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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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하나씩 있다. 익숙한 것은 공동묘지 주변을 떠도는 여러 존재들에 대한 묘사다. 뭔가 굉장히 독특한 것처럼 묘사를 해놓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한을 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다 가끔 긴머리에 소복차림으로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원혼들이 이 이야기의 주연이자 조연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듣는둥 마는둥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데 바쁘다. 자신의 억울함에 몰입하기 바빠 다른 영혼들의 이야기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쪽에 훨씬 더 가깝다. 원혼들이 이렇게 난리를 치고 이 소설은 그것을 아무런 정제 없이 날것으로 보여주는 바람에, 글을 처음 읽어내려가는 수십 페이지 동안은 대체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인지 조그마한 감조차 잡을 수가 없다.


반대로 낯선 것은, 이 공동묘지가 위치한 장소가 조선이나 고려의 어느 고을이 아니라 19세기 미국, 남북전쟁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말을 내뱉은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아들을 묻으러 온 링컨을 보며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한다. 죽은지 오래된 사람들은 저 사람이 무슨 대통령이냐며, 자기가 죽을 때는 정치인이었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원혼들 사이에서도 흑백이 나뉘어, 마치 묘지 밖에 세상에서 그런 것 같이 이들 또한 나름의 남북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도 있다.


왜 이들은 여기에 남아있는가? 그냥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냥 죽을 수 없는가? 무덤 바깥 세상에 미련이 남을 수 밖에 없는 황망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영혼들이 떠드는 말은 대체로 자신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죽음의 과정, 이유, 상황 같은 것들에 대한 나름의 일장연설과 해석들.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울려퍼지지만, 그 소원은 성취되지 못하고 모든 영혼을 돌아 그 자신에게 메아리로 돌아온다. 보태고 얹어진 다른 영혼의 사연은 자신과 무관하다보니 그저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이 영혼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해 이야기한다. 살아있을 적의 기억, 사실과도 다른 기억, 불확실함을 메우기 위해 횡설수설 해야만 하는 기억, 가끔은 잊어버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 기억. 그럼에도 영혼이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무덤 바깥의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의외로 허약한 병자-상자(관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속 차갑게 식어 하얗게 굳은 몸은 나였지만 더 이상은 내가 아니다. ‘나’임을 호소할 때, 나’임’을 주장할 때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제 기억 뿐인 것이다.


이 글 안에서 기억이란 주제를 잡아내는 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영혼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록도 함께 실려있다. 대통령 링컨에 관한 이야기, 그의 죽은 아들 윌리에 대한 묘사, 윌리가 죽은 날 밤 열렸던 파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전언, 이 사건에 대한 세간의 평가. 모두가 모순으로 가득하다. 천방지축이면서 품위가 있었다는 윌리, 못생겼지만 잘생긴 링컨, 화려하지만 아이를 죽이고야 만 그날밤의 파티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살아있는 사람과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에서 기억에 의존하는 일은, 영혼들이 기억에 집착하는 마음 만큼이나 애처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기억이란 현상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은(못한) 자들, 즉 살아있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죽은 자들에겐 기억이 없다, 기억을 말할 기회조차 빼앗기고 어딘가로 잡혀가거나 끌려간다. 반대로 죽음을 거부하고 무덤가에 남은 원혼들은 원혼이 되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까 기대하며, 아버지 에이브러햄 링컨과 뭔가 나눈 것 같은 자그마한 느낌을 주는 윌리에게 몰려가 각자의 사연을 토해내려 애쓴다. 이건 비단 무덤가의 원혼들에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나 한 번도 사람으로서 대우받은 적이 없었던 흑인 노예의 말이 살아있음과 기억의 연관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남을 위해서 일하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없어요, 좋은 주인을 만나 꽤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을 때, 내가 뭘 했는지 기억이 나요,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궁금해졌어요, 24시간을 이런 느낌을 갖고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수많은 사람의 기억이 일관성 없이 동시에 튀어나오는 것이 이 소설의 형식적 특징이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우리의 기억을 아무런 정제 없이 그대로 옮긴다면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지 않을까? 기억이란 의식의 흐름의 저장, 관념의 이동의 박제이니 말이다.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런 방식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집중 없이 일독을 하다가 무척이나 헤맸다. 다 읽지 못하고 덮어버리다, 잠시 책과 거리를 두었다가 다시 펼쳐보았다. 그래, 결국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란 이런 식이지. 복잡하고 뒤죽박죽하고 앞뒤도 맞지 않고 서로 다른 요소가 각자의 이야기만 악다구니처럼 하는 것의 총체. 그럼에도 살아있다는 증거. 찬찬히 뜯어보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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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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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개소리에 대한 책이다. 다른 어떤 소재도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책도 무척이나 얇고 짧다.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이다.


