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 필요할 때


쇼펜하우어 문장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훈, 2006.


 쇼펜하우어 하면 염세주의 철학자의 대표라 기억된다. 이 철학자의 문장론은 얼마나 다를까를 생각하며 책을 펼쳤는데, 상당히 간결하고 쉬운 글이었다. 자연적으로 철학자들의 책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부터 갖고 있던 것을 말끔히 씻어주듯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은 사색과 글쓰기, 독서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담고 있는 글이다. 더 정확히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집 <어록과 보유>에서 사색, 독서, 저술과 문체에 관한 부분만을 역자가 추려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이라 붙인 것이다. 명언처럼 명료한 생각의 전개가 돋보인다.

  쇼펜하우어는 사색하는 인생은 남다르다며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사색이 단순한 신변잡기적 생각의 흐름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 사색하는 정신은 나침반과 같고, 사색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이 사상이라고 말한다. 단, 독서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 것이기에 독서보다 더 한발 나아간 행위가 사색이고 사상가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색을 통해 사상가가 되었다면 사상가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는가.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사상가의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가능한 순수하고 명확하게, 간결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단순함이야말로 진리의 특징이며, 모든 천재들 또한 단순함을 사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름다운 문체는 사상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시대를 농락하는 사이비 사상가들처럼 문체를 통해 사상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체는 사상의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졸렬한 문장이 탄생하는 원인은 문체가 졸렬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사상이 졸렬하기 때문이다. p105~106


   글쓰기는 생각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글쓰기는 글쓰는 기법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생각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독서와 생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만 마냥 독서를 통해서 생각의 정리가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쇼펜하우어는 사상가의 글쓰기와 문체를 이야기하면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헤겔의 저작물에 대한 비판을 제법 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헤겔의 글은 ‘졸렬함’의 표본이 되는 모양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점차 독일어의 문법 체계를 파괴하는 글쓰기 형태가 이뤄지는 것에 상당히 분개한다. 언어의 삭제와 왜곡된 용법이 언어의 의미를 침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독일어의 핵심이랄 수 있는 완료형 시제의 삭제는 모국어를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야만어로 전락시키게 될 거라며 제대로 된 문법의 교육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의 삭제가 글쓰기의 명료함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오로지 생각의 힘으로 이뤄내야 할 것을 문법의 삭제를 통해 행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표현을 정확하게 하는 힘, 즉 수단이야말로 모국어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힘과 수단에 호소할 때 비로소 사상은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으며, 작가의 미묘한 심리형태까지 정밀하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름답고 생기 있는 고전적인 문체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가리키는 말이다.p133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철학이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사색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흔들림없이 명언처럼, 힘있고 강건했다. 그러나 언어와 문법의 당시의 글쓰기 체계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격앙되고 설명적이었다. 구체적인 단어와 문법체계를 들어가며 독일어의 문법 파괴 현상에 대해 지적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사색과 글쓰기, 문체를 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색과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명확했다. 그렇기에 이 세 주제를 관통하는 작가의 사상 또한 깔끔하고 명쾌했다. 독서도 필요한 일이고 중요하지만 그것은 타인의 생각을 읽는 일이므로 쉬운 사색의 방법이다. 제 사상을 다듬는 일은 독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좀더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색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색을 통한 글쓰기는 명확한 사색을 통해 제 사상을 잘 정립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것이 쇼펜하우어가 전하는 문장론의 핵심이었다.

  독서가 타인에게 제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지금 시점에서 와닿는 것은 사색은 제쳐두고 독서에 매달리는 행위가 지극히 편안한 길만 가려는 방법이란 말 때문이기도 하다. 지극히 그 심정으로 독서에 매달리고 있었다. 독서가 가장 쉬웠어요. 그러나 지금은 내게 사색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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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한명, 김숨 저, 현대문학, 2016.


