거스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니까. 원작 발행년도가 1983년인 걸 감안하니 상황을 좀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정말 답답해서... 그래도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었지만, 약간의 억지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다. 앤젤린은, 나중에 커서 이 일들을 상처가 아닌 해프닝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20. 밤이 오면 우리는(정보라. 현대문학. 2023. 140쪽)

: 로봇이 인류를 멸종시키려 전쟁을 시작한 세상. 로봇과 로봇 추종자인 인간들은 곳곳에 숨어 있는 생존자들을 추적하고, 생존자들은 들키지 않기 위해 체온과 체취를 최대한 지우며 버틴다. 한때 인간이었던 흡혈인 '나'는 로봇에 대항해 싸우며 생존자를 확인하던 중, 인간형 로봇 빌리와 마주치고, 빌리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우긴다.


길지 않지만 여운이 긴 작품이다. 어쩌면 흔할 수도 있는 주제이지만, 빌리의 '당신이 인간인 걸 어떻게 알았냐'(65쪽)는 물음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더불어, 인간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하는 생각도. 인간은 과연 늘 인간편이어야 할까? 과거를 보면, 지구에게는 인간이 없는 게 훨씬 유리하다. 그런데 앞으로 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인류가 멸종당해야 할까?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21. 반가운 살인자 - 2005 올해의 추리소설(서미애 외. 산다슬. 2005. 272쪽)

: 역시 잘쓴다, 서미애. 표제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약간의 기시감이 있긴 하지만 꽤 흥미진진하다. 딸이 화자의 의도를 알아차릴까 궁금해 하면서 읽다보니 어느새 결말이었고, 결말은 머리로는 좋았지만 마음은 좀 아팠다. 김차애도 좋았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그저 그랬다.



22.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백수린. 창비. 2022. 232쪽)

: 좋아하는 작가의 순한 에세이. 작가는 시내 중심에서 가깝지만 기울기가 급한 산동네인 탓에 집값이 저렴한 성곽길 근처의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천천히 해준다. 바쁘고 빡빡하게 뛰어다니던 중에 문득 스치는 서늘한 바람같은 글들. 많이 위로받았다. 다만, 앞으로도 난 반려동물은 절대 못 기를 거 같다. 



23. 모든 열정이 다하고(비타 색빌웨스트, 임슬애 역. 민음사. 2023. 240쪽)

: 슬레인 백작인 헨리 홀랜드는 평균 수명을 훨씬 넘긴 나이까지 정정하게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많은 영국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 자신이 식민지 총독으로서, 의원으로서 또 총리로서 훌륭한 정치인이었기에 런던 정계에 막대한 영향은 미치고 있다. 이런 그가 사망하고, 자식들은 저택으로 모여든다. 늘 조용히 내조에만 신경써왔던 레이디 슬레인을 누가 모셔야 하는지 자식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그때, 레이디 슬레인은 30여년 전에 봐두었던 헴스테드의 작은 집에서 혼자 살 것이라고 선언한다.


남편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으로 살아가는 레이디 슬레인. 시대적 배경과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녀의 행보는 꽤 파격적이다. 하지만 그래서 통쾌했고 시원했다. 그녀의 나이는 제목처럼 모든 열정이 다한 나이일 지 모른다. 하지만 노년이라고 해서 모든 걸 정리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집주인 벅트라우트 씨의 말처럼 모든 가능성은 열어둔 채 합리적으로, 나 자신으로, 레이디 슬레인이 아니라 데보라로 살아 나갈 수 있다. 어쩌면 진짜 열정은 이제야 시작되는 것일 수도. 



24.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 2006 올해의 추리소설(서미애 외. 산다슬. 2006. 272쪽)

: 역시 서미애 때문에 읽었는데, 수록된 작품들이 전부 다 별로였다. 심지어는 서미애도. 특히 많은 작품들에서 여성혐오가 아무렇지 않게 드러나 있어서 놀랐다. 2006년이면 얼마 전인 거 같은데, 물론 18년 전이긴 하지만, 이렇게 작가라는 사람들이 무지했나 싶다.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는 좀 젠더의식이 나아졌기를 바란다.



25. 비타와 버지니아(세라 그리스트우드, 심혜경 역. 뮤진트리. 2020. 276쪽)

: 1920년대부터 버지니아 울프의 친우이자 연인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의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인생을 각각 만나기 전(1882~1922), 가장 친밀하게 지내던 때(1922~1930), 각자의 삶으로 조금 멀어진 때(1931~1962)로 구분지어 시대순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쩌면 둘의 연인관계나 open merriage에 호기심을 갖고 읽기 시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두 사람의 지적 능력과 신념, 각자의 글들과 작품에 끼친 서로의 영향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사람들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도 이들의 교류를, 애정을 가볍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감히 말하자면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저작을 괜히 피해왔다. 왠지 내가 감당하기에 쉽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올랜도』를, 『등대로』를, 『막간』을 읽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버지니아보다는 비타 때문에. 



26. 플래쉬포워드(로버트 J. 소여, 정윤희 역. 미래인. 2010. 428쪽)

: 2009년 제네바 인근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힉스 입자를 생성해내기 위한 실험이 행해진다. 현지 시간 오후 5시에 행해진 이 실험이 시작되자마자 책임자 로이드 박사와 테오, 미치코는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다. 그리고 2분이 채 못되는 시간 동안 먼 미래의 자신에게 빙의된 듯한 환상을 본다. 이게 자신들만의 상황이 아니라 전세계에 공통적으로 일어난 현상임을 알게 되고, 곧 어마어마한 후폭풍에 직면한다.


설정이 흥미로웠고 이 책을 기반으로 미드도 만들어졌다기에 읽었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보다.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었다. 특히 미래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보이는 로이드와 미치코(둘은 약혼한 사이)의 갈등이 너무 답답했다. 거기에더해 잊을만 하면 보이는 교정 오류 때문에도 꽤 짜증이 났다. '지구에 유일한 생명체는 인간'이라든지 '그건 사람마다 틀려요' 따위의, 단순 오탈자 이상의, 편집자의 역량을 의심케 하는 오류들이 많았다. 이 출판사는 전에 읽은 다른 책도 그랬던 거 같은데, 앞으로 책 선택할 때 참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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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첨벙(박솔뫼 외. 한겨레출판. 2014. 368쪽)

: '중독'을 주제로 한 앤솔러지...라는데 난 읽는 동안엔 몰랐다. 처음 몇 편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주제가 '물'인 줄 알았는데 뒤로 갈수록 물과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였고, 솔직히 중독은 더더욱 상관없어 보였다. 한 편 한 편 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 좋지도 않았다. 가장 좋았던 건 역시 박솔뫼와 백수린. 이주란도 좋았다.



2. 아찔한 비행(케리 그린우드, 한지원 역. 딜라일라. 2016. 280쪽)

: 프라이니 피셔 시리즈 2권. 프라이니에게 쇠약한 모습의 노부인이 찾아온다. 그 부인은 자신의 아들 빌이 아버지와 극심한 의견 충돌을 지속하고 있다며 빌이 아버지를 죽일까봐 걱정이라고 털어놓고, 프라이니는 빌이 운영하는 비행학교를 찾아 빌을 잘 달랜다. 그런데 빌의 아버지 맥노튼 씨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죽은 채 발견된다. 한편 빌의 동료 헨리의 딸이 납치되는데...


