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한 줄 요약: 오랜만에 선동적 정치 팸플릿을 읽었더니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지고 기분이 좋았다.


서문


20세기 초반 인류의 경험은 법의 지배와 물질적 평등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확립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 차원에서, 권리나 자유 등 계약의 결과물의 차원이 아니라 존엄성의 차원에서 평등을 이해해야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고방식에 기반해 필라델피아 선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인권선언과 브레튼우즈 체제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상품이 아닌 방식으로 노동을 존중하고, 개인의 개별화에 맞서 연대를 제도화하며, 비계급적 타협의 정치를 억제하고 사회적 민주주의를 회복하며,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집단적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필라델피아 정신의 요점이다. 이 정신은 법의 지배를 확립함으로써 구현된다.


1-1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이후, 이 지역의 엘리트들은 도구적 국가라는 관점에 부합하는 신자유주의를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또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과학화”한다는 이름 아래 조직원리를 민주적 토론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창조된 질서인 신자유주의적 제도를 진리로서 이해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상은 “자생적 질서의 탄생”이라는 지향점을 내세웠던 하이에크의 철학에서 드러나지만, 그 논리는 내적으로 자생적 질서의 탄생을 위해 기존의 규범을 공격하고 해체한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의 귀결은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통한 엘리트들의 이윤 뽑아먹기, 엘리트의 이해에 그야말로 충실하게 복무하는 국가정책의 결합이라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독특하고 파괴적인 체제의 탄생이다. 이것을 극단적 자유주의 반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1-2 복지국가의 사유화


사회정의의 개념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비례성에 기초한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즉, 많이 받으면 많이 토해내야 한다. 그러나 많이 가진 자들은 사회/정치/경제적 권리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체계적으로 “토해내지 않게” 만들 가능성 또한 갖고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집단적 합의”를 통해 형성된 사회보장(법)이다. 하지만 최근의 경향은 “마태효과”, 즉 사회보장이 가장 필요없는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의 손길이 가장 많이 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기업에서의 노동강도는 무제한으로 증가한다. 공기업과 공공서비스는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처럼 보이는” 사기업화의 압력에 시달리고, 그에 따라 불친절과 불필요가 다시 불친절을 낳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 악순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제도가 연금과 의료보험이다. 엘리트들은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를 통해서 손실을 사회하고 이익은 사유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1-3 시장전체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정치경제적 “고안물”이다. 지속가능한 인간적 삶을 위해서 자연, 노동, 화폐는 상품으로 취급돼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재의 시장전체주의는 이들마저 상품으로 취급하려는 지속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는 정치경제적 고안물의 목적을 인간의 삶의 보장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결과다. 이런 목적의 전도는 WTO 마라케시 선언과 필라델피아 선언을 비교할 때 뚜렷하게 드러난다. 마라케시 선언은 교역의 정량적 증가를 목적이라고 말하는 반면, 필라델피아 선언은 삶의 질의 상승이 목적이라고 명시하기 때문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WTO의 목표는 점점 더 관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화 현상은 기업 간의 경쟁이 아니라 국가 간의 제도경쟁을 부추기며 “입법 시장”, “국가 쇼핑”을 만들어냈다. 즉, 재화를 거래하는 체계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규범을 바꿀 것을 역설하고 강제하는 것이 자유시장제도의 본질이다(라는 것을 하이에크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1-4 계량화의 환상들


인간이 물리적 존재로 계량화돼 해석되는 세계가 도래했다. 이전에 인간은 통치의 구조 아래 놓이는 존재였지만, 현재는 계량화된 수치를 통해 효용을 스스로 올리려고 노력하는 자기규율의 존재가 됐다. 즉 수치는 자기규율의 근거다. 이런 현상은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정책(의 결과)의 계량화와 비교평가, 모든 지역의 모든 것을 지표로 만드는 노력에 의해 시장전체주의에 속도가 붙었다. 수치로 평가하기 어려워보이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수치로 나타낼 수록 사람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이 수치화는 이질적인 것을 통합해 동질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수치화 이후 정책의 목적은 이 “보이는” 지표 자체를 개선하는 것으로 전도됐고, 숫자를 통해 사람들의 행위를 규율하는 “협치”가 탄생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지표를 설정할 때 개입할 상위 규범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것이다. 숫자는 표현의 도구이지 평가의 도구가 아니며, 이것을 망각할 때 “사실의 거짓말”에 빠질 수 밖에 없다.


