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
에느 리일 지음, 이승재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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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쓸쓸하고 아름답다. 매서운 바람이 떠오르는 북구의 고립된 한 섬에서 한 가족이 산다. 아빠, 엄마, 나 그리고 카알. 나와 카알은 쌍둥이 남매다. 나는 여자아이치곤 힘이 센 아이 리우고 카알은 말이 없는 남자아이다. 남매의 할머니는 아빠의 손에 살해된다. 그러니까 아들이 어머니의 숨을 끊어 놓은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이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서술된다.

 

아빠가 할머니를 살해하던 날, 하얀 방은 완전 깜깜했다. 난 거기 있었다. 카알도 함께 있었지만 누구도 카알이 거기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p.5

 

이 가족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설은 리우의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의 모습으로 지내게 되었는지를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리우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할머니가 살해되는 날까지. 그리고 그 가족이 어떤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지까지. 이야기의 중심은 리우의 아빠 옌스 호더다.

 

작가 에느 리일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송진」이 첫 작품이다. 이 소설로 작가는 2016년 스칸디나비아 최고의 서스펜스/범죄소설에 수여하는 글래스키상을 받았다. 「송진」은 덴마크에서 2015년에 출간됐고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자국내 첫 작품인 「리셀레예에서 온 도살자」(2013)를 발표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실력을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작가의 이전 작품을 본 일이 없는 나에겐 그저 낯선 작가일 뿐이었다.

 

「송진」은 기대 이상의 스토리텔링을 보여줬다. 충격적인 도입뿐 아니라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에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한 마지막 순간도 흥미로웠다. 서스펜스/범죄소설 분야의 작품임에도, 심지어 같은 분야의 유력한 상까지 수상했음에도 작가의 문장은 부드러운 서정이 담겼다.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송진’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홀데트섬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건 신선한 송진 냄새다. 코를 간질이는 재미난 느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끈적끈적한 느낌의 송진. 아빠는 차분한 목소리로 나무 안에서 나오는 수액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송진이라는 건 신기한 거라고. 외부의 자극이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상처를 치료할 뿐만 아니라 작은 크기의 죽은 동물들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한다고 했다.……송진은 나무들을 치유하는 보호자니까. 나무들은 내 친구들이었다. pp.15-16

 

옌스 호더는 일생을 통해 느꼈던 결핍을 물건을 모으는 일로 보상받고자 한다. 가까운 섬의 이웃들과도 점차 연락을 끊고 자기 가족들만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자신이 쌓아 만든 세상을 외부로부터 차단하고 시간조차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 옌스 작업실의 모래시계는 ‘모래가 양쪽에 정확히 반반씩 나눠진 채로’ ‘먼지와 기억 속에’ 잊혀져 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형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아들로부터. 그를 떠난 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도 그의 곁을 떠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p.106

 

딸에게 아빠의 세상을 넘어서는 것은 무엇도 가르치지 않고 싶어했지만 리우는 모래시계안의 모래가 흐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아이다. 아빠 옌스의 행동을 살피고 그가 한 말들을 곰곰이 되씹어본다. 리우는 숲 속에서 스스로 지혜를 터득하는 아이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번 떠난 것은 무엇이든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아빠, 그리고 숲의 순환처럼 모든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딸이 함께하는 시간은 처음부터 파국을 예고한다.

 

그날 이후 숲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색이 다른 색을 대신한다.……어둠이 빛을 다신하고, 빛이 어둠을 대신하는 것이다. p.17

 

