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에 깃든 말


파과, 구병모, 자음과 모음, 2013..


  제목을 보고서 폭력적이고 잔인한 내용일 거라 짐작했다. 작가가 시작부터 써놓은 으깨진 과일을 두고서도 전혀, 과일쪽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여성을 꽃과 과일에 빗대어 좋은 이미지로도 나쁜 이미지로도 표현하고 있으니까. 청소년 소설로 등단한 작가지만 그 책에서도 이미 폭력에 관한 판타지소설을 전개했기에 이 제목 아래 실로 적나라한 폭력과 마주하는 것은 아닌가 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적중했다. 폭력은 있었다. 다만, 주인공이 폭력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행하는 쪽이었을 뿐. 단순 폭력행사자가 아니라, 킬러다. 그리고 그 일을 벌써 45년이나 해왔다. 이름마저도 각이 반듯하게 진듯한 느낌의 ‘조각’이다. 그녀는 그 일을 방역업이라 불렀다. 조각이 이 일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당연 폭력을 당한 시점부터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외국인 병사로부터 당하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다가 그녀가 가진 ‘힘’이 더 컸던 탓에, 전격 스카웃 제의를 받은 것이다.

  이 소설은 미드에서나 볼 만한 65세의 여성노인이 여전히 현장에서 킬러 활동을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방역업의 대모로 자리잡은 조각 여사의 일대기라고 할 것이다. 다만 한창 전성기로서의 활동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쇠해가는 신체로 인해 겪는 심리와 현재의 상황에 더 방점을 둔다. 어쨌든, 외롭고 고단한 삶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부탁받은 이의 목숨을 제거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지만 조각의 삶은 늘 외롭고 고단했다. 자신보다 30년이나 어린 의사에게서 연정을 갖게 되는 것까지, 우리나라 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님엔 분명하다.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각 여사가 처리한 인물만해도 한둘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 여인, 몸짱대회에 나가면 우승할만큼의 탄탄한 신체를 가졌다. 비록 이제 늙어가고 있지만.

  대체로 킬러를 다룬 많은 이야기들에서 킬러는 남자이고 특정한 ‘여인’으로 인해 감화된다. 그리하여 삶의 변화를 겪거나 죽게 된다. 그 죽음은 자의적 선택이고 그 선택은 마음을 주게 된 여인의 안위를 위해서인데, 여기 소설 속 주인공 조각 여사도 그 길을 그대로 간다. 그리고 조각 여사의 안티는 그녀가 제거했던 이의 아이로 커서 복수를 노리는 뭐 그런. 성별을 바꾸면 익숙하게 영화속에서 보아 온 킬러의,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따른다.

  소설 속에서 놀랍게 기억되는 장면은 조각 여사의 생사를 알듯 말듯한 사건 이후에 등장한 네일아트를 받는 장면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단장한다. 원장과 직원의 자부심처럼 그것은 케어이고 아트이다. 아무에게도 보여 줄 리는 없지만, 언뜻 누군가 보게 되더라도 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수군댄다 해도 하등 상관없을 그 손톱. 그 단장을 조각 여사는 마음에 들어한다.

  그녀가 만족스럽게 네일아트를 바라보며 거리를 지날 때 정작 그녀에게 매니큐어를 해준 막내 직원은 훌쩍이고 있다. 그 아트를 무려 반값으로 계산했다고 욕을 먹은 탓에. 막내 직원의 변명이 압권이다. 그 손님, 그러니까 조각 여사의 왼손이 없었다고.

  일단 주인공이 킬러란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직업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제쳐두고서 소설을 보자면. 그래서 왜 파과인가.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p332~333

 

  소설은 破果의 이미지를 간간히 드러낸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조각이 바라보는 흐물어져 형체를 알기 힘들어진 과일처럼. 이 이미지는 그렇기에 애잔함을 상실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단어 속엔 또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으니 빛나는 시절, 순간을 갖는다.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서처럼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빛나는 순간이란 깨지고 사그라지는 순간에 빗대어 더욱 찬란하기 마련이니까.

