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어야 한다고 매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하노이에 온 것은 아닐까. 아마 맞을 것이다. 나는 하노이에 도착해 단 한 번 내가 호텔에서 죽어 썩어가는 모습을 상상하고서 완전히 그것을 잊어버렸다. 하노이에서 침대는 다행히 죽어가는 장소가 아니라 잠을 자는 장소로서만 존재했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 P73

(새들은 인간이 부러울까?)

(아닐 것이다.) - P79

사람이 혼자일 때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 장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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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

벌레는 온몸으로 세계를 만진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세계를 읽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대단한 독서량이다. 작은 나뭇잎 하나도 허투루 읽지 않고 정독한다. 그의 몸에는 초록의 언어가 가득하다.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르 잠자가 환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벌레를 살며시 만져보면 아기 살처럼 보드랍다.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고잘 구부러진다. 몸의 유연성이 탁월하여 덩굴식물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면서 난세의 협곡을 넘어간다. 그에게 해독되지 않는 세계는 없다. 개운산에서 만난 벌레는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상형문자였다. 너무 쉬워서 사람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는 몸의 언어였다. 벌레가 또 다른 문자를 고물고물 읽어나가는 동안 나무는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가지 끝에 웃음보를 터트렸다. 수국이었다. 독서광 벌레를 이해한 물색 고운 시였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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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나오면 무조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라.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물이 흔들리는 것과 같다. 행복이라는 거는 혜(慧)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혜 증득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지혜의 행복은 달로 표현한다. 달은 천천수 우리 우물 위에 옛날 엄마들이 정화수 떠놓고 그 안에 달이 비칠 때 우리 아들 되겠다 하지 않느냐. 그게 명경같이 깨끗해야 지혜의달이 비추지. 그런데 가장자리냐 하면 가장자리를 올리는거는 불경스러운 일이긴 한데, 우리 중생이 그것마저도 자양분 삼을 수 있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어떤 쓰레기 더미도 영양분으로 삼아서 연꽃을 피울 수 있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면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죠.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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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일요일 오후마다 모르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왔다
수현이가, 수현이 맞나. 아니요. 잘못 거셨어요. 수혁이집 아입니까? 예, 아니에요. 수현이 집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일요일 오후가 다 갔는데
전화는 걸려오지 않고
노인들은 골목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다 여전히

내가 수현인 줄도 모르고
내가 남아 있는 줄도 모르고

수현은 그늘로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올 여름은 그해보다 많이 덥다 생각하며
앉아 있다 - P40

지난가을

가을 저녁 부엌을 정리하던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국내산 흙당근은 이토록 무겁고 파프리카의 노랑에는 무게가 없는지 왜 두부는 단단한가 왜 여전히 두부는 값이 싼가 그리고 어느 날 매일 지나치는 약국 앞의 노점에서 그는 ‘나는오이야‘라고 적힌 종이를 읽게 된다 그 뒤로 무가 하나 놓여 있다 오이는 없다 그는 무를 산다 동전으로 거스름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다 부드럽게 얇아지는 하늘 ‘아직 가을이구나 혼자 생각할 줄 아는 가을 저녁이 있고 그는 알 수 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이제 나라는 사실을 나는 오이야 나는 오이야 무는 검정 비닐봉지에 들어 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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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학적 성찰의 궁극에서 나타나는 정신이 칸트 사상의 구조에 내적으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지 물어볼 수 있다. 즉 순수 이성의 핵심이 될 어떤 것, 그것의 초월적 환상의 뿌리 깊은 근원, 그것의 정당한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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