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올린 페이퍼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의 나라'가 알라딘의 방침에 따라 비공개로 처리됐다. 아래가 알라딘에서 온 통지다.

알라딘 서재 운영규정 상 마이페이퍼의 글들은 마이리뷰의 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화된 규정이 적용되었으나, 최근 방침이 수정되어 페이퍼의 글들 역시 외부 뉴스/언론사 기사의 전문 또는 부분 인용을 허락 없이 게재할 경우 해당 글은 블라인드 처리가 됩니다. 이는 로그인한 회원님 본인만 보실 수 있도록 비공개 처리를 하는 것으로써, 서재에서도 회원님 본인만 열람이 가능합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조치는 해당 기사의 출처를 밝히는 경우라도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이현우 회원님처럼 본인이 직접 작성한 외부 리뷰 기사의 본문을 게재한 경우에도 적용됩니다. 비록 이현우 회원님께서 작성한 리뷰이지만, 저작권은 해당 뉴스/언론사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전문 게재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이현우 회원님께서 작성해주신 매우 친미적인 대통령의 나라” ( http://blog.aladin.co.kr/mramor/5365569 ) 페이퍼 역시, 이현우 회원님이 직접 작성한 리뷰이긴 하지만 주간경향에 실린 외부 기사글로 간주되기에 위와 같은 방침에 따라 비공개 처리가 되었습니다.

하여 해당 기사를 아웃 링크하여 페이퍼를 수정해주시면 다시 정상적으로 게재하실 수 있습니다. 아웃 링크할 경우, 원문 리뷰의 세 줄까지는 허용이 된다고 하니 이 점 참고해 주세요.

내가 쓴 글도 공유할 수 없다면, 알라딘 서재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의미도 반감될 수밖에 없다. 아예 블로그 전체를 비공개로 돌리는 게 속편한 방식이 아닌가 싶다. 서재를 접는 문제에 대해서 고심해봐야겠다...

 

12. 01. 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전에 거실 벽면을 채울 책장이 들어와서 오후내 책정리를 하고 있다. 재작년 여름 이사올 때만 해도 모든 책을 서가에 꽂을 수 있었지만(박스에 넣어둔 책들 빼고) 그 이후에 또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지금은 방바닥에 나앉은 책이 부지기수다. 도저히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남겨놓았던 벽면 공간을 마저 책장으로 채운 것인데, 대략 6개가 추가로 더 들어가는 모양새가 됐다. 그래봐야 바닥의 책들을 절반도 소화 못할 듯싶지만, 여하튼 '숨통'은 좀 트이게 됐다. 반(半)난장판인 방안에서 간식을 먹다가 데이미언 톰슨의 <책과 집>(오브제, 2011) 생각이 나 기사를 찾아 옮겨놓는다. 오늘은 '책과 집'의 날이라 원고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하긴 전투 대형을 만들어야 전투도 할 수 있는 법이니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내게 책은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라 전력이다. 전투병력...

 

 

 

한겨레(12. 01. 07) 책은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다

 

책은 일종의 그릇. 무엇을 담았는가에 따라 표지, 책등, 글꼴이 다르며 크기, 두께, 색깔, 무게가 차이난다. 책이 모이면 질서가 된다. 서가를 보면 주인의 성격과 관심사를 알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다. 어느 선을 지나면 책은 주인을 배제한 채 스스로 방향을 잡아간다. 내용을 따라 모이는가 하면 모양별로 영역을 만들고 넓혀간다.

<책과 집>은 “돈이 생기면 책을 사고, 그러고도 남으면 음식과 옷을 산다”고 했던 에라스뮈스 같은 이들을 위한 책이다. 사진 위주로 각각의 공간과 취향, 책의 양에 걸맞은 수납방식을 안내한다. 동시에 책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과 책을 소개하는 책에 대한 아름다운 에세이이기도 하다. 온갖 다양한 서재와 책꽂이에 대한 안내이며 통로, 계단, 문틀 위, 창틀 사이를 어떻게 책을 위한 공간으로 바꿀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앉은뱅이 의자, 장식장, 선반 등을 유사책장으로 바꿀 수 있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전해주는 ‘책으로 집꾸미기’ 지침서다. “책이 가구는 아니지만 그만큼 집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 책의 주제다.