  나아가, 단어가 가리키는 의미가 전혀 다르게 적용되는데 놀란다. 같은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여자 나이 16세, 남자 나이 64세를 가리킨다는 파과의 사전적 의미를 들여다보면서도 의미의 어원이 형성된 것을 보면서도 의문이 더해진다. “‘瓜’ 자를 파자(破字)하면 ‘八’이 두 개가 되는데” 이를 더하면 16이라 여자는 16세이고 곱하면 64가 되기에 남자는 64세를 가리킨다는 설명이 와 닿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이것의 기준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왜 여자는 더하고 남자는 곱해야 하는지. 빛나는 순간조차도 남자와 여자의 나이가 상이하다는 뭐 그런 말인가. 여자의 빛나는 순간은 16세이고, 남자는 64세라는 말인가. 여자는 16세가 되면, 남자는 나이 64세가 되어야 비로소 으깨어진 나이란 말인가. 옛날 결혼적령기라고 적힌 것에서 피식 웃음마저 나온다. 이렇게도 사용하면서 남자 나이는 왜 64세라고 굳이 만들어내는 것인지.  

  파과의 의미를 破果로 보느냐 破瓜로 보느냐에 소설의 의미를 풍성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냥 파과라는 단어에 푹 담겨진,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또한번 그냥 흘려보지 못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단어들에 매여 특정한 나이에 습관적 우울증이 배가되는 것도 같다. 우리나라는 나이에 너무 민감하다. 내가 그런가.

  흠집이 나든 으깨어지든 인생이 흐물어지는 시기든, 어느 한때 빛나는 시절은 있을 것이니 그 시절을 기억하고 기억하며 그러나 그 시절에 집착하지 않는 한때를 살아나가야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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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존재들


아무도 아닌, 황정은 저


 

독자들이 좋아하는, 황정은 작가의 세 번째 단편집이다. 많은 작가들이 고유의 문체와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는데 황정은 작가 역시 단연코 그 독특함에서 빠지지 않는다. 장편이고 단편이고 할 것 없이 느낌상 ‘아, 이것은 황정은의 글이야’라고 알아챌 것 같으니, 작가의 스타일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 그 스타일을 지지받고 있다는 점에서 얼마나 축복받은 작가인가 싶다.

  이 단편집에 흐르는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제목이 드러내고 있는 ‘아무도 아닌’이라는 미지칭의 단어처럼 관계의 단절과 고립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재조차 흐릿해지는 누군가를 보는. 하지만 그들이 흐릿해져가는 과정은 너무도 명확하게 주위에서 보고 들은 일이라, 또한 ‘나’가 겪는 일이라 슬프고 섬뜩해지기까지 하는.

  작가는 단편집이 시작하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무도 아닌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이라 읽는다고. 아무도면 어떻고 아무것도면 어떻게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너무도 큰 외면이 될 것이고. 말 한마디의 차이가 갖는 놀라움을 의미를 생각한다면, 작가의 이 말로 인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단편집의 분위기로 차곡차곡 걷게 될 것이다. 아무도와 아무것도를 연이어 되새김질하면서.

  그와 함께 각 단편집의 제목들을 곱씹는 맛이 단편을 읽는 것과 한발 먼저 나간다. 가령 「양의 미래」에서 화자는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p53)"라고 외친다. 여기에서 단편집의 제목이 나왔나 생각하게끔 하는데, 그렇다면 이 「양의 미래」는 왜 「양의 미래」인가하는 물음을 갖는다. 「上行」은 왜 「下行」이 아닌가도 마찬가지로. 그런데 뒤늦게야 「명실」의 제목이 처음에는 「아무도 아닌, 명실」이었음을 확인하고 뒤늦게 「양의 미래」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제쳐두고 「명실」속의 아무도 아닌이라는 외침을 찾아 간다.

  어쨌든, 누구도 아무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 분명 그곳에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삶을 사는 세상을 맞닥뜨린 듯하다. 이것은 주체적 삶인가, 객체적 삶인가 헷갈릴 정도다. 선후가 무엇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그냥 지금의 삶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게 보인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上行」중


  시골에서 고추를 따고 서울로 다시 가는 이야기,「上行」속의 고추밭 주인의 외침처럼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결코 관계맺음에서 물러나 있겠다는 느낌이 가득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글픈 울림이 되어 자리잡는다. 이렇게 살아가다 누군가는 사라질 것이고 마침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들의 미래는 아무일도 없을 것이다. 바로 「양의 미래」 속 화자가 그러하듯이.


