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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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작년 일본 문단 최고의 화제작이라 불릴 만한 소설이다. 2009년 5월에 일본 현지에서 출간되어 수백만 부가 팔려나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도 우리나라에 3개월만에 번역 출간되어 현재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걸 보면, 이제 우리나라와 일본의 출간 시차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듯하다. <고백> 역시 우리말로 소개되기까지 딱 1년 정도가 걸린 셈이라 우리 독자들은 미나토 가나에가 대체 어떤 책을 썼기에 일본 열도를 그토록 진동시켰는가를 비교적 빨리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백>은 2008년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아마존 재팬 상반기 소설부문 2위, <소설 추리> 신인상, 무엇보다 서점직원들이 직접 가장 팔고 싶은 책을 뽑는 2009년 일본 서점대상에도 1위로 올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밀리언셀러에 조금 못 미치는 판매고를 올린 걸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비평계뿐 아니라 독자들의 눈도장까지 확실하게 찍었다. 데뷔작이 이 정도라니 앞으로 연거푸 몇 작품이 미끄러지지 않는 이상 성공의 탄탄대로에 오른 행복한 작가라 할 수 있겠다.



필자는 지금은 출판사에 다니지 않지만 몇 년 일을 한 덕에 편집자 지인이 제법 있다. 덕분에 아직 서점에도 완전히 깔리지 않은 <고백>을 우연히 남들보다 빨리 받아들 수 있게 되었는데, 가뭄에 콩나듯 이런 호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게 출판계에 몸담았던 거의 유일한 장점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대단한 화제작이라는 걸 작년부터 알고 있었기에 출판사에 다닐 때 판권을 사자는 건의를 한 적이 있다. 물론 윗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해 계약을 하지는 못했고 나오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만 하며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아는 분이 다니는 출판사에서 판권 계약을 해 이렇게 멋진 책으로 만들어주었으니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이 책이 그렇게 내가 계약을 따내고 싶어했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을까, 만약 내가 이 책을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등등 책을 읽기 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당시 시각은 새벽 0시 30분. 늦었으니 조금만 읽다 자야지 생각하고 몇 장을 넘겼는데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새벽 3시 15분. 조금의 딴 생각이라든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든가 하는 일체의 딴 짓을 할 수 없었다. 경악, 또 경악. 대단한 몰입감이었다.



<고백>의 도입부는 어느 중학교 1학년 여교사가 학년이 끝나는 종업실 날 반 아이들에게 1년간의 소회를 담담히 털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교사가 이제 7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자, 아이들은 술렁거린다. 이유를 알고보니 몇 달 전 그녀의 아이가 사고로 죽었기 때문. 싱글맘인 여교사는 매주 교무회의가 있어 늦게 끝나는 수요일에는 아이를 유치원에서 미리 데려와 양호실에서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나 사고가 생긴 그날, 아이는 양호실을 빠져나와 학교 수영장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실수로 발을 디뎌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려나 보다, 하고 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릴 때, 여교사는 충격적인 말을 던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직하는가? 딸은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우리 반 학생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책을 덮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대체 이날 무슨 일이 생겼길래, 하며 홀린 듯이 책장을 넘겼다. 그래서 마침내 드러난 이날의 비밀도 충격적이지만, 어린 나이로 인해 법으로 만족할 만큼 처벌하기 힘든 소년범들에게 여교사가 개인적으로 감행한 복수의 진상이 드러나는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놀라웠다. 머리가 쿵쿵 울리고, 먹은 것이 일시에 올라오는 기분이랄까(이 책을 읽어보면 내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그야말로 진짜 '올라온다').



