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W. 다이어 지음, 오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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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시적으로 텅 빈 공간에 앉아 커피향을 느낀다. 창밖의 시원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녹음이 우거진 나무숲이 고요하다. 시간이 멈춘듯한 정적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무념무상의 지금 이 순간!

행복의 다양한 정의와 나름의 방식을 떠들어대는 무수한 책들은 심하게 말하면 거의 쓰레기에 가깝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왜 불행한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고치거나 해결할 방법들을 행동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데 아픔이 있다. 읽다보면 똑같은 소리의 반복들이다. 자기 개발 프로그램이나 처세술에 관한 책들은 별 효용을 가지지 못한다. 물론 방법을 모르거나 자신을 분석하기 어려운 경우 지인의 충고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은 계량화할 수 없다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저자 웨인 다이어는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단계와 상황별로 그 이유를 점검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략들을 제시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저자는 두 가지로 선언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째는 감정은 선택 가능한 것이고, 둘째는 현재의 순간들은 통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대전제이다. 대전제를 부정하면 다음의 이야기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가 일치할 수는 없다. 다만 부단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거나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겠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자신을 위한 감정을 선택하고 순간 순간 벌어지는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1976년에 ‘당신의 오류지대your erroneous zon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 아직도 번역 출판된다는 것은 물론 의미있는 일이다. 이 책이 가지는 폭넓은 공감대가 첫째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은 일반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별함은 없다. 다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현실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답답함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겠지만 자기 반성의 시간과 기회를 갖는 것 이외에 특별한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신지식으로 선정되었던 심형래의 말처럼 ‘못하니까 안하는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 그것 이상의 말을 찾기 어렵다. 전체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보면,

1. 남보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
2.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라
3.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를 떼라
4. 자책과 걱정은 버려라
5. 미지의 세계를 즐겨라
6. 의무에 끌려다니지 말라
7. 정의의 덫을 피하라
8. 결코 뒤로 미루지 말라
9.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10. 화에 휩쓸리지 말라


마지막 11장이 행복한 이기주의자이다. 위의 10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새로운 인간형 행복한 이기주의자! 틀린 말이 별로 없어 시비걸고 싶진 않으나 남는 것이 없는 맹물같은 책이다. 다만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주는 함의는 두고두고 책내용과 상관없이 되새겨 볼 만하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수많은 방법들을 누구에게 배우겠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뿐이다.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방편으로 여겨야 한다. 더불어 잘 살아야한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말씀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게 불행을 주는 이기주의자가 느끼는 행복은 오만과 아집이다. 행복과 이기주의라는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의 조합이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또다른 모습인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과 책의 방향과 무관하게 우리들 삶에서 행복은 빼놓을 수 없는 삶의 목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행복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는 물론 개인의 선택이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수많은 방법들 중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과의 사소한 싸움에서 번번이 지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심리적 처방전이 될 수는 있겠으나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할 수 있겠다.


060609-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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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4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4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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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참 다양하다. 같은 소리에 대한 정서와 이성에 대한 느낌이 다른 것은 본능적인 면과 훈련에 의한 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훈련이라는 것은 문화적 영향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소음에서부터 영혼을 울리는 음악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태어나 귀를 통해 듣는 수많은 소리들을 생각하면 즐거움과 고통의 이중주를 들려준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의 오감중에 유일하게 취사선택이 가능한 감각이 시각이다. 나머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특히 소리는 더더욱 그러하다.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이다. 악기의 연주와 노래로 크게 나누어지는 음악은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어떤 악기가 가장 훌륭한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것을 객관화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설령 음악이 아니더라도 잠자는 아기의 숨소리, 사랑하는 연인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눈을 가만 감고 듣는 바람소리, 산사의 밤에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 등 주관적으로 판단되는 최상의 소리는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그 모든 소리가 음악이 아닐까?

