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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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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훈으로서의 역사

  전통적으로 인간의 역사의 가장 큰 기능은 교훈성이었다. 설화나 신화의 전승은 '이렇게 해야한다.'거나 혹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직관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취하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 벌어졌던 일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단순하게는 이들의 집적이 곧 역사가 된다. 현대의 역사가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엄밀한 사실로서의 역사'란, 구전설화 시절부터 태동한 위와 같은 경향에 비해 그 탄생이 한참 뒤쳐진다. 어찌 보면 오히려 이 교훈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한 - 그러니까, 이를테면 너희를 가르치려고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을 들려줄테니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식의 - 방법론적 엄밀함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역사적 사건이 교훈적이라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교훈은 언제나 누구에게/어떤 교훈을 주어야 하는지(또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지)가 문제로 떠오르고, 이 부분은 항상 문제적 영역이다. 완벽하게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위의 두 가지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사건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편집되며, 재생산된다. 때로는 서로 다른 편집본이 전혀 다른 대상과 가치를 지향하는 경우도 있으며, 흔히 이런 현상은 역사전쟁이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이 역사전쟁의 전선은 세계의 무수한 곳곳에 형성되어있다. 특히 '식민주의'라 불리는 이념적 경향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에서는, 21세기인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가운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문제는, 역시나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20세기의 첫 절반동안 일본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주변 각국에게 심대한 악영향을 분명하게 끼쳤다. 이 제국주의는 일본 민족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고, 그러므로 20세기를 지배한 '민족=국가'라는 등식과 맞물려 행정적(물질적)으로 증식되었다. 이에 맞선 민족들은, 경제이념과 관계없이 저 등식을 (다소나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엿고, 이는 (한국을 포함한) 피억압 민족을 각 민족공동체별로 통합하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재일조선인 - 위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언어의 감옥에서』의 글쓴이 서경식 교수는 자신의 위치를 이방인(디아스포라)이라고 규정하고, 이 위치에서의 경험을 증언하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어주는 현실적 조건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이다. 그가 생각하는 재일조선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자신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적 경향을 지닌 집단의 중요한 통일성의 도구(기제), 즉 언어가 자신의 사고와 행위의 기반을 지배하고 있는데서 생기는 이질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그가 2~3세에 해당하고, 그의 집안에서 민족교육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는 현상인데,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공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인 '식민주의와 언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어찌보면 논의라기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여러 사례를 들어 학술적 언어로 표현한 에세이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둘째, 재일+조선인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자신에게 공존하는 가운데, 각 개별 정체성을 대표하는 집단(일본과 한국(또는 북조선)이라는 민족국가)에게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승인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공존하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할 단일함을 끊임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글쓴이의 주장을 요약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지는, 아직도 뚜렷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거칠게 정리한 수준이다). 위의 언어보다도 더, 본질적으로 글쓴이가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책 내부에서 따로 장을 내어 심화시킨 측면이 없지 않기에 첫째 이유를 따로 떼어놓았지만, 글쓴이의 정신세계 전체를 지배하는(그래서 이 책의 실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관된 흐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첫째는 어쩌면 이러한 상황의 부수적 효과일런지도. 

  글쓴이 스스로가 지적하는 '한국의 독자들이 자신을 찾는 이유'인,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맥락이 중요해지는 것(또한 그 스스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지점도 바로 여기이다. 역사의 교훈은 대개 집단서사와 결부되어있으며, 집단서사의 현대적 버전은 다름아닌 민족서사이다. 특정한 공동체, 즉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역사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준다. 다름아닌, 학문의 이름으로 집단서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한국사(한국 민족의 역사), 일본사(일본 민족의 역사) 같은 것들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모든 집단(굳이 민족이 아닌, 다른 정체성으로 뭉친 곳도 마찬가지다.)에 있어 고유의 집단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보편적 현상으로 보면 그럭저럭 넘어갈만하다. 그러나 민족사의 경우, 어떤 교훈을 집단의 구성원에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국가 제도의 물리적 행정과 더불어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는다. 이는 민족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대체로 동일한 경우, 반드시 발생한다. 전쟁의 책임은 이제 끝난 것이며, 새로운 세대는 '희망찬 역사관'을 바탕으로 일본민족을 중흥해야 한다는 식의 일본우익들의 주장은 이같은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패전국으로서 자신을 위치시킴과 동시에 그런 패배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라고 교시하는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다. 

  자유주의자 문제 

  재일조선인인 글쓴이는 이에 대해 당연히 비판적이다.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더욱 무게를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싸구려 정치공학으로 민족을 팔아먹는 이들이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주된 주제이며, 동시에 그가 더욱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일본과 한국 내에서 이런 싸구려들을 비판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리버럴, 리버럴리스트)들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번역한 박유하 교수나,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조한혜정 교수와의 교류로 유명한 (역시나 일본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우에노 치즈코 교수 등이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단순히 서경식 교수의 입장만이 실린 이 책만으로는, 사실 그와 그의 비판의 대상(그리고 그들이 글쓴이를 향해 내놓은 반비판)들 사이에 오고간 논의가 무엇인지 종잡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인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생소한 '전쟁책임론의 이론철학적 기초'에 대한 더 넓은 논의의 맥락도 알아야하기 때문에,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주장의 진짜 의도와 의미가 무엇인지는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이 자유주의자들이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해보인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를 민족이 아닌 가부장적 국가제도의 문제, 즉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시도라든지, 양국 모두가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아야한다는 식의 논설, 인류사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일본의 전쟁은 잘못된 일이므로 윤리적 책임은 져야하지만 '한국'에 '일본'이 사죄해야 한다는 것은 민족주의적 시각에 매몰된 입장이므로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쩌면 민족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서경식 교수의 비판 -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결합, 그 사이에서 

  이들에 대한 글쓴이의 비판은, 전혀 다른 두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을 '편협한' 보편주의라고 비판하는 방향이다. 자유주의자들의 탈민족주의는 일본민족이라는 개념을 없애보림으로써 명백하게 존재했던 '일본' 민족의 전쟁책임을 없었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민족 대신 대체물을 통해 전쟁 중에 발생한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서경식 교수의 입장에 따르면) 어떤 대체물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론의 평가는 현실에 얼마나 정합적인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때, '민족=국가'인 20세기 초반의 현실에서 민족주의 이념 이상으로 설명의 힘을 가지는 이론(혹은 민족의 대체물)이 있을 수 있는가? 글쓴이의 답은, 민족주의가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다른 어떤 보편이론(예를 들면, 페미니즘)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위상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참여하고 설명해내려는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민족주의를 고려해야만 한다. 따라서,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는 반드시 민족이라는 것을 자신의 품에 안아야만 한다. 

  또 다른 한 방향은, 특수주의적 비판이다. 여기서의 특수란 다름아닌 서경식 교수 스스로를 뜻한다. 그가 경험하고 있는 특수함은, 정확하게 민족(국가)라는 존재를 통해, 그 경계에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책의 다른 여러 글에서 보이는 그의 개인적인 여러 경험은, 민족이 단순히 탈민족주의라는 사상적, 이론적 조류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극복될 수 없는 물리적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민족 사이의 이방인이라는 그의 존재 자체가 민족의 실체와 힘을 증명하는 가장 강한 증거라는 것이다. 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도 역시 자기들과 동일한 자유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고, 따라서 탈민족주의적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민족이라는 유령은 그의 곁을, 그리고 우리의 곁을 여전히 맴돌고 있다. 

