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의 피 - 상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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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작년인가, 인기 여성 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잘하는 보컬 태연 양의 아버님과 잠깐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워낙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상 깊었던 말씀은 그분의 아버님(태연 양의 할아버님)이 1950년대에 안경점을 여셨고, 아버님은 1980년대부터, 그 아드님(태연 양의 오빠)도 가업인 안경점을 이어받기 위해 안경 관련 학과를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삼대가 같은 일을 한다라. 요즘같이 휙휙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수십 년 세월 동안 한 가족이 대를 이어 같은 일을 한다는 건 당연히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다는 데는 그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준 직업인으로서의 올곧은 자세,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의 삶 전체를 긍정하고 인정한다는 커다란 의미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경관의 피> 역시 경찰이라는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경관 삼대의 이야기를 유장하게 그리는 장편소설이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도처에 부랑아들이 들끓고 범죄가 빈발하는 생지옥이 된 일본(물론 자업자득이다만). 치안을 위해 그저 그런 교육만 몇 달 받으면 경찰이 될 수 있었던 시대다. 막 임신한 아내를 둔 안조 세이지는 생계를 위해 경찰에 투신해 하급 순사가 된다. 처음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다같이 못 사는 처지에 남을 등 처먹는 사기꾼도 잡고, 어려운 사람 돕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물론 제일 좋은 건 단칸방이나마 마련할 수 있어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오손도손 지내는 거지만. 서서히 공을 세워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덴노지 주재소에 부임한 세이지는 몇 년 전 관내에서 벌어진 미모의 남창 살해사건을 끈질기게 조사하지만, 몇 가지 단서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다.

 

듬직한 아버지의 뒷모습을 늘 동경했던 세이지의 장남, 다미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관이 된다. 다미오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다. 바로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는 것. 하지만 다미오가 경찰학교에 입학한 시기는 '전공투'라 불리는 좌파 학생운동이 극심했던 1960년대 초. 다미오는 훗카이도 대학교에 위장 입학해, 흔히들 프락치라 부르는 스파이가 된다. 아버지처럼 평범한 경관이 되어 서민을 돕고 싶었지만, 노도 같은 시대의 흐름이 그의 작은 소망을 외면한 것이다. 정체가 탄로나는 순간, 생명이 위험한 스파이 생활을 몇 년 겪고 정신이 완전히 피폐해져버린 다미오는 이제 폭력남편에 불과하다. 더 이상 스파이짓을 하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간신히 일반 제복경관이 된 다미오는 지역의 평범한 소시민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예전의 꿈을 이루며 서서히 바른 정신을 회복한다. 그러나 아버지 세이지와 관련된 과거 때문일까. 다미오 역시 죽음을 맞게 되고, 이제 바톤은 손자 가즈야에게 넘어왔다. 50년을 넘게 끌어온 일족의 비극의 역사를 해결해야 할 숙명을 가진 가즈야의 활약을 지켜보시길.

 

두꺼운 책으로 2권 분량이지만 숨 쉴 틈 없이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로하는 일없이 담담하게 서술하지만 묘하게 박력 있고, 흡입력이 뛰어나 이게 거장의 솜씨구나, 했다. 작가 사사키 조는 1979년에 데뷔해 모험소설, 첩보소설, 하드보일드 등 다채로운 작풍을 보여왔는데, 특히 태평양 전쟁 당시 스파이전을 소재로 한 1990년작 <에트로프발 긴급전>이 유명하다. 개인적으로는 꽤 마음에 든 작가로 이 작품도 국내에 소개된다니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최근에는 경찰소설에 매진한다는데, <경관의 피>가 '200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베스트 1위에 올라 노장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2008년 일본 미스터리의 정점에 오른 <경관의 피>는 또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일본 현대사를 경관 삼부자의 이야기 속에 담아내 시대소설 혹은 사회소설의 맛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1940년대 세이지의 사건이 강매, 야바위, 들치기 같은 소박한(?) 것이었다면, 1960년대 다미오의 그것은 좌익 세력에 의한 폭탄 테러 등이고, 1990년대 가즈야는 마약이나 권총 밀거래, 동료 경관의 독직 사건 등을 수사하는 것이 시대상을 절묘하게 반영한 듯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러나 미스터리보다는 감동과 인간, 긍지 높은 삶에 방점을 찍은 작품이라고는 해도 미스터리 구조가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더 허약했다는 약점, 또 공공봉사를 위해서라면 다소의 부정은 허용할 수도 있다는 작가의 '경찰관'에서 도덕적 모호함을 강요받는다는 찝찝함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책이든 어떤 작가든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는 달라질 수 있는 법이고, 적어도 나는 읽는 동안 즐거웠다. 무엇보다 경관이라는 직업 속에서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는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할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가족과 직업윤리, 명예와 긍지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경찰의 이미지란 흔히 정권의 시녀로 약한 시민들 때려잡고, 뒷돈이나 받는 불한당 정도에 그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시민의 안녕을 위해 생명을 걸고 분투하는 경찰도 분명히 있다. 앞으로 나쁜 경찰은 나쁘다고 계속 욕하더라도, 좋은 경찰, 훌륭한 경관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시민은 경찰을 돕고, 경찰은 시민을 지키는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경관의 피>같이 경찰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잘쓴 소설이 나와 그런 사회 풍조 조성에 이바지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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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06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 블로그에 멋진 리뷰를 보고 싶으면 제다이님 블로그로 가보래서 와봤읍니다.정말 리뷰 멋지시네요.종종 놀러 오겠읍니다^^