여기까지가 <고백>의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던 단편 '성직자'의 내용이다. 사실 <고백>은 이 '성직자' 편에 다섯 개의 뒷이야기를 더 붙여 장편으로 만든 소설이다. 원래 단편으로 썼던 내용을 장편으로 클로즈업했다고 할까. 각 장의 제목은 1장 '성직자', 2장 '순교자, 3장 '자애자', 4장 '구도자', 5장 '신봉자', 6장 '전도자'로 되어 있으며, 20페이지 남짓한 6장을 제외하고 모두 50페이지 내외라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지만 어떤 두꺼운 책도 주기 힘든 강렬함이 있다. 각 장마다 1장에 등장했던 여교사뿐 아니라 범인A와 범인B,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같은 반 소녀 등 사건과 관계된 등장인물 개개인의 고백 형식으로 이뤄져 있어 누군가의 충격적인 비밀을 몰래 엿듣는 듯한 몰입감이 훌륭하며 형식적으로도 통일성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단순히 재미로도 빼어나지만 <고백>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만 14세 이하의 소년범 문제, 범죄 가해자의 인권에만 신경 써 정작 피해자의 인권은 실종되는 씁쓸한 상황,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심판하는 일이 윤리적으로 옳은 문제인가 하는 등 여러 가지 주제의식도 아울러 담고 있어 독서를 마치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



작가 미나토 가나에는 고교 교사 경력이 있다는데, 그 경험을 살려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사와 제자 간의 참혹한 복수극을 다룬 이 책을 현실감 넘치게 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잘한 복선 하나조차도 나중에 끔찍한 복수의 도구로 사용되니 모든 장면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라. 데뷔작부터 미야베 미유키의 스토리텔링과 기리노 나쓰오의 강렬함을 아울러 선 보인 필력을 봤을 때 앞날이 유망한 작가라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겠다. 1장 '성직자'가 원점이 된 소설이니만큼 1장의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지만 소설 전체의 결말이 드러나는 6장 또한 끔찍하리만큼 충격적이다. 물론 소설 전체적으로도 어디 한 구석 나무랄 데 없이 빼어나고. 이 독후감을 쓰면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낱말이 충격, 경악, 끔찍 등인데 아마 앞으로 읽을 누구나가 다 동의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자신의 제자에게 비정한 제재를 가하는 교사가 나오는 소설이라 도덕적인 면에서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좋아할 사람만큼 혐오하게 될 사람도 분명히 나오리라 본다. 그러나 이 책을 좋아하게 될 독자든 반대로 거품을 물고 씹을 독자든, 내가 한 가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는 건 누구든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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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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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읽는 사립탐정 소설이다. 베트남 전 참전용사 출신의 엘비스 콜은 파트너 조 파이크와 함께 LA에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엄마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반해 이름을 엘비스로 개명시켰다는 재미난 일화를 가지고 있는 그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농담을 일삼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베트남 전 때 만난 조 파이크는 과묵하고 악당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병기다. 이렇게 성격은 달라도 두 사람은 큰 공통점이 있으니 둘다 정의감이 무척 강하다는 것, 그리고 약한 자의 슬픔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엘비스는 바람나서 집을 나간 남편을 찾아달라는 엘런의 의뢰를 받아들이는데, 할리우드 에이전트였던 엘런 남편의 실종을 조사하면 할수록 이 사건이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베트남 전 참전용사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읽는 동안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리쎌 웨폰>이 떠올랐다. 마침 <리쎌 웨폰>과 이 책이 발표된 시기도 1987년으로 동일하다. 물론 누가 누구를 표절했다는 건 아니고, 몇 가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얘기다. 두 작품 다 LA 배경에, 주인공은 베트남 전 참전용사들이고, 그에 따라 강렬한 액션 씬이 연속되며, 서로 이질적인 성향의 두 파트너가 점차 가까워지는 걸 묘사하는 일종의 버디 액션 장르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게 느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의 사립탐정 소설에서는 유독 무지막지한 파트너가 자주 등장하는 듯하다. 로버트 파커가 창조한 스펜서와 호크, 할란 코벤의 마이런 볼리타와 윈,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부바 등이 언뜻 떠오르는데, 전부 후자의 인물들이 무시무시한 액션 히어로들이다. 이렇게 모든 게 다른 두 명의 파트너를 작가들이 자주 한 팀으로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각각 개성과 가치관은 달라도 정의 수호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단결해, 사악한 적들을 물리치고 더욱 끈끈한 우정을 만들어가는 파트너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걸 독자들이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책없이 두꺼운 요즘 스릴러들에 비해 370페이지로 깔끔한 분량이다. 엘비스는 끊임없이 배꼽 빠지는 농담을 날리지만, 분량도 그렇고 사건의 구조가 비교적 단선적이라 머리 쓸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작가 로버트 크레이스는 사건의 핵심에 이르러서 마침내 나타나는 지하 세계의 거물 대 엘비스 콜-조 파이크의 정면대결에 소설의 모든 힘을 집중시킨 느낌이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했던 것처럼 얼굴에 온통 붉은 칠을 하고,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적 아지트를 기습하는 결말의 박력은 정말이지 원초적인 쾌감이 넘친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울창한 나무숲으로 뒤덮여 햇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베트남의 정글과 네온으로 번쩍이는 할리우드의 거리는 그 모양부터가 전혀 다르지만, 돈과 마약, 환락으로 미쳐 돌아가는 LA도 베트남의 정글과 비교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느껴진다.

