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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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에게 있어 ‘혁명’은 어떤 의미였을까?

철지난 유행가를 부르듯 어쩌자고 슬라보이 지젝은 레닌을 들고 나왔나. 궁금하고 의아스럽다. 전위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이 분석하는 레닌이 궁금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레닌도 궁금했고 지젝의 분석도 구미가 당겼다. 이 책은 재밌고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지만 지젝다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젝답다는 말은 대중 문화 특히 영화에 관한 깊은 이해와 분석으로 독자의 이해를 도와가며 스스로의 논리에 동조를 구한다.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고 다면적인 측면의 시각과 분석이 드러나는 책이다.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가 되지만 지젝은 유럽의 변방 철학자로 분류된다.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에 빚지고 있는 지젝의 글들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철학적 개념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다면 그의 논리와 체계를 따라가기 힘들다.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역사적 사건들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젝의 매력은 풍부한 상상력과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이 책에서도 많은 영화를 인용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적절하고 그럴듯한 분석과 인용은 내용과 개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실 상회에서 벌어졌던 역사에 대한 분석이 이 책의 전제이기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철학자가 바라보는 역사 깊이 읽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역사적 사건과 상황을 분석하는 일과 이 책은 무관해 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레닌이라고 하는 한 개인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이 역사, 사회적 상황과 무관할 수는 없다. 독일에서 벌어졌던 홀로코스트를 비롯해서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현실 상황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바라보는 지젝 특유의 관점이 나타난 이 책은 ‘레닌에 관한 13가지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레닌을 통한 현실 읽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당연하게도 지젝의 관심은 과거 역사 속의 레닌에게 있지 않다. 이 책의 제목 <혁명이 다가온다>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90여 년 전의 붉은 혁명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레닌이 성공시켰던 1917년의 10월 혁명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조명 작업을 지젝이 할 리가 없다. 혁명의 핵인 레닌에 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오늘을 바라보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연 혁명은 다가오는가? 지젝은 분명하게 결론을 말하는 대신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반문하는 형식을 취한다. 하나의 개념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과 이성의 힘을 이끌어 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좌파인 지젝의 말에 귀기울이는 많은 사람들과 변죽을 울리는 철학과 문학의 짬뽕을 떠올리는 독자 사이에 간극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독자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존재에 대한 욕망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 ''폭력적''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열정이란 정의상 대상에게 ''상처''를 준다. 그리고 심지어는 수신인이 기꺼이 승인할지라도, 그 혹은 그녀는 항상 두려움을 갖거나 놀라면서 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 P. 111

완전한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에 대해 전적으로 무차별적이다. - P. 116

사랑이란 종교적 믿음과 같다. 나는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의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당신의 긍정적인 특징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P. 122

‘레닌은 이웃을 사랑했는가’에서 지젝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근본적으로 ‘사랑’이라는는 것도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같다.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보여주었던 대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논리적 접근은 일반적 견해에서 벗어나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어떤면으로든 그의 글들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철학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가 아카데미즘에 갇힌 박제된 논리라면 지젝의 글들은 다시 야생으로 돌아온 사자와 같다. 좌파의 길에 언급하는 그의 확언들은 그것이 비록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에 불과하더라도 새롭게 여겨진다. 그가 말하는 ‘좌파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의 궁극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의 제3의 길이라는 꿈은 악과의 협정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케이, 혁명 없이, 우리는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성공한 방식인 것을 받아들이지만 최소한 우는 복지사회의 성과를 구해내고 거기에 더해 성적,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 P.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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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0-22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파의 제3의 길은 지젝이 빈정거리며 비판하는 노선입니다. '혁명 없이' 자본주의(악)와 타협하겠다는 태도를 그는 탈정치시대의 문화적 다원주의라고 규정하면서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습니다. 그러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하신 건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sceptic 2006-10-2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단순한 근본주의자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좌파의 제 3의 길에 대한 비판을 이 책에서 다시 언급한 부분을 눈여겨 보면 지젝을 '혁명가'로 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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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다. 말은 곧 사람됨을 규정하고, 글은 곧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낸다. 말과 글은 다르다. 발화 의도와 글을 쓰는 목적이 같더라도 전달 방식과 매체가 다르기 때문에 전달 효과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물론, 글은 말보다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보다 말을 좋아한다. 그래도 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글은 말보다 점점 진해진다.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글쓰기에 답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일차적인 의사소통 수단으로서 글쓰기는 가르쳐야 하겠지만 문학적인 글쓰기는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를 배우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꾸준히 써라. 한 마디 말로 끝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글쓰기에 대해 오랫동안 소설을 써온 작가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정말 만보다. 만보는 한가롭게 거닐다는 뜻이다. 글쓰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속보가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이 투자되어야 하며 꾸준한 훈련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지속적인 노력과 열정이 보태져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에 대한 가르침이 이미 제목에 숨어 있다. 단권의 책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로또 복권보다 어려운 확률에 도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만한 문학적 재능과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종류의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문학에 대한 작은 관심과 소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소일거리 삼아 읽어볼 책이다.

