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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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 고배율 쌍안경으로 건너다보는 북녘의 하늘은 고즈넉하다. 겨울에는 남녘을 향해 초소 옆에 앉아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나 초소 넘어 보급소에서 작업을 하는 모습도 자주 관측된다. 아침 저녁으로 유행가처럼 울려 퍼지는 대남 방송이 친근하기까지 해진다. 비무장지대(DMZ) 안에 무기를 반입하고 초소를 설치해서 경계 근무를 하는 것은 분명한 정전 협정 위반이다. 수색중대 GP장으로 두 개의 GP에서 적 관측 및 경계 근무를 수행했던 기억의 저편이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혹독하게 경험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선 해석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52년째 휴전 상태인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어떤 것인가?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이 자신의 삶을 구술하고 기록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여러 번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췄다. 주변 상황 때문에 책장을 넘기다 눈물을 흘리는 일도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삶은 시간의 무게만으로도, 그것이 동시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만 36년의 세월동안 그가 지켜온 것은 무엇일까? 꼭 내가 살아온 인생만큼 한 평 남짓한 독방에서 홀로 지켜온 그의 신념은 오히려 궁금하지 않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그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었을까?

1920년생인 허영철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조망해 보는 일이다. 한 개인을 통해 우리가 겪었던 시간의 무게를 덜어보려는 것은 부질없어 보이지만 전형적 개인이 아닌 한 인간의 삶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반증하고 있다. 온몸으로 고스란히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과 21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은 나를 숙연하게 한다.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인생은 많다. 내 인생이 소설 한 권쯤 된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허영철의 삶은 소설이 아니라 그대로 ‘역사’가 된다.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과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분단 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감각한 역사 인식을 반성하자는 상투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른 가슴 한구석의 결림으로 다가오는 이 책은 참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꼭 한 번은 권해줄 만한 책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웁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허영철은 2000년에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보다 불행한 것일까? 통틀어 6개월도 함께 살아보지 못한 아내와의 40년만의 만남은 어떤 것일까? 이제는 정년을 앞두었을 고등학교 교사인 아들과 미국으로 건너간 딸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가족들의 설득은 그 어떤 모진 고문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다분히 인간적인 면에서 형이하학적인 욕망을 떨쳐 낼 수 있었던 한 인간의 신념과 생애는 ‘혁명’에 바쳐지고 있었다.

그가 이루지 못한 ‘혁명’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공화국’이 있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성적이고 공식적인, 혹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부질없다. 항상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세상과 사회에 눈 뜰 무렵의 한 혁명가가 변하지 않고 늘 푸른 소나무처럼 지켜낼 수 있었던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내가 숙연해진 것은 오로지 시간이다. 36년을 견뎌낼 수 있었던 무기를 우리는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이념도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광기도 집착도 아닌 그 무엇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80대 노인의 목소리는 덤덤하고 차분하다. 소리 높혀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다. 그가 살아온 세월과 쌓아온 시간들을 풀어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겪었던 삶이었다고.

“국가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 억압하고 지배하기 위한 독재기구다.” - P. 172

북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결과론적 입장에서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이야기하며 허영철의 삶을 단정짓거나 평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체제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에게는 우습다. 자유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을 보라. 그리고 아직도 꿈꾸고 그 꿈을 실현하고 싶을 한 혁명가의 생각의 언저리를 반추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이다. 국가에 대한 허영철의 젊은 날의 발언은 아나키스트의 목소리로 들린다. 당과 공화국은 그에게 국가가 아닌 이상향이었다. 그의 말이 틀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아내와 두 자식이 담장 너머에 살고 있는 남쪽 출신의 炷徨?장기수. 때때로 면회와 편지를 통해 그들의 고통스런 삶을 지켜보아야하는 허영철의 가슴 속엔 무엇이 들어 있었나.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쏟아지는 의문과 불편함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짊어지고 감내한 세월 속에 켜켜이 묻어 있는 고민들이 어쩌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데 있다.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 말이다. 단순히 이상향을 꿈꾸던 몽상가의 허망한 말로쯤으로 여길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산과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그리고 조정래의 <인간연습>으로 인상 깊었던 실존 인물의 이 막막한 한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온몸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서 있었던 그의 삶이 지금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는 데 그 고민의 핵심이 묻어난다. 불꽃처럼 살다가 산화한 체 게바라의 극적인 삶이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다소 거북한 사르트르의 평가로 대표된다면 이 땅에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허영철의 삶에 대한 평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다. 근현대사를 위한 어떤 훌륭한 텍스트보다도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제는 사상 문제가 아니고 양심의 문제이지.(1990. 1. 8 친지 허종규, 허춘과의 면회) - P.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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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론
플라톤 지음, 최현 옮김 / 집문당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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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가 끝난 것은 언제일까하는 바보같은 의문이 든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보다 우수한 종의 선택적 생존이 이루어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간 이성의 정점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알고 싶은 대부분은 것들에 대한 사유는 이미 끝나 버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그 결과물들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아니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시간들 속에서 의미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에 플라톤을 읽는 것은 허망하다. 