두 번째라서 내가 적응을 한 건지 아니면 작가의 글솜씨가 나아진 건지, 1권보다 덜 산만하고 재밌었다. 역시 능력자 프라이니. 어린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민감하고 그걸 제대로 해결해 내는 것도 맘에 든다. 주위의 여성 캐릭터들이 다 능력자들인 것도. 로맨스도 나쁘지 않다. 꽤 급진적이라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3. 야간열차 살인 사건(케리 그린우드, 정미현 역. 딜라일라. 2016. 272쪽)

: 프라이니 피셔 시리즈 3권. 시골 밸러렛행 열차를 타고 가던 프라이니. 한밤중 숨쉬기가 힘들어 잠에서 깬 프라이니는 일등석 전체에 가스가 찬 것을 알아채고 창문을 깨 환기를 시킨 후 사람들을 깨워 대피시킨다. 그 와중에 건너편 객실에 있던 노부인이 사라지고, 노부인은 기차가 멈춰선 들판 한가운데에서 끔찍한 모습의 시신으로 발견된다. 프라이니는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노부인의 딸 유니스의 의뢰를 받아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주요 사건 외 또다른 사건이 하나 더 딸려온다. 바로 기억을 잃은 소녀 제인의 이야기. 아마도 작가는 이런 식으로 프라이니가 여성 문제에 적극적임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프라이니의 행보는 비록 소설이지만 꽤 훌륭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에의 위협은 여전하고, 이걸 프라이니같은 능력있는 개인이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이 씁쓸하다. 이것과 별개로, 이야기는 재미는 있었다. 비록 추리에는 실패했지만. 



4. 조용한 흡혈마을(성요셉. 네오북스. 2023. 200쪽)

: 외할머니의 병실에까지 쫓아온 사채업자를 피해 희주는 철딱서니 고등학생 남동생 이루와 함께 엄마의 고향 자귀도로 향한다. 사실 자귀도는 130년 전 흡혈귀의 난 이후 흡혈인들이 조선 시대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며 조용히 살고 있는 폐쇄적인 섬. 희주와 이루의 등장으로 섬의 생활은 흔들리고, 희주는 몰래 섬의 보물을 찾기 시작한다.


가볍게 집어들었고 기대는 충족됐다. 작가가 처음부터 해피엔딩 말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빌런도 별로 등장하지 않아서 편하게 읽었다.



5.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테일러 젠킨스 리드, 박미경 역. 베리북. 2023. 544쪽)

: 이혼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쓰고자 하는 소설도 잘 안 풀리고, 다니고 있는 잡지사에서도 아직 1년차 신참인 모니크. 할리우드 대스타 에블린 휴고가 자신의 드레스를 경매에 부쳐 유방암 치료 재단을 위한 자선 기금을 마련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독보적인 섹시스타이자 7번의 결혼으로 늘 관심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녀가 모니크를 지목해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지만 뜻밖에도 깊이 아파하며 읽었다. 사람들이 쉽게 가쉽거리로 취급하는 연예인의 쉬운 결혼과 이혼의 이면에는 그녀만의 치열한, 살아남기 위한 전략과 전술이 숨어 있었다. 그걸로 그녀는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선 이겼다. 모든 싸움이 다 슬프지만 사랑을 위한 투쟁은 특히 더 슬프다. 에블린이 이젠 편히 쉬기를. 



6. 술과 농담(편혜영, 조해진, 이주란 외. 시간의흐름. 2021. 200쪽)

: 에세이 앤솔러지. 주제가 맘에 들어서 집어들었는데 김나영 빼고 다 재밌었다. 김나영은, 아무리 작가 본인이 농담을 못하는 성격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성의없이 글을 쓰다니. 마치 논술고사 모범 답안 같았고, 그나마도 창의성 점수는 못 받을 듯. 


이런 에세이를 통해서 작가 자신의 술버릇이나 음주 생활 등을 알게 되는 게 독자로서 매우 흥미진진했다. 



7. 화성과 나(배명훈. 래빗홀. 2023. 304쪽)

: 화성 이주 연작들. 저자 특유의 위트는 강화되었고 감성은 감소되었다. 난 이 작가의 감성적인 부분이 좋았는데. 어디서나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얘기하면서도 (저자가 상상한) 화성만의 특징도 놓치지 않았다. 근데 내 취향은 아니었어서, 조금 슬펐다. 그래도 좋았던 건 「붉은 행성의 방식」. '가장 중요한 건 회복력'이라는 희나의 말이 좋았다.



8. 한 사람을 더하면(은모든. 문학동네. 2023. 340쪽)

: 급격한 기후 변화와 몇 차례의 팬데믹, 고령화 사회 확정으로 국가에서는 '독신세'를 어마어마하게 물리는 가까운 미래. 화자 이심은 가정의로 일하며 혼자 살고 있는데 아무래도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 이제는 흔해진 집합가족이 되고자 '무도회장'을 방문한다. 그중 맘에 드는 가족은 집에 무려 '샴푸의 요정'이 있는, 형제와 중년 여성, 노년 여성 그리고 어린 남매가 있는 집이다. 


그동안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은 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만큼 무시무시한 공포를 주는 소설은 못 읽은 듯. 단순히 독신세라든가 전통 가족의 해체로 인한 사회 질서의 개편이 문제가 아니라 의료 민영화로 인해 높아진 의료 수가가 감당이 안 되어 생기는 여러 문제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질 수 밖에 없는 현실, 그 와중에 높아진 기술력과 터무니없이 떨어진 윤리의식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내용 중에 녹아있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다. 가장 무서운 건, 지금 우리 사회가 이 소설 속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거. 그나마 소설 속 결말은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지만, 경각심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9. 태초에 외계인이 지구를 평평하게 창조하였으니(정보라 외. 안온북스. 2023. 314쪽)

: 유사과학 앤솔러지. 유사과학이 소재이거나 아니면 진짜 유사과학을 세계관으로 해서 쓰거나. 정보라 때문에 집어들었는데 정작 정보라는 좀 평이했다. 그래도 대체로 재미있었다. 홍지운은 지루했지만. 제일 재미있었던 건 문이소의 「정기유의 화양연화」. 전헤진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아」도 좋았다.



10. 페로몬 부티크(강지영. 씨네21북스. 2018. 412쪽)

: 표적수사대 민재경. 9년 전 같이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던 남자친구가 살해당하기 직전 남자친구의 집으로 가는 계단에서 범인과 마주쳤던 순간으로 최면을 통해 되돌아가려 하지만 범인의 얼굴을 끝내 보이지 않는다. 한편 주로 공시생을 대상으로 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범인을 잡기 위해 표적수사대 팀장 두현은 희미한 냄새만으로도 모든 걸 유추해내는 타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역시나 저자만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범인은 추리하기 힘들었고 밝혀졌을 때에도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그거야 내가 범인이랑 너무 공감하면 그것도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싶고. 재밌긴 했지만 로맨스적인 요소가 너무 강했고,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 좀 힘이 빠진 거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난 여전히 이 작가가 정말 좋다. 



11. 작가와 연인들(릴리 킹,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23. 404쪽)

: 1997년, 작가 지망생 케이시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하지만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여전히 옛 연인의 배신이 때때로 떠오르며, 학자금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빚에 짓눌린다. 이 와중에 성공한 소설가 오스카와 만남을 가지게 되는 한편, 역시 작가 지망생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일러스와도 만나게 된다.


사랑 이야기이면서 성장 소설이기도 하지만, 이거저거 따질 것 없이 그냥 삶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제목이 제목이라 오스카와 사일러스와 캐이시의 이야기에 눈길이 가긴 하지만, 그래서 케이시의 선택이 실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기도 하지만 난 케이시가 과거에서 벗어나 서서히 혼자 힘으로 비상할 수 있게 되는 걸 지켜보는 게 좋았다. 이야기 자체는 잔잔히 전개되지만, 케이시가 레스토랑으로 일하러 가면서 마주치는 기러기 떼처럼 그냥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위로가 되어주는 책이었다. 



12. 위그드라실의 여신들(해도연. 안전가옥. 2023. 232쪽)

: 3편의 SF. 표제작이 가장 좋았고 이어지는 「여담, 혹은 이어지는 이야기」도 좋았다. 첫번째 작품은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평이한 느낌. 각주가 나처럼 SF를 어려워하는 독자에게는 진입장벽일 수도 있겠으나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작품을 느끼는 데 아무 방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표제작이 주는 여운은 깊고 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순수하게 이타적일 수 있는 게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평면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점도. 



