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지는가


   철학이 뭐 별건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자세이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좀더 비중을 두는 격언같은 것이라 말하면 안되는가? 철학자라고 철학을 공부한 이들만의 언어로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만이 철학인가? 그것만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어야 할 높은 수준인가.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


    이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었을 때 사실 나도 그랬다. 이 책은 너무 쉬운데라고. 그래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성평등지수가 높은 국가인 스웨덴에서 이 책이 성평등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다. 한 칼럼니스트가 “페미니즘의 기치를 교육받고 자란 스웨덴 고등학생에게 이 책의 내용은 좀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라고 했다는데 딱, 내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난 생각하기를, 좀더 강하고 좀더 처절한 성차별적 상황을 보여주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조금 더 포장된 말로 감싼 책을 원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얼만큼 자리잡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것보다 이론적인 말의 향연을 더 기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라는 한 철학자의 기사를 접하면서 내 생각이 짧았다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됐다. 페미니즘에 관한 한, 가장 쉬운 말로 해도 모자라기에 이 책만큼 적격인 것은 없구나라고.

  한편으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철학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삶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그러다 또 생각한다. 왜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여성적 사고라고만 생각하는 건가. 최근 급격히 증가된 혐오논쟁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더욱 강건해지고 공고화되는 듯하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늘 있어 왔지만. 아마도 이 부정적 인식의 전제에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여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치마만다도 거듭 이야기하듯이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모든 성별’이지 결코 ‘여성만’이 아니다.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신주는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는데 왜 이리 어렵게 느껴질까. 짧은 지식으로, 아니 짧은 지식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 보편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내 이해가 일찌감치 철학적이지 못했거나 한없이 형편없거나 한 모양이다.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젠더에 따른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요? 각자의 진정한 자아로 산다면,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요? p37~39


  오히려 강신주 자신이 페미니즘을 폄하하기 위해 여성성을 더욱 강조하며 제한하는 듯하다. 기사 한 줄로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좀더 알아봐야지 하다가 참 마음이 가라앉는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지만 그의 철학은, 그의 책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람의 트윗글, 교복은 입은 여학생에게 "담요 왜 둘러? 그런거 두르면 안이 궁금하잖아. 저 외국엔 성범죄 하나도 안 일어나. 다 벗고 다니거든.“

  저 말이야말로 나온 맥락을 따진다 해도 부정할 수 없이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가진 기본 인식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 말은 페미니즘 발언과 연계가 되면서 그가 말한 수준낮은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주장이라기보다 오히려 ‘남성’적 우월주의에 가득찬 시선이 담긴 의식의 표출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도대체 여성에게 참정권이 20세기에 들어온 것과 인간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발단이 된 그의 새로운 저서 철학 vs 철학을 읽어보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고픈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철학’에 대해 가지는 그의 입장이 허울가득한 텍스트적인 지식의 자랑이었던가. 삶의 의미와는 무관한. 그가 말하는 인문주의 시선이라는 것은, 그토록 편협적이었던가.


젠더는 대화하기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게 여깁니다. 남자도 여자도 젠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며, 혹은 젠더 문제를 성급히 부정해버리려고 합니다. 현 상태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늘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p43


  한편으로는 강신주의 말에 동의도 된다. 페미니즘은 수준 낮은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페미니즘은 기본이니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대한 인식이니까. 그래서 이것은 기본 중에 기본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밥을 먹고 어떤 커피를 마실까를 생각하며 커피가게를 찾아가는가를 고려하는 문제가 아니니까.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가장 낮은 욕구의 문제이니까. 낮을 수밖에.


내가 남자와 동행하여 나이지리아 식당에 들어서면, 웨이터들은 매번 남자에게만 이나를 건네고 나는 무시합니다. 그 웨이터들의 태도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회의 산물일 뿐이고, 나도 그들이 일부러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님을 알지만, 무언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할 때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입니다. 속이 상합니다.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p22~23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프다. 그렇다. 전문가, 학계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난 그들에 대해 전혀 생각 안 한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 50년 지나면 나만 남고, 그들은 아무도 안 남을 텐데”라고 말하는 한 철학가의 이 자만에 내 자존심은 상처입었다. 그의 철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는 건가. 나는 생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그는 내 생존을 한없이 비웃고 있다. 저와 다른 수준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 안 안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젠더 문제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해법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p44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 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p52


  오우! 응고지와의 말을 듣다보면 어떤 철학자는 반드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야심한 밤에 난 분노했다. 하지만 나 역시 반성하지 않겠다.