jedai2000 2009-03-1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카스피님^^ 멋진 리뷰라니 완전 감격이어요 T.T 한동안 서재에 안 와봐서 이렇게 기분 좋은 칭찬 글을 못 봤네요. 좋게 말씀해주시는 카스피님 같은 분들 때문에 리뷰쓰는 보람을 느껴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__)
 
아자젤의 음모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항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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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의 러시아는 내게 신비와 낭만으로 가득찬 시대다. 둥그런 지붕의 교회당과 돌바닥을 거침없이 달려가는 사륜마차들.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와 드레스를 차려입고 양산을 쓴 숙녀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차르와 대공, 왕녀, 귀족들, 그리고 요사스런 만능의 라스푸틴까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19세기 문학이나 예술, 철학 사조 등이 비교적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된 데 비해 구소련과 관계된 정치적 문제로(주로 1980년대까지) 제정 러시아에 대해서는 사실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해볼 기회가 적어 어쩐지 더 호기심이 가는 듯하다.

 

<아자젤의 음모>가 1867년을 배경으로 청년 탐정 에라스트 판도린이 활약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자마자 몹시 관심이 가서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읽는 요 며칠 동안 정말 즐거웠고, 좀 과장해서 독서의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그토록 궁금했던 제정 러시아의 뒷골목과 선술집, 경찰서, 호텔, 대저택까지 진부한 표현을 용서한다면 마치 그곳을 직접 거닐어보는 기분이었다. 더구나 이 작품에는 정말 19세기의 고전소설에서 튀어나온 듯한 호감 가는 인물들이 가득하고, 플롯은 요즘의 현란한 미스터리나 스릴러처럼 지나치게 꼬여 있지 않다. 뒤마나 코난 도일, 쥘 베른 등의 작품을 읽듯 즐거운 기분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일급의 대중소설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한때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몰락한 고아 신세가 된 약관의 판도린은 경찰서의 최하급 서기로 출발한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별일도 아닌데 다짜고짜 권총으로 자살한 어마어마한 거부의 아들, 코코린. 다들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 유약해, 하고 말지만 판도린은 자살 직전 그의 행적과 목격자들의 각기 다른 증언, 묘한 유언장 내용에서 심상찮은 느낌을 받고는 월급을 쪼개 독자적으로 수사에 나선다(용의자 추격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월급으로 사려던 빵을 포기하고 오늘날의 택시와 같은 마차를 타는 장면은 심금을 울린다). 코코린의 죽음에 뭔가가 있다는 걸 밝혀낸 판도린은 전모를 파악할 수 없지만 국가 전복을 꾀하는 '아자젤'이라는 조직에 대해 알게 된다. 자, 여기서부터 판도린의 모험은 논스톱이다. 우리의 판도린은 죽음의 위기를 두세 번 겪으며, 혼이 빠지도록 아름다운 두 명의 미인을 만나게 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장기인 숨 참기로 절체절명의 순간에 역전을 일구어내기도 하며, 명석한 추리력으로 결국 아자젤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성공한다. 