13. 너무 친절한 거짓말(제럴딘 매코크런, 오현주 역. 빚은책들. 2023. 544쪽)

: 아팔리아의 수도 프래스토. 식탁 용품들을 생산하는 공장이 모여 있고, 아팔리아를 통치하는 총리 관저가 있다. 2개월이 넘도록 내내 내리는 비로 도시는 엉망진창이고 비상대책회의가 총리 저택에서 열린다. 총리는 기상학자를 불러 날씨 예보를 듣고자 하는데, 기상학자들이 제출한 예보를 멋대로 바꾸어 공표한다. 그날밤 총리는 북부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는데 총리 저택의 하녀 글로리아와 리트리버 데이지는 탑승을 거부당한다. 총리의 남편 티미는 데이지를 데리러 내렸다가 기차에 타지 못하고, 티미는 열 일곱 살 하녀 글로리아를 총리 대역으로 내세운다.


동화같은 이야기인 줄 알고 - 표지에 '총리가 된 하녀'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 읽기 시작했으나 뜻밖에도 현실적이었다. 가상의 나라를 배경으로 했고 설정을 단순화하긴 했지만 자연재해 앞의 무력한 인간 모습과 위정자들의 무능력, 재해 앞의 극단적인 이기심과 가짜 뉴스의 만연, 가장 힘없는 계층의 희생과 이를 당연시하는 소위 상류층의 행태 등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선한 마음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도. 꽤 조마조마해 하며 읽었다. 재미있었고, 생각도 오래오래 하게 했다.



14. 풀업(강화길. 현대문학. 128쪽)

: 전세사기를 당하고 엄마 집으로 들어와 살고 있는 화자는 밤마다 악몽을 꾼다. 격렬하게 싸우다 잠에서 깨면 새벽이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할 시간까지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 어딘가로 바쁘게 가는 여성을 창밖으로 발견하고 무작정 따라가 헬스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앞의 여성이 멋지게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덜컥 등록한다.


서로를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오해는 있을 수 있다. 아니 가족이라서 더 오해가 깊어진다. 터놓고 얘기하기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그냥 덮자니 내 속이 문드러지고. 난 철저히 화자의 입장이어서 중반까지 꽤 속터져하며 읽었지만, 엄마와 동생도 나름의 입장이 있겠지. 작품의 주제('운동의 순기능')만 생각하면 꽤나 교훈적이지만 작가만의 섬세하고 현실적인 관계성 묘사가 인상깊었다.



15. 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부스 타킹턴, 구원 역. 코호북스. 2023. 348쪽)

: 전쟁(1차대전) 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미국의 한 도시. 앨리스 애덤스의 아버지는 오랜 시간 병석에 있고 가세는 기울어가는 중이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그 사업'을 해야 한다고 닥달하고, 남동생은 밖으로만 돈다. 한때 미모로 타운 전체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던 앨리스는 이제 나이도 찼고 집안 때문에도 댄스파티의 파트너는커녕 친구조차 없다. 어느날 타운에 아서 러셀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앨리스의 성장기이다. 첫부분에 지팡이를 들고 외출을 하던 앨리스의 당당함이 좋았는데 곧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초라함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안쓰러운 모습들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지만, 앨리스는 결국 성장한다. 그리고 그건 누구의 도움이나 자극이 아닌 그녀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게 정말 좋았다.



16. AI 미제 사건 전담반(조 캘러헌, 정은 역. 북플라자. 2023. 448쪽)

: 남편을 암으로 잃고 하나뿐인 아들마저 남편의 죽음과 사춘기로 점점 멀어지는 걸 느끼는 캣 프랭크 형사. AI를 기존 미제 사건에 활용하는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스마트워치를 차고 AI수사관 록과 함께 여러 실종 사건들 중 의미 있어보이는 것들을 선별하여 조사에 들어가는데, 원래부터 AI에 호의적이지 않던, 직감을 중시하는 캣과 록은 처음부터 삐걱댄다.


난 AI에 중립적인데 아무래도 이 작품은 캣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서 록이 마땅치않았다. 게다가 등장 인물들도 한 군데씩 맘에 안 드는 부분들이 있고 그게 꽤 커서 읽는 내내 별로 즐겁지가 않았다. 그래도 결말 부분에서 사건이 해결될 때는 꽤 시원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 시리즈가 나와도 읽을 거 같진 않다.



17.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정세랑. 문학동네. 2023. 296쪽)

: 역사 추리소설. 시리즈이고 최소 3권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개에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읽기 시작했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당나라에 유학갔던 설자은은 귀국하는 배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을 맞닥뜨린다. 얼결에 사건을 맡아 해결한 자은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백제 출신 목인곤을 집의 식객으로 들이게 되고, 금성의 여러 사건들을 의뢰받는다.


자은의 비밀은 금세 드러난다. 넉살좋게 들러붙는 목인곤과의 관계도 관심을 끌었지만 당대의 여성들의 미묘한 지위 - 조선시대보다 나았으리라 짐작했는데 그것만도 아니었다 - 라든가, 통일은 했지만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이 꽤 노골적이었던 사회 분위기, 그리고 그 유명한 골품제 등이 흥미진진했다. 배경이 배경이니만큼 심윤경의 『서라벌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해서 머릿속으로 비교해 가며 읽는 재미도 있었다. 얼른 다음 권이 출간됐으면.



18. 안진 : 세 번의 봄(강화길. 안전가옥. 2023. 118쪽)

: 세 편의 가족 이야기. 연작처럼 읽히기도 하고, 각각의 이야기만 생각하며 읽어도 무방하다. 읽고 나서 새삼 '세 번의 봄'이라는 부제를 돌아보았다. 그래, 봄은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지. 품으로 파고드는 바람이 겨울 북풍 못지않다. 가장 좋았던 건 「비망」이지만 여운은 「산책」이 깊었다.



19. 템스강의 작은 서점(프리다 쉬베크, 심연희 역. 열림원. 2023. 624쪽)

: 어쩌면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 근데 난 읽으면서 꽤 열받았다. 스웨덴에서 화장품 회사를 창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샬로테. 들어본 적도 없는 이모가 자신에게 런던의 서점을 물려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런던으로 온다. 막상 와서 보니 서점의 재정상태는 물론 운영도 엉망이다. 빨리 건물 전체를 팔아치우고 스웨덴으로 돌아가려는데, 서점 위층 사라 이모의 아파트에서 낯익은 느낌의 남자 사진과 자신의 엄마에게 쓴 편지들을 발견한다.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읽고 나면 따뜻한 느낌은 남을 거라고 생각해 읽었는데, 뜻밖의 복병때문에 열받았다. 현재의 이야기는 내 기대대로 흘러갔다. 과거 이야기가 날 화나게 했지. 그래도 책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수다라든지 진상 고객들 이야기 때문에 빵 터지기도 했다. 판타지같은 결말 부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20. 있을 법한 모든 것(구병모. 문학동네. 2023. 268쪽)

: 환상의 세계에서 이야기하는 현실. 배경은 어쩌면 가상의, 어쩌면 미래의 세계이지만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결코 멀지 않다. 다만 각 작품들의 서술이 묘하게 알랭 보통 느낌이어서 내 취향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작가는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미묘한 폭력을 놓치지 않는다. 이게 이 작가의 장점인데, 이전 작품들은 이런 문제제기를 정말 맛있는 당의정에 잘 싸서 독자에게 건네줬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냥 노골적으로 내보인다. 그게 좀 아쉬웠다.



21. 나는 그녀를 모른다(로지 월쉬, 신혜연 역. 문학사상. 2023. 480쪽)

: 신문사 부고기자인 레오. 아내 엠마는 해양생태학자이자 과거의 방송 경력으로 유명인이다. 엠마의 암이 재발하지 않을까 불안하던 어느날, 레오는 엠마의 부고 기사를 자신이 써두리고 결심하는데 문득 자신이 엠마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팩트 체크를 하기 시작하지만 엠마의 이야기와 어긋나는 부분들이 발견된다. 설상가상으로 엠마는 낯선 이와 문자까지 주고받는데...