세계적인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금난새가 청소년들을 위한 서양음악 가이드 북을 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클래식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 책에 ‘서양 음악사의 라이벌’이라는 부제를 부치고 싶다. 바흐와 헨델에서 시작해서 모차르트와 하이든, 베토벤과 로시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쇼팽과 리스트, 브람스와 바그너,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뷔시와 라벨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사에서 빛나는 거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방식이 단순한 이론과 지식에 머물지 않고 동 시대인 두 사람씩을 시대별로 묶어 비교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색깔과 개성이 뚜렷한 음악가들의 차이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에 반영된 정신을 읽을 수 있는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음악가들의 초상화와 관련 그림들을 풍부하게 삽입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히려는 배려가 눈에 띤다. 청소년을 예상 독자로 설정했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하는 책으로는 부족하지만 클래식에 한 발 다가서고 듣고 싶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고전주의 음악을 선도했던 서양의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음악교육은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창 시절 미국의 민를 배웠고, 서양 음악가와 작품들을 암기해서 음악시험을 본 기억이 있다. 판소리나 꽹과리, 징, 북소리의 깊은 울림에 관한 설명과 감상의 기회는 전무했다. 대학의 사물놀이패와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은 자발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학교교육에서 조차 차별받는 동양, 특히 한국의 음악은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동양의 고전 음악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얼마 전 중국의 전통 음악을 현대화해서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여자12악방’의 연주회에 다녀왔다. 팝과 클래식을 넘나들며 퓨전음악을 들려주는 여성 연주단이었다. 물론 상품화의 논란을 비껴갈 수는 없다. 미모의 여성들을 내세워 중국 전통 악기인 비파와 구젱이 주류를 이루는 연주팀으로 영화음악과 팝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주저하지 않고 CD를 사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었다. 공연장에서의 감동과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뉴에이지라는 장르가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돌아오는 길에 못내 아쉬웠던 것은 김영동이나 김수철 등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했던 사람들의 음악적 실험들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사장되어 버린 것 같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제외하면, 우리 전통 음악의 현대화는 멀게만 느껴진다. 단순히 현대음악과의 결합만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처럼 여겨진다.

그에 비해 서양의 클래식은 폭넓은 교육과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장르와 기원을 가리지 않고 좋은 음악이 주는 감동과 삶의 기쁨들을 즐기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겠지만 클래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지식이 밑바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알지 못하면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은 옳지 않지만 그저 듣고, 본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쉽고 흥미있는 내용을 위주로 음악가들의 생애와 음악적 특징을 사회문화적 배경과 함께 설명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내공의 결과다. 가장 대표적인 음악가들과 친숙해지는 일은 클래식의 세계로 입문하는 좋은 방법으로 여겨진다. 전국을 뒤흔든 함성소리도 아름답지만 창밖에 소리없이 내리는 빗소리처럼 부드러운 클래식의 바다에 풍덩!


060614-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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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 베버 선집
막스 베버 지음, 박성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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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망에 대해 맑스는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았을까? 전자본주의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후기 자본주의는 자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생력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기본 토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자본가의 형태가 고전적인 의미에서와 같이 한정적으로 논의하기는 쉽지 않게 되었다. 물론 노동의 관점과 시각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노동력으로 생활을 영위하면서 또 다른 자본을 소유하고 생산계급이면서도 자본가적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합리적 사고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21세기의 자본주의 경제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는 경제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해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달라지지 않는다고 해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탄생한 20세기 초반과 비교한다면 현재의 상황에서 이 책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러나 베버의 사상이 현재적 의미를 갖는 부분은 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서 바라본 자본주의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무엇인지, 칼뱅과 루터 그리고 가톨릭에서 말하는 노동과 직업의 소명 의식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이 책을 읽어야 했던 나는 이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구절과 구절의 의미는 물론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원전의 의미를 철저하게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번역이 아니라면 긴 문장을 나누고 다듬어 기본적인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 얄팍한 배경지식과 무식의 소치로 돌리기엔 번역된 문자이 주는 고통도 상당하다.

자본주의의 발달을 노동에 대한 직업 소명의식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탁월하다. 맑스가 이미 <자본론>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해 놓은 시대의 저작이라면 1905년에 발표된 이 논문도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의 출발선 언저리에서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변화를 바라보는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논쟁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종교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았던 베버의 진정한 의도는 찾을 수가 없다. 시대를 초월한 반론과 수많은 쟁점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연구를 유발했다. 청교도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과 자연스런 부의 축적을 자본주의와 연관지으려는 베버의 태도는 자본주의에 대한 오독으로 보여지기까지 한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서 근대적 자본주의가 잉태했다는 베버의 주장이 여전히 타당한가?

