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인문학 - 천천히 걸으며 떠나는 유럽 예술 기행
문갑식 지음, 이서현 사진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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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와 단체의 피렌체, 클림트의 빈, 랭보의 샤를빌 메지에르, 고흐의 생 레미 드 프로방스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을 마주한 뒤에야, 예술이 삶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p.296

 

얼핏 보면 친숙하고 생각 보면 낯선 유럽. 유럽에 대한 정보는 많고도 많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또 책으로. 서구 사회의 문화가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다 보니 세월만큼의 문화와 역사의 흔적이 쌓여있는 장소들이 많다. 넓기도 하거니와 그 많은 사연들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여행을 계획한다면 그 장소를 거친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게다.

 

「산책자의 인문학」은 15명의 역사적 인물과 인연이 있는 유럽의 도시를 소개하는 책이다. 인문학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긴 하지만 각 도시에 대한 이야기와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가벼운 담소를 건네듯 다룬다. 이 거리를 지나 저 골목에 들어가면 왼쪽에 무엇이 있고 오른쪽에는 어떤 풍경이 펼쳐진다는 서술이 많은 것은 아니다. 도시에 대한 전체적인 소개를 간략이 하고 인물과 관련된 장소 주변을 묘사한다. 그 후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상과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알려준다.

 

각 도시 마다 역사적 맥락을 설명해주는 부분이 좋았다.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며 해설하는 서술도 좋았지만 그런 작품이 있게 된 이유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알려주어 역사의 흐름 속에 특정 작품이 갖는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레초와 페트라르카를 소개하는 8장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도 지적하다시피 국내에는 페트라르카 연구가 적다. ‘휴머니즘의 아버지’이자 ‘현대 서정시의 아버지’, ‘인문주의의 선구자’라는데 말이다. 그가 왜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를 알기 위해선 중세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중세의 사상적 시조인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시작해 중세를 쉽게 설명한다. 그후 페트라르카가 ‘근대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이유를 서술한다.

 

페트라르카는 그렇게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어젖힌 중세의 문을 닫고, 처음으로 근대의 문을 연 사람이다. 혹자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비유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고, 페트라르카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학이 기독교 세계에 해가 되지 않는 것을 입증했다.” p.177

 

인물에 대한 해설에 지면을 할애하다 보니 유럽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제목처럼 ‘인문학’을 말하는 책이다. 인문학을 말하기 위해 산책이 필요로 한 책인 것이다. 저자는 유럽 도시들이 어떻게 인문학과 관련되어 있고 문학, 역사, 철학의 어느 지점에 기여했는지를 서술한다.

 

음악과 미술을 배태한 도시로 피렌체, 빈, 잘츠부르크, 프로방스를 소개하고, 문학과 관련된 도시로는 리옹, 샤를빌 메지에르, 뤼브롱산에 대해 이야기한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낳은 지역으로 아레초와 피렌체, 체르탈도, 베네치아를 여행한 뒤 스파이와 판타지의 세계로 옥스퍼드와 베를린 등을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니아 연대가와 반지의 제왕의 도시 옥스퍼드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사진과 함께 보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 소개된 도시들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또는 이미 방문했다해도 그 도시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여행의 의미가 한층 깊어질 것이다. 위대한 인물들이 평범한 삶을 영위했던 일상의 터를 돌아보는 동안 거대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그들을 좀더 가깝게 느낄 수있었다. 그와 함께 그들의 예술을 이해하는 눈도 조금은 깊어지지 않았을까. 친숙하게 또는 낯설게 만나는 유럽 도시 이야기,「산책자의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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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왕
권재원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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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그림이 담긴 「수집왕」은 뭔가를 모으는 일에 관한 책이다. 미니멀리즘, 버리기, 심플하게 살기가 유행인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물건 모으기는 그리 환영받지 못할 행동으로 느껴진다. 그 모으는 물건이라는 것이 아이들의 눈에 소중한 것일 경우엔 더욱 그렇다.

