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에서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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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서야 표지의 얼룩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됐다. 신기하게도 그 전에는 제목 아래에 있는 그 어둑한 그림자가 무슨 모양인지 몰랐다. 내 눈엔 그저 공원에 앉은 사람들만 보였고 화창한 하늘에 낀 작은 구름 때문에 잔디 일부분에 그늘이 져 있는 모양새로만 보였다. 일상에 길들여진 대로 보는 눈이 그려낸 광경이었다.

 

스티븐 킹은 공포 소설의 대가가 아니었던가. 무서운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 편이어서 스티븐 킹의 책을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이번 책「고도에서」는 그에게 전과 다른 칭호를 붙이고 있다. “스윗 킹”이라고. 공포의 제왕이 쓴 달콤한 이야기라면 읽어도 괜찮겠지 싶었다.

 

책에는 현실을 뛰어넘는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귀여운 수준이다. 주인공 스콧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체중감소 현상을 겪는다. 희한한 일은 외모나 신체 능력의 변화는 전혀 없다는 거다. 느껴지는 증상은 그저 몸이 중력의 감옥을 벗어나고 있다는 정도. 초현실적인 현상이다. 딱 여기까지 킹의 명성에 걸맞는 부분이었다.

 

스콧의 이웃에는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레즈비언 커플 디어드리와 미시가 산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이지만 보수적인 마을에서는 이들의 공개적인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정체성을 쉬쉬하며 숨기지 않고 지나치게 당당하다는게 이유다. 아무리 멋지고 입맛 당기는 메뉴를 내놓는다 해도 그들이 ‘결혼한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레스토랑은 파산 위기에 처해있다. 이들이 게이커플이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점이 있었을까. 그건 좀 다른 문제고.

 

“그러니까…… 레즈비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결혼까지 한 레즈비언이지. 그건 절대 타협 안 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 (…)”

“(…) 그 여자들이 정체를 숨기고 살았으면 괜찮았을 거야. 그런데 안 그랬잖아. (…)” p.65

 

마을 전체가 디어드리와 미시를 터부시 한다. 스콧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가벼워진 몸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에 변화가 오지 않았었다면 스콧은 레즈비언 커플에게 마음이 기울었을까.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상황,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직접 몸으로 겪고 있기 때문에 소외된 이웃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이 동네 전체가 레즈비언을 부결했다. 선거 투표에서 부결한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이 마을의 표어가 ‘남들 모르게 못하겠으면 나가라.’인가 싶다. p.104

 

디어드리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태도에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웃들이 뭐라든 스콧은 디어드리 커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기적은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를 특히 나와 다른 누군가에게 한 발 다가가는데 필요한 건 한 잔의 와인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스콧이 치즈, 크래커, 그리고 올리브와 함께 준비한 피노 와인 한 잔이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p.150

 

스콧에게 찾아온 마지막이 불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칠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찾아온 비현실적인 일이 사실이라면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또한 생각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스콧은 그의 삶에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만 ‘행복’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스콧은 자신이 가진 체력의 극치를 경험했다. 신세계였다.

그는 만사가 다 이와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 고양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p.136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불가사의다. p.97

 

디어드리는 마지막 순간에 도와달라는 스콧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스콧과 디어드리, 그 둘은 다름을 이유로 타자화되어 소외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전같으면 서로를 수용할 일이 없었을 그들이 이제 상대를 완벽히 이해한다.

 

“그리고 저는 병실이나 정부 기관에서 검사나 당하면서 이 체중 감소 프로그램의 남은 시간을 허송하고 싶지 않아요.” 스콧이 말했다. “어쩌면 대중들의 흥밋거리나 되거나요.”

디어드리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완벽하게 이해돼요.” p.159-160

 

소설은 이해와 포용의 이야기였다 그것도 아주 따뜻한 이야기 말이다. 킹의 소설이 이런 식이라면 내가 그간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은 지나치게 겁먹은 행동이었다. 설정이 어떻든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이야기, 사회의 그늘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라면 게다가 그토록 흥미진진하다면 얼마간의 으스스함은 견딜만 할 것 같다.

 

내가 책 표지를 보면서 당연한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스콧도 디어드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은 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변화로 인해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소외된 타인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내가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의 그림자 모양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래서 스콧에 대해 뭉클한 마음이 더 커졌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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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
문은강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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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하다. 고복희가 춤추는 장면은 끝까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원더랜드가 프놈펜에 있을 거란 상상만으로 흐믓해졌다. 왜냐구? 고복희처럼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평범한 수준의 상식이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권력자가 됐든 돈 많은 사람이 됐든.

