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시간이 난 김에, 아주 모처럼 추리소설 추천글을 끼적인다. 내용인즉슨 각 알파벳 철자에 해당하는 추리소설 장르 중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최고작을 재미삼아 선정했다. 매우 아주 모처럼 시간이 나는 추리소설 마니아가 있다면 가볍게 읽어봐주시길^^

 

 

 

Assassin - 암살

 

선정작 - <자칼의 날> by 프레드릭 포사이스

 

 

 

 

 

 

 

 

 

 

 

 

 

 

최종 후보작 - <피닉스> by 에이모스 어리처, 일라이 랜도

 

 

 

 

 

 

 

 

 

 

 

 

 

 

암살을 소재로 하는 추리소설 중 넘버원은 누가 뭐래도 프레드릭 포사이스를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1971년작 <자칼의 날>이 아닐까. 프랑스인들이 아직도 존경하는 대통령 하면 첫손에 꼽는 샤를 드골의 암살 지령을 받은 프로페셔널 킬러 '자칼'이 표적에 한 발, 한 발 접근해가는 과정을 포사이스가 기자 출신답게 정교하고 냉철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독립시킨 드골에 반발한 극우파가 실제로 드골의 암살 계획을 세웠던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 물론 암살자 자칼의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니고, 그를 막으려는 르벨 총경의 이야기도 한 축이다. 암살의 세부적인 얼개가 워낙 정밀해 현실 속의 암살자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한국에서는 특히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조총련 문세광이 이 작품을 읽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이가 현재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씨였는데, 두 사람의 이런 문답은 유명하다. "혹시 <자칼의 날>을 읽었나?", "아니, 그 책을 검사 님도 읽으셨습니까?" 그러니 장래 희망이 암살자인 사람은 꼭 <자칼의 날>을 읽으시길... 최종 후보작인 <피닉스> 또한 암살물의 잊지 못할 고전이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이 6일 만에 중동 지역을 제패한 '6일 전쟁'의 영웅 모세 다얀을 노리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킬러 '피닉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피닉스>가 유독 재미있는 이유는 PLO가 다얀의 암살을 외주로 준 전 세계급 킬러가 세 명이라는 것. 읽는 이로 하여금 셋 중 누가 피닉스일까, 그리고 피닉스의 진짜 계획은 무엇일까를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 암살물을 읽으면 항상 막는 사람보다 암살자에 감정이입해서 읽는 경향이 있는데, 어쩌면 나도 마음속에서는 암살을 꿈꾸는 게 아닌가 싶어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죽이고 싶은 사람 하나쯤은 있는 법이잖나. 어쩌면 암살물이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대리만족. 내가 마음속으로 꿈만 꾸는 일을 멋지게 실행으로 옮기는 용자를 응원하는 마음!

 

 

 

Bad Boy - 나쁜 놈

 

선정작 - <불야성> by 하세 세이슈

 

 

 

 

 

 

 

 

 

 

 

 

 

최종 후보작 - <인간사냥> by 리처드 스터크​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안티히어로를 열거하는 데 <불야성>의 류젠이는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된다. 악당이지만 인간미가 있다거나, 세상 모두가 적이지만 내 여자에게만큼은 따뜻하다거나 따위를 기대하지 마라. 이 작품의 류젠이는 생존본능과 악으로 똘똘 뭉친 철저한 악한이니까. 물론 중국 삼합회가 지배한 가부키초를 떠도는 류젠이가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대만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라는 이유로 대만인 조직의 핵심부에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푼돈이라도 벌어 쓰려면 냉정하고 위악적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런 류젠이에게 어느 날 가쿠키초 최대 계파인 상하이방의 보스로부터 버튼이 떨어진다. 보스의 오른팔을 죽이고 잠적한 류젠이의 옛 친구 우푸춘이 가부키초에 다시 나타났다는 정보가 있으니 3일 안에 그를 찾아오라고. 그렇게 못하면 물론 류젠이의 목숨은 없다. 친구가 뭐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류젠이 앞에 우푸춘의 애인이 나타나면서 사태는 갈수록 꼬인다. 과연 류젠이는 3일 안에 우푸춘을 대령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알량한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을까? <불야성>은 대강 이런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이 죄다 악당, 아니면 악녀라서 악의 에너지가 페이지마다 들끓는 희귀한 소설. 아침부터 밤까지 회사에서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절대로 겪을 수 없는 암흑가의 비정한 현실이 너무도 차갑고 뜨겁게 펼쳐져 가히 한 번 잡으면 놓을 수가 없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두 개의 속편들은 그저 그렇다... 최종 후보작인 <인간사냥>은 '파커'라는 삼류 갱이 자신을 배신한 조직에 복수하는 내용. 영화로도 몇 차례나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한 소설인데, 요즘 세대에게는 특히 멜 깁슨이 주연한 <페이백>의 원작이라고 하면 대개 알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커는 후속 시리즈가 수십 편이나 나올 정도로 대인기를 끌었다. 개인적으로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데, 암흑가에 몸담았지만 조직보다는 독불장군으로 행세하며, 농담을 찍찍 날리면서 무표정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녀석이라면 누구나 파커의 또 다른 자아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이다. 모 출판사에서 시리즈가 속속 출간될 예정이라고 해서 기대 중.

