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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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직장인이 가장 부러워하는 학생의 특권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시나 방학이 떠오른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두 달 가까이 통째로 쉬면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고, 하릴없이 방 안에 뒹굴뒹굴 누워 지낼 수 있는 방학은 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가 아닐까. 그런데 경험상 방학이라고 늘 기분 좋은 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초등학교 몇 학년 여름방학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이 나를 시골 외가댁에 한 달가량 머물게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엄마가 모처럼 손이 많이 가는 날 돌보는 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런 계략(?)을 꾸민 게 아닌가 싶은데, 외삼촌들은 전부 대학생이라 말도 안 통하고 또 엄마가 장녀인 탓에 당시에는 이모네 아들딸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같이 놀 또래 하나 없는 시골에서 한 달을 버티려니 숫제 죽을 맛이었다. 당시 시골집 평상에 누워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며 눈물 짓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흑백합>의 주인공 스스무는 나 같은 고문을 당할 필요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1952년 현재, 스스무는 도쿄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열네 살 소년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옛 동료에게 초대를 받아 그 아저씨의 오사카의 롯코 산 별장에서 한 달간 머물게 된다. 아저씨에게는 스스무와 동갑내기인 카즈히코라는 아들이 있어, 둘은 금세 친해진다. 두 친구는 롯코 산 이곳저곳을 탐험하며 매일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날 표주박 연못이라는 곳을 갔다가 거기서 자신을 '연못의 요정'이라고 주장하는 아름다운 한 소녀를 만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는 스스무, 카즈히코와는 달리 카오루라는 소녀는 오사카에서도 유명한 부잣집의 고명딸. 그 나이에 신분이나 재산의 격차 따위가 무슨 의미람. 세 동갑내기 소년소녀는 매일같이 롯코 산을 누비며 점점 가까워지는데, 안타깝게도 스스무와 카즈히코가 하필 둘다 카오루에게 반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다. 둘 중의 한 명은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하잖아.

 

가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수려한 풍광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한 롯코 산을 배경으로 소년소녀의 풋사랑이 펼쳐진다. 고전적인 애정의 삼각 관계라 뻔하다고 생각할 독자들이 있겠지만,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이 딱 그 나이 대 소년의 행동과 사고를 보여 사랑에 미숙했던 어린 날의 추억도 떠오르는가 하면, 흡사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보는 듯한 애틋함과 아련함이 있다.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오해하다가 잠 못 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기 일쑤인 법. 예컨대 두 소년은 카오루의 집에 초대되어 그녀의 방에서 놀게 된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 카오루는 스스무에게는 자신이 평소에 쓰는 의자를 주고, 카즈히코에게는 고모의 화려한 벨벳 의자를 가져다준다. 스스무는 훨씬 좋은 고모의 의자를 카즈히코에게 준 것을 그녀가 카즈히코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열등감에 빠지지만, 카즈히코는 평소에 카오루가 쓰는 의자를 스스무에게 준 것을 두고 그녀가 스스무를 더 스스럼없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좌절한다. 분명 카오루는 별 생각없이 의자를 나눠준 것일 테지만, 사랑을 경쟁하는 두 소년은 어디 그런가. 끊임없이 우리 중 누굴 더 좋아할까, 하고 고뇌하는 두 소년이 참을 수 없이 귀엽게 느껴진다.

 

이렇게 삼각 관계로만 진행되다 끝나면 어찌 이 작품이 200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7위에 올랐겠는가. 풋풋한 십대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와 맞물려 하나의 살인 사건도 있다. 살해당한 이는 카오루의 둘째 삼촌. <흑백합>은 1952년 현재의 아이들 장과 나치스가 지배하던 1935년 베를린, 전쟁이 한창인 1942-45년의 장이 병행된다. 과거의 장에서 현재 아이들이 만나는 어른들의 옛 이야기가 설명되는데, 독자들은 이 옛 이야기들을 통해 지금은 단지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들로만 보이는 그들에게도 잔혹한 사랑의 엇갈림이 있었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이 주로 내세우는 소년소녀들의 순박한 풋사랑이 유독 명징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들과 대비되는 어른들의 은원 관계가 그만큼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백합은 원래 하얀 꽃인데, 검을 흑(黑)자를 앞에 붙인 게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스포일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소녀들은 누구 하나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저 어느 여름방학의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일 뿐.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어른들의 어두운 비밀을 알아차리기에 그들은 너무도 순수하고 맑은 존재였던 것이다. 단순히 미스터리로만 보자면 요즘은 잘 안 쓰는 평범한 서술 트릭을 사용한 것이나,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점 요소가 있지만 용의자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뭐 했나를 차분차분 따지는 그런 본격 미스터리는 아니기에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곳곳에 복선이 있어 다 읽고 바로 한 번 더 읽으면 좋을 썩 괜찮은 미스터리 소설이다. 