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 그 동네에도 아카시아나무가 많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시아가 단 한 그루도 없는 동네에 살게 되더라도 나는 별 불편 없이 잘 적응해갈 것이다. -「양의 미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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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속 푸른 옷을 입은 사나이

 

제비뽑기 The Lottery And Other Stories

셜리 잭슨, 엘릭시르, 2014.

 

  공포와 광기의 작가라 불리는 셜리 잭슨의 대표적인 단편집이다. 연결된 이야기로 읽다가 무언가 아리송함을 발견하여 다시 보고 단편집임을 알았다. 단편임을 알았다면 각 단편을 완료된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였을 텐데, 단편이라 생각지 않아서인지 각 이야기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었다. 묘하게, 그렇게 연결짓는 이미지가 있었다.

   우선 형식에서 마치 장편인 것처럼 각 단편을 5부로 나누어 배열하고 있다. 각각이 독립적인 이야기라면 굳이 이러한 구분을, 분류의 필요성이 있을까. 아마도 이 구분이 읽으면서 장편이라는 연속적인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 요인일 것이다.

   내용 측면에선 셜리 잭슨이라는 작가하면 떠올려지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이다. 저자 특유의 이미지, 셜리 잭슨만이 그려내는 분위기는 무엇일까. 셜리 잭슨을 부르는 또다른 호칭은 마녀. 이 단편집은 1부에서 5부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의 앞장엔 조지프 글랜빌의사두키스무스 트리움파투스를 발췌하고 있다.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각각의 단편들에도 이 마녀재판의 이야기를, 이미지를 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가 지향하는 이야기의 틀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편집의 제목인 제비뽑기는 매년 미국 문학 교과서에 실린다고 하며 평론가들은 작가에 대해 미치광이 아니면 천재라 일컫게 해준 작품이다. 힐 하우스의 유령이 심리적 공포와 광기를 묘사하고 그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이 단편집은 오히려 가벼움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많았다. 어느 한 마을의 사람들이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그 속에, 저자 특유의 조이는 듯한 어두운 이미지가 드러난다.

   또한 작품 속엔 제임스 해리스라는 이름이, 푸른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에 이야기의 연속성을 받아들였던 듯하다. 반복된 이 이름과 이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가 의미하는 것, 이것도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단편을 읽어나갈 때마다, 아까도 이런 사람이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사람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보일 듯 말 듯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각인되어 있을 때마다 작은 소름이 돋으려 한다. 이 이미지와 이름은 마녀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답을 알고 있듯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진 않는다. 단편집마다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으로 문제와 관계된 사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면에서 혹은 스쳐가면서도 꼭 그렇게, ‘을 만들어 버린다. 관계의 갈등을 촉발하게끔, 인식을 전환하게끔 하는 것이다.

   단편 마녀에서처럼 평범하고 온화한 노인의 얼굴을 하고선 아이에게 끔찍하고 폭력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의 모든 단편에서 평범한 모습을 한 채 내뱉는 그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는 글로 읽어도 기가 막힌데, 직접 경험한다고 하면 더욱 놀라우리라 여겨진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맘 속에 불쑥 스며드는 공포와 불안, 이것을 조장하는 제임스, 푸른색 양복의 사나이.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내재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역할을 이들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 중 몇은 이들을 통해 환기된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 욕망을 알아서, 거기에 기대어 황홀함을 느끼기도 한다.

   매우 충격적이면서 놀라운 작품이라 일컬어지는제비뽑기는 마을의 축제에서 시작한다. 축제를 준비하는 이들의 일상의 풍경이 별스럽지 않게 드러나는 가운데 축제의 절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게 눈깜짝할 새, 경악스런 일이 벌어진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며 이뤄지는 제비뽑기 행사. 행사에서 제비뽑기를 굳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왜 제비뽑기가 이뤄지는지 드러난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너무도 특별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아 더 놀라운 사건이다. 표면에 악이라고 달고 있다면 미리 대비라도 할 수 있겠지만 전혀 선한 얼굴을 들이밀어 나타난 공포에 휩쓸리니 더욱 공포와 광기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워너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요즘 젊은 놈들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라니까. 조만간 동굴에서 원시 생활을 하자고, 더 이상 일하지 말자고 주장해댈 거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유월에 제비를 뽑아야 곡물이 금방 익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제비뽑기를 안 하면 별꽃과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게 될 거야. 매년 해왔다고.“ 노인은 성마른 어조로 덧붙였다. ”새파랗게 젊은 조 서머스가 모두와 농담을 해대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하건만.“