 

 

 

Courtroom - 법정

 

선정작 - <무죄추정> by 스콧 터로

 

 

 

 

 

 

 

 

 

 

 

 

 

 

 

최종 후보작 - <이노센트> by 스콧 터로

 

 

 

 

 

 

 

 

 

 

 

 

 

 

 

송사에 휘말렸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소송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라서 그런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래식 탐정하면 역시 변호사 탐정 페리 메이슨이다. 하지만 40~50년대 최고의 인기소설로 명성을 날린 페리 메이슨 시리즈는 지금 보면 어쩔 수 없이 조금 낡은 구석이 있고, 90년대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변호사 출신 작가 존 그리샴의 작품은 법정 추리소설이라기보다 법정을 무대로 한 대중 스릴러에 가까워 베스트로 꼽기에는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변호사 출신의 대가 스콧 터로가 있기 때문이다. 터로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무죄추정>을 아직도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꼭 읽어보라. 바로 이 작품을 법정 추리소설의 올타임 베스트로 꼽는 필자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할 것이다. 80년대 소설계의 대히트작 <무죄추정>은 해리슨 포드가 주연한 <의혹>의 원작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잘 만든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로 기억할 만큼 영화도 충분히 인기를 끌었다. 미국추리작가협회상 등 유독 수상 복이 없었던 게 안타까운데 개인적으로 각종 추리소설 시상식에서 역대 가장 부당하게 무시당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직 검사로 재직 중인 주인공 러스티가 내연관계인 동료 여검사의 살해 용의자가 되면서 엄청난 법정 공방이 벌어진다는 게 주요 골자로 작품 곳곳에 법조인만이 쓸 수 있는 리얼리티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단서가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되는 본격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최종 후보작인 <이노센트>는 스콧 터로가 20년만에 새로 쓴 <무죄추정>의 공식 후속편으로 전작의 인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모조리 출연한다. 세월이 흘러 항소법원의 법원장이자 대법관 후보가 된 러스티가 이번에는 아내의 살해 용의자가 되는 이야기인데, 전작에서 불륜 때문에 그렇게 고초를 겪은 사람이 이번에도 또! 비슷한 일로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참 그게(?) 뭐길래, 하고 절로 한탄하게 된다. 토머스 H. 쿡을 연상시키는 서정성과 아름다운 문장, 진짜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법정 공방의 짜릿함, 본격 추리소설의 트릭과 반전까지 재미난 요소란 요소는 다 갖고 있다. 두 작품 중 하나만 고르라면 어쩔 수 없이 <무죄추정>이지만 속편도 못지않다.

 

 

 

Detective - 탐정

 

선정자 - 셜록 홈스

 

 

 

 

 

 

 

 

 

 

 

 

 

최종 후보자 - 필립 말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냥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실루엣만 보여줘도 셜록 홈스라는 이름이 탁 튀어나올 것이다. 이런 데도 탐정의 대명사로 셜록 홈스 외의 다른 인물을 대겠는가. 이처럼 셜록 홈스는 하나의 신화이며 거대한 세계이자 시대를 뛰어넘는 진정한 아이콘이다. 최근에 인기를 끈 BBC드라마를 통해 또 한 번 재조명된 것처럼 홈스는 태어난 순간부터 언제나 최고였고, 앞으로도 최고의 탐정으로 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셜록 홈스의 인기 요인은 무엇일까? 날카로운 지성과 추리력으로 불가사의한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는 히어로적인 면모가 첫 번째이며, 곤경에 처한 의뢰인을 한결같이 도우려 하는 따뜻한 마음씨, 육체적인 완력에 (일부 분야에 한정되긴 하지만) 지식인다운 교양, 마지막으로 친구 왓슨에게 노상 틱틱대면서도 본질적으로는 그를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는 진실한 우정에 우리가 홀딱 반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추리소설이 존재하는 이상 홈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모습을 바꿔 영원히,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리라... 최종 후보자는 홈스보다는 대중성이 살짝 떨어지지만 홈스와 더불어 대중문화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명 캐릭터, 필립 말로이다. 솔직히 지금까지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 대부분은 필립 말로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인칭 시점으로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고 사색하는 관찰자이자, 내내 세상에 대해 빈정거리면서도 소중한 인간성, 다시 말해 사람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는 철학자. 현대 사회의 온갖 병폐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당당하게 그에 맞서는 비열한 거리의 기사. 정말이지 여지껏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 가운데 이 정도의 매력을 풍기는 남자가 또 있을까 싶다.

