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안다는 것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을 안다는 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엄마의 착각이 아이를 망친다. 식성과 습관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으나 성장 과정에서 생각과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차이가 난다.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는 도시의 전설은 여전하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연인과 부부 관계만큼 오해가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많은 사람이 에리히 프롬을 소환하고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고 되뇌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의 기대와 거리가 멀거나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 리가 있다’는 게 디폴트 값이다. 리처드 니스벳의 탁월한 저서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인간의 양면성을 상황 논리로 설명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고 사람은 앞뒤가 다르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 건 특정 직역, 정치인, 행정가, 공무원, 과학자의 논문 정도가 아닐까.

사람을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전제로 데이비드 브룩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관점이 달라진다. 우리, 아니 당신이 믿는 인간 혹은 세계는 어떤가. 서로를 깊이 알면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넓어지냐고 묻는 저자에게 서로를 깊이 알면 다칠 뿐이라는 시니컬한 답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소셜 애니멀』부터 관계에 집중했다.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며 인생의 태도를 점검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적 영감과 성찰을 준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에 가까운 자기계발서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저자의 지향점과 전제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례 중심으로 철학과 심리학, 문학과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소설과 영화를 가로지른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며 인사이트도 충분하다. 모든 사람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풀리지 않는 숙제다.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건, 사람마다 초점 자동 조절 기능으로 피사체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기능을 장착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기대고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소환하고 템플 스테이와 명상을 시도하기도 하는 걸까. 정답이 없으니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만의 ‘태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자기 정체성이다.

차이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고 조절해야 한다. 하나가 되려는 허튼 노력과 우리가 남이냐는 호소가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때로는 인맥과 인연을 강조하며 관계를 이용한다. 남이 하면 이기적 집단주의 카르텔, 내가 하면 처세술에 능한 성공한 인맥 관리일까. 정서적, 개인적 1차 관계와 공적 영역의 2차적 관계를 구분하는 공정한 세상, 합리적이고 평등한 사회는 ‘꿈’에 가까운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최소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라도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를 익히며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간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지혜로움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책이 그러하듯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개별 독자의 몫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정신적 경험을 세상에 투사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감각기관과 개인사, 목표, 기대치에 의해서 특정한 지각이 형성되었음을 망각한 채, 자기의 정신적 경험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라 착각한다.” - 프로핏/드레이크베어 『지각Perception』 재인용, 17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화는 진실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안다면 말과 행동을 삼가게 된다. 그러다 대부분의 사람은 신념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타인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며 자신은 복잡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모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며 생존 게임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불합리한 요소도 버릴 게 별로 없다. 이질적 존재에 대한 경계와 편견, 나와 다른 집단에 대한 적개심은 종족 보존과 항상성 유지에 도움이 된다. 끼리끼리의 카르텔은 깨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만의 리그는 계속되리라.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신경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필리프 슈테르처가 쓴 이 책은 과학의 영역조차 음모론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망상, 조현병조차 적응과 생존에 유리한 점이 있다는 점이 놀랍지만 ‘정상’과 ‘비정상’, ‘미친’과 ‘제정신’ 사이에는 경계가 없고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럽지 않다. 언제나 경계 위에서 흔들리는 사람, 고민하고 질문하는 사람은 성장과 변화의 희망을 품어도 좋다. 그러나 현실은 모두, 각자 ‘제정신’인 사람뿐이다. 반대편 사람들, 즉 정치적 신념, 종교 등이 다르면 공생이 불가능한 적으로 간주한다. 몇몇 극단주의자의 태도가 아니라 나와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가진 타인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왜 타인을 인정하기 어려울까. 아니, 어느 지점까지 허용할 수 있으며 협력과 공존이 가능할까.