어떤 곳에서는 이미 제비뽑기를 없앴다고 하더라고요.” 애덤스 씨가 말했다. 그래봐야 문제만 생겨.” 워너 영감은 단호히 말했다. “요새 젊은 것들이란.” p397

 

   작가 셜리 잭슨은 미학적 의미에서, 문학적인 은유로서의 마녀이외, 실제로 같은 마을에 사는 이들로부터 마녀로 취급당했다 한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호러 미스터리에, 집단 광기에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일 게다. 제비뽑기에 이르러 드러나는 집단적 광기의 덤덤한 표출은 일상의 생활 공간에서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마녀로 덧씌워진 셜리 잭슨의 내면의 반영일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의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 제비뽑기의 모습과 겹친다. 특정한 집단의 논리가 제임스 해리스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한발만 달리 뻗으면 극과 극의 논리를 겪게 되는 광장에선 310,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광장은 90여일 동안 진정한 축제였고 평화로웠다. 토론과 주장이 맞물리며 옳고 그름, 다름을 논의했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누고 다지는 자리였다. 논리와 신념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타인의 신념을 인정하는 방법을 아는 자, 상식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들의 행사는 순조로웠다. 어느 순간 불거진 광장의 이야기에 제임스 해리스가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몇몇의 제임스 해리스들이 등장하여 순수한 신념을 가진 이의 눈과 귀를 닫아버린 것은 아닌가.

   다만, 그들은 보기에도 평범하지 않은 얼굴을 하고, 제 지위를 이용하여 갖은 수단을 동원하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들을 광기에 물들게 했다. 타당한 논리도 아니고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책임을 가진 지위와 역할은 던져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기본도 망각한 채로 제비뽑기를 준비하던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실과 진실을 인지하며 어쩌면 생각을 재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이들의 결말을 방해한 것은 누구란 말인가. 특정 단어만을 반복한 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선동으로 사람들을 공포와 광기에 담가놓는 것이 누구란 말인가.

   오늘도 마녀사냥을 부르짖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 마녀사냥, 마녀재판이 가지는 집단 광기와 공포의 잔혹함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추상적인 공포에 기대어 희생양을 삼은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특정한 이의 이익을 위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마녀사냥이라는 말 속에는 어리석은 이들과 공포를 이용·조장하여 제 이익을 꾀하는 이에 대한 분노도 더해진다. 어쨌든 역사 속 마녀재판이라 불리는 사건들 속엔 분명 억울한 마녀가 존재했다.

   특정인이 부르짖는 이 마녀재판이라는 말은 어디에 닿는 것일까. 마녀재판이라는 말 속에 담긴 억울함이 호도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것은 과연 마녀재판일까. 오래도록 깊이 생각했지만 제비뽑기가 전하는 충격만큼이 전달되지 않는다. 짜증만이 날 뿐이다. 어떤 이들의 사전엔 단어의 정의가 제멋대로, 내 이익대로 쓰여 있다고 생각하게 될 뿐이다. 학력은 학벌은 정의를 바라보는 눈을 키워주지 않는다. 욕망과 탐욕이 공포와 광기와 만났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씁쓸하다. 참으로 기쁜 날인데, 참으로 시원스러운 날인데 조금 속이 편하지 않은 것은 몰상식과 몰인간성을 여전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단어 사전을 들고 권력과 재력으로 무장하고선 그것을 더 연장하기 위해 사람들의 이성을 감정을 툭툭 건드리는 불쾌한 제임스 해리스들, 푸른 양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지금도 광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제비뽑기를 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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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지 않을 테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Four Ways To Forgiveness

어슐러 K. 르 귄 시공사, 2014.