이 책의 목적은 <개소리>라는 단어의 개념을 개략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프랭크퍼트는 개소리가 아닌 것들과 개소리를 대조하며 개소리에 다가간다. 개소리는 협잡과는 다르다. 협잡은 거짓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와 거짓말 사이의 관계를 전달하려는 것 즉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척을 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반면 개소리는 그걸 사실이라고 믿는 척 하는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개소리는 마구 말한다는 인상을 주는 단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는데, 세심한 개소리들도 세상엔 많기 때문이다. 개소리는 실수와도 다르다. 실수는 잘 말하려고 했는데 잘못 말한 것이지만, 개소리는 잘 말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개소리는 거짓말과도 다르다. 거짓말은 사실들의 집합과 정합적이지만 사실이 아닌 문장을 끼워넣는 것이지만, 개소리는 정합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비교를 통해서 프랭크퍼트는 개소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생각없음”(p.34)에서 기원하는 말, 또는 “진리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언어사용(p.37). 개소리는 사실상 입김(더운 공기hot air, p.45)에 불과하며, 어떤 목적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 같고, 꼭 거짓말일 필요도 없다. 이 차이는 거짓말과의 대조를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프랭크퍼트는 주장한다. 거짓말은 적극적으로 거짓을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진리를 존중하지만(p.53), 개소리는 아예 진리와 무관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용어를 빌리면, 개소리는 “거짓말을 사랑하는 사람들”(p.63)이 내뱉는 공기의 파동(!)이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진리’라는 개념, 문장은 참과 거짓 둘 중에 하나이고 인간은 어느 정도는(대개는 거의 정확하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내버렸다는 것이다.


이 논문, 그리고 프랭크퍼트의 문제의식은, 이 글의 가장 첫 문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나있다.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나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개소리는 집단의 목소리 즉 그 만연성을 통해 담론이 된다. 담론화된 개소리의 특징은, 프랭크퍼트가 이야기하듯이, 사실 여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들면 ‘에이, 재미로 하는 건데 왤케 진지해여?’라는 반응이 돌아오지만, 그 담론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에겐 ‘진지충’이라는 낙인과 함께 인간관계의 단절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이다. 담론화된 개소리는 경제의 영역으로 작동해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그 이익집단은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개소리의 반복재생산에 온힘을 쏟는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 이런 담론화된 개소리들이 포진한 것을 나는 본다. 역자의 말과 해제에서는 정치 영역에서의 개소리를 주로 문제시하고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정치의 영역은 오히려 생각보다 개소리가 빠르게 철회되는 편인 것 같다는 게 내 인상이다. 보는 눈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 바깥의 생활 영역이다. 과학의 시선이 들어가야 할 곳에 개소리들이 판을 친다. 온갖 비과학적 이야기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때로 그런 개소리들이 이른바 통찰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나타나는 순간, 나는 소름이 끼친다.


