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책,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2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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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고전 중의 고전이다. 하지만 직접 읽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서술도 평이하고, 역사적 사례도 많아 이해하기 쉽고, 이른바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에서 많이 볼법한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논증 같은 것도 없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이게 과연 철학 고전인지 역사 고전인지 혹은 고전도 아니고 단순한 이야기 모음집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런 부분이, 고전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과 전문 연구자들 모두의 흥미를 돋우는 군주론만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군주론에는 묘한 지점이 있다. 먼저 말해둘 것은 “역량(virtu)” 개념에 대한 논의다. 군주론을 다루는 많은 책에서도 언급하는 내용이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고대 전통에서는 이 역량 개념에 도덕철학/윤리학적 접근법을 채택해서 “착함”, “선”, “옳음”과 virtu를 결부시켜 이것을 “(도덕적)덕”으로 해석하지만, 마키아벨리에게서는 딱히 그런 면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는 것.


하지만 고대 윤리학의 논의에 익숙하다면 이 말이 오히려 현대적 관점에서 고대 도덕철학을 바라보다가 생기는 착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전통에서도 virtu 즉 덕은 옳음이나 선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키케로에게서도, 덕이란 탁월함, 즉 인간적인(도덕의)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사용하는 실천적 지혜라는 개념 역시도 이 고대적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묘하다. 마치 “탁월함”과 “현명함”으로 정의된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끝까지 밀어붙인 느낌이라고 할까? 고대의 철학자들은 현명하고 탁월한 사람들은 당연히 착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 반면에, 마키아벨리는 탁월하고 현명한 사람은 대개 착하지만 반드시 착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다르게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나 키케로는 무언가를 “잘” 한다는 것과 “옳게” 한다는 것을 둘 다 성취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잘” 하는 것에 “옳게”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포함시켰다. 그 귀결은 “잘” 한다는 평가의 상당 부분을 평판 즉 사회 속에서 기존에 확립된 기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이론에는 “잘”과 “옳은” 사이의 갈등이 존재하고, 이 긴장관계는 객관적 기준을 옹호하는 사람들 또는 무차별적 상대주의자들에게 끊임없이 공격받는 지점이 되었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잘” 하면 그것이 “옳은” 것이 된다는 입장을 편다. 이 문장 자체가 추상적이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윤리학적 관점에서는 합목적적 활동과 결과주의에 대한 옹호가 될 것이고,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는 투쟁에서 승리해 이념지형 자체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선언이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 될 것 같다.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말하듯, 이런 입장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나아가서 외교의 영역)에선 허용된다. 논리는 간단하다.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삶만 책임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평온한 개인의 삶과 다르게, 언제나 긴장과 사건의 연속이며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정이 가져올 영향이 심대하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개인으로 현명했던 사람이 군주로서 비참했던 사례가 있고, 군주로서 현명한 사람은 때로 개인의 영역에서 허용되지 않는 일을 저질러 좋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렇게 군주론 속에서 정치와 도덕은 분리되고, 정치 영역에서의 현명함은 개인의 현명함과는 다르게 규정된다.


