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연구모임 사회비판과대안'에서 엮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사월의책, 2012)이다. '사회비판총서'라고 새로 기획된 시리즈의 첫 권으로 <포스트모던의 테제들>(사월의책, 2012)과 같이 나왔다. 시리즈 책이란 점 때문에 같이 주문하긴 했는데, 사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만 나왔더라면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같은 제목의 책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옹기장이, 2012)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주문하기 전에도 두 책이 거의 '같은' 책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2년만에 같은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다는 게 특이해서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같은 제목으로 검색은 되지만 두 책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책소개에 들어있지 않다(어떻게 해서 책을 다시 내게 됐다는 식의 얘기가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출판계약은 5년인 경우가 많은데, 계약이 파기된 것인지? 분명 먼저 책을 낸 출판사로선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 텐데, 양측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인지? 그런 사소한 흥미다.  

 

사소하지 않은 건 같은 콘텐츠의 책이 서로 다른 두 출판사에서 출간돼 동시에 판매된다는 사실이 독자에게 공지되지 않은 일이다. 표지만 바뀌었을 뿐(거기에 편집 스타일만 바뀌었다) 내용은 거의 100% 동일한 책이 가격은 꽤 차이가 나는 이유가 순전히 '하드카바'이기 때문이라면 그 또한 허탈한 일이다. 흠, 자세히 보니 그밖의 차이도 없지는 않다. 가령 옹기장이판의 편집자 서문은 '사회 비판과 대안 모색의 이념'이란 제목을 갖고 있지만, 사월의책판에서는 그게 부제로 돌려지고 새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적 전통'이란 제목이 붙여졌다. 아니, 그런데 순서만 보면 놀랍게도 이게 '새' 제목이 아니라 '옛날' 제목이다. 편집자 서문이 쓰인 날짜가 '2009년 9월 15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옹기장이판에서는 '2010년 1월 15일'로 돼 있다. 내용은 똑같은 서문인데, 나중에 나온 책 서문이 전에 나온 것보다 먼저 쓰였다는 것도 미스터리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이 아니라 '비밀들'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론 허버트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 대한 강의 때문에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해 상기하고 예전에 사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도 다시 떠올리게 됐다(마르쿠제의 주저는 <이성과 혁명>, <에로스와 문명>, <일차원적 인간> 등이다). 그러다 결국 같은 콘텐츠의 책을 두 권 갖게 됐는데, 새로 나온 책의 표지가 마음에 들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좀 희한한 일이어서 몇자 적었다. 딴은 두 권이 같은 내용의 책이란 걸 독자는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 

 

12. 04. 07.

 

 

P.S. 마르쿠제에 대한 소개로 가장 간명한 것은 손철성 교수의 <허버트 마르쿠제>(살림, 2005)이다(<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의 마르쿠제 편도 손 교수의 글이다). 80-90년대만 하더라도 적잖게 나와 있었지만 마르쿠제의 책들은 현재 주저 몇 권만 남아있는 상태다. 얇은 책으론 <해방론>(울력, 2004) 정도.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동녘, 2000)는 두어 차례 나왔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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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도서이지만 일부러 독서를 미뤄놓는 책들이 있는데 이언 와트의 <소설의 발생>(강, 2009)과 린 헌트의 <인권의 발명>(돌베개, 2009) 같은 책이 그렇다. 이유는 비슷하다. 저자들이 중요한 전거로 삼고 있는 작품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는 거. 어떤 작품들인가.

 

 

 

'디포우, 리처드슨, 필딩 연구'란 부제를 갖고 있는 <소설의 발생>에서는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 <몰 플랜더즈>, 그리고 리처드슨의 <파멜라>와 <클래리사>, 필딩의 <톰 존스>가 주된 분석 소재다. <톰 존스>(삼우반, 2007)와 <파멜라>(문학과지성사, 2008)가 번역된 이후에도 <몰 플랜더즈>, 더 결정적으로는 <클래리사>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는 게 핑계가 됐다.