 

액션이 한층 강화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읽는 느낌, 혹은 기가 막힌 농담들이 추가된 로버트 파커의 스펜서 시리즈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수표 하나 제대로 쓰지 못했던 전업주부 엘런이 가정에 닥친 비극 앞에 점점 강해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 마지막에 엘런이 결혼생활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 아님이 확인되는 장면 또한 무척 상쾌하다. 작가는 엘비스 콜 시리즈를 현재까지 총9편 썼고, 파트너 조 파이크가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는 스핀오프 시리즈도 쓰고 있다는데 개인적으로 터프가이 조 파이크 시리즈도 꼭 읽어보고 싶다. 내 생각에는 미 육군 출신의 고독한 늑대 잭 리처가 등장하는 리 차일드의 작품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날 것 같다(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도  담배나 마약보다 강한 중독성을 자랑한다). 재치 있고 여자도 잘 낚는 재간둥이 엘비스 콜과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조 파이크를 만나보게 되어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헤이, 탐정들. 한국에 온 걸 환영해. 앞으로 자주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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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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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전부 16권이나 되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가 출간된 미국에서 이런 광고가 새로 나왔다면 분명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터이다. 하지만 그동안 단 2권만이 어렵사리 소개된 우리나라에서는 이 외침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게 못내 섭섭하다. 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시리즈를 모두 즐길 수 없다니, 지금껏 세상에 선 보였던 어떤 탐정보다 매력적인 매트 스커더의 인생역정을 처음부터 따라갈 수 없다니 이것이이야말로 진짜 비극이지 싶다.

 

뭐 미국만큼은 덜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높이 평가했던 바로 그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하지만 전에 출간됐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1982년작으로 1992년에 발표된 본작 <무덤으로 향하다>와 무려 10년의 간극이 있는 건 안타깝다. 두 작품 사이에 출간된 총 네 편에서 매트가 어떤 사건을 만나고 무슨 변화를 겪는지는 그저 독자들이 추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오래전에 고려원에서 미국에서 <무덤으로 향하다>의 1년 전에 출간됐던 <백정들의 미사>가 나온 적은 있다. <백정들의 미사>는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단 두 문장으로 이뤄진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스피치를 선 보인 바 있는 매트는 알콜 중독으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허름한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무면허 사립탐정이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해 번민하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술을 완전히 끊고(물론 사건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다시 술병을 잡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만), 엘레인이라는 여인과 사귀고 있다.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에 완전히 절망했던 염세주의자 매트가 점차 세상과 화해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매트가 부녀자를 납치한 뒤 잔인하게 강간살해하는 유괴범과 대결하는 <무덤으로 향하다>의 또 하나의 기둥 줄거리는 창녀일을 하고 있는 엘레인과의 로맨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창녀일을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한번 결혼에 실패한 매트는 어쩐지 그녀를 완전히 책임지기가 부담스럽다. 서로에게 번잡한 구속을 하지 않는 지금의 관계가 편하기도 하고. 그러나 점차 엘레인의 손님들이 신경 쓰이고 그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매트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잡아! 속으로 10번도 더 외친 듯. 독자들의 생각보다 두 배쯤 아름다운 로맨스의 결과는 직접 확인하시길.