아빠 옌스가 집과 집 주변에 물건을 쌓아 자신만의 장막을 건설하는 동안 엄마 마리아는 자신의 몸 내부에 움직일 수없는 성을 만든다. 먹고 또 먹는 동안 마리아의 몸은 집의 일부가 된다. 마리아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옌스를 사랑했다. 그와 함께 한 고통의 세월 때문인지 변해가는 옌스를 이해하고 언젠가 자신에게 끼칠 해를 고스란히 떠안고자 한다. 하지만 딸아이만은 지키고 싶어한다. 목소리마저 잃어가는 마리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을 위한 도움을 요청한다. 옌스와 마리아는 자신들만의 천국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만 자신을 옭아매는 부모와의 삶에서 리우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작가가 묘사하는 저장강박의 현장은 그야말로 숨이 막힌다.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곁에 두는 게 아니다. 오직 그곳에 두기 위해 물건을 모은다. 언젠가 꼭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핑계로 물건이 집의 주인이 되고 결국은 집을 집어 삼킨다. 물건을 모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물의 마음에 연민이 일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쓰레기 속으로 함께 매몰돼 가는 그 가족의 처지가 슬프다.

 

 

결국 아이를 구하는 것은 작은 관심이다. 더럽고 구질구질하다고 눈 돌려버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누군가를 지켜보는 눈길 말이다. 작가 에느 리일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 이의 삶을 묘사한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지는지 도덕성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을 가족 간 살인을 다룬 범죄소설로만 보기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폭이 넓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 부모자식간의 애증에 대한 이야기, 험난한 가정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 아이의 생존기까지 이야기의 겹이 두껍다.

 

 

숨 가쁜 사건의 연쇄로 가득 찬 범죄소설과는 다른 서스펜스를 느끼고 싶은 범죄물의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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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 - 10대의 마음을 여는 부모의 대화법
이임숙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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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숲아동청소년상담센터 이임숙 소장의 신작 10대 자녀를 둔 부모를 위한 책「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가 나왔다. 「엄마의 말 공부」「엄마가 되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등의 전작으로 익히 알려진 저자다. 부모가 된다는 일, 특히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일의 무거움을 부드러운 문장으로 잘 풀어낸 바 있다.

 


이번 책은 생각만 해도 걱정부터 앞서는 10대를 대하는 부모에게 주고 싶은 말들을 담았다. 중2병이란 명칭에서도 느껴지다시피 10대의 증상들은 ‘병’이라 지칭될 만큼 특별하다. 부모 자신들도 거쳐 왔지만 자신들의 시절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만 같고 내 자녀의 경우는 유별함이 더 심한 것같이 느껴진다. 게다가 그 까다로운 10대를 통과하고 있는 자녀가 첫 자녀이거나 외동인 경우에는 부모의 황망함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자녀가 많지 않은 요즘엔 손위 자녀를 통해 쌓이는 경험치가 없는데다 주변 아이의 사례도 귀하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중2병 증상을 보이는 자녀 앞에서 부모는 당황하기 쉽다.

 


이임숙 소장의 「아이의 방문을 열기 전에」는 초등학교 고학년 자녀를 둔 부모부터 예습 차원에서 미리 읽어두면 좋을 책이다. 내 자녀의 미래를 예측한다기 보다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전반을 훑는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믿는 마음이 아이의 사춘기를 순조롭게 넘길 수 있다는 원칙은 변함없다. 부모의 청소년기가 담긴 시대와 요즘 청소년들이 통과하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이전 세대의 경험만으로 요즘 아이의 상황을 판단하기는 힘들다. 책은 10대라는 시기만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특별한 한 때의 별난 점들과 그 이유, 달라진 아이를 대하는 방법을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보여준다.

 


4부로 구성된 책의 1부는 우선 상담센터를 찾은 여러 청소년 사례를 제시해 준다. 청소년기가 어떨 수 있는가를 마치 전시회 보여주듯 펼친다. 이렇게 다양한 경우가 있구나 싶다. 소제목만 훑어도 느껴진다.