최근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놓았다는 이 번역본을 읽으면서 또 다르게 다가온 부분은, 역자가 근거를 두고 의도적으로 강조한 느낌을 주는 “민중적” 관점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다수와 연대를 구축하기”를 들고 있다. 단순히 다수의 견해를 대표하는 확성기가 될 것인지, 또는 자신의 뜻에 맞게 다수를 단련시켜 자신의 편으로 만들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정치적으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분명 후자의 과업을 해낼 것이다. 설령 공동체의 의사 결정기구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그저 다수인’ 민중이라고 하더라도, “소수지만 힘있는” 귀족들보다 그들의 지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일관된 관점이라고 번역자는 주장한다. 이미 다른 번역본으로 두어 번 읽었던 책이지만 이런 점은 상대적으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또 다른 방식의 독해를 배운 것은 이번 읽기의 개인적 수확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도 역시나 생각해볼 부분이라고 제기하는 것처럼) 이 책을 통치자 즉 정치적인 중요 인물이면서 실제로는 “유일한 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을 사람에게 바친 이유는 무엇일까?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피상적인 주장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마키아벨리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으며, 동아시아에도 있었고 서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도 있었을 것이다. 핵심적 문제는 그저 다수인 민중을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주체로서 보았는지 여부가 될 것이다. 여기에 확실하게 “네”라고 대답할 수 없다면, 그가 가진 역사적 의미는 많이 퇴색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니오”라고 확실하게 대답할만한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니, 이런 미묘한 어감을 읽어내는 것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의 영역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측면, 즉 정치와 도덕의 분리라는 개념과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을 인정하는 듯한 관점은, 최근의 내 고민과 맞닿아있다. 질문을 단순하게 바꾸면 이렇게 된다. “정치와 도덕이 정말 분리되는가?” 또는 “현명하게 나쁜 사람은 정치를 해도 되는가?”, 그리고 “대체로 소수파 정체성을 지닌 내게 정치적 주체로서 연대할만한 시민이 있는가?” 또는 “그러면 나는 얼마나 현명해야 하는가?” 지난 세월 우리 사회의 진보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도덕적 결함으로 숱하게 공격당했고, 그 중 몇몇은 정치적 생명을 잃었고 또 그 중 몇몇은 글자 그대로 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공격을 반박할 자신이 없었거나 때로는 편승했다. 각종 소수자 혐오의 목소리가 거대한 확성기를 달고 우리 사회를 덮쳐오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따뜻한 언어로 그 망측한 음파와 마주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바로 어떤 성취를 위해 앞에 놓인 불변의 여건들(necessita)이며, 이것을 현명함(prudenza)과 함께 헤쳐나가는 것이야 말로 군주가 가진(가져야 할) 역량이라고 했다. 즉, 오롯이 내게 주어진 과제다.


덧댐. 정확한 번역인지 판단할만한 능력은 내게 없다. 하지만 읽기 쉽고 친절한 번역본인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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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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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음을 고백한다.


처음으로 고통을 준 부분은, (이 작가의 글의 성향인지 이 책 속 이야기에서 의도된 설정인지 모를) 끊임없이 나오는 과장된 표현이다. 자기가 느낀 감정은 특별하고, 자신만이 가진 감정이고, 나 이외에 어떤 사람도 여기에 접근할 수 없으며,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고 그걸 잘 서술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 내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태도가 글 전체를 지배한다. 이런 태도를 지닌 사람을 가리켜서 보통 “중2증후군에 걸렸다”라고 하지 않나? 문제는 주인공이자 1인칭 시점의 “나”는 이미 꽤 오랜 시간 동안 직장생활까지 한 성인이라는 점이다.


없는 게 차라리 나았을, 중간중간 양념처럼 언급된 어설픈 철학 얘기가 (내 입장에선) 그 “중2증후군”의 성격을 덧씌우는데 꽤 큰 공헌을 한다. 누군가에겐 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와 잘 맞아들어가는 것처럼 보일테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좋겠다. 이 부분은 그야말로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철학자들이 말한 이런저런 경구나 너무 간략해서 실제로는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게끔 편집된 철학적 입장에 대한 설명을 배치한 글을 “겉멋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래서, 설령 그렇게 과장된 감정을 그 정도로 표현해야 할만큼 격렬하게 느꼈고 그것을 올곧게 표현했다고 간주하더라도, 그러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운명처럼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믿음은 몇 살까지 유효할까? 래퍼 우원재가 조우찬에게 “산타는 없단다”고 디스한 것처럼, 내가 주인공에게 가서 “운명은 없단다”고 말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오히려, 그것을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만이 그 시간을 의미있게 보냈다고 자신을 위로할 유일한 수단이기에, 사랑이 끝난 뒤에 실체가 없는 말로 그 풍경을 덮어씌워버릴 뿐이라고. 그리고 이 말이 작가와 주인공에게 하는 말일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었기에 외면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그 대책없는 낭만이 부러울 따름이다. 너무나도 많은 장면이 단편적으로 묘사된 책의 구성 탓에, 그 단편들 중에 비슷한 일을 겪지 않은 연인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장면은 그토록 낭만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 때 정말 있었을지도 모를 낭만이 내 기억에만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낭만이 사라진 사진엔 죄책감과 후회만 남는다. 그렇게 말하지 말걸, 그렇게 행동하지 말걸, 그러지 않았어야 했는데. 세상 많은 이별 가사처럼,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라는 물음표만 워터마크처럼 찍혀 기억 속을 떠돌아다닌다. 이 또한, 멀쩡한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는 책 전체를 관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분위기의 정점은 헤어지고 난 뒤 주인공의 생각의 흐름이다. 상대는 바람을 피웠고 그 때문에 헤어졌음에도 그의 생각 속에서 비난의 화살은 자신을 향해있다. 위험하지만 관심법을 펼쳐보자면, 이것은 진심으로 상대를 비난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ㅈ같은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는 태도를 통해 자신의 도덕적 고결함을 증명하려 하고 여기에 도취된, 대체 어떤 성장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이렇게 되는지 궁금할 정도로 이상하게 뒤틀려있는 정신의 산물이다.