얼마 전에 나는 라고스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가 그 글을 읽고는 성난 글이었다며, 그렇게 성난 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성이 나니까요.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더해 내게는 희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자신으로 변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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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굴해졌다

 

  겁이 많고 줏대가 없어 떳떳하지 못한 것, 비굴의 뜻이다. 한국학을 전공한 귀화한 학자 박노자는 2014년의 책에서 한국을 비굴의 시대라 일컬었다. 그가 한국의 정권에 대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귀화한 한국인이기 이전에 외국인임이 전제된 것일까. 그의 시선은 타자의 시선일까.

  비굴을 생산한 것이 공포의 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에 반박할 여지는 없다. 파시즘적 이라고 말하는 이 학자의 말이 다른 한국인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의 지위와 안전이 보장이 되었던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언론의 집중포화는 둘째 치고라도.

  저자는 많은 종류의 공포 중 낙오의 공포가 근저에 깔려 있고 경쟁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가? 가만히 있으면 죽어간다. 무기력도 사회적 타살의 원인이라고, 국가가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연대의 부족과 망각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 ‘국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공포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적 게임룰을 연대해서 정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연대가 성립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각자가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물론 우리 모두 공포 속에서 산다는 것, 그러기에 다 같이 연대해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정확한 실체를 대중이 이해한다면 이 지옥을 함께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p49 


  다같이, 함께라는 말은 모든 것의 ‘당연한 해답’처럼 제시된다. 기승전, 함께. 하지만 언제나 제대로 이루어지 못하기에 이토록 ‘함께’를 부르짖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함께의 이유와 목적이 서로 괴리될 때도 있다. 그러니 ‘함께’에 대한 방향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자유주의자는 그들의 이념이 제시하는 규준이 보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이념을 배태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 바깥에 있는 사회에다가 그 규준을 들이대고 준수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저 타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p215 


  저자인 박노자는 사회주의적 삶을 방향으로 제시한다. 물론 사회주의적 삶이라고 자본주의적 삶보다 윤택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시장경제가 사회 구성원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사회주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사회주의가 꿈꾸는 사회는 일단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보는 사회주의란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며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니라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되도록 골고루 평등하게 분배하고, 공동체 안에 민주주의, 상호 배려, 삶의 기쁨이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이다. 제한된 자원을 빨리 쓰면서 소비를 무제한으로 늘리는 것은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동차를 생산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환경을 보존하고, 교통 사고율을 최소화하며, 석유 같은 자원을 보존하고, 개인이 언제나 사회에 의존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p286


  저자가 사회주의 사회를 내세우는 이유는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사회가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중에서도 최고의 자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가 파생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을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한국은 어떤 대안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더 자본주의적인, 더 파시즘적인 상태를 끌어올리는데 열성적이라는 박노자의 비판은 그가 단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도 새겨볼 일이다.

  자본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한 제도적 선택이다. 다함께 전지구적인 위협에 대응하고 ‘인간’을 위한 삶을 부르짖는 흐름에서 한참을 벗어나 뒷걸음질치는 사회에서 비굴해지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보내는 박노자의 안타까움에 가득 찬 비판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 사회주의적 삶은 마냥 ‘이념’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보다 생존에 직접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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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인들 공평한가


 

 자본주의는 도덕과 윤리에 특별히 예의를 두지 않는다. 효율과 생산에 집착하고 불평등을 당연시 여긴다. 그래서 심화되는 불평등에 놀라지 않으며 반대편의 불평등을 향해 혀를 차거나 가끔 동정어린 시선을 보낼 뿐이다. 더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기도 한다. 효율성을 저해하는 모든 것에 불만이 가득 차 있으니까. 그래서 ‘불평등’이 문제라 목이 터져라 외쳐도 허공에 흩날릴 뿐이다.

  그래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 교수는 시장주의자들에 맞춰 그 ‘효율성’의 관점에서 불평등을 비판한다. 불평등을 이야기할 때 원인과 폐해에 집중하며 항상 윤리적 측면에서 옳지 않다고 부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평등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으로는 이성과 감성에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이유다.