노동과 직업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베버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돈벌이를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것이다.’는 주장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물질적 생활 욕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상상을 초월하게 되었으며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되고 있다. 어떤 계층 어떤 계급에 속하든 물질적 부의 척도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삶의 태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생에 대한 통찰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과 인간의 삶의 양태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반성적 관점에서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은 공허한 울림이 되겠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분명히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종교적인 질문도 세속적인 질문도 아닌 단순한 삶에 대한 자기 점검을 위한 질문일 뿐이다. 도구와 수단을 살펴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삶에 대한 철학이 부재한 것은 아닌가. ‘유태교의 에토스는 한 마디로 말해 천민 자본주의의 에토스이다.’는 위험한 발언을 선언적으로 할 수 있었던 시대의 베버는 오히려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유태교에 대한 혹은 유태인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청교도주의에서 추구하는 직업과 소명 의식에 대한 반성으로 읽히는 이유는 현재의 자본주의가 베버가 비판했던 유태교의 에토스보다 악화됐다고 믿는 까닭이다.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오로지 돈에 대한 집착과 인간의 욕망만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무조건 거부하거나 돈을 멀리하자는 멍청한 말이나 태도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태고 변화가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자본주의를 변화 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소박한 낙관주의일까?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아니라 그 어떤 대상과도 자본주의 정신은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다양한 관점과 생산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막스 베버의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번 쯤 떠올렸음직한 고민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060619-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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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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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란 어떤 것의 일별, 스쳐 지나가는 섬광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요. 아주 작은, 내용 말입니다.(월램 드 쿠닝, 어떤 인터뷰에서)

외양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얄팍한 사람들 뿐이오. 세계가 간직한 수수께끼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란 말이오.(오스카 와일드, 한 편지에서)

위와 같은 인용문으로 <해석에 반대한다>는 시작된다.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가지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수잔 손택의 첫 번째 경고로 들리는 것은 극단적이 이 두개의 인용문 때문이다. 예술에서, 엄밀하게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 논쟁의 전제에는 그것을 분리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수잔은 그것을 부정한다. 예술에서, 특히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고 그 특성을 ‘해석’하는 것이 지금까지(책이 출판된 1960년대)의 관행이었다. 문학 비평은 30년대 신비평주의자들에 의한 형식비평을 필두로 급격한 변화와 도전을 받게 되어 지금까지 숱한 변화와 주장들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비평’의 존재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첨예한 시대에 수잔의 이 책은 그녀를 폭풍의 핵으로 만들었고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 왔다. 또한 문학 비평에 대한 재인식의 기폭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문제작이란 이런 책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후 수잔은 사회적 목소리를 높혔으며 문학안에 머물지 않고 예술 전반과 그것의 모방 대상인 실제 현실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60년대까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내용과 형식은 우선순위와 상호 배타적 우월성을 표방하는 논쟁들과 소모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석 자체를 반대한다는 도발적인 선언과 그 대안은 여류 비평가를 주목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수잔은 이 책에서 단순히 문학과 예술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주는 무의미한 논쟁에 대한 종식을 선언함은 물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스타일’이다. 형식과 다른 개념과 용어로 설명하기 위해 번역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스타일’과 ‘스타일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적용이 제시된다. 스타일은 ‘투명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다.

투명성은 오늘날의 예술 - 그리고 비평 - 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의미심장한 가치다. 투명성이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 P. 33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여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그리고 거기에서 유추한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 P. 35

스타일을 논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의 총체성을 논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총체성에 관한 담론이 으레 그렇듯이,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은유에 기대야 한다. 그리고, 은유는 얘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간다. - P. 39

위에 인용한 부분은 수잔이 ‘투명성’과 ‘스타일’에 대한 논의의 핵심을 말한 부분이다. 문학을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공자나 비평가의 몫일 뿐 실제 문학의 소비자인 독자들과 거리가 멀거나 아카데미즘의 고유 영역일 수 있다. 독자반응비평같은 주장이 제기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가와 작품, 현실과 작품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하나의 축이었다면 작품의 내재적 의미만을 철저하게 분석하는 것이 또 하나의 작품 해석의 축이었다. 거기에 독자와 작품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을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수잔은 그 모든 형식과 내용에 관한 기본 틀을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문학 비평에서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하자는 이야기다. 투명성과 스타일은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작품 스스로 빛을 내는 반짝임 자체를 이해하는 일, 그것이 작품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엘리어트가 말한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는 해석 이전의 문제로의 회귀를 뜻한다. 투명성을 경험한 독자는 작품을 보다 잘 느끼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해석을 전제로 한 이해가 아니라 총체적인 스타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인 ‘해석에 반대한다’와 ‘스타일에 대해’가 수잔 손택의 문학비평에 관한 핵심 주장이다. 나머지는 실제 작품에 적용을 여준다. 특히 기존의 해석과 방법과 다른, 혹은 영화에도 적용되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술은 투명성을 확보하고 나름의 고유한 스타일을 찾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보다 더 잘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요구한 예술에 대한 기본 자세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아우라를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거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요구한 예술의 투명성은 결국 독자들의 생생한 경험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를 주장한 것이다. 지금은 당연해진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가 그녀의 주장 이전까지는 통용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문학과 예술에 대한 접근 방식과 이해의 폭은 중간에 끼여든 평론가를 통해 왜곡되고 변형될 수 있다. 비평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부터 다양한 문제점과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 전반에 걸친 맹목적인 주례비평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권력 다툼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비평이다. 결국, 문학에서 감상과 수용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독자들과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해석과 비평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로 남는다.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는 주는 의미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논의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060625-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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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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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받았던 감성적 충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Als das Kind Kind war아이가 아이였을 때……” 중저음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파리, 텍사스> 이후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준 영화다. 흑백의 화면과 빨간 옷을 입은 어린 아이의 선명한 이미지의 대조는 십 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된다. 이 영화를 보고 얼마 후 후배가 볼만한 영화가 없느냐고 묻길래 적극 추천했다. 여자친구와 이 영화를 보러 갔다가 10만에 자고 왔다는 원망을 들었다.