진심의 자책이 아니라 자아도취라는 점은, 너무나도 쉽고 허무하게 폭로된다. 바로 앞 문단에서 ‘떠나간 그는 예뻤고 그는 잘못한 게 없고 나는 그가 그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어쩌고’를 읊어대던 주인공은 어디서 예쁜 여자가 나타나니 ‘역시 운명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신은 내 편이야 어쩌고’하며 우디르급 태세 전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선,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 운명같은 사랑을 철석같이 믿는 자칭 낭만파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물론 나는 평생에 공감할 수 없는 느낌이겠지만.


책을 읽은 뒤엔, 혼란만 남았다. 사랑을 대하는 관점이 너무도 다르고, 나는 아직 이런 (내 입장에선 표면적일 뿐인) 풍성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내 감정이 빈곤하다고 해두는 게,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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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치킨전 -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따비 음식학 1
정은정 지음 / 따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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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단어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뛰고 손이 절로 가는 아름다운 그 이름,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며 떠올리기 힘들어지는 그 단어. 정은정 농축산인의 『대한민국 치킨전』은 치킨이란 단어와 엮여있는 연관관계를 산산이 조각내버리는 책이다.


난 이 책을 읽기 전에 XSFM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 출연분을 먼저 들었다. 그리고 그 분량이 정말 이 책을 사고 싶게 만든다. 조금은 아쉽게도, 방송에 자신의 경험담 몇 가지를 더 추가한 것 이외에, 방송과 책 사이에 별 차이는 없다. 심지어 방송에서 그렇게 재미있게 말했던 에피소드 대부분은 책에 수록되었다. 만담과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라면 책을 읽기보단 팟캐스트를 듣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팟캐스트를 들은 뒤에 이 책을 읽으니 독특한 효과가 생겼다. 거의 오디오북을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책을 읽는 속도 자체는 약간 느려지지만, 그만큼 상상하는 맛이 있어 책읽기가 지루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약간은 덜 정제된 상태의, 술술 읽히는 구어체로 쓰인 책이다. 물론 말하는 것을 거의 그대로 옮긴 양식이니 만큼 비문이 제법 있지만, 이것은 일장일단이 있는 스타일의 문제라서 굳이 문제삼을만한 부분은 아니다.


내용으로 들어가면, 『대한민국 치킨전』은 치킨백서라고 할 만큼 치킨에 관한 모든 것을 써놓은 책이다. 후라이드 치킨의 수입의 역사, 종류와 그에 따른 제작법, 주요한 배달음식이 된 이유, 치킨 자체를 둘러싼 산업구조, 완제품 치킨을 넘어서서 치킨을 만드는 원료의 산업과 그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까지. 이 책 속에는 어디선가 지나친 풍경, 마주했던 사람들, 내가 지불한 돈이 담겨있다. 가히, 책 속에서 튀김기름의 내음이 난다고 할 만하다.


그럼에도 치킨에 관해 즐거운 이야기만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현재, 미래 모두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서술에 가깝다. 즉, 실체 없이 지배하는 이른바 “자본”이 우리 삶을 어느 정도까지 잠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소재로서의 치킨에 가깝다. 닭은 하림이, 기름은 해표가, 밀가루는 제일제당이, 가게의 인테리어와 주방은 BBQ가, 배달은 배달의민족이 지배하는 시대다. 물론 이들의 규모와 성격을 자세히 따지자면 각자의 특징이 있겠으나, 우리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것들이 우리 삶의 가장 밑바닥마저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성격을 지닌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넓은 의미에서의 우리 생활세계의 “수직계열화”다. 