 

1966년에 데뷔해 수십 편의 장편 추리소설을 남긴 이 장르의 대가 중의 대가 로렌스 블록. 그의 롱런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늘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창의성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1982년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을 보면 살해된 어느 흑인 창녀의 사건을 수사하는 매트의 이야기와 로스 맥도널드, 로버트 파커 류의 하드보일드 소설과 특별한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덤으로 향하다>에 와서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레드 드래건> 같은 작품들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사이코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백정들의 미사>에서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포르노를 찍는 악당들과 대결하기도 하는 등 다루고 있는 범죄의 양상이 매번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추리소설 작가로서 한번 확립된 시리즈의 안정된 공식을 마다하고 매번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며 항상 사회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의 눈을 거두지 않는 로렌스 블록이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그랜드 마스터 반열에 오른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멈추지 않는 창의성을 증명하는 또 한 가지 예는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와 재기발랄한 유머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바니 로덴바 시리즈를 동시에 쓰고 있다는 사실. 낮에는 끝간 데 없이 어두운 탐정 매트의 이야기를 쓰고, 밤에는 방방 뛰는 도둑 바니의 이야기를 쓰는 셈이니 이야기꾼의 재능을 타고난 건지...

 

그밖에 꼭 말해두고 싶은 건 로렌스 블록의 대사 쓰는 실력이다. 흔히 미국식 대화의 전범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에드 맥베인에 비해 전혀 꿀리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넘실대는 미국식 유머와 간결하면서도 통렬한 메시지를 간직한 대사들은 특히 한없이 늘어지기 일쑤인 지루한 대사를 양산하는 얼치기 작가들이 꼭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닐까. '작가들의 작가'라는 세평을 듣는 거장답게 한 수 제대로 배운 느낌이다. 공들여 구상한 플롯을 A-B-C...순서대로 진행시키는 데만 여념이 없는 작가 지망생들에 비하면 매트는 여유가 있다. 사건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미술관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매트. 그러다 단서를 얻으면 그 순간부터 사건은 실타래가 풀리듯 순식간에 진행된다. 느긋한 여유와 빠른 페이스를 교차시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완급 조절에 감탄을 넘어 감동하고 말았다.

 

담배는 어떤 걸 피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모든 게 궁금해지는 매트 스커더는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느리지만 조금씩 착실하게 성장하는 매력적인 탐정으로 필립 말로나 루 아처의 계보를 잇는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소설 속 인물이다. 이 개성 넘치는 매트 스커더 시리즈를 창조한 로렌스 블록 역시 루스 렌들이나 PD 제임스 급의 현존하는 세계 최고 거장으로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영광일 정도의 작가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이 근사한 두 남자의 조합을 놓쳐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방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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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4-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말이요 ㅜ.ㅜ
언제 쌓아놓고 차례대로 볼 수 있을까요...

jedai2000 2009-05-0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리즈 하나만 선택해서 국내에 다 낼 수 있다면 매트 스커더를 고르고 싶네요...쓰고 보니 잭 리처 시리즈도 탐나네요 -_-;;;

앨런 2009-05-25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렇게 감질나게 하지 말구, 시리즈로 촥촥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jedai2000 2009-05-28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런님...저도 소원입니다만 과연 쉽게 이뤄질지 모르겠네요 ㅠ.ㅠ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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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 저는 그녀의 이름을 한번씩 쓸 때마다 웬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저 같은 골수 추리소설 애호가들에게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은 거의 예수와도 같은 경건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요. 오래 되서 누가 한 말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크리스티의 소설을 X선으로 비추면 추리소설의 뼈대가 나올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1퍼센트의 주저도 없이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어요. 적어도 크리스티는 클래식한 퍼즐 미스터리 분야의 창조주요, 그 장르의 완성자라 불려도 손색이 없지요.

