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다가가기 위해 더듬이를 세웠으므로, 매 순간이 새싹이었다.

나의 시, 나의 실천 이루었거나 못 이룬 진수를 미완성인 채로
언제 손을 놓아도 억울할 것 없을 포트폴리오다.

2022년 가을

이향지 - P5

길은 어디에나 없는 편이 가장 좋은 것이며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들었는가 무엇을 맡았는가 무엇을 만졌는가 어디로 가던 길이었던가
묻지 않아도 다 아는 길은 가지 않는 편이 더 좋은 것이며,
부딪쳐서 깨어지면서 피 흘리면서 스스로 아물면서 아는 것 - P46

한 잎 위에 누워

흙에 심어 흙을 먹는 일이네 농사란
손에도 옷에도 얼굴에도 흙이 묻는 일이네, 농부란

한 잎 위에 오그리고
한 잎만 떼어 주고 안아 온 배추를 생각해야 하는 일이네
한 잎도 놓지 않으려고 거머잡고
한 잎 채 떨어져 나간 배추벌레까지 생각해야 하는 일이네

내가 먹고사는 일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음을 알게 하는 일이네

누구는 길러서 먹고
누구는 잡아서 먹고
누구는 팔아서 먹고
누구는 구걸해서 먹고
누구는 뺏어서 먹고
누구는 고리로 빌려서 먹는다
모든 경우에 내가 들어 있음을 알게 하는 일이네. 목숨이란 - P74

지키기 위해 이어 가기 위해 더 길게 이어 가기 위해내 배추밭에 무임승차한 배추흰나비 날개 위로
아득히 투명 그물을 펼치기도 하는 일이네

한 잎 위에 누워
한 잎 더 덮어야 안심이 되는 사람
배춧잎 속 배추벌레를 닮았네

스무 잎 떼어 주고 한 잎 얻어먹는 일이네 농사란

눈 녹기를 기다려 배추 씨앗을 넣을 때
배추벌레도 같이 눈뜬다는 것을 아는 일이네, 농부란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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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누리 수영장


레인을 왔다 갔다 하는 초급반
나 혼자 뒤처진다 한 바퀴 따라 잡힌다

둥둥 떠다니고 싶었는데
가라앉는 사람들이 다시 떠오르는 동안
온몸에 힘을 빼고 살아 있고 싶었는데

땀을 흩날리며 트랙을 도는 육상부원
수영하는 사람도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고 멈추면 물도 많이 마신다

물 먹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수영을 배울 수 있는데 두려운 건 그뿐만이 아니라서

삶은 왜 그럴까
늘 푸르딩딩한 얼굴로 쪼글쪼글 붙어 있을까 - P32

내가 흘린 땀과 남이 흘린 땀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건 보이지 않지만 그 또한 물방울 속에 섞였을 것
작은 것 하나하나에 슬픔을 느끼는 병이 있다

두려움 없는 사람들 셔틀버스에 올라타고
꽃우물로

물이 무서운
나 혼자 뒤처지고 - P33

만년필

유종인

잉크가 다 닳은 펜의 카트리지가 훌쭉해져
잉크병을 열고 펜촉을 담갔으나 잉크병도 바닥일 때생활은 새똥이 묻은 교회 십자가 옆 허공에
빈 펜촉을 들어
필사의 부리로 끄적이는 일

필경사의 손도 아닌데 손가락에 생긴 펜혹은
창밖 뻐꾸기가 슬쩍 물어다 어디
묵언의 둥지에 한동안 탁란하듯 맡길 것도 같은 오월

바닥난 잉크 대신 카트리지에
히말라야 만년설의 빙하수를 넣어볼까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심상하게 귓등으로 넘기는 절간종무소의 진돗개 눈빛을 반쯤 채워 쓸까
가끔은 민달팽이와 유혈목이가 지나간 산 이끼의 숨결과
마라도와 가파도 사이 파도 소리를 시보時報처럼 담아뒀다 - P99

