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로저 스크루턴 지음, 류점석 옮김 / 아우라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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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든 단 하나의 이유는, 철학자가 와인에 관해서 썼기 때문이었다. 와인은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어느 미디어를 둘러봐도 이른바 ‘먹방’은 가장 흔한 컨텐츠가 되었다. 먹방에선 품평이 빠지지 않는다(대체로 좋게 포장하는 쪽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문제일 뿐이다). 이른바 음식에 대해 평가한다는 사람들은 넘쳐나고, 이들 중 몇몇은 전국적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맛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분명히 먹는 것을 비평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런 비평들이 과연 철학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맛에 관한 철학적 담론은 가능한 것일까? 이는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다. 좋은 그림에 대한 철학적 기준은 대체로 어느 정도 표준이 잡혀있다. 이 표준들, 또는 이런 표준에 대한 연구를 우리는 대체로 미학이라고 부른다. 미학에 관한 철학자들의 글은 넘쳐난다. 그림에 비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좋은 음악의 기준에 대한 철학적 연구도 그럭저럭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한때 아도르노라는 철학자를 좋아했는데, 그는 근대성의 파괴와 합리성의 전복 그리고 상품화할 수 없는 난해함을 표현하는 노래가 최고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재즈를 매우 싫어했다, 같은 입장들. 하지만 맛에 관한 철학책은 정말 찾기 어렵다. 심지어 맛이라는 영어단어(taste)조차도 미학적 태도 전체를 아우르는 ‘취향(taste)’이라는 의미로 쓰이면서, 맛의 철학은 그 자리를 잃어간 것만 같다.


스크루턴의 글에서 나는 이 잃어버린 ‘맛의 철학’을 어렴풋하게 넘볼 수 있었다. 맛은 와인이라는 대상의 파생물이 아니라 맛 자체가 독립된 대상이다. 하지만 맛은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다른 관념들과의(특히 다른 맛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른 미학적 대상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직접 철학적인 개념들을 동원하는 부분보다는 오히려 각 지역의 와인에 관해 짤막하게 설명하는 2장의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맛’을 다루는 철학적 방식의 한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쓴 단어는 아니지만) 와인을 철학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총체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독특한(즉 고유한) 맛을 만들어내는 데 동원되는 자원은 객관적 방식으로 계측이 불가능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토질이 그렇고, 포도의 품종이 그렇고, 그 포도가 그곳에 흘러들어오기까지의 역사가 그렇고, 와인을 만들어내는 방식 - 오크통 나무의 재질이라든가, 숙성의 기간이라든가, 대충 넘어가는 화학적 변화라든가 등등 - 이 그렇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능숙하게 지적으로 다룰 줄 아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야말로 와인의 총체성을 제대로 ‘느낄’ 줄 아는, 이 세계 속에서 매우 독특한 지위를 지닌 개체들이다.


그럼에도 총체성이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이 또 없다. 이 글 전체에서 ‘와인’이라는 자리에 다른 것을 넣는다면, 예를 들어 탁주(혹은 청주나 소주)라든가, 맥주라든가, 위스키라든가, 코냑이라든가, 하는 대체어를 넣는다면 와인과 완전히 다른 담론이 탄생할 수 있을까? 설사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총체성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제작과정이라든가 탄생설화와 같은 부분적인 어떤 것에서 달라질 뿐일 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한다. 결국 그래서 ‘그건 맛있어요?’라는 질문에 ‘네, 맛있어요’라거나 ‘아몬드 향에 태운 오크 통의 향이 살짝 덧입혀져서 구수한 부르고뉴 와이너리의 전통이 영국 신사의 깔끔함과 섞인 절묘한 블렌딩이로군요!’ 따위의 알듯말듯한 말들만 늘어놓게 되지 않을까. 스크루턴 또한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경계의 존재론’ 같은 표현을 사용하다가도, 짐짓 모르는 척 허세가 섞인 (것 같아 보이는) 말들을 풀어놓곤 한다.


여전히 맛의 철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미지의 영역인데다가 어디에선가 표준적인 모형을 배울 방법도 경로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이 책조차도, 뭔가 본격적인 것 같지만 예비적 시도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 책에 인용된,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이 무척 보고싶어졌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분명히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스크루턴이 다른 술에 대해서 얕잡아볼 정도로 와인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가 있다. 맥주가 취향인 나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언사들을 마구 남발하는데,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이상한 저서를 쓴 이유가 와인이 아닌 맥주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든가 하는 것들. 또 다른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멋드러진 묘사 속에서 살아숨쉬는 와인들을 한 번쯤은 맛보고 싶어졌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된 와인들 대부분은 한 병 가격이 10만원을 넘어가는 비싼 물건들이라 나는 그저 침만 흘릴 뿐이다…)