사실 엠마의 비밀이 좀더 거창한 거라고 짐작했었다. 개인적인 것보단 뭔가 국가적인 거.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망한 건 아니지만, 레오와 엠마가 서로에게 더 솔직하고 서로를 덜 사랑했다면 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을 거 같다. 드러난 진실이 생각보다 작다는 얘기.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걸 이렇게 발전시켰다고? 재밌게 읽긴 했는데 다음번에 이 작가를 또 읽을지는 모르겠다.



22. 별일은 없고요?(이주란. 한겨레출판. 2023. 280쪽)

: 잔잔하게 마음 아프지만 또 잔잔하게 위로가 되는 이야기들. 주인공들은 모두 위로가 필요하지만 정말 힘든 일은 이미 지나간 뒤여서 이제는 조용히 회복하기만 하면 되는 상태이다. 그래서, 마치 나도 그들 곁에서 가만가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산산조각난 나 자신을 아주 조금씩 다시 붙이는 기분으로 읽었다. 다 좋았는데 그래도 더 좋았던 건 「여름밤」.



23. 톨락의 아내(토레 렌베르그, 손화수 역. 작가정신. 2022. 264쪽)

: 사랑하는 아내 잉에보르그를 잃고 혼자, 아니 오도와 함께 살고 있는 나이든 톨락. 친딸 힐레비는 잉에보르그가 죽은 후 거의 발길을 끊었고 아들 얀 비다르만 간간이 들여다 볼 뿐이다. 목수인 톨락은 평생 아버지에게 배운 것들만이 옳다고 믿으며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를 거부하며 가부장적으로, 독선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적장애아인 오도를 데려다 키울 때만큼은 아니었다.


이 남자를 어쩌면 좋지? 처음엔 그냥 우직한 아내 바보인 줄 알았고 조금 더 읽고는 표현이 서툴러 오해받는 옛날 아버지라고도 생각했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톨락의 목소리만 들리는, 길지 않은 이 책에서도 잉에보르그의 힘듦과 힐레비의 상처와 얀 비다르의 인내가 보인다. 가장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오도만이 톨락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아이러니. 


톨락의 무지와 독단, 새 것을 거부하는 고집스러움은 답답하고, 잉에보르그를 떠나보낸 이기심과 폭력성은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게 만들지만 아무도 그의 곁에 없음을 생각하면 잉에보르그가 없는 이 현실이 이미 그에겐 지옥이었다는 걸, 그러므로 죽음은 차라리 그에게 축복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24. 빅 도어 프라이즈(M. O. 월시,송섬별 역. 작가정신. 2023. 512쪽)

: 중년의 셰릴린은 동네 식료품점에 들어온 기계 '디엔에이믹스'를 재미삼아 사용해 보았다가 그 결과 때문에 심란하다. DNA를 분석해서 될 수도 있었던 신분을 알려주는 이 기계에서 토해낸 결과는 셰릴린이 '왕족'이 될 수 있었다는 것. 역사 교사인 남편 더글러스와 무난하고 꽤 다정한 결혼 생활을 이어온 셰릴린은 이제 모든 게 다 답답할 뿐이다. 더글러스는 얼마 전 마흔 살 생일에 자신을 위해 트럼본을 샀고, 무탈하게 굴러가는 생활에 불만은 없지만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 마을 주민들이 그 기계 사용 후 이상하게 행동하는 게 못마땅하다. 한편 쌍둥이 형 토비가 음주운전으로 사망한 고등학생 제이컵은 형의 여친 트리나가 자꾸만 접근하는 게 부담스럽고, 트리나의 삼촌인 피트 신부는 트리나가 걱정스럽다.


그냥 가벼운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다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음을 누구나 알지만 그걸 염두에 두며 남을 대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 작은 마을 디어필드의 상당수 주민들의 행동은 그 기계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사실 인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설명되지 않지. 기계의 비밀은 내가 중반부터 짐작한 대로였고, 그래서 난 계속 이들의 변화하는 관계에 집중하며 읽어나갔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귀에 작은 소리로 속삭이기만 해도 방향을 휙 바꿔 달려가는 인간 관계. 그 약하디 약한 실낱을 부여잡는 건 각자의 몫이다. 



25. 사자가 푸른 눈을 뜨는 밤(조용호. 민음사. 2022. 204쪽)

: 1980년대 야학연합회 소속 대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구속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나'는 어느날 우연히 그녀와 닮은 여성을 만난다. 아무리 보아도 30여년 전의 그녀의 모습 그대로인 희연을. 희연에게 다가가 그녀와의 관계를 물었으나 부모를 모르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30여년 전 탄압을 피해 자신과 바닷가 마을에 숨어있다 자신이 잡혀가 버린 후 그저 '증발'해버린 하원의 흔적을 함께 찾아 나선다.


저자 특유의 차분한 슬픔이 이 소설에서는 깊은 회한과 함께 진하게 배어나온다. 그녀를 보내주기 위해 끝없이 떠도는 화자와 희연. 중간중간 인용되는 과거사 위원회의 보고서를 통해 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가 탁상행정에 불과하며 얼마나 성의가 없는지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고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 이야기는 화자 스스로 모든 것을 말하고픈(parrhesia), 그러나 알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고 보내줄 수도 없는 슬픔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후일담 소설'이라는 용어에 불만을 이야기했지만, 이런 후일담을 계속 읽는 나같은 독자가 있음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26. 사라진 지구를 걷다(에린 스완, 김소정 역. 아르테. 2023. 536쪽)

: 2073년, 일삼촌, 이삼촌과 함께 황량한 붉은 땅 위를 걷고 있는 소녀 달. 저 앞에 돔이 보인다. 이제 이 곳에서 살 수 있다. 바깥과 공기도 다르고 이제껏 먹어보지 못한 감자도 먹으면서 적응해야 하지만, 이제는 이곳이 집이다. 삼촌들은 달에게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1975년 어린 소녀 '비'는 가정집에서 먹을 걸 훔치다가 잡혀서 병원에 보내지는데, 열 두어 살의 나이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만삭에다가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약스포)

지구가 모두 물에 잠겨버린 미래를 배경으로 200여년 동안 7대의 이야기를 한다. 차분한 문체로 그저 현재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삶을. '비'는 거인을 낳고 그 거인은 '비'가 꿈으로 보여준 메시지를 따라 붉은 별을 좇는다. 후손들에게 차례로 전달되는 꿈. 그리고 그 꿈을 통해 만들어질 문명. 하지만 난, '비'가 어머니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런 식으로는. 그래서 달의 선택이 기뻤다. 마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달에게 마음으로 전달했던 메시지가 닿은 것처럼. 지구를 망쳐버린 문명 따위. 그러나 어디서든 삶을 계속되겠지. 책을 덮은 직후에는 그저 담담했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니 그저 달의 행복을 바라는 맘 뿐이다.



27. 새벽 2시의 코인 세탁소(박현주. 엘릭시르. 2023. 468쪽)

: '나의 오컬트한 일상' 시리즈. 화자는 여전히 오컬트 컬럼을 쓰고 있는데, 얼마 전 신축 빌라로 이사를 했다. 이 빌라 1층에는 코인 세탁소가 있는데 밤에는 빌라 내부로 통하는 문만 열려 있다. 글이 써지지 않아 새벽 2시에 세탁소에 내려간 화자는 땅에서 솟은 듯 나타난 러시아 여성과 맞닥뜨리게 되고, 빌라 주인의 소개에 따라 그녀에게 타로점을 본다.


전작들은 너무 기대를 하고 읽어서인지 조금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은 반대로 기대를 내려 놓아서인가 재미있었다. 사실 전작들에선 오컬트 현상들을 굳이 설명하려고 해서 재미없었는데 여기선 각 에피소드들을 그냥 열어두었다. 그리고 화자의 로맨스가 진전되는 걸 보는 맛도 있고. 참고로 난 그 보험조사원은 반댈세. 또,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조사도 나름 충실한 것도 좋았다. 이 시리즈 계속됐음 좋겠다.