 

작가 보리스 아쿠닌은 본명이 그리고리 샬로비치 치하르티시빌리(기, 길다,,)라는데 일본 문학을 평론하고 번역하는 등 러시아 문학계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란다. 아쿠닌이라는 필명은 일본어로 악인(惡人)이라는군. 1998년에 <아자젤의 음모>로 판도린 시리즈를 시작하고 나서 판도린이 활약하는 총 10권의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재미난 건 각 작품마다 추리소설의 소 장르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 <아자젤의 음모>는 음모 추리소설, 동시에 출간된 <리바이어던 살인>은 애거서 크리스티식 본격 추리소설이라니, 판도린 10권을 다 읽으면 추리소설의 모든 맛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발, 정말 제발 전권을 보고 싶다. 사실 시리즈 전작 출간이 얼마나 리스크가 크고, 만만치 않은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지만 판도린 시리즈만큼은 진심으로 전작 출간을 졸라보고 싶어진다.

 

내 생각에 판도린은 셜록 홈스, 브라운 신부, 필립 말로 등 어떤 탐정과 비교해도 그 매력이 떨어지지 않는다. 약관의 소년에 가까운 나이에 가끔 머리를 똑바로 쓰기도 하지만, 역시 미숙한 나이답게 어리버리한 실수도 곧잘 저질러 정말로 귀엽다. 팜므파탈의 매력에 휘둘리기도 하고, 때로는 우쭐해서 공적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가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고속 승진을 하는 장면들에는 박수가 절로 나올 지경. <아자젤의 음모>는 우리의 판도린을 소개하는 스핀오프에 가까운 느낌인데, 그가 어떻게 차르의 나라에서 청년의 나이로 요직에 오르는가, 어떻게 새까만 머리의 귀밑 머리만 하얘졌는가, 왜 명랑한 웃음을 잃고 술에 절은 주정뱅이가 되었는가, 그가 어린 시절과 어떻게 작별하게 되었는가가 그려진다. 흐뭇하지 못한, 아니 너무도 처절한 마무리가 오래도록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결말의 여운은 아주 길게 남을 것 같다. <아자젤의 음모>를 읽은 사람이 할 일은 당장 속편 <리바이어던 살인>을 읽는 것뿐. 낭만이 가득찬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꼭 안아주고 싶은 판도린 탐정이 활약하는 이야기를 누가 읽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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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2009-01-0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샀지만 아직 읽진 않고 있었는데 오늘이라도 당장 읽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리뷰입니다.^^;; 그러나 아직 읽는 중인 책이 2권..후.. 후딱 끝내고 이 책을 잡아야겠군요.+_+

BRINY 2009-01-0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관이라면 몇살일까요? 흥미를 유발하네요

jedai2000 2009-01-06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당장 읽으세요. 절대로 후회 안 하십니다! 재미없으시면 제가 환불....은 못해드려요 ㅎㅎ

브리니님...지금 곁에 책이 없어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23일 겁니다 ㅎㅎ 잼있어요. 꼭 보세요^^

보석 2009-01-06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2권이라니까요;; [얼어붙은 송곳니]랑 [최후의 알리바이]. 송곳니는 거의 다 읽었고 알리바이는 이제 60쪽 정도 읽었음. 더 이상 섞어버리면 과부화가 됩니다.;;
그리고, 재미가 없으면 제다이님 서재에 와서 드러누워야겠군요.-ㅂ- 절 이렇게 혹하게 하셨으니.

Kitty 2009-01-07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리바이어던 살인을 읽고 있는 1인 ㅎㅎㅎㅎㅎ
워낙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탈 특급 살인을 좋아해서 리바이어던을 먼저 잡았어요 ^^
한 70페이지쯤 남았는데 벌써 사람은 수두룩하게 죽었고;; 흥미진진하네요. ㅋㅋ
다만 번역이 자꾸 걸려서 그게 옥의 티입니다. 한글번역은 좋은가봐요 ^^

siesta 2009-01-07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보고 책사러 들어왔다가 이쪽집은 또 첫방문이라,,어딜가도 제다이시네요 ^ ^

jedai2000 2009-01-0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석님...보석님이 제 서재에 오셔서 드러누우시면, 전 빈 보석님 서재로 가서 차지할 거예요 ㅎㅎ 이참에 서재 체인지^^?