 

몽실몽실 작은 아이들이 자기의 수집품을 소중히 안고 모였다. 이 아이들은 그럴 법한 물건부터 깜짝 놀랄 물건까지 다양한 수집 품목을 자랑한다. 그 품목들을 살펴보면 허물, 보물, 죄수수첩, 부엉이, 인형, 외계인, 일기장, 탐정, 머리카락, 훈장, 만화책 등이다.

 

 

곤충이 허물벗기를 하고 난 허물을 모을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마음에 안드는 친구들을 죄수에 빗대어 만든 죄수수첩은 어려운 친구관계를 어쩌지 못하는 아이의 불편한 마음이 귀엽게 표현되어 있다. 엄마가 어릴 적 일기장을 간직한 것을 보고 일기를 써서 모으는 아이, 자신을 부엉이에 투사하면서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아이, 친구들의 머리카락을 모으면서 우정을 간직하는 아이.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수집품에 이야기와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돈이 되니까 모으는 물건, 남에게 자랑하려고 사들이는 물건이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와 정서가 담긴 아이들의 수집품을 보니 나도 어릴 적 뭔가를 모았었던 기억이 났다. 어디선가 얻게 된 낡은 옛날 엽전, 좋아하는 사람이 나온 신문 기사 스크랩, 바닷물이 씻기면 신비한 색으로 물들건 바닷가 돌맹이들이 그것이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그걸 모은 서랍을 열어볼 때마다 물건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고 또 그 물건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상상을 펼쳤었다. 누구에게나 수집품은 이런 것일 게다. 추억을 소환하고 상상의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

 

아이들은 자기 수집품을 보듬으며 풍요로운 마음을 얻는다. 아기자기 알록달록한 물건들 사이로 난 상상의 오솔길을 걸으며 그 길 너머에 있는 더 큰 세계를 꿈꾼다. 이렇게 모은 수집품은 물건 이상이다. 모은 사람의 상상을 담은 특별한 세계가 될 것이다.

 

수집의 세계가 아이들에게만 한정된 건 아닐 테다. 상상과 추억을 담은 물건, 당신은 무엇을 수집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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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샵 여신 읽기의 즐거움 34
제성은 지음, 국민지 그림 / 개암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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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이 아이들 장래희망 1순위이던 때가 있었다. 요즘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이다.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은 꿈은 아마도 돈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지 싶다. 누군가의 주목을 받고 싶고 선망의 대상이 되고픈 아이들은 아마도 연예인의 꿈을 더 많이 꾸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여자아이들이라면 걸그룹을 가장 많이 희망할 것이다.

 

「포토샵 여신」은 아이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다. 걸그룹이 되고 싶은 지안이는 뛰난 춤실력을 갖췄음에도 외모가 고민이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연예인 몸매와는 거리가 먼 듬직한 체격이기 때문이다. 전학오기 전의 학교에서는 나름 춤실력으로 인기가 있어지만 지금의 학교에서는 외모로만 평가될 뿐이다. 지안이가 외모가 아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지안이에게 포토샵 달린 혜림이가 나타난다. 혜림이는 사진관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사진 보정기술을 익혔다. 자신의 사진은 물론이고 지안이의 사진도 몰라보게 아름답게 변신시킨다. 혜림의 꿈 역시 연예기획사에 발탁되어 걸그룹이 되는 것이다. 혜림이가 보정한 지안이의 사진이 우연히 기획사에게 선택되어 오디션의 기회가 찾아온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잡았지만 몇 일안에 외모를 바꿀 수는 없는 일. 지안이는 어떻게 오디션을 봐야할지 고민에 빠진다.

 

자신의 정체성이 담긴 얼굴을 바꿔서라도 오디션을 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잘 묘사되어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디션을 가고 싶지만 이 얼굴 이 몸으론 실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탈락할 것이라는 걸 아이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실력은 둘째고 외모가 우선 평가되는 업계를 꿈꾸는 아이들을 어찌해야 할까. 그 문을 통과해 만인의 선망을 받는 사람은 기껏 손에 꼽을 정도다. 대다수의 연예인 지망생들은 희망고문을 당하며 시간과 재능을 탕진하기 일쑤다. 외모 지상주의를 하루 아침에 바꿀 수도 없는 일이고 아이들의 희망을 이용하는 업계가 변하기를 바라기도 힘들다. 소수의 빛나는 ‘스타’를 꿈꾸는 아이들이 보통의 현실에 연착륙하게 도울 방법은 무엇일지 생각이 많아졌다.

