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노블우드 클럽 2
사사모토 료헤이 지음, 정은주 옮김 / 로크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피보다 진한>의 뒤표지 문구를 보면 '물보다 진한 것은 피, 피보다 진한 건, 그것은 정(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웬지 '1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 3층 위에...'가 떠오르네요. 왜 이런 게 떠올랐을까요-_-??? 아무튼 남보다야 피가 섞인 사람을 챙기는 게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남도 돕는걸 하물며 가족인데...하지만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서로를 보듬어주며 깊은 정으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가족들의 이야기도 가끔 접하곤 합니다. 역시 생물학적인 유전보다 참된 가정을 일궈나가는 데는 정이 더 중요한 법인가 봅니다. 웬지 <좋은 생각>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피보다 진한>을 보고 그런 생각이 참 많이 들더라구요.

 

가족의 유대라는 건 무엇인가? 를 묻는 이 소설은 두 가지 이야기가 병행되며 흘러갑니다. 젊었을 때 주먹 좀 휘둘렀던 야쿠자가 세월이 흘러 암으로 죽음을 앞둔 병약한 노인이 되어 있습니다. 노인은 사립탐정 케이를 불러 일생일대의 회한을 이야기합니다. 35년 전, 노인의 아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들을 낳고는 곧바로 사망하자 한창 혈기방장한 야쿠자였던 그는 의사를 다짜고짜 폭행해버립니다. 이내 경찰이 찾아오고 갓 태어난 아들을 들쳐업고 튄 노인은 공원에서 유키라는 여자를 만납니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던 유키는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이를 맡아 기르겠다고 제의합니다. 어차피 자기는 잡히면 감옥에 갈 몸, 그리고 감옥에서 나와도 엄마도 없이, 험하게 사는 자기 밑에서 자라게 하느니 아무것도 모를 때 양자로 주자는 생각에 노인은 아들을 유키에게 맡깁니다. 복역 후 야쿠자에서 발을 뺀 노인은 건실한 사업가가 됐지만 이제는 병마가 찾아와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아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 일념에 케이에게 35년 전 그날 밤의 유키와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게 된거죠. 친아버지랍시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죄스럽지만 가는 길에 장성한 아들을 한번만 만나고 싶다는 노인의 진심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요?

 

한편, 노인의 의뢰를 받아들인 케이에게도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촉망받는 형사였던 케이는 아내와 아들, 모든 가족을 뺑소니 사고로 잃어야만 했던 것이죠. 헌데 그냥 뺑소니 사고가 아닙니다. 자산가 노부부를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용의자가 도주 중에 케이의 가족을 치고 달아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용의자는 형사들의 심증으로는 노부부의 아들 아키노부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단서가 없습니다. 케이는 절망해 경찰을 그만두고 방황하다 사립탐정 일을 하는데, 당시 노부부와 케이의 가족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범인이 또다시 연쇄 살인사건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맹세한 케이는 의뢰받은 노인의 아들을 찾는 일을 하는 짬짬이 그 사건을 수사합니다. 유력한 용의자 마약쟁이 아키노부의 곁을 맴돌면서 말이죠.

 