 

작가 타지마 토시유키는 1948년생으로 실제 주인공들과 열 살 차이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 스스무들과 비슷하게 1950년에 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 막 전쟁의 참상을 벗어나 점차 발전 일로의 길로 나아가는 당시 오사카의 모습을 정확하게 스케치해낸다. 작가는 미스터리부터 모험소설까지 다양한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원래 10년 전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고 하는데, 점차 남은 눈의 시력도 사라져가자 실의에 찬 나머지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모양인지 맨션, 가재도구도 전부 처분하고, 전기, 인터넷 등도 모두 해약한 채 사라졌다고 하는데, 벌써 4개월째 소식이 없어 좋은 소식을 기다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두 눈이 멀쩡한 우리가 시력을 상실한 작가를 두고 무책임한 자살이라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안 될 말이고,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마지막 작품으로 <흑백합>같이 여름날의 추억이 한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작품을 남긴 것에 작가 생활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주는 감흥에 흠뻑 빠져 책장을 다 덮은 새벽 3시부터 잠이 오지 않았으며, 죽기 전에 나도 이런 걸 꼭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담배만 뻑뻑 물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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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홈즈걸 1 -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명탐정 홈즈걸 1
오사키 고즈에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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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어릴 적 꿈은 서점 주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동네 서점에 가면 책을 붙들고 몇 시간이고 나올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다 못한 서점 아저씨가 안 사려거든 좀 가다오, 핀잔을 주면 겨우 안 움직이는 발을 떼며 나오기 일쑤였으니. 갖고 싶은 책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서점에 산처럼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군침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서점을 해서 마음놓고 책을 읽어야겠다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에 많은 인기를 모았던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서는 우승자에게 서점에서 자신이 들고오고 싶은 만큼 책을 주는 혜택을 주었는데, 나도 한 번 저런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 꿈까지 꿨을 정도. 그러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서점이란 역시 동경과 추억, 황홀한 꿈으로 온통 파랗게 채색된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뿐이랴. 예전에는 동네 서점이 사랑방 역할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 아파트 상가에 있던 서점에 가면 책 한 권 사놓고, 서점 주인 아저씨가 쌍팔년도에 데모했던 이야기 듣느라 몇 시간을 앉아 있다 오곤 했으니까.
 
 