  김숨 작가가 사회성 짙은 문제를 다룬 소설을 최근 잇달아 출간되는 것 같다.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L의 운동화도,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이 책 「한명」도 그렇고. 두 작품 모두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특히 「한명」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느낌이 강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대사에, 소설 속에 녹여 넣어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함을 넘어 읽는 것을 두렵게 만들게 한다. 소설의 대사만큼이나 각주가 많은 이 책. 그 말들이 모두 생존자들의 증언이라는 점은 소설이 허구라는 기본을 뛰어넘어 현실이 소설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명」.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마지막 한명이 남은 시점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고 했다. 마지막 한명.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간은 다가온다. 오늘도 최고령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99세, 한많은 세월을 마지막까지 한을 쌓으신 채 말이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38명이라 한다. 모두들 연로하시고 병세가 가득하며 가슴에 한이 많이 쌓여 있다. 그리고 정부로 인해 그 풀릴 수 없는 한이 분노가 되어 치솟는 상황을 여전히 겪고 계신 분들이다.

  선거 때면 찾아가 악수하고 대책 필요성을 강조하며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정치인들은 권력을 휘어잡고 난 이후엔 나 몰라라 하며 그들이 엎드려야 할 대상이 따로 있음을 부끄러움도 없이 보여준다. 얼마 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한다며 구속 판결이 내려졌다.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이라면, 나라로 인해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삶이 피폐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대우는 왜 그런 것인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왜 나라의 안전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가. 한일 위안부 협상타결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것인가, 그리하여 나라의 안전이 해결이 되는가, 성조기와 함께 일장기도 들고 휘두르고 있는 상황 아닌가. 아, 이 나라의 안전을 지켰어라고 자랑차게 힘껏 흔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소설은 작가가 엄청 빨리 썼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아니다 싶기도 했다. 빨리 썼다는 생각이 든 건,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 없이 생생한 증언이 너무도 넘쳐 나기에 쓸 것이 많아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싶은 건, 그 많은 자료를 읽어나가는데 그리고 그 증언들을 다시 소설로 옮겨 적는데 무척 힘이 들었겠구나 싶어서였다. 그 말이, 글이 가진 내용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힘에 겨워, 마음도 엄청 무거웠겠다 싶었다. 그러니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했을까.


그녀는 티브이 받침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백지를 꺼낸다. 반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쓴 글자들이, 억눌려 있던 스프링처럼 앞다투어 튕겨 오른다.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문장에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p236


  오래도록 전쟁터에서 종군 위안소에서 일본인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불리다가 마침내 끝장에서야 제 이름을 찾은 풍길. 마지막 한명이 남아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제 이름마저 제대로 찾지 못해 끙끙 앓는 세월을 살다가 자신도 피해자라고 이제 외치는 한명. 이 땅에 풍길 할머니 같이 "나도 피해자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더 계실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 중에 위안부는 20만 명이 넘는다 했으니, 그리고 그들이 전쟁에 지면서 증거를 없애듯이 무참히 죽여 버렸다 했으나…….

  동네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무참히 끌려가버린 풍길. 그런 소녀들이 많았다. 그 수만명의 피해자들 중엔 이유도 없이 어깨를 잡힌 소년들이. 그리고 나라는 앞장서서 소녀들을 팔아 치우기도 했다. 전쟁은 그러했다가 아니라 나라는 그러했다. 그렇게 내버려두었고 지금도 그렇게 내버려두고 있다.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가치가 있는 나라는 그 가치를 뒤바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소녀상 문제에 민감한 일본 정부의 반응에 더 예민한 한국 정부와 그리고 지자체가 더할나위없이 몰상식과 비상식의 표상이지만 아무런, 반응도 관심도 없다. 목적하는 바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길 없어 선거라는 이 휘황찬란한 분위기 속에 암울과 비참한 기분으로 서 있다. 한 개인으로서 이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런 화도, 분노도 부끄럽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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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상하군요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김정선 저, 유유, 2016.


