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기 전 막간 페이퍼를 쓴다. 제목은 두 권의 책에서 가져왔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이순, 2012)와 모리스 블랑쇼의 <카오스의 글쓰기>(그린비, 2012). 비슷한 시기에 출간돼 나란히 언급하게 됐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바르트와 블랑쇼는 프랑스 현대비평의 대가들이기에 자주 같이 묶인다.

 

 

어제 다시 주문한(알라딘에서는 품절이어서 교보로 주문했다) <프랑스비평사>(문학과지성사, 1991)의 저자 김현도 프랑스 현대비평의 네 성좌로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를 지목했다. 이들이 말하자면 4인방이다(얼핏 김현을 포함해 '문지'를 지탱했던 비평가 4인방이 생각난다). 사르트르와 바슐라르의 책도 적잖게 나와 있지만, 바르트와 블랑쇼는 '선집'이 나왔거나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채롭다. 작가 선집도 드문 형편에서 '비평가 선집'이 나올 정도니까 어지간한 작가들을 넘어선다고 할까. 아니 이들이 '작가'이다, 혹은 '정전 비평가'이다.

 

 

아직 책들을 다 읽지 않았으니 인사치레만 적자면, <애도일기>는 어머니 죽음을 애도하는 바르트의 일기다. 어머니와 그의 관계에 대해서는 <카메라 루시다>로도 번역된 바 있는 <밝은 방>(동문선, 2006)을 참고할 수 있다. 개인적으론 바르트 입문에 계기가 된 책이 <카메라 루시다>였다. <사랑의 단상>과 <텍스트의 즐거움> 등이 애독했던 책이고.

 

 

이후엔 '바르트의 모든 책'이라고 마음 먹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서로 갖추는 데 좀 소홀하긴 했다. 생각해보니 <작은 사건들>(동문선, 2003),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동문선, 2004), <중립>(동문선, 2004) 등이 구입하지 않은 책이다(그사이에 절판된 책들도 있군). 2004년엔 러시아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입할 수 없었기도 하지만 귀국한 이후에도 따로 챙기지 않은 것이다. 최근에 문학이론서들을 다시 점검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 목록을 작성해보고 있는데, 바르트 항목의 책들도 다시 정비해봐야겠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11권으로 예정돼 있는 '블랑쇼 선집' 가운데 여섯 번째로 나온 책이다. 이제 반환점을 돈 셈이고 앞으로 5권이 더 나올 예정이다. 짐작엔 거의 다 구입한 듯싶다. 예전에 나온 대표작 <도래할 책>(<미래의 책>으로 나왔었다)과 <문학의 공간>도 다시 구입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카오스의 글쓰기>라고 제목이 붙어서 좀 생소하긴 했는데, 보통 연보에서 <재난의 글쓰기>라고 번역되던 책이다. '재난'이라고 옮기던 'desastre'를 왜 '카오스'라고 옮길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선 역자가 자세한 설명을 서두에 붙였다. 

 


똑같이 선집이 나오고 있는 벤야민의 경우 <카프카와 현대의 미로>가 미간인데 블랑쇼의 경우에도 목록에만 있고 <카프카에서 카프카로>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독일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비평가들의 카프카론을 비교해가며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기대를 모으는 '빅매치'다. 흠, 이런 책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좀 부족하다...

 

13.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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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제목만 보고 구입한 책 가운데 하나는 윌리엄 앨런 닐슨이 엮은 <열린 인문학 강의>(유유, 2012)다. 아, 부제도 보긴 했다. '전 세계 교양인이 100년간 읽어온 하버드 고전수업'. 하버드대학의 고전강의를 엮은 책으로만 대충 짐작했는데, 어제 책을 펴보니 '하버드 고전수업'은 '하버드 클래식 강의' 혹은 '하버드 클래식 해설강의' 정도의 의미였다. 원제가 'Lectures on the Harvard Classics'이기 때문이고, 'Harvard Classics'은 일명 '5피트 책꽂이'로 불린 50권짜리 고전 선집을 가리킨다. 이 선집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베하의 <하버드 인문학 서재>(21세기북스, 2010)를 참고할 수 있다. 우리로 치면 <권장도서 해제집>(서울대출판부, 2005) 같은 성격의 책이라고 할까.

