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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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3.67>로 홍콩 추리소설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찬호께이의 신작이지만, 실은 전작이 워낙 인기가 있어 먼저 쓴 작품이 나중에 나온 경우이다. 즉,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2011년작, <13.67>은 2014년작이다. 1967년부터 2013년까지 홍콩의 변화하는 시대상 속에서 몇 가지 사건들을 해결했던 전작이 연작 단편집의 흐름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오롯이 한 사건만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전작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에 이번 신작도 무척 기대를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충분히 기대에 부응할 만큼 재미있는 추리소설이었다. 남편과 부인이 살해당한 홍콩의 서민 아파트 현장을 조사하는 형사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가 벌써 군더더기가 없고 바로 핵심을 찌른다. 주인공이 소속된 형사반은 부인과 불륜 중이었던 내연남의 흔적을 처참한 현장 도처에서 발견하고 그가 사건을 저지른 것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도출한다. 끔찍한 사건이지만 불륜에서 비롯된 치정 살인극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다른 형사들은 별 고민 없이 이대로 보고서만 쓰면 끝이라고 희희낙락하지만 주인공은 왠지 찜찜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이런 게 흔히 말하는 '형사의 감'이라는 걸까?



동료 형사들과 수사의 견해 차이로 주먹다짐까지 불사하고 홧김에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 주인공은 자신의 차 안에서 눈을 뜨고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한다. 아파트에서 부부 살인사건이 일어난 건 2003년, 그런데 오늘은 2009년이다! 동화처럼 딱 하룻밤 새에 무려 6년이 흘러버린 건 아니고, 원래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던 주인공에게 기억상실 증세가 일어난 것이다. 이제 주인공의 지상 과제는 두 개. 과연 기억을 잃어버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밝혀야 하고, 내내 찜찜했던 과거의 사건을 재수사해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비교적 사회 구조나 가치관 등이 단순했던 옛날보다 사회가 복잡해지다 보니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머릿속도 복잡해져서일까. 예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정신병도 참 많아진 것 같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에서는 그 많은 정신병리적인 증상 중에 특히 기억상실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는데, 사실 가벼운 기억상실 증세라면 우리에게도 그닥 낯선 분야는 아니다. 지금 당장도 번화가를 나가 보면 술이 떡이 되어 집도 못 찾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가 아닌가. 단 하루, 몇 시간 동안이라도 자기가 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엄연한 기억상실, 보통 무서운 일이 아니다. 일행이랑 싸우지는 않았는지, 술값은 제대로 냈는지 깨고 나서도 며칠간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하다 못해 술자리에서 몇 시간 필름 끊긴 것만 해도 이렇게 공포(?)스러운데 그게 살인사건과 연관된 기억이라면 어떻겠는가. 세상에 그보다 소름 끼치는 일이 또 있겠는가. 이처럼 기억상실은 모든 독자의 관심을 단숨에 모을 만한 참으로 매력적인 소재이다. 더구나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아찾기 투쟁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적인 상징성도 있고.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이렇게 먹음직스런 소재인 기억상실을 다룬 추리소설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예전 아동용 축약본으로 나왔던 윌리엄 아이리시의 <검은 커튼> 정도. 그 이유가 뭘까? 어쩌면 핵심 주제가 너무 근사하면 오히려 작가의 상상력을 압도해버릴 수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기억상실을 당한 주인공이 찾아나서는 자신의 정체가 악당일 수도 있고, 첩보원일 수도 있고, 탐정일 수도 있고,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가벼운 소동극일 수도 있고 등등 뻗어나갈 수 있는 갈래가 지나치게 많아 플롯을 짜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닐 터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읽기도 전에 독자들이 재미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소재에 섣불리 도전하는 건 보통 작가의 뱃심으로는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찬호께이는 한마디로 이 힘든 일에 도전해 일정 부분 이상의 성과를 거두고 보기 좋게 물러났다. 질투가 날 정도로 멋진 솜씨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줄거리가 내가 짐작한 것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소 시시한 범인의 정체도 딱 맞췄다만, 아뿔싸 남은 페이지가 무려 100쪽! 그때부터 연속적인 반전이 펼쳐지는데 가히 피스톤 펀치가 복부에 연속으로 너댓 방 꽂히는 느낌이었다. 반전의 질과 양이 가히 놀라운 수준이라 연신 감탄하면서 찬찬히 다시 복기해보니 결국 진범의 정체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고, 적당히 머리를 굴려 보면 충분히 맞출 만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완벽하게 속은 이유는 아마도 작가가 깔아놓은 오답이 너무도 선명해 다른 가능성을 오히려 막아놓아서였던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찬호께이에게 완벽히 '현혹'당했다고나 할까. 작가의 영리함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목은 주인공과 조연들의 직업을 형사나 스턴트맨처럼 액션과 밀접한 세계로 설정해 영상화의 가능성도 높였다는 것이다. 참고로 '쇼 브라더스 영화사'를 연상시키는 '허 브라더스 영화사'에서 무명시절의 성룡이나 원표 같은 무술배우들이 등장하는 내용들은 단순한 곁가지가 아니라 작품의 미스터리 플롯이나 손에 땀을 쥐는 클라이맥스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억하라, 찬호께이는 무엇 하나 버리는 게 없는 작가다.