도대체 2,500여년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원을 그리며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활은 편리해졌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더 바빠졌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결론은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다. 양적 질적 측면에서 눈부신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생 인류의 모습을 플라톤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플라톤의 <국가>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혹은 실현해야할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설득의 과정이다. 물론 그것은 ‘국가’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철인 정치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는 공산주의 사회와 가장 유사하다.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자 혹은 수호자들은 사유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다.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며 사사로운 재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책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내와 자식, 혹은 사유 재산은 공정하게 국가를 운영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며 그러한 덕성은 수호자 혹은 지배자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내도 자식도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급진적인 혁명적인 플라톤의 생각은 현실로 드러난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을 보라! 김지하가 ‘오적’이라 지칭한 사람들이 풍기는 악취와 썩은 하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혁명보다 힘겨운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기득권의 목숨 건 집단 이기주의에 맥을 못추고 있다.  

토마스 모어의 ‘utopia’는 ‘세상에 업는 곳’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상 국가’는 어쩌면 인류가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꿈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유사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양보하고 합의하는 나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부정적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가는 꿈같은 곳이 아니다. 철인 즉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제대로 된 나라가 된다는 것을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도 없다. 항상 그러하듯이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플라톤이 살아가던 시대의 가장 이상적 형태의 국가가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적 유용성을 갖는 의미만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철인이 통치해야 한다고? 김영삼은 우리에게 유일한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안다. 그것이 철인 정치이든 뭐든 간에 통치자의 역량과 진정성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방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믿는 모든 가치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가. 자기 나라의 작전통제권을 갖기 싫다고 다른 나라가 대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묻겠다는 사람들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올바른 판단과 이성이 필요한 철인에 의해 국가가 통치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어쩌면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형태와 제도 자체가 국민 혹은 시민들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억압적인 구조로 작용하는 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이제는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민 자치를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실현된다고 해서 모든 이 해결되지는 苛쨈? 유급제로 바뀐 그들의 입장과 겸직이 가?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권의 개입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우리는 대부분 외면해 버린다. 플라토의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먼저 국가에 대해가져야 하는 생각과 그 생각들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과 과정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인 글라우콘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 <국가>는 대화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어쩌면 집필 목적보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토지의 공적 개념이나 철저한 남녀평등 같은 개념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선각자나 철학자들의 몫은 전체를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읽어내는 힘에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공감을 얻을 수 없어도 우리가 나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그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의 영원한 사유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에서 인용한 ‘동굴의 비유’가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플라톤의 사상을 드러낸다. 참된 선의 실체인 ‘이데아’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과 연관지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든 그 논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데아와 현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예술 사이에 벌어지는 겹침과 펼침들이 중요하다. 그 사이를 뛰어넘는 사유의 틀을 마련하는 것은 플라톤 이후의 세대들이 짊져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데아’를 찾기보다 세 번째 모방인 ‘예술’을 통한 간접적이고 모호한 방식의 접근이 더 행복한 이유는 실체를 알기 위한 호기심도 없고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 성향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행복하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철학은 일단 자신만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론과 실제의 적용 문제, 즉 앞서 말했던 삶의 태도와 방식에의 적용 문제는 통합이 필요하다.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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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1
이용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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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사는 게 사건의 연속이지만,
모든 포유류의 결말은 고독하다
죽어서 말이 없거나 말없이 죽었거나
아가리 닥쳐, 라는 한마디가
후두둑 씨의 지나간 인생을 후려친다                          - ‘맙소사, 후두둑 씨’ 중에서