키티님...아항, 영어로 보시고 계신가 봅니다. 아주 솔직히 말씀드려 한글 번역도 군데 군데 걸리는 곳이 있답니다 ^^

시에스타님...기분 좋은 아이디네요^_^ 저는 리뷰 같은 거 쓰면, 제 개인 블로그, 해당 책을 낸 출판사의 카페, 하우미스터리, 여기 알라딘 서재에 올려요. 너무 중복이 많은 것 같아 알라딘 서재는 올리지 않으려 했는데, 작년부터 1년에 10여편 정도 쓸 정도로 리뷰 양이 줄어 그냥 알라딘도 올리고 있습니다. 반가워요 ^^

siesta 2009-01-0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저 슾입니다. ㅎㅎㅎ

jedai2000 2009-01-09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슾님...ㅎㅎㅎㅎ 반갑습니다 ^^

siesta 2009-01-2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슾은 스프,,,,, -- ㅎㅎㅎㅎ

jedai2000 2009-01-20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슾님...압니다 ㅎㅎ
 
The Incite mill 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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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아르바이트(이하 편하게 알바로^^) 한 번 안해본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물론 한창 젊은 혈기가 왕성하던 대학생 때 놀고도 싶고 갖고 싶은 것도 많은데 돈은 없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알바를 해본 적이 있다. 나와 친구 3명이 타이어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내 천성이 게을러서인지 딱 3일 나가니까 힘들고 귀찮아서 그만두겠다고 말하러 갔다가 미모의 여대생이 내일부터 알바로 나온다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를 외치고, 친구들과는 먼저 말 붙이는 사람이 승자로 만원빵 내기를 했지만 다들 소금쟁이 사촌 소심쟁이인지라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하고 묻은 돈으로 노래방을 갔던 찌질한 옛 추억이 떠오른다.


<인사이트 밀>도 비슷하게 시작한다. 자동차가 있으면 여친이 자동으로 생길 것 같아 방학 때 알바를 뛰어서 자동차 마련(과 더 중요한 여친 마련)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아르바이트 잡지를 뒤적이던 주인공 유키. 그런데 잡지 구석에 실려 있던 인문과학적 실험의 지원자를 구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보고 기겁을 한다. 시급이 무려 11만 2천 엔이라는데...100엔당 원화 환율이 700, 800원대였던 작년과는 달리 최근 환율이 1천 500원이니까, 대충 한 시간에 170만 원이 넘는 거액이다. 여기서 잠깐 딴 소리, 경제에 완전 문외한인 내가 봐도 엔화 환율이 1년 사이에 두 배나 더 뛰다니 비정상적인 일인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음...아무리 생각해봐도 작년과 달라진 건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것밖에는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2008년 11월 현재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시급을 보고 유키는 당연히 실험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헌데, 실험 장소는 구비구비 깊은 산중에 있는 기묘한 생김새의 원형 건물이라는 것이 아닌가. 건물의 이름하여 '암귀관'. 유키를 비롯한 실험 참가자는 모두 12명으로 불세출의 미남부터, 신비스러울 정도의 우아함을 갖춘 미소녀, 나이도 많은데 로커 차림을 고수하는 아저씨까지 몽타주만 봐도 범상치 않은 그룹이다. 자, 이제 배경과 인물은 모두 갖춰졌다. 그러면 이제 인문과학적인 실험 내용만 공개되면 되는데...


하나, 참가자들은 암귀관에서 일주일간을 외부와 완전 격리된 채로 지내야 한다. 각자의 방과 더불어 적절한 의식주는 보장된다.
둘,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면 시급 2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셋, 참가자 중 어느 한 사람이 탐정이 되어 살인자를 밝혀내면 시급 3배의 보너스를 받는다. 이 금액은 누적된다.
등등.