개인적으로 홍콩이라는 도시를 유달리 사랑해 <13.67>처럼 홍콩의 구체적인 지명이나 홍콩인의 삶에 대한 얘기가 많은 것도 좋았다. 작가는 홍콩 독자를 상대로 하는 책이라면 너무 당연해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얘기도 꼭 설명하고 넘어가는데, 이는 홍콩 독자보다는 외국 독자를 의식해서인 것 같다. 아마도 본인이 홍콩을 대표하는 홍콩 추리소설 '국가대표' 같은 의식이 있는 듯하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대만에서 개최되는 '시마다 소지 문학상'의 2회 대상작이다. 아마도 시마다 소지는 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서 '21세기 본격 미스터리'라는 의제를 제시하면서 그에 걸맞은 작품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가 말하는 21세기 본격 미스터리라는 것은 미스터리의 환상성과 논리를 갖추면서도 21세기에 통용되는 최신 과학의 지식과 방법론이 녹아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고전적인 미스터리의 장점은 고스란히 갖추되, 늘 하던 얘기만 늘어놓는 것이 아닌 현대적인 미스터리의 새로운 길이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 찬호께이가 21세기의 뇌과학이나 신경병리학 등을 꺼내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제시한 문제를 멋지게 풀어낸 찬호께이에 대해 시마다 소지는 이런 상찬의 말을 남겼다.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의 이해력과 고도의 글쓰기 능력을 활용해 21세기 본격추리라는 새로운 용어와 창작 방법에 모범답안을 제시한 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작가의 머릿속에 자발적으로 떠오른 창작이라기보다 자신의 재능 일부를 활용해 타이완에 상륙한 21세기 본격추리라는 새로운 생각에 반응한 것이며, 작가에게 있어서는 비주류성의 습작일 뿐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이 작가의 무한대한 재능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과연 추리소설계 대작가답게 시마다 소지의 예언은 정확했다. 최신 과학을 등장시킨 21세기 본격추리라는 문제에서 무난히 합격점을 받은 찬호께이는 3년 뒤 외부로부터 요구받은 비주류성의 습작을 벗어나 자신만의 주제와 방법론으로 자발적인 창작을 하게 되는데, 그 작품으로 무한대의 재능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그 작품이 바로 <13.6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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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무게 1
케빈 길포일 지음, 이옥용 옮김 / 북앳북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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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출간된 <그림자의 무게>는 케빈 길포일이라는 미국 작가의 처녀작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묻힌 책이다. 아마 국내 장르소설 중에서 비교적 인기가 적은 SF 설정이 깔려 있어 그런 게 아닐까 짐작되는데 일독의 가치가 분명히 있는 책이라 예전부터 아쉬웠었다. 출판사는 문학수첩의 성인 브랜드인 '북앳북스'. <해리 포터>로 대성공해서 그런지 이곳은 주로 영미권의 책만 내는데, 당시 참신한 데뷔작으로 각광을 받고 있던 케빈 길포일도 국적 덕분에 문학수첩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 같다. 전체 680쪽의 분량이라 분권을 했는데 아마 독자들이 분권을 싫어하는 요즘 나왔다면 분명히 비난을 받았으리라. 개인적으로는 분권을 해서 사랑받은 책도 있고, 만약 분권으로 판매가 망한다 해도 그것 역시 출판사의 선택이라 크게 투덜대지 않는 편이지만 독자들의 기호가 단권에 있다면 귀 기울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뭐니뭐니 해도 지갑 여는 사람이 갑 아니겠는가.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읽어본 이 책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전에 읽었을 때만 해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는데, 성인끼리의 경우에 한정하여 남자는 모두 반말, 여자는 모두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것이다. 번역자가 여성이었음에도 자연스럽게 이랬던 걸로 알 수 있듯이 10년 전만 해도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첫 출판사에서 이런 것도 무의식적인 남녀차별이라며 반기를 든 여성 편집자로 인해 번역 말투에 관한 회의를 열었던 기억도 난다. 새삼 세월은 많은 걸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말투도 변하고...



<그림자의 무게>는 이른바 '하이 콘셉트'가 빛나는 책이다. 그게 뭐냐 하면 줄거리를 한 줄로 요약할 때 과연 독자에게 먹히는 쌈박한 게 있느냐는 것인데, '공룡 화석 속에서 공룡의 피를 빤 모기를 채취해 그 DNA로 공룡을 현대에 부활시킨다. 하지만 관광 상품화된 공룡이 탈출해 온 세상이 쑥대밭이 된다.'는 한 줄 줄거리라면 아마 어느 누구도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책의 하이 콘셉트 역시 간단하지만 매우 효과적이다. '딸을 살해당한 복제 전문 의사가 우연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의 DNA를 얻게 된다. 딸의 살인자를 찾기 위해 의사는 불법으로 범인을 복제하고, 복제당한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주변에서 관찰한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되면 살인자의 얼굴과 똑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초반 100쪽 안에 이런 흥미진진한 줄거리가 제시되는데 어찌 읽기를 중단하겠는가. 요약된 줄거리 몇 줄만으로도 책을 집어들게 만드는 힘, 이게 바로 하이 콘셉트의 궁극적인 역할일 테고 그런 면에서 <그림자의 무게>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내 생각에 비록 뒤의 이야기는 바꾸더라도 초반 설정만큼은 우리나라에서도 영화화를 시도해볼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듯하다.



이야기의 진행은 여타의 미국식 스릴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1, 2, 3...식으로 숫자를 붙인 짤막한 챕터들이 나열되며 2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것이다. 하드보일드나 본격 추리소설을 보면 철저하게 주인공이나 관찰자의 시점에서만 그들의 눈에 비친 풍경들이 제시되며 시공간 이동도 어느 정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스릴러는 짤막한 챕터마다 A에서 B로 자유자재로 등장인물이 전환되며, 배경도 뉴욕이었다가 바로 다음 장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는 등 그 제약이 덜한 편이다. 혹시 이런 형태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은가? 씬 넘버가 있는 짤막한 챕터, 등장인물과 시공간 배경의 유연한 변화... 바로 영화 대본 말이다. 내 생각에 할리웃 영화는 1900년대 초반부터 미국(을 넘어 전 세계까지) 엔터테인먼트의 확고한 기준이 되었고, 범죄소설 작가들 역시 그 영향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받아들여 스릴러 소설이 영화 대본의 형식과 비슷해진 게 아닌가 추측된다. 



강력한 초반 콘셉트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림자의 무게>는 의외로 느긋한 페이스를 보인다. 특히 사립탐정들이 어쩌다 사건에 끼어들어 헛다리를 짚는 장면들은 분량도 만만찮고, 내용 진행상 곁가지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굳이 전개에 비효율적인 이런 장면들을 추가했을까. 물론 분량이 늘어나야 200페이지 책이 300페이지가 되고, 20달러 하드커버를 30달러에 팔아먹을 수 있는 마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좀 잔인하게 농담한 말이고, 실은 마땅히 작가적인 야심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락적인 재미에 방점을 찍은 다른 스릴러와 달리 <그림자의 무게>의 주제는 제법 진지한 편인데, 아무래도 인간 복제가 주소재이다 보니 복제를 감행한 의사, 그리고 원치 않게 살인자의 DNA로 태어난 아이의 정체성 찾기에 꽤 비중을 두고 있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는 소설 속에서 <심즈>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합친 듯이 묘사되는 '섀도 월드'라는 게임에서 가상의 '나'를 키우는 유저들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더구나 이 책을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되게 만드는 결말부의 두 가지 반전은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의 영역에까지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에 한계가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전개상 꼭 필요하지 않은 사립탐정들의 이야기도 바로 이런 주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쓰였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림자의 무게>는 현실과 게임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연쇄살인을 추적하는 스릴러로서도 충분히 매력 있고, 진지한 주제를 곱씹는 맛도 제법이다. 하드 SF도 아니니 어려울까 걱정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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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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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은 국내에서 최초로 출간되는 홍콩산 추리소설이다. 내 또래라면 대부분 알 텐데 우리나라에서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는 홍콩영화가 지금의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다. 쿵푸나 무협, 코미디도 홍콩이 자랑하는 장르겠지만 주윤발이나 유덕화, 양조위 등이 출연하는 느아르, 범죄, 형사물이 특히 인기를 끌었는데, 본인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가본 적도 없는 홍콩의 음침한 뒷골목이나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 등을 눈 감고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이다. 홍콩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데다, 추리소설을 밥보다 좋아하는 나로서는 홍콩과 추리소설을 모듬으로 제공한다는 말에 안 읽어볼 재간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물론 편견이겠지만) 중국산 하면 왠지 짝퉁, 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솔직히 우려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거의 700쪽에 달하는 책을 순식간에 다 읽고 나서 새삼 잊고 있었던 한 가지를 떠올리게 됐다. 중국인들하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전부터 이야기에 통달한 민족이 아니던가. <서유기>, <금병매>, <홍루몽>, 근래의 <사조영웅전>까지 불세출의 이야기들이 중국 문사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다행히 이번 <13.67> 역시 중국산 이야기의 어마어마한 뒷심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는 역작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맞아. 이 사람들은 원래 잘하는 사람들이었어, 하면서.