짐 알칼릴리는 『과학의 기쁨』에서 “확신이 몰락을 불러온다.”고 지적했고, 저자는 이 책에서 “확신은 본질상 가설에 불과하다.”라고 강조한다.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될 가능성은 없을까. 생존 기계에 불과한 인간의 유전적 본성에 반하는 데도 인간은 왜 스스로 합리적, 이성적 존재로 ‘착각’할까.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느라 하루 해가 짧다. 근대 이후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성과 합리성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었으나 개인은 모두 ‘제정신이라는 착각’에 빠져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합리성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비합리성이 진화한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시스템은 인식적 합리성 원칙을 표방한다. ‘인식적 합리성’은 확신이 증거에 부합해야 하며, 이런 부합성에 맞춰 확신을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실용적 합리성’은 어떤 확신이 자신에게 실용적 이익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마치 탈진실post-truth,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처럼 실용적 합리성은 뇌피셜과 합리화의 다른 이름일까. 비합리적 확신은 종교와 미신 그리고 음모론의 바탕을 이룬다. 미스터 스포크는 “나는 훈련 없는 지성에 반대한다.”고 선언했으나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적 비합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인지 왜곡’을 인지 편향 또는 인지 착각이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의 생각이 체계적으로 실수를 저지른다는 의미다.

대표적으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들 수 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겸손은 옛말이 되었고, 인터넷 시대의 인류는 스스로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점차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인 확증 편향이 인터넷에서 에코 체임버가 생겨나게 할 뿐 아니라, 에코 체임버가 확증 편향을 부추기는 것이다.” 필터 버블Filter Bubble과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은 에코 체임버echo chamber로 확신을 신념으로 강화한다. 대니얼 카너먼이 말한 ‘네게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다What You See is All There is’라는 무서운 팩트fact와 진실truth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절대 네비게이션을 창작한 신인류가 등장한 건 아닐까.

‘예측 처리 이론’을 소개하며 왜 우리가 대체로 인식적 비합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지, 심지어 망상과 조현병조차 적응과 생존의 방편이 될 수 있는지 살피는 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그’ 혹은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인간일 뿐 로직logic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나 로봇이 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과정은 곧 나의 착각과 확신을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예측 기계라는 저자의 주장은 인간이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에 포섭된다. 의심과 질문은 겸손한 태도를 만든다. 공부하고 살피며 매일 조금씩 조정하고 수정하며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삶은 불가능할까. 목청 높여 노래 부르던 가수의 외침이 새삼스럽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역사 - 신의 탄생과 정신의 모험
카렌 암스트롱 지음, 배국원 외 옮김 / 교양인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쿠오 바디스Quo vadis』를 읽은 건 초등학교 시절이었으니 아마도 문고판 축약본이었을 것이다. 신과 종교에 대해 무지했던 시기였으니 이 책이 그리 감동을 준 것도 아니었다. 사치와 향략으로 점철된 로마 문명과 숱한 박해와 고난에도 결국 인류의 보편적 종교로 자리 잡은 기독교의 대비가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에 대한 아우라가 영향을 미쳤을 리도 없다. 계몽사판 세계문학 전집 100권 중 하나로만 기억한다. 소설의 영향은 아니었겠으나 크리스마스 즈음에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서 초코파이를 받아먹은 게 종교 경험의 전부다. 풍광 좋은 절에 들러 문화재를 둘러보는 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감동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엊그제 겨울 산, 돌계단을 디뎌 개심사에 다녀왔다고 마음이 열리거나 번뇌가 씻기지도 않는다. 종교에 대한 관심과 신에 대한 믿음은 별개의 문제다.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예수는 신화다』 등의 책을 보는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던 질문 중의 하나가 ‘유일신’에 대한 그들의 공고한 믿음이었고, 유대교와 이슬람과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일치 여부 혹은 배타적 태도의 근원이 궁금했을 따름이다. 신의 존재 여부와 종교적 도그마는 한 인간 혹은 인류 전체의 역사를 뒤흔든다. 여전히.

극단주의 테러와 종교 전쟁을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숱한 사이비 논쟁이나 다양한 분파를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때때로 그 열정과 공고한 신뢰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그러한 삶은 그렇지 않은 삶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면 카렌 암스트롱이 작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첨부된 지도를 따라가며 신의 기원과 유일신의 탄생 과정을 시작으로 기독교, 이슬람의 신 뿐만 아니라 철학자, 신비주의자, 종교개혁가의 신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카렌 암스트롱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하나의 관점으로 신을 해석하거나 분석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과 역사적 과정을 살피는 데 그쳐 객관적 거리두기에 성공한 듯하다.