 

 

하버드 클래식의 기획자는 당시 40년간이나 총장을 지냈던 찰스 윌리엄 엘리엇이고, 이 클래식 해제의 책임 편집자가 영문과 교수였던 윌리엄 앨런 닐슨이다. 그리고 책이 출간된 게 1914년. '전 세계 교양인이 100년간 읽어온'이라고 할 때 '전 세계'란 말은 과장이지만 '100년간'은 맞는 말이다. 딱 100년전 책이니까. 역자 후기에는 이렇게 설명돼 있다.

 

<열린 인문학 강의>는 '하버드 고전'(Harvard Cassics)이라는 총서의 51번째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51번째 책은 '하버드 고전' 50권을 완간하고 나서 고전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일종의 길잡이 역할을 하려고 기획된 강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인문학 분야의 강의를 번역하되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부분은 오랜 고민 끝에 덜어냈습니다.  

그러니까 완역은 아니고 인문학 관련 분야를 선별해서 옮겼다는 얘기다(완역한다면 물론 책이 훨씬 두꺼워질 것이다). 검색해보니 책의 전체 목차는 아래와 같고, 원문도 읽어볼 수 있다(http://www.bartleby.com/60/).

 

CONTENTS
Bibliographic Record
NEW YORK: P.F. COLLIER & SON COMPANY, 1909–14
NEW YORK: BARTLEBY.COM, 2001
 
Editors
Introductory Notes
 
History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Robert Matteson Johnston
  2. Ancient History, by Professor William Scott Ferguson
  3. The Renaissance, by Professor Murray Anthony Potter
  4. The French Revolution, by Professor Robert Matteson Johnston
  5. The Territorial Development of the United States, by Professor Frederick Jackson Turner
 
Poetry
  1. General Introduction, by Carleton Noyes
  2. Homer and the Epic, by Professor Charles Burton Gulick
  3. Dante, by Professor Charles Hall Grandgent
  4. The Poems of John Milton, by Dr. Ernest Bernbaum
  5. The English Anthology, by Carleton Noyes
 
Natural Science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Lawrence J. Henderson
  2. Astronomy, by Professor Lawrence J. Henderson
  3. Physics and Chemistry, by Professor Lawrence J. Henderson
  4. The Biological Sciences, by Professor Lawrence J. Henderson
  5. Kelvin on “Light” and “The Tides”, by Professor W. M. Davis
 
Philosophy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Ralph Barton Perry
  2. Socrates, Plato, and the Roman Stoics, by Professor Charles Pomeroy Parker
  3. The Rise of Modern Philosophy, by Professor Ralph Barton Perry
  4. Introduction to Kant, by Professor Ralph Barton Perry
  5. Emerson, by Professor Chester Noyes Greenough
 
Biography
  1. General Introduction, by William Roscoe Thayer
  2. Plutarch, by Professor W. S. Ferguson
  3. Benvenuto Cellini, by Professor Chandler Rathfon Post
  4. Franklin and Woolman, by Professor Chester Noyes Greenough
  5. John Stuart Mill, by Professor O. M. W. Sprague
 
Prose Fiction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W. A. Neilson
  2. Popular Prose Fiction, by Professor F. N. Robinson
  3. Malory, by Dr. G. H. Maynadier
  4. Cervantes, by Professor J. D. M. Ford
  5. Manzoni, by Professor J. D. M. Ford
 
Criticism and the Essay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Bliss Perry
  2. What the Middle Ages Read, by Professor W. A. Neilson
  3. Theories of Poetry, by Professor Bliss Perry
  4. Æsthetic Criticism in Germany, by Professor W. G. Howard
  5. The Composition of a Criticism, by Dr. Ernest Bernbaum
 
Education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H. W. Holmes
  2. Francis Bacon, by Dr. Ernest Bernbaum
  3. Locke and Milton, by Professor H. W. Holmes
  4. Carlyle and Newman, by Frank Wilson Cheney Hersey
  5. Huxley on Science and Culture, by Professor A. O. Norton
 