 

소설의 주인공은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원더랜드’라는 이름의 호텔을 운영하는 고복희다. 소설의 배경과 인물들은 모두 현 시대를 살아가는 각 세대와 계층에서 추출한 표본들 같았다.

 

배경은 80년대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한 캄보디아. 군부의 세력이 정치를 휘두르고 자본과들과 결탁하며 비리와 불의가 득세하는 곳이다. 군사 정권이라는 점만 빼면 원칙을 교묘히 피해가는 힘있는 자들의 행태는 거기나 여기나 별 다를 바 없다.

 

군복을 입과 민간인을 위협하는 모양새라니. 이런 것마저 과거의 한국과 닮아 있다. 그때도 그랬다. 아파트가 무너지고 호텔에 불이 나 애꿎은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모두가 당연한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

개 같은 세상. 그렇다. 총을 들고 위협하는 군인. 부패한 관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이다. pp.54-55

 

고복희의 원더랜드를 찾은 손님 박지우는 청년세대의 표본이다. 열심히 살고 싶지만 되는 게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보다 못해 진짜를 느끼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앙코르와트를 찾아 프놈펜으로. 그러나 불국사가 서울에 없는 것처럼 앙코르와트는 프놈펜이 없었다.

 

“뭔가 이루고 싶으면 죽도록 하라고 하는데. 제가 봤을 때 죽도록 하는 사람들은 진짜 죽어요. 살기 위해 죽도록 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p.93

 

한인 회장 김인석은 기성세대를 대표한다. 노년층의 안일함과 청년층의 게으름을 못마땅히 여기며 다같이 뭉쳐 한국인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일을 도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늙은이는 시도 때도 없이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지껄인다. (…) 아직도 그 시대에 머물러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젊은 놈들은 더 한심하다. (…) 훌륭한 점심을 먹는 것이 인생에서 가중 중요한 일인 것처럼 군다. p.133

그는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있다. 한국인은 보통 인간이 아니다. (…) 얼마나 대단한 민족인데. 고개를 치켜들고 떵떵거려야 한다. 이렇게 죽은 듯이 살아서는 안 되는 거다. p.134

 

호텔 원더랜드에서 일하는 캄보디아인 린은 출중한 외모에 외국어에도 능통하다. 린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이 부끄럽다. 우리네가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정확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린이 생각하는 한국은 자랑스럽게 여기기 힘든 나라다.

 

고용허가제가 실시된 이후로 한국은 외국인에 대한 취업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업은 값싼 임금으로 위험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을 원할 뿐이었다. 부당한 대우에도 한국 정부는 제대로 해결할 생각조차 없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최악이었다. p.99

 

고복희의 남편 장영수는 개발 논리에 희생된 사람들을 보여준다. 바닷가 출신인 그는 새만금 간척사업이 자연에 얼마나 훼손을 가하는 일인가를 알리기 위해 애쓴다. 갯벌에 의지해 살아가는 어민들을 보호하고 자연을 살리기 위한 그의 노력은 무위로 돌아간다.

 

그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 정부에 대한. 눈앞의 손실만 바라보는데 급급한 법원에 대한. 명백한 오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pp.193-194

 

고복희는 원칙주의자다.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지만 그녀의 원칙은 주위와 불화하지 않는다. 그녀의 원칙은 일관성있고 의로움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를 불편하게 느꼈던 박지우도 호텔에서 일하는 현지인 린도 고복희를 신뢰한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낭비는 고복희가 용납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불필요한 쓰레기를 만드는 건 게으름뱅이나 하는 짓이다. 항상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p.88

 

우리 사회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모여 원더랜드를 둘러싼 한 바탕 이야기를 엮어간다. 교민사회의 힘 있는 자들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원더랜드를 탐낸다. 남편의 꿈을 구현한 장소인 원더랜드를 순순히 포기할 고복희가 아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움직임에 대해선 굳이 애쓰지 않지만 원더랜드를 지킨다는 원칙은 고수한다. “부당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자를 향한 불의를 눈앞에서 목격할 때 그녀는 자신의 ‘옳지 못함’을 무릅쓴다. 소설 대목 중 가장 통쾌한 장면이다. 자신의 옳지 못함으로 더 큰 불의가 자신의 본 모습에 눈을 뜨게 하는 불가사의한 통쾌함이었다.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가 「오베라는 남자」보다 재미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고복희라는 캐릭터는 그 독특함 때문에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짧은 단발머리와 꼬박꼬박 내뱉는 “다, 나, 까”말투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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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거래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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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이 맞나? 「일생일대의 거래」을 들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책의 부피는 그간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이야기의 향연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책 뒷면에 친절히 소개되어 있는 바를 보자면 그의 필력은 무려 다음과 같다. 「오베라는 남자」452쪽,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552쪽, 「브릿마리 여기있다」480쪽,「베어타운」 572쪽, 「우리와 당신들」 602쪽. 이중 「우리와 당신들」을 재밌게 읽었다. 서사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장이 쉴 새 없이 넘어갔다.