  이 책의 핵심은 문장을 쓸 때의 주의해야 할 표현이다. 그런데 그런 가르침은 한쪽에 제쳐두고 함인주 씨와의 메일 내용이 더 흥미를 끈다. 함인주라는 작가의 존재를 확인해 볼 정도로 궁금했고, 메일의 내용이 더 끌렸다. 그렇게 난, ‘적의를 보이는 것들’이란 문구를 들어, 재밌고 기억나게 문장 표현을 다듬는 법을 알려주려는 저자의 핵심 내용보다 부분 내용에 더 집착하는 독자가 되었다. 사실 저자가 짚어 주는 내용들은 낯설지 않은 익숙한 내용이었다. 다만 고쳐지지 않을 뿐. 머릿속에 잘 정리된 교정본이 들어 있다 한들 문장쓰기 습관을 고치긴 쉽지 않다. 좋은 말로 습관이고 내 문장의 특성이라며 감싸고 있을 뿐인. 그래서였을까,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여전히 문장 다듬기의 실질적인 내용보다 메일 내용과 그들 만남이 더 생각난다. 그리고 애당초 이 글의 핵심 역시도 메일의 내용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실화인지, 허구인지를 생각지 않고 나중에서야 메일 내용은 허구였던가 생각했다. 메일은 교정 작업을 하는 저자에게 교정을 받은 번역가가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메일을 보낸 데서 시작한다. 형식적으로 답변하다가 메일의 주인공 함인주의 문장에 관한 질문이 지속되자 저자는 실제 교정작업지를 살펴보며 함인주의 문장을 분석하고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함인주는 카프가의 단편 「유형지에서」를 거론하는데, 끌림의 주된 요인이 이 부분이었다.


소설에 나오는 기계는 실제 비인간적으로 작동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기계가 이루는 세계에는 나머지가 없기 때문이겠죠. 조립을 끝낸 뒤에 볼트나 너트가 남는다면, 또는 부품은 만지 않더라도 빈자리가 남는다면 기계로서 작동할 수 없을 겁니다. 나머지를 갖지 않고 빈자리도 없는 기계는 이처럼 자기 완결적이라 치욕을 알지 못하죠. 치욕이란 스스로를 나머지나 빈자리로 여기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p124


  문장이 이상한지, 표현을 제대로 하도록 도와주는 문장 교열책을 들여다보는 이유 자체도 그것 아닌가. 내 문장을 갖고 싶은 이유, 내 문장이라 부를 글을 잘 쓰고픈 욕구. 그러나 문장의 어색한 표현이라 하며 밑줄 좌악, 빨간 줄 좌악 그어 수정하다 보면 그 문장들은 하나같이 동일한 문장이 되어 한곳에 집합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과장이겠지만 이에 대한 기억이 분명 있다. 학창시절 교편에서 한 원고를 두고도 문장을 교정하는 이에 따라서 수많은 문장으로 교정되어 나타난 기억. 교정자 각각은 자신만의 문장으로, 문장의 어미들을 수정해 놓았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함인주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게 할 요소인 것이다.


언어가 개인의 것일 수 없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발화는 개인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문장 또한 개인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나 문장에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에는 ‘개인의 목소리’가 들어 있지 않더군요. 선생님이 손보고 다듬는 문장은 분명 누군가 개인이 쓴 것이고 따라서 그 누군가의 목소리를 담고 있을진대 선생님이 손보고 다듬은 뒤에도 그 목소리는 그대로 살아 있는 건가요? p118

    

  글을 쓰는 개인이 자신의 문장을 수정하면서 점차로 자신만의 문장을 만들어 나가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선 타인이 쓴 말을 써보기도 하고 내 표현을 정확한 문장표현법어 맞추어 재단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는 중에 타인에게라도 글을 보여줄라치면 쑥스러움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이 나라에서는 메일을 쓸 때조차 상대방이 메일의 오자를, 맞춤법을 확인하는 건 아닌가하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까, 이 글 속 문구처럼 ‘치욕’을 겪을까 전전긍긍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글쓰기에서 멀어지기도 할 것이고, 글쓰기가 즐거움보다 두려움이 되어 버릴 것이다.

