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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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커버 표지를 보려고 겉표지를 열었는데 겉표지 안쪽에 잘 익은 복숭아 과육 색깔에 맛있어 보이는 복숭아가 둥실 떠다닌다. 잘린 복숭아 위에는 어른과 어린이가 앉아있다. 까맣게 탄 큰 사람은 홍차를 마시고 건강하게 그을린 작은 사람은 케이크를 먹는다. 제목이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이니 어른은 엄마일 테고 어린이는 딸일 것이다. 표정이 색감만큼 따뜻하고 행복하다. 표지 안쪽의 일러스트가 이야기를 살짝 엿보여주는 것 같아 책이 궁금해진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감성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제목이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는 육아의 고됨을 잊게 만드는 만족감을 주고,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이와 함께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여성의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무급으로 사용하여 사회를 지탱하는 가부장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유지를 위한 모성이데올로기를 탄탄하게 하는 흐뭇한(?) 문구이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라는 단어에 반응하도록 생활 속에서, 매체를 통해, 사회적으로 암시를 받아서 뇌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것이리라.

제목의 앞뒤 문맥이 궁금해서 차례를 먼저 펼쳤다.

차례

언젠가 어딘가에서…13

꽃도 열매도 있다…71

D랜드는 멀다…171

은행 줍기…185

안녕, 다나카…209

옮긴이의 말…284

차례에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이라는 제목이 따로 없다. 어디서 제목과 연관된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기대하며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23페이지 만에 제목이 들어간 문장을 찾았다.

예전에 엄마랑 만약에 다시 태어난나면 뭐가 좋을지 얘기한 적이 있다. 부자가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벌레가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먹고 배설하고 그냥 사는 거야. 삶의 보람이니 의무니 과거니 장래니 일이니 돈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단순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겠어.”

나는 하나도 안 좋을 것 같지만 벌레든 동물이든 괜찮으니까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이었으면 좋겠다.(p.23)

제목과 관련된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만 떼어놓고 보면 카피로 사용하기 좋은, 감성을 자극하는 감동적인 문구이다. 거기까지, 설득되지 않았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제목인가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설득되지 않았다. 이 책은 설득되는 이야기로 읽는 책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읽어야하는 책인 모양이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속표지와 차례 사이에 ‘이 책에 쏟아진 찬사’가 실려 있는데 ‘이 책은 이렇게 읽으세요’하고 방향을 알려주는 가이드 같다.

이 책은 재미있다. 특히 인물 묘사 중 엄마 다나카 미치코와 집주인 아줌마에 대한 설명이 ‘리얼’하다. 주변에서 만날 것 같은 생생한 인물들이다.

볕에 탄 머리카락은 퍼석퍼석하고 잘 먹는데도 말랐다. 날씬해서 부러운 몸매가 아니라 가난해서 비쩍 마른 몸이다. 잘 씻어도 얼굴이 어딘가 지저분해 보이고, 여름에 반바지와 러닝셔츠를 입고 대자로 뻗어 낮잠을 자는 모습은 꼭 밭에서 방금 파낸 흙 묻은 우엉 같다.(p.21~22)

엄마는 흙탕물을 빨아들인 낡은 걸레처럼 온몸이 지저분했다.(p.53)

소화력이 유난히 강한지 먹어도 금방 배가 비워져서, 헝그리 정신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늘 배고파한다. 말 그대로 리얼하게 헝그리다. 굶주린 늑대라고 표현하면 멋있을 텐데, 엄마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안고 먹이를 찾아다니는 들개 같다.(p.73~74 엄마 다나카 미치코에 대한 묘사)

빠글빠글 파마한 머리는 가발 같고 공처럼 통통하게 살이 쪘다.(p.26~27)

기합이 단단히 들었는지 평소보다 훨씬 빠글빠글한 파마,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하얀 얼굴, ‘열심히 그렸습니다’라고 주장하는 눈썹, 번질번질 새빨간 립스틱, 그리고 까만 바탕에 빨간 부용화 무늬가 커다랗게 새겨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암컷 하마가 신에게 부탁해 하루만 인간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p.102~103 집주인 아줌마에 대한 묘사)

반면 이 책에는 머리숱이 없거나, 대머리이거나, 배가 나오거나, 뚱뚱한 남성은 없다. 특히 누구의 아빠이거나 예비 아빠에 대한 묘사는 단란한 가족이 나오는 캠페인 광고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아빠 이미지와 닮았다.

