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홍대선 지음 / 푸른숲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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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이 리뷰는 해당 도서를 푸른숲 출판사로부터 증정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오롯이 나로서 살아가는 일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때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추석 연휴 바로 전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대환장파티가 벌어지기 직전이다. 하지만, 어쩌면 영향을 받지 않으면 ‘나’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존립이 불가능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 그 어떤 인간이 키워주고 돌봐주는 사람 없이 10세를 넘길 수 있겠으며, 자연이 만들고 문화가 다듬은 산물들을 입으로 주워먹지 않고 사나흘 이상을 버틸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들이 세계가 내게 주는 영향이다.


이른바 근대철학을 수놓은 많은 학자들이 염두에 둔 어떤 문제의식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영향을 받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영향을 받으면 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개별자로서의 인간 즉 개인으로서의 자아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등정을 시작했다. 그 등정은 저술이라는 형태로 이론으로서 남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이론을 만들기까지 학자들이 보여주었던 삶의 과정이라는 실천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홍대선의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약칭 개되)는 이 개인이라는 등정에서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긴 몇몇 철학자들의 생애를 다룬 책이다. 작가가 선정한 철학자는 표지에 나와있는 것처럼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다. 의심을 통해 이들은 각각 최종근거로서의 개인을 정립하고, 자기보존이라는 근본욕망으로 개인을 설명하며, 세계에 대한 도덕적 해석이라는 이상으로 개인을 규정하고, 반성을 통한 변증법적 변화로 개인을 제시하며, 의지의 발현으로 개인을 해석하며, 충만한 힘과 그 구현으로서 개인을 지향한다.


아쉽게도, 저 여섯 철학자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들여다봤을 때 알 수 있는 정보는, 저렇게 여섯 문장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내용이 전부다. 그 밖에 사이사이 삽입된, 각 철학자의 주요 개념에 대한 아주 간략한(후려쳤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법한) 설명 정도가 있다. 철학적 주장에 대한 요약이나 정리, 또는 여기에 관련된 쟁점이나 생각할거리를 얻는 목적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닐거라 생각한다. 게다가 이 책이 전면에 내세우는 ‘개인되기’라는 주제와는, 최소한 헤겔과 니체는 (이 책에 소개된 내용만 봐서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떤 측면이 분명히 있다. 변화를 강조하고 고정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주장 자체로, 이미 개인이라는 개념은 무너져내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부분을 자세히 다루진 않는다. 대체 무엇이 어울리지 않는지 생각해보고 다른 자료를 찾아보는 일은 독자의 몫이니까.


이 책의 강점은 다른 곳에 있다. 이 책에는, 개인으로서의 철학자들이 개인이 되기 위해 영향을 받는 과정을 담았다는 어떤 역설이 숨어있다. 작가 스스로가 “철학자들의 삶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만큼, 서술의 대부분은 여섯 철학자들의 전기적 사실로 채워져있다. 태어난 곳, 가정환경, 시대적 배경, 교류한 사람들, 목도한 사건들. 그 철학자들이 저술로서 남겨놓은 철학적 입장을 포함해, 어쩌면 기행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만한 여러 행보까지도 주변과 끊임없이 주고받은 영향을 통해서 해석된다. 의심하는 성향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대체로 부유한 집안 출신인(철학은 원래 부자들이 하는 것이다!) 이들이 철학의 길에 들어선 것은 부모 세대와 벌인 투쟁의 산물이고 등등.


이렇게 철학자의 견해를 철학자의 삶과 강하게 연관시키는 시도엔 명암이 있다. 한 철학자의 삶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철학자의 입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실제로도 그럴듯한 주장이다. 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삶을 무시하면 맥락맹이 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 철학자가 이론을 제시하면서 추구하고자 했던 진정한 목표, 모든 개인과 우주에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를 구성하고자 했던 철학자들의 의도와 갈등을 일으키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떤 철학자도 자신의 삶에만 국한되는 사상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약 자기 주장이 자기 삶에만 연결된 것이라면, 아주 좋게 봐줘야 자기서사에서 종결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에 천착하면 관심법으로 흐르기 쉽다.


