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부인은 끊임없이 매질을 하던 형리를 잃었다. 생전의 최치수는 아들이 아니었으며 가혹한 형리였던 것이다. 그것을 윤씨부인은 원했다. 원했으며 또 그렇게 되게 만든 사람이 윤씨부인이다. 그 사실을 지금 윤씨부인은 공포 없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형리, 세월을 물어뜯으며, 물어뜯으며 지겨워서 못 견디어 하다가 그 세월에 눌리어 가버린 사람, 최지수는 윤씨부인을 치죄(治理)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단에 바쳐진 한 마리의 여윈 염소는 아니었던지.

사실 이들은 하느님을 본 일이 없다. 그 누구도 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님도 본 일이없고 터줏님 조상님의 얼굴도 모른다. 설령 삼 대사 대쯤, 어린 시절에 본 일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죽은 후 만난 일이 없다. 다만 하느님을 하늘과 해와 달에서, 별빛이나 구름이나 강물에서, 자연에 존재하는 크나큰 것, 혹은 신기하고 위태로운 것에서 느끼는 것이며, 나라님은 포졸의 육모방망이나 원님들의 거룩한 도임행차 같은 데서 느끼는 것이며, 터줏대감은 무당의 주술에서, 조상은 신주 위패에서 느끼는 것인데, 하느님을 말할 것 같으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특히 농민들이 실감하는 것으로는 사계절 천후(天候)를 임의로 하심이요, 세상에 태어나고 또하직하는 인간사를 관장하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만 임의로 죽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목숨이란 말씀이오. 설령 삶이 죽음보다 고생스러울지라도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요. 제가 일개 의생으로 칠십 평생 얻은 것이라고는 사람의 목숨이 소중하다 그것이었소. 제 목숨뿐만 아니라 남의 목숨도, 죄가 있다면 사람마다 죄가 있을 것이요, 갚음이 있다면 사람마다 갚음이 있을 것이요,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 것은 개죽음이요,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짐승일 따름, 사람은 아닐 것이외다. 

치수의 지체, 최치수의 재물, 최치수의 학식, 최치수의 오만, 그런 것이 말할 수 없는 큰 덩어리가 되어 자신은 그 밑에 짓눌리어 자꾸 작아지는 것 같은 생각이 그를 슬프게 했고 걷잡을 수 없게 안정을 잃게 했던 것이다.

요즘 서희는 엄마 데려오라 하면서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 차츰 엄마의 일은 뭔지 모르나 불가한 것이며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솟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꼬투리 잡아 울부짖었고 누구든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으면 싶을 때 그는 겉돌려 가며 방금 길상에게 한 것처럼 더듬어보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희의 마음이 자란 것이다. 슬픔은, 다른 아이들에게보다 그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아리랑 4 (개정판) 아리랑 (개정판) 4
조정래 지음 / 해냄출판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토지조사사업은 크게 네 가지 목적을 가지고 수행되고 있었다. 첫째, 조선의 전 국토를 대상으로 총독부 소유의 땅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둘째, 모든 종류의 토지 소유자들을 명백히 하여 세금을 철저하게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셋째, 조선땅 전체를 샅샅이 측량하여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자는 것이었다. 넷째, 양반계층의 재산을 보호해 줌으로써 식민성 지주로 예속시키는 동시에 친일세력을 대량으로 생산해내자는 것이었다._조정래, <아리랑 3>, p35/243

<아리랑 4> 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는 비극이 그려진다. 명목상으로는 신고 기간 내에 신고를 하면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것이 총독부의 설명이었지만, 관공서 공무원들과 ‘지주총대‘라는 중간관리인들의 농간으로 제때 신고서가 배부되지 않았고, 배부받은 이들도 글을 잘 알지 못해 작성하지 못해 결국 많은 토지가 총독부에게 넘어가고 만다. 작가는 <아리랑 4>에서 이러한 비극의 원인을 백성들의 게으름이 아닌 양반들의 횡포와 기득권에서 찾는다.