시인의 생각은, 아니 모든 작가의 글들은 그의 생을 넘어 설 수 없다. 이것은 한계가 아니라 작가의 개성이며 분명한 자기 색깔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유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글이다. 시나 소설이나 생에 대한 통찰과 연민, 애정과 비판이 감각적이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문학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나름의 방식은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될 것이며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다. 모호한 대상과 추상적 관념들을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하거나 감정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일반적인 시선으로도 이용한의 <안녕, 후두둑 씨>는 읽을만한 시집이다. 삶의 진정성이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시들은 독자의 정신을 ‘후려친다’

네가 말하는 추억이란,
그저 입술에 남은 바퀴 자국 같은 거
온몸이 불충분했고, 사랑했다는 증거는 없어
침대 밖에서까지 노력할 필요는 없지                          - ‘목요일은 아프다’ 중에서

아침에 나간 추억이 돌아오지 않는다
70년대 라디오 잡음처럼 비가 내리는 밤,
버려진 남자의 폐허 위로
몇 그루의 나무가 시간을 펄럭이며 서 있다
내가 키운 나무들은 아무래도 그리움이 지나쳤다
조금만 비가 와도 와락 눈물에 젖는다                          - ‘고장난 것들’ 중에서

나는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나이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68년생 이용한이 바라보는 세상과 인생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구두 밑창에 들러 붙어있는 완전히 떼어낼 수 없는 껌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증거도 없는 추억을 아직까지 지나친 그리움 속에 잠긴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장석주의 표현대로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를 기억하게 된다. 공감은 동일시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하나가 된 듯한 일종의 착각이다.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동일한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결국 시는 보편적 정서의 재생산이거나 유일무이한 사건과 감정에 대한 기록이다. 물론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초월과 한계를 함께 지닌다.

네가 외출한 사이에,
방바닥에 엎어진 술병들
술병처럼 누운 나
사실 내 기다림은 습관이야
굳이 네가 아니었어도 난 기다렸을 거야
낙엽 지던 입술들
내 삶의 푸른 이파리를 흔들어 다오                              - ‘비 오는 춘화’ 중에서

시간은 나무처럼 잘도 자란다
창문 밖으로 청춘이 지나가는 소리
나는 마음속의 검을 숨기고 술잔을 기울인다
이미 강 건너간 사랑은 건너간 사랑이야                        - ‘무악재에서 공무도하가를’ 중에서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지도 모른다. 이성과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파토스의 영역은 영원히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기다림이 습관인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바라본다고 해서 일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밀한 감정을 과대 포장하거나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자 현실에서 분출하는 욕망의 대리 배설이다. 그러나 이용한이 말하는 사랑과 그리움은 현실에서 누더기가 된다.

안녕, 후두둑 씨

후두둑 씨에게 늦은 소포가 온다
나는 잘 있다고 포장된 외로운 책이다
갈피마다 부엌에서 침대까지 걸어간
발자국이 적혀 있다
후두둑 씨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외투를 걸치고 식탁에 앉는다
지난봄에 들여놓은 아들 녀석이 잠깐
불가사의한 안녕을 묻는다
낡은 커피라도 드릴까요?
후두둑 씨에게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가
매일같이 삐걱이는 후두둑 씨를 기다린다
사뿐히- 갈라진 여백을 중얼거리며
아들아 거의 다 왔다,
문이 닫힌 아내가
지붕 위에서 성큼성큼 쏟아져 내린다.

표제작인 위의 작품은 10년만에 시집을 묶어 낸 시인의 30대가 보인다. ‘뒤꿈치가 닳아서 무표정한 의자’는 시인의 얼굴을 연상시킨다. ‘후두둑’ 떨어지는 마른 하늘의 빗방울처럼 불현듯 생의 불가해함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정된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부러운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우리들의 삶은 그렇게 별안간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다. 상상력이 시의 출발이라면 생활과 삶에 대한 통찰은 시인의 종착역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것은 모두 사람과 사물, 인생과 세계에 대한 반성과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이용記?지나가는 시간을, 사라지는 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체통

자고 나면 생이
슬퍼진다
쓸데없는 편지를 부치고
우체통처럼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세월은 우편배달부처럼 지나간다.