한 작가의 창작론은 사실 지루하기 짝이 없다. 한 사람의 연애 이야기처럼 자신에겐 목숨처럼 소중했지만 남들에겐 따분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하다고 해서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시중에는 글쓰기에 대한 책이 넘쳐나는 이유는 배움의 열망이 그만큼 뜨겁다고 볼 수 있다.

520여 페이지로 구성된 이 책은 일단 분량 초과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나중에 보태진 넷째, 다섯째 마당은 사족이다. 알면서 보탠 이유는 무언가? 유명 작가된 이후의 몸가짐과 태도까지 충고하고 있는 부분은 애써 눈감으려 해도 지루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실질적인 글쓰기에 관한 셋째 마당까지는 소설가로서 150여권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로서, 그간의 노하우를 나름의 방식대로 자연스럽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풀어낸다. 학생을 지도하듯 편안하고 직설적인 어법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돌려 말하거나 어려운 어휘, 전문 용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정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초보자들이 겪게 되는 실수와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짚어 주고 반드시 지켜야할 수칙들을 꼼꼼이 일러준다. 자상하고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을 하고 있어 소설을 써보고 싶은데 딱딱하고 이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은 책들을 보며 한숨지었던 독자들에게 제격이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와 가장 닮은 책이다. 제목이 ‘글쓰기 만보’지만 사실은 ‘소설쓰기 만보’이다. 문학적인 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산문에 국한된 특히 소설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실전 비법에 해당된다. 정규 코스를 거쳐 형식과 틀을 갖추어 나가는 방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세와 방법이야 어찌됐든 경기에 이기는 훈련만을 요구하는 거리의 허슬러처럼 여겨진다. 재밌고 유쾌한, 감동적이며 치밀한 소설 쓰기는 문학에 대한 이론과 문법보다도 실전에 관한 수많은 조언과 지침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그래서 이 책은 야전교범이라기보다 선임병들의 직접적인 조언처럼 훨씬 실감나게 다가온다.

대부분 외국 작가들의 낯선 소설들을 예문으로 들어 실제 적용 문제에 있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지나치게 긴 예문과 동어 반복에 해당되는 설명들이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흠으로 볼 수 있다. ‘만보’라는 제목으로 그 모든 단점들이 다 가려질 수는 없다. 스스로 독자들에게 말했듯이 좀 더 탄탄하고 치밀한 내용의 구성이 아쉽다. 소설이든 아니든 독자들은 그렇게 한가하거나 여유있게 즐길만한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데릭 젠슨의 <네 멋대로 써라>나 나탈리 골드버그의 <뼈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보다 후한 점수를 주기는 힘든 책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와 같은 이론적 체계적 글쓰기 책이 아니라면 좀 더 간결하고 인상적인 몇 가지 패턴이나 기법들을 전수해줬으면 하는 것은 개인적인 바람일까?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소설가를 꿈꾸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의 힘겨움과 노력, 열정과 한숨을 배우는 것도 이 책을 얻게 되는 덤이다.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뿐만 아니라 작가의 땀과 눈물까지도 읽어 낼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접근한다면 읽을 만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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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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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blog는 웹web과 로그log의 합성어로 21세기 주류 문화 현상중의 하나다. 집단 중심의 문화에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인터넷 문화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블로그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겠지만 소통을 위한 것과 개방형과 기록물의 저장소와 같은 칩거형으로 나눌 수 있겠다. 거칠게 두 가지로 나눴지만 혼합된 형태가 대부분이며 목적과 내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블로그의 전제 조건이다. 블로그는 웹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장 큰 특징은 쌍방향성이다. 책이나 다른 언론 매체와 달리 상호 작용이 가능하며 즉각적인 피드백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또한 블로그는 일정한 형식과 틀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고 유연하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에 이전과 전혀다른 형태의 의사소통 구조가 형성된다. 그러나 개성을 앞세운 블로그의 양적 팽창은 단순한 시간의 소모와 현대사회의 인간 소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동체와 자본으로부터의 소외가 나타나기도 하고 유행과 익명성의 폭력은 무시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가상 공간이 아닌 현실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목적과 욕구를 감안해서 자신과 맞는 코드와 선별적인 소통능력을 기른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와 효용을 얻을 수도 있다. 단점과 약점을 최소화하고 강점과 장점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행착오를 극복한다면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사이버 세상에서 또다른 만남을 가질 수도 있다.