요즘 인기 있는 추리소설은 거칠게 사건풀이에 집중하는 '본격추리'와 사건수사의 와중에 드러나는 현대 사회의 참혹한 진실과 황폐해진 인간성을 그리는 '사화파 추리'로 나눌 수 있다. <13.67>이 물론 홍콩의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관전둬'라는 천재적인 형사가 40년이 넘는 경찰생활 동안 마주친 여섯 개의 특별한 사건을 다룬 연작단편집인 이 책만큼은 본격추리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주인공이 형사라고 해서 잠복, 미행, 탐문 등 실제 형사들의 수사 기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는 관전둬의 천재적인 추리에 의해 사건의 숨겨진 이면이 밝혀진다는 점에서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하는 본격추리의 짜릿한 쾌감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역사가 긴 서구나 일본의 본격추리에 비해 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신선한 맛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단언컨대 이 책에 실린 여섯 개의 트릭은 서구나 일본의 어떤 본격추리에 나오는 트릭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가 찬호께이는 얼핏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설정이나 배경 이야기 등에 단서를 위화감 없이 숨겨두는 데 명수이고, 성동격서 식으로 '이것'에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키나 사실 진짜 힌트는 '저것'에 있었다는 미스디렉션도 절묘하게 구사하는 고도의 본격추리 테크니션이다. 각 단편마다 사건의 진상도 몇 번이나 뒤집혀 독자의 예상을 매번 빗나가게 하는 반전의 명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책이 단순히 천재 탐정의 활약을 담은 본격추리라고만 보기에는 사회파의 장점 또한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여섯 개의 사건은 전부 인질극, 유괴, 삼합회 범죄, 총기 탈옥, 폭탄 테러 등 홍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강력 사건들을 소재로 삼고 있어 현실감이 넘치며,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67년부터 2013년까지 홍콩 사회의 변모를 실감나게 그려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레 백년 동안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뀐 홍콩이라는 특수한 도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놀라운 트릭과 반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반적인 본격추리의 무대 배경이 도쿄이든, 뉴욕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은 데 비해 <13.67>은 반드시 홍콩이어야만 가능하고, 홍콩이어야만 이야기의 맛이 사는 본격추리라는 점에서 작가의 배경 선택의 탁월함에 감탄하게 된다. 트릭과 추리만이 우선시되는 현실성이 벗어난 세계 안에서도 고집스레 현실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특징은 범인들의 범행 동기에도 영향을 미쳐, 금전이나 애정, 복수 등으로 비교적 동기가 (트릭보다는) 중요시되지 않고 단순한 통상적인 본격추리와 달리 좀 더 내밀한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13.67>은 역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늙고 병든 관전둬 형사가 혼수상태에 빠져 일생일대의 호적수와 대결하는 첫 단편이 2013년의 시점이고, 두 번째 단편은 정년퇴직한 그가 경찰의 고문으로 위촉되어 프리랜서에 가까운 상태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범죄를 해결하는 데 이 당시가 2001년이다. 이런 식으로 관전둬의 20대 초반 시절을 그린 1967년의 마지막 단편까지 그의 인생을 되짚어 간다. 이러한 역순 방식의 서술은 독자들에게 그 자체로 하나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맛을 선사한다. 청년 관전둬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떻게 변모해 가는가를 순서대로 차근차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가진 현재의 관전둬가 먼저 제시되고 일종의 시간여행을 통해 그의 성격 형성 과정을 뚝뚝 떼서 척 던져놓는 것이다. 모든 걸 드러내놓고 떠벌리는 사람보다, 은근한 비밀 한 가지를 숨겨두는 사람이 때로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러한 서술 방식의 장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 단편들이 다 좋지만 그중에서도 절묘하게 합쳐지는 첫 번째와 마지막 단편이 단연 시선을 잡아끄는데 경찰조직보다 시민의 안전을 늘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대의를 위해 가끔 소소한 규정 위반도 서슴지 않는 관전둬의 신념에 얽힌 비밀이 밝혀진다. 더구나 인간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특히 한 점 어둠도 없었던 청운의 청년들이 어떻게 변해가는가, 그들은 왜 범죄에 발을 담가아먄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성찰에서 오는 짙은 비애가 책장을 다 덮고 나서도 문학적 여운으로 오래도록 남았다.



길게 적은 것처럼 <13.67>의 장점은 굉장하다. 본격추리로서도 성취가 뛰어나고, 홍콩의 변화상과 범죄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으로 사회파의 장점도 아울러 취하고 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 대개 사건이 벌어지고 나면 경찰이 출동해 진상을 재구성하는 형태가 많다면, 이 책은 격렬한 총격전이나 유괴에서의 몸값 전달 과정 등 역동적인 상황 속에서 추리의 단초가 숨겨져 있어 영상화의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작가의 문장력도 탁월하고, 일본의 요코야마 히데오를 연상시키는 경찰조직에 대한 정밀한 조사 등을 보면 작가적 성실성도 크게 인정할 만하다. 추리문학에 있어 미래의 대가 출현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 찬호께이에게서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같은 스타 추리소설가의 초기 출간 시절(지금처럼 수많은 작품들이 범람하기 전)의 생생함과 신선함을 느꼈다. 홍콩 추리소설은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나머지 너무 많이 출간되어 어쩌면 더 이상 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 일본 추리소설의 진정한 대안이 될 듯하다. 그리고 찬호께이라는 이름을 앞으로 자주 들을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든다. 단 한 권 읽어보고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13.67>은 단 한 권으로 그 책이 출간된 나라의 추리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올려줄 만한 작품이었다. 그만큼 걸작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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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네이버에서 보잘 것 없는 포스트를 대문에 걸어주는 바람에 모처럼 추리소설 팬들의 유입이 급증됐다. 나 또한 골수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이 호기(?)를 놓치기 싫어 급히 업데이트를...