2-1 한계의 기법


시장전체주의는 보편성에 대한 잘못된 요구를 이끌어냈다. 개별적인 사회/문화/역사적 조건을 갖고 있는 각각의 법체계 사이의 차이와 전개의 과정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시장전체주의가 정착했다. 이에 맞서는 정치운동 중 하나는 공동체의 규범(=법) 자체를 우회해 “나의 자리”를 요구하는 정체성 정치인데, 이는 법이 구속하지 못하는 영역(=법으로부터 개인의 이탈)을 발생시키는 시장전체주의의 귀결 중 하나다. 법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탄생한 것은 봉건 시대에 왕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 즉 봉건 영주의 영역의 탄생과 비슷하며,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 엘리트들을 현대의 봉건 영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전세계가 상당부분 이런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부정하긴 매우 어려우며, 따라서 법은 “창문”의 역할을 한다. 바깥을 볼 수 있으면서도 원하는 때에 그 문을 세계화의 여파를 막도록 문을 닫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2-2 척도의 의미


척도는 사실성과 규범성을 동시에 지닌다. 규범성의 영역에 사회정의라는 목적을 도입할 수 있고(도입해야 하고), 이 목적의 설정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달성돼야 한다는 제한을 둘 수 있다. 자유주의적 세계는 한동안 사회정의라는 목적 자체에 회의적이었고, 법은 탈목적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런 탈목적론은 불평등의 심화,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의 근본적 악화를 불러왔다. 사회정의를 되살리기 위해선 1인1표의 자유주의적 접근이 아닌 1집단 1표의 사회적 민주주의 방식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근본적 차이와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규범성의 설정에 참여함으로써 척도에 대한 물신주의와 과학적 관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개입이 적용될 영역은 회계, 지표, 통계가 될 것이다. 이들 지표가 사회정의라는 목적에 부합하게끔 변형시켜야 한다.


2-3 행위능력


행동을 위한 반응이 아니라 행위를 위한 자유와 통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시장전체주의는 자유의 의미를 왜곡한다. 24시간 일할 자유는 있지만 일하지 않을 자유는 없는 것이다. 20세기의 세계는 고용을 보장함으로써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는 포드주의 합의가 사회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세계화 이후의 세계는 이러한 합의를 유지할 수 없게 변화했다. 따라서 현재 인간의 삶의 보장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노동담지성’, 즉 역량(능력)이 있다는 사실 자체다. 즉, 일을 하는 조건을 유지함으로써 행위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존중함으로써 행위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국가는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법적 제도를 마련해주게 되는데, 모순어법같은 “유연안정성” 모델이 참고할만한 사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충분하진 않다.


2-4 책임의 부과


책임엔 책임자, 요구자, 중재자(보장자)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책임은 응답과 이행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책임의 구성요소를 만족하지 못한다. 우선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유동화해 주체로서의 지위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또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런 유동화와 책임회피에 맞서기 위해선, 생산의 측면에선 기업의 집합적 연대책임이라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유통의 측면에선 모든 영역에서의 원산지 표시제를 시행해야 한다. 이는 초국적화를 통해 국가 차원의 사법적 통제를 피해가려는 기업과 엘리트들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작동할 것이다.


2-5 연대의 고리들


연대의 원칙은 “비계약적 협력의 형식”이며, 이것을 명문화하면 사회보장제도가 탄생한다. 이 탄생은 “인생의 빚”이라는 철학적 개념에서 “의무”라는 정치적 표현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함축한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보장제도는 무형의 세대간 연대를 금전적 관계로 대체해 이해하게 하는 효과를 낳았고, 오히려 연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하기도 한다. 또한 열악한 의료보험제도도 개인간 연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며, 따라서 개혁이 필요하다. 새로운 연대의 형식을 모색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요소는, 현재까진 국가적 차원에서 작동했던 연대가 국제적 규모로 확대되어야 할 시간이 됐다는 점이다. 이 연대는 기업이 초국적 차원으로 확장됐다는 현실과, 국가간 격차로 인한 갈등과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로부터 동시에 도출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8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들어서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의 내용을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배심원과 대중에게 그대로 털어놓았을 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거짓말로 죽음을 피하려들지 않았고, 자기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음으로써 자발적으로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죽음에 대해 의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렇게 의연한 모습을 보이기에 25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그 기록이 남아 우리에게 읽히고 있지만, 그에게도 여러 갈등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그는 자신의 삶 전체와 일관된 선택을 내렸고 이를 수행하는 데 충실했다. 사소하지 않은, 아주 중대한 차이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죽음이 함축하는 의미에 관해 생각하다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우리는 아테네를 현대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배운다. 책에서도 나오듯, 이곳은 심지어 재판마저도 사람들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는 곳이다. 몇몇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이 체제가 나쁘게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배우긴 하지만, 어쨌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제라는 점은 상식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근본적 전제는 진리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찌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하고 재판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그 공동체는 우리가 소속감을 가질만한 자격을 갖춘 곳인가? 모른다는 것은 사실과 진리를 모른다는 것인데, 그것은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결과와 소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설령 우연히 우리가 원하는 효과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를 용인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올바른 태도일까. 소크라테스는 단연코 아니라고 답한다.