아주 먼 옛날, 수천 년 전의 기록을 검토하고 예수와 무함마드를 대하는 태도 삼위일체의 해석 문제 등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뿌리와 차이를 확인하는 동안 인류가 걸어온 종교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인간 이성은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합리주의 탄생의 바탕을 이룬다.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합리적 근거가 불가능한 신이 지배하는 세계에 균열이 발생하는 건 자연스러운 문명발달의 과정이다. 신이 설 자리가 좁아지기도 전 성급하게 신의 죽음을 외친 사람들이 많다. 시대를 앞선 자들의 삶은 괴로웠고 용기 있는 발언은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실존적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발언 내용이나 철학적 사유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종교가 사라지거나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이슬람 모두 유일신, 즉 우상 숭배 금지로부터 모든 갈등이 배태되었다. 아랍 민족의 문화적 전통을 부정하는 쿠란의 급진적 구절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슬람은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조차 부정하는 극단적 유일성의 개념에 집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제국에서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가능했다. 종교적 배타성으로 인한 인류 역사의 고통과 눈물은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다. 종교 전쟁과 마녀 사냥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지는 편견과 갈등을 다룬 숱한 기록과 고민들은 여전히 난망한 문제다. 힌두교와 불교를 다루기는 하지만 저자는 주로 세 종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간다. 종교와 과학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창조과학이라는 용어가 낯설지 않을 만큼 종교도 발전과 진화를 거듭한다. 나름의 설득력을 위한 노력은 종교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현실적 삶을 위한 인간의 정신적 보호 장비로 애용된다. 무엇을 믿는 어디를 바라보든 자유지만 신의 미래는 생각보다 밝아 보이지 않는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신의 미래를 신의 죽음과 인간의 해방으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틸리히의 ‘신 위의 신’, 화이트헤드의 ‘위대한 동반자’ 개념을 논하지만 우리가 믿어온 신에 대한 부정이나 새로운 신을 위한 희망이 아니다. 신의 존재 유무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은 헛되다.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과 종교에 대한 역사다.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지만 ‘태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특정 지역과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에 대한 앎은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지만 말과 행동의 맥락과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지금, 여기의 삶이 중요하든 내세와 죽음 이후의 영생에 목숨을 걸든 아무도 그 선택을 가로막거나 방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의 사회, 정치적 기능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결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종교가 있든 없든 ‘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 피해 갈 수 없다.