<피보다 진한>의 가로축(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아키노부 사건)과 세로축(35년의 세월이 벽으로 가로막힌 노인의 아들 찾기)을 이루는 두 이야기는 모두 흥미로워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는 35년 전 헤어진 피붙이를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의 원수를 갚는 일이니 감정적으로, 심정적으로 주인공 케이를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제발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만족스럽게 해결되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작품의 진행은 전형적인 'seek & hide', 일종의 숨바꼭질과 같습니다. 당시 관계자를 한 명 한 명 만나 단서를 모으고 증언을 듣고 증거를 찾아 어느 정도 진상이 떠오른다 싶으면, 숨겨졌던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수사는 난항에 빠집니다. 계속되는 조사로 난관에 봉착한 수사에 활로를 찾고, 또다시 복마전에 빠지고...이런 구조가 반복되죠. 하드보일드나 경찰소설, 사립탐정물(P.I) 등을 한 권이라도 보셨다면 충분히 어떤 구조인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케이의 끈질긴 수사를 통해 마침내 두 이야기가 결말을 맞게 되고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나 오래오래 묻혀 있던 진실이 마침내 드러납니다. 그 끝에 있는 건 놀랍게도 가슴 절절한 가족 간의 사랑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긴 세월 케이의 곁을 지켜줬던 가족의 따스함을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 아버지, 엄마, 정 이런 말만 들으면 눈에 눈물이 고이는 마음 여린 독자라면 모두 저처럼 손으로 눈가를 훔치고 말 걸요. 하지만 지나치게 감동 일변도로 마무리되는 책만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돋는 독자라면 피하는 편이 좋겠죠. 케이를 둘러싼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결말에 우연의 작용이 너무 심하고, 심히 작위적이라는 단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고, 케이가 진실을 파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추리나 두뇌를 써서가 아닌 등장인물 중 한 명의 고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도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감점입니다. 읽고 나서 느낌이 나쁘지 않고 적절한 분량에 빠른 진행, 그럴싸한 재미 무엇보다 무척 감동적입니다만, 온전한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부족한 점도 보여 역시 취향에 따라 선택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p.s/ 원제는 <시간의 기슭>이지만, 우리말 제목 <피보다 진한>이 10배 더 좋습니다. 제목을 더 좋게 바꾼 모범사례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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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더리스 브루클린 밀리언셀러 클럽 72
조나단 레덤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머더리스 브루클린>이라는 제목의 추리소설이라면 누구나 murderless를 떠올릴 것이다. '살인 없는 브루클린'이라니 탐정이 범죄를 다 소탕해 평화의 고장이 된 브루클린을 그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motherless더라. '엄마 없는 브루클린', 이건 뭐지? 오래된 영화 '엄마 없는 하늘 아래'도 아니고. 알고 보니 정말로 엄마가 없는 고아가 주인공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였다. 하드보일드의 본고장인 미국이 아니라 영국에서 2000년도에 영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을 탔다니 이색적이다.

 

예전에 처음 하드보일드 미스터리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건 마치 RPG 게임 같잖아 하는 거였다. 보통 사립탐정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은데, 우연찮게 사건에 말려든 탐정은 몇 가지 기본 단서를 가지고 관련자들을 계속 만난다.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고 거기서 연결된 또 다른 참고인들을 만나고, 악당들로부터 뒷통수도 맞고(말 그대로 '얻어맞는' 경우가 많다)...여차저차해서 정보와 단서가 충분히 쌓이면 최종적으로 사건을 해결하지.

 

애거서 크리스티 식의 본격 미스터리가 기본적으로 탐정과 독자에게 처음부터 공정하게 단서를 제공하고 그걸 하나로 꿰어 사건의 진상과 트릭을 밝혀내는 데 골몰한다면, 하드보일드는 탐정이 단서를 수집하는 과정 자체에서 재미와 문학성을 획득하는 것 같다. 하드보일드의 탐정은 비열한 거리를 누비며 어두운 사회의 현실을 관찰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군상을 스케치하며,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과 대면한다. 아무래도 작위적이고 진행 과정이 판에 박은 듯 도식적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진 본격 미스터리가 현대에 와서 시든데 반해, 하드보일드는 탐정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사회와 인간을 그리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게 아닐까.

 

<머더리스 브루클린> 역시 하드보일드의 매력과 장점을 어느 정도 간직한 작품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네 명의 소년을 청년이 될 때까지 돌봐주던 건달 똘마니가 피살되자(<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슬리퍼스> 등과 분위기가 약간 비슷하다), 그중 한 명인 라이어넬이 범인을 밝히고 복수하기 위해 조사를 결심하고 음울한 브루클린의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너무도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라 심심할 것 같은데, 라이어넬에게 매우 독특한 개성이 있어 그렇지는 않다. 고아 라이어넬은 '투렛증후군'이라는 일종의 신경장애를 앓고 있다. 그는 투렛증후군의 무의식적인 충동을 억누르지 못해 갑자기 되도 않는 소리를 지르거나, 말도 안 되는 신조어를 만들고, 상황에 부적절한 단어, 문장 등을 마구 내뱉는가 하면, 자기가 만든 규칙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의지로는 제어가 안 되는 그의 투렛증후군은 곳곳에서 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지만, 깊이 사랑에 빠진 여자에게도 반복되는 이상 행동을 함으로써 결국 그녀를 잃고 마는 안타깝고 쓸쓸한 장면도 아울러 만들어내고 있다.