 

 

 

Evil - 악(惡)

 

선정자 - 한니발 렉터

 

 

 

 

 

 

 

 

 

 

 

 

 

 

최종 후보자 - 모리아티 교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SES가 있으면 핑클이 있는 것처럼(응?), 탐정이 있으면 그에 대적하는 악이 있기 마련이다. 그동안 수많은 탐정들만큼이나 많은 악당들이 추리소설의 세계 속에서 명멸해 갔지만, 우리 뇌리 속에 지울 수 없는 인물은 단연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교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인육을 즐기는 엽기적인 연쇄살인마지만 심리학이나 철학, 자연과학 등 각종 지식에 통달했으며 고상한 기품과 나름의 취향까지 겸비한 희대의 악당 렉터 교수의 출현 이후로 시시한 실수로 붙잡히는 시시한 악당들은 추리소설의 세계에서 발 붙일 곳을 잃었다. 요즘 독자의 취향대로라면 아이큐 180에 수학이나 천문학, 의학 등에 어지간한 전문지식이 있어야지 그나마 악당으로 행세한다. 그러니 악의 제국을 꿈꾸는 자들이여,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 기자 출신 작가인 토머스 해리스의 <레드 드래곤>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한니발 렉터는 그 후 3편의 후속작에 더 등장하며 저자를 돈방석에 앉게 해주었는데, 역시나 오스카 작품상까지 받은 <양들의 침묵>이 가장 유명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양들의 침묵> 영화에서 렉터 교수를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명연기 덕분에 렉터의 인기가 더욱 올라갔다는 것이다. 소설이 영화의 기반이 되고, 영화는 소설과 등장인물의 인기를 더욱 끌어올려주었으니 행복한 윈윈 사례랄까. 비디오가 라디오스타뿐 아니라 소설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현대 대중문화계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최종 후보자인 모리아티 교수는 셜록 홈스의 영원한 맞수이다. 코난 도일의 업적 중 단연 최고는 역시 추리소설의 대중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영웅(홈스)이 충실한 사이드킥(왓슨)과 함께 슈퍼 빌런(모리아티)과 대적한다는 영웅소설의 공식을 확립한 점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수천 가닥의 줄로 된 범죄의 집을 치고, 그 한가운데에서 각각의 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거미'인 절대악 모리아티야말로 진정한 홈스의 라이벌이다. 

 

 

 

Future - 미래

 

선정작 - <별의 계승자> by 제임스 P. 호건

 

 

 

 

 

 

 

 

 

 

 

 

 

 

최종 후보작 - <강철도시> by 아이작 아시모프

 

 

 

 

 

 

 

 

 

 

 

 

 

 

SF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일부 마니아층을 제외하고는 '공상과학'이라고 불리며 폄하를 당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공상'이 어떻게 논리와 이성을 중시하는 추리소설과 어울리겠는가,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잘 쓴 SF소설은 대개 허무맹랑한 공상에 그치지 않고, 과학에 기반한 정교한 가설과 상상력을 내세우므로 이것저것 따지기 좋아하는 논리적인 추리소설과 잘 결합한다. 하긴 단서만 공정하게 주어지고, 주어진 물리법칙에만 충실하다면 명왕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달에서 발견된 우주복 입은 인간 사체(놀랍게도 연대 측정 결과 지금으로부터 5만 년 전의 인간이다)의 비밀을 파헤치는 <별의 계승자>는 탁월한 SF요, 추리소설이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그 사체에 관해 각종 가설을 내세우며 논리 대결을 펼치는, 액션보다는 말만 많은 소설이지만 그 가설들이 하나같이 흥미진진해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도출되는 진실에는 그야말로 헉 소리가 절로 난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너무X100 재미있는 소설이니 웃돈을 주고라도 꼭 구해보시길...<강철도시>는 SF추리소설의 최고작을 뽑을 때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걸작. 외계의 지배를 받게 된 식민지 상태의 지구 형사가 외계인이 만든 로봇 형사와 더불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내용으로 <별의 계승자>보다는 훨씬 정통적인 추리소설의 형태를 갖고 있다. SF의 대가 중의 대가인 아시모프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특히 좋아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흑거미 클럽>이라는 단편 추리소설집을 낸 적도 있다. 그런 아시모프가 본인의 장기인 SF에 추리를 제대로 결합시켜 멋진 화학작용을 일궈낸 작품.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인간과 로봇의 우정 또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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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유다의 별 - 전2권 유다의 별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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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여름을 맞아 변호사 탐정 고진이 등장하는 네 번째 작품 <유다의 별>이 출간되었다. 전작 <정신자살>이 굉장히 만족스러워 꽤나 기대를 하고 읽었는데, 여러모로 전작을 능가하는 지점이 눈에 띄어 공히 작가의 최고작이라고 봐도 좋을 듯싶다. 이 작품 이전에 나온 시리즈들이 죄다 주인공 고진이 철저하게 가상의 사건 속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다뤘다면, <유다의 별>은 일제시대 악마의 사교 집단 '백백교'를 주요 소재로 삼아 본격 추리소설 애호가뿐 아니라 더 넓은 독자층을 품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물론 작가는 기록된 살인 및 암매장 피해자 숫자만 300명이 넘는 희대의 사교를 책에 살짝 흘려넣어 독자의 반짝 호기심만을 자극하는 용도로 쓰진 않았다. 도진기 작가는 그렇게 얄팍한 추리소설가가 아니다. 백백교라는 흥미로운 모티브가 작품 전체의 줄거리와 주제에 호응하여 매력적으로 쓰인다는 점을 보증한다.