백성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이 글배우기를 싫어했거나 아둔을 타고나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글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다. 상것들은 절대 글을 읽힐 수 없는 것이 수백 년에 걸친 규범이었다. 그건 양반층이 자행한 횡포고 억압이었다. 양반층은 권력을 독점한 상태에서 일제의 세금만 안 낸 것이 아니었다. 그 권세를 세세만년 누리기 위해서 백성들을 뭇믹한 바보로 만들어 마음대로 부려왔던 것이다._조정래, <아리랑 3>, p6/243

결국 양반층은 송수익의 말대로 위로는 왕족을 업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짓밟아가며 권세와 부의 감미만 빠는 그릇된 부류들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들이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면 백성들을 모두 강압적으로 우민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고, 반란을 두려워해 사람을 그렇게도 잔인하게 병신을 만들 까닭도 없는 것이었다._조정래, <아리랑 3>, p40/243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면, 일제 하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진 일차적인 원인은 총독부의 간교한 정책에 있겠지만, 이러한 정책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조선 시대 지배층인 양반들의 폭정에도 원인이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공정‘과 ‘정의‘가 여전히 이슈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는 우리 사회의 영원한 과제는 아닌가 싶다.

또한, 전쟁, 가뭄, 홍수, 전염병에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먼저 위협에 노출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는 사회 법칙인 듯하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한 사회격변으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처럼, 일제 하에서도 정치, 종교의 실력자들은 혼란을 틈타 자신의 세력을 유지/강화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작품 안에서 확인하게 된다.

사찰령은 승려들의 행동을 억압하거나 통제하는 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법은 뒤로 절 재산을 확대시켜 주고 승려들이 더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혜택을 감추고 있었디. 총독부는 조산의 불교를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통합시키는 동시에 전국의 큰 절을 지역별로 선정하여 30개 본사(本寺)로 정하고, 작은 절들을 그 휘하에 속하게 했다. 그런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한 것은 바로 조선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는 불교를 장악하자는 것이었다. 그건 지배세력인 양반계층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회유하고 유인해 가며 자기네들 편을 만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수법이었다._조정래, <아리랑 3>, p70/243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친일(親日)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양반들과 불교계. 1910년 전후로는 불교계로부터 친일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결국 1940년대 등록된 모든 종교에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받아들였던 것을 떠올려 보면, ‘속(俗)에 종속된 성(聖)‘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근대(近代)가 아닌 중세(中世)가 열린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찰의) 혜택은 바로 토지조사사업에서 나타났다. 양반지주들이 우선적으로 보호를 받은 것처럼 모든 절들의 사답도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뿐이 아니었다. 총독부가 강탈한 역둔토까지 암암리에 배당받게 되어 절들은 오히려 재산이 불어나고 있었다. 총독부는 농토를 미끼로 불교계를 장악해 나가고 있었고, 중들은 배가 불러가는 대신에 왜놈들을 위해 목탁을 치는 친일배들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_조정래, <아리랑 3>, p187/2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아리랑 3 (개정판) 아리랑 (개정판) 3
조정래 지음 / 해냄출판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수사와 일곱 개의 궁에 속해 있는 농도 전부를 궁장토(宮庄土)라고 불렀다. 그러나 궁장토가 전부 궁중의 땅이거나 왕실의 재산이 아니라는 것은 농사를 짓지 않는 포수나 백정도 다 아는 일이었다. 궁장토 중에서 궁중의 토지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궁중의 토지를 유토(有土)라고 해서 논 없는 농사꾼들에게 소작을 내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 개인들이 농토이면서 각 궁에 속해 세금만 내는 논밭은 무토(無土)라고 불렀다. 그 무토는 사유지이니까 얼마든지 사고팔고 하는 거래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다만 궁토로서 그저 세금만 꼬박꼬박 잘 내면 그만이었다._조정래, <아리랑 3>, p98/260