Locked room - 밀실  


선정적 - <세 개의 관> by 존 딕슨 카


 

 

 

 

 

 

 

 

 

 

 

 

 


 

최종 후보작 - <황제의 코담뱃갑> by 존 딕슨 카


 



 

 

 

 

 

 

 

 

 

 

 

 

밀실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은 아마도 흔히 본격이라 불리는 퍼즐 미스터리 영역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인기 높은 장르일 것이다. 이중, 삼중으로 잠겨 있는 문 안쪽에서 교살당한 피해자, 그런데 용의자는 모두의 눈이 모여 있는 만찬장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딱 봐도 범인은 분명한데 범행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니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우리가 읽고 있는 추리소설이 이런 내용이라면 그 답을 알기 전에 책장을 내려놓고 산책을 나갈 만큼 무신경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의 노예인 바, 살인과 그에 얽힌 미스터리에 원초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밀실과 불가능 범죄가 사랑받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밀실을 전공으로 하는 추리소설가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이 역시 당연한 게 독자들이 완벽하게 한 방 먹었다고 감탄할 만한 초일류의 밀실 트릭을 짜는 게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사건의 진상이 막상 모두가 범인과 꼭 닮은 대역을 보고 속았다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작가는 밤거리를 돌아다닐 때 두둑한 뱃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쓰기 힘든 밀실 추리소설만을 50편 넘게 줄기차게 써내려갔던 미국 추리소설가 존 딕슨 카야말로 밀실의 제왕이라 할 만하다. 단순히 양만 많은 게 아니라 흔히 밀실 추리소설 베스트 10을 꼽으면 그중 8~9편은 딕슨 카의 작품인 걸로 볼 수 있듯이 질에서도 으뜸이니, 30~50년대 퍼즐 미스터리 계열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과 함께 3대 거장이었다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기디온 펠, 헨리 메리베일 경이 탐정으로 나오는 절정기의 작품은 거의 모두가 수작이라 오히려 선정작을 꼽기 애매했지만 역시나 <세 개의 관>이 내 기준에선 최고 걸작이다. 트릭의 스케일이나 진상이 몇 번이나 뒤바뀌는 반전, 게다가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뻔뻔스럽게(?) 수십 장에 걸쳐 펼쳐놓는 밀실론 강의까지 밀실 추리소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최종 후보작인 <황제의 코담뱃갑> 역시 딕슨 카의 베스트 중 한 편으로 추리소설을 1천 권 넘게 읽은 필자가 범인의 정체에서 가장 놀란 작품 중의 하나였다. 초능력자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 범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한 분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보너스로 밀실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딕슨 카의 작품 중에서 <유다의 창>도 필견! 역대 가장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밀실 트릭이 나온다. 그 밖에 다른 작가로 엘러리 퀸의 <킹은 죽었다>, 클레이튼 로슨의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도 수준급 밀실물로 추천한다.




Man - 남자


선정작 - <흥분> by 딕 프랜시스


 


 

 

 

 

 

 

 

 

 

 

 

 

 

최종 후보작 - <심야 플러스 원> by 개빈 라이얼


 


 

 

 

 

 

 

 

 

 

 

 

 

 

 

재미난 추리소설을 보면서 남녀를 따지는 것은 우습고 불필요한 일일 테지만, 유독 남자들이 선호하는 분위기의 작품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Man'편에서는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추리소설들을 추천하면서 여성에 비해 현격히 독서율이 떨어지는 남성의 분발을 촉구하는 바이다. 선정작인 <흥분>은 원제가 'For Kicks'로, 영문과를 나왔음에도 영어 까막눈에 가까운 필자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일본의 출판사가 붙인 제목일 게 분명한데, 어떻게 보면 원제보다 나을 정도로 작품의 테마를 한마디로 잘 표현해놓은 것 같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가 펼쳐지는 소설이라는 말씀. 영국의 경마계에서 누가 봐도 그저 그런 경주마들이 연속 우승하는 일이 펼쳐진다. 부정이 있는 것은 같은데 도핑을 해봐도 소용이 없고, 물리적인 어떤 증거도 없다. 더구나 폐쇄적인 영국의 경마계에선 부정이 있어도 제 식구를 감싸기 마련이니 수사가 제대로 될 리가. 이런 판국에 호주의 초야에 묻혀 목장을 하는 다니엘 로크에게 영국 경마위원회에서 제안이 들어온다. 어떤 연줄도 없는 당신이 가서 어떤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조사해달라고. 로크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유력 용의자의 마방에 잠입하는데, 그곳은 중세를 방불케 하는 극악의 환경으로 마부들을 숫제 조지고(?) 있다. 과연 로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경마계의 부정을 밝혀낼 수 있을까? 대강 이런 내용이다. 기본적으로는 60~70년대 대인기를 끌었던 영국의 모험소설과 스파이소설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시시한 경주마를 우승시킨 부정에 얽힌 트릭도 수준급이라 추리소설로도 부족함이 없다. 신분을 숨기고 위험한 일에 뛰어든 로크에 대한 보상일까, 가슴 뛰는 로맨스도 기다리고 있으며, 특히 최종장에서 악당들과의 2대1 대결은 주체가 힘들 정도로 '흥분'된다. 새벽에 읽다가 심장이 벌렁거려 잠이 오지 않았을 정도. 작가 딕 프랜시스는 실제 유명한 경마 기수 출신으로 기사도를 준수하는 현대의 쾌남들이 경마계에서 온갖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20여 편의 '경마 미스터리'로 일가를 이뤘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제조기였다. 2010년에 별세한 그의 명복을 빈다... 최종 후보작인 <심야 플러스 원>의 주인공 루이스 케인은 아마 <흥분>의 다니엘 로크를 보고 '젊은 시절에는 나도 저렇게 패기가 넘치고 박력이 있었지' 하며 씁쓸하게 미소 지을 중년의 남자이다.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영웅적인 활약을 했지만 전쟁이 끝난지도 어언 20년, 지난 과거를 묻어두고 생활인으로 살고 있다. 그런 케인에게 한 사업가와 여성 비서를 무사히 호송해달라는 제안이 들어온다. 제안을 받아들인 케인은 보디가드로 총잡이를 구하는데, 최고의 총잡이 두 사람은 연락이 안 되고 겨우 찾은 넘버 3 미국인 총잡이는 알코올중독으로 손을 덜덜 떤다. 케인이 이 오합지졸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걱정되고 궁금해서 한 번 잡으면 끝날 때까지 내려놓을 수가 없다. 전쟁은 분명 비극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 온갖 신화와 영웅들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쟁은 이미 끝났고, 무수한 영웅들은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 이 소멸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에 대한 허무와 쓸쓸한 정서가 공존하는 남성소설의 정수와 같은 작품이다. <흥분>과 마찬가지로 짜릿한 결말부의 총격전은 놓치면 후회할 것이다. <흥분>이 전성기의 남자가 펼치는 패기와 박력이라면, <심야 플러스 원>은 주변부로 물러나는 중년 남성의 허무와 비애가 주제라서 같이 읽으면 멋진 대구가 될 거라 생각한다.