개소리에 대한 해법은, 그래서 그 문제의 심각성과는 아주 반대로 매우 단순하다. 말할 때 사실에 대해서 신경쓰고 말하려고 할 것, 그래서 그 진리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할 것. 즉,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말 것. 하지만 개소리의 절대적인 양이 역사적으로 늘어났는지 줄어들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는 프랭크퍼트의 말을 들으며, ‘인류의 언어생활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은 아닌걸까’하는 절망도 머리 한 켠에 들어서게 되었다.


어떤 진술이 참이고 어떤 진술이 거짓인지를 규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과 기만하려는 노력 모두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내세우기를 삼간다는 것이다. 두번째 대안은 상황이 어떠한지를 기술하려는 주장, 그러나 개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주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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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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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에서 크리톤과 소크라테스가 맞붙는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다. “탈옥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크리톤은 친구인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실력자들을 매수해 그를 아테네 밖으로 빼내려한다. 반대로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주장에 맞서 자기가 여기에서 빠져나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법’의 목소리를 빌어서(때로는 스스로) 답변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근거가 끼어든다. 정의에 대한 판단은 사람들의 평판에 좌우되지 않는다는(즉 다수의 의견과 무관하게 객관적이라는) 것(47d), 그냥 사는 것 보다는 훌륭하게(즉 정의롭게, 정의의 원칙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47e),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49a), 정의롭지 못한 일은 어떤 경우에도 해선 안된다는 것(49a), 개인의 판단에 의해서 법의 절차에 따른 처분을 지키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행위하는 것은 공동체를 해치는 일이라는 것(50b), 절차에 따른 처분은 합당한 처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합당한 처분을 지지하는 공동체의 규칙을 꽤 긴 시간 동안 스스로 준수하고 존중해온 일관성을 해치면 안된다는 것(53b).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거부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감옥에서 크리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는가 여부와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근거들은 크리톤이 그에게 하는 말에 대한 반박이다. 아닌게 아니라, 크리톤은 이 대화의 첫 구절에서부터 탈옥이 사람들의 평판을 깎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탈옥시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쟤는 친구보다 돈이 좋은갑다”라고 수군대며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의 평판이 깎일 것을 염려한다(44d).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아버지 없느 자식이라는 편견(이것 역시 평판의 일종이겠지) 속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인다. 여기에 살아남는 것 또한 ‘용기(즉 훌륭함)’를 보여주는 행위로서 충분하다는, 소크라테스로서는 솔깃할 말도 빼놓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논변과 별개로, 우리는 크리톤에게서 일상인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평판은 중요하다. 소문도 중요하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우리는 말의 무서움을 안다. 그래서 크리톤의 말처럼 “말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기도 하고, 해를 입히기도 한다.” 크리톤의 설득도 뿌리치고, 이런 말의 무서움을 죽음으로서 돌파할 생각을 해낸 소크라테스의 고결함은 언제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 말들이 지닌 칼을 개인의 힘으로 돌파하는 방법은 죽음 말고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낸 뒤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그 결과 말이다.