 

 

<붉은집 살인사건>으로 데뷔했을 때는 현역 판사라는 점이 도진기 작가의 최대 홍보 포인트였다. 그때도 트릭 제조 능력은 탁월했지만 문장력이나 구성에서 어느 정도 아마추어의 느낌이 있었다면, 어느새 여섯 번째 소설을 낸 지금은 원래 좋았던 트릭과 반전은 여전히 좋은데다 언급한 단점들도 전부 극복해 읽는 맛이 출중하다. 어쩌면 도진기 씨도 <유다의 별>을 작가생활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대작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의 재미가 다채롭다. 전매특허인 밀실살인이 두 건이나 등장해 중심을 잡아주고 암호풀이와 보물찾기로 잔재미를 더한다. 백백교를 등장시켜 팩션의 맛까지 전달하며 진범이 세 번이나 뒤집히는 반전도 갖추고 있어 한마디로 추리소설의 종합 선물세트이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요소들이 중구난방으로 얽히고설키지 않고 적재적소에 투입되어 읽으면서 걸리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 시도한 상하권 구성이라서일까. 분량에 맞춰 고진의 파트너이자 현역 광역수사대 팀장인 이유현의 수사 파트도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열혈 형사인 이유현의 강렬한 개성 말고 다른 형사들은 특별한 성격이나 차별점이 없어 조금 아쉬웠다. 무대가 거의 서울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건도 수사하고 보물도 찾는데, 여행지에서의 견문이나 정서 등을 담은 점은 마쓰모토 세이초 느낌도 풍겨 그 점도 좋았다. 얄밉기로 따지면 역대급인 악역 용해운(도입부에서 밝혀지니 스포일러가 아님)의 묘사가 탁월해, 이 죽을 때까지 때리고 딱 세 대만 더 때리고 싶은 악당을 미치도록 잡고 싶은 이유현의 처절한 심정에 독자가 자연스레 몰입하게 되는 부분도 이 소설의 잘된 점이다. 꼭 용해운이나 이유현뿐 아니라 기타 등장인물, 예컨대 사슴피를 좋아하는 돈의 노예 김성노 노인, 얼굴은 별로라는데 묘하게 매력적인 화미령 변호사 등 새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들도 전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며, 전작들에서 다소 심각해 보였던 주인공 고진은 죽을 때까지 때리고 딱 세 대만 더 때리고 싶은 미치도록 썰렁한 유머를 구사해 독자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등 익숙한 캐릭터의 신선한 면모도 드러난다. 고진 시리즈를 한 권도 빠짐없이 본 독자라면 더욱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바로 직전작인 <정신자살>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정신자살>에 등장한 두 건의 밀실 알리바이 트릭의 완성도가 조금 더 높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다의 별>은 위에 길게 언급한 다채로운 재미의 향연으로 (내 기준에서) 전작보다 살짝 떨어지는 트릭을 충분히 보완하고 있으므로 이 점은 독자들의 취향 차이로 남겨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정신자살>의 최대 악당인 이탁오 박사가 일종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로서 악마적인 상상력을 현실화시켜 독자들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공로는 있지만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인물이라서 유독 현실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유다의 별>의 진범이 더 받아들이기 쉬울 듯하다. 정리하자면 <정신자살>은 추리소설가의 꿈, 머릿속에 잠재한 악몽을 일필휘지로 그려냈다면, <유다의 별>은 추리소설가의 이성, 현실에 바탕을 둔 사건을 세심하고 논리적으로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분명하게 장단점이 갈려지지만 결론은 둘 다 좋은 추리소설이니 독자들이 직접 읽어보고 어떤 게 나와 맞는지 판단하는 게 옳겠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뿐 아니라 도진기 씨의 다른 작품에 유독 '한국식', '한국형' 추리소설이라는 홍보 문구를 붙이는 게 유감이라는 말씀을 좀 드리고 싶다. 대체 한국식 추리소설이라는 게 뭘까? 혹시나 일본이나 서양의 추리소설에 비해 좀 부족하지만 신토불이 아닙니까, 의리로 우리 작가 추리소설도 좀 밀어주쇼, 하는 의미라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도 일본이나 서양의 정통(본격) 추리소설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이니 작품의 재미나 완성도만 내세워도 충분히 독자와 교감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요즘 물 건너온 추리소설들에도 이 정도 고난도의 트릭을 정공법으로 밀어붙여서 독자와 당당하게 정면승부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아직도 대다수의 국산 추리소설이 다른 나라의 수준작에 부족한 점이 상당히 많겠지만 도진기 씨 작품도 도매금으로 평가절하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 첨언했다. 다른 나라 작품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작품이라고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제는 눈치 보지 말고 좋은 건 좋다고 당당하게 말할 때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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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의 섬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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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흑사의 섬>은 오래전부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오노 후유미의 작품입니다. 1980년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의 대부 아야쓰지 유키토와 함께 '교토대 추리소설 연구회'에서 활동했고, 그의 부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입니다. 좋은 시절이라 국내에도 대부분의 신본격 작가들 대표작이 들어와 있어서 어지간히 읽어봤는데, 유독 오노 후유미의 작품은 기회가 없었거든요. 게다가 출신과 달리 그녀의 출세작은 <시귀> 같은 호러소설이나 대히트를 친 <십이국기> 같은 동양풍 판타지라서 딱히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2001년작 <흑사의 섬>은 완전한 본격 추리소설이라기에 더 망설일 이유 없이 붙잡게 되었습니다. 이건 갑자기 생각난 여담인데, 제가 대학 다닐 때 선배 하나가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십이국기>를 '열두 나라의 명기(名妓)'들이 나오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인 줄 알고 다운받았던 적이 있었더랬죠...