  체험과 증언의 가치 

  이 책은, 그래서 어떤 이론적 전망이나 체계를 제시하지 않는다. 에세이의 모음이라는 책의 구성 자체의 특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글쓴이의 특수한 정치적 위치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은 그가 비판하는 사람들과의 대립, 특히 그들이 기대고 있는 다양한 탈민족주의적 경향들과의 대립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그의 비판에 따르자면, 이러한 경향들은 그 자체로 논리적 정합성과 일정한 정치사상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의 근본은 결국 민족(국가)의식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적 완결성에 비해 그에게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이론적 무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그의 명확한 정치적인 입장과 묘한 긴장을 일으킨다. 

  대신 서경식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체험이다. 자신의 체험, 그가 자주 인용하는 레비의 체험 등에 대한 강조는, 기억의 정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문제에 잘못된 접근방식을 채택할 수도 있는 완결된 이론체계에 대한 반정립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의 입장에서 체험과 증언은 전쟁책임문제와 민족문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통합해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자 자기정당화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체험을 통한 직관적 판단(특히 재일조선인이라는 위치)이 가져다주는 통찰이, 모든 인류에게 평화를 선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맺는말 

  그러나 레비의 자살, 그리고 글쓴이 자신의 토로에서 읽어낼 수 있듯, 체험을 되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증언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증언에 극단적으로 드러난 비정상성을 수용할 수 있는 인식의 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이 체험과 증언은, 긍정적 미래의 가능성을 지속시키기 위해, 즉 그런 체험과 증언과 유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체험과 증언의 당사자들이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당위적인) 사명과도 같다.  

  그리하여, 냉철하고 확고한 정치적 입장에 비해, 그가 그리고 있는 앞날은 4부의 대담에서 스스로 인정하듯 다소 공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단순히 '대안이 없는 일본 우익과 자유주의자 양비론'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극복해내는 일은 결코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를 위해 (글쓴이의 분석에 따르면) 가장 먼저 포기되어야 하는 일본의 민족주의가 지금처럼 지속되는 이상, 각각의 민족들은 그 폭력적 이념을 일본에 의지해 유지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는 각 민족들이 적대적 공생관계에 돌입하는 우울한 미래를 낳을 것이다.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제목의 뜻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전쟁책임론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다시 그 내용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자 비판이다. 한편 그의 분석은 충분히 귀담아들을만 하고, 그의 체험은 충분히 고려되어야하는 것들이다. 이 둘이 결합했을 때, 너무나도 이상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정치가 열린다. 서경식의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은 이유들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더욱 보편적인' 보편주의적 통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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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강의 동서문화사 월드북 26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권기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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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성 숙제> 

  헤겔의 역사철학

  헤겔(G.W.F. Hegel : 1770~1831)은 역사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헤겔 이전에도 역사를 철학적으로 다루려 시도한 학자들은 존재했다. 칸트나 루소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역사철학, 또는 역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수행한다고 명확하게 인식하지는 않았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기준으로 삼아, 과거와 미래에 대한 조심스러운 견해를 개진하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하여, 철학의 한 분과이자 핵심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로서 역사철학을 천명하였다. 또한 역사철학이 다루어야 할 주제들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역사를 인식하는가,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어떤 속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들은 거의 모두 헤겔의 역사철학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두를 종합했을 때,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역사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란 단순히 군중의 집합이 벌이는 여러 가지 행동의 묶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이 있으며,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아마도 그 사건의 ‘역사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성을 규정하고, 그 정의에 따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그리고 그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가능해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성의 기준으로서 헤겔은 ‘이성’이라는 열쇠말을 제시한다. 역사의 과정은 이성적이며, 그리고 그 이성을 능력으로서 지니고 있는 인간은 사건의 역사성을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은 역사적 사건을 만드는 데 개별적으로 참여하지만, 자신들이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그 개별적 참여로부터 의도하지 않은 거대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이성은 구체적인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으로 존재함과 동시에, 그 구체적 개인들을 거시적 역사에 참여시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냄으로써 실체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과연,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헤겔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실제로 역사의 탐구에 나선다. 이같은 내용이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각 국가에 대한 견해는 같은 시대를 견주어 비교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성이 매우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인도 등의 비유럽 국가에 대해 매우 심각한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휩싸여있다는 점에서 그 신뢰도가 의심스럽다. 구체적으로 역사를 분석할 때 헤겔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선택적으로 인용한 면이 없지 않으며, 그가 주장하는 이성에 의한 역사의 발전이라는 말이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시도와 노력은 일관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려는 최초의 적극적 태도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이후의 역사철학자들의 문제의식, 그리고 그들이 탐구하는 주제에 대해 알아보는 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의 거의 모든 역사철학은, 헤겔의 역사철학에 매우 큰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헤겔의 역사철학은 그의 책 『역사철학강의』에 잘 드러나있다. 

  헤겔의 역사 구분

  우선 헤겔은 자신이 ‘철학적 세계사’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철학적 세계사는 그가 분류한 역사를 탐구하는 태도 가운데 한 가지에 해당한다. 그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사실로서의 역사이다. 이런 태도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정리하여 문자의 형태로 남겨놓는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인간들이 벌여놓는 여러 가지 행동들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정신의 범주에 맞게 옮겨놓는 것, 즉 물질의 운동의 영역에서 주관적 정신의 이해의 영역으로 옮겨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히 언어적 표현이어서만은 안되며, 명확하게 ‘역사’를 한다는 자각이 있어야한다. 따라서 문학이나 전승, 신화는 역사에서 제외되며, 보고에 대한 동기가 일차적으로 역사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사실로서의 역사는 결국 보고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모든 사건이 보고하는 사람의 관념에 밀착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근본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기록으로만 남게 된다. 가장 특수한 것에 대한 가장 특수한 정신의 기록이 ‘사실로서의 역사’인 셈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런 역사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역사를 생성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을 헤겔은 ‘반성적 역사’ 라고 말한다. 

  반성적 역사는 다시 네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일반적 역사이다. 일반적 역사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종합하여 서술하는 것인데, 그 서술이 구체적 사건에 매몰된 ‘사실로서의 역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그 반성의 내용을 말하는 역사가 자신의 종합이다. 따라서 일관된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게 된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사건에 대한 해석과, 해석자의 개념도구들이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 역사를 서술하는 서술자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 사건들을 배치하는데, 여기에서 역사를 결정하는 권리를 서술자의 생각에 달려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그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통해 개인들이 현재에도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을 전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교훈적 성격을 가진 역사를 헤겔은 실용적 역사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반성적 역사의 두 번째 종류이다. 실용적 역사는 과거로서의 역사인 동시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유의미한 변화를 주기 위해 서술자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이런 시도에 대해서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역사적 조건들과 현재의 역사적 조건들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유추하려고 하더라도 절대 그 본래의 내용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비판적 역사이다. 이들은 역사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역사가가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아예 역사적 사실 자체는 뒷전으로 물러나며,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부각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될 수 없으며, 역사 자체에 대한 연구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넷째는 전문적 역사이다. 역사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역사 전체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통찰에 다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전문적 역사에 발을 내민다. 이들은 전체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각 부분의 역사에 대해 깊이 탐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한다. 특히 이들은 정신의 측면이 반영되는 분야에 대해 연구하는 경향이 강한데, 역사철학은 이러한 각각의 전문적 역사로부터 정신 자체의 본성과 그 역할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 자체를 연구하는 역사를 헤겔은 ‘철학적 역사’라고 이름짓는다.