Political Science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Thomas Nixon Carver
  2. Theories of Government in the Renaissance, by Professor O. M. W. Sprague
  3. Adam Smith and “The Wealth of Nations”, by Professor Charles J. Bullock
  4. The Growth of the American Constitution, by Professor W. B. Munro
  5. Law and Liberty, by Professor Roscoe Pound
 
Drama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George Pierce Baker
  2. Greek Tragedy, by Professor Charles Burton Gulick
  3. The Elizabethan Drama, by Professor W. A. Neilson
  4. The Faust Legend, by Professor Kuno Francke
  5. Modern English Drama, by Dr. Ernest Bernbaum
 
Voyages and Travel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R. B. Dixon
  2. Herodotus on Egypt, by Professor George H. Chase
  3. The Elizabethan Adventurers, by Professor W. A. Neilson
  4. The Era of Discovery, by Professor W. B. Munro
  5. Darwin’s Voyage of the Beagle, by Professor George Howard Parker
 
Religion
  1. General Introduction, by Professor R. B. Perry
  2. Buddhism, by Professor C. R. Lanman
  3. Confucianism, by Alfred Dwight Sheffield
  4. Greek Religion, by Professor Clifford Herschel Moore
  5. Pascal, by Professor C. H. C. Wright

 

정리해보자면 <열린 인문학 강의>의 더 적절한 제목은 <하버드 클래식 강의>라는 점. '100년 전' 책이라는 게 흠일 수 있지만, 당시 하버드대학 최강 교수진이 대거 참여한 강의라는 점, 인문학 분야를 선별한 번역이라는 점 등이다...

 

1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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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하워드 진의 <왜 대통령들은 거짓말을 하는가?>(일상이상, 2012)이다. '시민권력을 위한 불온한 정치사'가 부제.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올해 나온 원서(<이뤄지지 않은 역사의 약속>) 자체가 하워드 진의 유작이다.

 

 

번역본의 제목이 저자가 다루는 다양한 범위의 이슈들을 축소시킨 감이 있는데, 지난 1980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의 진보적 잡지 <프로그레시브>에 실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진의 마지막 저작이자 유작이 이 칼럼집인 셈이다. 책상 가까이에 있길래 아침에 무심결에 집어서 몇 쪽 읽어봤는데, 이 걸출한 역사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 그리고 빼어난 교육자의 면모를 두루 확인할 수 있어서 '하워드 진 입문서'로도 아주 요긴하다 싶다.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 옆에 나란히 꽂아둘 수 있을까. 한 인터뷰 꼭지에서 자서전의 제목을 왜 그렇게 붙였느냐고 물으니까 하워드 진의 대답은 이렇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말이냐고? 강연장에서 나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내 자서전의 제목을 뭐라고들 잘못 말하는지 아는가? "중립적인 현장에서는 자신을 훈련시킬 수 없다(You Can't be Training in a Neutral Place)"라고 한단 말이지. 그런 점을 노렸다고 할 수 있는데 '중립'과 '기차', '훈련'이란 말이 서로 엇갈려 이 제목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한 것이었다.(53쪽)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하워드 진의 가장 큰 미덕은 모든 이슈들에 자신의 관점을 아주 쉬운 언어로 명쾌하게 전달한다는 점인데, 가령 진보의 핵심 가치로서 평등주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보적 가치의 핵심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고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과 필요한 것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 있다는 생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그 어디에서든 불평등은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덧붙이기를, "그렇다고 내가 완벽한 평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현실에서 성취하기엔 어렵다. 내 앞에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스웨터는 내가 입고 있는 스웨터보단 좋다. 그러나 우리가 둘 다 스웨터를 입고 있다는 사실, 그게 중요하다."(11쪽)