  저자는,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의 실패라고 주장한다. 불평등이 경제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불평등이 시장경제의 활성화의 필요악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불평등이 제대로 자리잡으면 정치·사회의 여타 제도들 역시 안정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평등의 책임은 정부 정책에게 있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심각한 불평등과 그의 원인이 시장 왜곡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시장은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행위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부를 빼앗는 행위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불평등의 해결은 항상 경제성장이 해답이라고 주장하지만, 경제성장도 제대로 된 적 없거니와 경제성장을 통해 이익을 보는 집단은 따로 있었고 불평등은 완화되지 않았다. 또한 불평등 완화로 늘 내밀었던 사회복지에 대한 투자도 안전을 위한 정책도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또한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 대신에 분열만이 가득한 상황이 되었다. 특히나 가난한 사람은 늘, 그들 스스로가 게으르고 부족하다는 논리로 불평등의 결과를 개인에게 전가시킨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물리고 효과적인 사회 보호 시스템을 제공하는 내용의 누진적인 조세 정책 및 지출 정책은 불평등의 심화를 억제한다. 반대로, 국가의 자원을 부자들과 좋은 연줄을 가진 사람들에게 몰아주는 프로그램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p121 


  중요한 것은 시장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정치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익히 보아온 대로, 그 힘을 불평등을 완화시키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세계 금융위기에도 심각한 시장실패가 나타나는 상황에서도 항상 정부는, 정책을 “분배”에 집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특정 집단에 힘을 실어주는 법률로 정책으로 노동자들을 제어하는 방식으로 흐른다. 경제학적 논리로 “자본 수익률 격차가 노동 수익률 격차에 비해 아주 작게 나타나는” 데도 그렇다. 정부는 보다 효율적일 수 있는 정책들을 외면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사회복지정책이 효과가 있음에도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소수에게 혜택이 가는 기업지원 제도를 만든다. 세수를 확충하고 효율성을 증진하고 평등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세 제도를 설계할 수 있는데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심각한 불평등은 정치 균형을 잃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균형을 잃은 채 균형을 잃은 경제를 관리하게 되면 치명적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불평등은 대부분 과학 기술과 시장의 힘, 그리고 광범한 사회적 힘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견인하는 정부 정책에서 비롯한 결과다. 바로 여기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이런 불평등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정책을 바꾸면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반면에 이런 정책들을 만들어 내는 정치 과정을 바꾸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절망에 빠진다. p186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할까.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근본적인 가치관에 더욱 부합하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더 많은 기회와 더 높은 국민 소득, 더 강건한 민주주의, 그리고 대다수 성원들에게 더 높은 삶의 질이 보장되는 사회다. 물론 그곳에 다다르기는 쉽지 않다.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 여러 시장의 힘들도 존재한다. 이런 시장의 힘들은 정치, 우리가 집단적으로 선택한 규정과 규제, 그리고 우리 사회 내 기관들이 행동하는 방식에 의해서 형성된다. p432


  전세계적으로 불평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심각한 문제들을 보면서도 지금까지 해온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놀랍다. 과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시장경제가 기회만 주면 결과의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지만, 그 기회가 공평하지 않다는 것, 그 기회에서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체감하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어떤 시스템을 작동하는가는 그 사회가 가진 가치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누구의 지배논리가 어떤 가치를 우선하느냐에 좌우된다. 그래서 한없이 암울한 전망이다. 정치과정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 또 한편으로 정치과정을 바꾸는 것이 무엇이 어렵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정치는 ‘권력’을 잡기 전엔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이기는 하니까.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흔든다. 경제적 불평등과 민주주의 모두를 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고 싶은 사회시스템에 대해서 생각해 볼 일이다. 정부가 만드는 정책과 제도에 대해 따져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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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진 우리


   

  애완의 시대라니. 뒤에 ‘동물’을 붙이는 것이 가장 널리 활용된 예라 이 ‘애완’이란 단어 속에 왜인지 ‘길들임’이라는 말이 내포된 느낌을 받는다. 도대체 무엇을, 왜, 애완의 시대라고 말하는 건가.

  두 명의 저자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자녀들을 애완의 ‘자식들’이라 말한다. 그들은 부모들에 의해 돌봄과 배려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행복하게 이 돌봄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 젊은이들은 조금만 어려워도 힘들어하고 스스로 삶의 길을 나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제껏 부모들이 알려준 길을 걸으며 그 길에서 안정된 삶을 길어 올리지 못하자 부모세대에 분노한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신들이 그 빈곤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해준 것’에 보상받지 못하고 외면당하자 분노한다.


 삶이라는 것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씨름하는 것,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리인’의 삶이란 이런 질문을 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대리인의 삶은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주인의 의도를 이뤄내는 것이니 말이다.