어쩐지 참가자들 사이에 살인을 부추기는 룰이다. 더구나 참가자들은 고전 추리소설의 흉기 한 가지씩을 복불복으로 지급받은 상태. 유키가 받은 건 셜록 홈스 <얼룩끈>에 나오는 부지깽이다. 이래서는 언제 어디서 살인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사실 12명이 다 그냥 얌전히 있다가 나가기만 해도 시급이 워낙 세기 때문에 일주일에 1천 800만 엔이라는 거액이 보장되는지라 멤버들은 그렇게 하기로 신사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평온하게 참가자들이 수다나 떨면서 일주일을 때우다 나가는 이야기라면 굳이 책으로 쓸 이유가 없겠지. 다음 날부터 12명의 참가자들은 하나씩 죽어 나가기 시작하는데...


여기까지만 소개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유독 촉이 빠른 분들이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집어들 것이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날 끝을 보고 대만족의 환성을 지를 것이다, 바로 나처럼. 몇 명의 참가자가 서로를 죽인다는 설정에서 <배틀 로열>을, 비정상적인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영화 <큐브>나, 연쇄살인이 철저하게 게임 감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일본 드라마 <극한추리 콜로세움>을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여러 장면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나 <Y의 비극> 같은 고전 걸작 추리소설에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바치기도 한다. 참가자들에게 지급되는 흉기는 전부 잊지 못할 걸작 추리소설들의 소품이라 많이 본 사람일수록 더 흐뭇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는 국내에도 소개된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등의 소소한 사건들을 소박하게 풀어나가는 일상계 추리소설로 명성을 떨쳤지만, <인사이트 밀>에서는 의외로 본격 추리소설의 약점으로 흔히 거론되는 작위적인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속도감이 넘치면서 젊은 층의 구미에도 딱 맞는 게임 감각의 재미로 충만한 새로운 스타일의 본격 추리소설을 내놓은 게 이채롭다. 요 몇 년 사이에 나온 책 중 재미 만으로는 최고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결말도 본격풍으로 논리적으로 모든 진상을 도출해내는데, 범행의 진짜 목적이나 동기 같은 부분까지는 몰라도 단순히 범인을 맞추는 것만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걸 유일한(억지로 찾자면) 약점으로 꼽고 싶다. 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싶지도 않다. 요즘같이 흉흉한 시국에 골 아픈 건 읽기 싫고 무조건 재미있는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집어라.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키리고에...>를... 죄송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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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11-26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제목 보고 얼른 달려왔어요.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

Apple 2008-11-2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던 책인데 재밌나봐요~~저도 담아놔야겠습니다.^^

그린브라운 2008-11-26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좋아하는 작가네요 ^^ 기대됩니다

보석 2008-11-2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봤어요. 읽기 전엔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첨부터 책장이 정말 잘 넘어가더라고요.

jedai2000 2008-11-27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제 글을 보시고 귀한 돈을 쓰시는데 감사는 제가 해야죠^^ 제가 그만큼 신뢰를 얻었구나 싶어 기분이 늠흐늠흐 좋네요~

애플님...어떤 메시지나 주제보다 철저하게 재미를 위해 봉사하는 책이죠. 애플님 약간 심각한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어떨지 걱정되네요. 재미는 최고예용 ^^