그래서 변론 속에는 어쩌면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지도 모를, 하지만 인간의 근본적 조건으로서 항상 이고 살아야하는 대립이 표현돼있다. 장르로 따지면 철학과 정치의 대립이고, 입장으로 따지면 진리와 민주주의의 대립이다. 아테네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철학과 정치의 아이콘을 단죄한 것인데, 이것을 그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배심원들을 도발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차원을 뛰어넘었다. 그렇다고 진리를 독점한 자들이 독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소문으로든 변론으로든 그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도, 그래서 유/무죄 평결에서 소크라테스의 손을 꽤 많이 들어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변론』을 읽고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진리의 편을 들어주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철학이라는 활동 자체가 진리를 탐구하는 소크라테스적 방법에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지만 동시에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진리의 유혹에 시달린다(?). 어떻게 이 두 가지 소중한 가치를 소크라테스처럼 잘 조화롭게 세워놓느냐가,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한 관건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이름도 유명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다. 꼬박 1주일이 걸렸다. 두툼한 책, 빽빽한 글자에 정보량도 엄청나게 많은 책이라 펼치기만 하면 자꾸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하루에 100페이지씩은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는 5~60페이지씩만 읽어가면서 어떻게 어떻게 끝맺기는 했다. 이렇게 도전적으로 책을 읽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유독 이 책은 더 심하게 오래 걸렸다.


그렇게 열심히 읽은 결과는, 한 편으로는 생각보다 싱겁다. 이 책은 정말 그야말로 보고서이고, 기사다. 누가 어디서 무얼 했고 그는 누구와 관계가 있으며 이런저런 정책의 실무진으로 활동을 했는데 그 정책은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고 그 아이디어가 나오기까지는 책임자 선에서의 권력암투가 있었는데 그 둘의 다툼은 누구누구와 연결돼있고… 하는 이야기의 끊임없는 나열이다.


이 책에서 나온 개념으로 유명해진 이른바 악의 평범성에 관해서도, 이게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15장까지 사건을 보고하는 내용을 죽 보여준 뒤에, “이게 악의 평범성이다”라는 문장으로 글이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 악의 평범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추적할만한 단서가 제공되긴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설명이란 이 책에 등장하는 몇몇 폼나는 단어들을 몇 개 이어붙여서 만든 가짜설명이라는 게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 확실해졌다.


읽으면서 내가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당시 유럽 전체가 얼마나 반유대주의에 물들어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중간 부분에서 아렌트는 독일 본토 및 독일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던 지역에서 유대인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국가별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독일이 저지른 것마냥 반드시 유대인을 이 지구에서 축출해버려야겠다는 정도의 태도는 아니었지만, 상당수의 독일 주변국들은 각자의 경제/정치/사회적 이유에 따라서 유대인을 2등 시민으로 대우했다. 그 국가들 중 몇몇은 독일이 “최종해결책”을 선포했을 때 매우 협조적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차별정책에 명백하게 반대의견을 표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행동에 나섰던 국가는, 이 책에 따르면 덴마크가 거의 유일하다.


그 와중에 1등 시민 대우를 받았던 부유한 유대인들과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 중 일부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는 없겠다. 물론 여기에는 고려해볼만한, 약간의 맥락이 있긴 하다. 반유대주의의 거울쌍으로 탄생한 시온주의의 영향 덕분에, 어떤 유대인들은 실제로 독일(과 유럽)을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했고, 이들은 유대인을 지배지역 밖으로 이송하고자 했던 독일의 초기 유대인 정책에 실제로 “협조”했다. 추방당하는 유대인들은 거의 전재산을 몰수당하는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었음에도 그랬다. 아마 이들 중 일부는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최종해결책”으로 변화한 것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이송” 과정에 협조했을 지도 모른다.


또 하나 주목했던 부분은, 일종의 총체적 엉망진창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어떤 사회적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의 정신과 기억이 뒤죽박죽이어서,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정말 힘들다. 행정기록과 다른 증인에 의해 확정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자신의 권한을 부풀려서 말했다가도 그 점이 불리하게 작용할 때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고 발뺌하기도 한다.