통감부에서는 그 역둔토에 속한 개인들의 농토도 모두 국유지로 둔갑시켜 버렸던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렇게 억지 춘향이를 만든 농토의 7할 이상을 통감부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겨준 것이엇다. 소유권이 동척으로 넘어간 것이고, 동척은 조선에서 제일가는 땅부자가 되어버린 것었다.(p98)... 합방이라는 것이 되기도 전인 그해 4월이었다. 대물림해 온 사유지가 주인도 모르게 국유지로 둔갑한 날벼락은 혼자만 맞은 것이 아니었다. 그 피해자는 수두룩했다._조정래, <아리랑 3>, p107/260

<아리랑 3>에서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 1910 ~ 1918) 초기의 혼란한 모습과 수탈의 초기 모습이 잘 그려진다. 중앙정부의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지방의 규약인 향약(鄕約)에 기반한 관습법들이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인정되지 않고, 새롭게 성문법이 강요되면서 빚어지는 혼란 속에서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소작농은 유랑민으로 내몰리면서 민중들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져간다.

옛날부터 여기 김제 만경 사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들녘이 넓어 논들이 많으니까 사또한테도 생기는 게 많아 자리가 좋기로 명이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여기 사또로 오자면 누구나 뒷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됐지요. 뒷손을 쓰고 여기 사또로 온 것까지는 좋은데, 그 사또들이 또 거짓말처럼 산골이나 오지로 쫓겨가게 됩니다. 그 연고인즉, 자기네가 뒷손 쓴 돈이 아까워 급하게 본전을 빼려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다 보니 시달리다 못한 백선들이 들고 일어나는 거지요._조정래, <아리랑 3>, p126/260

그렇지만, 사실 민중들의 삶이 어려웠던 것은 일제의 수탈 때문은 아니었다. 특산물
과 같은 이권(利權)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부정한 청탁이 따르고, 본전을 챙기려는 이들의 마음은 조선시대 지배층도 마찬가지였다. 감귤의 산지 제주도에서 탐관오리들의 등쌀이 못이긴 이들이 감귤이 열리지 않도록 밤중에 뜨거운 물을 버렸다는 이야기나 어느 지방이나 전승되어 온 소년 장수 설화 등은 식민시대 이전의 민중이 삶도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니었음을 잘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의병을 일으켜 지키려고 했던 나라는 무엇이었을까.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500년 왕조 조선(朝鮮)이 아닌 자신과 함께 어울어져 살아갔던 이웃들의 삶이 아니었을까. 몸은 고되더라도, 열심히 살면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으로 농토를 빼앗긴 이들이 양반들과 함께 일제에 맞선 것이었으리라. 이와는 반대로, 지방의 유림들 중 상당수는 복벽운동(復壁運動)으로 왕조의 부활을 목표로 했으니, 이미 구한말 의병운동 때부터 분열의 씨앗은 이미 심어져 있었던 듯하다...

"나라 뺏긴 것이야 우리 잘못이 머시가 있어. 우리야 골병들게 땅 파서 오만 세금이란 세금 우로 바치고 아래로 뜯김서 산 죄뿐인디. 다 양반이란 놈덜이 우리헌티 알궈가고 뜯어간 세금으로 배꼽이 요강꼭지가 되게 배때지 불리고, 100리고 200리고 땅 늘쿼감스로 세금이라고넌 땡전 한 닢 안내고 사는 것도 모지래서 나라꺼정 팔아묵은 것 아니여. 근디 시상이 이리 뒤집어졌어도 양반이란 것덜언 땅얼 한 치도 안 뺏기고 지화자 얼씨구나 태평세월로 잘만 살아가덜 않냔 말이여. 어찌보면 왜놈덜보담 더 못된 종자덜이 양반이여, 양반.(p107)... 돈 있고 권세 있는 것덜이 어디 조선사람이간디. 맘이야 벌써 다 왜놈 되야부러 우리 겉은 가난허고 못난 인종덜이나 조선사람으로 남았제."_조정래, <아리랑 3>, p204/2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아리랑 2 (개정판) 아리랑 (개정판) 2
조정래 지음 / 해냄출판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통감부는 9월 1일을 기해 헌병대를 앞세워 호남의병을 쓸어 없애기 위한 '남한 대토벌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그 계획에 따라 이미 6개월 전에 경상북도와 강원도 접경 산악지대에 투입되었던 토벌대 병력들이 호남지방으로 집중되었다. 대토벌작전의 기본 전술은 '교반적 전술'이었다. 교반은 휘저어섞는다는 뜼으로, 의병과 연계된 어떤 일정 지역을 지목하게 되면 그 외곽에 경비 부대가 포위망을 둘러치고, 포위망 안에서는 여러 토벌대가 이 마을 저 마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옮겨다니며 기습을 되풀이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p96)... 19월이 끝나면서 '남한 대토벌'도 끝을 맺었다. 그 두 달 동안에 죽어간 대소 의병장들이 103명이었고, 의병들은 4,200여 명이었다. 결국 호남의병은 몸체가 잘리고 뿌리까지 뽑혀진 채 실뿌리만 남게 되었다.__ 조정래, <아리랑 2>, p102/239