28. 레니와 마고의 백 년(매리언 크로닌,조경실 역. 해피북스투유. 2022. 500쪽)

: 시한부 병동에 있는 열 일곱 레니. 조용한 곳을 찾아 병원 성당으로 간다. 나이든 아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의문("저는 왜 죽어가는 거죠?")은 해소되지 않는다. 병원을 돌아다니던 레니는 미술치료실이 곧 오픈한다는 걸 알게 된다. 또래들이 모이는 시간에 가보지만 어울리기가 쉽지 않은데, 다른 시간에 가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고 마음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여든 셋 마고 곁에 앉게 된 레니는 마고의 과거 한 시점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둘이 합쳐 백 살인 이들은 각자의 의미있었던 1년을 한 장씩 그려 백 년을 채우기로 한다.


슬프지만 각오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눈물 쫙쫙 뽑아내는 신파는 아니라는 얘기다. 레니와 마고의 이야기가 교차되는데 둘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 둘은 죽어가는 게 아니라 아직도 살아가는 것임을, 죽음 뒤에도 많은 것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고. 세상은 공평하지 않지만, 백 번째 그 그림 덕분에 나도 많이 슬프지 않을 수 있었다. 



29.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정세진. 고즈넉이엔티. 2023. 280쪽)

: 표제작 외에는 다 약간의 공포를 담고 있는 환상 소설들. 표제작은 너무 무난하고 뻔했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소재가 독특하고 아이디어가 좋아서 재미는 있었다. 다만 이 작가는 문장이 너무 정리가 안 된다. 작가 뿐 아니라 편집자도 기억해 두고 싶을 만큼. 문장에 비문도 많고 한 문장 안에서 중복되는 단어도 너무 많다(비슷한 형용사 세 개를 연이어 쓴 경우도 봤다). 작품 내용에만 집중해서 읽으려 해도 문장이 거슬려서 다음 번에는 이 작가도 이 출판사도 피할 거 같다.



30. 토끼귀 살인사건(안티 투오마이넨,김지원 역. 은행나무. 2023. 464쪽)

: 보험계리사인 '나'는 늘 정확한 수학적 계산을 염두에 두고 생활한다. 하지만 회사는 점점 놀이터처럼 변하고,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힘든 '나'에게 상사는 해고를 통보한다. 곧 변호사에게서 연락을 받는데, 하나뿐인 가족인 형이 죽었고 그에게 놀이공원을 상속했다는 걸 알게 된다. 놀이공원에 가보니 겉으로는 잘 운영이 되고있는 듯 보이지만 어마어마한 대출이 있는데...


살인사건이긴 하지만 범인을 찾는 수사물은 아니다. '누아르'라고 장르를 규정했던데, 어둠의 세계와 긴밀하게 얽힌 이야기이니 누아르가 맞기는 하다. 근데, 사실 이건 사랑 이야기이다. 어쩌면 화자 헨리의 성장기일 수도 있고. 대체 헨리와 그녀는 어떻게 되는 건지, 놀이공원은 무사히 운영될 수 있을지, 손을 뻗는 어둠의 세력들에게선 벗어날 수 있을지 흥미롭게 지켜봤다. 다만 주인공의 성향이 나와는 너무 달라서, 블랙 코미디라고 하는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할 지는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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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양을 바라보며(줄리언 반스, 신재실 역. 열린책들. 2005. 312쪽)

https://blog.aladin.co.kr/yujin/15193573


2. 어느 날의 나(이주란. 현대문학. 2022. 132쪽)

: 아마도 작가 자신의 특징이지 않을까 싶은 차분한 문체가 좋았다. 작은 빌라에서 함께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작은 방에서 따로 또 같이 월세를 나눠 내며 지내는 소소한 3개월간의 기록이다. 큰 사건도, 위기도 없이 각자의 하루를 보내고 산책을 하고 같이 아는 지인과 잠깐 여행도 가고... 그 차분함이 정말 좋았다. 물론 한 번씩 여기저기에서 태클도 들어오지만 무른 듯 단단하게 하루가, 한 주가, 한 달이 지난다.


사실 첫 문장에서부터 위로를 받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주네. 아는 사람들은 관심이라는 미명하에 날 작게, 자잘하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괜찮다 해주는 건 때로는 눈물이 날 만큼 고맙다. 기대가 없으니까. 의무가 없으니까. 차라리, 애정이 없으니까. 행간이 아주 깊은 좋은 소설이었다. 이 작가를 알게 되어서 기쁘다.



3. 순례 주택(유은실. 비룡소. 2021. 256쪽)

: 순례 주택은 세입자가 줄을 선다. 혹설에 따르면 5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이유는 물론 주변 시세보다 싸기 때문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순례씨가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이다. 옥상을 함께 쓰고, 분리배출을 철저히 하고, 입주민들끼리 배려하고. 화자 오수림은 이 빌라의 주인이자 외할아버지의 여자친구인 순례 씨 손에 컸다. 수림의 원가족은 길 건너 고급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지만 수림은 순례 주택에 있을 때만 맘이 편하다.


(약스포)

수림이 '1군들'이라고 부르는 원가족은 다 진상이다. 아버지 집을 빼앗아 살면서도 마치 집이 자기 신분인 양 구는 전업주부 엄마, 평생 여기저기 빌붙어 살면서 자신을 올려치기만 하는 만년 강사 아빠, 이 둘을 꼭 닮은 언니. 읽으면서 너무 답답했다. 순진한 순례씨와 입주민들 때문에. 이들은 마냥 착하게 빌런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내 경험상, 그리고 책 속에서도 빌런들은 절대 정신차리지 않는다. 그래도 청소년 소설이니 뭔가 동화처럼 권선징악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이건 그냥 수림이와 순례씨, 그리고 입주민들의 정신 승리 이야기일 뿐, 동화가 아니다. 순례씨가 너무 멋있어서, 마치 요정대모 같아서 잠시 착각했다. 분위기가 따뜻한 건 좋았지만, 그게 다였다.



4. 연수(장류진. 창비. 2023. 336쪽)

: 작가 특유의 완전히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 솔직히 표제작 외에는 다 기시감이 있어서 좀 흥미를 잃었다. 표제작도 역시 아주 많이 현실적이기는 했으나 강사의 마지막 말이 좋아서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표제작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좋았던 건 「미라와 라라」. 



5. 노엘의 다이어리(리처드 폴 에번스, 이현숙 역. 씨큐브. 2022. 296쪽)

: 성공한 작가 제이콥은 오랫동안 연을 끊고 지내던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엄마는 어릴적 형이 사고사한 후 제이콥을 방치하고 학대하다가 내쫓아버렸다. 아버지는 형이 죽고 얼마 뒤 떠나버렸고. 크리스마스 시즌, 엄마의 집에 도착해 보니 엄마는 모든 물건을 쌓아두고 살았었고, 제이콥은 며칠 머물며 정리하기로 한다. 그런데 갑자기 매우 친숙한 느낌의 젊은 여자 레이첼이 엄마를 찾아 온다.


처음엔 타임슬립물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고, 그냥 사랑 이야기이다. 뻔하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그런데 빌런들의 행태가 너무 반복적이긴 했다. 꽉 닫히지 않은 엔딩도 약간 부족한 느낌. 그래도 쉬면서 읽기 좋았고, 이 작가의 '노엘 4부작'도 출간되는 대로 읽을 생각이다.



6.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정세진. 고즈넉이엔티. 2022. 244쪽)

: 꽤 신박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랄까. 대체로 평범한 인간들이 위기에 몰리면 상상할 법한 정도의 나쁜 짓들. 차라리 더 나빠지지, 싶었던. 어디선가 있을 법하지만 이 이야기를 누구도 대놓고 하지는 않았다는 게 신기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알라딘에서 광고하는 대로 '천재 이야기꾼의 탄생'까지는 아니지만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가 기대되기는 하다. 가장 좋았던 건 「나를 버릴지라도」. 



7. 우리가 만드는 세계(N.K.제미신. 박슬라 역. 황금가지. 2023. 452쪽)

: 1편이 있는 걸 모르고 도서관 신착도서코너에 있길래 읽었다. 도시의 화신들이 침입자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 SF적인 부분들이 여러 신화와 뒤섞여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부분들이 많다. 정서적으로도 낯설고. 한 명의 개인이 각 지역의 화신이 된다는 개념은 신박하지만 너무 영웅놀이를 위한 설정 같았고 실제로 뒷부분에서는 다중우주의 존망이 이들 손에 달려 있기도 해서 점점 흥미를 잃었다. 스마트하고 기발한 SF지만 나와는 안 맞는 듯. 1편을 읽었다면 달랐을까?