책 안에서 복원된 독일의 분위기도 혼돈의 도가니다. 유대인에 대한 첫번째 공개적 차별정책인 소개령 자체도 “이게 말이 되는 정책인가?”라는 의구심을 자아내지만, 그에 협조하는 유대인도 있고, 이때다 싶어 신나서 날뛰며 소개령을 거부하는 유대인을 죽이러 다니는 독일인도 있고, 뒷돈을 받고 유대인의 책무(?)를 면제해주는 증명서를 발급해주거나 이송목록에서 제외시키는 관리도 있다. 뒷돈 액수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적게는 인당 50마르크에서 많게는 1만 마르크까지 치솟는다. 아이히만을 둘러싼 명령체계도 일관성있게 잡혀있지 않으며, 정부의 각 부처들은 힘겨루기에 골몰하고, 무엇보다도 최고통수권자였던 히틀러의 명령도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히는데, 당연히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속에서 아이히만은 혼란한 정부의 상태를 탓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아렌트가 하고 싶었던 말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 도덕적 악은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집단, 좋은 사회에 대한 지향점이 확실하지 않은 공동체에서 발생한다. 이런 집단은 개인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이 혼자 수양과 반성을 통해 도덕적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며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만 그 기준을 얻을 수 있다. 도덕적 지향이 없는 집단 속에서 지내다보면, 그 안에서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나의 일상을 열심히 꾸려가는 사람은 그 어떤 자각도 없이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악은 때로는 평범의 옷을 입고 자행되고, 이것은 개인이 어떻게 용을 쓴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렌트는 분명하게 덧붙인다. 자각이 없어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악이다. 자각이 없었다는 것이 악행을 저지른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개인이 악을 저질렀다고 선언하는 것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작업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책임을 묻는 작업이다. 그래서 아렌트 또한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UN 사법재판소, 즉 “인류의 법정”에 갔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그가 인류의 법정의 시선을 가졌더라면, 인간성에 대한 깊은 고려가 동반되었더라면, 공동체를 향해서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배려하라고 요구했더라면, 아우슈비츠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 종교사 논형 일본학 18
스에키 후미히코 지음, 백승연 옮김 / 논형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은 다른듯 하면서도 우리나라와 닮은 구석이 참 많은 것 같다. 일본의 종교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다룬 이 책을 읽고 난 첫 느낌도 그렇다. 종교 부분에서도, 이 사람들은 우리와 유사한 어떤 길을 밟아왔구나. 혹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형성된 이른바 ‘고층’이라는 관점이 식민지 시기 동안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에 알게 모르게 적용된 것을 내가 어디에선가 배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유사한 것인지, 아니면 관점에 의해 유사성이 발견되는 것인지 가리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다.


신불습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부터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독자성, 고유성, 정체성이라는 한 묶음과 보편성 사이의 대립. 국사 시간에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유불도(선)의 통합 어쩌고, 중국의 사상적 전통과 구별되는 한국 고유의 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저쩌고 같은 말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기시감 속에서도 흥미로웠던 것은, 독자성, 고유성, 정체성이라는 범주 아래 놓인 것들이 실제로는 불교의 영향이 없이는 성립조차 될 수 없었다는 것, 고유성이라 불리는 것 속에 이미 불교적 색채가 진하게 녹아있어 우리의 시점에서 그 둘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견해였다. 두 범주 사이의 대립은 그래서 정치적인 것이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함축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의미에서 글쓴이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표현을 빌렸다는 ‘고층’이라는 비유가 정말 적절하다. 땅의 각 층은 분명히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땅 전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각 층이 서로가 서로의 성분을 일정 정도 공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층도 단일한 물질로 이뤄져있지 않고 여러 흙의 혼합으로 형성돼있다. 사상사가는 마치 지질학자나 고고학자처럼, 그 땅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탐사하면서 땅 전체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그 모습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가 딛고 서있는 땅의 모습과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불분명하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의 기반이기에 탐구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 그 탐구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방향이 정해지는 그 무엇, 그것을 ‘고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약간씩 다른 경로를 걷긴 했더라도, 불교의 수입, 중국에서 송나라 이후에 발전한 신유학의 유입, 15세기 이후 기독교의 전파, 18세기 이후 다양한 사상사조의 침공(?)에 대응하는 모습에서도 공통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든 지배이념에 복무시키고자 하는 권력층의 행동도 그렇고, 기존의 신념체계에 타자를 유연하게(때로는 격렬하게) 받아들이는 이른바 민중들의 분위기도 그렇다. 이런 점은 사상사가 아니라 종교사이기 때문에 고찰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상사라면 입장들의 논리적 정합성과 이론적 논쟁의 승패만을 가리면 되지만, 종교사이기 때문에 그 입장들이 사람들의 삶과 얼마나 호응했는지 고려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근대 시기에 들어서면 더 많이 들어본 이름과 더 많이 보았던 사건이 배경으로 펼쳐진다. 우리와 일본이 모두 (강제로) 세계사의 일원으로 편입되면서 생긴 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일본에서도 있었다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똑같이 한국에서 있었던 (그리고 국사시간에 배웠던) 논쟁을 생각나게 하고, 신도가 종교냐 하는 논쟁은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오래된 사찰에 국고보조금을 줘야 하는가에 관한 우리나라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입장에선 종전일인 매년 광복절마다 논란이 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문제에 대한 논란과 그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생각해보면, 일본의 종교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아직 살아숨쉬고 있는 현재진행형 안건이다.