미키의 아빠는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이 미키와 많이 닮았다. ...... 뼈마디가 두드러진 긴 손가락, 마른 몸에 비해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팔뚝, 새하얀 폴로셔츠와 희미하게 나던 헤어스프레이의 향 같은 것이 산뜻해서 내게도 아빠가 있다면 이렇겠거니 싶었다.(p.13~14 미키의 아빠에 대한 묘사)

갸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진한 눈. ...... 하얀셔츠에 남색 치노 바지를 입었고, 나이는 미키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다.(p.29 다카이 유카의 아버지 다카이 신이치에 대한 묘사)

키가 큰 편은 아닌데 배도 나오지 않았고 치열도 골랐으며 무엇보다 웃는 얼굴이 다정해 보였다.(p.104 가자마 히로시에 대한 묘사)

성인 여성은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로 태어나고 싶은 엄마라도 ‘리얼’하게 묘사할 수 있는 대상이지만 성인 남성 가부장은 이상적인 모습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바탕에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성과 여성을 대하는 일본사회의 시각을 작가의 묘사를 통해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작가 스즈키 루리카가 사회의 암묵적 의식을 판단하지 않고 흡수하는 나이이기에 가능한 묘사일 것이다.

‘안녕, 다나카’에서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미카미 신야가 학원에서 느끼는 심정을 묘사한 부분은 대한민국의 많은 학생들이 공감할 것 같다.

우리는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아까부터 사고가 정지했다. 수업이 시작하면 ‘오늘이야말로 꼭 열심히 해야지’하고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것도 고작 몇 분, 곧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선생님이 하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다. 선생님의 말이 내 위를 그냥 흘러 지나간다. 이렇게 되면 그냥 끝이다. 아예 뇌가 모든 걸 차단해버린다. 마치 머리에 점토가 꽉꽉 들어찬 것처럼. 게다가 딴생각만 떠오른다. 선생님이 무슨 소리를 해도 머릿속에서는 ‘가네코가의 간장 라면, 없어서 못 먹죠!’같은 광고 노래가 반복된다. 아마도 뇌가 파업하는 것이겠지. 옆에서 보기에는 그냥 넋을 놓은 것으로 보이리라. 머리가 포화 상태다. 그런 수준인 아이들을 모아놓은 반이다. 입시 공부를 전혀 이해하지 못 하고 흥미도 없다. 그런 수업을 몇 시간이나 듣는 것은 몹시 고통스럽다. 그냥 앉아 있을 뿐이지만 정말 괴롭다. 고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p.219~220)

대한민국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중 입시에 집중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 그냥 앉아 있을 뿐인 학생들의 내면을 꺼내 펼쳐본 것 같다. 이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고통을 받으며 그냥 앉아서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교육의 전부인가? 앉아있기만 하면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일까? 성적 상위권 학생의 보호자에게 이런 고민은 다른 사람의 것일까? 열네 살 작가 스즈키 루리카가 보여준 입시생 미카미 신야의 내면은 재미있게 읽혔지만 대한민국 학생들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진다.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을 읽는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계속 떠올랐다. 영화장면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이 책에 쏟아진 찬사’에 흘러넘치는 감동의 물결에 함께 흘러가지 못 했다. 다 읽고 나서도 감동과 따뜻함이 가득한 이야기를 읽었음에도 마음이 불편해져서 여러 날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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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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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간 하나의 소설을 써오던 이야기의 신이 붓을 멈춘다. 한 달에 한 권씩 이백 권에 가까운 소설을 줄기차게 써오던 그가 다섯 달째 감감무소식이다. 구중궁궐 내명부의 최고 어른이 애독자인 까닭에 글 꽤나 읽는다는 규장각 서리 김진과 도성 안 어려운 사건의 해결사로 알려진 의금부 도사 이명방에게 원인을 파악하라는 엄명이 내린다. 작가 임두는 자신을 찾아온 이명방과 김진에게 잃어버린 수첩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소설의 초안이 들어있는 작가 수첩을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 이야기의 신이 사라진다. 중단된 소설 「산해인연록」은 미완의 대작으로 남을 것인가.

 

「대소설의 시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몇 백 권을 넘는 분량의 시리즈를 수십 년에 걸쳐 쓰는 작가와 책이 나오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그린다. 또한 이 소설은 정조 시대를 살아간 여인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대소설 속에 자신들의 신산한 삶의 고통을 녹인다. 혼돈의 정치 상황이 얽히는 궐에서도, 시집살이 와중의 사가에서도 이야기의 힘은 셌다. 그녀들은 사람과 사람이 엮이는 이야기 속에서 위안을 얻고 삶을 지속한다. 작가 김탁환은 격변하는 정조 시대 사회 속에서 소설을 쓰고 즐긴 여인들의 이야기를 눈앞에 영상을 보여주는 듯 쓰고 있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작가 김탁환의 소설과 소설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작가는 ‘쓰는 시간이 읽는 시간보다 많으면 작품이 쪼그라들’고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명작들을 자신만의 눈으로 분석하여 강점과 약점을 파악한 뒤에야 제대로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소설 속 작가를 두고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저자 자신의 이야기로 들렸다. 김탁환이란 작가가 어떤 자세와 생각으로 소설을 써왔는지를 절절히 보여주는 문장이 즐비했다. 작가 스스로가 가고 싶은 길을 써놓은 듯 싶은 지점도 있었다.