8. 심심포차 심심 사건(홍선주. 네오픽션. 2023. 212쪽)

: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나' 찬휘는 오드아이다. 보육원에서 자랄 때부터 괴물 취급을 받아 위축된 삶을 살았고, 컴플렉스인 오드아이를 보완하기 위해 늘 끼던 렌즈 때문에 실명위기에 놓여 지금 프로젝트를 끝내면 자살을 할 생각이다. 늦은 밤 작업 후 귀가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심심포차에 들어간 화자는 집밥처럼 따뜻한 맞춤 메뉴와 다정한 주인에게 위로를 받는 느낌이라 폐업을 앞둔 그곳을 매일 방문하며 단골 손님들이 늘어놓는 사건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인다.


'심야식당'의 변주인가 하는 맘으로 가볍게 읽고 있다가 마지막 반전에 놀랐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작가의 글솜씨가 꽤 좋다. 말한 대로 심야식당의 변주라는 면에서 기대치를 낮추고 읽은 덕도 있겠지만. 아이디어도 좋다. 요즘 이렇게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이 계속 발견되어 너무너무 좋다.



9. 우아하게 나이들 줄 알았더니(제나 매카시, 김하연 역. 현암사. 2020. 344쪽)

: 어느덧 중년이 된 여성의 넋두리랄까. 원래 이런 에세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문득 다른 중년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읽었다. 사실 전적으로 공감하기보다는 그냥 이 사람은 이렇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 물론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다. 몸무게는 안 늘었는데 치수는 늘었다든지, 특정 단어나 내가 뭘 하려는지 늘 까먹는다든지. 하지만 내가 확인한 건, 이런 보편적인 신체의 노화와 그에 따른 증상들보다는 역시 삶은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끼리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거. 아이가 있고 남편이 있는 중년의 삶은 당연히 독거인의 삶과 다르지. 간혹 미국식 유머 덕분에 웃기는 했다.



10. 아주 작은 죽음들(브루스 골드파브, 강동혁 역. RHK. 2022. 408쪽)

: 미국 법의학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 이 명칭은 내가 붙인 거다 -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전기. 우리가 미드 『CSI』를 즐겨 볼 수 있게 된 건 리의 덕이다. 리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고, 특유의 뛰어난 관찰력과 손재주, 추진력으로 하버드에 학과가 개설되고 법의학자를 양성하여 수사에 제대로 활용될 수 있게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스스로도 법의학을 독학하여 여성 최초로 경감이 되었다. 


리가 궁극적으로 추진한 건 피해자도 피의자도 억울한 사람이 없는 것. 당시에는 검시관과 코로너가 구분되어 있었다. 검시관은 사망 원인을 진단하지만 전문적인 지식 없이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임명직이었고, 그 지위를 이용해 뒷돈을 벌기도 했다. 리는 이런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데에도 힘썼다. 사비를 밑빠진 독에 물 붇듯 들이부어가면서, 또 경찰관과 법의학도의 교육을 위해 본인 스스로 범죄 현장 미니어처인 디오라마를 만들면서(제목은 이 디오라마를 가리키는 것이다). 비록 당대의 편견과 사회 분위기로 인해 본인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더라도 리의 업적은 오늘날의 과학 수사의 토대가 되었다.


리의 삶 뿐 아니라 19세기 당시의 흥미로운 사회 분위기도 잘 스케치되어 있다. 특히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 여성 건축 설계자 소피아 하이든이 우먼스 빌딩을 설계하고 받은 금액이 겨우 1000달러 - 남자 설계자들은 1만 달러 받음 - 라든지, 오늘날 머그샷의 원조격인 베르티용의 범인감식법 - 정면 뿐 아니라 나이가 들고 살이 찌고 수염을 길러도 거의 변하지 않는 옆얼굴이 중요하다고 함 - 을 시카고 경찰이 적극 활용했다든지. 재미있게, 안타까워하면서 읽었다.



11. 불타는 작품(윤고은. 은행나무. 2023. 363쪽)

: 안이지는 12년 전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적 있는 전도 유망한 화가였지만 이제는 배달 어플의 라이더로 일하는 가난한 작가일 뿐이다. 일하던 중 자신이 미국의 '로버트 재단'의 창작프로그램 수혜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받는다. 조건은 재단에서 작업을 해야 하고, 재단의 인근도시 Q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해야 하며, 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하나의 작품을 불태워야 한다는 것. 이지는 재단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향하지만 거기는 계속된 가뭄으로 화재가 끊이질 않아 모든 것이 엉망이다. 


도입부가 정말 흥미로웠다. 로버트 재단의 시작이랄까. 읽으면서 자꾸만 로버트를 의인화하게 되고 - 물론 이게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 그래서 더 예술과 현실의 거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예술이 삶 속에 많이 가까워졌다지만, 아직도 멀긴 하지. 그런거 생각 안 하고 그냥 이야기를 따라가며 읽어도 재미있기는 했다. 이 작가의 작품은 항상 참신하면서도 가볍지 않아서 늘 좋다.



12. 길 위의 신사들(마이클 셰이본, 이은정 역. 사피엔스21. 2010. 264쪽)

프랑크인이자 유대인 젤리크만과 아비시니아인 암람. 아란 왕국 변두리의 작은 여관에서 시비가 붙은 이들은 가느다란 랜싯과 커다란 도끼를 들고 결투를 벌인다. 하지만 사실 이건 내기 판돈을 갖기 위해 짜고 치는 것. 이들이 속임수를 쓴다는 걸 알아차린 투숙객 코끼리 조련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제안한다. 바로 하자르 왕국의 왕자를 어머니의 나라로 무사히 데려다 주는 것. 


예전에 하자르 사전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하자르라는 나라는 왜 이렇게 내게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낯설다뿐 딱히 어려울 것도 없는데 말이다. 제목은 노상강도를 가리키는 은어이자 이 두 주인공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옳은 일을 한다. 모험 소설답게 전개가 흥미진진했다. 초반의 지리적 낯섦만 극복하면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길지 않지만 당대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하고,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꽤 와닿는다. 즐겁게 읽었다.



13. 그렇게 할 수 밖에(최도담. 네오북스. 2022. 204쪽)

: 라경은 청부살인을 계획한다. 대상은 엄마의 동거남이었던 이기섭. 그는 엄마를 폭행하고 가스라이팅하여 결국 죽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손에 크면서 상처를 잊은 듯 살아가고 있었지만 우연히 마주친 그는 너무 잘 살고 있었고, 라경은 그를 제거하기로 한다.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걸 확인했지만, 갑자기 킬러가 의뢰에 실패했다면서 돈을 돌려준다.


왜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짐작가능하다. 그리고 그래서 계속 아파하면서 후반부를 읽었다.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중략)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는데 작가의 이런 말들이 방금 마친 소설을 더 좋아지게 했다.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건 악의 제거보다는 사랑의 증폭이다. 물론 악은 제거되어야만 하지만. 



14. 천국의 도둑(리처드 도이치, 안종설 역. 문학수첩. 2011. 620쪽)

: 대도 마이클 피에르 시리즈 1권. 대도라니, 재밌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이 시리즈를 더 읽을 거 같진 않다. 마이클은 못 훔치는 물건이 없는 솜씨를 가진 대도지만 결혼 후 손을 씻고 자신만의 보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아내가 갑자기 난소암을 진단받고, 의료보험이 없어 엄청난 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든 그는 수상쩍은 의뢰를 수락하기로 한다. 바로 바티칸의 보물을 훔쳐오는 것.