철학자의 삶과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 두 견해의 대립은, 양쪽 다 맞는 말이기 때문에 맥락맹과 관심법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맞추거나 또는 타협을 봐야한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관심법 쪽으로 약간은 넘치게 기울어있다. 그래서 과연 이들이 오롯이 개인이었던 것인가, 흔한 말로 결국 시대의 산물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질문까지 던지게 만드는 지점도 있다. 물론 이런 특징은 작가의 스타일과 집필의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은 관심법을 택함으로써 지루함을 버리고,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한 유형의 재미를 얻었다. 얼마전 <사피엔스>에서 본 내용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뒷이야기를 하거나 들으면서 낄낄대는 것은 호모속이 갈라져 나올 때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습관이라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졸음이 밀려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목받지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이 책의 서술방식은 전략의 차원에서 해석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이 제시하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그 여섯 명의 철학자는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었는가? 배경의 영향 아래 놓여있든 혹은 독특한 생각의 과정을 거쳤든 간에, 그들은 철학의 역사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함으로써 유일무이한 개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개되>를 읽는 사람들은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될 수 있는 방법과 태도를 이 여섯 철학자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에 소개된 그 철학자들의 실천이 그들의 철학 전체 또는 일부를 잘 보여주고 있는가? 나는 이 부분이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철학자들의 삶의 사실에 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이 더할 나위없이 재미있겠지만, 그 정보들이 각각의 철학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계속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재미있게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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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의 기술 - 트럼프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 The Art of the Deal 한국어판
도널드 트럼프 지음, 이재호 옮김 / 살림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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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트럼프는 여러 모로 신기한 대상이다. 도통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존재이고, 외국인의 입장에선 막말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언사들을 반복한다. 그의 트위터 계정은 공식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으며, 정부 각료들과 말이 맞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럼에도 트럼프 덕분에 한반도에는 평화가 찾아들고 있지만, 지구 반대편 서남아시아는 트럼프 탓에 쑥대밭이 되어간다. 대체 그는 왜 그럴까? 아니, 질문을 더 좁게 바꿔서, 이런 듣도보도 못한 미국 대통령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트럼프 자신이 쓴 자서전 『거래의 기술』이 그에 대한 해답의 단초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책은 1987년경 출판되었고 그 뒤 오늘날까지 강산은 세 번이나 바뀌었기에 그의 성격도 바뀌었을지 모르겠으나, 젊었을 때 형성된 행동양식은 보통 평생에 걸쳐 재현되기 때문이다. 그의 자기자랑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그는 옛날부터, 지금 하는 것처럼 그랬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건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끌고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끝내 달성한다.”


써놓고 보니 이명박 전 대통령의 면모가 떠오르긴 하지만, 적어도 이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트럼프의 모습은 이렇게 다섯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야말로 크고 높은 것 즉 ‘빅 이벤트’를 성공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향이다. 투자한 땅은 넓어야 하고, 지을 건물은 높아야 하며, 들어가는 예산의 규모는 천문학적이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과 언론의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가 들인 천문학적인 돈보다 더 천문학적인 수입이 생긴다. 트럼프 자신은 이것을 “합리적”인 계산법이라 말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트럼프가 이런 규모를 실현시키는 방식은 끝없는 블러핑이다. 이 책에는 아직 확보되지 않은 불투명한 자금줄, 건축과 관련된 허가에 머뭇거리는 공무원, 자신이 가진 것을 트럼프에게 팔거나 또는 (이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트럼프가 내놓은 것을 사려는 결정을 망설이는 세일즈 파트너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트럼프는 이들을 상대로 자신의 패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거래를 한다. 자금줄은 이 프로젝트가 분명히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건네 확보하고, 공무원들에겐 이 프로젝트의 성패 여부는 당신들의 자리와 상관이 없을 것이고 반면 성공하면 아주 좋은 일이 될 것이라는 말로 설득하며, 거래 상대역으로 나온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낮거나 높은 가격을 일단 부르고 시작한다. 최소한 이 책에 등장한 몇몇 대형 프로젝트는 대체로 성공리에 마무리되거나 트럼프가 큰 손해를 보지는 않은 상태에서 끝나는데, 트럼프 자신은 이것을 “신용” 또는 “신뢰”의 결과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것 같다.


