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는 한국문학의 무진은 두 개다. 김승옥의 무진, 그리고 <도가니>와 <해리>의 배경인 공지영의 무진이다. 두 소설에서 모두, 안개는 사람들의 눈을 가려버린다. 시각은 사람이 가장 많이 의존하는 감각이며 그래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때문에 무진의 끈적한 안개는 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든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노력은, 깊지만 더러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이 될 수 밖에 없다. <해리>는 그 미끌거리는 안개 속에서 정신없이 몰락하는 사람들의 아귀다툼에 관한 이야기로 내게 다가왔다.


<해리>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욕망에 충실하다 못해 그걸 너무 빤한 방식으로 전시한다. 피해자로 등장하는 또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등장하는 몇몇 또한 욕망의 문제에 너무 강하게 얽혀있어서, 그들의 피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단지 관찰자 시점이기에 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서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누군가 내 삶을 3인칭의 시점으로 관찰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 싫은 나의 행동들 또한 욕망의 결과물로 바라볼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들은 욕망 앞에선 선과 악이 없다는 하나마나한 말을 인생의 정답이랍시고 내밀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욕망을 편취하는 의도와 방식은 여전히 문제삼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선과 악의 스펙트럼 위에 어떤 개인을 올려놓을 수 있다. 이것은 욕망 자체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제목과 달리 이 소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짜 대상은 주인공인 해리가 아니라 <해리>를 둘러싼 남자들이다.


그들은 해리가 “꼬셨고” 자기들은 그 “남자라면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갔”으며 그래서 해리를 “나쁜 년”이라고 평가한다. 그 모습이 해리의 일부분인 것도 분명한 탓에, 그리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는 이 소설의 서사 구조 때문에, <해리>의 대부분은 해리에 대한 비난으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구성은 트릭이다. 가만히 뜯어보면, 이 소설 속 남자들은 해리와 육체적 관계를 맺을 거라는 근거없는 망상에 ‘자발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 관계에 동반되는 모종의 시술을 단 한 번만 받고 손을 뗀 사람도 이 소설엔 없다. 즉, 그들은 욕망을 달성하려는 의도와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언제나 적극적이었고, 그렇기에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해리더러 나쁜 년이라는 말만 반복한다. 내 관점에선, 이것이 “해리성 인격 장애”의 좋은 사례인 것만 같다.


더군다나 해리는 혼자인 반면 남자는 다수다. 다수는 구조를 형성한다. <해리>에서 해리성 인격 장애는 몇몇 개인의 특성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징후가 된다. 정치적 진보와 보수, 나이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이 모두 사회의 산물이라면, 사회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징후를 나눠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할당된 징후는 다수의 실천 속에서 권력이 되고, 사회의 바깥을 “모럴”의 이름으로 응징한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은 누구인가, 과연 “모럴”이 아닌 하느님의 공의에 따른 합당한 처분을 받은 자가 이 이야기 안에 있었던가? 해리의 행적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 쪽은 구조적 피해와 그에 대한 복수라는 수동적-반응적 동기로 인한 행위였다면, 다른 한 쪽은 그 구조를 체화하고 그 권력을 능동적으로 휘두른 행위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눈은 안개에 가려져있고, 권력은 우리를 짓누른다. 어떻게 단순히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서유경 센터장은 “지루함”이라는, 흥미로운 키워드를 제시한다. 선은 창조하고, 악은 반복한다. 그래서 선은 신선하고, 악은 지루하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권력은 기존의 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기에 필연적으로 반복을 명령한다. 우리는 여기에 저항할 수 있다. 이나처럼, 내면의 트라우마를 덜 복기하는 방식으로, 계산하는 머리가 아닌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든 몸의 반응으로, 성욕의 충족이 아닌 사랑의 충만이 존재하는 관계로.