 

투렛증후군을 가진 주인공을 이토록 현실감 넘치게 그린 책은 또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생각에 골똘히 잠기면 무심코 속마음을 겉으로 말하곤 해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등의 창피를 당하곤 하는데, 매일같이 이런 장애를 겪어야 한다면 정말로 엄청나게 불편할 것 같다. 투렛증후군으로 인해 사고 자체가 남들과는 다른 라이어넬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이나 문장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또한 라이어넬을 '영어로' 생동감 넘치게 그려낸 작품을 '우리말'로 생동감 넘치게 옮긴 번역가의 노고도 높이 사고 싶다). 작품의 호평도 대체로 그쪽에 쏠려 있는 것 같고. 그러나 미스터리의 측면에서 보자면 작가가 준비해둔 사건의 결말도 평범하고 조사 과정이나 라이어넬이 진상에 도달하기까지의 흐름에는 대단할 것이 없어 흥이 좀 떨어졌다.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 같은 작가들의 정통 하드보일드를 연상시키는 플롯의 진행도, 어떤이가 보기엔 찬란한 고전에의 오마주요, 다른이가 보기엔 하드보일드의 뻔한 공식을 그대로 재탕한다고 할 수 있어 취향에 따라 찬반이 갈릴 듯하다. 굳이 미스터리로 한정할 게 아니라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보는 마음으로 읽는 편이 훨씬 인상적인 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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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8-09-03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 오랜만이네요..+_+

jedai2000 2008-09-04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님...아아~~ 반갑습니다 ^_^ 잘 지내시죠? 리뷰는 항상 흥미롭게 보고 있어요~~
 
소녀의 무덤 모중석 스릴러 클럽 15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제목에 소녀가 들어간다고 혹시 소녀시대와 관련이 있는 책이라고 착각해 집어드는 독자는 없어야겠다. <소녀의 무덤>은 스릴러 마스터, 반전의 제왕 제프리 디버의 출세작으로 1995년에 출간되었다. 이미 국내에 그의 대표적인 히트작 '링컨 라임 시리즈'가 6권이나 나와 있어 적어도 확실한 재미는 보장하는 작가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으렷다.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축복받은 독자들 사이에서 링컨 라임 시리즈 외에 가장 재미있는 디버의 작품이 <소녀의 무덤>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라 디버 애호가들의 기대 또한 높았던 책인데 이렇게 우리말로 만나게 되니 반가움을 숨길 수 없다. 개인적으로도 제프리 디버 책 몇 권에 관여를 한 바가 있고, 그걸 떠나 열성팬이기도 해 기쁨 두 배라고나 할까.  

정체가 모호한 스릴러 기획자 모중석 씨가 직접 선정한다고 밝히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15번째 책으로, 모중석 스릴러 클럽은 책 맨 뒤에 모중석 씨와 편집자의 인터뷰가 실려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대체로 작가 소개나 이 책을 선정한 이유, 현지에서 받는 평가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소녀의 무덤>에 관해서는 '훗날 자신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준 링컨 라임 시리즈의 톤을 확실히 세팅해놓았다'고 평했더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좋은 한 줄 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 컬렉터> <코핀 댄서> <곤충 소년> 등 크게 히트한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작가가 트레이드 마크로 삼는 속임수, 반전, 서스펜스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기에.