지은이는 거실과 현관은 집안 분위기를 좌우하므로 책을 테마로 바꿔보라고 유혹한다. 단색 책꽂이로 큰 벽을 완전히 채우되 낮은 사다리에다 이동식 전등 등을 갖추면 더할 나위 없다. 단, 다른 벽은 최대한 비울 것. 책벽은 훌륭한 단열재, 흡음재이며 추상회화가 된다. 중요한 것은 상주하는 주인과 가구들과의 조화. 필요와 찾는 빈도에 따라 공간을 정하고 크기와 색깔에 따라 위치를 지정한다. 창, 문, 바닥재와의 조화도 고려사항. 가끔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눈요기도 필요하다. 계단을 겸한 책꽂이나 물결, 나무 모양을 한 책꽂이는 집안의 명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지은이는 모양과 크기에 따라 쌓을까 꽂을까부터 결정하라고 권한다. 쌓을 경우 정기적으로 위아래를 바꿔주어야 제본이 망가지지 않는다. 어쩌다 보는 책은 스피커나 전화기 받침으로 쓰면 어떠랴. 색깔별로 정리할 때는 중간색을 중간에 두고 스펙트럼처럼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으로 배열하면 보기 편하다고 한다. 책등이 보이도록 하되 서체 디자인이나 그림이 멋진 책은 한두 권 정도 표지나 면지가 보이도록 진열하는 것도 센스.

아예 책의 밑이나 배가 보이도록 쌓아 보라. 가로세로 종잇결과 바랜 정도를 반영하는 채도가 조각을 보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책 한권을 찾자고 모든 책을 꺼내야 하니 강권하지는 않는다. 멋진 서재와 책장 사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다.(임종업 선임기자)

 

12. 01. 17.

 

P.S. 오늘부터 '마이페이퍼 작성시 유의사항'이 뜬다. 뉴스기사 저작권에 관한 것이다. 그간에 '나의 서재 & 즐겨찾는 서재브리핑에만 노출함' 설정으로 북리뷰 기사를 스크랩해놓곤 했는데, 권고에 따라 앞으론 '인용'으로만 처리하도록 한다. '로쟈의 낚시'도 이제 일거리가 많이 없어질 듯하다. 이 참에 '로쟈의 전투'로 전환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 12월 중순이 넘어가면 출판계는 대작이나 문제작을 내놓지 않는다. 연말연시에 책 선물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독서할 시간은 많지 않고 그만큼 책을 찾는 발길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에 나오는 책들은 대개 '밀어내기용'이 많다. 해를 넘기지 않기 위해 애를 쓴 결과다. 하지만 간혹 '통념'을 건너뛰는 책들도 나온다. 

  

이번주부터 나오기 시작한 <루쉰 전집>(그린비)이 그렇다. 1, 2, 7권이 선보였는데(더 나왔나?) 장서가들의 '책탐'을 부추길 만하다. 15권짜리 장정에 들어간 김영수의 완역본 <사기>도 <로마제국쇠망사> 완역본을 능가하는 대사업이 될 듯하다. <사기 본기1>(알마, 2010)이 이번주에 나왔다.   

전집이 아닌 단행본에 시선을 맞추자면 <문학카페에서 철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의 저자, 아니 내게는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의 저자 김용규의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2010)이 출간됐다. 아니 이것도 '순수' 단행본은 아니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시리즈라 한다. 당초 신학과 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데, 860쪽이 넘는 분량은 조철수의 <예수 평전>(김영사, 2010)을 떠올려준다. '대작'에 값하는 책들이다.   

개인적으론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 '신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흥미롭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거기에서 하나의 선택과 방향, 물음 등이 읽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여정도 시작은 첫걸음부터다. '신이란 무엇인가'란 형이상학 고유의 물음형식이 이 책의 첫걸음인 것이다. 그래서 떠올린 책은 잭 마일스의 <신의 전기>(지호, 1997)다.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몇년전에 구해놓았는데, 현재는 절판중인 책이다(소장도서라곤 하지만 항상 어디에 두었는지가 문제다). 얼마전에 나온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웅진지식하우스, 2010)까지 포함하면 얼추 신에 대한, 신을 위한 '종합선물세트'가 될 만하다. 그런데, 왜 하필 신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가? 저자가 길잡이로 삼은 것은 <팡세>의 한 구절이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 '신'에 이어지는 것은 '이성'이라 한다. 언제쯤 출간되는지 모르겠지만 볼프강 벨슈의 <이성1>(이학사, 2010)과 같이 읽어봄직하다. 이 또한 제1부만 번역돼 나온 상태인데, 원서의 부제는 '우리시대의 이성비판과 횡단이성'이다. 절반만 번역되었기에 번역본 부제는 '우리시대의 이성비판'이 됐다. 저자의 색깔이 더 강하게 드러날 '횡단이성'이 마저, 얼른 출간되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시대'가 언제부터인지 궁금하신가? <계몽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2001)부터다. 거기서 알 수 있지만 제목의 '이성비판'에서 '이성'은 '비판'의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다. 저자는 데리다와 들뢰즈, 리처드 로티와 넬슨 굿맨 등 프랑스와 미국철학의 '이성비판' 사례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볼프강 벨슈의 전작으론 <미학의 경계를 넘어>(향연, 2005)가 소개돼 있다. 몇년 전 세미나에서 읽었는데, '미학의 해체'란 주제가 흥미롭지만 번역은 좀 아쉬웠다.    