어쨌든, 그보다 거의 2500년을 더 뒤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각각의 근거에 반박할 만반의 논리가 갖춰져있다. 법감정이라는 것도 있고, 어떤 명분보다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고, 정의의 원칙은 광범위하긴 하지만 때로는 예외가 주어지기도 하고, 따라서 개인의 판단에 따라 법을 위반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렇게 한다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지는 일 따위는 대체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내세운 주장들보다는, 이 문단에 늘어놓은 현대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훨씬 더 친숙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막 반박하고픈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다시 마음 한켠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사람들의 몰이해와 왜곡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그 위기의 순간에 그는 (사실상)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념과 죽음을 맞바꿨다는(53e) 사실이다. 소크라테스만큼 칭송받으며 인류의 정신 속에 기억될만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우리 모두 목숨과도 맞바꿀만한 사랑의 대상 하나쯤은 갖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우리는 함부로 돌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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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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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은 지금의 내 인생을 만든 책 중에 한 권이다. 그만큼 오래 전이 읽었고, 또 그만큼 아끼고, 지금 내가 가진 여러 생각들의 뼈대를 제공해준 책이다. 그렇다고 막 힘들 때 슬플 때 외로울 때마다 번번이 꺼내보고 나를 반성하고, 뭐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어지간하면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들여다보지 않는 내 습관 속에서 이 책은 벌써 이번이 네 번째 완독이다. 한때는, 그러니까 두번째에서 세번째쯤 읽을 무렵 상대적으로 그의 생각과 가장 멀리 있었던 것 같다. 뭔가 꺼림칙한 귀족풍의 냄새라고 해야하나…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지금은 오히려 그 때보다 러셀의 생각에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러셀은 이 책에서 기독교라고 이름붙여진 무엇을 공격한다. 이 글에서 그가 반대하는 대상을 종교현상 내지는 종교활동으로서의 기독교로 내가 확정짓지 않는 이유는, 그가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유 때문이다. 그의 반대의 핵심엔 경험적 증거가 없는 환상에 대한 맹신,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의 표식이라고 간주하는 비합리적 태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가 살아온 문화궈에서는 이런 것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이 “기독교”라는 명사이기에, 그가 기독교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또는 어쩌면 이 단어 말고 다른 대체할 단어를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이런 믿음이 과연 기독교 공동체 또는 기독교 문화권에만 존재하는가? 러셀 스스로가 지적하듯, 이런 태도는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각기 다른 양상으로 인간의 지성의 진보를 가로막고, 단지 문화의 발전만 지체시키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문화적 구조 안에서 소수로 배제되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고통까지 안겨준다. 그 고통에 어떤 의미와 목적이 담겨있기에 (또는 담겨있다면) 어쩌면 공동체의 관점에서 또는 인류의 관점에서 감내할만한(감내해야할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신자와 목회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게 정녕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피해당사자들 앞에서 내뱉는 것은 역시나 인간적인 도의가 아닐 것이다.


이런 비경험적 믿음이 정말 인류의 차원에서 사실이라면 즉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비밀과 사실을 정말 아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귀담아들을만한 일말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세계엔 호교론자들과 변증론자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러셀의 관점에서 이들의 논증은 형식적으로 올바르게 구성된 것이 거의 없다. 여기에 나도 대부분 동의한다. 따라서 신은 합리적 이유로 이해되는 대상일 수 없고, 어떤 감정적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러셀의 이런 주장을 떠올리며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가 철학을 전공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너 점 볼 줄 아냐?”였다. (아주 기분나쁘고 자존심 상하지만, 나는 주역점을 볼 줄 안다.) 대체 이런 걸 왜 돈을 주고 하는 것인가 싶지만, 번화가에는 어김없이 미래를 맞춘다는 포춘텔러 부스가 줄을 서서 개설된다. 동네의 점집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부적을 팔고 굿판을 벌인다. 정부에서 절반 이상을 대신 내주는 약값은 500원만 나와도 아깝다는 사람들이 한 번도 효능이 증명된 적 없는 홍삼베이스의 건강보조식품은 백화점에서 10만원 100만원씩 턱턱 주고 구입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심리적 위안”이라고 퉁치는데, 그러면서 진짜 훈련받은 전문가인 신경정신과나 심리상담사에게 비용을 치르는 것은 주저한다. 러셀의 눈에는 이 모든게 “기독교”일 것이고, 내 눈에도 그러하다. 이 모든 노력과 정성과 돈이(이게 제일 중요하다. 돈이!!!) 과학과 지성의 진보에 사용되었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져있지 않았을까?


물론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여기에서 러셀 자신의 분석과 희망사항과 제안이 서로 (약간의) 충돌을 일으키는 것 같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고, 그 인식을 효과적으로(과학적으로) 바꾸기 위해선 사람들의 본성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인 과학의 모든 관점을 동원해서 인간을 본다고 하더라도, 거의 근본적 수준의 감정 중 하나인 두려움은 그칠 줄 모르고 틈만 나면 우리의 지성을 뚫고 나올 것이라는 결론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러셀의 낙관적인 예측처럼, 지식의 축적과 과학의 눈부신 성과만으로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우리 인류의 상태가 그것이 부족하기에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가… 모르겠다.