줄거리를 느슨하게 이끄는 법이 없는 디버답게 시작부터 강렬하다. 여덟 명의 소녀들을 인솔하는(한 명만 더 있으면 소녀시대잖아, 하악,,) 두 명의 여교사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버스를 타고 멀리 떨어진 지방 축제에 참가하는 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가지 독특한 건 그녀들이 모두 말을 못하는 농아라는 것. 비록 수화를 통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만화책 영웅에 열광하는 딱 그 또래 나어린 소녀들이다. 신나게 버스를 달리다 일행은 우연히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버스에서 내린다. 이런 데서 오지랖 넓게 남들을 도와주다 온갖 고초를 겪는 건 스릴러나 호러의 공식인 법. 주인공들이 스티븐 킹이나 딘 쿤츠의 책을 몇 권만 읽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텐데...

알고 보니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오늘 새벽에 감옥에서 탈옥한 세 명의 죄수들이었다. 루 핸디를 필두로 한 피도 눈물도 없는 탈옥수들은 도망치다가 교통사고가 나자 차에서 내려 맞은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처치한 것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경찰들이 몰려오자 핸디는 어쩔 수 없이 도와주러 내린 열 명의 농아학교 일행들을 인질로 잡고 버려진 도살장 안으로 잠입해 농성 태세에 돌입한다. 한편 인질 협상의 대가 FBI요원 아더 포터는 오늘이 아내의 기일임에도 불구하고 호출을 받고 즉시 도착해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딱 35페이지 동안 일어난 일이다. 역시 디버는 페이지를 낭비하는 법이 없다!

한마디로 인질극 스릴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인질 협상가 아더 포터와 루 핸디 사이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전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독자를 빨아들이는가 하면, 잔인하고 도통 죄책감이 없는 루 핸디와 어떻게든 아이들을 지켜내고 싶어하는 농아교사 멜라니 사이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이 교차해 읽는 동안 도저히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 인질범, 협상가, 인질이라는 인질극의 세 핵심 요소들이 전부 비중있게 다뤄지며, 이런 거대한 사건의 와중에 어떻게든 끼어들어 특종을 만들겠다는 기자들, 아이들을 무사히 구원해 자신의 이미지를 드높이려는 정치꾼들까지 등장해 상황을 악화시키는 등 그야말로 현대 인질 사건의 모든 양상이 집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언급한 대로 링컨 라임 시리즈의 모태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설정들도 자주 눈에 띈다. 전미 최고의 법의학자인 링컨 라임과 놀라운 인질 협상 성공률을 보유하고 있는 아더 포터의 전문가적인 면모가 겹치고, 링컨 라임이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들과 팀을 짜 활기찬 수사를 벌이는 것처럼 아더 포터 역시 심리 분석가, 컴퓨터 전문가 등 늘 함께 일하는 믿음직한 동지들과 멋진 팀웍을 보여준다. 링컨 라임 시리즈에서 디버는 매 작품마다 다양한 소재들을 깊이 있게 조사해 작품에 풀어놓는 걸 즐기는데, <본 컬렉터>가 뉴욕의 역사, <코핀 댄서>가 비행기와 항공, <사라진 마술사>는 마술의 역사와 수법이었다면 <소녀의 무덤>은 수화나 농아 세계에서의 정치적 운동 등을 묘사해내 또 하나의 볼 거리를 주는 셈이다.

하지만 약은 약사에게, 반전은 디버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반전을 잘 다룬다는 세평답게 <소녀의 무덤>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도 역시 반전이다. 디버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사건과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어떤 사소한 사실들도 무시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나중에 다 기가 막힌 반전의 재료로 사용되니까. 그의 작품을 제법 봐서 그 스타일에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결국 또 속고야 마니 디버는 타고난 사기꾼인 것인가...

그밖에 심리 묘사도 마음에 든다. 왜 머리핀 하나를 팔아도 성의껏 온 마음을 다해야 겨우 판매가 성사되는 법인데, 하물며 인질을 무사히 내놓고 항복하라고 설득하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아더 포터는 인질범 루 핸디와 마치 연애를 하듯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는데 그에게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인질범은 죽거나 체포되거나 둘 중 하나다. 짧게나마 인질범에게 모든 마음을 다준 아더 포터가 느끼는 상실감은 비슷한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미묘한 지점까지 잘 잡아낸 것은 감탄스러운 부분이 아닐까.