“수직계열화”의 문제는 우리 삶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그렇게 닭을 많이 먹게 되니, 행복하십니까?’ 우리는 정말 닭을 싸게 먹게 된 것일까? 꼭 그렇지도 않다. 업계의 주요 브랜드의 치킨값은 2만원대를 오르내린다. 이렇게 비싸진만큼 치킨집 사장들은 행복해졌을까? 치킨값이 올라서 닭을 덜 먹게 되었으니, 그만큼 덜 죽어도 되는 중병아리들은 행복할까? 그렇다고 치킨값이 싸지면, 우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주 오래 전에 진중권이 썼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수직계열화는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해를 사회화한다.” 늘어나는 행복은 누군가에게 이전되고, 줄어드는 행복은 어딘가로 전가된다. 


책에선 마무리 부분에만 살짝 언급되지만, 글쓴이 정은정 농축산인은 <그것은 알기 싫다>의 마지막 회에서 거듭 강조했다. 치킨의 수직계열화는 다가와서는 안되지만 이미 지나간 우리의 미래라고. 수직계열화에 성공한 산업 분야는 치킨 뿐만이 아니다. 동시에, 아직 수직계열화되지 않은 다른 수많은 품목이 그 대열에 들어서길 기다리고 있다. 특히 먹거리 산업의 변화는 단순히 가격과 품질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생명을 저당잡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책의 재미와 별개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재미있는 책이다. 농축산인의 말에 따르면, 다음 타깃은 삼겹살이다.


이 책의 이런 의미와는 별개로, 책 후반부로 갈수록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일이 많아진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물론 배치되는 맥락과 표현방식이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책이 짧은데다 한 번에 후루룩 읽을 수 있는 탓에 했던 이야기를 또 언급하면 금방 떠오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책의 큰 그림은 4장인 「치킨 약전」에 챕터 제목 그대로 집약되어 있다. 다른 디테일 없이 치킨에 관한 뼈대만 추리고 싶다면 이 장만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치킨전을 읽으며 치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글의 앞머리에 쓴 것처럼, 이제 치킨은 더 이상 행복의 동의어가 아니게 되었다. 그렇다고 먹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은 다음날 나는 핫크리스피를 먹으러 KFC에 갔고, 그 뒤엔 친구들과 월드컵 예선 멕시코전을 보면서 버켓을 뜯었다. 하지만 아마도, 치킨에 대해 걱정하는 내 마음과 크리스피의 튀김옷을 향해 손을 뻗는 내 손의 불일치를 평생 고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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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피엔스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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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열풍이 불었던 책을 이제야 읽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넓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잘 읽힐만한 좋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좋다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은 뒤에야 이 책을 읽게 되어서, 약간은 싱겁고 실망한 부분도 있다.)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연대기다. 이 말을 강조해둘 필요가 있는데, 인간의 역사 이상의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기록과 함께 시작된다. 기록에는 문자가 동원된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가 발명되기 전, 기록되지 않았지만 인간이 살았던 것은 분명한 시대를 선사시대/신화의 시대라고 부르곤 한다. 그러나 사피엔스의 연대기는 신화로도 기록되지 않은, 정말로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시작한다. 인간, 그러니까 호모 ‘속’이 다른 종들로부터 분리되었던 그 시기 말이다. 연대로 따진다면 대충 백만 년 단위다. 호모 속은 자연계에서 결코 강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호모 속이 여러 종으로 분화해 에렉투스, 하빌리스, 네안데르탈, 사피엔스가 된 뒤 한참 동안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호모 속이, 그 중에서도 물리적으로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사피엔스 종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추기까지, 다섯 번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렇다. 상상력의 생물학적 토대를 갖춘 인지혁명, 공동체의 관점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농업혁명,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을 가능케 한 원칙으로 작동한 제국(주의)체제, 사물의 표준을 확립함으로써 교환의 생활 생태계를 만든 화폐(와 상업 혁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꿔놓은 과학 혁명.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른 모든 사건들이 그렇지만, 하라리의 관점에서 이 사건들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인류가, 아니 호모 사피엔스 종의 개별 구성원들이 이 역사의 과정을 뒤집어 과거의 생활방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상상력이라는 능력을 얻게 된 이상, 모든 인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개인의 관점에서는 노동량은 늘어나고 소득은 줄어들고 생활의 반경은 줄어들었지만, 농사를 지은 뒤에 수렵채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 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제국 체제의 성립 이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제국 체제의 수장이 되고 싶어했지 체제를 해체하는 아나키적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진 않았다. 화폐의 이점은 단순한 물물교환체제의 장점을 압도했다. 그 어떤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장벽도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사피엔스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또는 뒤돌아볼 수도 없이) 지금의 위치까지 달려왔다.