 

지안이에겐 자신의 용기와 노력을 높이 평가해주고 좌절하지 않게 격려해주는 친구가 있었다. 청소년기 아이들에겐 이런 친구가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친구가 곁에 있을 때 아이는 힘을 얻는다. 지안이도 혜림이의 위로에 힘을 얻고 실력만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일 기회를 만들어 낸다.

 

“음…… 너는 아이돌이 되려고 춤도 열심히 연습하고, 용기를 내서 오디션도 보러 왔잖아. 내가 보기에 그냥 얼굴이 예쁘기만 한 사람들보다 네가 훨씬 멋지고 아름다운 것 같아.” pp.103-104

 

아이들 모두가 가짜 외모가 아닌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스스로 쌓은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고 도와주는 어른들이 많다면 아이들의 생각도 더 나은 방향으로 빨리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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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이순신 큰곰자리 48
김온 지음, 이수영 그림 / 책읽는곰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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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지키는 칼이나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칼이나 뭐가 다르냐?” p.62

 

나라를 지킨 이순신이 요리도 잘 한다면? 책「요리하는 이순신」이 쓰게 된 아이디어 아닐까? 따로 작가의 말이 붙어 있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처음 든 생각이다. 임진왜란이라는 난국에 이순신이 필요했다면 주인공 소년 이순신은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게 될까.

 

5학년 이순신 어린이는 진짜 이순신 장군의 후손이다. 덕수 이씨 25대손이라고 할머니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이름도 똑같이 지었다니 언감생심 이런 손자가 부엌일을 하게 둘리 만무하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이순신은 요리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아침을 못 먹고 학교에 오는 단짝 친구들을 위해 매일 간식 도시락을 준비할 정도다.

 

순신이의 요리 솜씨는 대단했다. 냉장고를 한 번 열어보는 것만으로 남은 식재료로 무슨 음식을 만들지 척척 생각해내니 말이다. 친구들의 식성과 상황을 고려한 요리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재료의 배합과 색의 조화까지 신경쓴다. 채소를 싫어하는 친구를 위한 요리, 한약을 먹고 있는 친구를 위한 요리. 같은 색깔이 섞이지 않도록 재료를 대체하는 재치. 그야말로 요리사급의 정성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할머니다. 순신이의 할머니는 귀한 손자가 요리하는 걸 무조건 반대한다. 부엌에 얼씬거리는 것만 봐도 역정을 내실 정도니 요리하고 싶은 순신에겐 이보다 큰 장애가 없다. 순신은 할머니가 아기를 낳은 고모댁에 가느라 집을 비운 사이 요리대회에 나갈 준비를 한다.

 

할머니 말고도 순신에게 닥친 역경이 또 있으니 이유없이 순신을 괴롭히는 같은 반 성룡이다. 순신은 누구와도 싸우고 싶지 않고 큰소리 나는 일이 생기는 것도 싫다. 하지만 매번 자신에게 딴지를 거는 성룡땜에 학교 생활이 괴롭다.

 

사고로 아빠를 잃었지만 구김없이 자란 순신이 대견하다. 요리를 잘했던 아빠를 따라 요리에 관심이 많고 어린 동생도 잘 보듬는다. 바쁜 엄마를 잘 돕고 이해하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순한 아이가 꿈을 막는 할머니와 괴롭히는 친구 때문에 힘들어하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도 유독 자신을 걸고넘어지는 성룡이가 원망스러웠다. 아니, 정확히 어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라면과 콩나물 봉지를 들고 서둘러 뛰어가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화도 나지 않았다. pp.76-77

 

순신이는 그 누구와도 부딪히기 싫었다. 타고난 성격 탓도 있지만, 그 사건이 있을 뒤로는 더더욱 그랬다. p.92

 