조정래(趙廷來, 1943 ~ )의 <아리랑 1>에서 독자들은 항일(抗日)투쟁의 뿌리를 발견한다면, <아리랑 2>에서는 이를 뿌리뽑으려는 일본의 반(反)의병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 1909.9 ~10)을 통해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을 처절하게 진압한 일본군의 만행 속에서 일종의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게 된다. 이후 1920년 간도참변(間島慘變), 1938년부터 만주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군을 토벌한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 활동이 식민지배하에서 직접연관을 맺는다면,이의 기원은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 ~ 1598)까지 닿을 수 있으며, 아래로는 4.3 사건, 여순사건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 )의 <우린 너무 몰랐다>를 참조하도록 하고 넘기되, 이러한 연관성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태백산맥>과 <아리랑>의 접점이 된다는 점을 챙기자.

임진왜란 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때는 상감과 더불어 조정과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는 점이고, 이번에는 상감과 조정은 왜놈들 편에 서서 의병을 역적시하며 해산령을 내리거나 매도하는 가운데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싸운 것이 크게 다른 점입니다. 의병들이 무수한 희생만 내고 결국 오늘과 같은 비통한 궁지로 몰라게 된 데는 이러저러한 원인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도 제일 큰 원인이 바로 상감과 조정의 망발입니다._ 조정래, <아리랑 2>, p145/239

<아리랑 2> 에서는 송수익이 구한 말의 의병활동과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8)의 의병활동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송수익은 작품에서 임진왜란의 승리요인이 선조(宣祖, 1552 ~ 1608)와 신하, 백성이 하나가 되어 왜침을 극복했다고 말했지만 선뜼 동의하기 힘들다. 실제로 선조는 별로 싸울 의지 없이 빠르게 의주까지 피난한 후 여차하면 요동(遼東)으로 넘어가려 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송수익이 선조에게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렸다고 본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동북아 최강의 함대와 이순신(李舜臣, 1545 ~ 1598)이라는 중심점이 있었기에, 이를 중심으로 결국은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당연한 분석이겠지만, 송수익이 굳이 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청의 북양함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물리친 일본의 해군력 때문이었을까. 이미 우리에겐 육군, 해군도 모두 열세인 상황에서 굳이 열악한 현실을 말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지도층이 앞장서 싸웠다면 허망하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으리라는 그의 생각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보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때 실기를 했으면 그 다음 강제 양위를 당했을 때 상감은 만백성을 향해서 외쳤어야 하네. 백성들이여, 나와 더불어 왜적들과 싸우자 하고 말이네. 그러고 군대를 이끌고 앞장섰어야 했네. 그러면 왜놈들이 곧 죽이고 말았을 거라고? 죽이면 죽어야지. 그게 나라 뺏긴 상감이 책무를 다하는 길이네. 상감이 해산령을 내려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의병으로 나서서 수만 명씩 죽어가는 백성들인데 만약 상감이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가 왜놈들의 총칼에 죽었다면 백성들은 어찌했겠나. 이 땅에 합방이란 없었네._ 조정래, <아리랑 2>, p147/2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