와인은 위스키의 해독제다. - 토머스 제퍼슨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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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론 한길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43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성염 옮김 / 한길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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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가 『법률론』에서 보여주는 가장 재미있는 사고방식은 법(ius)과 법률(lex)의 구별일 것이다. 법률은 사회에서 실제로 제정돼 집행되는 중인 규칙을 의미하고, 법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이 가리키는 해야할 일 또는 해선 안될 일에 관한 법칙을 의미한다. 법은 법률을 구속하지만 동시에 법률은 법의 구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체로 옳다. 때로는 법에 어긋난 법률이 제정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이런 법률은 얼른 폐지되어야 한다고 키케로는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법은 인간이 지닌 이성이 가리키는 일이면서 인간의 본질인 이성이 가장 잘 구현된 대상으로 간주되기에, 법(률)과 법(률)을 따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일이다. 즉, 법은 다른 목적에 봉사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유용함 때문에 법(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그 유용함에 법이 방해될 경우 법(률)을 폐지하겠다는 선언이 되는데, 키케로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기껏해야 ‘약삭빠른(?)’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법률론』의 총 3부 중 1부의 논의는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2부에서는 1부의 논의를 한 번 더 반복함과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길고 지루한 설명을 시도한다. 이 부분은 내가 정말 이해를 했나 싶을 정도로 복잡하고, 그래서 대충 읽고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다. 제사에 대해서 이토록 복잡한 논의를 하는 까닭은 이 절차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중요했기 때문일텐데, 이 사실은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설이나 추석 때가 되면 허례허식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가? 이젠 ‘허례허식’ 담론 자체는 조금 덜한 대신 그 “예의”를 위한 노동의 편중 쪽으로 논란의 지형도가 바뀐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아마 제삿상이나 차례상 차리는 법에 관해서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우리도 이 정도의 이야기는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재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사람이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 때도 똑같았구나 싶은 것도 소소한 웃음포인트였다.


3부에서도 여러 가지 주제가 등장하지만, 눈에 띄는 토론은 두 가지다. 첫째는 호민관의 지위에 관한 것이다. 민중 전체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것 자체를 방지하기 위해 통령이라든가 원로원 등의 여러 의사결정구조를 설계했음에도 왜 다시 호민관을 통해서 민중 전체의 의지를 제도화해야 하는가? 키케로의 반대편에 서있는 퀸투스는 악행을 저지른 호민관의 이름을 나열하며 이런 현상이 이 제도의 필연적 결과임을 역설한다. 반대로 키케로는 몇몇 나쁜 결과들만을 놓고 제도의 선악을 논할 수 없음을 우선 강조하며, 호민관을 통해서 얻는 긍정적 효과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민중의 대표를 세움으로써 오히려 민중의 무질서한 정치적 열기를 잠재울 수 있고, 이들이 정제된 상태로 공동체의 의사결정과정에 반영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제도의 이름은 다르지만, 이런 기능은 현대에는 대체로 정당이 담당하는 기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여전히 정당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관해서 키케로가 지적하는(그리고 숙고했던) 갈등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신기하면서도 지금 우리에게조차 여전히 의미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눈에 띄는 다른 토론은 3부의 말미에 등장하는 투표에 관한 것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자신은 없지만, 키케로는 대체로 의사결정과정에서 책임자들에 한해 공개투표를 지향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국회의원들이 (또는 행정부와 사법부도 포함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지 공개해야 된다는 뜻일거다. 선거에 관해서 우리 사회의 상식에는 두 가지 직관이 충돌한다. 비밀투표를 해야 자신의 솔직한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는 직관과, 자신이 견지하는 입장이 떳떳하다면 자신의 입장을 굳이 가릴 필요가 없으니 투표는 공개적으로 해야한다는 직관이다. 우리 사회 또한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나름의 절충점을 찾은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절충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우리와 전혀 다른 사회를 살았던 사람들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타협점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키케로를 읽으며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을 흉내내는 쾌락이 모든 감관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를 기만하기도 한다네. 그것이 모든 악의 모체가 되지. 그것의 유혹으로 부패한 연후에는 사람들은 무엇이 자연본성상 선한 것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네. 자연본성상 선한 것들에는 이런 달콤한 맛과 매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지. - P93

무릇 사물을 비판함에 선한 점들은 제외하고 악한 점들만 열거하고 폐단들만 선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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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카다피와 같은 군부 출신이긴 하지만 카다피의 정치적 행보에 찬성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체포되었다. 그 와중에 카다피 치하의 몇몇 수용소에선 “정치범”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어떤 기록을 뒤져봐도 아버지의 생사는 확인되지 않는다. 아들이 이 생사를 확실하게 만들려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카다피가 어떻게 집권하고 정권을 유지했는지, 리비아 사람들의 삶은 어떤 식으로 바뀌었는지, 그를 대하는 이른바 선진국들의 태도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드러난다.