그러나 아더 포터가 주책없이 인질 중 한 명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뺏겨 전문가의 면모에 먹칠을 한다거나, 주인공 중 한 명이 갑자기 스티븐 시걸로 변신하는 결말이 되면 황당한 느낌마저 들어 완벽한 디버의 최고작이라고 하긴 힘들 것 같다. 현재까지 본 디버의 작품 중에서는 <코핀 댄서>와 <곤충 소년>이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소녀의 무덤>이 그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가교라고 한다면 그래도 역시 높은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애인과 싸웠거나, 지방 출장을 갔다거나 해서 무료한 하루를 때워야 할 사람이 있다면 <소녀의 무덤>이 확실한 답이 될 것이다.




p.s/ 모중석 씨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래서 일단 국적을 추측해봤다. 모 씨라는 성이 국내에서는 대단히 희귀성이니 혹시 중국인? 모택동(毛澤東)도 있으니...혹시 텐진에 사는 모중석(毛中石) 씨. 아니면 미국인일지도 모르겠다. 전 뉴욕 메츠 선수 중에 모 본이라는 타자가 있었다. 풀네임은 모리스 사무엘 본(Maurice Samuel Vaughn). 어쩌면 모중석 씨의 풀네임도 모리스 중석(Maurice Joong Suk)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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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섬 미도리의 책장 2
곤도 후미에 지음, 권영주 옮김 / 시작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동그란 얼굴의 여인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표지가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슨 서러운 사연이 있어서 이렇게 울고 있을까나, 궁금해서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다들 책을 엄청 쳐다보길래 창피해져서 조용히 집어넣고 집에 와 단 2시간 만에 다 읽고 말았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얼어붙은 섬>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고립된 섬에 갇힌 8명의 남녀가 하나씩 살해당한다는 내용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외딴섬 퍼즐>과 비슷하게 섬을 배경으로 한 본격 추리소설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언뜻 떠오르는 작품이 몇 개 없어 3권만 소개했지만 사실 섬을 배경으로 한 추리소설은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 추리소설의 무대로 작가들이 섬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섬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간다기보다는 보통 여름 휴가나 겨울 여행에 큰맘 먹고 한번씩 가는 곳이다. 도심에서의 안온하지만 심심한 일상과는 다른 뭔가 뒤틀린 비일상의 파격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 물론 더 큰 이유는 배만 끊기면 곧바로 섬 전체가 완벽하게 밀폐된 밀실이 되기 때문이겠지. 이 책에서도 역시 엽기적인 방법으로 한 명씩 죽어나가는 주인공들이, 머무르고 있는 무인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모터보트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숨이 턱턱 막히는 고립감과 공포감을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작가 곤도 후미에는 1993년, 제4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 수상작인 이 작품으로 성공리에 등단했는데, 데뷔 연도로 봐서 아야쓰지 유키토나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의 대표적인 신본격 작가군 중 약간 후배 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본격 작가들, 특히 아야쓰지 유키토 같은 작가가 트릭에만 매몰되어 있고, 지나치게 게임 감각이며, 문장이 서투르다는 혹평을 듣기도 한다면, 곤도 후미에는 언급한 여러 문제점들을 전부 피해가고 있어 나무랄 데가 거의 없다. 특히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정념과 열정에 불륜의 장미를 받아드는 화자이자 여주인공인 아야메의 섬세한 심리 묘사는 돋보인다. 8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랑이라는 독한 술에 한껏 취해 있으며,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강력한 동기 또한 애달픈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본격 추리소설에서 이 정도로 연애소설의 풍미를 자아내는 작가는 곤도 후미에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데뷔작답게 일군의 등장인물이 섬에 고립되는 과정이 슬쩍 억지스럽다거나 주인공들의 나이가 이십대라 주고받는 말은 통통 튀는데 머릿속의 사고는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탐미적이라 부조화가 느껴진다거나 하는 점은 읽는 동안 좀 걸리는 부분이었지만 독서의 재미를 크게 해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본격 추리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트릭과 사건의 해결이 만족스러우니까. 애거서 크리스티의 아주 유명한 두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모티브를 따와 결정적인 트릭까지 거의 그대로 재현하다시피 하는 첫번째 결말에서는 솔직히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모든 얽키고설킨 이야기들을 완벽하게 매듭짓는 진짜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 무척이나 성공적인 고전의 창조적인 재해석이라 불러주고 싶다. 추리소설을 별로 접해보지 않은 독자도,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고전 추리소설을 꿰고 있는 사람도 한방 먹일 수 있는 근사한 결말이다.