  철학적 역사

  철학적 역사는, 다른 말로 하면 역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헤겔의 언급에 따르면 이 말은 모순을 안고 있다. 역사는 가장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한 고찰인데 비하여, 철학은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에 대한 탐구를 명확한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철학적으로 고찰한다는 말은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길어올리는 것, 그리고 다시 그 원리에 따라 역사를 재배치하는 두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원리란, ‘철학이 역사를 향할 때,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따라서 세계 역사도 이성적으로 진행한다는 사상’이다. 철학적 역사는 이 원리를 역사에서 읽어내고, 그리고 그 원리에 따라 역사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을 전제이자 목표로 삼는다. 이성은 세계의 모든 존재들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이기 때문에, 역사 또한 이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성의 움직임은 반드시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서만 드러나야 한다. 이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와 내용을 갖지 못하는 추상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작동하는 이성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진행을 탐구해야만 한다. 역사 자체의 개념만을 분석하는 추상적 수준에서의 이성에 대한 탐구는 무의미한 동어반복 또는 역사가 아니라 탐구자의 사고의 시적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철학은 반드시 그 핵심이 구체적 역사로부터 뒷받침이 되어야한다. 

  헤겔은 자신이 구상하는 철학적 역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사조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첫째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인데, 이 세계 전체를 인도하는 이성적 원리가 있다고 간주한 것이다. 아낙사고라스의 용어에 따르면 이를 nous라고 부른다. 이는 자연과 인간 모두를 지배하는 원리로서 작동하는데, 오히려 이러한 개념의 혼동이 자연사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으나 인간사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운동의 법칙 수준에만 머무르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둘째는 기독교적 전통이다. 이 전통에서는 세계를 주재하는 존재를 신이라고 지칭한다. 역사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신의 인도에 따라서 벌어진 것이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있고 그것은 신의 능력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신이 철학적 신이 아니라 종교적 신이라는 점이다. 종교적 신은 인간에게 이해나 이성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주재한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 역사에 대한 신뢰 또한 잃어버릴 수 밖에 없으며, 이것은 역사에 대한 회의주의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다. 헤겔은 두 전통을 비판하며, 신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인간의 완전한 인식의 가능성을 대체해 종교적 신을 철학적 신으로 대치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철학을 유비적으로 설명한다. 즉, 인간의 정신이 신을 인식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문제를 이성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으로 전환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철학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통적인 악의 존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바꾸어 헤겔에게도 똑같이 질문할 수 있다. 만약 철학적 신이 있다면, 왜 이 세계에는 그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이 존재하는가? 철학적 신은 이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려줄 것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주재하는 원리로서의 이성을 통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 속 악의 문제를 설명해보려 시도한다. 구체적인 세계에서는 언제나 악인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헤겔의 체계가 갖춘다면, 그가 주장하는 내용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정신, 자유, 역사의 동력

  헤겔에게 정신은 물질과 반대되는 실체 개념인데, 이 정신은 역사가 펼쳐지는 배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신은 실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운동하는 고유의 법칙이 있으며, 또한 그 법칙은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그 법칙이란 다름 아닌 이성이다. 하지만 이성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이성을 정의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며, 내용을 가질 수 없는 정의에 불과하다. 헤겔은 이 단계에서 정신에 대해 추정적, 잠정적으로라도 정의를 내려볼 것을 제안하는데, 그것이 곧 자유이다. 정신의 본성이 자유라는 것은, 자신의 운동의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의지하는지 의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존재는 하나의 완결된 존재이다. 이는 그 반대인 물질 실체와 대비되는 속성인데, 물질실체는 본성으로서 질량(무게)를 지니며, 따라서 관성의 법칙에 의해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원인이 주어져야 한다. 

  헤겔은 이런 개념 정의를 거쳐 역사의 과정은 정신이 자유를 성취하는 과정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 본질이 자유라는 것은, 정신은 곧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서 이 본질을 발현하려고 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또한 자유는 곧 자신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정신은 자신을 점점 더 명확하게 정의하고 알아가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만약 역사가 정신 위에서 펼쳐지는 장이라면, 역사 또한 정신의 운동법칙(경향)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정신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단계를 밟아나간다. 

  그렇다면 추상적으로 정의된 정신, 자유를 그 본질로 하는 정신은 어떤 것을 매개로 자신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것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개인들의 활동이라고 답한다. 그 가운데서도 개인들의 정념에 근거한 의지를 통한 활동에 의해 정신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개인들은 결코 역사 속에서 정신,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더라도 매우 우연적일 뿐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의 동기를 정념에 의지한다. 구체적인 역사는 이러한 정념들이 펼쳐지는 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헤겔이 취하는 관점이다. 그는 이 수준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역사는 이성에 의해 인도된다.’는 관점을 우선 지닌 뒤에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이는 정념들로만 구성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어떻게 이성의 인도에 따라 진행되는 합리적 과정으로 바뀔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헤겔의 답변이다. 이는 단순한 귀납이나 체계내적 연역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은 이성의 반성적 능력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렇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성 스스로가 자신을 정의하고 그것을 본질로서 소유하며, 그리고 그것은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통해 활동에 나선다는 인식에 이르면,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묶음과는 전혀 다른 유기적인 전체로 보이게 된다. 

  역사에 참여하는 구체적 개인들은, 항상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 목적을 설정하고 그에 가장 알맞은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다. 이 과정은 구체적이고, 그 때 그 때에 맞는 특수성에 부합하게끔 기획된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의 측면에 있어서 정신적이고, 자유를 소유한 추상적 존재들이다. 따라서 인간이 구체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언제나 정신의 본성, 즉 자유가 발휘되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활동에는 이 두 가지 영역이 중첩되어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활동의 유기적 전체인 역사에도 이 두 영역이 중첩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사건의 핵심, 그리고 그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전체 이성의 기획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추상과 구체 사이의 매개자로서 기능한다.

  정신의 실현체로서의 국가

  특수한 개인은, 특수한 정념을 동기로 삼아 특수한 목적을 설정하고 특수한 방법을 동원하여 실천하고 행복을 성취한다. 그렇다면 가장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은, 이성을 동기로 삼아 자유를 목적으로 설정해 이를 선취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렇다면 개인과 달리 이성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기획을 일반적으로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물론 구체적 개인의 실천에서부터 시작하기는 하지만, 이성이 이성으로서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개인의 정념에만 실천의 모든 동기를 의지해서는 안된다. 헤겔은, 이런 개인들을 이성에 따르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가이며, 이 국가가 이성의 현현으로서 역사의 단위가 된다고 주장한다. 