다락방님...앗! 좋아하는 작가시면서 아직 안 읽으셨다니 이 잼있는 책을...무지 잼있으니 기대하세요 ^^

보석님...페이지 빨리 넘어가고 잘 읽히기로는 비교할 책이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작가가 속편을 써줬으면 하는 마음뿐이랍니다 ^^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Medusa Collection 3
아이라 레빈 지음, 김효설 옮김 / 시작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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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년에 타계한 스릴러계의 거장 아이라 레빈의 1976년 작품이다. 24살에 센세이셔널한 데뷔작 <죽음의 키스>를 발표하고 폭발적인 인기와 더불어 미국추리작가협회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평단의 극찬까지 받은 행복한 작가 레빈은 이른 데뷔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평생 단 7편의 작품만을 남겼다. 철저하게 과작으로 일관하면서 매번 색다른 소재와 탄탄한 완성도를 추구했던 스릴러 장인이라고 보면 된다. 책을 보면 그대로 그림이 그려지는 영상적인 글쓰기가 탁월한 양반인지라 작품 대부분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판권으로도 돈 좀 만지셨을 듯.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오컬트 호러의 걸작 <로즈마리의 아기>, <스탭포드 와이프>, <슬리버>, <죽음의 키스>그리고 오늘 소개할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까지 책은 안 봤어도 영화로 그의 작품 하나 안 보신 분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재미삼아(?) 일화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로만 폴란스키의 <로즈마리의 아기> 영화를 보고 감동한 사이비종교 추종자들이 폴란스키의 아내이자 배우인 샤론 테이트를 토막살해한 건 유명한 스캔들. 폴란스키도 거장이지만 레빈의 워낙에 훌륭한 원작 탓도 없다고는 말 못할 듯하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은 제목 그대로 브라질에서 출발한다. 점잖은 노신사가 브라질 시내의 고급 일식집에서 6명의 남자들과 만찬을 즐기는데,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슬슬 용건을 꺼내기 시작한다. 노신사는 '죽음의 천사'라 불리는 실존인물 요제프 맹겔레 박사. 맹겔레는 의사 출신으로 맹렬 히틀러 추종자에, 게르만 민족의 우월한 유전자를 더욱 발전시킨다는 명목 아래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극악스런 생체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쌍둥이를 꿰매버리거나 눈동자 색을 파랗게 바꿔버리는 등 책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40만 명에 가까운 유태인들을 실험하고 학살했다니 그야말로 '악마의 의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나치 패망 후 잔당들의 도움을 받아 남미로 도피해 73세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맹겔레가 남미에서 삶을 마감한 것과 이 작품의 배경이 브라질인 것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더하려는 작가의 의도 같다. 아무튼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맹겔레의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실제 그의 삶이 더 소설 같다.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소설...


맹겔레와 자리를 함께한 남자들은 전직 나치 친위대 대원들. 전 세계 각지(주로 남미)에 숨어 전범 재판을 피해 살고 있지만 제3제국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한몫을 할 수 있는 든든한(?) 친구들이다. 맹겔레는 그들에게 임무를 내리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친위대가 들어도 기가 막히는 내용이다. 전 세계 곳곳에 있는 60대 중반의 남자 94명을 조를 짜서 처치하라는 것. 그들의 공통점은 전직 공무원 출신에 고집 세고 사교성도 없지만, 특별한 고위 공직자도 아니었고 그다지 해가 되지는 않는 인물들이라는 것, 그리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인이 있다는 것 정도. 이게 위대한 독일 제국의 부활과 무슨 상관이 있는 미션일까?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의 핵심 재미는 여기서 나온다. 암살자 나치들도 모르고 독자들도 알 수 없다. 이 모든 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음모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인가를.


한편 우연히 60대 노인들이 체계적으로 나치 잔당들에 의해 암살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치전범 사냥꾼 야코프 리베르만이 맹겔레와 더불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유태인 리베르만은 작품 속에서, 600만 명의 유태인 학살의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는 실존인물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해 사형시킨 장본인으로 나온다. 당시에는 그의 명성이 떠르르했지만, 전쟁의 상흔도 잊혀져가는데다 이제 늙고 지친 노인이 된 리베르만은 그저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이유는 잘 몰라도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린 듯한 연속 살해에 의문을 품고 줄기차게 사건을 조사해 마침내 나치와 맹겔레의 음모에 관한 경악스런 진실을 알게 된다. 작품의 결말은 리베르만과 맹겔레의 대결로 이뤄지는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리베르만은 올해의 소설 속 '시니어 스타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할아버지로 나오는데 올곧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나이를 무색케 하는 활력이 샘솟는데다, 인간적이기까지 해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은 이 책은 1991년에 고려원에서 페이퍼백 미스터리 문고로 발매된 책이다. 한 7-8년 전에 읽었었는데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희미하고 사망한 레빈도 기념할 겸 새 판본으로 다시 읽었다. 읽었던 책이니 큰 기대도 없이 설렁설렁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미칠 듯이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과연 거장은 시간이 흘러도 거장이고, 명품은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1976년에 나온 이 책이 요즘 나오는 스릴러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깊이 있으며 속도감까지 갖추고 있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적이 모호한 노인들 연속 살해사건을 통해 독자의 호기심을 한껏 고조시켜놓은 다음, 소름 끼치는 음모의 전모를 드러내 독자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두 주인공의 강렬한 대결 장면을 통해 손에 땀을 쥐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한마디로 스릴러의 롤렉스 시계. 기가 막힌 명품이라고 할 수밖에.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에서 맹겔레가 획책하는 음모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살짝 어설픈 부분이 많다. 유전공학의 방법적인 부분도 그렇고, 인간의 환경이 성격 형성에 어떠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작가와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1976년 작품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레빈이 당시의 작가들을 훌쩍 뛰어넘는 굉장한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아무래도 1976년 작품을 지금의 과학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을까. 쥘 베른이나 H. G. 웰스의 작품은 요즘 과학의 눈으로 보면 말도 되지 않지만,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역시 현지에서 출판된 것 같이 1976년에 국내에 소개되지 못하고, 2008년에 재출간된 게 아까울 따름이지 본질적인 작품의 가치에는 조그만 흠집도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작품이 쓰인 1976년은 1945년 나치 패망으로부터 3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다. 20대에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남았던 유태인이라면 50대나 60대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시점이라는 이야기다. 그들이 아직 나치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시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다니 당시에 이 책을 본 유태인들은 정말 극도의 무서움을 느꼈을 법하다. 그 공포는 60년도 더 지난 요즘에 와서도 충분히 유효하다. 최고의 스릴러 거장 아이라 레빈의 손끝에서 빚어진 공포라서 더욱 그러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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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11-19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_ㅠ악...이런게 언제 나왔어요!!!ㅠ ㅠ흐흑....아이라레빈 소설 출간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ㅠ ㅠ악악!!!저도 지르겠어요.흐흑..