 

<얼어붙은 섬>은 1930년대 사교계에서 유행했던 드레스를 고이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가 손녀에게 선물로 그 드레스를 주자, 손녀가 현대적인 디자인을 가미해 만인에게 선보임으로써 박수갈채를 받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아한 고전미에 현대의 세련된 감각이 접목된, 추리소설 팬이라면 누구나 흐뭇하게 읽고 뒤로 넘어갈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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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8-08-19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지막 문단이 정말 멋진 리뷰네요 ^^
리뷰 많이많이 올려주세요~
추리 소설을 자주 읽지는 못해도 대리만족하고 있습니다 ^^;;;

jedai2000 2008-08-2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빠서 리뷰를 잘 못 쓰고 있는데 정말 기운나는 말씀이네요 ^^
너무 감사드립니다. 길기만 하고 별로 멋지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막 힘이 나네요 ^^
 
제3의 시효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제3의 시효]는 수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우글대는 일본 미스터리계의 지형도 안에서도 그만의 경찰소설로 한 자리를 단단히 차지하고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연작 단편집이다. 일반적인 범죄 발생-경찰 수사의 줄거리에 경찰 조직 안에서의 치열한 암투와 갈등 그리고 화해와 단결이라는 부차적인 재미를 더하는데 명수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경찰소설은 실패할 확률이 극히 적은 주식투자와도 같다. 그는 장편과 단편을 골고루 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장편보다는 단편들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이 작가의 미스터리 트릭은 비교적 단순한 게 많아 장편 하나를 온전히 끌고가기는 힘에 부치는 편인데다 감동적인 마무리에 다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의 장편은 독일 기계처럼 정교하게 돌아가는 조직 안에 충격적인 상황이 연속되면서 그에 따른 조직원들의 극적인 반응을 계속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스타일이라 읽는 동안 끊임없는 몰입감과 박력은 줄지언정 우리나라 독자들이 유독 좋아하는 기발한 트릭과 반전은 별로 제공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요코야마 히데오의 단편은 다르다. 장편에 쓰기에는 조금 약하지만 단편에는 멋지게 녹아들 수 있는 준수한 트릭이 등장하며 아무래도 길이가 짧아서인지 감동에 대한 강박도 장편만큼 느끼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기자 출신답게 늘어지지 않는 간결한 문장과 빠른 호흡, 타고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글솜씨로 책을 독자들의 손에서 절대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단편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들이 모여 있는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하려는 [제3의 시효]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 창창한 날이 남아 있는 작가니만큼 이보다 더 뛰어난 걸 쓰지 못한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요코야마 히데오의 최고작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F현 경찰청 강력계의 세 반을 무대로 펼쳐지는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 반 반장들의 각기 다른 매력과 개성적인 수사법이 기막힌 즐거움을 보장한다. 절대 웃지 않는 1반 반장 '파란 귀신' 구치키는 경찰청 내 최고 엘리트 집단의 수장답게 어디까지나 정공법으로 용의자를 압박하고 진실을 밝혀낸다면, 2반 반장 '냉혈한' 구스미는 공안 출신답게 위법에 가까운 편법과 도박성 강한 함정수사 등으로 절차야 어떻든 범인만 잡자 주의다. 3반의 '검독수리' 무라세는 천재 수사관이라는 세평처럼 범죄에 관한 직감이 비상해 현장만 보고도 대충 범인의 윤곽을 그려낸다. 진정한 경찰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범죄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이 세 반장이 각자 활약하다 때로 부딪치고 가끔 협력하며 난해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게 단편들의 기둥 줄거리. 물론 '조직'과 그 속에서 울고 웃으며 부대끼는 '사람'을 그리는데 독보적인 히데오의 작품이니만큼 능력이 뛰어난 세 반장을 제대로 휘어잡지 못해 약간의 굴욕감을 느끼는 다하타 과장이라든지, 어린 시절 범죄의 꼭두각시로 이용되었던 젊은 형사 야시로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역시나 명불허전이라 할 정도로 잘 빚어진 인물들이다.