 대리인의 삶은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주인의 의지대로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애완견과 다르지 않다. 애완견은 나이는 먹지만 성장하지 않는다. 애완견은 보살핌은 받지만 존엄의 대상은 아니다.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길러졌으며 그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서적인 지체와 정신적인 미숙함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해보지 못한 채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들의 부모처럼. p72~73


  인류학자 진 리들로프는 “사회에 세대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신호”라고 보았다. “어린 세대가 그 사회의 어른처럼 되는 것에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이미 삶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상실했으며 문화라고 부를 만한 문화가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곱씹으면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이 상황에서 한국은 제대로 된 ‘문화’가, ‘가치’가 전수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부모 세대는 ‘빈곤’으로 가로막혀 인권도 배려도 함께 살아가는 것도 잊은 채 살아왔다. 배불리 먹기 위해 ‘순응하는 국민’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풍요로움을 일구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기꺼이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자신들 또한 전쟁과 빈곤 속에서 보내면서 오로지 ‘궁핍에서 벗어나는 것’에 주시하였기에 궁핍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빈곤을 벗어난 삶에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지 못한 채 제가 살아온 삶만을 고수하며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부모”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살아온 전쟁과 빈곤과 경제성장과 산업화 시대라는 ‘애환의 역사’에서 그들은 국가의 착취에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을 원한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가 원한 것은 더 많이 가진 삶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풍요로운 재산이었지 풍요로운 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더 많이 갖고 싶은 것은 배려심이나 삶의 기품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더 힘센 사람이 되고 싶어 하며, 그런 사람을 숭배하고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이 보호받는다고 믿는다. p22


  우리는, 지금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가. 부모 세대도 자식 세대도 서로에게 겨누는 날카로움만큼의 정신적인 성숙을 지녔다. 결국 모두가 애완의 세대 애완의 자식이 되었다. 애완이 애완을 되물림하며 풍요로운 정신적 문화를 물려주지 못함은 지난 대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 사상적 빈곤이, 과거의 길들여짐에 익숙한 정신이 미래까지 과거 속으로 소환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이고 저자들이 묻고자 하는 바다. 애완은 결코 의문을 갖지 것이므로.


우린 여전히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밖에서는 우리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린 여전히 ‘지배받지 않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자신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개발이나 성장 말고는 미래를 말하는 다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손쉬운 대안이나 전망을 바란다. 결국 우린 낡은 시대의 한계를 모두 확인한 다음에야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p235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가.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은 어디인가. 애완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그것은 애완과 애환의 과거를 끊어내는 일이다. 국가가 ‘우리’를 지켜주는가? 그 답은 명확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 이제, ‘길들여짐’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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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단골 빵집이 생긴다는 건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에 나오는 문장이다.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2008년 이후로 술집에 갈 때면 항상 저 말이 떠올랐고 가끔은 소리없는 입말로 읊조렸다. 그리고 지금은 빵집에 갈 때마다 “동네에 단골 빵집이 생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한다.

  동네에 천연발효종을 사용한 빵집이 생겼다. 발을 멈추게 하는 빵냄새에, 호기심에, 작은 빵집 문을 두드려 한껏 고르고 난 뒤 발길이 그곳으로만 간다. 프랜차이즈 빵집을 전전하던 내게 실로 생애 처음으로 단골 빵집이 생겼다. 얼마 되지도 않아 빵집 영수증이 수두룩하게 쌓였다. 내가 이토록 빵을 좋아했던가 의아할 만큼 빵을 사들이는데, 가끔은 보상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또한 이 빵집에서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 빵집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연발표종 사용에 매주 쉬고 재료가 소진되면 영업하지 않는 방식. 뭐, 이것은 표면적인 것이기도 하니까. 이러한 마케팅은 다른 가게에서도 널리 하고 있으니 차별성이 덜하다 치고. 일단은 빵이 맛있다. 무엇보다 빵속에 들어간 다양한 재료들이 숨바꼭질 놀이 하지 않고 늘 단체로 튀어나온다. 밤, 호두, 크랜베리, 불루베리, 무화과라는 이름이 들어간 빵에 걸맞게 밀가루는 조연이 된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느끼는 “향”만 가득한 빵이 아니었다. ‘건강하고 맛있는 빵’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아 이런 게 빵이구나 싶은 새로움을 안겨 주었다. 참, 빵이 뭐라고 이렇게 먹을 때마다 감탄해대다니! 

  와타나베 이타루는 이스트에 물든 빵이 아니라 천연균을 찾아 자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건강하고 착한 빵을 만드는 빵집 주인이다. 그는 자신이 빵집을 운영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라는 독특한 제목으로 들려준다. 이 책 제목이 한참 떠돌며 베스트셀러에 등극할 때, 그냥 자본론에 관한 일본 학자의 해석인가보다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철저하게 자본론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강의였다.