<XX사>라는 딱딱한 제목을 지닌 책이 그러하듯, 쉽게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주제이긴 하다. 이렇게라도 압축적으로 읽어둬서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숨그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수용소에서 보낸 5년을 보낸 사람의 삶을 다룬 소설이다. 그러나 무심결에 초반 여러 페이지를 넘기면서 읽을 때는 “수용소”라는 단어에서 으레 느껴지는 어두움과 참혹함이 없다. 밝고, 아름답고, 반짝인다. 300페이지가 넘는 시를 읽은 기분이다. 이 글이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천천히 곱씹어봐야만 아, 이런 상황이구나 알 수 있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첫번째 이유다.


이 정도는 독자라면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는 일종의 문학적 전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숨그네>의 경우엔, 문장에 가득한 긍정의 단어와 그 조합이 만들어내는 비참함 사이의 낙차가 어마어마하다. 하나하나 꾹꾹 눌러썼다는 표현만이 어울리게 꼼꼼히 지어진 문장들 속에서 생각의 길을 잃고 헤메다보면 주인공 레오의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정상세계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소설의 밖으로 튀어나간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두번째 이유다.


수용소라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레오는 배고픔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배고픔만 남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아니다. 수용소가 사람들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무엇을 빼앗아가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유라느니, 존엄성이라느니, 수치심이라느니, 이런 추상적인 단어들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정상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이런 추상체들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겐 진짜 이름이 없다. 수용소가 이들을 빼앗아갔을 때에는 빼앗겼다는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성이라는 기호가 가리키는 그 덩어리가 흐트러져 버렸다는 사실은 설명될 수 없다. 묘사라는 먼 길을 통해서만 힘겹게 가닿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세번째 이유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면 내가 아니라 사물이 눈에 들어온다. 비루한 인격은 내 곁을 감싸는 물건들 속으로 한 조각씩 들어간다. 이제 나는 그 물건들 없이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내가 삽을 사용하지 않고, 내 옷에 시멘트가 붙지 않으며, 내가 침대에 눕지 않는다. 내가 곧 삽이고, 내가 곧 시멘트이며, 내가 곧 침대다. 나는 더 이상 내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이것을 끝내주지도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그것을 삶에 대한 희망이라고 부르겠지만,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네번째 이유다.


레오는 5년째 되는 날 수용소에서 나갈 수 있었다. 탈출은 아니고, 강제노동의 재편성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이었다. 수용소에 가는 것도, 수용소에서 나오는 것도, 그 무엇 하나 나와 관련돼 결정된 것이 없었다. 육체는 소련이 내쫓았기 때문에, 정신은 아직도 수용소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다. 내 역사의 일부이기에 짊어져야 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짐이다. 사회는 그대로 있고, 그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다섯번째 이유다.


강제노동의 수용소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군에서 보낸 2년을 생각해본다. 군에 대한 담론은 넘쳐난다. 너무 넘쳐나서 아무도 그에 대해 적절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 시간을 보낸 모든 사람의 마음엔 꺼내지 못한 혼란스러움만 쌓여있다. 낮아진 지능으로 자주, 대상이 잘못된 분노로 가끔 나타나야만 그 어지러움의 존재 내지는 인격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난 <숨그네>가 그런 종류의 상처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 강도는 덜하다 할지라도, 레오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전국민의 3~40%인 이곳은, 어떤 곳일까 생각해본다. 이 책의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는 마지막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