 

하지만 이번주에 예기치 않게도 <클래리사>가 <클러리사 할로>(지만지, 2012)란 제목으로, 무려 8권짜리 책으로 번역돼 나왔다(책값만 20만원이 넘어간다. 소설 한 작품에!). 일단은 2권까지만 구입했는데, 비록 <몰 플랜더즈>는 아직 소식이 없지만 나머지 작품들은 완비가 된 상황이니 '시간 부족' 말고는 더이상은 핑계가 안 통하게 됐다. <소설의 발생>을 어디에 두었는지 하는 수 없이 주말에 찾아볼 예정(오래전에 구입한 원서도 갖고 있긴 하다).

 

 

 

다시 정리하면, <소설의 발생>을 읽기 위해서 미리 읽거나 같이 읽어야 할 책으로 먼저 디포우의 <로빈슨 크루소>가 있다. 세계문학판 번역본들이 나와서 이 책은 독서여건이 아주 좋다.

 

 

 

그리고 필딩의 <톰 존스>와 리처드슨의 <파멜라>. 분량이 만만찮지만 소설사뿐 아니라 18세기 문화사에 관심이 있다면 책장에 구비해놓을 만하다.

 

 

 

거기에 <클러리사 할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맞먹을 만한 분량이다(책값은 능가한다!). 영어본으로도 보통은 축약본이 나와 있을 정도. <인권의 발명>을 읽기 위해선 <클러리사 할로>에다가 루소의 <신엘로이즈>(한길사, 2008)를 더 얹으면 된다. '소설'이 아니라 '고전 명저'로 번역돼 고급양장본이고 가격도 세다(이런 건 문고판 영역본들이 부럽다).

 

 

 

흠, 찾아놓고 보니 <소설의 발생>과 <인권의 탄생>을 읽는 건만 해도 몇십 만원 비용에 몇 개월짜리 프로젝트다. 이런 건 '독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전투'다...

 

12.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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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관심도서 가운데 '책읽기' 범주에 속하는 책 두 권에 대해 적는다. 아직 손에 들지 못했으니 책에 대한 '감'을 적는다고 할까. 먼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들이 쓴 <철학자의 서재2>(알렙, 2012)가 나왔다.

 

 

프레시안의 '철학자의 서재' 연재를 묶은 것으로 작년 1월에 첫권 <철학자의 서재>(알렙, 2011)이 나왔었으니까 2권이 일년만에 나온 셈. 당연히 분량은 좀 줄었다. 대신에 서평들이 좀더 가지런하게 분류됐다. 부제는 '오래된 책, 위험한 책, 희망의 책'. 철학자들의 서평집답게 철학책이 다수 다뤄진 게 여느 서평집과는 다른 특징이자 이 책의 유인이다. 거기에 역사와 교육, 정치에 관한 책들이 다수 서평거리가 됐다. 나긋나긋한 책들을 즐기는 독자라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좀더 묵직한 독서를 원하는 독자라면 유용한 가이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뒷표지에 실린 나의 추천사는 이렇다.

이 책의 서평 목록에는 소위 ‘철학서’로 분류되는 책이 의외로 많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또한 “딱딱하고 골치 아픈 이론들과 화석화된 활자들” 속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사유와 문제의 단초를 찾으려는 적극적인 시도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소위 전문가들’이 아닌 ‘우리’가 같이 읽고, 같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들이 어떤 것인지 함께 짚어보고 함께 고민하자는 취지가 아닐까. 그럴 때 ‘철학자의 서재’는 옆집 아저씨의 서재만큼이나 가깝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또 한권의 책은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웅진지식하우스, 2012). 저자가 365일동안 매일 하루에 한권씩 읽고 쓴 기록을 모은 것이다(언젠가 정윤수 평론가가 오마이뉴스에 같은 컨셉으로 'booking 365'를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게 왜 책으로 안 나왔는지 모르겠다). 원제는 '톨스토이와 보라색의자'. 이름에서 눈치를 챘는데, 저자는 러시아계 이민 가정 출신이다(이름은 '니나 산코비치'라고 읽는 게 맞다. '상코비치'는 기분으로 읽어준 것인 듯). 무슨 계기가 있었을까? 그렇다. 저자 소개를 보니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익숙한 일상을 이어가던 40대 중반, 언니가 세상을 떠난다. 슬픔을 잊으려고 3년 간 방황했지만,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불쑥불쑥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400쪽이 넘는 <드라큘라>를 하루 만에 읽고,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는 ‘마법 같은 독서의 한 해’를 시작하게 된 계기다. 2008년부터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미국 전역의 독서광들의 입소문을 타고, <뉴욕타임즈>에 ‘The 365 Project’로 소개되는 등 화제가 되었다.