 

소설가가 몸도 아프지 않고 마음도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할 때, 갖가지 부담을 홀로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법이지, 23년이나 썼다 해도, 오늘 가장 좋은 문장을 지을 수 있는냐 없느냐로 판가름이 아는 게 또한 소설이라네. 1권 p.240

 

우리가 제아무리 열심히 소설을 읽고 쓰더라도, 그것은 직업을 벗어난 어디까지나 취미였다. 「산해인연록」과 같은 대작을 이어 쓰려면, 소설가 외엔 직업을 버려야 한다. 직업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이다. 2권 p.23

 

소설가란 결국 쓰고 쓰고 쓰는 사람이다. 아무리 쓰더라도 쓰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이것까지 다 쓰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늙을수록 더 자주 하는 사람이다. 2권 p.290

김탁환 작가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대소설의 시대」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그가 엄청나게 성실하게 연구하는 작가라는 것이었다. 백탑파가 활동하던 시대인 정조 시대에 이렇게 수많은 한글 소설들이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작가는 수많은 소설들의 내용을 소설의 내용 속에 풀어내고 있다. 김탁환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와 조선 시대의 실제 역사가 씨실과 날실로 엮여들어 있다. 가상의 책인 「산해인연록」을 둘러싼 이야기를 읽으면서 실제 대소설의 시대에 씌여진 소설들의 면면을 맛볼 수 있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이었다.

 

「대소설의 시대」는 김탁환 작가의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의 18, 19권이다. 앞서 출판된 「방각본 살인 사건」과 「열녀문의 비밀」이 영화의 원작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탁환의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다. 추리의 요소와 함께 역사적 인물을 만나는 재미도 있다. 규장각 서리 김진은 박제가, 김덕성, 김홍도와 궐에서 일을 하고 의금부 도사 이명방은 백동수를 사형으로 모신다. 장헌(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의빈 성씨는 대소설의 애독자로 「산해인연록」의 작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또 정약용과 이벽은 익히 알려진대로 천주교 교인으로 이야기의 중요한 맥을 담당한다.

 

저자 김탁환은 이 책에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 나라만의 소설의 시대를 보여준다. 여성이 쓰고 여성이 읽는 소설의 시대를 말이다. 유교 이념에 눌려 조선시대 여성의 존재는 희미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억압의 시대도 여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또 읽으면서 생을 이겨냈다. 함께 읽고 쓰고 소설 안팎을 넘나드는 이야기로 삶을 즐겼다. 그야말로 책을 제대로 읽은 시대가 아닐 수 없다.

 

남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읽는 구도에서, 여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읽는 구도로 바뀌면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다고 보네. 남자 작가들이 인물들의 갈등을 대략 만들고 거기에 공맹의 도리를 얹었다면, 여자 작가들은 직접 겪은 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해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와 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나눈 대화까지, 아주 상세히 소설에 담았다네.……이 나라 이 동네 이 가문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매순간 주어진 예법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각종 차이를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여인들을 담고 있는 소설 또한 소중하다네. 크고 강하다고 멋지고 작고 약하다고 시시한 게 아니란 걸세. 남자를 중심으로 모든 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자들이 만드는 이야기를 알고 느끼려면,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들여다봐야해. 말하지 않은, 말할 수 없는, 말하기 싫은, 그래서 담기지 않은 여백의 속마음을 곰곰이 따질 필요가 있지. 1권 p.46

 

그 밑바탕엔 이처럼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백 년 넘게 쌓아온 상상의 세계가 깔려 있다네. 이건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 1권 p.47

 

쓰는 것만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 옮겨 적는 것, 함께 떠드는 것, 소설 밖으로 나가더라도 막지 않는 것, 소설 밖에서 들어오는 것임을 고맙게도 나는 겨우 스물넷에 알아 버렸다. 그리고 다신 그 즐거움으로부터 떠날 수 없었다. 2권 p.92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백탑파에 대해 궁금해졌었다. 역사로 접근하려니 어렵게만 느껴지던 참에 김탁환 작가의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목록을 보니 백탑파를 소재로 한 작품이 몇 있다. 픽션과 역사를 정교하게 엮어낸 저자의 소설에서 정조 시대를 일별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책 속의 무사 백동수의 호통을 되새겨 볼 일이다.