  헤겔이 설명하는 국가는 매우 포괄적이다. 단순히 국가체계나 법적으로 정의된 영토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좁게는 이데올로기적 공동체 혹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지침을 전해주는 문화공동체의 의미로 쓰고 있다. 더욱 추상적인 정의로는, 각 개인들이 정념에 따라 하는 행동들에 자유를 부여해주는 존재이다. 인간은 국가를 통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구체적 개인에게 공동체가 없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신적 존재, 즉 자유로운 존재인데, 이는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또한 자신의 본질로서의 자유를 추구했을 때 공동체가 등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것이 인간의 본질 또는 정신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헤겔은 국가를 원자적 개인의 집합이며 권리를 보장하고 제한해주는 기능을 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바라보는 사회계약론적인 국가관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계약론적 국가관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를 권리로서 가지고 있고, 사회가 이를 제약한다고 본다. 하지만 날 때부터 자유라는 자연상태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헤겔이 보았을 때는 오히려 계약론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고실험 내지는 가상의 상태일 뿐이다. 그들은 이런 가상과 역사적 사실을 혼동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이며, 공동체에 편입되어야만이 그 자유가 현실태로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러한 견해에 따라 원시적 열정을 자유와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며 자신을 완전히 인식한다는 자유의 개념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한 착각이라고 헤겔은 말하고 있다. 자유는,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공동체에 소속되어서 그 공동체의 정신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국가를 가족에서부터 비롯된 자연발생적인 공동체로 보고, 공동체적 규율만으로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는 도덕주의자들 또한 헤겔의 비판의 대상에 오른다. 물론 가족공동체는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지게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장소로서, 공동체의 속성이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복합적인 효과를 내는 유기체가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하기는 한다. 허나 여전히 자연발생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동물들이 가족을 생각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다. 결속력의 기초는 만들어줄지 모르나 가족 자체가 이성적인 공동체는 아니며, 이성적인 공동체의 조건으로서 법과 규범은 반드시 포함되어야한다. 

  또한 국가의 통치체제, 혹은 관료의 구조로만 국가에 대해 판단하려 하는 것도 잘못이다. 국가는 오히려 이것보다 더 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그 국가의 정신의 단계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지 그것을 국가의 본질로 바라보려 해서는 안된다. 또한 정신의 반영물이기에 시대나 장소에 따라 그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으며 이 사이에 비교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통치체제, 즉 국가기구는 국가가 자신을 현현하는 데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체제뿐만 아니라 그 국가를 둘러싼 정신적 산물들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 국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정신적인 면모들은 종교, 예술, 철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관장하는 절대적인 주권자, 즉 국가의 원리를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바로 종교이다. 각 사회는 그 사회에 맞는 종교를 지니고 있는데, 이 종교는 그 사회가 역사 일반을 이해하는 방식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개인적인 정념은 종교를 향한 열정과 신앙 앞에서 무화되고, 자신을 절대자와 일치시키는 의식을 종교행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시행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헤겔이 생각하는 이성과 구체적 개인 사이의 통일과 유비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한 민족이 진리로 삼고 있는 것의 정의(definition)을 가리키는 장소’이다. 이러한 통일은 종교적 상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그 국가의 역사 단계의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그 국가의 종교를 관찰하면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헤겔이 사용하는 의미의 국가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역사상 존재했던 거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기구의 권위(제도의 권위)를 종교의 권위에 빌어서 사람들에게 강제하곤 했던 것이 가장 강력하고 구체적인 증거이다. 종교적 권위는 그 국가에게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옳은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따라서 국가와 일체가 되는 것은 신과 일체가 되는 것과 논리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으며, 헤겔의 체계 내에서 이런 일치는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정신이 자유를 완전히 성취한 상태와 같다. 

  종교는 결국 한 특수한 공동체의 성향만을 반영한다. 다른 종교를 가진 국가들은 다른 정신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또 그에 따라 서로 다른 국가체제와 제도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헤겔이 이야기하는 이성은 특수한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 일반, 모든 인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므로 특수한 종교가 자유를 성취할 수 있는 완전한 수단이 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각 국가들을 통해서 세계사 전체를 움직이는 이성은 자신의 원리를 각 종교에 모두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으며, 이들은 각자의 과정을 거쳐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성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역사 발전의 원리

  그렇다면 역사에 존재하는 이런 단위들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 역사는 어떤 방향이든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변화는 두 가지로 분류한다. 자연의 변화는 기존에 있었던 단위 사물들의 운동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기존에 없었던 것이 생기는 변화는 아니다. 반면에 정신의 변화는 기존에 없었던 것이 생성되는 변화, 창조의 변화이며 신적인 변화이다. 

  하지만 역사의 발전은 위의 두 가지와 같은 일차원적인 변화가 아니다. 역사의 발전이 보여주는 변화는, 정신의 수준이나 단계가 총체적으로 바뀌며 진화에 가까운 탈바꿈을 하는 것이 그 원리이다. 역사의 방향은 내재해있으나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인간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외화한다. 안에 있던 것이 밖으로 보여지면서, 전혀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점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발전이 자연의 운동의 법칙처럼 단선적이지 않다. 즉, 관성의 법칙에 의해 자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는 과정만이 역사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발전이란 다름아닌 이성의 본질인 자유의 성취, 즉 물질세계로부터 종속된 위치에서 떨어져나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적인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기원인의 존재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헤겔에게 역사의 발전이란, 자연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지는 과정, 자연으로부터 정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의 역사의 시작은 이미 문헌에 남아있지 않고, 종교적 상징과 전승으로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역사철학은 이것에 대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옳지 않다.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입장에서 역사는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의 일변도를 걷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는 인간으로서의 진정만 면모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또한 의식적으로 역사를 정리한다는 자각, 그리고 그것을 기록할 명확한 개념적 도구들이 없는 시기의 역사는 객관적인 역사라고 할 수 없으며, 그것은 역사 이전 혹은 역사가 아닌 시대일 따름이다.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들이 발생하고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의 개념들은 스스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부정되면서 부적합한 개념은 교정되고 파괴된다. 그리고 새로운 개념으로 대체된다. 역사는 정신 속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개념의 역사이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이러한 개념을 통해 해석되고 또 그로써 역사라는 위치를 얻기 때문에, 역사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에서는 구체적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개념들의 변화와 그 법칙을 연구해야 한다. 그것이 곧 역사에 대한 선이해이며, 역사 현상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의 핵심은 바로 자유이다. 

  따라서 자유를 중심으로 파악되지 못하고, 역사의 구체적 사건들이 스스로 이러한 점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구체적 사건들의 공통된 점을 예로 들며 그 발전의 정도를 판가름할 수 없으며 모든 민족과 모든 국가에 자유가 주어져있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며, 그 민족과 국가의 문화는 반드시 발전의 정도가 있다. 그것은 자유가 그만큼 반영된 법과 제도, 종교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정신사적인 발전의 정도가 가장 많이 반영되어있는 종교, 예술, 철학은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민족과 국가에 종교와 철학과 예술이 있지만, 그리고 그들이 형식적으로 매우 완결되고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자유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면 그 민족과 국가에게 자유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마치 고대와 중세와 근대, 유럽과 비유럽이 모두 똑같은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착상과 같다. 