그냥 도둑질하는 얘기였으면 끝까지 흥미롭게 읽었을 텐데, 중간에 물건을 훔치는 데 성공한 이후로 갑자기 신비주의로 흐른다. 오컬트나 판타지 다 좋아하지만 이런 식의 신비주의는 재미가 없었다. 천국이 한 사람의 손에 달렸다니, 그게 그렇게 흘러간다고? 어쨌든 이런 책은 해피 엔딩이 보장되어 있어서 좋다.



15. 만조를 기다리며(조예은. 위즈덤하우스. 2023. 132쪽)

: 정해는 어릴적 할머니를 따라가 잠깐 머물던 섬 영산에서 만났던 친구 우영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산을 지키는 산지기의 딸로 늘 영산에 묻힐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우영이 바다에 뛰어들 리가 없다고 생각한 정해는 영산으로 향한다.


짧지만 꽤 깊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뻔하게 흐를 수도 있는 여러 장치들 - 사이비 종교, 섬, 동굴 등 - 이 있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관계'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과 사람이 바뀌어도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관계. 그게 정해를 영산으로 이끌었고 진실을 드러냈겠지. 그래서 정해도 마지막에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그렇게 이어지는 거라고.



16. ㅁㅇㅇㅅ(곽재식. 아작. 2021. 368쪽)

: SF 연작. 이미영 사장과 김양식 이사는 '은하행성서비스센터'를 운영한다. 처음 세웠던 '목적'은 언제부턴가 구석에 쳐박히고, 사무실 유지비용을 대기 위해 들어오는 의뢰는 뭐든지 다 맡는다. 그때마다 양식은 미영에게 항의하지만 결국에는 의뢰 수행에 따라나선다.


가벼운 마음으로 재밌게 읽었다. 그 '목적'이라는 게 마지막 작품쯤에서는 밝혀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사실 그게 뭔지는 더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뭐, 적당히 거창하고 적당히 착한 거겠지. 근데 그러면 이 서비스센터는 목적을 이룬 거 아닌가? 



17. 은하행성 서비스센터, 정상 영업합니다(곽재식. 네오픽션. 2022. 212쪽)

: 앞서 읽은 책의 2권인 줄 알았는데, 주인공과 배경만 같다. 역시나 미영과 양식이 여러 의뢰를 받아 다양한 환경을 가진 행성들을 방문하는 내용인데, 읽으면서 청소년들이 읽으면 적당히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괜찮겠다 싶었는데 역시나 동서평설 연재분이란다. 재미는 있었는데 좀 교과서 느낌이었다.



18.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조예은. 안전가옥. 2019. 280쪽)

: 유지는 부모님을 졸라 뉴서울파크에 왔다. 늘 싸우기만 하는 부모님과 이곳에서만큼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하지만 엄마 아빠는 이 곳에서도 서로에게 으르렁대기만 한다. 구석에서 젤리카트를 발견한 유지. 이 젤리를 함께 먹으면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며 무료로 나눠주는 젤리를 들고 온 유지는 이걸 부모님과 함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온 자리에 부모님은 없다.


각자의 사연과 당위성을 가진 인간들이 각자의 욕망을 드러낸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갖는 건 어린아이 뿐.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티 안내고 합리화를 할 줄 알게 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다 어린이다. 관계 속에 놓여 있기를 바라는 어린이. 이미 빛을 잃은 관계를 놓아 버리지 못하는 어린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꿈만 꾸며 모든 게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린이. 


삽화와 표지, 그리고 소재 때문에 계속 어디선가 인공 향료와 단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읽는 동안에는 젤리에 정이 떨어졌지만, 사실 책 속에서도 젤리는 아무 잘못 없다. 젤리장수도.



19.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임하곤 외. 네오픽션. 2022. 328쪽)

: SF 앤솔러지. 유이립 외엔 다 재밌었다. 유이립은 뭔가 기발한 걸 시도해보고 싶었던 거 같은데,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그냥 평범해져 버렸다. 가장 좋았던 건 최희라 「영원」. 비어 있는 듯 차 있는 여백이 좋았다. 이야기를 빽빽하게 채우지 않았지만 모든 걸 이야기해 준 느낌. 임하곤 「나와 올퓌」도 좋았다. 뻔하고 평범한 이야기일 지 모르겠지만 아포칼립스에서도 남아 있는 다정함을 읽는 건 늘 눈물이 난다. 나머지 작품들도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좋았다.



20. 독재자(정세랑, 정보라 외. 뿔. 2010. 288쪽)

: 정보라와 정세랑 때문에 읽었지만 사실 이 두 작가 작품은 이미 읽은 것. 권력에 대한 SF 앤솔러지다. 역시 정보라와 정세랑이 가장 좋았지만 처음 읽은 작가 중에서는 김창규 「파수」가 가장 좋았다. 차분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메시지를 뚜렷하게 전달하는 게 좋았다. 



21. 금서를 빌려드립니다(데이브 코니스, 한원희 역. 우리교육. 2022. 368쪽)

: 책을 정말 사랑하는 클라라. 해마다 학년이 바뀌기 전날에는 밤새도록 좋아하는 구절에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책 한 권을 읽는 '형광펜 올나이트'를 할 정도다. 이른 아침 등교해서 습관처럼 교내 도서관에 갔다가 담당 선생님의 이메일을 엿보게 되고, 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를 비롯해 10권의 금서를 지정한 것을 알게 된다. 어이 없는 기분에 클라라는 학교 도서관에서 치워진 책들을 자신의 사물함에 넣어두고 학우들에게 몰래 대출해 주기 시작한다.


청소년 소설 답게 옳은 일을 하려는 주인공의 좌충우돌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클라라는 자신의 행동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장 선생님에 대한 반발심에서만 비롯된 건 아닌지 고민하고, 비밀 도서관 운영으로 자신의 생활이 흔들리고 개인 시간이 침범당하는 걸 괴로워한다. 또한 자기가 일부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음을 시인한다. 사실 결말은 좀 아쉬웠다. 전형적인 해피엔딩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나아지거나 해결되는 게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클라라만 성장하고 만다. 그래도 책이 소재여서 재밌게 읽었다.



22.코카인 블루스(케리 그린우드, 한지원 역. 딜라일라북스. 2016. 296쪽)

: 1920년대, 귀족 영애 프라이니 피셔는 파티에서 주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친 범인을 뛰어난 추리력으로 잡아낸다. 이걸 계기로 하퍼 대령의 눈에 들어 호주에 사는 그의 딸의 안위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아무래도 사위가 딸을 학대하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고. 귀족들의 한량 놀음에 싫증이 난 프라이니는 호주로 건너가 대령의 딸과 사교계에서 자연스럽게 컨택을 한다.


기대가 컸는데, 시리즈의 첫 권이어서인지 좀 산만했다. 이야기의 전개도, 문장도. 캐릭터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거야 말 그대로 첫 권이니까 그런 거 맞겠지만. 확실히 프라이니는 당대의 금기를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사건 자체는 좀 허술한 느낌이었다. 



23. 그림자 밟기(루이스 어드리크, 이원경 역. 비채. 2014. 320쪽)

: 아이린은 남편 길이 자신의 일기장을 읽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빨간 표지의 일기장을 적당한 곳에 감춘 뒤 은행의 대여 금고로 향한다. 진짜 속마음은 그곳에 있는 파란 표지 일기장에 쓰인다. 아이린은 남편이 뮤즈이자 그의 그림 모델인 자신의 부정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빨간 일기장으로 남편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서 조금 놀랐다. 책 속 남편 길은, 너무 지질했다. 단순히 아내의 일기장을 훔쳐 보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일기장을 훔쳐 보는 마음이 그저 깊은 사랑과 그에 따른 두려움이었다면, 혹은 그저 관음이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은 열등감으로 단단히 싸여 있는 인간이고, 그걸 폭력적인 방법 외에는 표출할 수 없는 인간이고, 그러면서 점점 더 퇴화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난 길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아이린의 태도로 약간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결말이 그럴 줄이야. 


그럼에도 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이제껏 읽어왔던 작품들과 다른 전개라서가 아니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각 등장인물들이 가진 혼자만의 괴로움과 갈등을 탁월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읽으면 읽을수록 좋다. 