 

   지난달 지구와 닮은 7개 행성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 책이 떠올랐다. 지구와 닮은 행성이란 의미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했다는 발표는 자주 접한 듯한데 후속보도가 없다. 지구인처럼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행성들을 찾는 지구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학적 사실에 대한 발견, SF에서 보듯 지구인의 영토 확장? 지금의 심정이라면 지구가 아닌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프다. 어쩌면 혼란일수도 어쩌면 더 확고한 질서가 잡힐 수도 있을 그곳. 엉망이 된 터전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조금은 진정이 될지 모를 39일이다. 외국도 아닌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하는 일은 발생할까.

   알 수 없는 일인데, 왜 미래 세계에 대해 희망보다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SF 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어슐러 르 권의 연작 단편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은 우주 공간의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곱 개 달을 가진 행성 웨렐과 웨렐의 식민지 행성 예이오웨이가 배경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과학 발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소설 속 행성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유배지의 인상을 준다. 황량하고 문명이 파괴되어 버린 터전으로 보인다. 1995년에 발표한 연작 단편집으로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용서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각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결국 지구 밖 행성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배경이 그러할뿐 인간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민지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권력과 투쟁이 있는, 그리하여 용서와 화해가 필요로 한.

   작가는 SF와 추리소설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수상전력도 화려하다. 이 책 발표 당시 그 의미와 아름다움과 중요성에서 영원히 남을 작품” “미국의 가장 영예롭고 존경받는 작가라는 찬사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매료된 이 책의 이야기는 무얼까.

두 행성은 식민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주인과 노예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은 피부색으로 결정된다. 소유주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검고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이나 피부색이 옅은 사람들을 정복하며 자산으로 취급한다. 자산들이 불리는 이름은 먼지놈’ ‘분필’ ‘흰둥이등이다. 당연, 여성은 구분조차 없는 남자의 자산으로 취급되었고 소유주의 부인이어도 그저 열등한 특권 계급이었다.

 

여기서, 이 세계에서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들은 정부의 일부가 아니에요. 여자들이 해방을 이뤄냈어요.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죽었어요. 하지만 여자들은 장군이 아니었고, 대장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을에서 여자들은 하찮은 존재 그 이하이고, 일하는 짐승이고, 새끼 낳는 가축이에요. 여기선 조금 나아요. 하지만 좋진 않아요. 전 베소의 의료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전 의사예요. 간호사가 아니라. 보스들의 지휘 아래, 전 이 병원을 운영했어요. 이젠 남자가 병원을 운영해요. 이젠 우리의 남자들이 소유주예요. 그리고 우린 언제나와 같은 처지고요. 자산이죠. 이러자고 우리가 그 기나긴 전쟁을 싸워온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특사님? 우리는 새로운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우린 그 일을 끝내야 해요. - <사람들의 남자 , p226~227>

 

   이러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가 만든 식민행성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 관례를 그대로 적용하며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그 방식이란 집단 내 경쟁과 권력 다툼을 통해서다. 기시감이 느껴지듯 그 방법 속엔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동원되고 그 어떤 외부 정도도 차단된다. 식민행성의 여성의 지위는 주행성보다도 열악하다. 심지어 남자노예일지라도 여자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한다.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심지어 살인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다른 점이라면 식민행성이므로 주행성에 대해 끊임없이 독립을 시도한다는 점이랄까. 식민행성의 여성들이 더욱 그 갈망이, 행동력이 강하다는 점이랄까.

 

예이오웨이에서 사람들은 그 자산들을 자유계약인(freedpeople)이라 불렀다. 자유민(free people)이 아니라, 자유계약인이었다. 그때, 내가 읽던 역사책이 말했다. ‘왜 우리가 자유민이 아니지?’라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 <한 여자의 해방 p. 310> -

 

   이러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위한 갈망은 30여년의 해방전쟁 상태를 만든다. 당연 혁명군도 반혁명군도 존재한다. 배신도 음모도 빠질 수 없다. <배신>의 이야기는 전직 혁명대장 압버캄의 이야기다. 그는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의 혁명을 이끌었지만 권력 남용으로 쫓겨났다. 압버캄이 누명을 썼다거나 혁명의 새 시도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상태로 노숙인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전직 혁명대장의 끊임없는 회의를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가 좌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의 존재가 서로에게 필요로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한 여자의 해방>은 웨렐의 노예로 태어난 라캄이 여성 해방운동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식민행성과 노예라는 구조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들 모두는 주어진 체제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글을 읽는 것도 아는 것도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모순을, 불평등을 인식하는 계기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이 노예에게 지식을 배제시키는 이유일 것이고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강압하고 세뇌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혁명이 뭔지 전혀 몰랐다. 에로드가 말해줬을 때는, 예이오웨이라 불리는 곳에서 플랜테이션들의 자산들이 자신들의 소유주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고, 나는 어떻게 자산들이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세상에는 높은 존재와 낮은 존재, 주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소유주와 피소유자가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나의 세상은 쇼메케 영지가 전부였고, 쇼메케 영지는 그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누가 그걸 뒤엎고 싶겠는가?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 아래에 깔려 짜부라질 텐데. - <한 여자의 해방 p283>-

