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물리학

 

중력의 법칙, 장 퇼레, 성귀수 옮김, 열림원, 2008.

 

   이 소설이 연극이라면, 영화라면 등장인물은 몇 명 출연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은 단 두 명이다. 두 명의 대화로 이어가는 소설의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작가 장 퇼레는 『자살가게』에서도 블랙 유머를 가득 구사하는데 프랑스가 자랑하는 이야기꾼이라 불린다. 그의 소설을 읽을수록 이 말에 동감하게 된다.

 

한쪽 눈이 여자를 무죄방면하는 동안 다른 쪽 눈은 여자를 단죄하는 것인가……그렇다면 질이 지금 처해 있는 정확한 위치는 두 눈 사이가 되는 셈이다. p137

 

   경찰관 질 퐁투아즈의 두 눈 사이에 있는 여자. 여자는 10년 전 지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러 경찰서에 와 있다. 공소시효 3시간 정도를 앞두고서. 여자의 죄는 12층 아파트에서 남편을 떠민 것이라 말한다. 12층 창문에서 떨어진 남편은 양팔을 옆구리에 붙인 채 사망했다. 그 사건은 자살 시도 전력이 있는 남편의 자살로 결론 났다. 이 떨어짐, 이에 대한 중력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떨어짐은 잠깐이고 경찰서에서 경찰관과 여자의 대화만이 진행된다. 머릿속에 막연히 ‘중력’과 ‘중력의 법칙’이 무언가에 대한 물음을 희미하게 붙잡고 소설을 읽는데 두 사람의 대화속에 빨려 들어가 지켜보는 내내 긴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데 중력은?

   경찰관이라면 자수하는 이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더라도 정확한 사항을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직업적인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 경찰관은 사건경위를 듣고 범죄혐의를 파악하고도 ‘절대로’ 체포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겨 적극적으로 여자를 설득하기 시작한다. 여자는 ‘절대로’ 10년 동안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노라며 감옥에 들어가기를, 합당한 벌을 받기를 원한다.

   오래도록 죄의식에 시달려 온 여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면, 경찰관은 도대체 왜 이토록 여자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가. 남편은 술주정뱅이에 자주 여자와 아이들을 구타했고 자살 시도로 잦은 치료를 받고 있기도 했으며 그날도 역시 창문에 매달려 자살하겠다고 외쳤기에 여자는 그럼, 소원대로 해주겠다며 남편을 밀었다고. 그러나 당시에 경찰관들에겐 남편이 자살했다고 진술했다는 이 여성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체포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만. 그전에 우리의 경찰관은 3시간 후의 당직에서 벗어나 휴일을 맘껏 즐기고 경찰업무를 잊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니 3시간만 참으면 경찰관은 아무런 일처리를 할 필요없이 휴일을 향해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라고 하더라도 질 퐁투아즈 경찰관에게 이 여자의 자백과 행동은 도대체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다. 실로 멍청하기 그지없는 결정이다. 어쨌든 남편은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망나니같은 놈이고, 그런 놈이 이 사회에 없는 것이 훨씬 좋은 일 아닌가.

 

책상 위의 텅 빈 성모마리아는 여전히 감색 의상을 걸친 채 꼿꼿한 자세로 서 있다. 그 발치에는 고전적인 윤곽을 갖춘 머리 모양 마개가 책상에 볼을 댄 채 누워 있다. 자세히 보니, 성모마리아의 한쪽 눈에 묻었던 수의와 약물 한 방울이 방금, 마치 베게처럼, 자기 머리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한 장의 얼굴사진을 슬그머니 적시고 있다.

마리아가 지미를 애도하고 있는 셈이다……. 리지외 출신의 경찰관은 도대체 이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신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무얼 뜻하는 걸까? 그럼에도 죄지은 여자를 체포하지 말아야 하는가? p149

 

   처절하게 여자를 설득하기 위한 경찰관의 노력은 여자의 삶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경찰관 자신의 인생을 끄집어내게끔 한다. 탈법과 타락의 비루한 제 이야기 하나하나, 낱낱이. 마치 경찰관의 자백, 고해성사 같다. 이제 체포되어야 할 사람은 경찰관인 것만 같다. 이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경찰관에게 여자의 위치는 성모마리아, 신부와 같았을 지도 모른다. 죄를 지었으나 언뜻 무결해 보이기도 하는 여자의 상태, 그 도덕심에 대해 경찰관의 자기고백이 나왔을지 모른다.