이나는 그렇게 한 발짝 선의 세계로 다가가고, 해는 우리의 눈을 가려왔던 안개를 걷어 새 것과 헌 것을 나눌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아마, <해리>를 읽는 우리도 때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책의 결말을 혁명적인 변화가 없는 질척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만 해석할 수는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 이 책이 정말 재미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면, 재미없고 흥미없는 심드렁한 문장이 단 한 개도 없었다. 한 줄 한 줄마다, 그리고 그 문장들 사이의 행간마다 정보와 문제의식과 생각할 거리가 가득 담긴 책이었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공동체가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적어도 근대 사회에 들어와서 공동체는 특정한 이념에 대한 복속을 통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단일한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낀다고 발언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공동체는 그래서 “이념”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위대한 독일을 만들고자 했던 나치당에도 이념이 필요했다. 이 책의 초반부에 설명된 것처럼, 나치즘의 기반이 되는 이념은 “게르만” 제일주의다. 하지만 그것은 그냥 탄생하지 않았다. 히틀러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악의적 편집을 감행했다. 그렇게 국가사회주의의 이념지도가 “칵테일”로서 제공되었다. 맥락도 상황도 고려하지 않은 짜깁기다. 하지만 그 짜깁기에 동원된 몇몇 멘트들을 남긴 철학자들 또한, 맥락도 상황도 고려하지 않은 채 아무런 의식 없이 그런 구절들을 활자로 새겨놓았다는 점에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진 않다.


그렇기에, 조금만 지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치즘이 표방하는 것들은 아주 우호적으로 이해해봐야 아무말 대잔치 수준이다. 그래서 나치는 그것을 처음부터 정교하게 다듬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학문의 제도를 먼저 장악하려고 한다. 어차피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그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지적인 마비상태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조성되었지만 단지 보이지 않았을 뿐인 단초들 - 결국 반유대주의 - 위에서, 나치는 정부를 점령했고 나치의 이념은 학문제도를 장악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이 아무말 대잔치의 확산에 참여하거나 동조하거나 침묵한다. 이렇게 아무말 왕국이 탄생하고, 사람들은 권력을 획득한 아무말 앞에서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당했다. 아무말이 아무말이 아닌 것처럼 포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여하거나, 아니면 아무말 왕국으로부터 탈출하거나.


책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두 대가, 칼 슈미트와 마르틴 하이데거는 포장전문가의 길을 선택했다. 정치(적 행위)의 근본을 구성하는 요소는 적대라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을 가장 간략하게 요약한 문장이 될텐데, 적대라는 단어 앞에는 “유대인에 대한(그리고 즉 소수자에 대한)”이라는 말이 교묘하게 생략되었다. 하이데거는 나치의 유사-낭만적, 반계몽주의적, 반근대적 작태를 탈근대와 고양된 신비주의로 탈바꿈하는 철학적 시를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그것은 합리적 논증이 아니었고, 근거가 있는 주장도 아니었으며, 어딘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이미지들만 난무하는 언어기호예술일 뿐이었다. 나머지 덜 유명한 학자들은,


“눈 뜨고 보기 힘들만큼 참혹한 인간의 고통이 늘어가는 동안(...) 명예를 놓고 다퉜고 반유대주의의 정확한 개념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p.141)


반면 탈출을 시도한 유대계 철학자들은, 나치즘이 주구장창 선전하던 “유럽(이라 쓰고 게르만이라 읽는)”이 실제로 지니고 있던 내밀한 문화적 유산과 건전한 지적 전통을 지키려 애썼다. 그들이 그 통찰을 간직하기 위해 동원한 능력은 다양했다. 아도르노의 예민한 문화적 감수성, 벤야민의 (하이데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비주의적 세계관, 아렌트가 시도한 유대계(라고 쓰고 소수자라고 읽는)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해명, 백장미단의 후버가 구상했던 진정한 독일의 추구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히틀러의 아무말로부터 도망가거나, 저항하거나, 아무말이 “적대”하는 것들을 보호하고자 애썼다. 즉, 


“망명한 유대인들은 순수한 유럽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p.257)


하지만 이들의 운명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 반유대주의는 단지 히틀러와 나치즘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전 유럽의 문화적 코드에 깊게 스며든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나치 바깥의 반유대주의에 포획되어 나치에게 압송되기 직전 자살했다. 아렌트는 영국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2차대전이 끝나고도 몇 년이나 더 지나서야 미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아도르노는 미국으로 망명해서도 자기 집 앞에서 반유대주의자들의 시위가 벌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 동안 나치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치밀하게 외면했다.