 

간단히 말해, <흑사의 섬>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떠올리게 하는, 폭풍우로 고립된 섬에서의 살인사건을 탐정이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듯 본격 추리소설의 영원불멸한 테마에다가 고결한 인간성보다 개화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잘못된 인습이나 사이비 종교 등에 매몰된 섬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이라는 요코미조 세이시 풍미를 끼얹어 자신 있게 내놓은 요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장 비슷한 느낌을 주는 책이라면 역시 세이시의 대표작 <옥문도>를 꼽아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흑사의 섬'을 '검은 뱀의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식 종교가 아닌 '사이비(黑祠)의 섬'을 뜻하는 것이더군요. 장점이나 단점, 혹은 약점이 케익을 반으로 자르듯 선명하게 나뉘는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정하라면 <흑사의 섬의 천일야화>라고 하겠습니다. 탐정이 살인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야차도'라는 섬에 도착한 데다, 이 섬의 절대적인 존재가 증거를 미리감치 전부 은폐해버렸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탐문밖에 없어요. 관계자를 만나 끝없이 증언을 듣고 또 듣는 게 탐정의 조사 내용 전부입니다. 게다가 탐정이 하필이면(?) 십 수 년 전에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과 현재 일어난 두 건의 살인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심증을 가지고 있어서 관계자 한 명씩마다 알리바이를 무려 네 번이나 들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정보의 홍수, 큰따옴표로 시작하는 문장이 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 섬마을 사람들은 다들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건지, 방문객이 별로 없어서 외로웠던 걸까요ㅠ.ㅠ?  반드시 일일이 따져봐야 하는 살인사건이 네 개나 등장하는 책의 내용상 어쩔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해져서 내용을 따라가기 쉽지는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토착 종교와 전근대적인 영주가 여전히 지배권을 행사하는 '흑사의 섬'에 탐정이 당도해 분위기를 잡아가는 초반부는 아주 좋았습니다.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도 입을 모아 그런 일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고 잡아떼는 마을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운 악의는 은근히 소름이 끼쳐 호러소설로 일가를 이룬 오노 후유미의 실력을 엿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이 세이시가 활약하던 1950년대가 아니라 2000년대에 나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과연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죠. 어쩔 수 없이 몰입감이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본격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탐정 역의 시키부는 끈질기고 자기 일에 열심이라는 미덕을 제외하면 거의 매력이 없어요. 사건을 조사하기도 바빠 어떤 인간미를 보여줄 기회도 없었고요. 유감스럽게도 주인공 시키부가 이럴진대, 다른 등장인물들도 백지장처럼 얄팍하게 보이는 건 마찬가지겠지요. 추리소설을 다른 말로 탐정소설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탐정의 성격이 이처럼 평면적이라면 커다란 흠결이 되는 것입니다.

 

 

책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장점이 별로 보이지 않아 낭패로구나 생각할 때 사건의 전모와 진범(그리고 진짜 00)이 드러납니다. 천만다행으로 여기서 상당 부분 점수를 땁니다. 어쩌면 본격 추리소설은 모든 게 뒤떨어져도 트릭만 쌈박하면 적당히 만족하며 책장을 덮을 수 있는데, <흑사의 섬>이 딱 그런 작품이었어요. 여기서부터는 살짜쿵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범인이 두 희생자 후보 여성 가운데 유독 동기가 없는 쪽을 골라서 죽인 것. 그리고 자기들끼리 수십 년간 모여 살아 얼굴을 모르는 주민이 하나도 없는 섬에서 목격자가 범인의 얼굴을 '낯선 이'라고 지목한 것. 이 두 가지 포인트는 대단히 공정하고 분명한 단서들이라서 꼼꼼히 따져보면 독자도 충분히 진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뭐 저도 못 맞췄지만 이런 힌트를 놓치면 너무 분하죠, 흑흑. 명쾌하게 떨어지는 해설이긴 하지만 역시나 텍스트로만 읽으면 꽤 헷갈리는 트릭이라 확실하게 그림으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등으로 각색되면 훨씬 재미있을 작품이라고 사료됩니다.