  정신사의 발전은 이전의 정신사적 절정을 이루었던 민족이나 문화의 개념들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이루어진다. 이는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인식하는 자유, 다시말해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그 객관화 자체가 새로운 역사의 동력으로서 작용하는 정신의 원리인 변증법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러한 긴장상태가 끝나고 자족하는 정신상태로 들어갔을 때, 그 민족은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머무르게 되며,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은 더 이상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역사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발전의 단계와 과정,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를 면밀히 관찰하는 일이다. 현재의 과정이 되기까지 거친 여러 폐기된 요소들은 어떻게 현재의 발전에 발판이 되었으며, 그리고 그 기억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가져가야만 한다. 역사철학은 각 민족의 이러한 정신사적 발전을 하나의 총체적 과정, 즉 이성의 자기 실현의 과정으로서 간주하고 또 파악한다. 역사철학자에게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영원히 자신의 앞에 현전하는, 지금-여기의 사건이다. 그것을 과거로, 정체로, 발전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는 순간 그 철학은 물론이고 그 민족과 국가 전체가 더 이상 세계사에서 무의미한 존재로 추락하게 된다.

  결론과 평가

  헤겔의 역사철학은 이와 같은 계획에도 불구하고, 서론에서도 서술했듯이 구체적인 분석의 내용을 들여다보았을 때에는 현재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상당하다. 자연환경이 인간들의 활동의 구조와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인식이나, 역사의 발전의 방향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 중국과 인도의 역사에 대한 편견 등은 전형적인 식민적 사고라는 이름으로 헤겔이 자신의 역사철학을 개진한 이래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지금 이 시간, 구체적으로는 헤겔이 매우 폄하했던 문화권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시선에서는 그가 자신의 선입견을 철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패권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절대적인 인식의 기준인 것으로 표명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정신을 주체로 삼은 그의 역사철학의 큰 줄기는, 그 정신이(이성이) 독립적인 존재로서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은 그곳에서 결코 주체로서 행위할 수 없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을 매개하는 존재자일 뿐이다. 또한 그 존재자는 정신을 온전히 이 세계에 전개하는데, 정신이 지니고 있는 자유의 속성은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러한 자유를 정말로 누릴 수 있는가? 정신에 의해서 누리는 이러한 자유는 이미 인간의 자유가 아니며, 그렇다면 어쩌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는 공동체에 의해서 구속받는다고 하는 견해는 매우 상식에 부합한다.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유는, 자유라기보단 법적 권리에 가까우며 또한 인간의 잠재적 자유를 성취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의 행동에 대한 허가를 얻는 것에 더 가깝다. 만약 헤겔이 정신의 형이상학적 자유로부터 인간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만드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면, 그가 이론적으로 쟁취해낸 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요컨대, 그의 자유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역사를 연구한다. 헤겔이 정의했듯이, 역사는 단순히 군중들의 행동의 집합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명확한 역사성이 있으며, 그 역사성을 인식하는 것은 그 행동을 취하는 인간들이다. 헤겔의 문제의식은 그 역사성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또한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간의 자유의 확장이 역사성이라는 헤겔의 답변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긍정적 전망과 발전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로 인류를 현재의 상황까지 이끌고 온 큰 동력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헤겔의 역사철학은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당화로서 매우 효과적이라고 보여진다. 설령 그의 구체적 분석이 서양중심적인 시각, 다시 말해 그가 가장 경계했던 시간과 공간의 특수함에 매몰된 해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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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중앙대학교 교지 『중앙문화』기고> 

 

베스트셀러?

  올해 5월, 서점에 책 한 권이 등장했다. 표지에는 ‘JUSTICE’라는 모양이 크게 박혀있다. 한글 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 글쓴이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라는데, 하버드 대학의 교수다. 이 책은 그가 ‘정의Justice’를 주제로 삼아 해마다 여는 강의의 강의록 혹은 강의초안이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학생들이 모여, 경제정책도 신기술도 아닌 정의에 대해 배우는 강의라고 한다. 목차에는 칸트니 아리스토텔레스니 하는,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과목에나 나올 것 같은 이름이 들어가있다. 

  이런 면모들을 조합해보았을 때, 이 책은 다른 인문학 책들이 그렇듯이 1000권이나 겨우 넘길까 말까 한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게 정상이었다. 표지도 예쁘지 않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부생들 대부분이 이름만 얼핏 아는 정도인 샌델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낯선 이름일 것이다. 다루는 내용은 머리에서 잊어버렸던 수능 공부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다. 못난 표지와 유명하지 않은 글쓴이와 지루한 내용의 3박자가 골고루 갖추어진, 다시 말해 망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한 마디로 말해 대박을 터뜨렸다. 출간 이후 급하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더니,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11월 초에는 50만부를 넘겼다. 지금 추세로는 스테디셀러 반열에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서는 예약이 밀려있는 경우가 보통이며, 학교 중앙도서관에도 무려 13권이나(!) 있다. 조금 더 과장을 섞자면, 2010년에 지하철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다음으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책이 되었다. 문제는 이 책이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퓨전무협이나 트렌디한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이라는 것이다. 

  무척 당혹스럽다.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명성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만큼 팔린 사례는 없다. 예를 들면, 존 롤즈John Rawls가 쓴 『정의론Theory of Justice』은 한국에서 얼마나 팔렸을까? 『실천이성비판』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또 어떤가?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자신의 희망사항을 덧씌우기도 한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정의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나. 그리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이 사회의 병리를 점검할 수 있는 척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그 평가를 내린 자신이 사회를 공정하지 않다고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공정하지 못하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비슷한 주제에 비슷한 입장을 펼치는 다른 책들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대통령이 휴가를 가면서 들고 갔다는 소문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식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 정도다. 

  그러면 읽어보어야 한다. 이 책은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샌델은 왜 이렇게 글을 썼는가? 그리고 이 책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왜 베스트셀러일까?

  어떤 책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회적인 맥락을 짚어내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 책 자체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도 틀린 방법은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결정하는 데 사회 분위기와 책의 내용 가운데 어떤 것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어야, 그 내용이 사회와 부합하여 판매부수라는 실제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정의란 무엇인가』는, 책 자체로도 매우 괜찮은 책이기 때문에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 책은 끊임없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누구나 부담없이 읽기가 편하다. 도덕과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으레 등장하는 괴상한 개념과 명제들이 이 책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샌델이 직접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인용 정도에서 그칠 뿐이다. 대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례 속에 모두 담겨있다. 이 이야기들은 여러 쟁점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가 신중하게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그 사례들이 매우 자극적이다. 그리고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부자의 부에 대해 국가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라는 말 대신 ‘미국 부자 1등 빌 게이츠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도 되는가?’를 사용한다.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을 죽여도 되는가?’,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슬픈가?’ 는 질문도 들어있다. 대개 샌델의 질문은,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밋밋한 사건들이 아닌, 생명이나 권리가 걸린 상황에 대해 선택을 강요한다. 마치 잘 짜여진 TV 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셋째, 이 이야기들 때문에 샌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함의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어, 이것은 문제인데.’ 라고 읽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고작이지만 이런 방식의 효과는 크다. 따라서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론들도, 샌델의 사례들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곧바로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 자습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사례가 말해주는 사항을 글쓴이가 어느 정도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언어로 직접 정리해주기도 한다. 

  넷째, 사실상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도덕에 대한 매우 다양한 입장을 효과적으로 단순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샌델은 윤리학사에 등장한 여러 입장을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자유주의(칸트와 롤즈), 덕 이론(아리스토텔레스)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몇몇 특수한 예외들을 제외하면, 이 샌델의 모델에서 포착할 수 없는 입장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읽는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 책에서 쉽게, 그리고 이론적으로도 완성된 형태로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장점들이 지금처럼 화제에 오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내용을 읽는 사람이 마주치는 사건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적용해보기 쉽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책과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직면해있으며, 그것을 어떤 식으로 고민해야하는지 알아간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론적 수단을 제시해준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 모든 욕구를 채워주기에 아주 알맞은 형식으로 써진 책이다. 그리고 바로 샌델이 자기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위하기를 바랐을 것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샌델의 위치?