트럼프가 이렇게 블러핑의 방식으로 큰 사건들을 불러일으키고 그걸 처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부동산-건설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치의 상당 부분은 환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집을 지으면 곧장 붕괴할 가능성이 가장 낮기 때문에 서울의 집값이 한국에서 가장 높은 게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환상이다. 게다가 트럼프가 거래하는 대상은 모두 아직 실현되지 않은 대상들이다. 낡은 건물이 있는 땅, 리모델링이 필요한 낡은 호텔과 오피스텔.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거래하기에 블러핑은 이 영역의 유일한 영업수단이 되는 역설이 구현되는 순간이다.


(트럼프의 대척점에 있으면서 그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평론가 집단 역시 환상을 먹고 사는 족속들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트럼프의 성공기를 이렇게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은 아니다. 그의 행보에는 분명 과감한 구석이 있다. 그가 사업을 막 시작하고 첫 프로젝트를 시작할 시기인 70년대 중반, 전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세계의 중심, 그 중에서도 뉴욕 시의 위기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테다. 책에서 볼 수 있듯, 트럼프 주변의 공기는 굉장히 위축되어 있다. 19세기에 지어진 것 같이 생긴 것으로 묘사되는 건물들에선 활기를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제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점점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트럼프는 그 가운데서, 마치 뉴욕의 어느 곳에 트럼프 타워가 불쑥 솟아있는 것처럼 튀어보인다. 좋게 말하면, 혼자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다. 


지금 백악관의 수석보좌관인 이방카 트럼프가 갓난쟁이인 것으로 묘사될 정도로 오래된 책이지만, 트럼프의 사고방식 즉 사업방식은 이후로도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뉴욕을 넘어 다른 곳으로, 더 크게, 더 많이, 더 빨리. 그의 행보 자체가 합리적인 것이 아닌, 그 ‘더-더-더’를 통해 자기 수를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또는 비틀어버리는 방식 말이다. 그 능력을 이용해서 그는 세계 최고의 부동산업자로 등극했고, 급기야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까지 되었다. 자서전을 쓰던 1987년, 민주당 인사들과 격의 없는 친구관계를 맺었다며 좋아하던 트럼프 스스로는 이런 미래를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다시 지금 우리의 시대로 돌아와서 생각해본다. 트럼프의 지금 행보는, 그저 트럼프가 트럼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서있는 위치가 바뀌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며, 그의 향방에 전세계 구석구석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그는 정치인이 되었다. 빅 이벤트를 지향하며 환상을 팔기 위해 끊임없이 블러핑을 치는 그의 방식, “거래를 위해서 거래를 한다”는 그 생각이 정치의 영역에서도 올바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거래는 의외로 싱겁게 끝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 ‘실제로 원하는 것’을 한 번도 내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현재의 위치에 올라왔다. 그런 그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 또 얻어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이 정상회담을 하네마네 옥신각신하는 이 때, 트럼프의 성공기가 그것을 읽고 있는 한국의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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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원전 완역판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79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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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사람에게는 동화로 기억될 책, “완역”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번역본의 소개글에는 동화가 아니라 정치풍자소설로 소개되는 책, 그 걸리버 여행기를 읽었다. 가장 처음 드는 인상은 ‘둘 다 아니다’다. 성인의 눈으로 끝까지 다 읽었을 때 이 책이 동화로 읽힐 리는 그야말로 만무하다. 그렇다고 풍자나 해학이 있어 웃기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어처구니 없어서 헛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주제는 비판이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논문을 보는 듯한 느낌의 비평이다.