  저자는 농부를 꿈꾸었고 유기농산물 도매회사에서 일을 했다. 하지만 그 회사에서 저자는 부정을 일삼는 회사의 모습에 질려 회사를 그만두었다. 가만 보면 저자 자신도 그렇지만 저자의 환경도 다른 이들과 확실히 달랐다. 그의 할아버지는 천연균을 연구하셨고 그의 아버지는 마르크스를 탐닉하신 분이니까.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저자가 하고픈 일을 하는데 힘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끊임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를 다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 가는가를 생각하는 삶으로 말이다.

  삶에서 사회와 느끼는 괴리감을 적절히 끌어안고 삶의 철학을 잘 영글었고 그 바탕으로 이룬 것이 그의 빵집 <다루마리>다. 그는 혼자서 살아가는 이윤을 남기는 빵집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빵집을 운영하기로 했다.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식, 보다 행복하게 살며 행복한 빵을 만들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와 그의 아내가 함께 이루어가고 있다.

  그의 빵집 운영과 삶의 철학의 바탕이 된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자본론이다. 빵집을 운영하는데 <자본론> 책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기다. 세상 어느 자영업자, 기업가가 <자본론>을 읽으며 경영방식을 세우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다. 자본주의의 경제와 경영 체계를 뒤집고 마르크스주의의 자본론을 깨치며 이윤을 남기지 않는 빵집을 만들었다. <자본론>이 이렇게 적절한 사례와 함께 이야기되니 동화책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렵다, 불온서적이다라는 마르크스의 책이 고운 때깔을 맛난 듯 이 책은 초등학생들도 부담없이 쉽게 읽고 이해될 것 같다.


자연계에서는 균의 활약을 통해 모든 물질이 흙으로 돌아가고, 살아 있는 온갖 것들의 균형은 이 '순환' 속에서 유지된다. 자연의 균형 속에서는 누군가가 독점하는 일 없이도, 누군가가 혹사당하지 않고도 생물이 각자의 생을 다한다. 부패가 생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연의 섭리를 경제활동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각자의 생을 다하기 위해 배경에 부패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부패하는 경제는 우리 각자의 삶을 온화하고 즐겁게 만들어주고, 인생을 빛나게 해주지 않을까? p13


  이 책 속에는 반복적으로 ‘부패’라는 단어가 나온다. 저자가 말하는 부패하지 않는 경제는 이윤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이윤이라는 목적을 위해 어그러진 노동시장을 만들지 않는 것. 억압과 착취가 난무하는 노동환경, 비리가 폭발하는 경영을 하지 않는 것.

  하지만 그가 허용하는 부패가 있다. 그는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균을 이용해 빵을 만든다. 그것은 부패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균은 ‘부패’와 ‘발효’의 순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이윤을 위해 사용되는 인공배양균 이스트가 빠른 속도로 많은 빵을 만들어낼지는 모르지만 결코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스트로 만든 빵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행복은 한정적이다. 특정한 이에게로 집중된다. ‘부패하지 않는’ 빵, 그런 음식은 결국 이 자연을 조화롭게 유지시키는데 악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당장의 허기를 채워주고 취약한 취업환경에서 일자리를 제공해 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영양없는 먹거리와 일자리일 뿐, 인간의 존엄을 엎어치며 공존하는 삶을 밀쳐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돈을 쓰는 방식이야말로 사회를 만든다. 자리가 잡히고 균이 자라면 먹거리는 발효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소상인과 장인이 크면 경제도 발효할 것이다. 사람과 균과 작물의 생명이 넉넉하게 자라고 잠재능력이 충분히 발휘되는 경제. 그것이 시골빵집이 새롭게 구워낸 자본론이다. 빵을 굽는 우리는 시골 변방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혁명의 태동을 오늘도 느끼는 중이다. p232


  동네 빵집에도 쿠폰을 발행해준다. 그렇다고 쿠폰을 채워 공짜빵 하나 더 먹으려고 줄기차게 이 빵집을 찾는 건 아니다. 프랜차이즈에서는 언제들 활용가능한 할인카드가 있으니까. 화학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은 천연발효종과 유기농밀가루를 사용하는 빵집이라서, 그저 재료를 아끼지 않고 쏟아붓는 빵집이라서 아주 좋은 향이 난다. 난 이 집이 다루마리 빵집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루마리 빵집처럼 경영하는 빵집이 있다면, 소비자로서 이 집 빵을 사먹는 일 또한 부패하지 않는 경제를 만들어가는 일에 힘을 얻는 일이라 생각하며 이 빵집엘 간다. 


와타나베 이타루,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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