 


 
아이가 이럴 줄 몰랐어요

중2병 증상이 심한 시진이

너무 멀리 가 버린 듯 한 아이들

엄마 아빠에게 상처받고 있는 아이들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다. 이럴 때 부모는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제가 가끔 마음이 정리가 되면 학교 안가고 있는 거 진짜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마음잡고 조금씩 공부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엄마 아빠 있는 자리에서 “공부 해 보고 싶어요” 이랬더니 “너 또 한다고 했다가 그만둘 거잖아. 전에도 학원 간다고 하다가 이틀 가고 안 갔잖아.” 그러는 거예요. 이 말 듣고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알았어. 그만두면 되잖아.” 이랬더니 “이것 봐. 네가 그렇지.” 이래요. 미친거 아니예요, 진짜?(18세 학교 밖 청소년)  pp.50-51

 

 

2부에서는 청소년기의 심리에 대해 부모가 알아야할 부분에 대해 서술한다. 청소년의 뇌는 아직 발달중이다. 어른만큼 몸이 자랐다고 해서 뇌도 똑같이 자라는 건 아니란 거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전두엽은 천천히 발달하는 반면 정서와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변연계는 발달이 빠르다. 그 결과 ‘흥분과 쾌락을 추가하고 마음과 행동을 조절하기 어려운’ 뇌 상태가 된다. 청소년은 보상과 타인의 관심에 민감하며 자기만의 특별함에 빠지기도 한다. 아이의 성격을 잘 판단해 필요한 도움(부모가 주고 샆은 도움이 아닌)을 주라고 저자는 말한다. 아이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징후가 목록으로 정리돼 있어 참고할 만하다.

 


3부는 양육자로서의 부모에서 상담자로의 부모로 변해야하는 과정을 다룬다. 초등학교때까지의 아이는 돌봄을 주로하는 양육이 필요하지만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자가 필요해진다고 한다. 저자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단계적으로 밟아갈 수도 있고 통합적으로 알아도 좋을 대화법이다. 특별한 문제 상황이 아니더라도 청소년 자녀와 바람직한 대화에 한두 가지씩 응용해 볼 만한 팁이다. 우선 대화가 가능한 때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실행할 다음 단계는 아래와 같다.

 

 

 

 

1단계 멈추기

2단계 함께 웃기

3단계 믿어 주기, 인정하기, 감사하기

4단계 아이의 긍정적 의도 알아주기

5단계 인지적 재미 키워 주기
 

 

4부에서는 상담을 통해 달라진 아이들의 사례를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5단계 대화법을 실제 상황에서 여떻게 적용할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청소년이면 이제 다 컸는데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니예요?

과연 이렇다고 효과가 있을까요? p.239

 

 

 

책을 읽으면서 부모됨의 고난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결혼했으면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는 것이 순리라는 말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일은 이런 깨달음들이 쌓여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아이를 낳았다고 자연스럽게 성숙한 부모가 되지는 않는다. 알고 선택했든 모르고 되었든 간에 자녀를 두고 부모가 되었다면 자녀를 위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일이다. ‘왜 이렇게 힘들게 자녀에게 힘을 써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르지만 달리 답이 없는 것 같다. ‘부모니까’라는 말밖에는.

 


10대라는 존재가 사고하는 구조를 종합적으로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읽은 성과다. 반면 대부분의 문제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사람으로 엄마만 지목된 것은 아쉽다. 책의 타이틀은 ‘10대를 마음을 여는 부모의 대화법’임에도 아이와의 대화는 엄마만 주로 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아빠와의 대화는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그도 아니면 아빠의 존재는 10대 자녀에게 의미가 없는 걸까. 10대 자녀앞에서는 함께 낳고 함께 키운다는 말이 무색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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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마더
에이미 몰로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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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마더」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온라인 모임을 통해 만난 엄마들이 아기를 다른 보호자에게 맡기고 잠시 외출했던 밤, 한 엄마의 아기가 사라지고 나서 정치인과 경찰, 방송, 사람들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와 아기를 찾으며 엄마들이 겪게 되는 일을 그렸다.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을 오가며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인물들 중 누가 1인칭 화자인 ‘나’인지를 찾는 재미가 있다.

 

「퍼펙트 마더」에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가 엄마가 된 여성에게 요구하는 통념과 아기를 처음 키우는 여성이 직면하는 현실이 산재되어있다.