파도체의 소리 나는 푸른 사인을 해볼까
어기적어기적 저 오랜만의 두꺼비 머루 같은 눈빛도만연체 소설의 물꼬를 틀 때 써볼까

마음은 점점 바닥난 잉크를 대신하겠다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변방의 숨은 오지랖들
그 변두리 진국들에 펜촉의 과정을 그윽이 박는 날들

어머니는 그 생각만으로도 만년은 훌쩍 넘겨
쓸 수 있는 영혼의 잉크라는 것
죽음으로도 그 사랑의 필기감은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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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들.
세상의 표면을 뒤덮고 있는 수억만 개의 얼굴들.
아마도 제각기 천차만별이겠지.
이미 존재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것들도 하지만 자연은-자연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만-끊임없는 노역에 지친 나머지
해묵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재활용해서
과거에 이미 사용했던 얼굴들을
우리에게 다시 덮어씌웠을지도 모른다. - P16

우리 사이엔 다른 점이 너무나 많다.
단지 두개골과 안와(眼窩)
그리고 뼈들만 동일할 뿐. - P23

바람에 실려 온 먼지 조각은 그들 앞에선
깊은 우주 공간에서 날아온 별똥별,
손가락의 지문은 광활한 미로,
그곳에서 그들은 집결한다.
자신들만의 무언(無言)의 퍼레이드와
눈먼 일리아드, 그리고 우파니샤드를 위해. - P32

그는 좀처럼 대화에 동참하지 않는다.
대신 쭈글쭈글해진 봉투에서 꺼낸 편지를 읽고 있는 중.
아마도 그 편지는 여러 번 읽은 듯하다.
편지지 귀퉁이가 이미 닳아서 해져 있는 걸 보면.
그러다 편지지 틈에서 말린 제비꽃잎 하나가 떨어졌을 때
아, 이런!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탄식하며
그것을 붙잡으려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다. - P56

어쨌든 나는 돌아가야만 한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_미완성 육필 원고부분 (147쪽)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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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싫어하는 아이

아이의 머리를 땋아주었다. 짧은 끈으로 묶으려는데 자꾸 머리카락이 삐져나왔다. 아프면 말해 참지 말고․ 중국이 싫어요, 중국을 생각하면 기분이, 아주아주 나빠요. 아프면 말해. 아프지 않으면, 말하지 말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두 손에 모으며 짧은 몇 가닥도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때마다 머리카락은 내 손을 빠져나와 아래로 흘러내렸다. 중국이 왜 싫니. 싫어하면 되니. 싫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요. 그래. 그렇구나. 제발. 한 가닥의 머리카락도 당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옵시고, 머리를 묶은 아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아프면 말해 아프지 않으면! - P25

불 꺼진 거실에 앉아 티브이마저 꺼버린 나는 플라스틱용기입니까, 사과입니까, 전파입니까, 당신의 날개, 아래붙어 있는 수백만의 박테리아입니까, 나와 당신 사이에서서 내가 던진 말을 저 멀리 날려버리려는 또 다른 누구, 무엇입니까. 겹눈이여, 반짝이는 겹눈이여. 악취를 느낀다면 사인을 보내주세요. 공중에 기호를 그려 이 생각을 멈추게해주세요.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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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항상 과거의 작품과 위대한 시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기의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과연 시란 무엇이며 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이 현실에 있어 자기 세계의 창조에 있다. 그것은극도로 냉정한 폭(幅)에 건축되며 아름다운 평화의 심도를 수반하고 나타난다. 비평가가 비록 절찬한다 할지라도 자기 작품에 스스로 불만을느낄 때마다 그 공허감은 메워질 수 없다. 시는 독자를 위한 생산품이아니며 어디까지나 자아에의 집중이며 극복인 것이다………(중략) 그러면작품 목적을 위한 방법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가. 이것이 몹시 중요한문제라고 생각된다. 부동(浮動)하는 자기 위치의 설정, 즉 극난(難)한시 정신의 탐구에서 방법론은 자연 발생적으로 동시에 요청된다.(「눈은 자아의 창이다ㅡ시를 위한 노트,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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