김치샐러드의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이란 책은 사이버 공간의 블로그를 책의 형태로 옮겨 놓았다. 어렵고 딱딱한 그림을 블로거의 안목과 적절한 설명 그리고 재치있는 말솜씨로 아주 쉽고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야하는 수고를 책장을 넘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과연 수직적 시선의 이동을 수평적으로 옮겨놓은 것만이 이 책이 지니는 의미일까?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아우라aura’의 개념을 통해 사진이나 영화 예술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시작했다.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유일한 현존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아우라가 없는 예술은 예술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20세기 초 기술 복제 시대에 진입한 발터 벤야민의 논리이다. 21세기에 들어서 사진과 영화 그리고 만화를 예술이 아니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은 많지 않다. 시대는 변했고 예술의 개념도 달라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숨어 있는 명화들을 화면으로 불러내고 말풍선을 달아 친절한 설명을 붙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투사한 해설은 수많은 블로거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네트워크 시대의 특성을 감안하면 수많은 스크랩과 이슈를 만들어내는 포탈 사이트의 홍보에 힘입어 순식간에 유명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뿐이다. 깊이와 넓이를 닮아내지 못하는 단순한 여가 활용 수준의 사이버 갤러리 역할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만 차별성과 본래의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 화가들의 그림들을 사이버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기술 복제 시대의 장점이지만 아우라가 없는 복제된 그림의 해설은 실제 그림의 감상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일이다. 감상자와의 상호 의사소통과 예술의 개념을 달리 받아들이게 하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 아니라면 원본이 지니는 아우라를 전달할 수는 없다. 그림은 시처럼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예술 장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자명한 진리처럼 여겨지는 금언속에는 타인의 견해와 해설을 작품 이해의 전부라고 믿는 오류가 숨어 있다.

책은 나무로 만들어진다. 자연을 훼손하며 인간은 책을 만든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지혜의 전달과 저장과 보관을 위해 가장 유용한 수단이 책이라고 믿어왔다. 앞으로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의 일부를 파괴하면서 만들어가는 책은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 김치 샐러드의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그런 면에서 예의가 없는 책이다.

재밌고 즐거운 사이버 공간에서 이웃 블로거로 만났다면 사소한 슬픔과 기쁨에 공감할 수도 있고 안부를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의 형태로 나타난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어떤 의사소통도 부재한 일방적인 의사전달 방식이 된다. 그렇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럴만한 이유도 내용도 없는 종이 낭비에 불과한 심심풀이 낙서장에 불과하다. 책의 내용과 의미를 묻기 전에 책이 지니는 효용과 전달방식을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우??이런 책도 책이라고 읽어야 할까? 나무의 희생, 타인의 시간과 노력을 담보로하는 책은 만드는 데 좀 더 신중해져야 한다. 블로그는 블로그로 남겨두고 책은 책으로 남겨달라. 블로그의 목적이 이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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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평전 - 한국이 낳은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강주상 지음 / 럭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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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은 개인의 일대기를 서술자의 평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객관적 사실들을 고증하고 자료를 열거하여 구성하는 전기와 다른 특징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전에 허구fiction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실fact를 바탕으로 하되 서술자의 해석과 평가 적절한 분석들이 더해지면 한 사람의 생애가 오롯이 떠오른다.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별적 사실들에 대한 인과 관계를 적절히 구성하고 배열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말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훈련된 글쓰기와 철저한 고증만이 책을 빛나게 한다. 단순한 사실들의 연대기적 나열은 읽는 사람의 눈꺼풀을 끄집어 내린다.

93년에 출간된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아니었다면 이휘소라는 사람이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가 영화처럼 극적일 수 있다는 것은 가끔 소설보다 훨씬 더 영화같은 현실을 접하는 우리들을 당혹케한다. 핵무기와 관련된 박정희와 이휘소의 관계나 미국과의 상황들이 모두 현실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휘소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소설을 소설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할까?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은 기각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마찬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유족측은 패소했다. 죽은 사람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는 것이 유족들의 주장이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명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명예에 대한 해석이 각자 달랐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사람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유족들에 대해 당연히 부담을 갖는다. 그것에 대한 기준도 정답도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늘 충돌이 일어난다.

강주상은 이휘소의 제자로 물리학을 전공한 학자다. 이휘소의 평전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가 그의 전공 때문만은 아니다. 이휘소에 대한 가장 많은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에 평전을 써서도 안된다. 직접 곁에서 이휘소를 지켜보고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믿지만 평전은 강주상의 의도와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 책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휘소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부분이다. 약관의 나이에 도미해서 석박사 과정을 거쳐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으로 일하며 오펜하이머와 교류하고 페르미 연구소에서 일했던 과정을 통해 그의 뛰어난 수학적 계산 능력과 분석 능력 등 이론 물리학의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과정을 영웅적인 시선으로 서술한다.