 

소설은 그 길이가 짧아질수록 그 안에 담기는 의미가 압축된다. 상세한 설명과 묘사 없이 뚝뚝 떨어진 장면들을 서로 연결해 상상해야 한다. 이 작가에게 기대한 소설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기심도 일었다. 이렇게 프레드릭 베크만이 쓴 두 개의 중편 중 하나인「일생일대의 거래」와 조우했다.

 

이건 한 생명을 구하려면 어떤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야 하는지를 다룬 짧은 이야기다. 미래뿐 아니라 과거까지 걸린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이 아니라 뒤에 남긴 발자취가 걸린 문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게 전부라면, 그게 당신의 전부라면 누굴 위해 당신을 내어 줄 수 있을까? p.5

 

꽤 무거운 주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도입부로 시작한다.

 

안녕, 아빠다. 조만간 일어나겠구나. 헬싱보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일 텐데. 나는 사람을 죽였다. p.11

 

자녀에게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인사를 건네면서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하는 아버지라니. 「이방인」의 첫 문장에 대한 오마주라도 되는 걸까.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누굴 죽인 걸까. 그걸 왜 아이에게 고백하듯 말하는 걸까. 데뷔작부터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작가다운 시작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도입부의 궁금증을 풀어가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자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주인공은 가족을 버리다시피 하던 끝에 홀로 되고 사회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루지만 병마를 피하지 못한다. 입원한 병원에서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죽음의 사자를 만난 그는 하나의 죽음으로 다른 하나의 죽음을 대신하려 한다. 아니 하나의 목숨으로 다른 목숨을 사려한다.

 

“다른 사람들 데려가요! 다른 사람을 줄 테니 그 사람을 죽여요!” p.21

 

평생 남자의 주변을 맴돌며 죽음의 순간을 경고해주던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어김없이 병원에도 나타난다. 뭔가 잔뜩 적힌 폴더를 들고 까만 연필로 그 위에 뭔가를 표시하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여자. 그녀는 그 병원에서 누구를 데려가려는 걸까. 그? 소녀? 언제 올지 모를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남자는 행복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행복이란 승자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갖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행복은 어린아이나 동물을 위한 것이고 거기엔 실질적인 기능이 전혀 없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세상에는 예술도 음악도 마천루도, 발견도 혁신도 없다. 모든 리더, 네가 아는 모든 영웅은 하나같이 집착이 심하다. 행복한 사람들은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고, 질병을 치료하거나 비행기를 띄우는 데 일생을 바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위해 살고 오로지 소비자로서 지구상에 존재한다. 나와 다르게. pp.73-74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날 그의 마음에 동요가 생긴다.

 

그리고 나는 궁금해졌다. 내가 그 개들처럼 행복한 적이 있었는지. 그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었는지. 행복해지는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p.74

 

“암이 있으면 가구에 낙서해도 되”는 걸 알고 자신을 보며 우는 엄마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할 줄 아는 다섯 살짜리 아이는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를 무서워한다. 회색 스웨터 아줌마가 오지 못하게 보초를 서겠다고 아이와 약속한 남자는 자신에게 큰 변화가 닥친 걸 알아챈다.

 

남자에게 중요한 건 시간이다. 그리고 1초의 가치를 믿으며 인생을 건 마지막 거래를 한다. 그가 건 1초의 가치는 무엇인지, 그의 마지막 거래는 성공했는지는 각자가 확인해 보시길.

 

많은 의미를 눌러담은 동화같은 소설이다. 중편이라 부르기에도 짧아 보이는 분량이지만 삶에 대해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해 행복과 희생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책의 만듦새도 좋았다. 표지부터 속지의 삽화들까지 따스한 색감의 그림들이 들어있다. 이야기를 담되 울림을 더 크게 만드는 이미지들을 보며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다 보면 어느새 첫 페이지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선택을 곱씹어 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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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샘과 함께하는 시간을 걷는 인문학
조지욱 지음 / 사계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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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길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수많은 인간의 발자국이 묻어 있다. 어떤 길은 수천 년의 시간을 견디며 수만 킬로미터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길을 공부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같다. 그런 역사가 깃든 길을 걸으며 수천 년 동안 그곳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만나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p.7