걸리버 여행기가 드러내는 비평의 원천이자 전략은 단 한가지, ‘자기의 타자화’다. 자기객관화, 거리두기, 입장바꾸기 같은 말로 번역될 수도 있겠다. 소설 내내 걸리버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 심지어 생각하는 것까지 - 모두 우리의 평범한 정치생활에 묻혀서 무감각하게 지나쳐버리는 현상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걸리버의 눈을 통해서, 또는 걸리버와 대화하는 나 스스로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릴리퍼트, 브로브닝닥, 라퓨타, 후이늠 등의 설정은 이런 타자화의 변주다. 이 변주의 몇몇 단면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1부, 흔히 소인국이라고 불리는 릴리퍼트를 가로지르는 여행기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그 공동체에서 걸리버가 대우받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곳의 주민들은 걸리버에 비해 한없이 약한 존재들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여러가지 전략을 사용하고 협력하면 걸리버를 쓰러뜨릴 수 있는 정도의 힘은 가진 존재다. 다시 말하면, 걸리버가 곳곳에서 사용하는 묘사와는 달리 릴리퍼트 공동체와 걸리버 사이의 힘의 관계는 사실상 대등하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 신체적 크기, 그리고 그 크기를 반영하는 심리적 크기 때문에 릴리퍼트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내 관심을 끄는 것, 그리고 지금 우리의 문제와 연관된 것은 소설 속에서 신체적 크기로서 은유되는 심리적 크기다. 우리가 느끼는 이방인의 심리적 크기가 딱 이만큼이다. 힘으로써는 대등하지만, 오히려 공동체 대 개인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지만, 아주 희박한데다가 제멋대로 해석된 증거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존경과 환호와 공포와 혐오로서 걸리버를 대하는 그 모습. 어느 곳에선가 많이 본 듯 하다. 이 부분은, 걸리버가 하루에 1000명 분의 밥과 물을 해치운다면서 “경제적인 짐”이 된다며 그를 쫓아내는 부분에서 정점을 찍는 것 같기도 하다.

2부로 넘어가면 이 위치가 아주 극적으로 역적된다. 거인국, 즉 브로브닝닥에서 자신보다 여섯 배나 더 큰 사람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위기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걸리버’에 대한’ 타자화의 과정은 릴리퍼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인들은 그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그래서 한동안은 기예를 부리게 만들고는 구경거리로 소비한다. 서커스에 지친 그는 이내 탈진하고, 아주 극적으로 그 나라의 왕에게 싼값으로 ‘팔린다!’ 그를 공동체의 동료로서 대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하지만 덕분에 걸리버는 자기 자신,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스케일로 사람들의 삶을 그야말로 현미경처럼 자세히 관찰하게 된 것이다. 거인들의 냄새나 피부에 대한, 다소 사소하게 보이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평범함조차도 규모가 부여하는 차이로 인해 아주 색다르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스크린이 큰 영화관에서 종종 체험하는데, 특히 영화 앤트맨 시리즈를 보면 간접적으로 걸리버가 되어볼 수도 있다.)

3부에 접어들면서 이 이야기의 분위기는 극적으로 바뀐다. 앞의 두 여행기가 생활상이나 풍경을 그림그리듯 자세하게 묘사를 하는 데 집중했다면, 라퓨타를 포함한 발나바비 여행기인 3부부터는 추상적인 말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고,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걸리버가 사는 사회와 걸리버가 기행 중인 공동체의 특징을 많이 비교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등장인물이 있고 배경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의 외피를 둘러썼을 뿐 작가가 설정한 여러 인물의 생각을 열거하는 데 집중한다.