 

 

430페이지의 힘든 독서를 버티고 마지막 50페이지의 쾌감을 즐길 수 있는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단순히 트릭의 측면에서는 2000년대 이후 일본 본격 추리소설에서 가장 좋은 작품 중의 하나라고도 생각이 들 정도예요.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오노 후유미의 작품이 꽤 만족스러워서 더 찾아 읽어볼 계획입니다.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한계를 새로운 시도로 돌파하는 '신본격' 추리소설 운동을 주창한 일군의 작가들. 결사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맞부딪치게 되는 위기가 있습니다. 새로움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새로움 빼고는 다른 모든 게 허망한 주화입마 식의 작품이 나올 수도 있을 테고, 또 운 좋게 초반에 남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한방으로 성공했다 해도 새로운 걸 끊임없이 반복하면 어느새 그 새로움 또한 낡게 느껴지는 자기 딜레마가 그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신본격은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고 운동 역시 휴지기를 맞은 듯하지만, 젊고 열정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끈질기게 지속했던 작가들이 어느덧 중견이 된 지금도 충분히 멋지고 보기 좋습니다. 오노 후유미도 바로 그런 작가 중의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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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묘점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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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나날 가운데 모처럼 맞은 느긋한 시간, 읽지도 못하면서 산더미처럼 사놓기만 한 추리소설 가운데 무엇을 고를까. 이런 질문만큼 호사스런 고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호사스럽건 궁상스럽건 고민은 어디까지나 고민. 하여 나름 진지하게 따져본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시간이 아니니 재미는 물론 남는 것도 있어야 하며 책장을 다 덮었을 때 진한 감동과 여운까지 주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국내에 소개되는 외국 추리소설은 대부분 그 나라에서 잘 팔리고 평도 좋은 것들이 아닌가. 그러니 어느 것을 골라도 크게 불만족스럽지는 않을 터. 차라리 국적으로 선택할까? 미국, 영국, 일본, 노르웨이...아니면 장르로? 본격, 하드보일드, 스릴러, 첩보... 이쯤되면 더 이상 즐거운 고민이 아니다. 또 하나의 스트레스일 뿐. 이처럼 수없이 쌓인 추리소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 나는 결국 마쓰모토 세이초를 잡게 된다. 나른한 휴식시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식히려고 읽는 책이라면 역시 출간 시기상 고전에 해당하는 세이초의 여유롭고 느긋한 작풍이 딱 어울린다. 더구나 세이초의 작품들은 거의 다 재미있고 남는 것도 있으며, 꽤 높은 확률로 진한 감동과 여운까지 제공하니 가장 안전한 선택일 수밖에 없으리라.

 

 

<푸른 묘점>은 공히 작가의 최고 걸작이라 할 <점과 선>과 같은 시점인 1958년에 집필한 작품이다. 초기작인 만큼 신선하고 생생한 느낌은 있지만 아무래도 같은 시기에 두 작품을 쓰려다 보니 작품들끼리 닮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일본의 각 지역을 철도와 트럭 등으로 오가며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을 구사하는 형태가 <점과 선>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다. 이런 스타일은 1968년작 <D의 복합>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재현되는데, 세이초가 장편만 100편, 단편은 1,000편을 썼다니 이해가 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나중에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썼던가, 저런 트릭을 썼었나, 본인도 헷갈릴 지경이 아니었을까^^ 큰 챕터 안에 서너 개의 짤막한 챕터들이 속해 있는 구성인데, 소 챕터가 끝날 때마다 절묘하게 다음 줄거리를 궁금하게 하는 장면에서 끝나는 걸로 짐작컨대 아마도 토막토막 신문에 연재했던 것 같다.

 

 

도입부의 줄거리는 이렇다. 소설 잡지사 신참 편집자인 여주인공이 원고를 펑크내고 가족과 여행지로 떠난 작가를 닦달하기 위해 편집장의 명을 받고 쫓아간다. 그런데 이 여류 작가는 신경질이 대단한 성격이라 편집자가 같은 여관 지붕 아래에 있으면서 원고를 독촉하는 것을 싫어해, 여주인공은 그녀가 머무는 여관의 바로 옆에 위치한 여관에 숙박한다. 재미있는 건 절벽 밑에 자리잡은 두 여관이 지척에 있으면서도 높은 담벼락을 둘러쳐 서로 오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A여관에서 B여관으로 가려면, A여관이 운영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절벽 위로 올라와 B여관이 운영하는 케이블카로 갈아타고 다시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두 여관의 이용객들은 몹시 불편하겠지만, 닳고 닳은 추리소설 독자들이라면 딱 눈치를 채야 한다. 작가가 굳이 이렇게 인공적이고 복잡한 배경이나 장치를 그린 데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과연 다음 날 절벽에서 추락해 죽은 시체가 한 구 나오는데, 이 양반은 여주인공과도 안면이 있는 추잡한 스캔들 전문 정보꾼이다. 하이에나처럼 썩은 내음을 풍기는 이 추잡한 남자가 여기엔 왜 왔을까, 의문이 있지만 어쨌든 사건은 자살로 처리된다. 문제는 여주인공이 잡지사로 복귀한 다음부터 점입가경으로 확대되는데, 여류 작가는 곧 자취를 감추고 심지어 그녀의 작품 전체가 표절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제기된 것이다.