 

우선 읽어! 읽기만 하면 해결될 문제를 캐묻거나 억측을 해 대는 놈들이 나는 제일 싫더라. 전투엔 나서지도 않고 진법이나 따지는 것과 뭐가 달라? 겪어야만 아는 게 생겨. 1권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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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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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검은 개와 맞닥뜨린다. 염소로 착각할 만큼 크고 온 몸이 검은 개 두 마리. 인적이 없는 메마른 고지대의 오솔길에서 홀로 만난 커다란 검은 짐승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하지만 준의 공포를 현실화 한 것은 검은 개의 물리적 실체가 아니었다. 거대한 몸집의 그 짐승이 어떤 목적으로 양육되었는지를 알게 된 그 순간, 준은 악의 현신을 깨닫는다.

「검은 개」는 이언 매큐언이 1992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장편소설이다. 영화 <어톤먼트>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대표작「속죄」가 나오기 10년 전에 출판된 작품이다. 「속죄」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개개인의 미약함 그리고 누군가의 무심함이 타인의 생을 얼마나 왜곡시킬 수 있는가를 그렸다. 「검은 개」에도 세계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이어진다. 이 책에서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보는 시선의 문제를 다룬다.

준과 버나드 트리메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만나 결혼한 부부다. 이들 부부의 딸 제인의 남편 제러미가 소설의 화자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제러미는 부모 세대의 사람들에게 남다른 친밀감을 가진 이다. 부모와 유대감이 거의 없는 제인의 반대에도 제러미는 장인, 장모의 삶을 깊이 파고든다. 준과 버나드는 결혼 직후 영국과 프랑스로 헤어져 각자 삶의 터전을 일군다.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제러미는 요양원에 입원한 준과 대화하면서 장인, 장모의 삶을 돌아본다. 준이 간직한 사진에서 한때 서로에게 기대어 웃고 있던 젊은 그들이 어느 순간 어떤 이유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상대로 여기게 되었는지를.

인간 만사를 주관하며 주기적으로 개인과 국가의 삶을 파괴하는 사악한 힘과 선하고 전능한 영성이 공존함을 믿는 준의 시각이다.

내면세계의 혁명 없이-아무리 느리다고 해도-거창한 설계가 다 무슨 소용이야.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p.244

재능있는 곤충학자로 평생 과학의 제한적인 확실성과 당당함을 굳게 믿었던 버나드의 시각이다.

내면세계라. 사위, 어디 배곯으면서 내면세계 한번 찾아보라지. 아니면 깨끗한 물 없이 아니면 단칸방에 일고여덟 명이 기거하면서 말이야. ……이 복작거리는 작은 지구에서 세상일이 돌아가려면 우리에게는 반드시 사상이 필요해. 그것도 아주 죽여주는 사상이! p.245

두 사람은 ‘각각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인민위원과 요기, 활동가와 기권자, 과학자와 직관론자’로서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현상을 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각자 개인의 몫이다.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할 것인가. 준의 눈으로? 또는 버나드의 눈으로?

저자는 사위 제러미의 입을 빌어 말한다. 세상은 세계사와 개인사가 서로 작용하고 결합하면서 이뤄지는 거라고. ‘합리적인 사고와 영적인 통찰은 별개의 영역이며 두 가지가 반목한다고 주장해봐야 소용없는 짓’이라고 말이다. 제러미는 어떤 견해의 쪽에 발을 딛더라도 삶을 변화시키는 가능성은 사랑에 있다고 말한다. 서로의 세계를 알고는 있었으면서도 먼저 말을 걸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 준과 버나드는 사랑의 힘에 좀 더 기댔어야 했을까.

저자는 또한 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드러난 악에 대해 경고한다. 경계하는 마음이 느슨해지는 순간을 틈타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낼 검은 개와 같은 사악함. 희미한 자국처럼 남아있다가도 언젠가 우리 곁으로 돌아올 유령같은 악의 존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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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쿡 - 애플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조용한 천재
린더 카니 지음, 안진환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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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전쟁 영화를 즐긴 기분이다. 사방의 국지전을 잠재우면서 주력을 어떻게 움직여나갈지 잘 아는 장수 이야기다. 장수는 그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린더 카니의 책「팀 쿡」이야기다.