060816-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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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과 철학 강의 1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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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와 다름없다. 전쟁과 평화라는 상반된 가치는 인류에게 방학 중 일기숙제처럼 영원히 미뤄진 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전쟁과 폭력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50여년간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한반도의 평화가 한민족에게는 가장 긴 평화(?)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단 하루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날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만큼 인류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 폭력의 판단 기준을 선과 악으로 들이대거나 원인을 규명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다. 인간은 싸운다. 고로 존재한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론의 1차적 욕구는 생리적 욕구다. 식욕과 성욕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렇다면 전쟁과 폭력은 이러한 1차적 욕구를 성취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가라는 물음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아니면, 마지막 5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위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한국 근현대사에서 폭력의 문제는 국가의 존립을 위한 몸부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세의 봉건적 가치를 고집하는 수구세력의 목숨을 건 저항은 결국 나라를 말아 먹었다. 근대화의 기로에 선 조선은 대한민국이라는 제국주의를 선택했으나 일본에 의해 끝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후 벌어지는 독립 운동과 일본의 패망에 의한 광복은 초유의 이념대립에 의해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결국 친일 잔재 청산은 21세기에도 요원한 숙제가 되어버렸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박정희로 이어지는 현대사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

이 폭력의 시대를 넘어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푸른 하늘에 짙게 드리운 먹구름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한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인류의 미래는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답변일 뿐인가?

도올이 말하는 폭력의 세기와 논술의 세기에 동의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 <책문>으로부터 논술의 역사를 찾고 있는 도올의 논술에 대한 거대 담론은 시대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거시적 안목으로 비쳐지지만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의 현장에 적용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EBS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논술 강의를 하고 있는 도올은 <논술과 철학강의>라는 책을 통해 강의의 면면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두 권의 책 중 1권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폭력’의 문제와 관련시켜 살펴보는 1부와 철학의 제문제들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들을 짚어보는 2부는 가독성이 탁월하다. 고등학생들에게 강의하듯 막힘없이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어려울 수 있다는 서문의 내용이 무색하다. 3부는 문장론이다. 수많은 책을 쓰면서 대표적인 저술가답게, 개인 출판사를 운영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도올의 문장론은 수준 이하이다.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중언부언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래도 1, 2에서 보여준 도올 특유의 입담과 일관성 있는 시선은 한국 현대사와 철학의 제문제에 대한 명쾌한 설명으로 읽을만하다. 특히 맨땅에 헤딩하는 논술 세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권해줄 만한 책이다. 바야흐로 ‘논술의 시대’가 도래했다. 세계 문학이나 한국 문학을 출판하는 모든 출판사와 글쓰기와 관련된 모든 책들의 앞, 뒤에 ‘논술’이라는 수식어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다. 맹목적이고 무분별한 논술에 대한 집착은 그 결과가 뻔하지 않은가. 초등학생부터, 아니 취학 전 아동부터 시작되는 논술에 대한 광풍이 염려스럽다. 학교교육의 방법과 틀이 바뀌지 않은 채 논술에 대한 관심과 열의만 증폭되는 현실에 대한 대책은 시급하기만 하다.

도올은 책 말미에서 2006년을 시대의 물음에 답할 수 없는 침묵의 시기로 규정하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논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책 두 권으로 논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사유의 틀과 세상에 대한 이해 방식을 바로 잡는 데는 도움이 될 만하다. 도올 특유의 자뻑멘트가 눈에 거슬리기도 하고 우리말 문장과 한글 전용에 대한 주관적 아집이 보이기도 하지만 귀엽게 봐준다면 후한 점수를 줄 수 있겠다.