 

기계적이라는 말은 반성과 회의를 모른다는 말이고 따라서 ‘자기’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니까요. 합의의 세계는 바로 이런 기계의 세계일 겁니다. 합의된 내용보다 형식을 그 생명력으로 삼음으로써 참여자들을 나머지로 만드는 세계 말이죠.

 말과 글 또한 합의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라면 ‘나’는 말을 하고 글을 쓰면서 늘 치욕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합의된 대로 말하거나 쓰지 않으면 내 생각이나 의도는 물론 느낌조차 표현할 수 없다는 치욕 말입니다. 끊임없이 말하고 쓰면서도 끊임없이 그 말과 글의 세계에서 나머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치욕……. p126~127


  내 문장을 갖는 일. 저자의 말대로 ‘최대한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좋을 일이지만 문장쓰기는 늘, 그렇게 문장표현이라는 굴레에 가려 내용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형식적 두려움, 그러니까 합의된, 기계적 세계를 탈피하는 일조차도 그것을 수없이 겪은 후에야 이뤄질 세계가 될 지 모른다는 것이다. 글이, 문장이,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도 타인의 눈을, 손을 거쳐야만 비로소 인지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만큼 이미 인이 박혀 버린 내 표현과 문장들에 ‘치욕’을 찾는 일은 기쁜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양가감정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이 책이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많은 이들이 글쓰기에 갖는 관심을 반영한 것일 게다. 그 많은 독자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아쉬운 점은 교정과 교열에 관한 책임에도, 출판사가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책의 편집이, 글자체가 깔끔하지가 않다. a4에 쓴 글을 인쇄한 듯한 성의없는 출간으로 느껴졌다. 쓸데없이 페이지를 늘이는 책도 맘에 들진 않지만 최소한의 책의 외면도 생각지 않는 출판도 맘에 들진 않는다. 독자들에게 훨씬 더 읽기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편집이 그렇게도 이상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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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에 가고 싶다


위저드 베이커리, 구병모, 창비, 2009.

 

   이 책에선 빵냄새가 난다. 먹어보지 못한 빵이다. 이내 중독된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선두로 우리나라에도 판타지 동화가 급격하게 등장했다. 청소년 소설에서 판타지의 등장은 위저드 베이커리가 처음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위저드 베이커리가 가진 장르적 특성은 다양하다. 다양한 종류의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빵처럼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가 가득하다. 그러고보니 이 빵이 만들어진 것이 벌써 10년 전이다. 10년 전 나온 이 빵은 요즘에 먹어도 전혀 옛날이야기 느낌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신선하고 풍부한 맛이 흘러나온다.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제목이 환상적인, 예쁘고 아름다운 느낌의 마법의 세계로 안내해줄 거란 이미지는 시작부터 착각이었다. 재혼 가정의 소년이 겪는 갈등이야기가 시작인 듯 보이지만 소년은 이전부터 더 잔인한 파장을 견디어 내는 중이었다. 소년이 겪는 일 또한 판타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소년의 엄마는 자살했고, 자살 전 엄마는 소년을 낯선 길에다 버려두기까지 했다. 아빠는 재혼하고 새엄마와 의붓 여동생 무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잘 살아갈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소년은 새엄마와 지속적으로 갈등하고 마침내 어린 동생 무희의 성추행범으로 몰려 집을 뛰쳐나온다. 그를 성추행범으로 지목한 것이 동생 무희의 손가락이다.