Neo Mystery - 신본격


선정작 - <시계관의 살인> by 아야쓰지 유키토


 

 

 

 

 

 

 

 

 

 

 

 


 

최종 후보작 - <말레이 철도의 비밀> by 아리스가와 아리스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것은 온전히 일본 추리소설에서만 쓰이는 용어이다. 대충 신본격의 역사를 얘기하자면...일본에선 흔히 코넌 도일이나 크리스티, 딕슨 카 등 기발한 트릭과 명탐정의 등장을 특징으로 하는 퍼즐파를 본격 미스터리라고 불렀다. 남의 것을 우라까이(?)하기 좋아하는 일본의 특성상 서양의 본격 미스터리를 자국의 배경과 문화를 담아 현지화한 작가들이 속속 출연해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우리도 익히 아는 에도가와 란포와 요코미조 세이시. 이른바 원조 본격파로 대인기를 누리던 이들에 반기(?)를 든 걸물이 그 유명한 마쓰모토 세이초였다. 아무래도 퍼즐풍의 추리소설은 장르의 성격상, 리얼리티보다는 대저택이나 고립된 섬 등 클리셰적인 세트와 독자들이 헷갈리지 않고 무의식 중에 받아들일 수 있게끔 극히 전형화된 인물군상 등이 출연하는 게 특징이다. 세이초는 트릭이나 반전, 퍼즐보다는 인간심리와 사회적인 메시지, 소설로서의 문학성을 추구하는 일명 '사회파 추리소설'로 사실상 오늘날 일본 추리소설계의 상업적 대성공의 발판을 일구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기 있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질 수밖에 없듯이 80년대까지 사회파가 득세하자 이에 따른 피로를 호소하는 추리소설가들이 발생했는데, 시마다 소지 그리고 아야쓰지 유키토 같은 작가들이 본격으로 회귀하자는 신본격 운동을 내세우며 또 한 번 대세를 타기 시작한다. 바닷가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체, 그들은 현 국회의원의 비서와 그의 내연녀. 평범한 동반자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미국 방위산업체의 무기 거래 로비와 관련된 정황이...운운하는 세이초식 사회파 추리소설에는 어린 시절 읽었던 본격 추리소설의 원초적인 즐거움이 없다, 추리소설은 뭐니뭐니 해도 기발한 트릭과 과감한 논리, 그리고 명탐정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신본격의 아버지, 아야쓰지 유키토의 집필 철학이 아닐까 싶다. 유키토는 고전적인 본격파의 트릭에 당시 이미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던 재패니메이션의 캐릭터 같은 명탐정 시시야 카도미를 내세워 스타 작가로 부상한다. 개인적으로 신본격 하면 왠지 재패니메이션이 떠오르는데, 악마적인 재능의 건축가가 남긴 10개의 저택에서 매번 불가사의한 사건이 펼쳐지고 그걸 명탐정이 족족 해결하는 플롯 자체가 이미 소설보다는 연작 만화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어딘가 가벼운(?) 분위기야말로 신본격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는데, 서양에서는 최근 상이란 상은 죄다 휩쓸고 있는 루이즈 페니 같은 현대 본격 추리소설가조차 트릭에 있어서 리얼리티를 중시하고 명탐정도 고전적인 천재형이 아니라 나름의 약점이나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신본격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 같다. 처음부터 10권을 예정한 유키토의 '관 시리즈'는 현재까지 8권이 나왔는데 그중 5권 <시계관의 살인>이 제일 탁월한 듯하고, 7권부터는 필력이나 구상력이 조금 떨어진 느낌이 든다. 오로지 일본에만 있는 신본격의 주창자가 부진을 떨치고 강력한 신작으로 복귀하기를 바란다...유키토와는 조금 느낌이 다르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대학생 아리스 시리즈'로 현재까지 건실하게 활동하고 있다. 유키토보다 만화적인 느낌은 덜한 편인데, 아무래도 그는 논리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엘러리 퀸을 추앙하는 작가라 신본격 중에서는 그래도 고전 본격 작가들과 가장 비슷한 작풍이지 않나 싶다. '대학생 아리스 시리즈' 중에서는 <외딴섬 퍼즐>, '작가 아리스 시리즈' 중에서는 <주홍색 연구>를 추천하고 싶고, 제목부터가 엘러리 퀸 워너비임을 증명하는 최종 후보작 <말레이 철도의 비밀>도 상당히 잘된 밀실 추리소설이다.




Obstacle  - 장애


선정자 - 링컨 라임 by 제프리 디버


 

 

 

 

 

 

 

 

 

 

 

 


 

최종 후보자 - 맥스 캐러도스 by 에너스트 브래머  


 


'Obstacle'이 장애라는 뜻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O항목이 암만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아 영어사전을 뒤지다 겨우 발견한 것인데, 이런 글을 쓰면서 영어 공부까지 해야 할 줄이야ㅠ.,ㅠ 아무튼 추리소설의 역사라는 게 실은 탐정의 역사나 매한가지다. 추리소설의 주제는 결국 나쁜 짓을 저지른 놈을 붙잡아서 벌주고 기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게 아니던가. 이때 악당은 평화에 대한 위협을 증폭시키기 위해 최대한 간교한 트릭을 선 보이므로, 이를 해결하는 탐정 역시 초인적이고 영웅적이어야 한다. 이런 초인형, 영웅형 탐정의 선두주자는 누가 뭐래도 셜록 홈스인데, 워낙 캐릭터 조형이 잘된 덕분에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불멸의 히어로로 사랑받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홈스는 첫 등장할 때부터 슈퍼스타였기 때문에 그에 맞서는 아류 탐정들도 반드시 다양한 개성과 특징으로 무장해야 했다. 이게 도를 지나치자, 너네 홈스는 정상인이지? 우리 탐정은 눈이 안 보여도 홈스만큼 범인을 잘 잡아! 하는 등의 일견 유치한 경쟁으로까지 치닫게 됐다. 이때 등장한 온갖 문제가 있는 탐정들을 추리소설 사조상 'defective detective(결점 있는 탐정)'라고 부른단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음에도 놀라운 활약을 펼치는 탐정은 그 장애의 그늘이 짙은 덕분에 더욱 빛나는 셈인데, 이 장애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작가가 바로 전신마비 탐정 링컨 라임을 창조한 제프리 디버이다. 법의학과 각종 자연과학에 통달한 과학수사관이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다. 그는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해오는 파트너 아멜리아 색스(나중에 연인 관계로 발전), 그리고 동료 수사관들과 함께 오직 머리로만 희대의 악당들을 상대하는데, 벌써 10권 넘게 이어진 링컨 라임의 수사 기록은 그야말로 천의무봉이다. 대표작은 영화화된 <본 컬렉터>이지만, 개인적으로 시리즈 2작 <코핀 댄서>를 베스트로 꼽으며 7작 <콜드 문>도 못지않다. 링컨 라임이 몇 번의 수술 끝에 오른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된 최신작 <킬 룸>에서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교한 저격수와 상대하는데 이 역시 강력 추천작. 제프리 디버는 현대 영미 추리소설가 중에서는 희귀하게 각종 단서들을 '수사 보고서'라는 명목으로 독자에게 가감없이 공개하는 작가로서 독자와의 두뇌싸움을 내세웠던 퍼즐파의 향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 유독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 물론 자주 보다 보니까 어느 정도 반전이 예상 가능하다는 점은 있지만 거의 언제나 돈값을 하는 보증수표이다... 어네스트 브래머의 '맥스 캐러도스' 탐정은 위에서 예로 든 바로 그 홈스 시대의 장님 탐정이다. 물적 증거가 무엇보다 중요한 살인 현장에서 장님이 어떻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지가 키 포인트인데, 아쉽게도 현재 국내에서 따로 책으로 구할 수는 없다. 아주 예전에 자유추리문고에서 단편집이 한 권 나왔을 뿐, 그 후로는 잊혀져 있는 것이다. 고전 추리소설이 이따금 나오는 요즘 맥스 캐러도스의 재출전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Police - 경찰