이 다섯 번의 혁명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역사 이전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진행된 과정이었다. 나머지 세 가지는 이른바 “고전”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또는 문화인류학/고고학 연구를 통해서 해독할 수 있는 문자기록을 살펴보며 읽어낼 수 있는 과정이다. 내 눈에 더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었던 부분은 앞의 두 가지 혁명, 선사시대 이야기였다. 최근 몇 십년 동안 이 시기에 대한 연구성과는 말그대로 “풍부하게” 쌓였다. 이전의 인류학자들이 범했던 인종주의적 편견도 어느 정도 극복된 상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시기에 사피엔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 수 없기 때문에(말 그대로 자료가 없으므로!) 상상이 더 많이 개입할 수도 있다. 압도적으로 많이 인용된 각주 속에서, 독자는 놀라운 연구성과와 그에 경합하는 상상력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추측컨대, 상당수의 한국어 독자에게 이 책의 초반부 이야기는 기존에 알던 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농업혁명으로 인간은 더욱 불행한 상태에 빠졌다는 것, 수렵채집 생활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고되지 않았다는 것, 그 시기에도 이미 인간은 꽤 대규모의 사회를 구성할 만큼 충분히 인지적으로 발달해 있었다는 것, 그 덕분에 만년 전에도 인간은 그 때부터 생태계의 파괴자였다는 것. 그간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바뀐 “고대 사피엔스의 상”을 압축적으로 전해준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사피엔스의 삶이 우리의 삶의 모습과 결코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는 서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전반부는 매우 훌륭하다.


이 책의 후반부의 강점은 전반부의 풍부함과는 사뭇 다르다. 주석이 양이 대폭 줄어들고, 대신 하라리가 나름대로 정리한 인류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쉴틈없이 펼쳐진다. 인용표시가 없는 이유는 개별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정확하게(선사시대에 대한 서술처럼 “과학적으로”) 하려면 끝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기존에 알고 있던 엄청난 사건이든,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그가 보기에 아주 의미가 있는 사건이든, 그의 서술 앞에서는 대체로 공평하게 똑같은 정도로 “후려쳐진” 상태로 책 속에서 펼쳐진다.


이런 축약은 “사피엔스의 역사”를 서사적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저자의 목적에 잘 물려들어간다. 그 생물학적 토대는 이미 선사 시대에 모두 갖추었지만, 어쨌든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세 가지 혁명, 즉 제국(주의)체제와 화폐(와 상업) 혁명 그리고 과학혁명에 대한 그의 설명이 그렇다. 이 세 가지는 처음에는 각자의 이유와 목적을 갖고 시작되었지만, 과학혁명의 발생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피엔스의 종적 변화라는 한 차원 더 높은 목적을 위해 기능을 수행한다.


광범위한 단일통치체제만을 의미했던 제국 체제는 정복 사업을 통해 과학적 지식의 확장에 이바지한다. 과학적 지식의 확장은 기술 수준의 향상을 불러오고, 재화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려 자본을 증식시킨다. 자본 증식에 의한 상업의 발전은 다시 제국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하라리가 지적하기에, 이런 상호 피드백이 바로 전근대적이고 고립된 제국체제와 근대적 제국의 차이다. 역사 속에서, 특히 근대 이후 일어났던 모든 커다란 사건은 이 근대적 피드백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피드백을 설명함으로써, 예전에는 개별적인 것처럼 보였던 각 사건의 독특한 의미가 드러난다.