 

보통 이런 단편집을 보면 탁 튀는 놈이 한두 개 있고 나머지는 고만고만한데 비해 [제3의 시효]는 수준이 비교적 고르다. 놀랍게도 아주 높은 수준에서 고르다는 이야기다. 마지막 단편 <흑백의 반전>이 약간 억지스러운 설명이 있어 살짝 떨어질 뿐, 증명하기도 힘들고 효과도 별로 없을 것 같은 알리바이를 줄기차게 내세우는 용의자의 비밀을 파헤치는 <침묵의 알리바이>, 출입구가 봉쇄된 맨션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조직 폭력배를 수사하는 <밀실의 탈출구>, 십여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청산가리 연쇄독살 사건을 그린 <페르소나의 미소> 같은 작품들이 모두 재미있고 완성도가 뛰어나다. 하지만 이 단편집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표제작인 <제3의 시효>에 비춰져야 마땅한 것 같다. 2반 반장 피도 눈물도 없는 구스미의 악마 같은 카리스마에 전율을 금치 못할 작품으로 그는 15년이라는 살인 공소시효가 지나 공식적으로 소멸되어 버린 강간살인 사건에 도전한다. 도피 중인 용의자는 시효 기간 안에 대만에 일주일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외국에 나가 있는 기간은 시효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용의자의 진짜 시효는 15년 하고 7일. 그러나 2반 형사들의 노력에도 제2의 시효가 끝나도록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낙담하는데 구스미는 지시를 멈추지 않는다. '제3의 시효'가 있으니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경악할 정도로 기발하달 수 있는 제3의 시효 때문에 결국 용의자는 잡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또 다른 반전 그리고 또 한번의 뒤집기. 구스미는 사중, 오중의 함정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근래 읽어본 단편 아니 국내에 나온 모든 2000년대 일본 미스터리 단편들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 라고 말할 수 있다. 몇 번의 뒤집어지는 반전의 연속과 더불어 작가 특유의 감동과 인간미가 배합되어 잊을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요 요코야마 특유의 문체 맛도 일품이다. 단문, 아니 아예 한 단어, 혹은 두 단어로 한 문장을 만들어 긴박감과 속도감을 배가시키는 솜씨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작가다. 지금 책이 곁에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느낌.
-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 3의 시효가 남아 있다."
수사 속행? 형사들이 모인 방에 폭탄이 떨어졌다. 모두 경악. -

 

경찰소설의 장인이 모든 역량을 다해 써낸 [제3의 시효]는 사실 [강력1반]이라는 만화책으로 출간된 적이 있고, 여섯 개의 단편 중 네 개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강력1반]을 예전에 읽은 바 있어 썩 기대가 크진 못했는데 과연 원전에 범접하는 리메이크는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만들었다. 얼핏 F현 경찰청의 새 시리즈가 연재되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일본서 책으로 묶여 나오면 우리나라에서도 반드시 또 만나고 싶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단편집으로 특히 표제작 <제3의 시효>는 3년에 한 번 꼴로 다시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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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8-07-1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고죠^^

jedai2000 2008-07-10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 요코야마 히데오, 최고죠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