선정작 - <웃는 경관> by 펠 바르, 마이 슈발


 

 

 

 

 

 

 

 

 

 

 

 

 


 

최종 후보작 - <살의의 쐐기> by 에드 맥베인


 


 

 

 

 

 

 

 

 

 


 

 

고전 추리소설과 명탐정이 동격인 데 반해, 아쉽게도 현대 추리소설에서는 명탐정의 활약이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경찰 조직이 세포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박혀 사건을 해결하는 요즘, 명탐정이 등장해 난해한 사건을 척척 해결한다면 리얼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 실제로는 암만 명탐정이라도 경찰이 통제하는 사건 현장에 들어가보지도 못할 걸. 경찰소설은 이런 흐름을 타고 등장했다고 보면 된다. 처음 경찰소설을 쓴 작가는 그 유명한 에드 맥베인. 맥베인은 87분서라는 가공의 경찰서를 배경으로 7~8명의 살인과 형사들이 대형 사건을 팀으로써 해결하는 구조를 최초로 선 보였는데, 딱 한 명의 영웅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과 심리적 특징을 가진 형사들이 등장하므로 형사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온갖 소회와 현대 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었다. 더구나 조직적으로 착착 움직이면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형사들의 활약은 이미 조직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과도 절묘하게 부합해 이 역시 인기 요인의 하나이다. 맥베인 열풍을 멀리 스웨덴에서 벤치마킹한 작가가 바로 부부작가 펠 바르, 마이 슈발이다. 그들은 스톡홀름의 살인과 형사들을 주인공으로 10편의 시리즈를 썼는데, 형사들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주요 캐릭터가 마르틴 베크라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라 불린다. <웃는 경관>은 시리즈 제4작으로 영어로 번역되자마자 놀라운 평가를 받고 상업적으로도 대성공했다. 솔직히 맥베인의 영향이 굉장히 짙은 시리즈라서 오리지널리티의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웃는 경관>만큼은 감히 원조 맥베인조차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대걸작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역대 경찰소설 가운데서도 1위로 꼽고 싶고, 모든 장르를 통합한 올타임 베스트 추리소설을 꼽아도 아마 열 손가락 안에는 있지 않을까 싶다. 스톡홀름의 2층버스에서 벌어진 기관총 난사사건을 해결하는 베크 팀은 누구 한 사람 소외되지 않고 각자의 단서를 바탕으로 수사를 펼쳐 나가는데, 끝에 가서 이 모든 단서가 가리키는 범인이 딱 하나로 떨어질 때의 쾌감은 가히 아름다울 지경. 한 개인의 탁월한 추리력이 아니라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현대 경찰의 조직 수사를 이토록 완벽하게 묘사한 소설은 지금껏 없었다. 그 어느 작품보다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비감이 전해지는 결말도 일품. 요즘은 스칸디나비아 미스터리도 많이 소개되는데 불멸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왜 내지 않는 것인지가 출판계에 느끼는 나만의 미스터리이다...<살의의 쐐기>는 수십 권이 이어진 87분서 시리즈 중 비교적 초기작으로, 경찰서에 자살 폭탄테러를 가하려는 여인이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서스펜스와 팀의 리더 격인 스티브 카렐라 형사가 맞닥뜨린 밀실 살인사건이 번갈아가며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합쳐지는 구성은 가히 대가의 솜씨라 할 만하다. 87분서 시리즈는 워낙 권수가 많아 그간 국내에 잘 소개되지 못했는데,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내고 있는 출판사가 있어 무척이나 반갑고, 앞으로도 더욱 활발한 출간을 부탁드리고 싶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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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오늘은 G부터 K까지...

 

 

Gag - 개그

 

선정작 -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by 히가시가와 도쿠야

 

 

 

 

 

 

 

 

 

 

 

 

 

 

최종 후보작 - <뉴욕을 털어라> by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추리소설의 으뜸 소재라고 하면 역시 살인사건일 텐데, 과연 피 튀기는 살인과 웃음 넘치는 개그가 어울릴까. 의외로 많은 유머 추리소설을 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걸 보면 답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 피와 살인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웃음으로 중화시켜 즐거운 독서체험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유머 추리소설은 추리소설의 역사 속에서 꾸준히 인기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특히 본격이나 하드보일드라는 추리소설의 양대산맥이 상당 부분 클리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로는 <5인의 탐정가>나 <클루> 같은 블랙코미디나 패러디도 나와 있다. 유머 추리소설로 가장 성공한 작가는 일본의 아카가와 지로겠지만 한 권, 한 권의 파괴력이 약하고, 개인적으로 유머 추리소설의 명작으로 꼽는 <플레치>나 <맥널리 시리즈>는 절판된 지 오래라서 현재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작품을 골랐다. 데뷔 이래 한결같이 유머 추리소설만 파고 있는 도쿠야는 폭소까지는 아니지만 시종일관 잔바리(?) 개그를 날려 10번에 3~4번 정도는 웃기고야 마는 타율이 높은 교타자다. 게다가 유머와는 별개로 작품들이 몽땅 본격 추리소설이고 트릭의 수준도 높은 편이라 뭘 읽어도 크게 후회가 없다. 아마도 애초에 본격 추리소설이 독자와의 두뇌싸움이라는 유희정신으로 출발했고, 유머 또한 일종의 인간 유희이기에 이 두 가지를 보기 좋게 결합한 히가시가와 도쿠야야말로 우리 시대의 유희왕(?)이 아닐까.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는 대표작인 '이카가와 시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고, <노란 방의 비밀>을 연상시키는 밀실 트릭도 깔끔해서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도통 현실감은 없지만 <살의는 반드시 세 번 느낀다>도 추천작...<뉴욕을 털어라>는 'Bad Boy'편의 차석이었던 <인간사냥>의 리처드 스터크가 본명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로 발표한 코믹 범죄소설이다. <인간사냥>의 '파커'가 잔인무도한 범죄자인데 반해, <뉴욕을 털어라>에 나오는 '도트문더'는 실수투성이 괴짜 도둑이라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아마도 냉혈한 파커와 헐렁한 도트문더는 작가가 바라본 범죄의 양면인지도 모르겠다(예전에 <뉴욕을 털어라> 리뷰에 썼던 문장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나라고 쓸 만한 문장을 무한정 생산하는 건 아니다...). 보너스로 단편 중에서 정말 포복절도할 만한 걸 하나 소개한다. 기시 유스케의 <자물쇠 없는 방> 중 '밀실극장'. 결정적인 어떤 장면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었다.