 

 

탐정 역은 두 명이다. 언급한 여주인공 노리코와 그녀가 은근히 짝사랑하는 편집자 다쓰오. 두 사람은 뭔가 기사거리가 될 만하다는 느낌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처음에는 물리적으로, 종국에는 정신적으로 점차 가까워진다. 개인적으로 출판사를 다녀본 적이 있기 때문에 (비록 50년의 시간 차가 있지만) 하는 일이 나와 대개 비슷했던 두 주인공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나도 예전에 작가 분들 만나서 잠깐이면 끝나는 일을 마친 후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기어코 커피숍에 들러 퇴근시간까지 버티다 들어오곤 했었으니까^^ 물론 나는 그야말로 노닥거렸을 뿐이지만 <푸른 묘점>의 두 주인공은 사건에 관한 추리를 펼친다. 남녀 두 편집자들이 농땡이도 치고, 야근도 하며, 출장도 가는 등 현실적인 직장인의 삶을 살면서 짬짬이 사건에 매진하는 모습에 괜스레 부러워졌다. 내가 다녔던 출판사들은 왜 노리코와 같이 취미를 함께 나누며 가까워질 만한 여성 편집자가 없었던 걸까(물론 그녀들의 생각은 정확히 반대이겠지...).

 

 

각설하고 <푸른 묘점>은 대단히 재미있다. 솔직히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결말부에서는 조금 실망한 것도 사실인데, 일단 살인이 벌어지는 결정적인 순간 우연의 요소가 지나치고, 또 알리바이 트릭이라는 것도 사건을 수사한 경찰의 능력이 그 정도 시시한 잔재주를 못 밝혀낼 정도로 졸렬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우선 평범한 직장인들이 평범한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노리코는 사건을 조사하다가 문득 '책에서만 봤던 셜록 홈스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데, 아마도 그 느낌이란 노상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시달리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의 눈까지 덩달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것일 터. 경찰이 아니니 수사권도 없고, 거대 신문사 기자가 아니라서 그럴싸한 힘도 없는 두 주인공이 오직 끈질긴 노력과 셀 수 없이 세웠다 부수는 가설만으로 진실에 접근해가는 쾌감이 만만찮았다는 말이다. 더구나 이 정도 노력은 우리 같은 갑남을녀도 유사한 일을 맞닥뜨리면 똑같이 따라할 수 있으므로 더욱 몰입감이 생기지 않았을까?

 

 

다음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이 책이 로맨스 추리소설로서 일급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노리코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이지만 그녀의 내밀한 속마음을, 짝사랑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교감을 이뤄가는 두 주인공의 로맨스를 솜씨 좋게 그려낸 작가의 솜씨에 감탄했다. 특히 노리코가 홀로 시골로 사건을 조사하러 갔다가 조사 내용을 보고도 할 겸, 남자에게 안부도 전할 겸 보낸 편지는 행간의 사이사이에 애써 감춰둔 본심이 살그머니 드러나는 듯해 몹시 사랑스럽다. 이렇게 예쁜 편지가 나오는 추리소설은 별로 본 적이 없다. 세이초의 작품을 한 편만 권하라면 단연 <점과 선>을 추천하겠지만, 트릭의 밀도는 좀 떨어져도 깔끔하지 않고 무신경한 남자와 당차면서도 상냥한 여자의 섬세한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푸른 묘점>이 오히려 현 시대에 더 먹히는 작품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독서인구의 대다수가 20~30대 여성이라서.

 

 

<푸른 묘점>은 주인공들이 작품 내내 여행을 떠나는 '여행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견문이나 감상, 정서 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1958년은 일본이 전쟁의 참상을 떨쳐내고 발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서 많이들 여행을 다녔나 보다. 그래서 여행을 테마로 삼은 이 작품도 먹힐 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일본의 버블경제가 절정에 달했던 80년대에 여행 미스터리가 그렇게 대히트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건 여행 미스터리 역시 세이초가 가장 먼저 시도했다는 것. 과연 일본 추리소설의 진정한 거장답다. 간결하면서도 중후한 필치에 품격 있는 내용, 어른 흉내만 내는 게 아닌 진짜 어른스러운 등장인물 등 세이초의 추리소설이야말로 진정한 '성인의 엔터테인먼트'라고 확신한다. <푸른 묘점>의 장점은 7, 단점은 3. 적어도 확실한 재미는 약속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재미있었다면 <D의 복합>도 읽어보시길. 그 작품은 두 '남성' 소설가와 편집자가 여행을 다니면서 사건을 추리한다.

 

 

  

 

       

<스포일러 있는 P.S>

 