그러나 2010년 3월 현재, 나는 꿈만으로 동네 서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수지가 안 맞는 장사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열혈 운동권 출신 아저씨가 하던 동네 상가 서점은 이미 도산한 지 오래. 그 아저씨는 간 곳을 모른다. 물론 나는 요즘도 가끔 서점을 가곤 하지만, 책표지나 만든 꼴만 확인하고 냉큼 집에 들어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다. 집에서 편하게 받아볼 수 있고, 각종 할인이나 적립금, 이벤트 등이 온라인에서 훨씬 풍부해 굳이 서점에서 책을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게 다 편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바뀌어버린 생활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끔 서점에 얽힌 즐거운 옛 생각이 날 때면 가슴 한구석의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렇듯 조금쯤은 예전에 분명히 있었던 훈훈함과 재미가 사라진 시절에 우연히 만난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은 서점이라는 공간을 너무도 따뜻하게 그리고 있어 읽는 동안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점에 얽힌 사건은 서점이 해결한다'는 모토를 내세운 일종의 서점 미스터리인 이 작품은 총 다섯 편이 수록된 단편집. 주인공은 6년차 나름 베테랑 서점 직원 교코와 날카로운 추리력을 지닌 아르바이트생 다에(실제 사건들은 전부 다에가 해결한다). 불후의 명콤비 홈즈와 왓슨을 떠올리게 만드는 두 파트너가 역앞 중규모의 '세후도 서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기껏해야 책값으로 몇 만 원 정도가 오가는 서점에서 강도나 살인 같은 초강력 범죄가 일어날 리 있겠는가. 치매로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가 사다달라고 한 책을 찾아준다거나(다만 할아버지가 병으로 말씀도 잘 못해 책 제목을 적어준 쪽지가 암호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손님이 병원에 있을 때 너무도 좋은 책을 추천해준 이름 모를 세후도 서점 직원을 밝혀낸다거나, 서점에서 준비한 판촉물을 훼손한 범인을 알아내는 등의 소소한 내용이니 일상의 미스터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건 자체의 강도가 약한 편이라, 치밀한 추리나 경천동지할 반전...그런 건 없다. 어디까지나 안락한 분위기와 서점에 관한 공감 가는 정서로 승부하는 진짜 서점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듯.

 

무난하고 잘쓴 단편들이라 누가 읽어도 만족스럽겠지만,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가졌던 나는 딱 두 배의 재미를 더 느꼈다. 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전차남>이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등 일본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책들이 자주 언급되니,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흥미로울 듯하다. 특히 첫 번째 단편에 나오는 중요 단서 중 하나인 신초샤(일본 메이저 출판사 중 하나)의 판다 마스코트와 문고본 카탈로그 책자 같은 건 실물을 본 적이 있기에 읽는 동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막기 힘들었다. 미스터리로서도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지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서점이나 서점 일에 관한 정밀한 묘사가 아닐까 싶은데, 작가는 실제로 서점 직원으로 13년이나 일했다고 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점 직원이 하는 일을 그려낸다거나 평소 서점에서 일하면서 느낀 생각 등을 적재적소에 녹여내 한 편의 직업 소개서로도 충분할 정도다. 주인공 교코는 서점에 깊은 애정을 가진 평범한 직장인으로, 요즘 유행하는 소설들의 등장인물처럼 온갖 자의식이나 트라우마로 가득찬 우울한 내면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구김살 없는 보통 아가씨라 오히려 한층 더 호감이 가는 것이다. <명탐정 홈즈걸의 모험>은 서점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손에 잡힐 듯 분명히 보여주고, 단지 책을 사랑하는 손님들을 돕기 위해 별난 모험에 뛰어드는 두 아가씨의 매력이 가득한 정말 사랑스런 서점 미스터리다.

 

p.s/ 책 말미에 실제 서점 직원으로 일하는 아가씨 네 명의 인터뷰가 꽤 길게 수록되어 있는데, 이게 또 무척 재미있다. 이 책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손님들보다 더 골 때리는 실제 손님들의 일화라거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공감대 등이 아가씨들 특유의 끝없는 수다로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첫 직장이었던 출판사는 당시 영세한 곳이라 편집자인 나도 영업을 도우면서, 실제 서점 아가씨들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중 국내 굴지의 서점 아가씨가 참 네가지가 없어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한 적이 있는데, 이 인터뷰를 보니 서점 아가씨들 고충도 만만치 않더라. 우리는 한 사람이지만, 그분들이 만나야 할 출판사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을 테니 어찌 모두 친절하게만 대할 수 있겠는가. 바빠서 그런 거라 이해해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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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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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벽두부터 올해 최고의 기대작 중 한 편이 출간되었다. 2005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제5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에 빛나는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가 바로 그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6년작 <용의자 X의 헌신>처럼 그해를 대표하는 일본 미스터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작가는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군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이 작가의 작품은 그간 국내에서는 단편 몇 개만 겨우 소개된 데 그쳤는데, 특히 잡지 <판타스틱>에 실렸던 <도시전설 퍼즐>과, <계간 미스터리>에 수록된 <이퀄 Y의 비극> 같은 단편들은 짧은 분량에 비해 아주 재미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는 기억이 난다. 참고로 <도시전설 퍼즐>은 제55회 일본추리작가협회 단편상을 받은 바 있다. 이 두 단편을 비롯해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은 추리소설가 노리즈키 린타로로 실제 작가와 같은 이름이다. 추리소설 황금기를 빛나는 작품들로 수놓았던 작가 엘러리 퀸(프레드릭 더네이, 맨프레드 리, 사촌형제의 합작 필명)이 주인공 탐정의 이름을 역시 엘러리 퀸으로 한 것과 같은 설정이라 흥미롭다.