대학 입시와 직결된 각론으로 들어가서 이 책이 대입 논술을 위해 도움이 될만한가라는 질문에는 절대로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 2008학년도 대입부터 시행되는 통합 논술의 예시들은 도올의 지적대로 프랑스의 바칼로레아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빼앗기거나 잘못된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실전과 훈련을 일치 시켜야하는 현실에서 본다면 부적당한 교재다. 하지만 넓고 깊은 의미에서 궁극적인 논술의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면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는 없다. 잡다한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창조적인 사유 방식들을 다듬어 나가기 위한 방편이라면 잠시 시간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060817-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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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문화사 살림지식총서 224
박철수 지음 / 살림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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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 줍니다’

엽기적인 건설 회사의 광고 카피다. 아파트라고 하는 공통 주택의 형태는 엽기다. 차단된 공간 속에서 한 줄로 앉아 볼일을 보고 한 줄로 누워 잠을 잔다. 아파트 밖에서 위 아래로 훑어보며 생각해 보면 닭장 속의 닭처럼, 성냥갑 속의 성냥들처럼 동일한 공간과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박제된 사람들의 생활이 재밌고 우습다. 이것이 내가 처음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느낀 점이다. 80년대 후반 처음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을 때 생활의 편리보다는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족들이 대부분 반대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머니의 주장대로 이사를 감행했고, 또 그런대로 아파트의 편리함에 익숙해져 갔다. 이후 한 번도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삶의 형태도 비슷할 것이다. 이제 아파트는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다.

우연히 박철수의 <아파트의 문화사>라는 책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다. 한국의 아파트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했다. 짧은 책이지만 현대사의 산 증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아파트는 개발 독재 시대의 유산으로 출발해서 양극화의 첨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중 소설을 통해 아파트의 이미지를 소개하는 부분은 신선했고, 우리의 아파트가 지닌 문제점을 건축가의 입장에서 지적하는 대목들은 공감할 수 있었다. 원래 아파트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들이 개선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 공감하게 되었다. 현재의 아파트를 ‘자폐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비유한 대목을 이해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오래 전부터 하늘과 산과 강을 그리워하며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그리워했던 이유들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피상적인 꿈으로서 전원 생활이 아니라 콘크리트 숲이 주는 건조함과 사막함의 원인은 공간적 이기주의와 폐쇄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숨 막히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들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는지도 모른다. 아파트의 편리함과 환금성을 대체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대안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닐 것이다. 아파트도 기본적으로는 우리들 삶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며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단지식 아파트로 현재와 같은 형태로 지어진 최초의 아파트는 1962년에 완공된 마포 아파트다. 이후 아파트의 높은 담장과 철저한 보안 시스템은 첨단을 달리고 있다. 결국 아파트의 진화는 단지별 위화감의 조성과 단지 밖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동경과 선망으로 바뀌었다. 평수와 가격으로 수량화, 박제화 되어 버리고 있는 우리들 아파트의 현주소는 설명하기 힘든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결국 대한민국 자본주의 총아는 아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평생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삶을 저당 잡히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토지와 주택에 대한 개념이 변함없이 유지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원시시대에도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아 해결했던 의식주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생존 환경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걸까?

박철수의 말처럼 ‘자폐증과 우울증’이라는 병리현상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는 아파트의 현주소는 바뀌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이기적 욕망들을 버리고 모두 함께 잘살자는 이상주의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과 동사이 개별 호와 호 사이에 최소한 소통의 공간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경쟁과 비교 우위의 강박 속에서는 불가능한 삶의 모습들이다. 물론 모두가 살벌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집단 이기주의의 속성은 첨예한 대립양상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단지와 단지 사이의 통행 제한이나 학군 조정 문제 도로 개통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들만으로도 아파트의 우울한 현주소는 쉽게 확인된다.

각종 외국어를 이용한 아파트 브랜드의 차별화 전략은 명품에 환장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전형을 이용하고 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대한민국의 각 가정에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가 흘러 나온다. 내가 사는 곳과 내가 사는 아파트가 나를 말해 준다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라면 할 말은 없다. 아파트의 ‘오만과 편견’은 우리들 삶의 모습까지 일그러지게 한다.

효율성과 집적 능력의 결정판으로 주거 형태에 혁명을 가져온 아파트에 대한 새로운 시각고 접근 방법은 개별 거주자들의 노력은 물론이겠지만, 주택과 토지에 대한 국가적 개념 설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삶의 질을 향상 시키기 위해 아파트라는 주택 형태는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다. 매년 새로 지어지는 주택의 80%가 아파트라면 아파트의 기능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야 아파트의 ‘자폐증과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이다.


060818-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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