발나바비를 거니는 부분에서 인상적인 것은 역시나 이전에 죽었던 사람들을 마법의 힘으로 소환해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장면일 수도 있겠고, 사소하게 보면 인류가 그 동안 쌓았다고 생각한 여러 미덕과 업적이 사실은 꾸며졌거나 미화됐거나 와전되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국면이기도 하다. 마법에 의해 불려오는 영혼의 주인들은 (왠지) 걸리버가 그 당시에 알고 있었던 모든 역사시대와 모든 계층을 아우른다(는 느낌을 준다). 그에 따라 걸리버 - 그리고 독자 - 가 느낄 배신감의 크기도 커질 것을 의도한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의 모양을 하고 살아가는 후이늠을 만나고 교류하면서 걸리버가 변화하는 과정은, 나로선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은 아주 온화하고 덕스러우며 인간들이 저지르는 온갖 악행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을 접해본 적이 없기에 아예 알지 못한다. 악덕의 사례들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야후에게 전가된다. 걸리버는 후이늠의 논리를 마주하면서 처음에는 설명하고, 그 다음엔 해명하며, 나중엔 방어하다가, 끝내 설득당한다. 결국에는 인간과 야후를 동일시하며 인간을 경멸하는 태도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으로 걸리버의 여행기는 끝을 맺는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이 마뜩찮았다. 과연 걸리버가 인간혐오의 상태로 빠져들어간 것은 그럴듯한(받아들일만한) 선택지였는가 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스스로 이야기한 것처럼 후이늠의 정치체제는 어떤 종류의 고대적 이상을 구현했다. 말이 색깔별로 계급이 나눠진다는 것은, 사람이 금/은/동으로 나눠진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한 군주가 절대권력을 발휘해 선한 명령을 내리면 피통치자들은 그것을 도덕적 사명으로 이해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반면 걸리버가 겪은 영국은 고대적 이상의 장점을 붙잡으면서도 그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려는 역동적인 상태였다. 물론 그 역동성은 혼란을 동반했고 그 때문에 온갖 협잡, 사기, 살인, 전쟁이 난무했지만,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쁘다고만 볼 수도 없는 국면이기도 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그 역동성의 결과로 진보한 세계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이미 EDM이 주류가 된 지금 “클래식이 짱이고 나머지는 다 쓰레기야”라고 외치는 음악평론가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막판에 이 글의 분위기가 무너진다고 느꼈다. 조나단 스위프트에게 우호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아마 걸리버가 이렇게 바뀌어가서 영국의 현실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평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조차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그 무엇에 포함되지 않을까 하고 잠깐 생각해봤다. 이리저리 여행을 다녀 견문을 넓혔다며 젠체하는 책을 써낸 걸리버조차도 결국 인식의 한계에 갇혀버리고 말았으며,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의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 그럼에도 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걸리버가 했던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타자화하며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 4부로 구성된 이 책을 일관되게 해석하기 위한 배경을, 나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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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 2,000년 유럽의 모든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식
존 허스트 지음, 김종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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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는 그 역사 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일이 그렇게 쉽고 깔끔하게 정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역사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사건과 사고와 인물로 가득한 정리되지 않은 무더기 하나와 대면하게 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디테일은 생략하더라도 뼈대만 잘 간추린 역사서는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잘 압축된 책을 만나기 쉽지 않다. 사건사고만 나열되어 있어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거나(즉 그냥 외워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나름의 서사를 구축하기 위해 몇몇 중요한 사건들을 자의적으로 날려버리는 그런 책들을 주로 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는 이런 두 가지 난점을 꽤 잘 해결하고 3천여 년에 이르는 유럽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묘사하는 데 성공한 책이다. 우선 이 책은 1부에서 드라마 요약본보다도 더 짧은 역사 브리핑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엔 현대(근대)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 몇 가지에 관련해 나름의 서사를 2부에서 제공하고, 3부에서는 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20세기)를 그 서사가 모두 흘러 모여드는 공간으로 제시한다. 앞에서 썼듯 기존의 많은 역사(입문)서가 디테일에 빠져 이야기가 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루함만 제공해주었다면, 이 책은 구성으로 통해서 나름의 긴박감도 제공하면서 우리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틀도 제공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이 보여주는 두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게르만적 특성에 관한 설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서양(유럽) 문명의 정신적인 두 기둥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꼽는다. 반면 이 책의 저자는 여기에 “게르만적 특성”이라는 요소를 하나 추가한다. 아마도 저자는 현대 유럽을 이해할 때 앞의 두 가지 요소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어떤 특성을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싸움을 좋아한다”는 말로 아주 단순하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 특성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근대 유럽 국가들의 세계 정복 사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포함해 이 요소도 포함시켜야 더 잘 설명이 된다. 또 봉건제라는 서유럽 중세 1000년의 독특한 정치경제체제도 게르만적 특성이라는 것을 배제하고서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런 태도는 1부의 역사 브리핑 부분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둘째, ‘견제와 균형’의 강조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2부의 각 장은 표면적으로 그리스-로마의 정치사, 교회와 군주의 관계, 권력층과 서민의 다툼을 다루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이 모든 테마를 가로지르는 주제어는 견제와 균형이다. 소수의 권력층 장군과 다수 병사들 사이의 파워게임, 교황과 황제 사이에 벌어지는 끊임없는 기싸움, 각각 이익집단이 되어 충돌하는 부자와 서민. 저자가 직접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갈등의 소산이 바로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라고 저자가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내가 이해한 이야기 구조가 맞다면, 이 책의 3부에서 다루는 1,2차 세계대전은 이런 견제와 균형이 어그러지고 무너지면서 세계가 파괴적으로 타락하는 사건이 된다.