아마도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 엘러리 퀸의 대단한 팬인 모양인지, 엘러리 퀸(추리소설가, 탐정)과 리처드 퀸(엘러리의 아버지, 경감) 부자가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플롯도 그대로 빌려왔다.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추리소설가, 탐정) 또한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 경시의 도움을 받아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경찰 내부의 정보를 입수하곤 한다. 코난 도일 사후에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탐정 셜록 홈스 이야기를 다른 작가들이 이어 쓰듯(이런 장르를 '패스티시'라고 한다고), 엘러리 퀸을 일본을 배경으로 새롭게 부활시켰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추리하는 스타일도 비슷한데, 노리즈키 린타로도 엘러리 퀸처럼 번뜩이는 천재성에 의거한 추리가 아니라, 엄정한 논리에 따른 소거법을 주축으로 삼고 있다. 범행 시간에 A는 빨래를 널고 있었으므로 제외, B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님, 그러므로 범인은 알리바이가 없는 C. 대충 이런 식으로 가능성이 없는 용의자를 하나하나 제거시켜 나가고,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범인임이 틀림없음을 증명하는 식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엘러리 퀸'을 표방하는 또 한 명의 유명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비슷한 스타일이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와 매력적인 여대생 에치카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알고 보니 에치카의 아버지는 유명한 전위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 그는 실제 사람의 몸에 석고붕대를 감아 그 사람의 외양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라이프캐스팅 조각 기법의 명인이다. 이사쿠는 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딸 에치카를 본뜬 마지막 작품을 제작 중이다. 필생의 걸작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완성과 동시에 생명의 불이 꺼져버리고 만다. 이사쿠의 장례식이 끝나고 에치카를 비롯한 유족의 슬픔이 사라지기도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사쿠의 유작, 즉 에치카를 그대로 본뜬 조각상의 머리만 잘려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에치카는 고등학교 시절에 저질 사진가에게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사쿠의 위세가 만만찮을 때라, 다시는 사진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는데 이제 이사쿠가 가고 없으니 걸릴 것이 없다. 혹시 그 사진가가 이번에야말로 진짜 에치카의 머리를 잘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에치카를 꼭 닮은 조각의 머리를 잘라 가져가는 것으로 표현하려는 게 아닐까? 노리즈키 린타로는 에치카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사건에 개입하는데, 결국 에치카는 누구도 보지 못한 사이에 실종되어 버린다.