  소년이 도망쳐 들어간 곳이 바로 ‘위저드 베이커리’다. 그곳엔 빵집의 분위기만큼이나 수상한 점장이 빵을 굽고 있다. 주문생산제다. 고객이 원하는 빵을 생산해낸다. 그 빵의 종류를 조금 살펴본다면 ‘악마의 시나몬 쿠키’ ‘체인 월넛 프레첼’, ‘부두인형’ ‘타임 리와인더’ 등이다. 이 빵들은 모두 마법의 빵이다. 고객의 욕망이 반영된 빵, 원하는 이를 사랑에 빠뜨리게 하거나 상대를 고통스럽게 만들거나 시간을 되돌리거나 하는 힘을 지녔다. 소년은 빵집에서 기거하며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인간들을 만난다. 점장은 도대체 이런 빵을 왜 만들어 내는가 싶지만, 점장은 제 욕망에 기인한 마법의 빵을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내린다.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은 채 소년은 이 빵집에서 위로와 충고를 얻는다. 언뜻 보기엔 소년의 집이나 빵집이나 기괴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소년이 선택하는 빵은 어떤 것일까. 이 다양한 빵 중에, 마법의 힘을 지닌 빵 중에서 소년의 욕망과 맞닿아 있는 빵은 무얼까. 삶의 위안을 얻게 된 빵집에서 소년은 계속 머무를 수는 있는 걸까.

  소년이 빵을 선택한 틈도 없이 점장은 소년에게 빵을 선물한다. ‘타림 리와인더’. 소년은 이 선물을 받아들고 어떤 시간으로 되돌아갈까. 소년에게 가장 힘든 시간의 어느날로 돌아간다면 그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면 그 시간은 언제가 될까. 무희가 자신을 지목했을 때일까. 이휘재가 나왔던 인생극장처럼 “그래 결심했어”의 순간, Y or N의 두 가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년이 빵을 먹으려는 순간은 역시 그 순간, 새엄마와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무희와의 일이 있던 그 순간이다. Y가 빵을 먹는 것에 성공한 경우 소년은 6살 때로 돌아가 새엄마와 아빠가 결혼하지 않도록 막고 부자가 함께 사는 것으로, N은 먹는데 실패한 경우로 아빠는 감옥에 새엄마와 무희와는 따로 사는 삶으로 결정된다. 소년은 어떤 삶을 원할까.


 틀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선택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뜻이지. 그 선택의 결과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너의 선택은 더욱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란 말을 하는 거야. p200~201


  소년의 가슴 아픈 경험을 표면에 드러내면서 결국 작가가 말하고픈 빵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었나 한다. 선택과 책임. 욕망에 대해서도 가져야 할 책임. 그렇기에 마법의 빵을 생산하면서도 잊지 않았던 ‘저주’를 걸어 두었을 것이다.

  지난날에 대해 떠올리는 때가 많다. 우습게도 되돌아가고픈 순간은 어찌나 많은지. 지금 내 삶을 과거의 결정탓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타임 리와인더를 먹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까. 물론, 지금과 같은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 날엔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가져온 선택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이 가져온 뒷날의 삶에 대해서는 또 지난 뒷날에 후회가 없을까, 책임을 전가하진 않을까.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던 어느 쪽의 변화든 간에 이것은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계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십시오.’ p63


  그건 그거고. 소설 속 어른들의 선택과 책임은 분명 문제였다. 삶의 고통이 어떠했을 지 남의 고통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것을 속인들의 특성이라고 치고, 소년을 버리고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한 엄마나, 새로운 가정을 꾸미면서 재혼 자녀에게 서슴지 않고 냉대를 행하는 새엄마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아들이 고통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빠나 그들이 행한 ‘결혼’으로 이어질 일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자세가 엉망이었다. 하나의 욕망만을 원하고 그 욕망에 따르는 책임은 지려 하지 않았던 결과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많은 일들이 행하는 잘못의 전형이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가끔, 위저드 베이커리에 들리고픈 욕망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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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되고 싶은 시간


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예담, 2016.9.5.