나치 시대의 지성사적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다는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지만, 나는 이 점 못지 않게 히틀러의 반대자들이 처한 운명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나치라는 딱지를 붙이고 여기에 모든 나쁜 특성들을 몰아넣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악덕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좋은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치즘은 영국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매우 편한 핑계가 되었다. 미국은 자국 내 나치당원들의 활동을 방관했다. 유대인들은 나치를 벗어났다고 해도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예민함이 극에 달한 철학자와 지식인들은, 유럽과 미국 사회에 공기처럼 깔려있는 반유대주의의 냄새를 그 누구보다도 먼저 맡아야만 했으며, 그래서 고통스러워했다. 우리는 어쩌면, 그 공기를 들이마시며 우리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기처럼(또는 유령처럼) 떠도는 차별은, 당연히 전후 복구처리의 불공정한 결과로 나타났다. 몇몇 상징적인 나치 수뇌부 소속 인물들을 제외하면 나치에 협력했던 철학자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가 원직에 복귀했다. 칼 슈미트는 정치학에서, 하이데거는 철학에서, 아직까지도 절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이 그 중요도가 포장전문가 두 사람에 비해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솔직하게 말해 그 위상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예술에서도 언제나 문제가 되는 질문,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의 작품을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 책에서 더욱 더 첨예하게 제기된다. 윤리와 예술작품은 다루는 대상이 다를 수도 있지만, 철학은 윤리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즉, 조금의 논리적 비약을 섞자면,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철학을 한 마디로 줄였을 때 “나치가 되어라”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 포장해본들, 메시지의 본질을 지워버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나치가 되어라”라고 말하는 철학자들을 가르쳐야 하는가? (그렇다면, 대체 왜 그 명민하다는 아렌트는, 그리고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그 두 사람을 그렇게 상찬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는가?) 나의 위치는, 누군가가 하이데거를 읽는다고 하면 “그런 놈의 잡소리는 읽을 필요가 없어요”라고 적극적으로 말리지만, 나 스스로는 밥벌이를 위해 포장전문가들의 저술을 읽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자리다. (심지어 집에 몇 권 있다)


안타깝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겐 우리나라의 몇몇 철학자들 또한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어용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던 철학자들의 존재는 저기 멀고 먼 유럽나라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이승만에게는 안호상이라는 철학자가, 박정희에게는 박종홍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리고 “국민윤리”라는 무시무시한 초중고 교과과목을 만들어낸, 부끄러운 윤리/정치/사회철학 연구자들이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이제 거의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국민윤리라는 과목 또한 도덕, 윤리를 거쳐 생활윤리나 윤리와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약간) 탈바꿈했다. 하지만 마치 공기처럼 떠돌아 다니는 어떤 것이 나치의 제도화를 통해 소수자들을 질식시키는 독가스로 바뀐 것처럼, 우리의 주변에도 그런 공기가 떠돌아다니지 않으리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슬림은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그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다.