 
보통 애거서 크리스티나 밴 다인 등의 작품을 보면 탐정은 사건이 이미 벌어지고 나서 범행 현장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벌써 일어난 살인 사건의 현장을 발생 후에 조사하고, 관계자들의 증언을 청취해 점차 증거가 쌓이면 그걸 추리의 재료로 삼아 진실에 도달하는 게 본격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린타로는 사건다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에치카를 알고 있었고, 사건의 시작점부터 이미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설 만한 강력 사건이 벌어진 것도 작품의 중반을 지난 무렵이라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진행과는 무척 다른데, 실제로 사건은 그 시점에서부터 벌어진 게 아니라 책의 맨 첫 장부터 서서히 그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범행-탐정 도착-조사-추리-범인 도출의 순서대로 착착 흘러가는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진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의 범죄와 수사는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나 일의 순서에 따라 구획되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인간의 행동이니만큼 이 범죄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범행 당사자, 수사관 등)의 의지와 실수, 악의와 오해 등이 뒤섞여 무질서하게 돌아간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를 무 자르듯 가볍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실제적인 범죄의 양상과 흐름에 포커스를 맞춘 작가의 탁월한 구상은 깊은 고민의 산물인 듯해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나 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처럼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본격 미스터리는 그만큼 소구점이 명확해 집중이 잘 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장소 한 군데서만 모든 일이 벌어져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단점도 분명하다. 반면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탐정 린타로가 사건과 관련된 곳곳의 장소를 방문하고, 제법 많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청취하는 과정이 비중있게 묘사되어, 흡사 하라 료나 작중에서도 가끔 언급되는 로스 맥도널드의 하드보일드를 읽는 기분이었다. 특히 로스 맥도널드의 모 작품과는 줄거리도 아주 비슷해,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마디로 관련자 D의 증언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다른이 E의 증언에 따라 그 가설의 헛점이 노출되면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 등 탐문이 중요한 수사 기법으로 사용된다. 덕분에 본격 추리소설에 더해 하드보일드의 재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실은 '하드'까지는 아니고 '소프트'보일드에 가깝다). 작가의 문체는 비교적 유머도 적고 문장도 담백한 편이라 확 읽히는 맛은 적지만,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증언을 듣고, 가설을 세우고 허무는 과정이 자주 반복되어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었다. 또한 사건의 암부에 불륜과 배신 등 일그러진 가족 관계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어 시쳇말로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한 다소 꺼림칙한 재미도 충분하다. 이래저래 재미만큼은 확실한 소설이라고 보장한다.

 
마지막으로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면, 추리소설 작가이면서 평론가이기도 하단다. 신본격 미스터리를 제창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같은 교토대학교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으로, 유키토와 마찬가지로 걸작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시마다 소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 작가들이 줄줄이 데뷔하면서 신본격 미스터리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었는데,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작가로서 한창 때인 20대의 아야쓰지 유키토가 다소 무리한 아이디어나 트릭이라도 이거 되겠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맹장 타입이었다면, 평론 활동을 주축으로 미스터리의 존재 의의나 구성 원리 등을 이론적으로 파고들며 가끔 한 번씩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표하는 노리즈키 린타로는 후방에서 신본격을 뒷받침하는 책사 정도가 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도 10년만에 발표한 소설이라는데, 다음 작품은 좀더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아야쓰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 야마구치 마사야, 아시베 타쿠 등 신본격 작가들이 국내에 제법 소개된 이때, 처음으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미지의 대표 장편을 만날 수 있어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린타로 탐정이 잘린 머리 석고상에 얽힌 모든 비밀을 밝히는 마지막 30페이지는 아껴 읽을 만큼 흥미진진했고, 린타로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인물이 진실을 알고 나서 느끼는 깊은 회한은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때때로 우리의 삶을 슬픔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오해라는 괴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진실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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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셀렉션
데이브 프리드먼 지음, 김윤택 외 옮김 / 지성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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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스>가 <주라기 공원>을 만난다면?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데이브 프리드먼의 2006년 소설 <내추럴 셀렉션>을 읽는 게 어떨까 싶다. 심해와 지상에서 펼쳐지는 괴생명체와 여섯 명의 해양생물학자 간의 대결을 다룬 이 스릴러가 꼭 그런 이야기라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이 책과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책이라면, 몇 해 전에 스티브 앨튼이라는 작가가 상어의 조상 격인 고대 괴수 메갈로돈이 현대에 출몰해 사람들을 살육하는 <메그>라는 소설을 발표해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유감스럽게도 <내추럴 셀렉션>은 <메그>만큼 파괴력 넘치고 몰입감이 강하지는 못했지만(상어공포증에 시달리는 개인 취향이 반영된 듯), 나름대로 짜임새 있는 설정에 매 페이지마다 액션이 넘쳐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거의 최초의 스릴러라 불리는 <39계단>이 1차대전을 일으키려는 독일 첩보조직(엄밀히 따지면 배후의 비밀조직이지만)과의 대결을 소재로 삼은 것처럼, 서구에서 독서계를 장악한 스릴러라는 장르는 항상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끊임없이 스릴을 자극하는) 어떤 것을 그리는 듯하다. 때문에 양차대전 때는 독일, 냉전시대에는 소련 세력 등을 주로 악역으로 설정했다면, 전세계적인 해빙 무드가 조성된 요즘은 그럴싸한 적을 찾기 어려워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스릴러 작가들은 다양한 곳에서 독자의 본능적인 공포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대상을 정하는데, 의료 현장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사건들을 메디컬 스릴러로 푼다든가, 연쇄살인범이 등장해 주변의 이웃들을 살해하는 사이코 스릴러 등 종류가 무척 많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렵다. 아무래도 최근의 스릴러들은 더 이상 독자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국가 차원의 거대한 음모보다는, 개개인에게 닥치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공포를 다루는 쪽으로 유행이 바뀐 모양이다.