 

 

 

Hard Boiled - 하드보일드

 

선정작 - <메인> by 트레베니안

 

 

 

 

 

 

 

 

 

 

 

 

 

 

최종 후보작 - <위철리 가의 여인들> by 로스 맥도널드

 

 

 

 

 

 

 

 

 

 

 

 

 

 

원래 하드보일드는 계란 따위를 '완숙하다'는 뜻이었는데, 점차 비정, 냉혹하고 딱딱하게, 라는 문학 용어처럼 변했다. 여기가 뭐 장르의 규칙이나 변천사를 고찰하는 자리도 아니고, 또 그런 걸 잘 알지도 못하는 터라 대충 감정에 잘 휘둘리지 않는 터프가이가 끊임없는 탐문과 거친 액션을 통해 사건을 해결한다는 하나의 스타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자. 복면 작가 트레베니안(사후에 캐나다 교수로 밝혀짐)의 1976년작 <메인>은 하드보일드의 인기와 핵심 요소들이 후대의 형사물, 혹은 연쇄살인 스릴러물 등에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걸작으로 하드보일드의 조종을 울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쇠락한 몬트리올의 메인 거리를 수십 년째 지키고 있는 노형사의 생애 마지막 사건을 주로 담담하게, 때로 격정적으로 그리는 작품으로 주인공 라프왕트가 간절하게 원했으나 끝내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너무도 시리게 후벼 판다. <메인>이 유독 아프게 읽히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의 교정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번역자인 정태원 선생님이 주인공 라프왕트처럼 병환이 깊어진 걸 알게 된 것이다. 시한부인 라프왕트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당시 비슷한 처지였던 정 선생님이 생각나 작업하기 힘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편이 좋다. 상처를 드러내서 어쩌겠다는 건가? 바보짓이다. 어리석은 짓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원조 추리소설 마니아셨던 우리 모두의 선배, 정태원 선생님의 명복을 다시금 빈다... 본격 추리소설의 작위성이나 단조로움 등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에서 시작된 하드보일드의 삼대장은 누구나 알다시피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이다. 아무래도 데뷔한 순서대로 장르에 이바지한 영역이 다를 텐데, 해밋이 창조했고, 챈들러가 발전시켰으며, 맥도널드가 완성했다고 보면 좋지 않을까. 비슷한 방식을 본격 추리소설에 적용해 보면,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했고, 코넌 도일이 발전시켰으며, 애거서 크리스티가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하드보일드라는 용어에 딱 어울리는 해밋의 피가 뚝뚝 떨어질 듯 박력 있는 문장이나 챈들러의 시니컬하면서도 우수가 배어 있는 문장에 품격을 더하고, 50년대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로 혼란과 도탄에 빠진 미국 가정의 비극이라는 주제의식과 추리소설적인 플롯, 반전에는 더욱 공을 들인 로스 맥도널드의 작품들은 이미 현대 하드보일드의 최고봉이다. 전부 읽어본 건 아니지만 국내에 나온 작품 중에서는 <위철리 가의 여인>이 가장 좋았기에 추천!

 

 

 

Island - 섬

 

선정작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by 애거서 크리스티

 

 

 

 

 

 

 

 

 

 

 

 

 

 

최종 후보작 - <살인자들의 섬> by 데니스 루헤인

 

 

 

 

 

 

 

 

 

 

 

 

 

 

 

사실 섬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중에서 꼭 1위를 주고 싶은 작품이 있긴 한데,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유라서 빠진 게 있다. 아직도 철면피가 되려면 멀었다는 걸 새삼 느끼는 바이다. 아무튼 추리소설에서는 섬이 주 무대로 자주 쓰이곤 한다. 아무래도 폭풍우 등으로 배만 끊기면 자력으로 섬을 빠져나올 수 없기에 등장인물들이 하나씩 먹잇감이 되는 본격 추리소설의 배경으로 안성맞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선박 제조기술 등이 갈수록 좋아지는 요즘은 섬 배경의 추리소설이 줄어드는 추세인 듯하다. 그래서 조금 오래된 작품을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결과적으로 뽑은 선정작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거라 확신한다.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 중 한 편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야말로 섬에서 벌어지는 본격 추리소설의 A부터 Z까지 모든 게 담긴 작품이 아닌가! 외딴섬에 모인 열 명의 등장인물.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운 좋게 단죄를 피한 범죄자들이었다. 모두가 모여 시끌벅적한 파티를 벌이는 와중에 한놈두시기석삼너구리 식으로(어허, 또 나이가...) 한 명씩 죽어가고, 때를 같이해 선반에 장식해놓은 인디언 인형들이 하나씩 없어진다. 대략적인 줄거리만 들어도 으스스한 게 어릴 적 페이지 넘기는 게 무서울 정도로 몰입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에 어떤 선배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공포소설이지, 무슨 추리소설이냐고 하는 얘기를 하기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완전히 고립된 섬에서 등장인물 모두가 죽었다면 자연스레 지금 같은 형태의 진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해서 어떻게 봐도 내 생각에는 공정하고, 또 우수한 본격 추리소설이다. 워낙 압도적인 이미지를 제공한 작품이었기에 전 세계를 막론하고 패러디도 많이 됐는데, <무한도전>도 떠오르지만 역시나 가장 괴이한 패러디는 <극락도 살인사건>일 것 같다ㅎㅎ... 최종 후보작인 <살인자들의 섬>은 꽃미남에서 잭 니콜슨으로 역변(?)하고 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동명 영화로 많이들 기억할 듯. 당시만 해도 사립탐정물 '켄지&제나로 시리즈'로 소소하게 떠오르고 있던 데니스 루헤인의 결정적인 히트작으로, 2차대전 이후 정신병동으로 쓰이고 있는 셔터 섬의 실종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관이 방문하면서 비극적인 이야기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지금 와서는 그닥 새로울 것 없는 반전이지만 결말까지 가는 과정이 스릴 넘치고 또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의 절절한 심리가 공감되어 여운이 몹시 긴 책이다.