jedai2000 2008-11-1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 나온 걸 모르셨나 보네요 ^^ 저도 레빈 책은 다 만족하고 있어요.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도 무지 재미있으니까 기대하세요~
 
샤라쿠 살인사건
다카하시 가츠히코 지음, 안소현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샤라쿠는 기존 화단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이 혜성같이 등장해 1794년부터 1795년까지 단 10개월간 140여점의 우키요에만을 남기고 그야말로 홀연히 사라진 화가라고 합니다. 당대에는 별로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유럽에 수출되면서 고흐 등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현재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추앙을 받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홍도가 혹시 샤라쿠가 아닐까 하는 흥미로운 가설 때문에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미술의 세계에는 완전 문외한이나 다름없어 걱정은 했지만, 일본 우키요에와 샤라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어 매우 기대하며 읽은 책이랍니다. 대개 자기가 관심없는 분야는 읽지 않고 넘어가는 분들이 많은데 한 권의 책을 보면서 재미도 얻고 배움도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게 독서의 묘미겠지요.

 
샤라쿠 연구계의 양대산맥이 있습니다. 학계의 니시지마 교수와 재야의 사가 아츠시가 그들입니다. 두 사람이 대립하는 이유는 우키요에 연구에 대한 관점 차이 때문이죠. 우키요에는 본시 판화로 유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완성된 판화 그대로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니시지마 교수의 견해, 판화는 조각칼로 밑그림을 파는 판화가의 솜씨가 작품의 완성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에 판화 이전의 밑그림(육필화)에 진정한 우키요에 화가의 숨결이 드러난다는 것이 사가의 의견입니다. 둘다 나름 설득력이 있어 누가 옳고 그르다를 나눌 수 없는 문제죠. 그렇다면 서로의 학설을 존중하며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면서 각자의 연구에 매진하면 될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은 그렇지 못했죠. 격렬하게 서로를 비방하며 학회를 조직해 자신들의 세를 구축하고 그 힘을 과시하기 일쑤입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순수한 배움의 터전인 학계도 썩을 대로 썩은 모양입니다.


 
소설은 재야의 거물 사가 아츠시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시작합니다. 경찰은 여러 정황상 사가가 자살을 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죠. 사가의 처남인 헌책방 업주는 이젠 쓸모없게 된 사가의 자료들을 헐값에 내놓는데 떨이로 자료들을 왕창 사간 게 바로 주인공이자 니시지마의 조교인 츠다입니다. 츠다는 설렁설렁 사가의 자료들을 살피다 기요치카라는 우키요에 화가가 머리말을 쓴 화집 한 권을 발견합니다. 그 화집은 완전 무명인 치카마츠 쇼헤이라는 화가의 그림을 모은 것입니다. 허나 한 호랑이 그림에 뜻밖에 '도슈사이 샤라쿠가 치카마츠 쇼헤이로 고치고 그림'이라는 말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의문의 거장 샤라쿠의 정체가 쇼헤이일까요? 츠다는 만약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이 가설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합니다. 허나 조사가 깊어질수록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시체로 발견되고 마는군요.