   아무리 범죄자들을 조사하고 체포하는 그런 좋지 못한 일상만을 접하는 경찰업무에 시달린다 한들 그 조서 하나를 피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절절하게 이야기를 내뱉는 경찰관의 이 노력이 처음엔 웃기다가 차차 경건해보이기도 한 까닭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에 몸을 던진 경위는, 축 늘어진 양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가만히 누워 있다. 붕대를 감은 왼손의 반지 속 어금니가 마치 작은 수도원처럼 보인다.

이제 그는 그 어떤 꿈의 기억도 지니지 않는 죽음의 형제, 깊은 잠 속에 빠져든다……. p187

 

   그 어떤 노력을 해도, 압박을 가해도, 공포를 심어줘도 여자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날 이후 여자의 온 생은 죄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곳곳에서 남편의 얼굴을 만났고 이제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 이상 시간이 없는 것이다. 결코 여자를 떠나지 않을 죄의식이라는 중력장. 그리고 경찰이지만 경찰이라는 업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찰에게 되돌아오는 경찰업무라는 중력장. 그리고 그들에게 잔잔히 파동치는, 그러나 전체를 휘감는 ‘도덕’이라는 중력장. 알 수 없이 흐르는 중력이 인간의 생을 결정짓는다. 그 어떤 발버둥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의 집결지는 경찰관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가 쥐고 있는 듯하다. 수도원처럼 보이는 반지. 결국 중력의 법칙은 도덕의 또다른 이름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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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광기


육식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임호경 옮김, 문학동네, 2010.


   독특하다,라는 말에 걸맞은 베르나르 키리니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작가는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독특한 스타일의 작가에게 주는 ‘스틸’상을 수상했다는 말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는다. 베르나르 키리니. 이 작가를 프랑스문학계에선 환상 문학계의 대표적 작가인 보르헤스, 포 등을 잇는 작가로 거론하는 모양이다. 열네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육식이야기」에는 여전히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작가의 스타일이 펼쳐진다.

  재밌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일단, 기괴하군이라는 생각이 먼저 스쳐간다. 작품 전반의 분위기는 음산한 열대우림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 속에서 서늘했다가 놀랐다가 나가고 싶어 했다가 포근함을 느끼기도 했다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움츠러들기도 했다가, 별별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상상력만큼이나 별개로 환상속으로 통과하게끔 하는 맛이 있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단편은 현실에서 벌어질 개연성이 있긴 하겠지만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형태, 또는 등장인물의 절대 악과 같은 류의 이야기로 흘러가지 않는다. 당연 이상한 상황이 등장하는데 그 상황은 더 이상한 상황과 더 이상한 등장인물의 사고패턴으로 이어진다. 역시 적절한 말은 기괴하다, 정도일까. 유쾌하다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구 머리야’라는 말이 나올 법하다. 이런 류의 상상이란, 이런 류의 환상이란 마법이란 단어에서 느끼는 귀엽고 유쾌하고 재밌는 종류의 환상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생각해보니, 단편의 제목뿐만 아니라 단편집 전체의 이야기가 육식으로 가득찼다. 「육식이야기」는 거대 식물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굳이, 육식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였는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언뜻 알듯하다. 단편 「밀감」이 반복적으로 밀감과 오렌지를 꺼내들며 이야기해도 사그라지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 피의 이미지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밀감」은 그 껍질을 벗기고 상큼하거나 시큼하거나 달달한 과즙을 상상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작부터 오렌지 주스에 피를 섞어 마시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것은 현실이라도 궁금한데, 하물며 소설이니까 적극적으로 이 남자의 사연을 궁금해 하는 이가 어떤 사연인지 물어준다. 그리하여 남자는 온몸이 오렌지 껍질로 되어 있었다는 아리따운 여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해준다. 오렌지 껍질을 까먹듯 그 여인과의 오렌지향 가득한 사랑을 나누지만 환상적 사랑이 지나고 난 이후에 오렌지 껍질로 가득찬 여인을 직시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침몰한 배에서 유출된 기름이 잔뜩 유출되어 그 덩어리로 출렁이는 바다를 찬양하는 학자도 등장한다. 기름 범벅인 바다에 대한 탁월한 찬양을 하는 자의 사고 또한 식물적이기보다는 육식의 이미지에 가깝게 느껴진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독 잘 청취하는 놀라운 청력의 소유자도 등장한다. 육신이 늘어나는 주교도 등장한다.    