반면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좌파운동가 부모를 둔 딸의 이야기다. 부모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에 팔레비 왕정에도 아마 우호적이지 않았을 것 같지만, 호메이니의 종교혁명 이후 모든 종류의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정권에 더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다 견딜 수 없어 프랑스로 이주해 삶을 꾸려가는데,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딸의 시선으로 다뤄진다. 복장 제한과 일부다처제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여성차별,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은 리비아에서보다 더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딸은 부모의 행보에 대해 덮어놓고 우호적이지만은 않은데, 두 사람이 자신들의 신념을 딸인 자신보다 더 우선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책을 읽는 가장 첫 감상은, 나름 소설 또는 이야기라는 이 두 책의 원래 형식과 걸맞지 않게 “공부했다”는 느낌이다. 리비아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운동은 뉴스를 통해서만 접하던 내용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그 독재정치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에 저항한 사람들의 행적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마지디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호메이니가 일으킨 이슬람 혁명이 이란 사회 전체에 어떤 여파를 미쳤는지, 그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 상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두 책 모두의 배경이 우리가 아랍이라고 묶어서 부르기 좋아하는 어떤 사회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세속주의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확실히 한 쪽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점만은 분명한 공통점이었다. 정치적인 의사표현, 자유로운 학술활동, 모든 것이 정부의 검열대상이었다. 남자였던 마타르에게선 드러나지 않았던 성차별적 억압이 마지디의 글에서 전면에 드러나는 것 또한, 책을 단순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일종의 “깨알” 포인트이기도 했다.


문화로 보나 거리로 보나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의 거의 끝에 자리잡았다는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에 공감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각각 그 이유는 석유와 지정학적 지위로 서로 달랐지만, 2차 대전 이후 펼쳐진 냉전과 연장된 식민주의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민주적으로 집권한 정부도 독재를 일삼았는데,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도 독재를 했다는 것은 굳이 말해봐야 입이 아픈 사실이다. 그에 대항하던 수많은 정치적 반대자들이 불구가 되어 살아가거나 남산의 핏빛 이슬이 되어 사라졌다. 반대자들의 아내와 아들딸들은 한편으로는 정부의 행각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편하게 마음을 둘 공동체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어찌할바를 모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억압의 무게는 모두에게 똑같이 무거웠지만 여성에겐 훨씬 더 무거웠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두 책이 모두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마지디보다 마티르의 책이 더 흥미로웠다. 모르던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미리 알았던 내용이 있다면 영국의 (노동당 간부들을 비롯한) 고위층이 카다피의 독재를 못본 척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당 정치인들의 산실인 명문대학 런던정경대에서 카다피 정부의 비자금으로 학술활동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 때도 미친 놈들이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아부살람 학살 사건을 비롯해 독재정부가 해야할 것은 빼놓지 않고 다 했었던 카다피 정권의 맥락을 고려하니 정말 상종못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치적으로 좌파라고 자부하고 다니는 사람의 입장에선, 좌파가 저러고 다녔다는 게 너무 슬프고 짜증난다…)

















반면 이란에 관해선 예전에 비슷한 만화를 본 적이 있었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라는 만화다. 사트라피가 이란의 전통과 문화에 좀 더 우호적인 것 같긴 하지만(더 정확하게는 1세계 백인 페미니즘의 잣대로 이란을 보지 말라...는 정도였다), 어느 작가의 관점으로 보든 이란의 체제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마지디의 글은 내게 이란에 관한 어떤 대체불가능한 경전이 될 것 같다. 아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선을 동원해 이란 사람들의 삶을 사트라피에 비해 좀 더 내밀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상투적인 말로 글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소설이나 소설적 요소가 섞인 논픽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찾아읽을 생각도 잘 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 두 권을 그야말로 따로 나가는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출간이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을 종류의 책이었다. 게다가 읽었더니 (여러가지 의미에서) 재미있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독서모임하는 재미 중 중요한 어떤 요소를 다시 깨닫게 된 계기랄까? 그래서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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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 고기를 굽기 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철학적 질문들
최훈 지음 / 사월의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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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하는 철학자는 이중의 부담을 떠안았다. 첫째는 채식이 취향이 아닌 윤리라는 점을 논증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꼭 그래야하는 것인가 싶긴 하지만) 채식에 대한 자신의 주장과 자기 생활의 모습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고기를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수행한다는 것은 꽤나 부담일테다. 첫째를 시도하면 인신공격이 들어오고(자기 취향을 강요하는 나쁜 사람), 둘째를 시도하려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또 다시 인신공격이 들어온다(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그래서 철학적으로 채식을 논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못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이 저자는 학문의 영역에서 채식을 다루는 몇 안되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또 채식의 근거로 공리주의라는, 윤리적 판단에 있어서의 대원칙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그 입장은 이 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의 모든 주장과 논증에 있어서 ‘고통’을 줄이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줄이는 행위는 대체로 옳은 행위이고, 고통을 늘리는 행위는 그르다. 그른 행위는 하면 안되는데, 육식은 고통을 늘리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