순신은 자신의 특기인 요리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한다. 심술궂던 친구의 마음을 녹이고 남자답지 못한 일을 한다며 꾸지람하던 할머니도 설득한다. 순신은 어떤 마법의 요리 기술을 발휘한 걸까? 섬세하게 재료를 고르고 재료간의 조화를 생각할 줄 아는 순신은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 그 따뜻한 마음이 어려움을 뚫고 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큰소리가 나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순신이는 유독 견디기 힘들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지금도 순신이는 아무런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맛있게 배를 두드리던 장면에서 필름이 멈추길 바랐듯, 이번에도 부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길 바랐다. pp.94-95

 

그동안 오랜 시간을 이렇게 혼자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아파 왔다. p.130

 

어쩌면 성룡이는 혼자 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무섭고 어렵기만 했던 성룡이가 어느새 순신이 마음속에 성큼 들어와 있었다. pp.112-113

 

요리대회에 나간 장면에서는 함께 긴장하고, 아빠 제사를 지내지 못할 뻔한 상황을 해결한 순신이 할머니와 통화할 때는 감동했다. 이순신 장군이 칼을 들고 나라를 지킨 것처럼 순신은 부엌칼을 들고 가족의 건강과 자신의 미래를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요리가 남자답지 못하다는 편견은 이제 유통기간이 지났다. 순신의 창의적인 요리의 맛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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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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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용 책으로 알려졌던 「걸리버 여행기」의 풀버전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한동안 읽지 않았다. ‘풍자문학’이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내 개념으로는 ‘풍자’는 곧 ‘웃긴 이야기’였다.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가 살았던 17세기 당대를 웃기게 쓴 책에 관심이 없었던 게다. 호기심이 생긴 계기는 ‘라퓨타’와 ‘야후’ 때문이다. 이 두 단어 모두 출처가 「걸리버 여행기」였다.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와 지금은 잊혀진 포털 ‘야후’의 이름이 모두 이 책에서 나왔다니. 대체 「걸리버 여행기」에는 무슨 얘기를 하는 책일까.

 

‘완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 중 검색 상위에 나오는 책을 몇 년전에 읽었다. 익숙한 거인국, 소인국을 다룬 장도 흥미로웠지만 그 뒤의 내용은 책의 진가를 깨닫게 했다.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을 이 세상에 없는 세계를 배경으로 현실보다 더 실감나게 그리고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걸리버 여행기」와 관련한 주변 내용을 찾아보며 읽다보니 번역이 눈에 걸렸다. 잘 이해안되는 대목을 원문(프로젝트 구텐베르크)과 대조하게 하던 중 내가 읽고 있는 번역이 실망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서지를 보니 초판이 1992년. 그 긴 세월동안 교정한번 안한 책이었다. 다른 믿을 만한 번역으로 다시 읽고 싶었다. 새 번역을 기다렸다.

 

9월 초 「걸리버 여행기」가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나왔다. 번역자 이름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전문 번역가 이종인. 「숨결이 바람될 때」, 「로마제국 쇠망사」, 「리비우스 로마사」등으로 번역에 대한 신뢰감이 두터운 분이다. 특히 역사에 대한 지식이 남다른 번역자로 알고 있어서 작품 해설까지 기대됐다.

 

이번 현대지성 판의 장점은 대부분 역자에게서 기인한다. 매끄러운 번역은 기본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기 위해선 작가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작품의 인물이나 장소, 사건 등이 그 시대의 특정 소재를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상상의 이야기로만 읽어도 재밌는 책이다. 작가의 섬세한 묘사 덕에 거인국, 소인국에서의 생활이나 라퓨타 섬에서의 모험 등이 생생하다. 하지만 비유의 대상을 알고 읽을 때 더 큰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역자는 각주를 충실히 달아 이런 비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덕분에 17세기 영국사를 한 번 정리하는 효과를 얻었다.