이 두 요소는, 유럽사를 전부 다룬다고 보기엔 매우 짧은 것처럼 느껴지는 300페이지 남짓한 이 책을 돋보이게 만든다. 이렇게 저자는 자기 나름의 “세계사의 구조”를 보여주며, 중요한 사건들은 명시를 하든 암시를 하든 애를 써서 선보이려고 노력한다. 이 책을 통해서, 세밀한 부분을 찾아 한 단계 더 나아가기에는 매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문장이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한글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약간 안타까웠다. 읽기에 막대한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문장이 원래 영어로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며 더 나은 표현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잡념이 자주 들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했을 때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교정/교열/편집의 과정에서 문장에 조금 더 공을 들였다면, 그야말로 빼어난 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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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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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으로 말해, 사르트르의 구토는 소설이 아니다. 만약 죽은 사르트르가 내게 다가와 “이것은 소설이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최소한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다”라고 응수할 것이다. 만약 사르트르가 “나만의 기법이기에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서 재미를 못 느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해할 수 있도록 쓰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작가의 의무이지 않나?”라고 반문할 것이다(물론 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려운 것은 어렵게 쓰는 것이 맞다).


하지만 소설을 벗어나서 이것을 철학책으로 본다면, 또는 차라리 철학적 형상화를 포함한 어떤 문학적 결과물로 본다면, 나는 구토를 꽤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더군다나 이 책 속에서 로캉탱이 밟아가는 과정의 기반이 되는 철학적 주장 즉 현상학에 관해서 후설이 직접 쓴 책을 기억 속에 떠올려본다면, “그래, 그래도 사르트르가 100배는 쉽네…”라는 쓸데없는 생각에 잠긴다. 이 정도 했으면, 잘 한거다.


로캉탱 스스로가 밝히듯, 그가 “구역질”을 느끼는 이유는 존재에 관한 근본물음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존재”에 얽힌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가? 사물들과 그 의미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가 존재한다고 쉽게 믿는 것들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또는 우리가 머리에 떠올리는 그 양상 그대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양상들을 너무나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과 결합시키며 - 기차의 검은색과 멍의 검은색이 왜 똑같이 검은색인지, 그것을 세계의 진짜 구조이자 진리라고 믿는가? 이 모든 질문은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함축하며, 내 지속을 의탁해왔던 모든 것들로부터의 독립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런 결별과 독립은 아무것도-없음을 동반한다. 익숙한 것들, 지속을 의탁해왔던 것들이야말로 익숙한 방식으로서의 내 존재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폭력을 제거하자 규정이 없어지고 지식이 증발하며 경계가 허물어진다. 비유하자면, 내가 세계 속에서 온전히 서있을 수 있던 지반이 흐물흐물한 상태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 서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배멀미를 한다. 이것이 로캉탱 스스로가 밝힌, 그리고 후설의 현상학이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언급한 상태에 들어간 사람이 느끼는 지적인 어지러움 - 구토감이다. 그렇게 세계가 “흘러내린다.”


구토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름아닌 익숙해지는 것이다 - 마치 뱃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존재한다고 간주했던 것, 익숙하기에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로부터 탈출한 뒤에, 이 세계가 원래 그런 모습으로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존재방식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따지고보면 이것 말고 다른 어떤 해법이 있을까 싶지만,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어떤 나약함은 위험한 문제를 자꾸만 회피하고 싶어한다. 게다가 존재양식이 달라졌다고 해서 마치 해탈한 사람마냥 밥도 물도 끊고 초연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의 살덩이이기 때문에 - 존재양식의 침범에 저항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런 양식의 정점에 언어가 있다. 모든 폭력의 시작이자 끝이고, 세계를 포섭하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담긴 어떤 장치. 그래서 익숙함의 포기는 언어의 포기이며, 언어의 포기는 사고의 포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 차원에서의 언어 구사란 평범한 자의 정신세계로는 이해하기 힘든 어떤 것이 아닐까? 구토라는 소설 자체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는 것이 이미 전제된 어떤 지적 태도를 언어로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니 말이다 - 그렇다. 그래서 이 책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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