1인칭 시점에서 ‘나’는 콜레트를 보면서 ‘완벽한 모습’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찰리로 추정되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요즘 잘나가는 작가인 찰리 말이다. 포피는 찰리의 가슴에 안겨있었다. 그는 콜레트와 손을 잡고서 이야기하며 웃어댔고, 아이스커피 한 잔을 서로 번갈아 마셨다. 콜레트의 품에는 시장에서 산 한아름의 꽃다발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완벽한 모습을 만들어낸다.(p.357)

‘나’의 시선에 들어온 콜레트의 모습이 아마도 미국 뉴욕 브루클린 사회가 아기를 낳은 여성에게 요구하고 보고 싶어 하는 엄마의 모습, ‘퍼펙트 마더’의 모습이 아닐까? 미국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나라라고 자랑하는 것과 달리 실상은 ‘핀란드, 17주 유급 휴가. 오스트레일리아, 18주. 일본, 14주. 미국, 출산휴가 없음.’(p.52)이라는 비합리적인 출산휴가 정책을 펴는 나라인 것처럼 콜레트가 마주한 현실도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만들어낸 완벽한 모습’과는 다르다.

아기에게 소홀한 자신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고, 일과 육아 모두 다 잘하려고 정말 힘들게 일했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찰리를 깨운 다음, 포피의 진료 예약일까지 석 달을 참았다가 그때부터 걱정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미 자신은 한계치까지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너무 걱정스러웠다. 말하기 시작하면 그만 엉엉 울어버려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픔과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겠지. 얼마나 감당이 안 될까. 이제껏 쌓아왔다고 믿은 게 다 빠져나가고 있다니 얼마나 아득할까.(p.408)

「퍼펙트 마더」에는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에게 보내는 조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우리 아기 엄마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엄마이면서 또 아내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죠.(p.359)

아기를 낳은 여성은 엄마, 아내이기만 한 것일까? 엄마, 아내라는 정의보다 ‘그저 사람’이라고 말하는 다음 문장이 더 설득력 있게 읽힌다.

개인적으로, 나는 맘이라는 용어를 좋아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건 너무 정치적이고 안 좋은 단어다. 우리는 맘이 아니었다. 우리는 엄마였다. 그저 사람일 뿐인데, ......(p.19)

「퍼펙트 마더」를 읽고 나서 ‘맘’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정치적이고 누구에게 왜 안 좋은 단어인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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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우즈
린다 라 플란테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수첩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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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날 한 시에 세 여자의 남편이 죽었다. 세 명의 미망인. 그것도 실패한 현금수송차량털이범의 미망인이다. 졸지에 남편없는 삶이 들이닥친 것도 모자라 남편들이 가담했던 범죄 수사까지 감당해야 한다. 나름 평탄했던 삶이 이렇게 급작스레 꼬이기도 힘들 듯하다. 설상가상으로 주동자였던 해리 돌린스가 작성한 장부를 내놓으라는 조직의 압박이 시작된다. 미망인은 아니 미망인들은 선택 앞에 선다. 장부를 공개하고 조직에게 당하느냐 혹은 장부의 또다른 계획에 따라 현금수송차량을 털어 자금을 마련해 도피하느냐. 그녀들의 선택은 무려 현금수송차량 절도.

 

이야기가 폭포수처럼 흘러간다. 남편들의 범죄가 사고로 치닫는 순간에서 시작한 소설은 등장인물의 시점을 건너 뛰어가며 쉬지 않고 결말을 향해간다. 잡으려는 자와 도망가려는 자가 닿을 듯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스쳐간다. 삶의 밑바닥에서 도망치려는 미망인들, 해리의 장부를 쫒는 조직의 아니와 장부를 손에 넣은 돌리, 쫒는 경찰 레스닉과 그림자 조차 숨긴 해리, 해리의 흔적을 쫒는 돌리와 오로지 돈을 쫒는 해리.