 「육식 이야기」속 식물학자는 식충식물에 반해 모든 것을 제껴두고 식충식물 연구에만 매달린다. 연구용으로 채취해 온 거대 파리지옥과 늘상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이 식물학자의 점점 더해지는 광기를 보며 조수는 식물학자를 떠나고 몇 년 후 식물학자가 의문사 했음을 전한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짐작가는 범인을 가까이에 두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읽다 보면 유출된 기름냄새가 온몸을 휘감은 듯 머리가 아프다. 조금 신선한 공기를 쐬지 않으면 같이 미쳐버릴 것만 같다. 이 단편집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처럼 광기에 빠지는 일은 욕망에 빠지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떤 욕망은 내도록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기도 하다 싶다. 욕망을 쫓는 일은 힘든 일이라는, 발목 잡힐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완전한 욕망에 빠지는 일도 쉽지 않다. 온전히 욕망에 빠져 그 욕망을 과감하게 가감없이 발산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선택인 것일까, 환상에 매몰되는 것일까. 문득, 욕망에 광기에 빠지는 일이라는 것은 신선한 공기를 쐬지 못하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욕망이란 옳지 않다는 이미지로 인한 생각일까. 어쨌든 육식이야기에서의 육식, 이 단편집에서의 육식이란 욕망을 욕망하는 이야기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생각을 하며 작가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로부터 빠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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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거짓의 문장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베르나르 키리니,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2012.

 

    한국의 단편은 정해진 분량을 대체로 가늠할 수 있다. 각종 공모전들이 소설의 분량을 일률적으로 정하고 있으니까. 단편이라면 원고지 몇 페이지, 책으로 몇 페이지 정도라는 것을 안다. 셜리 잭슨(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단편은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분량이라는 것이 주어질 뿐, 한국처럼 천편일률적이진 않다)의 단편은, 분량이 자유롭다. 이것이 경향인지 최근 한국소설에도 짧은 이야기라 기획으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이야기는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나오는 것이지 특정한 분량으로 제재를 두어야 할 것은 아니긴 하다. 그래서 단편이라는 양에 길들여진 독자에겐 이야기의 분량에 가끔 당황하긴 한다.

   이런 짧은 분량의 이야기는 종종 유머와 풍자를 곁들인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내가 읽은 단편 소설들에서만 판단하건대 그렇다. 키리니의 작품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상당한 풍자와 유머들이 튀어나온다. 장편소설에 피에르 굴드가 나오는데 이 단편집이 키리니의 첫 출간작이었으니 피에르 굴드는 작가의 페르소나인가 싶다. 16개의 단편 곳곳에서 피에르 굴드를 만날 수 있다.

   단편집의 제목인 「첫 문장 못쓰는 남자」가 가장 인상적이다. 첫문장을 못떼는 이야기가 너무나 공감되어 요즘 유행말로 웃프게 느껴진다. 결국 첫문장을 쓰지 못하고 문장 속에 갇혀버리는 그런.

 

첫 문장, 그것이 문제였다.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던 책을 쓰기로 결심한 날, 굴드가 고민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백지를 앞에 놓고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느라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금방이라도 글을 써내려갈 듯이 끊임없이 만년필촉을 종이 위에 갖다대고 손목을 부드럽게 풀면서 첫 글자의 획을 그어보려 했지만, 글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신경이 쓰여 매번 멈추고 말았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문장에서 비롯될 것이고, 따라서 첫 문장을 잘못 시작했다가는 책 전체가 망가져버릴 게 틀림없었다. p9

 

   굴드처럼 모든 문장을 쓰는 일은 어렵지만 첫문장은 유독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작을 하던 때도 많았는데 줄거리만큼이나 “문장” “첫문장”에 대한 관심도 증가한 것 같다. 이 단편에서 굴드는 첫문장을 써내기 위해 엄청나게 고심을 한다. 그래서 그는 글쓰는데 어려움을 느끼는데 결국 굴드는 작가가 되었다. 어떻게 되었느냐고.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내용도 쓰지 못한 소설의 작가.”

   그럼에도 굴드는 계속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단편집 곳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기 위한 피에르 굴드의 종횡무진 활약상을 만날 수 있다. 피에르 굴드는 단 한권의 책을 쓰고 영원히 글쓰기를 포기한 ‘이클립스들’에 매료되어 첫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을 쓰고자 하지만 쉬울 리가. 첫 문장을 못쓰는 남자 피에르 굴드가 마지막 작품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관한 안내서」를 쓰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자신을 찔러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재밌고 독특하게 생각을 전개시킨 소설들을 만나다 보면 외국인들의 환상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의 세계들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이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일 지도 모르지만 다소 ‘문화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 곳곳에서 글쓰기와 작가에 대한 정체성과 고민이 지속된 단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고민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기괴한 이야기의 나래를 펼쳤다. 곳곳에 들어있는 피에르 굴드의 활약들이 글을 쓰기 위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대부분의 작가는 거짓말하는 재능이 바닥나 이제는 진실밖에 이야기하지 못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교묘하게 얽힌 이야기들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들을 하려는 작가들이 있고 작가가 되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힘들고 어렵다는 문장들을 나열하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건. 거짓을 위함일까, 진실을 위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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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사고와 말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수전 손택·조너선 콧, 마음산책, 2015