"눈 뜨고 보기 힘들만큼 참혹한 인간의 고통이 늘어가는 동안, 20세기의 철학자들은 명예를 놓고 다퉜고 반유대주의의 정확한 개념을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p.141)

"망명한 유대인들은 순수한 유럽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p.2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태에 대한 옹호 서양 철학의 논문들 6
주디스 자비스 톰슨 지음, 김혜연.신우승 옮김 / 전기가오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임신중절(이 글에선 낙태라는 표현을 썼지만 내 글에선 이 단어를 쓰려고 한다)을 둘러싼 논쟁엔 너무 많은 결이 겹쳐있다. 형이상학, 윤리학, 사회학, 정치학의 층위가 각자의 자리를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마구 침범하며 뒤얽혀있다. 그래서 이 주제로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거나, 상관없는 문제를 마치 카운터블로우인 것 마냥 너절스레 늘어놓고는 내가 이겼다고 외치는 정신승리가 벌어진다. 이런 논쟁의 장에서 주디스 자비스 톰슨의 『낙태에 대한 옹호』는 윤리학적인 결만 잘 발라내려 노력했다는 점만으로도 고전의 반열에 올라갈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여러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옹호자의 논리로 두 개의 직관과 하나의 논리를 제공한다. 우선 그의 직관은 소유라는 개념에 호소한다. 즉, 한 인격이 가장 정당하고 우선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무언가를 꼽으라면 그것은 신체에 대한 소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직관은 권리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완성된다. 권리란 권리주체가 개진하는 어떤 주장이 도덕적/정치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보증수표와 같은 기능을 하는 상징물이다. 신체에 대한 소유는 정당한 권리주장의 대상이다.


여기에 기초한 하나의 논리는 권리주장과 다른 종류의 도덕적 주장의 분리에 관한 생각이다. 즉, “b는 a에게 x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문장과 “a는 b에게 x를 해야 한다”는 문장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만큼 권리는 단순한 도덕적 개념 이상의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톰슨의 생각이고,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배타적 경계설정이라는 발상인 것 같다. 만약 이 둘이 나눠지지 않는다면, 엄마가 아들에게만 준 초콜릿 10개에 대한 “권리”가 누나에게도 있으며 그 몫을 누나가 동생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황당한 주장에 이르게 된다. 초콜릿 10개는 증여를 통해서 그 소유주장이 아들에게 옮겨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이 둘의 혼동은 논문에서도 언급되었듯 착한 사마리아 인이라는 윤리학적으로 까다로운 문제 또한 발생시킨다.


그 외에도 이 논문에서 건드리고 지나가는 윤리학적 주제는 많다. 작위와 부작위의 문제(직접 죽이는 것과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의 도덕적 차이), 도덕적 주장의 보편성 문제(“나는 싫다”는 문장과 “모두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문장의 차이, 내 결정과 다른 사람의 결정이 차이가 있을 때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분석적 틀의 제공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 책임 소재의 분유에 대한 사고관(“-수 있었다”는 반사실적 가정을 행위의 인과관계에 개입하는지 여부) 등등이 모두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포함될만한 문제들이다.


이렇게 많은 문제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입해본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결론을 톰슨과 공유하는 만큼 그가 제시한 거의 모든 각론에서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기대고 있는 두 개의 직관, 즉 소유라는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확정되고 그것이 권리가 되는지는, 적어도 철학적 의미에서는, 난 아직 모르겠다. 아주 강력한 직관이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어 보이고 그 이유 때문에 그도 더 이상의 설명을 부연하지 않지만, 나는 오히려 “소유”나 “권리”라는 단어를 도덕적 논증에 도입하는 것을 선결문제의 오류를 저지르는 일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권리주장을 다른 종류의 도덕적 주장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논리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만하다. 이 두 종류의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을 것 같다. “a는 b에게 x를 해야한다”는 문장이 a에게 도덕적으로 요구하는 행위와 “b는 a에게 x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문장이 a에게 도덕적으로 요구하는 행위는 같다. 그리고 이 두 문장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행위의 차이 밖에 없다. 왜냐면 이 둘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수행되지 않는” 권리를 우리가 생각할 수 없고, 이른바 “권리”라는 단어가 요구하는 것도 행위인데, 그것은 x로서 “해야 한다” 형식의 문장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문장의 의미를 다르게 이해할 수 없고, 같은 것으로 봐야할지 모른다.