 

흔히 테크노 스릴러라 부르는 과학을 기반으로 한 스릴러는 작년에 사망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수퍼 베스트셀러 <주라기 공원>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괴수를 등장시켜 사람들을 학살하는 고전적인 괴물 호러소설의 플롯에 현대생물학이나 유전공학 등의 과학 기술 등을 결합시켜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이 소설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해 기록적인 흥행을 달성하기도 했다.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은 물론이거니와 워낙 소설 자체가 영화로 만들기에 그림이 딱 나오는 그런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과학 공부 좀 했고, 글도 좀 쓰며, 큰돈 만지고 싶은 배짱 좋은 후배 작가들이 나도 한번 써봐, 하며 나서기에 충분한 조건이 아닐까? 더구나 기초 교육의 확대로 독자들의 과학에 대한 교양 수준도 예전에 비해서는 크게 올라갔다. 이제 어느 정도의 해설 만으로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과학 이론에 대해 충분히 독자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과학을 소재로 삼는 어려운 스릴러를 집필한다는 부담감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나 요즘 독자들은 소설을 즐기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웬만큼의 지식도 얻어가는 걸 원하므로 오락과 과학이 결합된 <내추럴 셀렉션> 같은 소설이 앞으로도 더욱 큰 인기를 끌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의 작가 데이브 프리드먼 역시 과학 공부 좀 했고, 글도 좀 쓰며, 큰돈 만지고 싶은 배짱 좋은 작가 중 한 명이다. <내추럴 셀렉션>에서 그가 비장의 무기로 내세운 건, 찰스 다윈의 그 유명한 <진화론>이다. 제목 '내추럴 셀렉션' 또한, 다윈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이라 풀이할 수 있다. 자연선택이란 어느 특정한 종의 개체 사이에 벌어지는 생존 경쟁 속에서, 특히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생존하여 후손을 남긴다는 뜻이란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원시 기린은 처음부터 오늘날처럼 목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기린들이나 다른 동물들이 나뭇잎 등의 한정된 먹이를 놓고 다툴 때, 유독 목이 긴 기린이 높은 가지의 잎사귀를 따먹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목이 긴 기린들만 생존하고 목이 짧은 기린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이 긴 기린들의 암수끼리 결합하여, 목이 긴 유전자를 계속 후손들에게 퍼뜨렸고, 그 결과 오늘날 아프리카 초원의 기린들은 전부 목이 긴 기린만 남게 된 셈이다.

 