  샌델이 이런 방식으로 책을 쓰게 된(혹은 강의를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학문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그가 책에서 쓰고 있는 것처럼, 샌델은 존 롤즈에 매우 반대한다. 이런 반대는 비단 롤즈와 샌델에게만 관련이 있는 문제는 아니다. 흔히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이라고 불리는 학문적 논쟁에서 롤즈는 자유주의 진영을, 샌델은 공동체주의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학자이다. 이 논쟁은 샌델이 1982년에 롤즈를 비판하는 책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의 논쟁도 흥미롭지만, 그 큰 맥락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샌델의 전략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샌델, 그리고 샌델과 함께 대표적인 공동체주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Alesdaire MacIntyre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보여지는 입장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매우 가까워보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샌델과 매킨타이어가 함께 강조하는 것은 바로 덕virtue이다(『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미덕으로 번역되어있는 것 같다). 이 덕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충실하게 지속적으로 사는 삶을 뜻한다. 인간은 영혼, 그리고 영혼에서도 이성이라는 특별한 부분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삶을 꾸려나간다면 그 사람은 덕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덕 있는 사람은 삶의 목적인 행복한 삶eudaimonia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어떤 특별한 원리나, 모든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규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지침은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더 가깝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상황마다 그에 맞는 행위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양식을 찾게 해주는 인간의 능력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실제 사건들과 끊임없이 마주하면서 어떤 행위가 가장 적합한지 알아내는 훈련이 요구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습관hexis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렇게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실천적 지식phronesis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실제 벌어지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사건이 없는 한 도덕은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제목,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설정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전통에서는 정의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해 질문한다. 공리주의에서는 도덕과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좋은 것’와 ‘싫은 것’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문제들을 이 두 개념으로 환원시킨다. 자유주의에서는 ‘선이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도덕적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며, 이와 별개로 ‘자유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여기에 기초하여 권리를 설정하고 그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의 수립을 추진한다. 정의에 대한 질문은, 선과 정치가 오묘하게 닿아있는 영역이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하고 적절한 기준을 제시하려고 했던 그 곳이다. 

  샌델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전략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재현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도 밝히고 있지만, 도덕에 대한 논의는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도덕적·종교적 판단은 언제나 정치적 판단과 연결되어있다.’ 따라서 샌델이 여러 윤리적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전략은 자신의 입장에 충실히 따르는 일, 즉 구체적인 사례들을 계속 보여주며 여기에서 가장 적합한 선택 또는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윤리적인 입장에 부합하는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어쩔 수 없이 ‘도덕적 직관’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매우 위태롭다. 물론 다른 체계를 자기 내면에 담고 사는 사람들도 직관처럼 보이는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은 어떤 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며, 추론하는 과정을 빠르게 하거나 생략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 직관에는 이런 판단의 체계나 기준이 없다. 당장 아리스토텔레스만 보아도, 샌델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한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행위하는 것이 이성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여기서 ‘적절’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듯, ‘적절하다’는 말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적절함’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떻게?
 

이데올로기?

  우리가 ‘직관’하여 어떤 행위를 생각할 수 있는 이유를, 어떤 학자들은 신념의 체계라고 부르며, 그것을 한 단어로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는 체계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우연히, 어떤 체계에서 연역할 수 있는 결론을 담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인 추론이나 엄밀하게 검토된 양식이 아니다. 거의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정하게 행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행위들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아까 위에서 잠깐 특수한 몇몇 예외들을 제외하면 샌델의 모델이 거의 모든 윤리학적 입장을 소개해주고 있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이데올로기’를 언급하는 주장들이 이 특수한 몇몇 예외들에 해당한다. 가장 멀게는 트라시마쿠스가 내뱉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라는 짧은 말에서부터, 최근에는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권력의 미시적 작동에 의해 사회 전체가 통제되고 있다고 폭로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같은 사람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만들어진 조건에 따라 아주 우연한 여러 가지 형태로 ‘해야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당위명제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에 편입되는 순간 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편입되지 못한다면, 한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놓여있는 많은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력에 해를 입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편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우연적’이기 때문에 실천을 강요할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해도 사회로부터 배척당한다. 나와 너의 분리, 우리와 너네의 분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요소가 바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샌델의 한계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어, 샌델은 시장만능주의자들과 낙태찬성자들을 자유지상주의라는 한 범주에 묶었다. 하지만 실제 정치환경에서 이 둘을 동시에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의 시장만능주의자들, 즉 보수주의자들은 대개 기독교도적 정체성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한다. 다시 말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명령하는 명제들의 묶음, 즉 어떤 특수한 이데올로기이다. 또한 낙태찬성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자유롭게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낙태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여성의 몸을 취급하는 방식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맥락이 다른 이야기이다. 

  더욱이 샌델은 지속적으로 어떤 일관된 체계 안에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제시하는 도덕적 딜레마 앞에서, 항상 같은 체계에서 연역될 수 있는 선택지를 뽑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가정을 바탕에 두고 논지를 전개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런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고, 자기 안에 담아놓은 당위적 명제들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죽더라도 국가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아래에서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죽을 때 덜 슬픈 것이다. 사실 샌델의 판단과는 다르게, 도덕적 직관에 따른 판단은 일관된 도덕적 신념에 위배될 때가 훨씬 많다. 우리는 서로 모순된 행위를, 그것이 모순된 것인지 아닌지 판단을 유보한 채 일단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한다. 사회와 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샌델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덕목은 모두 이데올로기에 속하거나,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것들이다. 우애, 애국심, 시민적 의무감, 가족애, 형제애 모두가 그렇다. 이런 개념들은, 언뜻 보기에 자연스러우나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인종탄압, 전쟁과 같은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또한 가족이든, 형제든, 국민이든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는 경우를 너무나도 자주 볼 수 있다. 그 이유도 정말 다양하다. 

  흔히 이런 경우에는 덕목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며 우리가 어떤 기제들에 묶여있는 것은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존재하던 덕목들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윤리학을 정립시켰고, 샌델도 그 뜻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윤리학의 진정한 의미가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라면, 우리가 굳이 그들을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욱 넓은 시각에서, 자신이 영위해온 삶의 양식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성해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샌델의 설명과는 달리 칸트의 견해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칸트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매몰된 행위지침들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보편적인 윤리적 체계에서 자유에 대해 설명하려 한 그의 견해에 비춰볼 때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는 시민윤리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언제나 세계시민적인 관점, 인류 전체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또한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시민사회들이 통합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세계시민적인 윤리가 확립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런 예측은「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이라는, 그가 쓴 아주 유명한 논문에 등장한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시민적인 관점을 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이는 ‘인간을 목적으로서 대하라.’ 라는 칸트의 공식과, 그 공식을 실제로 세계에 펼칠 수 있는 사회가 출현함으로써 성취된다. 물론 그도 이 과정이 대단히 길고 힘들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말을 한다. 게다가 이것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현상계(감성계)에서 포착할 수 없으며,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계(예지계,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지적 세계’로 번역되어있다.)를 향해 인간이 스스로 요청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의 윤리학은 진정한 도덕적 인간의 밑그림을 그려준다는 점에서, 단순히 현재의 덕목들을 윤리학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들,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는 공리주의적 생각,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이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의란 무엇인가』 다시 들여다보기

  샌델은 영국과 미국에서 논의된 윤리학의 전통만 다루고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베스트셀러가 될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이야기 중심의 책 구조는 책 내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만든다. 그 사례들이 충분히 사람들의 상상력을 들뜨게 할만한 일들이기에 그 효과는 몇 배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은, 윤리학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샌델이 설정한 모델을 핵심만 뽑아내어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은 이런 것들이다. 아주 재미있고 실용적인 윤리학 책이다. 