톰슨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내 주장을 일부 도입했을 때, 예상되는 결과는 당연히 파국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생명권 같은 것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이것조차도 톰슨의 논지와 반대다!). 권리를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에서 끊임없이 임신중절은 나쁜 것이라는 요구가 들어오고, 그것은 임신중절은 해선 안된다는 명령과 같다. 이 명령은 (우리가 지금 사는 이 세계 속에서) 권리가 갖는 기능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아마 임신중절을 고민하는 여성은 무거운 도덕적 책임이라는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릴 것이다. 이 명령은 사회적으로 작동하기에, 그를 정당하게(그리고 기술적으로 안전한 방법으로) 도와줄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난관을 뚫어내고 모종의 방법으로 중절에 성공하든, 스트레스로 유산을 하든, 아니면 중절에 실패해서 세상에 불행을 하나 더 만들어내든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은 “도덕성”이라는 명목 아래 임신중절을 고민했던 여성에게 가해질 것이다.(물론 나 개인이 이런 상황을 바라고 있으며, 내 논리를 따라가면 반드시 이런 상황 또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이 논문을 읽으면서 톰슨이 당연히 고민했을 지점, 그리고 내가 이 논문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임신중절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내린 잠정적 결론은, 임신중절은 어쩌면 윤리적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문제인 것, 그리고 정말로 고쳐야 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온갖 종류의 도덕적 직관이나 논리들(톰슨이 이 논문에서 반박하고자 애쓰는 그 헛된 말들)이 임신중절을 고민하는 여성 개인만 어떻게 해서든 “도덕적 압박감”에 시달리도록 만드는 현실이다. 논문 마무리 부분의 톰슨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임신중절이라는 단 한 경우에만, 그것도 여성에게만 “착한 사마리아인”을 넘어서 “훌륭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강요하고 그 도덕적 고민을 아무런 고민 없이 통째로 떠넘긴다. 도덕적 지형 자체가 불평등, 불공정, 부당하게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이것이 교정되지 않으면, 톰슨의 이 빛나는 성과도, 임신중절을 윤리적으로 옹호하려는 수많은 진보적이고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철학자들이 올린(그리고 앞으로 올릴) 성과도, 정제되지 않은 편견 앞에선 언제든지 무너져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혐오 현상에 관한 책을 하나 읽었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라는 책이었다.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는 이슬람/무슬림 관련 소문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 밝히는 책이었는데, 여기에서 다루는 그 소문들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들이었다. 예전에 문제가 되었던 수쿠크 법이라든가, 할랄식품 단지나 이슬람 계통의 대학교 설립에 관한 것들, 나아가 “기독교의 본산” 유럽이 무슬림으로 뒤덮히고 있으니 “세계 기독교의 성지” 한국은 무슬림의 유입을 철저히 통제해야 한다나 뭐라나.


문제는 이런 (대부분의) 허위 사실이 이슬람과 관련된 논의를 하는 한국의 어떤 곳에 가든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포교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가 전혀 아닌 비종교인들이나 일부의 무신론자들 조차도 이성적인 척, 합리적인 척 하면서 비슷한 논리를 들이댄다.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가 사례집이라면,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는 왜 혐오라는 현상이 나타나는지, 이런 감정을 잦아들게 만들려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는 가시성(즉 가지성)을 만들어내고 감정을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행위를 허용함으로써 특정한 집단에 대한 차별을 만들어내는 제도적 장치를 혐오 현상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 제도적 장치가 유지되는 원동력은 세 가지다. “우리”와 “너네”를 상상 속에서 구별하는 기준으로서의 동질성, 정상적 상태라는 기원과 그곳으로 회귀하는 복고의 서사를 구축하는 본연성, 정상적 상태에서 한 발도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하며 이탈을 병리학적 상태로 규정하는 순수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동원하는 사례는, 하나같이 슬픈 이야기들이다. 난민이라는 이유로 군중 속에서 공포에 떨어야 하는 무고한 아이들, 저항하지 않았는데도 경찰에게 목이 졸려 숨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별 동기화를 위해서 법적인 장애판정을 받아내야만 하는 성소수자들, 위협이 두려워 자신의 지향을 쉬이 드러낼 수 없는 신실한 종교인들, 폭력적 정화운동의 물결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