 

책 뒤에 붙은 해제와 작품해설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일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일대기와 함께 그가 출판한 작품들에 대한 해설이 들어있다. 작가에 대해 잘 알게 됨은 물론이고 그가 어떤 정치적, 종교적 성향을 가지고 저술에 임했는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해제 부분을 읽고 번역자에 대한 믿음이 커졌다. 스위프트가 비밀결혼했다고 알려진 에스터 존슨에 대한 부분 때문이다. 타 번역본에서는 에스터 존슨과 스텔라를 두 명의 인물로 다루고 있었다. 에스터 존슨은 후에 스텔라로 불렸으며 스위프트와 평생지기로 사후에도 나란히 묻힌 인물이다. 이런 오류를 담은 책이 수십 쇄를 찍었다.

 

걸리버의 여행 중 두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자들을 소환해내는 마법사의 섬 글럽덥드립과 럭낵의 스트럴드브럭 이야기다. 글럽덥드립에서 역사적 인물 수백명을 만나는 내용이 내겐 거인국, 소인국 여행보다 흥미진진했다. 눈앞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전쟁과 한니발의 행군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메로스와 담소를 나누는 호사를 누린 걸리버가 부러워지는 장면이었다. 이로써 걸리버 머릿속의 고대사와 현대사는 수정된다. 진실은 언제나 직접 대면하기 누추한 경우가 다반사인 모양이다.

 

세상의 위대한 사업과 혁명의 근원과 동기를 알게 되고, 그런 일의 성공이 한심스럽게도 우연에 불과했다는 점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느낌 인간의 지혜와 지성에 대한 실망은 얼마였던가. pp.244-245

 

죽음과 영생에 대한 스위프트의 통찰을 볼 수 있는 스트럴드브럭 이야기는 내게도 질분으로 남는다. 젊음 없는 장수가 과연 바람직할까. 겉모습은 건강할지라도 나이 들수록 경직돼가는 정신과 마음은 후손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세월만큼 현명해지는 일은 희귀한 것인데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는 탐욕은 어찌해야 할까.

 

부와 건강을 지닌 채 한창 젊을 때의 육신을 한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고령에 수반되는 일반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영생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괴로운 상태로 불사의 몸이 되고자 소망하는 자는 거의 없겠지만, 앞서 말한 두 왕국, 그러니까 발니바비와 일본에서 저는 모든 사람이 조금이라도 죽음을 뒤로 미루고 최대한 늦게 죽음과 마주하길 원하는 걸 봤습니다. p.260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탐욕은 고령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니만큼 죽지 않는 그들이 온 나라를 그들의 손아귀에 거머쥐고 국가 권력을 독점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욕심만 많았지 관리 능력은 거의 없으므로 필경에는 나라는 멸망하게 만들 것이다. p.264

 

가장 서글펐던 대목이다. 죽지 않는 인간 스트럴드브럭과 독서에 대한 부분이다. 내 독서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 지금도 이미 스트럴드브럭이 돼있는건 아닐까.

 

같은 이유로 그들은 책을 읽으면서 절대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한 문장을 읽더라도 끝부분에 도달하면 처음 읽었던 부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런 결점으로 인해 그들은 기억이 좋았더라면 누렸을 수도 있는 단 하나의 오락마저도 빼앗기고 맙니다. p.262

 

스위프트는 요즘 시국에 필요할 듯한 해법도 제시해준다.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처치같은데 이런 정밀한 기술을 가진 의사가 없는 게 아쉽다.

 

그는 당쟁이 격렬할 때 이를 중재하는 훌륭한 방법도 고안해냈다.……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반쪽 뇌 두 개가 하나릐 두개골 안에서 화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곧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어 중용은 물론 생각의 일관성까지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중용과 일관성은 자신이 세상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통치하고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머리에 꼭 생겨났으면 하는 자질이기도 하다. 정당 지도자들의 뇌 용량이나 품질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이 의사는 자신이 아는 바에 의하면 아주 사소한 차이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p.231

 

「걸리버 여행기」를 동화로만 읽기엔 아깝다. 설정은 동화에서 시작하지만 읽다보면 결코 풍자만은 아닌 맨살의 사회를 보여준다. 가상의 이야기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는 것이 오히려 안심될 정도로 인간 그리고 사회의 실상을 말한다. 17세기 영국에 대한 풍자에 현재의 우리가 변함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인간과 사회는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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