요컨대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는 책읽기의 사례라고 할까. 굳이 보라색의자가 아니더라도 독서용 의자가 집에 있다면 늦은 밤 편안한 시간에 하루치씩 읽어나갈 만한 책이다.

 

<철학자의 서재2>나 <혼자 책 읽는 시간>이나 물론 읽으면서 읽을 책이 더 늘어나는 부작용은 감수해야 할 터이다. 책읽기 책들은 혼자 다니지 않고 떼로 다니는 게 주특징이니까...

 

12. 0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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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마지막 택배로 배송된 책은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지만지, 2012)이다. 지난주에 나온 가장 '놀라운' 책으로 바로 주문했지만 배송이 좀 늦어졌다. 지젝의 독자가 아니라면 오토 바이닝거란 이름은 다소 생소할 듯싶다. 내가 처음 접한 것도 지젝의 <향락의 전이>를 통해서였는데, '여성'을 다룬 2부의 마지막 장 제목이 '오토 바이닝거 또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됐고 러시아어본과 영어본도 그간에 구했지만 우리말 번역본이 나올 줄은 몰랐다(이번에 발췌본과 완역본이 동시에 나왔는데, 완역본의 경우 본문의 분량이 824쪽이다!). '놀라운' 책이라고 적은 이유다.

 

 

사실 놀라운 건 책뿐만이 아니다. 저자의 생애 또한 뒤통수를 친다. 소개에 따르면 "오토 바이닝거는 1880년 4월 3일 빈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10월 4일 23세의 나이로 자살한 오스트리아의 철학자"다. 놀랄 만큼 짧은 생애를 살다간 것인데, 자신의 극단적인 이론을 담은 <성과 성격>, 그리고 "베토벤이 숨을 거둔 집에서 자살"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의 과격한 이론은 어떤 것이었나? 역자 해설을 조금 간추린다.

 

바이닝거는 자신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까지 극도의 반유대주의와 반페미니즘, 육체 혐오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그는 또한 최초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철학적-심리학적 이론을 전개했으며, 그 이론의 중심에 인간의 '양성' 이론이 있다. 바이닝거는 엄청난 이론을 쏟아놓고 너무 젊은 나이에 자살함으로써 신화가 되었고,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842쪽)

물론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는 얘기일 텐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 초판 600부가 다 팔리는 데 9년이 걸린 것에 비해서 1903년에 출간된 <성과 성격>은 그때 이미 11판이 나왔고, 1932년까지 28쇄를 찍었다고 한다. 그의 유명세에는 물론 극적인 자살이 한몫해서 전 유럽에 그의 명성이 퍼지게 됐고 <성과 성격>은 숭배의 책이 됐다고. 그의 악명 높은 주장 가운데는 "여성은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성은 무(無)다"는 것도 들어 있다.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들리지만 동시에 양성간의 '차이'와 '구분'에 주목한 것이어서 라캉의 성구분 공식으로도 이어진다.

 

흥미로운 건 그의 양성이론이다. 그는 인간이 본래 양성적이라고 보았고,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 가운데 어느 요소가 많은지에 따라 남성 또는 여성으로 불린다고 주장했다. 완전한 남성(M)과 완전한 여성(W)이 양극단에 있다면 그 사이에 4분의 3의 M과 4분의 1의 W로 구성된 사람도 있고, 반대로 4분의 1의 M과 4분의 3의 W로 구성된 사람도 있다. 이 경우는 서로 보충적이어서 서로를 찾게 된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점. 바이닝거는 W의 요소를 완전히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M-되어 가기'가  '여성 해방'의 정도를 가리킨다.