이런 '스웨터론' 같은 언어가 우리에겐(더구나 요즘 같은 대선 국면에선) 더 많이, 그리고 절실하게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진은 상당히 많은 분량을 반전에 대한 열정적 옹호에 할애하고 있는데, 번역본 제목의 빌미가 된 '2000년 미국 대통령 후보들의 거짓말'에서는 당시 미국 대선후보들의 대외 정책 공약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대외 및 군사 정책에 대해서는 아예 무슨 변화에 대한 말 자체를 입밖에 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 모두가 정당소속을 불문하고, 경쟁적으로 자신들이 국방부를 지지하고 있으며 미국의 군사력 증강을 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습게도 이건 무슨 육체미 과시하는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 나가 근력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보다 많은 바디 빌딩 기구를 사겠다면서 우리에게 그 돈을 다 내라고 하고, 대회에서 우승하겠다면서 동네 뒷골목에서 다른 애들을 죄다 괴롭히고 자기가 대장인데 지면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고 우기고 있는 식이다.

우리가 진정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이라면, 전 세계 인구의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 미국이 전 세계 부의 25퍼센트를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 후보를 지지할 수 있겠는가? (...) 미국인들을 뺀 나머지 전 세계 인구 96퍼센트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바로 우리 미국의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자존심이 있다면 이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대통령 후보들에게 어떻게 지지를 표명할 수 있겠는가? (94쪽)

에둘러 말하지 않으며 말에 군더더기가 없다. 2000년 대선이면 좀 지나간 시점의 얘기지만, 그렇다고 시의성이 만료된 것도 아니다. 최근의 미 대선과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대선에 적용해봐도 그렇다. 진의 말대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두루뭉술하게 '좋은 애기들'만 늘어놓기보다는 좀더 확실하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공표하는 후보가 앞장서 나왔으면 싶다. 어려운 가치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좋은 것과 필요한 것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 있다"는 걸로도 충분하다. 미국의 양심, 하워드 진조차도 가져보지 못한 정부를 우리는 가질 수 있을까. 기대와 염려가 교차한다...

 

12.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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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도 꽤 많은 책들이 출간됐지만 희소성이라는 면에서 단연 두드러진 책은 야콥 폰 윅스퀼(1864-1944)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도서출판b, 2012)다. 일반독자가 윅스퀼이란 이름을 기억하려면 아마도 에른스트 카시러나 들뢰즈를 경유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내 경우엔 학부 때 읽은 카시러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처음 '윅스퀼'이란 이름을 접하고 궁금해한 기억이 있다. 책을 펼치자 마자 나오는 이름이 '윅스퀼'이고 '환경세계(Umwelt)'라는 개념이었다. 그 윅스퀼의 주저가 바로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다.

 

 

책갈피에 소개된 윅스퀼의 약력은 이렇다. "윅스퀼은 에스토니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80세의 나이에 카프리 섬에서 사망했다. 동물학을 공부한 뒤 근육생리학 연구를 했다. 그는 생산적이고 독창적인 학자였으며 백여 권의 과학서를 썼다. 현대생태학의 창안자라고도 할 수 있는 윅스퀼은 주저인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환경세계(Umwelt)라는 용어를 규정하고, 생태계들에 관한 연구가 생명체들의 행동에 관한 연구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핵심은 환경세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생명체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윅스퀼은 첫 장에서 진드기와 진드기의 환경세계를 다룬다. 다행인 것은 이 책이 "일반 독자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환경세계 이론을 쉽게 풀어쓴 책"이라는 점. 그것은 카시러가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 자신의 철학을 쉽게 풀어쓴 것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카시러에 관한 교양상식은 무엇일까. 신칸트학파에 속한다는 점, 주저가 <상징형식의 철학>이라는 점, 그걸 간추린 책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점, 등등. 내가 열거할 수 있는 게 그 정도이니 딱 그만큼이 교양상식일 것이다(오래 전에 <인간과 문화>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은 이후에 - 이 두 권은 같은 책을 옮긴 것이다 - 특별히 그를 탐독한 기억이 없으니 나는 전문가적 식견이라고 할 만한 걸 갖고 있지 않다). <상징형식의 철학>은 전3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인데, 국내에는 제1권 언어와 2권 신화적 사고가 번역돼 있다.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돼 표지가 통일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두 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가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이고 2부는 '의미의 이론'이란 제목을 갖고 있다. 알고 보니 윅스퀼이 각각 1934년과 1940년에 발표한 책을 합본한 불어본을 옮긴 것이어서 체제가 그렇다. 분량이 많지 않아 합본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다행스럽다. 찾아보니 영어본도 합본 형식으로 돼 있다.