  이런 서술구조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샌델의 학문적 성향 때문이다. 구체적 사례 속에서 직접 실천함으로써 윤리적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샌델은 자신의 윤리학 체계를 만들어가면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책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고, 앞에서 나왔던 여러 이론들을 반박할 수 있는 최고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적합성’이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적합한 행위를 함으로써 도덕적인 인간 즉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샌델도 여기에 동의하며 시민적 덕을 자기 윤리학의 중요한 자원으로 삼았다. 

  하지만 샌델이 제시하는 덕목들은 특정한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좌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잘못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미국이 지금까지 쌓아온 역사적, 사상적 전통에서 나온 (미국)시민적 덕목들은, 요즘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볼 때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아보인다. 물론 샌델은 그 덕목들이 발휘되고 있지 않거나 잘못 발휘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미국사회를 비판한다. 하지만 특정 집단의 가치들을 일반화하고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 한 권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학자들에게도, 샌델에게도 한계점은 분명 존재하게 마련이다. 샌델이 부정적으로 설명한 칸트가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답이 꼭 옳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이 뒤를 고민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 각자의 몫이다. 이 책은 50만 부가 넘게 팔렸다. 바로 ‘이 뒤’를 고민할 사람이 적어도 50만 명이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주 기쁜 일이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 윤리적 삶의 첫걸음을 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50만 명 각자의 삶, 나아가서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더욱 진지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생겼다는 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은 매우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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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단상
    from 효진이네 : 꼼꼼히 읽기 2018-02-17 07:01 
    『정의란 무엇인가』를 두 번째 읽는다. 학교를 다니며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불만에 가득 찬 리뷰를 교지에 투고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어 막 나왔을 때 쯤이었으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다. 새로 번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판형과 종이가 바뀐 정도 이외에 큰 차이는 못느끼겠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초판을 읽은지 오래 되기도 했고. 다시 번역이 되고도 30쇄나 더 찍을 만큼 많이 읽힌 책이고, 그에 대한
 
 
에브리온 2010-12-0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카로운 지적에 글을 보며 감탄사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것을 비롯해서 이제까지의 서평 중에 가장 풍성하면서, 동시에 정확한 글인 듯 합니다. 즐겨찾기 등록하고 갑니다 !

박효진 2010-12-07 00:46   좋아요 0 | URL
엇... 감사합니다... ㅠ.ㅠ
이 글은 중앙대학교 교지인 중앙문화에 기고한 글입니다. 저는 중앙대학교 철학과 학생이고요. 교지에 다른 좋은 글도 많으니 시간 되시면 찾아서 읽어주세요 ㅎㅎㅎ

남규 2010-12-16 23:4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은혜로운 바쿄진님..ㅜㅜㅜㅜ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 86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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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치사상 숙제> 

問 : 루소의 <사회계약론> 1권부터 4권까지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판단하기에 오늘날의 정치 현실 혹은 한국의 정치 상황과 가장 연관성이 큰 부분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몇권 몇장의 무슨 내용?), 이 부분에서 루소가 주장하고 있는 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논하시오.

答 :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문제는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의 범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행정부가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만큼 행정부에 소속되는 인원이 입법부나 사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아진다. 또한 실제 구체적인 일을 처리하는 부서인 만큼 관련된 예산도 집중적으로 필요한 부서가 될 것이다. 이에 따라 행정부의 권한은 정부의 다른 구성요소들, 즉 입법부나 사법부에 비해 막강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금전적 이익을 매개로 행정부가 입법부와 사법부의 권한을 침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각 국가를 막론하고 벌어지고 있으며,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예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행정부의 예산이다. 입법부는 이 예산을 심의하는 데 입법부 구성원 개인의 관심사, 혹은 그 개인이 속해있는 정당의 관심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행정 관료들은 자신이 직접 입법권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익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입법부와 사법부를 움직여 행정부의 일반의지를 관철시킨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에, 행정부가 직접적으로 권한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익을 매개로 각 부서의 구성원들은 ‘알아서,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실제로 권한을 침범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도출한다. 게다가 독특하게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데, 입법부와 행정부를 같은 정당의 구성원으로 선출하려는 투표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선출이 되었을 경우, 일반의지보다는 각 부서의 의지 혹은 특정한 정당의 이익에 따른 의지의 표출이 더욱 교묘하고 용이하게 진행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루소는, 위와 같은 ‘행정의 지배’와 ‘금전의 지배’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책 『사회계약론』에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결국 정부의 왜곡과 국가의 해체를 불러오기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루소가 행정부에 관해 어떻게 쓰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구성 ‘원리’를 설명한 루소의 계약 이론 이외에도, 이 원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는지 혹은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루소의 생각에도 주목해야 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한 부를 떼어 행정부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행정부를 일반의지를 단순히 집행하는 기구, 혹은 집행해야만 하는 기구로서 규정하고 있다(3부 1장). 그리고 집행기구의 구성원 숫자를 기준으로 민주정과 귀족정, 군주정을 나누고 이에 대해서 분석한다(3부 3장). 여기에서 루소는 민주정은 꿈과 같은 일이고(3부 3장),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장 그럴듯한 정부형태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라고 주장한다(3부 4장). 또한 각 국가의 여건에 가장 적합한 정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인구를 꼽고 있으며(3부 2장), 행정부의 권력이 남용되는 형식적 모습과 그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루소가 귀족정에 대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선거를 통해서 가장 현명하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행정부의 일원으로 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3부 4장).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라면,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반영하거나 행정부의 일반의지에 따르는 결정을 하지 않고 언제나 국가의 일반의지를 따라 집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정부는 국가의 일반의지를 집행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정부와 그 구성원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고 적합한 정부이며 그 구성원이다. 