그리고, 아감벤 독자들에겐 반가운 소식인데, <호모 사케르>를 기준으로 하자면 초기 저작인 <유아기와 역사>(새물결, 2010)가 번역돼 나왔다. 부제는 '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이탈리아어판 벤야민 전집 편집자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의 벤야민관을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벤야민 르네상스를 불러온 문제작'이란 뒷표지의 문구가 그래서 나온다. 덧붙이자면, "프랑크푸르트학파-아도르노의 연장선상에 있던 벤야민을 20세기 지성사의 전혀 새로운 성좌 속에 배치시키고 있는 역작"이다. 개인적으론 <장치란 무엇인가?>(난장, 2010), <세속화 예찬>(난장, 2010)과 함께 연말에 읽을 '아감벤 3종세트'다.   

그런가 하면 '이글턴 3종세트'도 있다(연말이라 독서도 '묶어서' 한다). 오랫동안 대기중이던 <이론 이후>(길, 2010)가 출간됐기 때문이다. 소개는 이렇다. "이론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자 하는 테리 이글턴의 문제작. 인간은 결국 '이론'을 통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로소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논리를 치밀한 문화이론을 바탕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그 굴곡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생각난 김에 연말에 읽을 '이론서'가 필요하신 분은 지젝 등이 편집한 <공산주의 이념>(Verso, 2010)이 어떨까 싶다(어제 배송받은 책이다).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 가설>에 대한 발표와 토론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공산주의 가설>은 특이하게도 알라딘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나는 교보에서 구입했다). 같이 읽을 만한 책은 바디우의 <철학을 위한 선언>(길, 2010)과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 <공산주의 가설>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소개를 받고 구입한 책이다.  



문학분야를 건너뛰면 관심도서 가운데 남는 건 로저 펜로즈의 <실체에 이르는 길>(승산, 2010)이다.  

 

"세계적인 석학 로저 펜로즈의 8년 만의 역작. 스티븐 호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목이 창조해 낸 ‘현대물리학의 집대성’"이라고 소개되는 책. 난이도가 있는 책이어서 '독서'가 될지 '구경'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주의 법칙으로 인도하는 완벽한 안내서'라는 홍보문구는 유혹적이다. 하지만 어제 두 군데 서점에 들렀을 때는 구할 수 없었다... 

10. 12. 10.  

P.S. 원래는 '이주의 관심도서' 리스트를 만들어놓으려고 했으나 얘기가 길어져서 페이퍼로 돌리고, 제목을 따로 붙여놓는다. 파스칼의 단장을 약간 비틀어놓으면서...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책을 읽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꾸때리다 2010-12-1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reality라는 말은 철학에서는 주로 '실재'로 번역하지 않나요? '실체'라는 말은 substance의 번역어로 사용하고요...

로쟈 2010-12-10 09:17   좋아요 0 | URL
정신분석에선 '현실'이니 다 제각각입니다. 물리학에선 '실체'라고 옮기나 봅니다...

비로그인 2010-12-10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책을 읽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이 문장이 파스칼의 문장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네요. 신은 멀고 책은 가까워서 그런가요? ㅎㅎ 연말에도 여전히 바쁘시겠죠? 날이 본격적으로 추워질 모양인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로쟈 2010-12-11 10:2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신은 멀고 책은 가깝지요.^^ 연말에도 바쁘긴 한데, 그래도 최악은 넘긴 듯합니다.^^;

2011-01-06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11-01-06 18:49   좋아요 0 | URL
가끔씩 들르셔서 그런 모양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귀족온달 2011-02-05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신을 위한 변론>과 <신을 올호하다>를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 대한 반론으로 쓴 책들이었는데요, 로쟈님의 서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학에 무지한 저로서는 이글턴이 말하는, 히치킨스는 신학을 모르면서 종교를 무신론적 관점에서 공격한다는 지적이, 좀 마뜩잖았습니다. 게다가 이글턴은 히치킨스의 계급적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왜 사회적인 문제에는 입을 닫으면서 종교를 공격하느냐고 일침을 놓는데, 이 수준이 되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사회주의적 신앙인 vs 자유주의적 무신론자....예전에 <종교전쟁>이라는 책에서도 신학자분의 대담을 통해서도 시원하지 않았는데요, 과학을 기반으로 한 무신론에 대한 신학의 답변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혹은 그것에 대해서 탐독할만 한 다른 책들은 머가 있을까요? 두서 없는 댓글 죄송하고요 ㅠㅠ 앞으로도 좋은 서평 부탁드립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