 배터리 폭발로 세계 곳곳에서 폭발 소식을 안겼던 삼성이 새롭게 모델을 출시했다고 그것은 실패한 모델과 달리 진일보한 상품이라며 언론에 하루종일 오르내렸다. 창업주가, 소유주가 구속되면 나라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는데, 잘 나가네, 더불어 그래봤자 휴대폰의 세계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또한 열심히 수식해댄 문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하긴 이 말도 가전제품이며 전자기기에 수없이 활용되었던 만큼 굳이 놀랄 일은 아니다. 단지 인공지능이라면 로봇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반사작용 때문이기도, 그래서 휴대폰과 인공지능의 어울림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인공지능=로봇. 이런 도식은 어쩌다 생겨난 것인지. 하지만 오늘의 이 단어로 인해 불완전한 인공지능 로봇 은결이 떠올랐다.


은결의 존재를 신기해하던 동네 주민들은 방송이 나갔을 때 한두 주쯤 반짝 관심을 보이곤 어느덧 익숙해진다. 일상의 일부가 된다. 일반인이 잔일에 부려먹기에는 다소 기능이 과하다 싶은 고가의 로봇보다 중요하거나 피곤한 일들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래처럼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p29 


  새로 출시된 저 모델도 신기해하고 바짝 관심을 보이다가 어느덧 낡은 모델로 분류될 것이다. 모든 기기들의 운명이란 그렇게 정해져 있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하지만 인간이라고 뭐 다를 리 있는가. 늙으면 병들면, 폐기하는 것이 당연한 듯 아니, 애잔함이 남아 있더라도 골치 아픈 대상으로 분류된다.

  이 소설은 모델명 ROBO-a1318b에서 은결이란 이름을 갖게 된 로봇의 한 스푼의 시간의 이야기다. 세탁서 주인 명정은 외국에서 사고로 사망한 아들 이름으로 보내온 택배 상자속에서 17세 소년 정도의 소년 모습을 한 로봇과 만난다. 조그만 동네 세탁소에서 은결은 명정의 가르침을 배우며 세탁소 일을 돕고, 또한 주위의 아이들과 관계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들 아이들 모두 각각의 아픔과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가고 은결은 고스란히 그들의 모든 삶과 마주한다.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에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가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p157


 입력된 정보만을 처리하며 단순하게 작동할 것만 같은 은결은 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듯 은결만의 지능을 가동하며 거기에 감성의 기능을 더해 간다. 그렇게 불쑥불쑥 은결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배움을 또한 위로를 주고받기도 한다. 아이들은 커가고 명정은 더욱 늙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겪는 동안 은결도 시간에 대해, 인간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느끼게 된다.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지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간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p249


  인간이 성장할수록 퇴화되는 기계로서의 은결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인간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는 은결의 시선이 가득하다. 은결 또한 그 희로애락을 느낀다. 이런 감정의 반응을 은결 스스로는 오류라 인지하긴 하지만. 세탁소에서 그렇게 명정이 사망해도 아이들이 성장하여 떠나고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오랜 시간이 지난다. 그래봐야 우주 137억년에 비하면 세제 한스푼이 녹는 시간일 뿐이다. 시간이긴 하지만, 은결의 그 시간이 제 가족들을 형성하고 보내는 노년의 부모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모두 떠나 버린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려는 듯한 은결의 모습은……. 여전히 은결은 살아, 있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은결의 이름처럼 은은하게 느껴지며 애잔하고 오래도록 슬픈 기분이 든다.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고…. 삶은 계란에서 느끼는 은결의 느낌처럼 삶은 은결이 느끼는 것처럼 그런 거라고 말하는 명정의 말처럼 이 소설도 뜨겁고, 끈적하고, 비릿하다. 이 느낌을 은결에게 가서, 명정의 세탁소에서 세탁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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