영화든 책이든 개인적인 취향과 감동의 깊이는 천양지차다. 객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만큼 객관화시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재미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자하는 태도는 문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다.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감동과 교훈을 고루 얻을 수 있는 소설을 만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은 밀란 쿤테라의 <농담>을 읽었을 때의 극히 주관적 감동 상태와 유사하다. 늙은 소설가의 말년 작품은 극단적으로 위대하거나 초라하다. 나이와 연륜을 감당할 만한 작품들이 고루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평범하고 지루해 보이는 이 소설이 내게는 깊은 심연의 ‘동굴’을 돌아보게 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세상에 대한 인식 방법을 회의하게 만든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빛나는 작품이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는 손과 목이 쇠사슬에 묶인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반문하는 듯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볼 수조차 없는 동굴 속의 나의 모습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에게 투영된 나의 모습과 옆을 돌아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뒷모습을 확인한 것은 나만의 공상일까?

평생 도자기 그릇을 구워온 노인과 그의 딸 그리고 사위, 한 동네에 사는 과부와 길을 잃고 노인에게 온 개 한 마리가 이 장편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다. 단순한 구성과 밋밋한 갈등은 지루하고 나른한 소설로 팽개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인물들 간의 대화를 큰 따옴표로 묶지 않고 인용하듯 긴 문장들을 쉼표로 연결해 놓아 긴 호흡과 느린 템포를 유지한다. 노인의 시선과 서술자의 말투는 무더운 여름 오후의 거친 호흡처럼 답답하기까지 하다.

‘센터’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노인의 모든 그릇이 이곳으로 납품되다가 일시에 거절당한 후 인형을 제작해 납품해보기로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센터에서 경비로 일하는 사위는 상주 경비원으로 승진해서 센터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게 된다. 센터 밖에 거주하는 노인은 딸 내외를 따라 가기로 결심한다. 센터로 이주 한 후 지하 발굴 현장에 몰래 잠입해서 동굴의 실체를 확인한 후 다시 산업지대와 그린벨트를 지나 과부의 사랑을 확인하러 돌아온다. 사위와 딸도 동굴과 센터를 떠나 네 사람은 석양 속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으로 이 소설을 끝을 맺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굴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비극적 인식에서 이 소설이 출발한다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소설화한 해설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의미는 동굴에 있지 않고 동굴 밖에 있다. 동굴을 포함한 센터와 센터 밖의 세계와의 대비가 아니라 두 세계를 포함한 세계 밖으로 길을 떠나는 네 사람의 여행 후기가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이 떠나는 세계는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는 서술자의 입을 통해 촌철살인의 인생에 대한 통찰들이 녹아 있다. 네 사람이 나누는 대화 사이사이 서술자가 개입하고 그 개입과 인물들의 대화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대부분 아주 오랫동안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지 않은 사람은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선언적 아포리즘들이다. 소설에 밑줄 그으면 읽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가. 그래도 다시 한 번 읽어보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하며 여운을 즐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거나, 딱 한 번만 말하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P. 48)”는 작가의 말은 길게 늘어 놓은 그의 소설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많은 말들의 부질없음을 알고 있는 작가의 말에 귀기울여 볼만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독자들이 각자 찾아나서야 하는 모래밭에 바짝이는 작은 바늘 하일 수도 있다.


060629-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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