그 반대에는 난민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이미지를 멋대로 결부시키고 그것을 현실이라 믿는 극우주의자들, 피부색과 폭력-공포를 연관짓는 인종주의적 문화를 체현한 경찰들, 세속주의라는 명분 아래 특정한 종교만 배척하려는 정치세력,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순수함”에 대한 갈망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무장조직과 이를 빌미로 우리도 “순수해져야 한다”는 운동을 이끄는 엘리트들이 있다.


이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대로 아예 세상을 재조립하고자 한다. 그 이념적 지향이 드러나는 실천들은, 최소한 방조함으로써 “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고, 그것을 다수의 행동으로 조직함으로써 제도로 만든다. 이렇게 세워진 공동체는 내부적으로는 평등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차별을 양산한다. 즉 그들은 동일성을 평등과 의도적으로 혼동함으로써 혐오라는 현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고리를 끊기 위해, 엠케는 가장 첫 단계인 “해도 된다”는 신호를 차단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혐오의 실천의 첫 단계에서 저항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뒤에 펼쳐질 문화적 상승 이후의 혐오를 막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 이런 활동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책의 말미에 푸코의 파르헤지아 개념을 설명하면서 정점에 이른다. 파르헤지아는 한글로 풀어쓰면 “권력에 대항해서 진실을 말하는 행동” 정도가 되는 개념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지의 차원에서 범주화해 현실을 억압하는 이념적 권력의 방향성을 전복시켜, 실제로 대상이 어떠하다는 “진실”을 말함으로써 권력적 이념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 파르헤지아의 핵심이다.


혐오 현상의 원인에 대한 분석 만큼이나 추상적인 제안이라는 것을 저자 스스로도 인식한 탓인지, 박물관의 교육 프로그램이나 교과서 수정 등의 정책을 사례로 든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대안이라고 하는 것이, 줄여 말하면 혐오를 “해도 된다”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혐오가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그 강도와 혐오 현상에 대한 글쓴이의 설득력있는 분석에 비해 그 대책이 허공에 붕 뜬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읽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읽을 땐 느낌이 조금 달랐다. 엠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유럽에 연관된 사례들만 계속 이야기하지만, 내 머리에는 <왜 우리는 이슬람을 혐오하는가>에서 보았던 여러 이야기가 스쳐지나갔다. 문제는 그 헛소문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에 문화를 만들어나갔고,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정적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비슷한 방식으로 표방하는 정치세력에게 표를 준다는 사실이다. 이 책이 그 사건을 겨냥하진 않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엠케의 설명과 비슷한 사건을 숱하게 겪었다. 특히 클라우스니츠와 너무도 판박이 같은 일이 얼마전 제주도에서 벌어졌다! 지금의 혐오는 마치 예전에는 없었던 것인 양,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양 구는 것까지 어쩜 그렇게 엠케의 설명과 똑같을 수 있는지.


그래서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인식을 바꾸는 활동이란 추상적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나의 인식도, 다른 사람의 인식도 바꿔야 한다.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내가 처한 환경에 맞게 변용할 필요도 있다. 때로는 “단순하게” 따라하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그 시도의 의의를 바래게 할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냥, 내 작은 실천에 담긴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영화유튜버 “거의없다”의 채널을 참 좋아한다. 그가 한 번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영상에 인용한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 세 가지가 뭔지 알아? 시나리오, 시나리오, 시나리오.” 영화를 떠받드는 모든 요소들은 결국 그 영화가 전개하는 이야기를 받쳐주기 위한 도구라는 뜻이었고, 따라서 시나리오가 받쳐주지 않으면 영화에 무슨 짓을 해도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현대 영화 작법에 고색창연한 생각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시나리오-플롯, 즉 사건의 연쇄의 합리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구한 경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지나치리만치 강조된다. 아무리 옛날 이야기라도 하더라도, 그가 비평하는 대상이 지금으로 치면 뮤지컬과 비슷하다고 할만한 서사비극이니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에 그가 보여주는 관점을 적용하는 게 딱히 무리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비극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 요소는 플롯, 성격, 사상, 조사, 장경, 노래다(6장). 성격은 인물과 캐릭터를 뜻하고, 조사는 대본이며, 사상은 대본에서 등장하는 몇몇 발언들이 보편적 주제에 대해 갖는 태도, 장경은 무대장치나 특수효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연구주제인 사상과 기술의 영역에 해당하는 장경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에 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설명의 목적은 “좋은” 비극을 판별하는 기준을 설정하는 작업이다.