  물론 루소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에서는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는 식의 기술을 통해, 귀족정에 대한 어떤 묘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행정관의 상, 즉 ‘되어야 하는’ 행정관의 상을 보여주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는, 적어도 현실에서 행정관이 정말 저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저런 결정을 언제나 내리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루소가 행정부의 일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구체적인 사안에 접근하는지 분류해놓은 방식이다(3부 2장). 첫째는 행정관의 개별 이익, 일개 시민으로서 행정관이 가질 수 있는 행동의 동기다. 둘째는 행정부의 이익, 정부의 다른 부서나 시민과 별개로서 행동하는 동기인데, 이것은 행정부의 일반의지이다. 셋째는 국가 전체의 이익인데, 루소는 이를 진정한 일반의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의 동기는 대개 금전적 이익을 통해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지면 심해지고 있지, 덜하지 않다. 루소는 이런 점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즉, 물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즉 상업적인 이득은 ‘노예들이 쓰는 말’(3부 15장)이며, 만약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은 피하는 것이 옳다. 물질적인 이득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자질, 소양같은 것들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이런 사람 가운데서 행정부의 구성원이 될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상업적 이득을 경멸하는 듯한 루소의 말은, 어느 정도 과거지향적이고 복고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에도 이런 경향이 우려할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져 알게 모르게 혹은 자발적으로 금전적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복종하는 모습들에 대해 루소는 매우 좋은 충격을 안겨다주는 경고이며, 또한 귀감이 될 수 있는 충고를 해주고 있다고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간주할 수 있는 정치상의 문제는, ‘행정의 지배’와 ‘금전의 지배’가 복합되었을 때 나타나며, 이 둘은 상호간에 복잡한 효과를 일으키며 더욱 악화된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경향이 가장 처음 나타나던 시기에 루소가 던져주는 위와 같은 충고들은, 우리가 현재 영위하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행태들에 대해 가장 원형적이고 근본적인 비판을 던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가 보았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사회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에 대한 해법이 후퇴적인 모습을 띈다고 하더라도, 그가 말하고자 했던 모습과 그에 대한 경보는 충분히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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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1 - 교회국가 및 시민국가의 재료와 형태 및 권력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241
토마스 홉스 지음, 진석용 옮김 / 나남출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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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치사상 숙제> 

문 : 홉스는 주권자(리바이어던)의 권위와 판단에 따르는 것이 자연상태보다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홉스는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며, 홉스의 주장을 평가하시오. 

답 :  

  홉스가 말하는 평화와 안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상태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그는 세 가지 측면에서 자연상태를 추론해낸다. 첫째는 인간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그는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을 이성(reason)과 정념(passion)을 지닌 존재로 상정하고 자신의 논의를 시작한다. 그에게 이성이란 계산하는 능력이다. 정념이란 계산하는 능력 이외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마음의 여러 상태를 뜻한다. 정념은 선호하는 것 또는 혐오하는 것을 결정해주며, 이 두 가지가 각각 도덕적인 선(good)과 악(evil)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둘째는 자연권(right of nature)이다. 자연권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이다. 자연권에 대한 홉스의 정의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뜻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liberty), 즉 그 자신의 판단과 이성에 따라 가장 적합한 조치라고 생각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자유’이다. 여기에 따르면 인간에게 허용되는 행동의 범위에는 제한이 없다. 강제력을 발휘하는 법뿐만 아니라, 특정한 정치공동체(commonwealth)에서 규범적으로 강조되는 도덕률 또한 없는 상태인 것이다. 

  셋째는 인간은 결코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타인(들)은 자신과 똑같이 이성과 정념을 지닌 존재들이며, 능력에도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 즉 소유하려는 것이 자신과 겹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분쟁을 벌여야한다. 또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자신에게 피해를 입힐 지 알 수 없으므로 항상 경계하거나 상대의 존재를 먼저 제거해버려야 한다. 이런 분쟁을 벌여야하는 대상은 인간 전체이며, 모든 인간이 이런 행동방식을 취해야한다. 이것이 바로 홉스의 논의에서 논리적 기초가 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자연상태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은 인간을 이완된 상태로 이끌어줄 수 없기에 인간의 본성과 어긋난다. 인간에게는 편안하게 지내고자 하는 욕구 또한 있기 때문인데, 이는 정념이 아닌 이성의 명령에 따라 나오는 명령이다. 이것이 자연법(natural law)이다. 이런 이완된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개개인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자연권을 똑같이 양도한다는 전제 아래 자신의 자연권을 특정한 대표자 즉 리바이어던에게 양도하는데, 이것이 사회계약이다. 이 계약을 통해 사람들은 사회상태, 시민사회(civil society)로 진입한다.

  따라서 홉스에게 사회상태란 자연상태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자연상태는 전쟁, 혼란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으며, 사회상태는 이런 요소들이 제거된 상태이다. 이론적으로는 하고 싶은 것을 실행에 옮길 권리가 모두 양도되었으므로, 사람들은 타인에게 마음대로 행동을 취할 수 없다. 또한 실천적으로는,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 하더라도 그 사회에서 리바이어던은 유일하게 자연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이런 피해를 입히는 체계가 규범 혹은 법률이다. 리바이어던은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인 동시에 그 사회를 규정하는 도덕적 규범 혹은 실정법적 법률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이성에 따라 피해와 이익을 계산해보았을 때 자신에게 올 피해가 더 크기 때문에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되고, 이것으로서 사회 전체가 서로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을 홉스는 평화 혹은 안전한 상태라고 보았다. 그에게 자연상태란 분쟁이 극에 달한 상태이며, 따라서 위와 같은 논리적 구조에서는 어떤 사회상태도 자연상태보다 더 분쟁이 심할 수 없으며, 안정을 보장받지 못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홉스는 자연상태를 벗어나는 것 자체가 평화와 안정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홉스에 따르면 사회상태는 위와 같이 자연상태와 날카롭게 나누어진다. 그러나 리바이어던의 출현이 ‘실제로’ 그가 말하는 사회상태의 평화와 안전을 향한 이행을 보장해주는지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경험적으로도 ‘여행갈 때는 무장하고, 여러 사람과 같이 가려고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문단속을 한다. (중략) 집안 아이들과 하인들을 어떻게 여기기에 금고 문을 잠가두는 것’이 확인되는데, 그가 예로 들어보인 이 모든 사례들은 리바이어던 - 규범과 법률을 지닌 정부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관찰된 것들이다. 자연상태 자체가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례를 보여주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가 자연상태로서 지적한 사례들이 모두 엄연히 리바이어던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한다. 

  또한 리바이어던이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물리적 강제에 국한된다. 계약의 내용은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지만, 이 계약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물리적 압력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추어볼 때, 리바이어던의 출현은 상대방의 권리나 심리적 동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연권에 입각해 행사하는 물리적 힘(능력)을 그와 똑같은 힘 또는 더 큰 힘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리바이어던은 그의 힘이 현실적으로 가해질 때에 출현할 뿐, 그 이외에는 공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순간은 모든 개인에게 자연권에 의해 보장되는 심리적 동기가 다시 출현하는 시간으로서, 논리적으로 자연상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리바이어던의 영향력은 연속적이지 못하고 분절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리바이어던의 존재론적 위상은 심각할 정도로 애매하다. 우선 그것은 정치공동체를 대표하고 그 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 타자이다. 홉스에 따르면 대표자는 독립된 인격을 지니며, 리바이어던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 모두에게서 권리를 양도받은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정치공동체 내부의 존재이기도 하다. 홉스는 ‘자기 자신과 맺은 계약이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의 판단과 집행을 거부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리바이어던은 모순적이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가 어떻게 정치공동체를 규합하고, 단일화시킬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결정적으로, 리바이어던을 둘러싼 모든 개념들은 비어있다. 리바이어던 자체도 인공적인 인격인데, 규범과 법률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유명적 정의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이 실제로 어떤 내용인지는, 즉 정의(justice)와 불의(injustice)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사회상태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기준 - 평화와 안전이라는 말도 결국 리바이어던이 내리는 규정에 따라 그 의미가 유동적이다. 그러므로 리바이어던의 권위와 판단에 따르는 것이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주장은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이 실제 어떤 모습일지 평가할 수 있는 메타적 기준은, 적어도 홉스의 체계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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