 

그러면 크리스티가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준 추리소설의 뼈대란 무엇일까요. 누구나 한 권쯤은 읽어봤다시피(그녀의 판매 부수는 억 부를 가뿐히 뛰어넘죠), 어느 살인사건을 맞아 명탐정이 기회와 동기를 가지고 있던 몇 명의 용의자들 중에서 치밀한 조사와 논리적 추리를 통해 범인을 찾아내는 지적 유희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80권이 넘는 그녀의 소설 대부분이 이런 구조라 빤하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네요. 어찌 보면 천편일률적인 동어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4편의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그 함정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한정된 용의자 안에서 범인을 찾는 그녀의 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10명의 용의자 모두가 범인인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결말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중간에 피살된 판사가 범인이지요. 흔히 추리소설을 읽을 때 시체가 된 인물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독자들의 부주의를 간파한 멋진 트릭입니다. <커튼>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을 본능적으로 의심하고 보는 노련한 크리스티의 독자들마저도 빼놓을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사람, 즉 에르큘 포와로 탐정이 범인입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크리스티의 동반자로 무수한 사건들을 해결한 정의의 상징 포와로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퇴역시키다니, 이쯤 되면 어떻게든 독자를 속이고야 말겠다는 크리스티의 집념에 일종의 장엄함까지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최초의 근대적인 추리소설인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부터 등장해 결코 추리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왓슨'역의 화자(포와로 못지 않게 독자들이 의심을 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독자는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술하는 화자를 무의식중에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가 범인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포와로의 활약을 옆에서 지켜보며 충실히 기록하는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라는 게 밝혀질 때 당시 독자들이 느껴던 충격과 분노(?)는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페어와 언페어 논쟁이 뜨거울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추리소설 기법상의 혁명을 불러온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패기가 놀라운 추리소설, 혹은 크리스티와 추리소설에 대한 분석서, 독서 행위 자체에 대한 일종의 에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의 문학 교수이자 정신 분석가인 저자 피에르 바야르는 첫 장에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작품들을 살펴보며(그녀의 작품 수십 편의 스포일러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옵니다), 그녀의 핵심 트릭을 몇 가지로 정의합니다. '위장'은 말 그대로 범인의 특징을 철저히 위장함으로써 범인의 정체를 숨기는 것으로, 예를 들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범인은 자신을 시체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전환'은 독자의 주의를 교묘히 다른 곳으로 이끌어서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징표들을 나열해 수사에 혼선을 주는 범인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피해자 이름의 알파벳 순서대로 세 건의 살인이 벌어지는 <ABC 살인사건>의 범인은 실은 그중 한 명만이 진짜 목표였지만, 기묘한 연쇄살인이라는 그럴 듯한 외형을 만들어 독자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버렸습니다. '전시'는 너무도 뚜렷한 단서를 독자의 눈앞에 대놓고 제시해 오히려 이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독창적인 트릭입니다. 포의 유명한 <도둑맞은 편지>를 생각해보시길.

 

한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크리스티는 이 방법들 외에 '생략에 의한 거짓말'이라는 새로운 트릭을 선보입니다. 작품의 화자인 셰퍼드 의사가 범인이기 때문에, 그는 기록자임에도 자신의 행적을 모조리 다 적을 수 없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되죠. 자신의 행동이나 심리를 전부 적으면 자신의 범행 장면도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식 퍼즐 추리소설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크로이드 씨는 본디 고집이 몹시 셀 뿐 아니라, 억지를 쓰면 쓸수록 더욱 굳어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파커가 편지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8시 40분, 내가 편지를 마저 읽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한 채 애크로이드 씨의 서재를 나온 것은 정확히 8시 50분이었다. __<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중에서