 

 

 

Journey - 여행

 

선정작 - <나일 강의 죽음> by 애거서 크리스티

 

 

 

 

 

 

 

 

 

 

 

 

 

 

최종 후보작 - <오리엔트 특급살인> by 애거서 크리스티

 

 

 

 

 

 

 

 

 

 

 

 

 

 

어쩌다 보니 연속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판이 됐는데 추리소설을 좀 아는 분들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본격 추리소설의 모든 소장르 가운데 그녀가 하지 않은 것이 없고, 걸작을 써내지 못한 것이 없다는 걸. 당연히 여행 추리소설도 크리스티가 1등이다. 요즘에야 평범한 벌이를 하는 사람들도 비행기로 1년에 몇 차례씩 해외에 나가는 게 예사지만 1930년대쯤에는 어디 그랬을까. 추측컨대 전원의 마을이나 도시의 공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성공(?)한 작가가 조근조근 전해주는 해외의 풍경에 그만큼 몰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대인기 명탐정 중 한 명인 미스 마플의 이미지가 하도 강렬해 저자 역시 시골에 틀어박혀 글만 쓰는 노처녀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크리스티는 두 번 결혼했고 해외도 자주 나갔다. 두 번째 남편이 고고학자라서 중동의 유적 발굴 현장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뛰어난 작가들은 어떤 경험도 허투로 쓰지 않아 이때의 해외 출장 경험은 그녀의 걸작들에서 자주 발현되는데, 나일 강을 항해하는 유람선을 배경으로 막 결혼한 부잣집 딸내미가 피격 살해당하는 <나일 강의 죽음>도 비슷한 경험을 토대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고립된 배경에서 한정된 용의자 가운데 하나 혹은 여러 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죽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중 독자들이 절대로 신뢰할 수 있는 명탐정이 단서를 모으고 용의자를 탐문해 마침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주로 단독범인 범인의 정체를 폭로한다.' 이상이 본격 추리소설의 핵심 골자라고 할 수 있는데, 크리스티는 곡예를 펼치듯 한계까지 이 장르 규칙을 가지고 놀면서 독자들에게 마법을 선사했다. 일종의 추리소설 규칙의 맹점을 찌른 트릭을 펼친 명작들이 최종 후보작에 오른 <오리엔트 특급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커튼> 등이라면, <나일 강의 죽음>은 메타적인 느낌보다는 작품 속에 언급한 단서와 증언을 차곡차곡 쌓아 진상에 도달하는 정통파의 느낌이 강하다. 외계인이 지구를 점령하고 지구인의 문명을 조사하면서 대체 본격 추리소설이란 게 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내놓을 만한 작품이다...위에서 잠깐 언급한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호화 열차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명탐정 포와로가 해결하는 내용으로 호화 캐스트인 동명 영화로도 유명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만약 일반 영화처럼 주인공을 톰 크루즈가 하고, 이름 난 조연으로 케빈 스페이시가 딱 한 명만 나오면 누구나 범인을 때려맞출 것이기에. 1970년대처럼 화려한 캐스트의 크리스티 영화가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마지막으로 전해본다.

 

 

 

Kidnap - 유괴

 

선정작 - <64> by 요코야마 히데오

 

 

 

 

 

 

 

 

 

 

 

 

 

 

최종 후보작 - <조화의 꿀> by 렌조 미키히코

 

 

 

 

 

 

 

 

 

 

 

 

 

예전에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를 두고 작품을 지금보다 더 많이, 빠르게 쓰면 마쓰모토 세이초를 뛰어넘을 거라고 언급한 바 있다. 사회파의 거두인 마쓰모토 세이초에 비해 역량이나 스케일 면에서 떨어질 게 전혀 없으니 세이초의 절반만큼의 생산성만 보장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반대로 히데오 작품의 출간은 갈수록 뜸해졌으니 실망하는 게 당연지사. 알고 보니 몸이 좀 안 좋았다고. 이런 연유로 좀 마뜩찮게 7년만의 복귀작 <64>를 읽어보고 기나긴 공백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10년 동안 갈고 닦았다는 말이 이해가 갈 정도로 대작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다 읽자마자 책의 맨 뒤로 가서 가격을 보았다. 15,000원. 이 수준의 작품을 이 가격에 살 수 있다니 정말 횡재한 기분이었다(왠지 홈쇼핑 멘트 같은 느낌이). 히가시노 게이고, 시마다 소지, 미야베 미유키, 다카무라 가오루 등이 데뷔와 동시에 걸작들을 꽝꽝 내던 1980~90년대가 일본 추리소설의 황금기라면 최근의 작품들은 어쩐지 좀 비어 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내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만화 같은 라이트노벨풍 추리소설이 다른 장르에 비해 좀 넘친다는 생각도 들고. 솔직히 2000년대 이후에 활발한 작가 중에 요네자와 호노부가 늘 감탄스럽고, 미치오 슈스케는 가끔, 나머지는 말을 말자... 하지만 <64> 같은 걸작을 내는 요코야마 히데오 같은 작가가 있기에 일본 추리소설은 건재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 조직의 한 부속품인 주인공이 조직의 횡포와 맞서 싸우는 특유의 테마에 여전한 감동 코드, 게다가 두 개의 유괴사건이 하나로 절묘하게 합쳐져서 장엄하게 끝나는 결말부까지 부족한 점이 전혀 없다. 한순간도 허전하지 않은 밀도 높은 이야기가 놀랍고, 처음에는 작위적이라고 생각했던 두 개의 유괴가 아무 위화감 없이 결합해서 둘 다 깔끔하게 해결되는 결말은 몇 번을 칭찬해도 모자라다. 저자의 말에서 '공들여 가꾼 이야기의 정원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운운하는 걸, 나중에 다시 읽고 웃음이 나더라. 이런 건 작가가 진짜 자신 있을 때 쓰는 말이거든. 모처럼 완성한 걸작에 스스로도 득의양양한 작가의 모습이 상상되어 절로 웃음이 난 것이다. 단연 2000년대 이후 최고작으로 만약 라식수술 등으로 일시적으로 눈이 안 보인다면 책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라도 고용해서 무조건 읽으시길... 최종 후보작인 <조화의 꿀>은 경찰조직 내부의 암투가 주 소재인 <64>보다는 정통적인 유괴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유괴 추리소설의 난점은 범인이 몸값을 받으려면 반드시 경찰이나 피해자 가족과 한 번은 접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건데, 이 과정의 아이디어가 유괴 추리소설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인이다. 실제 유괴사건들도 대개 이 과정에서 체포당하지 않나. <회귀천 정사> 등으로 이름 난 렌조 미키히코는 과연 명성에 걸맞은 실력으로 이 난점을 비교적 깔끔하게 해결해낸다. 평범해 보였던 사건 관계자들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요사스런 인간의 심리에 접근하는 특유의 스타일도 여전하다. <64>처럼 일본 추리소설의 단단한 노장 파워를 보여준 작품이지만 안타깝게도 작년에 렌조가 별세하면서 그의 실험은 끝나고 말았다. 이 자리를 빌어 불세출의 작품(특히 단편집 <회귀천 정사>)을 남긴 렌조 미키히코 님의 명복을 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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