인간은 공허함과 황량함을 견딜 수 없기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그 공백을 채울 것이다. 근본주의의 우상은 신을 대신할 수 없다. 미래를 위한 활기찬 새 신앙을 창조하려면 신의 역사에서 교훈과 경고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 68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화의 힘 Philos 시리즈 4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4년 마지막 3개월간 주제는 「신화」였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막론하고 신화는 공동체의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민중들의 생각과 경험과 기억이 보태진 집단 창작물이 바로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기록하면서 현재의 형태로 고정되었으나 기록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니 원본은 의미가 없고 디테일에 목숨 걸 필요도 없습니다. 세계 각국의 신화는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고 문명 시대에도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21세기에도 라그나로크 같은 게임의 세계관을 제공하며 스타벅스 커피잔에도 세이렌이 새겨질 만큼 자본주의 첨병으로도 활약합니다. 그래서 조지프 캠베은 “꿈이 사적인 신화”라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이라고 정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종횡무진 세계 각국의 신화를 누비며 비교 신화학의 전설이 되어버린 저자에 대한 찬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1987년에 세상을 떠난 조지프 캠벨의 이 책은 199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1992년 이윤기가 번역했고, 2002년 개정판이 나왔다가 2020년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싶은 책이지만 배경지식이 전혀 없거나 신화 입문용으로는 조금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너무 쉽고 재밌는 콘텐츠에 익숙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적당한 난이도는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어 빌 모이어스는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라고 정의합니다. 인상적인 발언인데, 이 말은 조지프 캠벨이 천착했던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을 설명합니다. 신화는 근대 국가 혹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전부터 군집 생활을 했던 인류 공동체의 삶과 꿈을 반영합니다. 원형적 상징으로서 자연에 대한 공포,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아 신화는 태초의 인류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조지프 캠벨은 “‘산타 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導師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 클로스는 부모와 자식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 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 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며 동심을 파괴합니다. 종교와 신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태도가 객관적일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내재한 서양의 전통과 문화와 달리 우리는 유교적 전통과 가부장적 결속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그게 무슨 삼각김밥 끈 떨어지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으나 인간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가족과 사회를 통해 만들어진 욕망의 하수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라는 거대한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건 사유하는 기능을 점검하지 않는 개인의 책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겨울 산에서 길을 잃어 아재 둘이 동사했다는 뉴스를 접하며 동호회원들의 무관심보다 어둡고 캄캄한 산속에서 난감했을 불안과 공포가 떠올라 한동안 마음이 쓰였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신화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먼 훗날 신화로 전해지지 않을까요.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동해로 떠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대신 다가올 미래는 결국 과거와 현재의 결과일 뿐이라는 걸 알면 어차피 연말에 후회만 남기는 신년 계획 대신 내 삶의 신화를 스스로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와 태도를 점검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달력이 바뀐다고 삶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희망 고문 대신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직시하는 일이 신화 읽기를 통해 우리 삶에 숨겨진 메타포를 읽어내는 방법일 겁니다. 그러니 계속 따로, 또 같이 걸어 보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 사계절 만화가 열전 21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현실과 유리된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적이 없다. 모든 책은 인간 스스로 자기를 알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나’가 아닌 ‘너’와 ‘그들’ 그리고 외부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태’를 향한 호기심과 관찰의 탐구 과정을 담은 기록인 책은 폭발적 지식의 빅뱅을 가능케 했다. 단기간에 엄청난 지식과 정보 습득이 가능해지자 과학기술은 빛의 속도로 발달했고 인간의 인지 능력과 사고력은 무엇을 상상하든 실현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하늘이 파란 이유도 노을이 붉게 물드는 과정도 알게 됐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불합리한 선택, 종교적 도그마, 학살자의 심리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책들이 차고 넘친다. 그래서 책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인터넷 이후 시대, 즉 정보화 시대의 독서는 이전 시대와 그 목적과 방향이 전혀 다르다. 지식의 생산자였던 연구자들은 건재하나 소비 대중은 폭과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어졌다. 누구나 읽고 쓰는 시대를 살면서도 ‘독서’는 가장 느린 매체가 되어 외면받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점점 중요해지는 문해력과 미디어 리터러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쇼츠, 릴스, 틱톡 등 점점 호흡이 빠르고 단축, 요약된 정보를 소비한다. 유일하게 줄지 않고 오히려 늘고 있는 건 인간의 욕망뿐이다.

현상이 어떠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창현의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권과 2권은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안간힘으로 보여 안쓰러운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취향 저격인 책에 대한 상찬은 낯이 간지러워 솔직한 이야기를 쓰기가 어렵다. 만화에서 강유원을 만나는 어색함과 만화는 책을 읽기 싫은 사람들이 보는 거라는 편견이 어우러지면 이 책이 놓일 자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통쾌함을 느끼고, 동류의식에 위로를 받고. 나같은 사람들이 어딘가에 또 있을 거라는 기이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나 혼자 뿐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중독인 것을.

만화의 소재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가벼운 독서법, 자기계발서, 서평집 따위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 한 권쯤은 괜찮지 않은가. 왜 문학을 넘어선 자리에 이 책이 놓여야 하는지, 왜 강유원을 등장시켜 독서의 본질과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점검해야 하는지 살펴 볼 수 있다면 이 책은 서가의 어떤 책보다 중요한 자리에 놓여야 할 것이다.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거나, 책을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되냐고 묻는 정도가 돼야 재밌는 책이다. 왜 책을 읽어야 하냐거나 독서가 꼭 필요하냐고 생각한다면 다른 책을 살펴보는 게 좋다.

유머를 이기는 방법은 없다. 독서 클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피는 건 메시지를 담는 포장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내뱉는 말과 행동을 살펴보며 자기 삶의 여유(개그)와 태도(의미)를 점검할 수도 있다. 무엇을 위해 왜 사느냐고 묻는 사람은 많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드물다. 눈앞에 현실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늘이 흐리고 내일 아침은 혹한의 겨울이 시작될 거라는 예보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 고전과 신화를 뒤적이는 마음,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상상하던 사춘기와 시지프를 다시 생각하는 중년, 걷고 뛰고 땀을 흘리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일들을 바라보는 오늘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바스라진다. 사라지는 모든 것이 아쉬움을 남기는 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무엇이 없지도 않다. 가능한 모든 일을 저지르고 도전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게 뭔지 다시 고민하려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도서 목록보다 자기 몸과 유머를 챙겨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