실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범행은 셰퍼드 의사가 서재에 있다가 별 소득없이 나왔다고 주장한 8시 40분과 8시 50분 사이에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셰퍼드 의사는 위에서 말한 이유에 걸맞게 자신의 구체적인 범행 장면을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의문은 여기서 출발합니다. 한 번 생략을 통한 거짓말(즉 셰퍼드 의사의 기술을 이제 누구도 100퍼센트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을 시도한 셰퍼드가 다른 부분에서 또 비슷한 생략과 거짓말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 본질적인 의문점을 토대로 셰퍼드의 기술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 다른 해석이 가능한 부분 등을 샅샅이 분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포와로조차 완전히 간과한 진범을 찾아내는데 성공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읽은 지가 이미 십여년이 지나 피에르 바야르의 이 책을 보다 재미있게 읽기 위해 다시 한 번 보았습니다. 그렇게 두 권을 순서대로 보니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의 세세한 설명 하나하나가 너무도 쉽고 재기발랄하게 다가오더군요. 아, 모처럼 정말 짜릿한 추리소설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당대의 석학이라는 평가에 부끄럽지 않은 피에르 바야르의 정신 분석과 문학 비평이라는 두 분야를 오가는 화려한 논리에 흠뻑 빠져서 내내 킬킬 거리고 말았다구요. 비길 데 없는 명탐정 포와로가 순식간에 고집불통 망상 늙은이로 떨어지는 꼴이라니, 하하. 그러나 다만 해석망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3장은 문외한이 보기엔 지나치게 어려워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장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미칠 듯이 재미있습니다. 특히 저처럼 크리스티를 숭배하는 분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경전으로 모시는 분들은 이 책을 보며 어쩌면 우상이 망가지는 데서 오는 불경스러운 쾌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네요. 뭐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수준높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망가뜨린다면(?) 하늘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도 그닥 큰 불평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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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4-10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랜만에 이렇게 강력한 지름신을 ;;;;
크리스티 이름 들을 때마다 화장실에서 손 씻고 싶다는 첫문장 읽고 '이건 바로 내 얘기야!!!!' 하면서 구경하러 갔다가 마침 중고가 있길래 바로 주문 버튼 눌러서 결재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_-;;; 땡스투라도 드려야 하는건데 ㅠㅠ 추천이라도 누르고 갑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너무 기대돼요 >_<

비연 2009-04-1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보관함에 쑈옹~ 넣었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해요~

jedai2000 2009-04-13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앗^^ 키티님도 크리스티 신자셨군요~ 넘 반갑습니다. 피에르 바야르의 다른 책에 대해서도 소개하신 글을 보았습니다. 이 친구가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도 깠(?)다니, 너무 보고 싶네요 ㅠ.ㅠ 챕터3이 제 수준에 지나치게 어려웠는데, 다른 장들은 다 너무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보실지 너무 궁금하네요. 좋은 말씀 넘 감사드립니다 ^^

비연님...좋게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드리죠^^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다시 한 번 복기하시고 연달아 읽으심 쵝오의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듯 하옵니다 ^.~

젠장 2009-05-22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 다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는 문장은 못 봤네요. 안돼 ㅠ.ㅠ

jedai2000 2009-05-2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님...죄송합니다 ㅠ.ㅠ 제가 더 눈에 확 띄는 곳에 써뒀어야 하는데...추리소설을 읽을 때 스포일러 뿌리는 사람만큼 증오스런 게 없죠. 본의는 아니지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절규성 살인사건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절규성 살인사건>의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지형도 안에서 '관 시리즈'의 아야쓰지 유키토와 좋은 맞수가 되는 것 같다. 각각 도시샤 대학과 교토 대학의 미스터리 창작 동호회에서 습작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다, 80년대 중후반이라는 비슷한 시기에 아리스는 아유카와 데쓰야, 유키토는 시마다 소지라는 거장급 멘토의 추천을 받고 데뷔했으니 얼추 그 점도 비슷하다. 게다가 확실한 팬 베이스를 만들어준 시리즈를 둘다 보유하고 있는데, 유키토는 위에서 말했듯 그 유명한 '관 시리즈', 아리스는 현재까지 4권이 나온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 그 밖의 대부분의 작품이 포함된 '작가 아리스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미스터리 스타일은 어디까지나 다른데, 유키토가 기발한 서술 트릭과 깜짝 놀랄 만한 반전, 하나하나 기괴한 개성을 가진 저택 등 추리소설다운 분위기를 강조한다면, 아리스는 철저한 논리와 페어플레이 정신, 주인공들의 행동과 심리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인간미 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유키토는 독자의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반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보통 추리소설에서는 금기시되곤 하는 초현실적인 설정도 등장시키는 등 다소 무리한 수도 주저없이 쓴다. 사회파의 거두 마쓰모토 세이초가 리얼리티가 부족한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결점으로 지적했던 '요란뻑적지근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추리놀음'을 아예 시리즈 테마로 잡았으니 역시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느낌도 없다.