 

두툼한 책을 읽으면서 잡스 이후 애플과 지구 최고 가치를 지닌 기업의 현재를 둘러 볼 수 있었다. 팀 쿡은 잡스의 그늘이 희미해진 가운데 애플에 신뢰할 수 있는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잡스의 죽음이 발표됐을 때가 생각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애플은 이제 어떻게 될까, 창의성의 동력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가졌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애플의 후계 문제가 명확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을 때 내부에서는 이미 팀 쿡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팀 쿡은 잡스가 만든 애플, 높이 치솟았지만 부실덩어리인 기업에 살을 붙여 오늘날의 애플을 만들었다.

 

팀 쿡의 애플은 잡스의 애플과 달랐다. 잡스의 애플이 호기심과 엉뚱함이 폭발하는 청소년기라면 팀 쿡의 애플은 사회적 윤리의식과 책임의식을 갖춘 성년이다. 책에서는 여섯 가지 경영 가치를 중심으로 애플을 지휘하는 쿡을 소개한다. 애플의 웹사이트에도 게재되어 쿡의 애플 경영의 기초가 된 가치들이다. 접근가능성, 교육, 환경, 포용성과 다양성, 프라이버시와 안전, 공급자 책임이 그것이다.

 

⦁ 접근가능성: 애플은 접근가능성이 인간의 기본권이며, 모든 사람이 기술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교육: 애플은 교육이 인간의 기본권이며, 모든 사람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환경: 애플은 환경에 대한의무감을 바탕으로 제품의 설계와 제조에 임하다.

⦁ 포용성과 다양성: 애플은 각기 다른 다양한 팀이 존재해야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 프라이버시와 안전: 애플은 프라이버시가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믿는다. 애플의 모든 제품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프라이버시와 안전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 공급자 책임: 애플은 공급 사슬에 속한 사람들을 교육한 후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며 귀중한 환경 자원을 보전하도록 돕는다. (pp.11-12)

 

 

얼핏 보면 기업이라는 거대 생명체을 운영하면서 그 사회적 파급을 생각한다면 응당 생각해야할 가치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미덕을 실현하려는 윤리의식을 갖춘 경영자와 기업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쿡은 이런 가치들을 대외 홍보용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 있다. 책에서는 환경을 생각하는 그린 정책을 어떻게 현실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용자의 프라이버시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어떤 상황까지 감수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소개한다.

 

혼돈에 빠진 회사를 살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아웃소싱은 환경과 공급자 책임에 문제를 일으켰다. 환경 오염 물질 배출과 노동자 처우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또 범죄와 관련된 아이폰의 보안과 관련해 애플은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쪽을 선택한다. 정부의 요구와 소송 협박도 불사하면서 말이다.

 

검정 바탕에 흑백톤으로 인쇄된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애플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조용한 천재”라는 소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잡스 이후의 애플을 이끄는 사람을 영웅화하려는 책인가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특히 대기업은 부도덕함을 피하기 어렵다는 개념을 가진 터라 세계 최고 가치 기업의 수장을 다룬 책이 고운 시선으로 보이지 않았던 게다. 우려와 달리 책의 내용대로라면 애플은 달랐다. 미래를 내다보며 기술을 사들이고 제품을 개발하는데 천재성을 보였던 잡스의 또 다른 안목을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람보는 눈이다. 잡스는 자신에게 부족한 경영측면을 완벽하게 보완할 사람을 찾아 애플의 미래를 맡겼다. 팀 쿡은 자신의 특기인 운영의 기술을 애플을 재건하는데 탁월하게 발휘했다. 또한 단지 돈을 끌어들이는 괴물로서의 기업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으로서의 애플을 만들어가고 있다.

 

린더 카니의 이 책을 읽는 동안 사용자 친화적인 IT 제품의 역사를 구석기시대부터 훑어 본 기분이 들었다. 맥이 지나온 길을 아는 이라면 곳곳에 등장하는 애플Ⅱ, 파워맥, 뉴턴 같은 용어에 미소짓게 될 것이다. 애플이 미덕만을 갖춘 기업은 아니다. 그들의 사악할 지경에 이른 고가정책이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 볼 수 없는 노동환경 정책은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미래를 기대해 보게 됐다. 그들이 수장 팀 쿡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올바르며, 지금까지 보여준 옳은 방향으로의 추진력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아쉬웠던 것은 쿡의 창의성을 확인하기 못한 점이다. 쿡이 잡스의 영향력 없이 개발한 제품인 애플워치만으로는 신제품 개발에 대한 그의 안목을 확신하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잡스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만의 비젼을 보여준 팀 쿡에게 창의성까지 증명할 것을 기대한다면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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