 

다시, 윅스퀼의 관점은 무엇인가. 옮긴이 후기를 참고하면, 그의 의도는 "동물을 단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세계를 갖는 하나의 주체로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세계,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의 고유한 환경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다. 책의 부제는 '보이지 않은 세계의 그림책'인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세계와 동물들의 여러 세계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들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생물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무시돼 왔다고 하는데(현재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엔 기본 관점이 아닌가 싶다.

 

하여 오랜만에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 윅스퀼과 카시러를 연이어 읽는 독서계획도 이번 가을에는 세워봄직하다. 거기에 들뢰즈도 덧붙이면 한결 호사스러워운 독서가 되리라. 뒷표지에 인용된 들뢰즈의 말이다.

가령 거미와 거미줄, 벼룩과 머리, 진드기와 포유류의 피부 얀간, 이런 것들이 철학적 짐승이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아니다. 정감을 촉발시키는 것, 변용할 수 있는 권력을 실현하게 하는 것을 신호(signal)라고 부른다. 가령 거미줄은 흔들리고, 머리는 주름지고, 피부는 노출된다. 광막한 검은 밤의 별들처럼 오직 몇몇 기호(signe)들만이 있다. 거미-되기, 벼룩-되기, 진드기-되기, 강하고 모호하고 완고한 하나의 미지의 삶."

 

12, 0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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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치과에 잠깐 가는 길에 이번주 시사IN(262호)을 손에 들었는데 문화면 특집기사가 '영화평론가, 절망 범죄를 말하다'이다. 김용언의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강, 2012)과 김봉석의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예담, 2012), 두 권의 책을 빌미로 한 인터뷰기사.  

 

 

책은 모두 구해놓고도 아직 손에 들진 못했는데, 기사 덕분에 대략 윤곽은 잡을 수 있었다. 범죄소설의 역사를 다룬 줄리안 시먼즈의 <블러디 머더>(을유문화사, 2012)도 손이 닿는 곳에 있는 책이지만 아직 건드리지 못했다. 보통은 여름에 읽기에 좋다고 하지만 추석 연휴 때 하루 몰입해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두 저자는 모두 잡지에 몸을 담았다는 것 말고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즐겨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각각 흥미롭게 읽은 작품들도 언급하고 있는데, 김용언 평론가는 정유정의 <7년의 밤>(은행나무, 2011)에 대해 "범죄소설을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스릴러의 장점을 잘 구현했다"고 평했고, 김봉석 평론가는 멕시코의 마약전쟁을 그린 돈 윈슬로의 <개의 힘>(황금가지, 2012)을 추천도서에 포함시켰다. 마약범죄소설의 수작이라 한다.

 

 

개인적으론 범죄소설, 하면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 아무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일 수밖에 없는데(비록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작가도 독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작품이지만 '블러디 머더'의 대표작 아닌가!), 이번에 김희숙 교수의 새 번역본이 출간돼 역시나 연휴의 읽을거리 목록에 포함시켰다. '참회자의 고독한 감방에 갇힌 축복받은 죄인'이란 작품 해설만이라도 필독해봄직하다.

 

다시, 기사로 돌아와 두 영화평론가의 한 마디씩을 옮겨본다. "나도 어쩌다 내 안의 어떤 존재(괴물)에 대해 느낄 때가 있다. 스스로 갉아먹힐 것 같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무슨 일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혹시 운이 좋아 여기 있는 건 아닌가."(김용언) "나는 휴머니즘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학살을 저질렀는데... 내가 관심을 가지는 건 어둠이다. 하드보일드 소설도 마찬가지다. 뒤로 갈수록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어둠'이 있다."(김봉석)

 

종합하자면, 우리 안의 어떤 '괴물'과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어둠'이 결국은 범죄소설과 하드보일드에 탐닉하게 만드는 동인인지도 모르겠다...

 

12.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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