작가는 대다수의 생물학자에게 공인받은 이 자연선택 이론을 기반으로 삼아 거기에 상상력을 더해 무시무시한 심해의 괴물을 창조했다. 몸길이가 7미터가 넘고 무게는 20톤이 넘는 거대 가오리떼가 깊은 바다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원인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 익숙한 환경이 서서히 파괴되자, 원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는 거대 가오리떼는 서서히 얕은 바다로 부상하고, 그중 선구자 노릇을 하는 가오리는 아예 거대한 날개를 사용해 뭍으로 상륙하는데 성공한다. 심해라는 환경이 파괴되자 그에 적응하기 위해 육지에 올라온 거대 가오리야말로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의 최종 승자가 된 셈이다. 날카로운 이빨로 3미터에 달하는 곰도 한 입에 물어죽이고 육지와 바다, 공중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식인 가오리를 뒤쫓던 여섯 명의 해양생물학자는 이 새로운 가오리를 '악마가오리'라 명명한다. 그들은 악마가오리로 인한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기관총과 활, 헬리콥터, 보트 등을 총동원해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 한 가지는 악마가오리 또한 역으로 그들을 사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오리가 아무리 커져봐야 하늘을 날고 사람까지 죽이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심해는 우주만큼이나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 지구상에서 가장 깊다는 마리아나 해구에 인간들은 고작 수십 분을 들어갔다 나왔을 뿐이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곳에서 어떤 생물들이 살고 있을지, 그 생물들에게 어떤 능력이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추럴 셀렉션>이 보여주는 상상력은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바탕을 둔 비교적 그럴듯한 내용에 후반부 200페이지는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모험과 액션의 연속이다. 심심풀이로 책을 잡은 독자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듯하다. 다만 약간 아쉬운 건, 설정이나 줄거리의 정교함, 기발함에 비해 인물의 성격이 지나치게 얄팍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섯 명의 과학자들 중 한 명이 악마가오리를 사냥하는 게 무척 위험한 일이라는 이유를 들며 빠지려 하자, 리더 격인 인물은 이 일은 인류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종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며 아마 교과서에도 실리게 될 거라 회유한다. 리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교과서에 실리는 게 내 인생의 꿈'이었다며 참가를 결정한다. 그냥 한번 튕겨본 건가...백인 선남선녀 두 사람만 살아남게 되는 결말도 지나치게 할리우드 스타일이고,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동료를 줄줄이 잃었음에도 그다지 슬퍼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아무리 아이디어나 플롯이 중요한 소설이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문장이란 것도 죄다, '악마가오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식이라 전개는 빠를지언정 문학 작품을 읽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데이브 프리드먼의 다음 작품은 흥미진진한 내용 못지않게 문장력이나 인물의 성격에도 공을 들이길 기대하며 이만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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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0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죠스가 주랴기 공원을 만난 책이라면 이미 메그라는 해양소설이 있읍니다.ㅎㅎ
제다이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jedai2000 2010-01-0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스피님...사실 재미도 <메그>가 더 있었어요-_-;; 카스피님도 올 한해 원하시는 소원 다 성취하시고, 늘 댁내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마침내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이 출간되었다. 1989년 일본에서 출간되어 현재까지 일본 추리소설 사상 최고 걸작 중 한 편이라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199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가 뽑은 과거 10년간 베스트 1위, 1988-2008 베스트 오브 베스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는 2위(1위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도쿄 쇼겐샤 선정 본격 추리소설 100선에서도 당당 1위를 기록, 타이틀 만으로는 국가대표급 추리소설이라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의 출간에 약간 관여한 바가 있어, 과연 어떠한 작품일까 엄청 큰 기대를 하며 읽었다. 670쪽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라 며칠 시간은 걸렸지만, 다행히 만족스런 기분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고 명성에 비해 전혀 부족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기분 좋은 결론을 내렸다.

 

무대는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 마을이다. 일본 작가가 쓴 작품이지만 주인공이자 탐정역, 그리고 시체역을 맡은 그린이 일본인 혼혈아일 뿐 등장인물은 전원 미국인. 이름만 들어도 으스스한 '툼스빌' 마을의 스마일 공동묘지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거대 공동묘지의 소유주이자 대를 이은 장의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발리콘 가문의 수장 스마일리는 병에 걸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두 번의 결혼으로 얻은 자식들은 모두 여섯 명. 이들 중 사고나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사망한 자식들을 제외하면 유산의 상속권자는 총 다섯 명이고, 스마일리 발리콘의 손자인 펑크족 청년 그린에게도 권리가 있다. 이제 추리소설의 필수 공식 중 하나인 유산을 둘러싼 반목과 유언장 공개 등이 수순대로 일어나는데, 홍차를 마시는 다과회 자리에서 스마일리는 자신에게 선물로 들어온 초콜릿을 먹기 싫다며 그린에게 준다. 자기 방에 누워 빈둥대다 초콜릿을 먹은 그린은 아뿔싸, 죽음에 이르게 된다. 초콜릿에 맹독인 비소가 들어 있던 것이다!