 

이야기의 중심에는 해리와 돌리가 있다. 얼핏 성실한 가장으로 보이는 해리는 범죄 조직의 냉혹한 보스다. 돌리는 해리를 순정적으로 사랑했다. 그의 실체가 무엇이든 둘 사이엔 남들이 알 수 없는 끈끈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현금수송차량털이에 실패하고 전소된 차량에서 해리의 손목시계만 간신히 남았을 때 돌리의 세상은 무너졌다.

 

마음속 아픔을 멈출 수만 있다면 뭐라도,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경찰은 해리의 시신이 너무 심하게 손상되었다며 보여주기 않았고, 도리는 마음 한구석에서 경찰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놈들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녀는 확신했다. p.10

 

돌리를 해리에게 이끈 것은 번쩍이는 E타입 재규어 자동차도, 잘생긴 얼굴이나 매력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점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들의 교감은 그보다 훨씬 깊은 것이었다. p.17

 

사랑하는 남편 해리가 남긴 장부에는 이루지 못한 계획이 들어있다. 돌리는 해리가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어 남편과 가까워지려 한다. 여기에 다른 미망인들이 엮여들고 제 4의 인물 벨라가 합류한다. 4명의 여성들은 각각 사건에 참여하는 이유가 다르다. 사랑 그리고 돈.

갑작스레 예비 범죄자가 된 여자들 앞에는 처절한 준비과정이 펼쳐진다. 각종 장비를 스스로 준비하고 무거운 돈 배낭을 옮기기 위해 체력도 안배해야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을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경찰과 조직의 눈을 속이면서 해내야한다. 리더 돌리의 지휘 아래 모든 준비는 착착 진행되지만 여자들 간의 믿음이 계속 흔들리는 가운데 해리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다. 해리의 준비된 배신을 알게 된 돌리는 계획을 끝까지 실행할 것인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해리라는 인물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랑도 아닌 의심스런 핏줄에 대한 집착 때문에 평생 쌓은 영국에서의 삶을 모두 버리고 스페인으로 탈출을 꿈꾸다니. 게다라 유전자 검사 한 번이면 끝날 의혹을 계속 여자에게 하는 질문으로 끌고 가다니. 1980년대 드라마를 소설화한 작품의 한계일까. 또 해리가 가진 돌리에 대한 증오의 감정도 혼란스럽다. 자신이 실패한 사건을 보란 듯이 성공시킨 여자에 대한 열등감인지, 자신이 배신한 돌리에 대한 죄책감이 엉뚱하게 폭발하는 것인지 또는 자신이 보스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풀이인지. 이 모든 감정이 해리가 돌리를 그토록 증오할 수 있는 이유가 될까. 의문이다.

 

해리는 두 손에 머리를 묻고 거실을 오락가락하며 감정의 소용돌이와 싸웠다. 자신이 실패한 일을 해낸 돌리가 증오스러웠다. 돌리에게서 모두 빼앗아 누가 보스인지 보여주고 싶었다.……하지만 자식 같은 울프를 정말로 잃었다면, 그러서는 돌리의 뒤통수를 치는 일에서 죄책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p.388

 

인생을 걸고 난생처음 범죄자가 될 결심을 한 여자들은 마음이 통하기까지 지독한 어려움을 겪는다. 서로를 향한 신뢰는 계속 엇갈리고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심은 계속된다. 의심의 대상은 주로 돌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린다. 셜리, 벨라와 달리 돌리가 현금털이범이 되어야할 이유가 납득키 어렵기 때문이다. 돌리는 계속 의심받는다. 해리와 짜고 나머지 여자들을 배신하려는 건 아닐까. 아니면 혼자서 돈을 갖고 튀려는 건 아닐까. 모두가 돌리에게 이용만 당하는 건 아닐까. 왜 아니겠는가. 눈앞의 사건으로 최소 무장강도, 잘못하면 무장강도살해범이 될 테니 말이다. 허나 여자들은 위험을 잘 헤쳐 나간다. 마지막에 터뜨리는 샴페인이 시원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아직 살아있는 해리, 돌리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해리 덕에 속편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쉴 새 없는 이야기의 소용돌이에 눈길을 맞기고 보니 저녁나절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위도우즈」는 큰 고민없이 영화 한 편 보듯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잡아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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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만 3형제 방랑기 사계절 그림책
신동근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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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동네가 화살 투성입니다. 옆집 초가지붕에, 산 중턱 정자 머리에, 할아버지 망건에, 길가는 아주머니 머리 위의 짐 보따리에. 심지어 돌산꼭대기까지. 옆 집 할아버지는 곰방대를 휘두르며 성을 냅니다.