둘째, 이휘소의 능력과 업적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의 전공 분야를 알려야 한다. 이 책의 상당부분이 이론 물리학에 관한 강의로 채워져 있다. 무식한 나로서는 하품을 하며 억지로 읽었다. 과학 잡지의 기자처럼 독자들에게 알기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으면 길게 쓰지 말아야할 부분이었다. 차라리 리처드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학 이야기>처럼 일반 독자와 무식한 대중을 상대로 한 이야기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겠지만 평전에서는 무리한 내용 전개로 밖에 볼 수 없다.

셋째, 핵물리학자로 의문사 했다는 오해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미망인을 비롯해서 강주상 본인등 이휘소의 지인들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처럼 영화처럼 비쳐지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문 내용과 동일한 내용의 부록까지 부쳐 ‘강주상의 회고’와 ‘소문과 억측들’까지 덧붙이는 기이한 형태의 평전이 되었다.

세가지 목적이 적절하게 어우러졌다면 즐겁고 유익한 책이 될 수 있었으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인다. 이 책은 ‘강주상 지음’으로 되어 있으나 필자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끝까지 ‘강주상은...’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본문 188페이지 단 한번 “필자는 ‘그렇다’고 믿는다.”는 문장이 나온다. 나머지는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다. ‘이휘소 평전을 쓰면서’에서 강주상은 이 책을 ‘전기’라고 여러 번 표현한다. 책의 제목까지 헤매고 있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프롤로그’가 다시 덧붙혀진다. 알 수 없는 체계로 구성되어 있는 짧은 책이다. 상당한 허점과 실수를 연발하고 있는 이 책은 출판사의 편집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크게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휘소의 생애를 일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만 장소의 이동과 시간의 변화만으로 그의 생애를 그가 남긴 업적과 직장으로 나누고 있어 설득력이 약하다. 유족과 지인들의 입장에서 2006년 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책일 수도 있지만 소설속의 이휘소가 아닌 이론 물리학자 이휘소를 전면적으로 보여주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은 책이다. 주관적, 감정적 서술이 드러나는 부분들을 삭제한다면 전기에 가까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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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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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내용과 형식은 분리할 수 없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생물로 비유하자면 뼈와 살을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비유와 유추의 속성은 ‘유사성’에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는 부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어느 한 쪽이 도드라지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니콜 클라우스의 <사랑의 역사>가 그런 경우다.

미국의 주목받는 작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만, 장편의 분량에 비해 긴장감이나 극적인 재미는 부족하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겠지만 형식에 치중할 경우 내용은 진부하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깊이는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없다면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이 재기 발랄한 재치와 빠른 두뇌회전에 의존한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랑’ 속에서 한 작가의 ‘사랑’이 의미를 지니려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거나 특별한 안타까움, 기막힌 우연 등 여러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소설은 마치 직육면체 입체 퍼즐을 맞춰나가는 느낌이다. 영화적 상상력이 이 소설의 독특함을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다. 소설과 영화의 형식이 다르듯 상상력과 표현도 달라진다. 각각의 장점을 잘 살려내야 한다. 물론 다른 장르의 표현법을 빌려와 성공을 거둔다면 더없이 좋은 새로움을 얻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장 뤽 고다르의 <아워뮤직>을 보면 영화 형식과 인간의 폭력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들의 음악은 과연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소리인지 악몽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화면에 펼쳐지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잔혹한 전쟁장면의 이미지들을 소설은 흉내내지 못한다. 파편화된 개별적 이미지들의 편집과 완성된 그림을 향한 조각 퍼즐들의 역할은 훌륭한 지적 유희가 된다. 하지만 그 특별한 재미를 위해 뻔한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한 것은 많이 아쉽다.

추리 소설 형식을 취하고 색다른 이야기를 이런 형식에 담아 냈다면 정말 재밌는 소설이 되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섬세한 감성의 세계를 다루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내밀한 고백과 관찰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대상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이라면 <라 빠르망>같은 영화 한편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은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현존했던 유태인 작가 ‘브루노’가 등장하기도 하고 소설 속의 소설과 소설 속의 현실이 뒤섞이며 실제 현실과 조우하기도 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존재가 ‘사랑의 역사’라는 한 권의 책을 매개로 매트릭스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네트워크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각 장마다 다른 주인공의 시점으로 서술되기 때문에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재미가 있지만 자칫 다른 생각을 하거나 실마리를 놓쳐 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하는 영화처럼 사건과 인물들이 금세 엉켜버린다. 독자들의 긴장과 작가의 복선들이 적절하게 만날 수 있다면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 되겠지만 실패하면 짜증나는 소설이 된다. 독자의 책임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읽어달라는 주문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밑줄 그을 문장 하나도 건지지 못하는 소설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재미나 감동,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 주기도 힘들다. 다만 잘 짜여진 미스터리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 아니라 영화를 선택해야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적절히 배합된 종합선물세트 같은 소설을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그런가?


0609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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