 

바이닝거의 반유대주의는 이러한 성이론에서 나온다고. 그는 유대인을 '여성적'이라는 이유로 혐오했다. "여성과 유대인은 단지 섹스, 육체, 물질일 뿐이며, 정신과 영혼이나 도덕도 없고, 성적 금욕 생활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종의 위협적인 존쟤"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주의 또한 여성성과 마찬가지로 극복의 대상이다.

 

이런 생각들에 흥미가 발동한다면 <성과 성격>은 모처럼의 '서프라이즈'가 될 것이다. 책값 또한 서프라이즈하다...

 

12.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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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배송된 책 가운데 하나는 후지타 쇼조(1926-2003)의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논형, 2009)다. 특별히 꽂혀서가 아니라 쓰루미 슌스케의 <전향>(논형, 2005)을 구입하려다 보니 후지타 쇼조의 <전향의 사상사적 연구>(논형, 2007)가 눈에 띄었고,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이기에 같이 구입한 것이다. <전향>에 대한 관심은 또 쓰루미 슌스케 등의 <사상으로서의 3.11>(그린비, 2012) 때문에 촉발된 것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셈.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게 후지타 쇼조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창비, 1998)이다. 창비식 표기론 '후지따 쇼오조오'라고 돼 있어서 '후지타 쇼조'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더 나쁜 건 절판된 책이라는 점.

 

 

<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에는 후지타의 제자인 이이다 다이조의 한국어판 서문이 붙어 있는데, 학통을 따르자면 마루야마 마사오와 사제지간인 후지타, 그리고 이이다 다이조로 이어진다. 이이다는 독자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마루야마와 후지타의 저작집 편집자 역할이 주인 것으로 보인다. <전체주의의 시대경혐>에도 그가 쓴 '후지타 쇼조의 시대와 사상'이 해제로 붙어 있다고. 그래서 찾아보니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은 아쉽게도 중고서점은 물론 도서관에도 잘 없는 책이다(알라딘 중고에는 '고서' 가격의 책으로 나와 있는 게 하나 있긴 하다).

 

기사를 좀 검색해보니 후지타는 현대 일본사회를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라고 비판했다. 작년 4월 프레시안의 서평기사에는 이런 언급이 보인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421170308§ion=05).

 

 

지진과 화산이 빈번한 일본에 원자력 발전소가 50기가 넘는 것도 결국은 에너지의 대량 소비와 관련되는 "불편함의 원천을 일소하려는 욕구"로 해석할 수 있다. 원자 폭탄을 얻어맞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1954년 3월, 비키니 섬의 수소 폭탄 실험으로 일본인 어부가 사망하게 되는 사고가 일어난 바로 그날, 훗날 일본 총리가 되는 청년 정치가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모두가 미적댈 때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가의 책임"이라며 원자력 발전 연구를 밀어붙이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런 황당한 행동도 후지타 쇼조가 비판하듯, 천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가족 국가 체제에서 몽매한 '어린 아이' 같은 신민들을 보살피는 용기 있는 정치가의 결단인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이 위험천만한 원자력 발전 체제를 "세계 최고 기술력" 운운하며 끝끝내 고집하는 행태는 또한 후지타 쇼조가 현대 일본의 정신이라고 명명한 "자기비판 능력이 결여된, 자기애로서의 나르시시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이계삼 밀성고등학교 교사)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이 일본만의 것일까. 식민지배 시대를 거쳐서 군부독재를 경험한 나라의 '신민들'이 갖는 정신상태도 뭔가 문제적인 대목이 있지 않을까. 후지타 쇼조의 문제의식을 연장하자면,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현대 일본의 정신, '자기애로서의 나르시시즘'이 필연적으로 초래한 재난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런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로운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은 타산지석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상으로서의 3.11>에서 쓰루미 슌스케는 '일본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다. 후쿠시마 1년을 맞아 일본 핵발전의 진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남의 나라의 지진일 뿐'이라는 안이한, 나르시시즘적 태도에서 벗어나 무겁게 끌어안아야 할 질문이다...

 

12.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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