육식은 다양한 방향에서 고통을 늘린다. 우선 죽음을 가져오며 고통을 늘리고, 사육환경을 동물에게 맞지 않는 방식으로 개조함으로써 고통을 늘린다. 사람에게 돌아갈 곡물을 동물에게 비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동료 인류의 고통을 늘리고, 상대적으로 유해한 것처럼 보이는 고기를 생산함으로써 그것을 먹는 개인의 고통을 늘린다.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가 윤리적 판단에서 어떤 대원칙을 갖느냐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공개적인 공리주의자이다. 이 글을 쓰기 방금 전 저녁으로 설 명절에 사용하고 남은 갖가지 전들 - 햄이 들어간 꼬치, 동그랑땡, 새우튀김, 육전 - 과 삶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살면서 한 번도 채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도 없다. 하지만 저자의 모든 논의에 동의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속적으로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그 안타까운 지점인데, 스스로를 나쁜 사람이라고 쿨하게 인정하고 싶지만 사람은 원래(본성적으로!!!) 그렇지 못한 존재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이 책의 논의에서 구멍을 찾으려고 애썼다. 동물의 고통을 확인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추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추정의 근거는 행동이다. 행동을 통한 추정에는 상상이 너무 많이 개입할 뿐만 아니라, 저자가 물고기에 대해서 논할 때처럼 추정된 대상이 실재하는가에 대한 그럴듯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축산업에 대한 논의는 ‘그래서 “과학적” 생산을 포기하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이것 또한 인류의 진보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오히려 가리지도 않고 남김없이 다 먹어치우는 것보다야 종이 한정적인 게 낫지 않을까? 인격동일성 논의를 우격성(동격성이라고 해야할까)에 적용해서 고통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대체 어떤 함의가 있을까? 등등의 생각들.


하지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다, 어느 순간 인정해야만 했다. 그냥 나는 나쁜 사람이다. 공리주의자인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 문제는 저자가 언급하는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 ‘아크라시아’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 같다. 육식하는 사람은 진짜 공리주의자인가, 육식을 하면서 동물의 행복을 인정한다고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편들든 간에, 결국 나는 동물의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거나(못하거나) 동물의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즉,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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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고전의세계 리커버
르네 데카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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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증명 방식은 21세기의 감각에서 봤을 땐 어느 모로나 뜯어봐도 참 상식에서 벗어나있다. 외부사물의 의심까지는 그렇다쳐도,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선성,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 신의 착함에 대한 증명, 그 뒤에야 우리가 흔히 ‘물질’이라고 부르는 어떤 세계(대상)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는 것까지. 반대로 나는(혹은 이 시대의 일반적 감각은) 외부의 사물을 의심하지 않고, 정신은 결코 육체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신은 착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한다고도 말하기가 어렵고, 세계의 모든 것은 물질이라는 형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사상의 역사 속에서 근대 - 그러니까 우리의 세계 - 를 만들어온 사람으로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그 말이 딱히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내 정신에 대한 탐구 과정 속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존재는 인간이었다. 그 과정을 글로 남겨 출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따라하게 만들어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인간에 대한 탐구 속에서 인간이 가장 먼저 등장하길 고대했다. 그가 생각한 인간은 다름 아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그 생각을 잘 벼려야 우리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구실을 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것들은 시체(즉, 몸으로서의 인간)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정신을 이용해 몸(즉 물질)으로서의 세계를 잘 연구하면, 그것이 과학이 된다.


그가 생각하기에 과학적 활동은 인간의 정신이 짊어진 일종의 의무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과학이야말로 의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손톱보다도 더 작게 보이는 해는 실제로 지구의 몇 십배도 더 된다. 한 개의 작은 점으로 보이는 별들은 사실 그보다도 더 크고, 더 밝다. 우리의 몸보다 몇십만분의 일 정도로 작은 것도 우리의 발 밑에선 생물이랍시고 꿈틀거리고 있다. 이처럼 탐구, 발견, 창조성 같은 것들은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을 포함한 육체성(?)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발상의 전환으로 마무리된다. 결론으로서는 현대인의 감각에 맞지 않지만 신념으로서는 현대인의 감각에 맞는다는 것, 나아가서는 인간으로서 꼭 가져야 할 태도라는 것이, 이 케케묵은 책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가치라면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PS. 번역본에 대한 이야기는, 읽어본 '인상'으로만 따질 때에는 이것보단 이현복 번역본이 나은 것 같긴 하다. 먼저 읽은 것에 대한 익숙함의 문제일까? 나중에 본격적으로 비교해볼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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