 
츠다는 샤라쿠의 정체에 파고들기 위해 기존에 거론되었던 샤라쿠 후보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은 츠다의 조근조근한 설명을 통해 샤라쿠가 그간 알려진 대로 무명의 가부키 배우가 아니라 누군가 모종의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숨기고 샤라쿠로 활동했다는 이른바 '샤라쿠 별인설'에 대해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호쿠사이, 우타마로가 어쩌구 저쩌구 등 엄청 많고 생소한 우키요에 화가가 등장해 우리나라 독자들이 읽기에는 상당히 버겁습니다. 여기서 정신줄과 함께 책을 놓을 독자들이 꽤 보이는군요. 하지만 당대 현실을 바탕으로 샤라쿠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가는 작가의 대담한 상상력은 박력이 넘치고 무엇보다 꽤 공감이 가더군요. 읽고 나면 아, 과연 샤라쿠의 정체가 이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샤라쿠의 정체에 대해서만 줄기차게 거론하다 만다면 관련 종사자들의 아카데믹한 즐거움에만 봉사하고 끝날 확률이 높습니다. 작가 다카하시 가츠히코는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을 준비합니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독서의 흥미를 빼앗을 우려가 있어 적지 않겠지만, 생각보다 이 작품이 스케일이 굉장히 크며 구조 전체를 트릭으로 사용하는 기발함이 있다는 것만 이야기해두겠습니다. 또한 전형적인 기차 알리바이 트릭 깨기 요소도 있어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더욱 소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단히 독창적이고 뭔가 배우는 것도 있는 훌륭한 추리소설이예요. 읽어보면 일본에서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바로 알게 됩니다. 다만 샤란큐는 좋아해도 샤라쿠는 관심없다거나, 김홍도, 신윤복도 잘 모르는데 왜 일본 화가까지 알아야 하느냐,며 도통 흥미가 생기지 않는 독자라면 읽어내기 버거울 것입니다. 그 나라의 문화나 사정이 너무 진하게 배어 있어 번역으로 맛을 살리기 어려운 책들이 가끔 있는데, 안타깝게도 <샤라쿠 살인사건>이 그런 책으로 보입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한번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는 책이나 현실에서도 머리 아픈데 소설까지 공부하면서 보기 싫다는 분들은 굳이 잡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p.s1/ 작가 다카하시 가츠히코는 <샤라쿠 살인사건>으로 에도가와 란포 상, <샤라쿠 살인사건>과 더불어 '우키요에 미스터리 3부작'을 이룬다는 <호쿠사이 살인사건>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 상, <붉은 기억>으로 나오키 상 등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중견 작가입니다. 우키요에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데, 소개글을 읽어보니 걸물이더군요. 1960년대 고등학교 때 무작정 해외로 나가 일본인 가운데 처음으로 비틀즈를 만난 기록을 가지고 있다네요 ^^

 

p.s2/ 부록으로 주는 우키요에 엽서 세트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대부분의 책 부록이 받자마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만한 것들인데 반해 오래 보관하고 싶어지네요. 엽서 중에 다카하시 가츠히코가 어렸을 때 보고 반해 우키요에에 평생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우타가와 쿠니요시의 <소마의 후루다이라>는 저도 보고 놀랐습니다. 너무나 현대적이고 만화를 연상시키는 상상력에 우키요에를 다시 보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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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8-10-1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라쿠가 뭔가 했더니 화가였군요 :)
너무 일본 문화가 녹아있는 작품은 정말 읽기 힘들더라구요.
요괴 이 정도까지는 나름 괜찮은데 말이죠.

그나저나 제다이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

jedai2000 2008-10-14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라쿠는 유명한 화가래요. 저도 이 책 보기 전까지는 잘 몰랐답니다. 그래도 책을 읽으며 일본 문화와 전통 우키요에에 대해서도 약간 배우고 나쁘지 않았답니다 ^^ 요괴하니까 갑자기 교고쿠가 읽고 싶네요 T.T

정말 감사합니당. 마이리뷰 한 6번 정도 된 것 같은데 마침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되서 기분이 느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