 

주인공이 죽었으니 이야기가 끝이 나나? 생각하겠지만 남은 페이지는 아직도 500쪽.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하고 분개하지 마시라. 본인이 한 가지 중요한 설명을 빠뜨렸으니까. 이 작품의 프롤로그에 나온 대로, 최근 미국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나는 기이한 일들이 연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은 미국 사회를 충격에 던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부활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등장인물 중 하나인 사학(死學) 전문가 허스 박사의 입을 통해 다양한 가설이 소개되긴 하지만 누구도 진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린을 보면 알 수 있듯 분명 호흡도, 맥박도, 땀도 흘리지 않는 시체가 되살아나는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그린은 젊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게 된 억울함과 분노를 풀기 위해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려 한다. 일체의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하므로 피나 살이 곧 썩어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는 혈액을 방부제로 교체하고, 변색되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해 '시체'라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기고 탐정 활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발리콘 일족들에게 제2, 제3의 죽음이 연속되면서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마냥 모든 진실은 아리송해질 따름이다.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이라는 제목 자체가 통째로 아이러니다. 시체가 살아 있다니, 거기다 그 살아 있는 시체가 또 죽다니 하고 의아해지는 게 당연한 제목이지만 책을 다 읽으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일종의 좀비가 나오는 소설이라 혹시 호러소설이나 판타지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추리소설, 그것도 독자와의 치열한 두뇌싸움과 아귀가 딱딱 맞는 논리로 충만한 본격 추리소설이다. 비록 비현실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기묘한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지만 어디에도 반칙은 없다. 세세한 설정 하나까지 전부 사전에 설명되고, 도처에 복선이 가득해 반드시 꼼꼼이 읽어야 한다. 끝까지 읽고, '작가에게 당했다!'는 말은 나올지언정 결코 '작가에게 속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맨 나중에 '살아 있는 시체'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범행 현장을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떠날 수 있다는 게 밝혀지거나 하는 식이 절대 아니다. 주인공 그린이 '살아 있는 시체'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린의 경우를 통해 '살아 있는 시체'의 능력이나 심정, 행동 원리 등을 철저히 분석할 수 있다. 작가가 손에 쥔 카드를 완전히 공개하는 셈인데, 여기 어디에 반칙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규칙만 확실하고 공정하게 지정해주면 가령 절대 죽지 않는 그리스 신들의 살신(殺神) 사건 같은 것도 충분히 추리소설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량의 압박이 제법 있지만, 넘어지고 자빠지는 슬랩스틱이나 언어유희, 재기 넘치는 그린과 여주인공 체셔의 대거리 등의 유머가 풍부해 지루하지 않고 술술 잘도 넘어간다. 본격 추리소설답게 탐정이 모든 용의자들을 모아놓고 '폭로쇼'를 벌이는 장면도 두 번이나 나온다(민완경감이 탐정이 되어 진행한 첫 번째 폭로쇼는 대참패로 끝나지만). 죽음과 삶, 그리고 사랑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결말도 너 무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현실에 치중하는 영미권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진행하는 작품이 많은 현재 일본 추리소설의 개성을 확립한 작품이라 평가하고 싶다. 특히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 같다.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역시 교고쿠의 작품들처럼 분량도 제법 되고, 개성 강한 등장인물이 나오며, 은근한 유머는 물론 사학, 미국식 장례식, 엠바밍 등의 잡지식으로 넘쳐나는 걸 보고 그리 생각해보았다. 약간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나라에 소개된 타이밍이 조금 늦은 감이 있어, 오히려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 할 후배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만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1989년작이라는 출간 시기를 감안해보면 작품의 크리에이티브가 얼마나 뛰어났는지에 대해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시체가 되살아나는 불가해한 '매직'을 철저한 '로직'으로 풀어내는 본격 추리소설의 명편,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 추리소설의 한 경향을 만든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의 진면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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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11-2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요? 몰랐네요 함 읽어봐야겠어요

jedai2000 2009-11-2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그냥 제 생각일 뿐이예요ㅠ.ㅠ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는데, 좀 길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는 확실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