 

저 눔 호랭이가 안 잡아가나!

 

허구헌 날 활만 쏘는 그것도 기막히게 잘 쏘는 잘만쏘니 이야깁니다. 잘만쏘니가 하루는 친구를 만나는데요. 이 친구 이름은 잘만뛰니네요. 뜀박질을 하도 잘해서 잘만뛰니랍니다. 두 친구가 산길에서 눈을 데굴데굴 천리를 보는 잘만보니를 만납니다.

두둑한 몸집에 활통을 멘 잘만쏘니, 가늘고 기다란 다리를 자랑하는 잘만뛰니, 왕방울만한 눈의 잘만보니의 모습은 각자의 장기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요. 서로서로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열두 고개 너머에 위험에 처함 새 새끼를 구하면서 서로 죽이 잘 맞은 셋은 의형제를 맺습니다. 이렇게 잘만 3형제가 탄생합니다. 책「잘만3형제 방랑기」는 이들 형제의 모험이야기입니다.

 

 

세상 구경을 나간 3형제 눈에 비친 주변의 모습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뭐 다 비슷비슷해. 가도 가도 산이고

 

비슷비슷한 세상 속에도 형제들을 위한 순간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잘만 3형제에게 드디어 모험의 기회가 옵니다. 전재산을 걸고 달리기 내기를 하는 최부잣집이 있는 마을에 도착한 거죠. 내기에 진 마을 사람들은 모두 최씨의 머슴을 살고 있습니다. 달리기 내기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3형제는 마을로 달려갑니다. 최부잣집 발이여섯 아씨와 산꼭대기 우물물 떠오기 내기를 하려는 거죠. 발이여섯 아씨를 우습게 본 잘만뛰니는 한쪽 다리를 묶고 출발선에 섭니다. 잘만뛰니는 발이여섯 아씨를 이기고 마을 사람들을 머슴살이에서 구하게 될까요?

 

 

산 너머 경기 상황을 실시간 중계하는 잘만보니와 토끼처럼 낮잠에 빠진 잘만뛰니를 깨우는 잘만쏘니 화살의 도움으로 경기는 아슬아슬하게 진행됩니다. 잡을락말락, 잡을락말락 아슬아슬. 누가 이겼을까요?

 

 

「잘만3형제 방랑기」는 입에 착 붙는 문장으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마치 할머니가 “옛날옛날에...”하면서 들려주던 전설을 듣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림책으로 읽기보다 리듬을 타며 소리내어 읽는 맛이 특별한 책입니다. 위트있는 그림체도 매력적입니다. 3형제를 특기를 살려 묘사한 모습도 그렇지만 발이여섯 아씨는 특히 눈길을 사롭잡네요. 처음 잘만 3형제가 최씨 집을 찾아갔을 때 아씨는 긴 속눈썹을 내려깔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잠시후 경주가 시작되자 기다란 눈을 치켜뜨고 송곳니를 드러낸 표독스런 얼굴로 바뀌죠. 그리고 마지막 경주 도착 지점에서 아슬아슬하게 결과가 갈리는 장면의 아씨 표정은 이 책 전체 그림 중 가장 압권이었습니다.

 

 

용감한 형제들이 폭정을 일삼는 양반을 처단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교훈을 굳이 들먹이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3형제가 서로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모습,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무엇보다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그림을 보는 맛이 있는 옛이야기다운 책이었습니다. 잘만 3형제의 방랑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이렇게 매력 가득한 캐릭터를 한 번밖에 볼 수 없는 건 좀 아까운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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