24. 죽음의 역사(앤드루 도이그, 석혜미 역. 브론스테인. 2023. 468쪽)

: 죽음의 개념 아주 간략하게 개괄한 후 죽음의 원인을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특히 시기적으로 대규모의 죽음이 일어난 원인을 고찰하는데, 저자가 얘기했듯 초반에는 의학보다는 통계학에 가깝다. 하지만 의학적인 면도 놓치지는 않는다. 시대적으로 높은 사망 원인을 다루면서 바이러스와 세균이 어떻게 전파되고 어떤 방식으로 인체에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지, 만성질환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우리 몸 안에서 발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 설명한다. 


과거 전염병과 위생 문제, 높은 영아 사망률 등이 주로 사망의 원인이었다면 현대로 올수록 만성질환 특히 치매의 비율이 높아진 게 인상적이었다. 사실, 이런 것은 굳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짐작 가능한 부분이고, 정말 흥미로웠던 건 여러가지 소소한 지식들이었다. 가령 19세기까지 의사들은 사용했던 의료 도구나 수술복, 심지어는 손도 잘 씻지 않아서 "유럽에서 출산과 관련된 사망은 수백 년 전 의사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훨씬 늘어났다(147쪽)." 든지, 16세기 부터 런던에서 사망자 통계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는 역병의 영향이었으며 당시 사망 원인 중에는 '고난과 압박(Trouble and oppression)'도 있었다(32쪽) 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매년 전체 사망자 중 1%를 조금 넘는 100만 명 정도가 동물로 인해 사망한다(152쪽)." 는 것도 흥미로웠다.


사실 중요한 건 저자도 얘기했듯 사망 원인 통계 자체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법률, 정책, 공학, 통계, 경제학이 발전했을 때, 또는 의욕과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 사회의 저항을 이겨내고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를 실천했을 때 진보가 일어났다(411쪽)."



25. 아노말리(에르베 르 텔리에, 이세진 역. 민음사. 2022. 480쪽)

: 3월의 어느날, 파리 출발 뉴욕행 에어프랑스 여객기는 난기류를 만나 크게 요동친다. 승객들 모두 공포에 질리지만 무사히 착륙해 곧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철저히 위장한 살인청부업자도, 아버지뻘 남자의 몇 년에 걸친 구애를 받아들인 영화 편집자도, 자신만의 작품은 완성하지 못하고 번역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소설가도. 그런데 6월에 뉴욕 공항에 착륙한 에어프랑스 여객기에 이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기장과 부기장, 승무원은 물론 탑승객들까지 모두. 


독특한 소재를 나름 과학적, 철학적으로 풀어냈다. 물론 그 이론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어차피 평행우주에 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으니. 처음에 살인청부업자의 생활로 시작한 것도 꽤 영리했다. 다만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건 작가의 삶이었다. 그야말로 내가 늘 원하는, reset을 제대로 해낸 거 아닌가! 조금 산만하긴 했지만 즐거운 독서였다. 다만, 기존의 공쿠르상 수상작들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기는 했다. 



26.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안톤 허. 어크로스. 2023. 232쪽)

: 정보라 작가와 함께 부커상 후보로 올랐던 번역가 안톤 허의 에세이. 번역에 진심이고 문학을 사랑하는, 약간 까칠하고 자기 주장 확실한 저자의 솔직한 글들이다. 앞부분 읽을 땐 타겟이 번역가 혹은 지망생들인가 싶었지만 뒤로 갈수록 독자들도 확실히 알아두는 게 좋을 현실을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 꽤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가 얼마나 번역가들을 문학의 '도구'로만 취급하는지, 번역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미비한지, 해외에 우리 문학을 소개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게다가 부커상 국제부문은 원작 자체가 아니라 번역본에 주는 상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래서 번역가와 작가가 함께 후보에 오르는 거였다. 


그래도, 우리나라 독자들도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처럼 좋아하는 번역가가 있어서 그가 번역한 책은 믿고 읽는다고. 그리고 이름을 알린 저자가 이렇게 솔직하게 번역을 이야기해 주어서 고맙다고도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 우리 문학이 발전하는데 꼭 도움이 될 거라고. 



27. 당신의 남자를 죽여드립니다(엘 코시마노, 김효정 역. 인플루엔셜. 2023. 416쪽)

: 핀레이의 생활은 현재 엉망이다. 남편은 섹시한 부동산업자와 눈 맞아서 집을 나가 바로 한동네에 살고 있고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벅차다. 게다가 스릴러 작가인 그녀는 앞으로 쓸 책에 대한 계약금까지 미리 받아서 다 써버렸는데 전남편은 베이비시터까지 해고해 버렸다. 핀레이는 독촉하러 온 에이전트와 동네 식당에서 만나는데, 집에 올 때 보니 남편을 죽여달라며 사례비와 정보가 쓰여 있는 냅킨이 가방에 들어있다. 무시하고 싶지만 금액이 너무 어마어마한데...


제목이 맘에 들어서 집어들었는데 첫부분을 읽으면서 강지영의 『심여사는 킬러』가 생각났다. 사실 핀레이의 좌충우돌이 재밌기는 했지만 심여사만큼은 아니었다. 어쨌든 핀레이는 상당부분 남에게 의존한다. 본인이 워낙 허둥대기도 하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기왕 휘말릴 거면 심여사처럼 본인의 능력을 발휘하는 게 낫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워맨스가 돋보인달까. 역시 여성들의 연대가 답이다. 



28.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주란. 문학동네. 2019. 304쪽)

: 연작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단편들. 모든 화자가 다 다르면서도 다 한 사람인 것도 같고, 어디에선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어디선가 들어본 삶들은 아니다. 평범하고 조용하지만 독특하고 격렬한 삶. 나와는 다르지만 주제넘게 안아주고 싶다거나 토닥거리고 싶다는 마음 대신 옆에 가만히 앉아있어주고 싶은 삶.


덤덤하게 말한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 극복이 아니라 체념. 그래도 살자 하다가도, 사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라 하다가도, 차라리... 하다가도 그냥 돌아보면 시간이 이만큼 지나온 거. 



29. 사방에 부는 바람(크리스틴 해나, 박찬원 역. 은행나무. 2023. 588쪽)

: 1921년 텍사스.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집 딸인 엘사는 그러나 부모와 동생들의 무시와 천대를 견디고 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이탈리아계 레이프는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그와 몸을 섞은 후 임신을 하게 되어 부모에게 쫓겨나 결혼한다. 1934년, 그동안 예쁜 딸과 아들을 낳고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는 남편과 사랑을 듬뿍 주는 시부모와 함께 농장을 꾸려나가는 엘사. 하지만 대평원에는 벌써 몇 달 째 비가 오지 않고 있고, 모래폭풍이 불어닥친다.


대공황기 서민들의 몰락이 뼈아프게 그려진다. 이제껏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읽더라도 대부분 도시에서 어떻게든 버티는 중산층들의 이야기였는데, 이렇게 수직하락한 이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이야기는 거의 처음인 셈이라 마음이 아파하며 읽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뉴딜 정책은 정작 미국의 가장 기본이 되는 농부와 농장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거대 농장주들을 비롯해 자본가들은 자기보다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기는커녕 그들의 상황을 이용해서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만을 바랐다. 어쩌면 이렇게 가진자들은 전세계 어디서나, 어느 시기나 똑같을까.


암담한 현실을 정말 잘 그려냈지만 이 책은 엘사의 성장기이다. 비록 결말이 조금 마음 아프지만 그래도 희망이 반짝인다. 그래서 우리 모두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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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연말에 갑자기 바빠져서 그랬는지, 눈 감았다 뜨니 내일이 섣달 그믐이네. 지난 1년간 307권, 107,662쪽 읽었다. 하루 평균 294.96쪽. 


아쉽다. 사실 올해 초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루에 300쪽을 읽을 수는 없을까? 그래서 꽤 열심히 읽었는데. 12월에 좀더 분발했더라면 좋았을 걸. 


내년에는 좀더 에너지를 끌어올려 봐야지. 하루에 300쪽을 읽고 온전히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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