어쩌면 <푸른 묘점>은 여성의 허영심이 숨겨진 또 다른 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표절과 도작으로 이름을 날린 여류 작가가 자살한 이유도 정체가 폭로되느니 정점에서 죽겠다는 허영심의 발로였다. 또한 범인으로 드러난 여성은 인간쓰레기를 사랑한 본심을 감추기 위해 유서에서도 그런 뉘앙스만 살짝 풍길 뿐, 한사코 오빠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남자를 죽였다고 '우긴다'. 내가 무척 좋아한 노리코의 편지도 사실은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한테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좋은 이미지로 보이고 싶어 공들여 이 표현, 저 표현을 여러 번 썼다가 지웠을 게 아닌가. 하드한 책만 보다 보니 내가 너무 비뚤어졌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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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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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도라는 묵직한 주제를 다룬 데뷔작 <13계단>으로 홈런을 친 다카노 가즈아키의 복귀작이다. 작년 여름에 사놓고도 688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과 페이지마다 빼곡한 글자를 겁내 안 읽고 버티다가 며칠 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막상 한 번 잡으니까 놓을 수가 없더라. 다 읽고 난 소감은 간단히 말해, 다카노 가즈아키의 현재까지 최고작이라는 것. 최근 일본 추리소설은 연애나 인간관계 등 다소 소소한 테마의 일상 미스터리가 많고, 그 배경이나 설정도 가능하면 평범하게 꾸며 자연스레 독자의 공감을 사는 내용이 인기였던 것 같다. 나와 우리 이웃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듯한 아기자기한 재미의 추리소설, 과연 읽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도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가의 시공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대하고 치밀한 자료조사, 거대하고 진지한 주제를 거침없이 다루는 역작이 그리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한 거니까 조금만 관찰력을 키우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기분의 작품과 이런 정교한 구성과 과학적인 설명, 뛰어난 상상력이 어우러진 소설을 나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어, 하는 기분의 작품. 당연히 둘 중 우열을 가릴 수는 없을 테지만, 역시 대부분의 독자를 진정 감탄하게 만드는 것은 후자이리라. 몹시 거친 분류이지만 <제노사이드>는 바로 후자, 다시 말해 비범한 작가가 열과 성을 다해야만 쓸 수 있어 독자들의 자연스런 존경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제노사이드>는 일본과 아프리카의 두 주인공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일본 쪽 주인공은 얼마 전 지병으로 아버지를 잃은 평범한 약학 대학원생, 고가 겐토. 물론 전공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한 듯 약학 지식이 꽤나 탁월해 평범하다는 말에는 살짝 어폐가 있다(관련 지식이 전무한 진짜 '평범한' 독자들이 보기에는 약학계의 슈퍼히어로다). 겐토의 아버지 또한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지 못했고, 조금 궁상맞아 보이는 언행으로 인해 겐토는 과학자로서 아버지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고 날아온 아버지의 예약 이메일 한 통은 겐토의 평범한 삶을 모험과 진지한 연구로 가득찬 신세계로 안내하는데, 이 부분은 흡사 히치콕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목표 기한 안에 궁극의 신약을 개발할 것. 다만 도처에 위험이 있으니 조심할 것. 겐토는 왜 자신이 이 신약을 개발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정체불명의 적에게 쫓기면서 연구를 계속한다.

 

아프리카 쪽 주인공은 아들이 걸린 불치의 유전병 치료비를 대기 위해 이라크 등 교전지역에서 용병 생활을 하는 전직 군인, 조너선 예거. 예거는 거액의 사례를 약속받고 다른 용병 세 명과 함께 특수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아프리카 콩고로 잠입한다. 그러나 작전 개시에 대비한 모의 훈련에서 예거는 한 가지 의혹을 느끼는데, 왠지 그들의 제거 목표가 어린이의 몸집을 가진 것 같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남의 아들을 죽일 수 있을까? 도덕적 딜레마를 애써 묻어두고 어쨌든 서서히 목표 지역으로 나아가는 예거 일행의 앞을 아프리카의 무자비한 정글 외에도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준군사 조직들이 가로막는다. 겐토의 챕터가 서스펜스 영화라면, 예거의 챕터는 흡사 브루스 윌리스가 나올 듯한 액션영화 같은 모험과 위기의 연속이다. 개인적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는 두 이야기가 어떻게 접점을 이룰지 몹시 궁금했는데, 마침내 하나로 맞닥뜨린 이야기의 본질을 알고 나서 굉장히 감탄했다. 온 사방으로 뻗어 나간 이야기 줄기가 이 정도로 정교하게 맞물린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제목은 '종족 말살'을 뜻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터나 아프리카 부족 간의 격렬한 인종 청소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듯한데, 인류 역사상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는 비극이다. 다만 이 책에서의 제노사이드는 인류와 인류 간의 제노사이드가 아니라는 데 재미의 핵심이 있다. 내용을 전혀 모르고 보면 훨씬 놀랄 일이 많을 듯해, 구체적으로 현 인류의 제노사이드 대상을 밝히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 책에 나오는 인류의 '적'은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비범한 능력을 지녀 현 인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석학들과도 멋진 적수가 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체스 게임처럼 전개되는 두 세력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에 흠뻑 젖어보시길. 약학, 인터넷, 항공, 인류학 등 다양한 전문 영역을 깊이 있는 취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마이클 크라이튼,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선배 과학 스릴러 작가에 부끄럽지 않고, 아프리카에서의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와 그 와중에 마주치는 소년병 등 현대 아프리카의 비극을 그린다는 점에서 후나도 요이치의 모험소설도 생각난다. 어떻게 봐도 모처럼 만난 소설계의 역작임에는 틀림없다. 데뷔작과 몇 편의 후속작들에서 이만한 깜냥을 짐작하지는 못했는데,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낸 작가에 박수를 보내며, 독자들에게도 강력하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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