이런 거창한 인류사적 고민 말고도, 예전엔 없었던 개인적인 고민도 이번에 책을 읽으며 하나 더 늘어났다. 이전엔 무슨 의미로 이런 글을 쓴건지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그냥 넘겼던 챕터인 “마담…” 부분과 관련된 고민이다. 나 스스로는 러셀의 의견에 십분 공감하지만,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철학의 모습이나 형태 즉 판매용 철학과 내 마음 사이의 고민에 관한 문제였다. 러셀이 비판하는 맥타가트와 브래들리(철학의 역사에서 B급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 사람들)의 형이상학적 태도, 즉 미학적 도취 혹은 종교적 열망의 대리만족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사람들의 요구(또는 철학자들 스스로의 어떤 잘못된 방향설정)에 나는 부응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고 살자니 굶어죽기에 딱 좋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적이 많이 생길 것만 같고, 그러고 살자니 평생 거짓말이나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고… 뭐 그런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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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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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공산당선언』을 읽고 있자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은 “왜 지금 공산당 선언을 읽는가?(읽어야 하는가?)”가 될 것이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고전이니까”일텐데, 고전의 정의가 “(아무 이유 없지만 일단은)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사실 이 대답은 의미없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산당(과 공산주의)”은 실패한 정치실험이라는, 80%는 맞지만 20%는 틀렸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선입견도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 책이 타겟으로 잡고 있는 자본주의의 동시대성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자본주의 세계엔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라는 단순화로 포착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이 말이 맞다면 마르크스의 현재 분석도 틀린 것이고, 그 분석에 기반한 미래 예측과 행동강령 또한 제대로 들어맞을 리가 없다. 핸드메이드 소공업인들은 유통 플랫폼의 갑질에 종속되었고, 동네 슈퍼 아저씨들은 대형마트에게 시장을 빼앗겨 가게 문을 닫고 그 마트의 비정규직으로 취직했다. 기술의 발전은 점점 인간이 신경써야 하는 영역을 점유해가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자본만 있으면 모든 인간들이 각자 가진 어마어마하게 서로 다른 수요를 작은 기관에서 모두 충족시키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해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 서로 다른 수요를 대면접촉으로 충족시켰던 모든 “소자본가”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어가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정말 틀린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도 조금은 다르게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진정한 공산주의 운동이란, 어떤 세계가 아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나눠졌을 때만 이뤄질 수 있다. 이 과정은 순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이뤄진다. (이 말에는 수많은 쟁점이 담겨있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핵심 교의이기도 한데) 이 경제적 운동은 다른 영역의 어떠한 변화나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 또 마르크스가 이 글의 끝에 밝히는 것처럼,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공산주의를 향한 최후의 일전에 돌입하기 전 벌어지는 모든 국지적 전투에도 우호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범위는 우리가 소극적이고 국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넓어야 하고), 실제로 (내 관점에서) 꽤 괜찮은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개혁의 길에 들어섰거나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도 바보가 아닌 한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는 내 자만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이런 종류의 단어를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내가 이해한 『공산당선언』의 핵심은, 경제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지향하는 열망 같은 것이다. 마르크스의 실제 의도가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공산당 선언』 자체가 수사적으로 매우 풍부한 문체로 기록되어 있기에 나도 내 멋대로 해석한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더 이상 미래를 기획하며 돈을 모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뜻의 “월급이 스쳐간다”는 표현이 150년 전 쓰인 이 팸플릿에 이미 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생각에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당신의 월급이 통장을 스쳐가는 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공장주의 착취가 끝나고 그가 임금을 현금으로 받을 때가 되자마자, 이번에는 부르주아지의 다른 부분들, 즉 집주인, 상점 주인, 전당포 주인 등등이 그에게 달려든다.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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