 

   한 인간의 변화는 인지를 통해서 또한 인지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많은 이들이 그저 그렇게 구축한 세상에 대해 변화에 대한 의미조차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 나은 세계를 인식한 순간 그들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꼈고 그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이 소설 속에서 그 방법은 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다.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오해와 반목을 풀어가고 함께 혁명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해야 할 것,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혼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가며 이해의 소길을 구가하려는 모습들은 사랑이라는 뻔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던 이들이 그 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은, 갈등은 결국 인간들의 편협한 사고때문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마침내 그들은 새로운 행성을 만들어 가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한번에, 단번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점진적인 변화의 형태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변혁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야 할 일이다. 바뀌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에도 헌법 수정안이 이루어졌다.

 

헌법 수정안은 예이오웨이 해방 18년에 투표에 부쳐졌고, 거의 비밀투표였다. 여기까지의 사건들, 그리고 그 뒤의 사건들은 대학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세권짜리 <예이오웨이의 역사>에서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말해달라고 부탁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처럼, 나 역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두 세계의 역사, 우리 평생의 위대한 혁명들, 희망들, 우리 종족의 끝없는 잔학한 행위들 속에서, 한 남자의 그리고 한 여자의 사랑과 욕망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작은 것이다. 하지만 작은 열쇠가 문 옆에 있을 때는 그 문을 연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문은 절대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의 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잃거나 자유롭기 시작하고, 바로 우리의 몸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예생활을 받아들이거나 끝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이제껏 나와 함께 자유롭게 살아왔고 자유롭게 죽을, 내 친구를 위해. - <한 여자의 해방 p372>-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을 보았지만, 난 용서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용서와 사랑은 무조건 베풀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위치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용서가 필요치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책 속의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시대에 과거회귀가 웬 말인가. 우리 사회가 한편으로는 심각한 무지와 문맹의 나라라는 것을 절감하는 때이다. 글자를 안다고 문맹이 아니랄 수 없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장의 의미를 아는 일이다. 여전히 지식이란 것을 학력을 통해 갖추었으나 무지와 문맹이 가득한 사람들의 쇼를 보며 생각한다. ,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책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무지와 문맹을 바탕으로 한 탐욕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고.

 

무지는 자신을 사납게 방어하고, 문맹은 나도 잘 알듯 날카로워질 수 있다. - <한 여자의 해방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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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 같은 시와 삶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3월의 꽃샘추위가 시작되었다. 눈이 내린 곳도 있다. 남쪽 지방에선 겨울에도 보지 못한 눈이 삼월에만 연달아 내리던 때도 있었다. 3월은 봄인데, 꽃샘추위라고 부르기엔 괴상한 날씨, 그것은 점점 이상기후라 불렸다.

    3월이 봄이란 걸 안다. 그만큼 3월 초엔 꽃샘추위가 있을 것을 안다. 추위는 매섭지만 꽃샘추위라는 귀여운 말에 가려, 곧 따쓰해질 것을 알아서인지 놀랍거나 불안하거나 하지도 않다. 봄이라는 따스한 기운은 그렇게 마음 속에 스며 새겨지는 모양이다. 3월만큼, 봄이라는 느낌은 2월에도 느껴진다. 2월이라는 달력을 보는 순간부터 벌써 봄을 느끼며 상승한 기온과 좀더 따뜻해진 햇살을 느낀다. 그런 2. 이제는 2월하면 한 작가가 떠오른다. 실비아 플라스. 안타깝게도 이 강렬한 이미지는 211일 생을 마감한 실비아 플라스의 생애에서 온다. 다른 어떤 말도 작가의 작품 구절도 아닌 작가의 생애에 대한 한 문장. “그날 영국은 100년 만에 가장 혹독한 추위였다.”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고. 봄에 느끼는 꽃샘추위의 느낌일 거라고 그날을 생각한다. 211일의 날씨가 실비아 플라스를 삼키고 추위보다 더한 고독와 배신과 우울이 작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날.