 

「시간을 걷는 인문학」은 지리에 얽힌 여러 시대의 사회, 문화, 경제, 환경 등의 이야기를 길이라는 주제로 묶어낸다. ‘1장 하늘부터 바다, 땅속까지, 세상은 길로 이어져 있다’에서는 여러 가지 길에 대해 소개하고 ‘2장 우리와 또 다른 사회를 연결하는 길’에는 문명과 문명을 연결하는 길과 그 길이 있음으로 일어난 변화에 대해 다룬다. ‘3장 오고 가는 길에서 피어나는 문화’에서는 길과 강이 문명의 생성과 문화의 발달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고, ‘4장 경제 발전과 전통 사이에 놓인 길’은 교역과 소통을 위한 길이 경제와 어떤 상관 관계를 맺는지 알아본다. ‘5장 자연환경과 길은 공존할 수 있을까?’에서는 인간이 만든 이기인 길과 자연이 주고받는 영향을 다룬다.

 

저자는 세계 도처의 길을 소재로 하는 동시에 그 길에서 파생된 문명 그리고 길을 통해 이뤄진 소통과 발전, 쇠망에 이르는 역사의 현장을 함께 보여준다. 길을 알면 길에 담긴 인간사를 알게 되고 인간 문명을 통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을 걷는 인문학」이라는 책의 제목은 책의 의도를 가장 적절하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길을 소개하는 부분에 눈이 갔다. 나라 땅 여기저기에 낯 선 이름의 길들이 오랜 시간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각각 길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저자는 ‘토끼비리’ 길을 설명하면서 ‘비리’란 강가나 바닷가의 낭떠러지를 뜻하는 사투리라는 것과 조선 선조 때 재상 유성룡의 일화와 고려 태조 왕건의 이야기를 한다. 역사를 담은 길 이야기가 길지 않은 에피소드로 차곡차곡 담겨있다.

 

 

이야기 사이사이 따로 영역을 만들어 넣은 단편적인 설명도 재미있다.

 

배는 어떻게 발달해 왔을까?

원시 시대의 통나무배로는 ‘카누’, 가죽배로는 ‘카약’이 있다. 단순히 재료의 뜨는 성질을 이용하던 것과 달리 인간의 힘으로 뜨도록 만든 최초의 배는 이집트인의 ‘파피루스배’다. 나일강의 갈대(파피루스)로 만든 이 배는 앞과 뒤의 끝이 올라간 모양을 하고 있으며, 처음으로 돛을 달았다. p.94

 

「시간을 걷는 인문학」은 지나온 시대에 대한 이야기에 더해 현재 그리고 앞으로 문제가 될 환경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물속에 잠기는 현상이 우리나라도 나타난다는 것에 놀랐다. 제주 ‘용머리 해안 산책길’ 이야기는 지구 환경 변화에 예외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산책로가 바닷물에 잠기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 잠기는 시간이 길어져 하루 평균 4~6시간에 이른다. 산책로가 사라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지구 온난화가 그중 하나라고 한다.

제주 해수면은 지난 40년 동안 22센티미터 상승하고, 바닷물의 온도는 30년 사이에 1.2도 높아졌다. 제주 해역의 해수면 상승률은 우리나라 다른 해역보다 가팔라서 1년에 4.55밀리미터씩 상승한 것을 분석됐다. 이것은 전 세계 평균 해수면이 1년에 1.8밀리미터씩 상승한 것보다 2.5배 정도 높은 수치다. 과학자들은 지구 기후 변화로 수온이 상승해 바닷물의 부피가 커진 것을 원인 중 하나로 꼽는다. 이는 이어도 남측을 지나 동해안과 일본열도 동쪽으로 들어오는 쿠로시오 해류의 유량과 수온 변화 등의 영향이다. pp.182-183

 