반면에 아리스는 유키토처럼 여러 번 뒤집히고 끝에 가서 한 번 더 뒤집는 그런 결말보다는, 살인사건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앞에 제시하고 탐정과 조수가 단서를 하나둘씩 수집해 냉철한 논리로 핵심에 파고 드는 고전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 같다. 배경도 유키토처럼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저택이 아니라, 산 속 휴양림, 외딴섬 등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가 서양 미스터리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엘러리 퀸이라고 하는데, 과연 일본판 엘러리 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비슷한 느낌이다. 왜 반전의 깜짝쇼만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작품 앞부분에 공들여 쌓아둔 설정이 뒤의 반전과 충돌하면서 작품의 내적 구조가 스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악수가 나오기도 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아리스의 작품은 건실한 돌탑을 보는 것마냥 단단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화려한 기술을 가진 유키토는 도미, 아리스는 가자미인가-_-;


꼭 누가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고유한 스타일일 뿐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아니니까. 나는 유키토의 신작을 보면서 이번에는 또 어떤 독특한 저택이 나올까, 무슨 반전으로 뒷통수를 때릴 것인가 기대하며 그가 공들여 안배한 설정들을 즐거이 소비한다. 아리스의 작품을 보면서는 꼼꼼하게 타임 테이블을 그리며, 얘는 이 시간에 여기에 있었으니까 절대 범행이 불가능하지, 하면서 나름의 논리와 소거법으로 범인을 맞춰보려 노력하는 맛에 빠져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다. 과연 추리소설의 재미란 이렇게나 다양한 법이군.


어쩌면 유키토의 장기에 도전하고 싶었던 걸까. <절규성 살인사건>은 '관 시리즈'처럼 6개의 기묘한 외형을 가진 건물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일종의 연작 단편집이다(표제작인 '절규성'은 실체가 있는 건물은 아니다). <월광 게임> <외딴섬 퍼즐>에 나온 에가미 선배와 풋풋한 대학생 아리스가 주인공이 아니라, 국내에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에서 첫 선을 보인 바 있는 임상범죄심리학자 히무라와 추리소설 작가 아리스가 탐정과 조수 역으로 사건을 푼다. 그러니까 '작가 아리스 시리즈'란 말씀. 표제작을 제외하고는 50페이지 남짓한 분량이라 아주 난해하지도, 여러 번 꼬여 있지도 않은 깔끔한 추리 퀴즈를 푸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품들의 수준 편차도 별로 없이 적당한 재미가 다 있어 한마디로 만족스럽게 읽었다. 경천동지할 트릭이나 경악스런 반전은 없지만, 해답을 알고 나면 무릎을 한번 탁 치게 되는 절묘한 맛이랄까(위에서 '관 시리즈'와 비교했지만, 건물의 구조나 특징을 이용한 단편은 몇 개 없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모든 내공이 응축된 그런 대작 추리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지만, 크게 머리 쓰고 싶지 않고 기분 좋게 책장을 열었다가 개운한 맛으로 덮고 싶은 그런 심정의 독자라면 충분히 좋아할 단편집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비행청소년 남녀가 폐쇄된 호텔 설화루에서 노숙하다 그중 남자아이가 추락사하는 '설화루 살인사건'이 인상적이었다. 아직 서로를 감당할 수 없는 미숙한 두 아이가 때로 싸우고 소리치고 서로를 원망하다, 그래도 부둥켜 안고 추위를 이겨내는 따뜻하고도 쓸쓸한 이미지가 뇌리에서 오래오래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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