    천재 시인이라 불리는 예술가의 비극적 마지막이 강렬하게 박혔지만 작가의 시 또한 강렬한 이미지로 사로잡는다. 실비아 플라스 시전집은 1956년 이후에 쓴 224편의 작품과 1956년 이전에 쓴 시 가운데 50편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실비아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남편이었던 테드 휴스가 엮은 것이다.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들은 지운 채 실비아의 작품을 정리했다고 한다.

   실비아는 문단에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실비아의 시가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시대, 여성에게 가해진 이 모순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비평가들이 실비아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시의 언어가 아닌 개인적인 경험(아버지의 죽음과 자살 시도, 남편과의 이혼 같은 것)과 연계하는데 비해 1980년대 페미니즘 문학비평가들은 플라스의 시에 나타난 분노의 목소리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여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재평가하여, 여성 문학의 신화혹은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부각한다(p657).”

   실비아의 시를 읽어 내려가기는 쉽지 않지만 이미지만큼은 강렬하다. 전체적으로 음울한 잿빛 이미지를 심어준다. 시를 읽다보면 반복적으로 뇌리에 남는 단어들, 울분과 결의의 소리들에 명징한 자의식을 찾고자 하는 실비아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쨌든 몇 년을 같이 산 전남편이자 시인인 테드 휴스는 실비아의 시쓰기에 대해 말하길 내면의 상징과 이미지에 큰 뿌리를 두고 있다했다. 실비아의 내면 속에 가득찬 것은 고뇌일까. 어릴 적부터 시를 쓰던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내면을 찾아들어갔을까. 외적인 사건들이 실비아의 생애에, 시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아버지와 남편과의 관계들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오로지 그것에 갇혀 있지는 않을 실비아의 시는, 읽고 있다 보면 마음이 힘겨워진다.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아빠, 이젠 돌아누워도 돼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지.

그들은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 아빠

 

   실비아 플라스의 대표작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더불어 충격을 안겨준 아빠의 구절이다. 201640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아침의 문은 실비아 플라스의 이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나치와 유대인으로 설정하며 더 극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삶에 대한, 사물에 대한 시선. 내면의 갈등은 끝이 난 것인가. 오래도록 길들여지고 관념화되어 버린 믿음이 조각나는 것, 감정과 이성을 끝없이 되뇌며 마침내 분노와 울분으로 내뱉는 말. 신화화된 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신화를 쌓는 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 삶의 고됨이 고통이 울분에 찬 말로써 해소될 수 있을까. 갈등, 공포, 고뇌, 울분들. 그 모든 것들을 내면속에 넘치도록 담고서 삶을 지탱한 실비아의 자의식은 시대와 실비아를 둘러싼 관계들과 그녀 자신의 관념의 산물이다. 실비아가 지향하는 삶은, 자아는 어디로 향하기를 원했을까.

하얀

고다이바처럼, 나는 벗어버린다.

과거의 유물과 과거의 핍박을.

 

그리고 이제 나는

바다의 광채 같은 밀밭을 휘젓는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벽에서 녹아내린다.

그러면 나는

화살이고,

 

새빨간 눈,

아침의 큰 솥 안으로

자살하듯 돌진해서 뛰어드는

 

이슬이다.

- 에어리얼

 

   실비아의 생이 유동치지 않고 평안하게 머물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인해 못내 울분을 토하고 있을 듯하다. 남겨지게 만들어버린 실비아의 아이들과 더 풀어내지 못한 울분들. 벗어버렸을 그 에어리얼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아니, 절반만 드러낸 채 시인은 떠났다. 시인의 생애도 시인의 언어도 꽃샘추위처럼 서늘하고 매섭다. 또한 그 한기가 청아함을 비장미를 씁쓸함을 준다. 서린 말들이 한없이 이어지는 시어들 속에서 푸욱푹 눈발 속에 빠지듯 실비아 플라스의 시 속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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