이렇게 흩어진 구슬을 하나의 서사에 꿰어놓은 하라리의 필력에 감탄하는 동안에도, 그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독자의 몫이다.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의 후반부에 언급되는 여러 사건과 그 함축에 관한 논의가 그렇게 몹시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상업이 인류 사회에 주는 충격, 제국의 의미와 그 합법성, 과학혁명의 실제 진행과정. 이 모두는 지금 이 시대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이 고민하고 있는 커다란 주제들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후려쳐진 하라리의 설명의 일부 또는 전체에 반대할 것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중에 특히 제국주의에 다소간 유보적인 그의 시선이 못내 아쉽고 불편했다. 우선 단일통치체제와 탄력적 국경 그리고 다문화주의 조합으로 구성된다는 제국 체제에 대한 다소 느슨한 규정은(내가 아는 한 이것이 “제국” 개념에 대한 최근의 트렌드다), 제국 체제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을 제공해주기도 하면서 동시에 또 다른 유형의 제국 체제에 대해서는 눈이 어두워진다. 이 통찰과 맹점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그 “또 다른 제국체제”인) 일제의 피해자의 후손이라는 우리의 위치 때문이다. 하라리와 비슷한 수준의 거시적 관점에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아마 서유럽과 영국/미국의 유형과 큰 차이를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인의 경험이 우리와 같을 수 없고 그래서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 간디와 김구의 차이가 벌어지듯, 영국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완전히 같다고도 볼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부분은 현재 연구자들이 열심히 파고 있으니, 나같은 한량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것 같긴 하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서 단번에 떠오르는 게임이 있을 것이다. 농업, 명상, 종교, 화폐, 신학, 관료제, 시장경제, 자연과학, 차차 테크트리를 밟아서 미래 기술까지. 바로 시드마이어의 문명이다. 물론 그 게임이 다루는 시대는 이 책이 다루는 시대에 비해 훨씬 좁긴 하다. 기원전 4천년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 책이 주는 역사에 대한 희열과 몰입감만큼은, 세계 3대 폐인게임 중 하나라고 불리는 그 게임에 못지 않다는 말만은 남겨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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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처럼 이 글은 주로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건축물이라는 대상에서 파생되는 여러 미학적 단상들을 모아놓은 글이다. 그래서 건축물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삶도 다루고,난해한 미술작품도 다루고, 몇몇 학자와 비평가의 이름도 나온다. 말하자면, 건축을 소재로 삼아서 꾸려놓은 미학 선물세트인 셈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물이 가치에 관해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연습하면 충분히 사물들의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보통에게 사물이 말을 한다는 문장은 수사적 의미를 뛰어넘는다. 사물은 자신의 물성(물적 특성)을 통해서 진짜로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 매끈하게 잘 빠지고 군더더기가 없는 대상은 절제와 검소를, 반대로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대상은 아름다움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의미란 결국 인간의 활동의 결과물이다. 그 활동을 우리는 흔히 접근 또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대상의 물성이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물성에 의해서 고정되어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해석에 대해서 열려있다. 해석의 차원에서 절제와 검소는 투박과 무미건조와 유의어(또는 동의어)다. 그 모든 전달사항은 동일한 물성 속에 갇혀있으며, 인간의 이해와 조우하는 현상을 통해 해방되길 기다린다. 물성의 잠재성과 해석의 능동성이 만나는 그 순간 우리는 대상에서 가치, 특히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이것이 “사물이 말한다”는 주장에 대한 보통의 설명이다.


사실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말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문장인 “사물이 말한다”는 소리는, 현대미학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특정한 전통이 “해석으로서의 존재”라는 구호를 내세워 채택하고 있는 기본 입장이다(라고 나는 이해했는데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해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 더 나아가서는 어떤 사물의 존재 여부와 그 양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 어떤 이해도 임의(무작위)적이지 않으려면, 거의 시에 다다른 사실인 “사물이 말한다”는 견해를 채택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처한다. 말하는 사물들이 나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해석(이해)을 자신과 세계 모두의 존재양식이 되는 인간의 근본 조건. 대충 요약하면,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견해가 이렇다.


그렇기에 보통의 견해는 그렇게 낯설은 주장은 아니다. 보통의 장점은 그 견해를 이야기해주는 과정에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에 하이데거의 책을 읽고 자신있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금 처지가 낫긴 하지만, 가다머는 또 어떤가? “말하는 사물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서 예술적 활동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한 두 사람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책을 읽으면 “으읭?”과 아무말 대잔치의 연속이라는 느낌 뿐이다. 반면 보통은 인간의 삶과 건축과 예술에 대해 쓰기 위해 성실히 수집한 자료를 천천히 내보이며, 어떤 사물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게 그는 사물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가 되며, 동시에 미학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가 된다. 생활에 짓눌린 우리가 놓치는 비현실적 부분을 알려주는, 작두 탄 무당인 셈이다.


물론 해석이라는 활동이 놓인 근본적인 주관성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보통이 우리에게 건네는 대화도 보통의 개인적 생각 이상으로 나아가기엔 걸리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 내 성향 때문에 이렇게 삐딱하게 이 책을 바라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야기꾼으로서, 해석 상에서 흥미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러로서 보통의 재능은 높게 살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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