하나의 이야기 길이가 길지 않아 어린이가 읽기에 적당하다. 책 내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시각 자료가 알차게 들어있다. 지도뿐 아니라 그래프, 에피소드를 설명하는 사진 등은 읽기의 흥미도를 높이는 포인트다. 다만 한 지형을 설명하며 시대나 지명, 인물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뒤섞여 나와 배경 지식의 정도에 따라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다. 연결해서 읽지 않더라도 짧은 시간에 한 에피소드씩 넘겨보아도 좋을 책이다.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면 흥미로운 지역의 길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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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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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목표는 권력을 남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권력에서 폭력을 제거하고 권력의 의미를 바꾸는데 있다. p.5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아마도 먼저 “페미니스트가 뭔가요?”라는 질문으로 답할 것 같다.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어설프게 읽어보고 강좌도 들어봤지만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의 정확한 의미를 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읽고 들을 때만 아는가 싶다가 일상의 생각으로 돌아오면 다시 모호해졌다. 그저 뭔가 불편한 느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불편함이 내 생각의 단단함에서 기인한다는 걸 깨달았다. 기존 권력 질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진 고정관념들이 새로운 생각에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탑들이 기반으로 하는 개념들이 얼마나 한 쪽으로 편중된 것인지를 알게 되는 일이 싫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시각을 갖게 되면 그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만난다. 그냥 지나쳤던 부분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이런 새로운 앎은 환희만 가져다 주지 않는다. 고통이 뒤따른다. “페미니스트가 된 다음에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수가 없어요. 재미있게 보던 예능 프로그램도 짜증이 나고, 드라마나 영화도 보면 화가 나요. 친구와 가족과도 점점 말이 안 통해서 조금씩 멀어지는데, 어떡하면 좋죠?”라며 꽤 절박하게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p.60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는 정희진의 강연에서 인상깊게 들었던 구절을 몇 번이고 되뇌이게 한 책이다. “알게 될수록 사는 게 불편해지시죠? 앞으로 오만가지 것들이 불편하실 거예요.” 강연에서 이런 맥락의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근데 이 책을 읽으며 보니 ‘페미니즘’의 눈으로 볼 때 우리의 삶은 부정의가 ‘기본값’이었다. 우리의 세계는 한쪽 성에 또는 다수가 가진 성에 관한 관념만이 존재하는 장소였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의 인식 체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페미니즘의 존재는 “불온한”(p.25) 것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책은 저자가 다양한 여성주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얻은 단상들이나 책 혹은 영화를 소재로 다룬다. 특히 영화를 보는 저자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친일 논란으로 흥행에 실패했던 <청연>을 두고 주인공 박경원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시대와 권력의 무게를 증명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영화는 “시대를 넘어 하늘을 날고 싶은 여성의 꿈을 그렸지만, 친일 논란에 시달렸다”면서 “애국심은 정말 그렇게 모든 가치에 우선할 정도로 정의로운 것인가”를 묻는다. 영화 <청연>에 대해 ‘친일’에만 방점을 찍었던 나의 생각에 창문을 내는 듯한 문장이었다. 저자는 이어 언론이 <청연>을 다룬 방식에서 보이는 여성혐오적인 태도를 지적한다. 영화에서 박경원을 기존 성역할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다룬 점을 서술한 부분에 가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PC통신의 시대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사람이다. 공저를 여러 권 냈지만 단독 저서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만의 책을 내고 그 책의 무게를 온전히 홀로 책임져야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페미니스트로 살면서 목소리를 낸다는 건 인신공격에 계속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이런 말의 맥락에서 그녀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로 지낸 세월동안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받는 공격이 일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페미니즘이라는 어휘가 우리 말 속에 등장한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변했을까. 단지 여성주의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회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책 표지에는 제목이 이렇게 인쇄되어 있다. “다시는________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과 ‘그전으로’ 사이에 긴 밑줄이 그어져 있는데 나게는 이것이 저자의 망설임으로 느껴졌다. ‘그전으로’ 돌아가는 일의 불가능성과 돌아가지 않음으로 해서 예상할 수 있는 고통 사이의 망설임말이다.

 

이 책은 2003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것이다. 긴 시간을 통과한 글임에도 글에서 다루는 상황들, 개념들이 여전히 새로운 것은 내가 그리고 우리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 권김현영은 우리의 영혼이 진화하고 있다고 더불어 페미니즘도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낙관이 현실이길 바란다.

 

내가 나로 사는 한 결코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리고 살기 위해선 내가 아닌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지만 혼자는 싫고, 나를 억압하는 것들이 나를 살게 하기도 하며, 자유는 언제나 위험을 담고 있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언제나 모순과 역설 속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냈다. p.12

 

이 책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저자가 오랜 시간이 걸려서나마 그녀의 글들을 모아 출판하기로 마음먹어줘서 또 다행이다. 책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밑줄을 그었다. 미처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다시 읽고 읽어서 그녀의 말을 온전히 흡수하고 싶었다. 세상을 이해해보려는 나의 눈을 얼마간 밝혀준 책이 고맙다. 저자는 출판사에 두 가지 원고 뭉치를 넘겼다고 한다. 하나는 이 책으로 꾸려진 짧은 글들의 모음이고 또 하나는 긴 글을 모은 연구서라고. 내년 상반기에 나올 조금 더 호흡이 긴 그녀의 글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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