그가 플롯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이야기하는 만큼, 이 책의 상당부분은 왜 플롯이 중요한지 그리고 “좋은” 플롯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할애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시나리오의 기준과 그의 “좋은” 플롯 사이의 공통점은 발견하기 쉽지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플롯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영화는, 특히 비평의 관점에서 좋은 영화는, 사건의 연쇄가 “앞의 사건이 반드시 뒤의 사건의 원인이 되도록” 전개되어 “중간의 어느 한 사건(장면?)을 무작위로 뺐을 때 전체가 말이 안되게끔” 짜여있어야 한다는 것(7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플롯을 제외한 다른 요소들이 그저 부차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극이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콘텐츠가 플롯이라면, 그 콘텐츠를 잘 전달하기 위해선 반드시 나머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물과 성격도 일관성 있게 설정해야하고, 조사에 들어갈 단어 하나하나도 세심하게 고르고 캐릭터와 비극의 성격에 걸맞는 운율로 잘 써야한다(20장 이후). “극적” 쾌감과 독립적으로 다뤄질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진 않지만(14장), 사상과 장경 역시 가벼이 볼 수만은 없다. 이 원칙들을 잘 지키면, “좋은” 비극이 탄생한다.


물론 이런 관점은 너무나도 옛스런 시각이고, 21세기가 된지도 한참 지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고루한 시각을 전복시킨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봤던 훌륭한/처참한 예술작품들이 머리에 많이 스쳐지나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영화평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이디푸스 비극의 훌륭함을 논하는 부분(11장)에서 적잖이 <올드보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100분 토론>에서 울려진 전국민적 유행어였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15장)는 미학자 진중권 교수가 심형래의 <디-워>에 플롯이 없다는 점을 비판하려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 결과물이었다. 여기에선 각자가 마음 속에 품은 영화가 있을 것만 같다.


예전에 읽었을 때완 다르게 눈길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힙합음악을 좋아하는데, 그렇다면 20장에서 22장에 이르기까지 문법과 운율과 단어선택을 다루는 부분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랩 퍼포먼스의 효과를 더 극대화하기 위해 문법적 연구를 어떤 정도까지 진행해야 하는지(그리고 진행할 수 있는지), 화자의 성격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부분에 유의해야 하는지 등등에 관한 논의가 계속 이어졌다. 고대 희랍어는 읽는 방법이 이미 사라져버린 죽은 언어이지만, 어디에선가(힙플? 힙갤? 힙합LE? DC Tribe? 요즘엔 이런 이야기 어디에서 하는지 모르겠다...) 비슷하게 전개된 지루한 논의를 지켜본 것 같은 데자뷰를 느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의 논적들을 이 책에서 계속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아마 이 책 자체가 현실의 파피루스 배틀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꽤 몰입했다.


아마도 고전의 가치란, 이런 기시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2500년 전의 논의를 읽으면서도 그제 내가 봤던 영화, 10년 전에 내가 즐겼던 문화가 떠오르는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중에 이 세계가 끝날 때까지 버려지지 않을 책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난 이 책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비극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예술작품에 분석적으로 접근해서 합리적으로 평론하는 작업의 원형을 꽤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원형이기에, 그것의 창조적 파괴가 우리의 의무로 남겨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