 수전 손택을 알게 된 건 수전 손택의 글을 읽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책을 읽는 중에 수전 손택의 이름과 글과 책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마침내 난 수전 손택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그녀의 글을 읽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글을 읽고 나선 수전 손택의 생전에 더 많이 읽을 것을 후회했다.

  타인의 책에서 반복되어 나타났기에 수전 손택을 알게 된 처음엔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은데 사실, 수전 손택의 책들은 책의 두께와 말의 무게에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소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해도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듬거렸다.

  그에 비해 수전 손택의 사후에 나온 책들은 얼마나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가 생각하면 놀랍다. 이 책 또한 인터뷰 형식이라서인지 글이 쉬이 읽혀진다. 역시나 수전 손택의 말이고 생각을 담고 있는데도 그렇다. 어쩌면 질문과 답으로 이어진 형식은 나홀로 묻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전 손택의 육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글을 통해 생각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실제 목소리는 내가 느낀 것과 너무 달라 놀란 작가들이 몇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느낌과 수전 손택의 실제의 괴리가 얼마만큼인가 알고자 하는 걸까.

  옛 사진이란 것이 항상 그렇지만, 더구나 흑백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란 것은 사람을 참 인상적이게 만든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과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습게도 타인같지가 않다.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들여다본다.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면서도, 안다고 그렇게 느낀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 남겨진 자신의 결점. 말이 많은 것이라는 일기가 생각난다. 말이 많다는 것은 수다스럽다는 것으로 통칭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런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로 보는것과 또 다르니까. 1978년 파리에서의 12시간 인터뷰 전문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수전 손택의 말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는데 “명료하고 권위적이고 직접적인 말투를 갖기 전에는 인터뷰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후의 인터뷰로 그 완성의 결과라고 한다. 인터뷰 당시의 호흡 그대로라고 하는데도 정말이지 명료하다. 삶에 대한 확고한 자기 생각이 없다면 말로 명료하게 나와지지 않는다. 마흔 다섯의 수전 손택은 완결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일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사실 글을 쓸 때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죠. 대중을 경멸하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린다는 건 내가 믿는 바로서―글을 쓸 때는 물론 실제로도 믿죠―그걸 전달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다 쓰고 나면 제가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복잡해지죠…….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얘기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글을 쓰고 나면 전 이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랍니다. p177~178


  수전 손택식의 사고와 글쓰기는 내게 유사점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당한 거리감 또한 준다. 이것은 여전한 사고속에 머물러 자기확신이 없는 나와 수전 손택의 차이점일까. 또한 지성의 한없는 부족의 이유도 있겠다. 아무도 내게 인터뷰하자고 조르지는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수전 손택처럼 생각들이 좀더 명료해질 때까진 말을 남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다. 하긴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공표되었기에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낌으로써 일을 진행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반면 나는 내가 그것을 행한 이후에나 말을 해애 한다는 강박을 느끼긴 했는데, 그런 점에서 글은 또 다른 것 같다. 글이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도 같다. 말이란 조심스럽고 글또한 조심스럽지만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상은 생각의 연속이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등등의 말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이것참 삶에서 내 확고한 생각하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전 손택처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행동력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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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힘


다시 태어나다-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잔 손택 /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이후, 2013.


 타인의 일기를 읽는 내밀함을 데이비드 리프는 허락했다. 자신의 글이 아니기에 결정이 쉬웠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어머니의 일기엔 아들의 이야기가 필히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다. 어머니의 일기를 아들은 공개했다. 어머니는 이미 유명인이었고 어머니의 삶과 글, 생각은 어머니의 입과 글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일기란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과 형식을 갖게 되는데, 아들에게 어머니가 사망 전 일기의 존재를 알린 것을 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글을 읽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모든 면면들이 나타나는 것을 앎에도 아들은 어머니의 글을 출판했다. 그 자신, 어머니 수잔 손택의 아들이 아니라 저술가, 편집자로서 출간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보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수전 손택의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아 보인다.

  이 책엔 14세부터 30세 때의 수전 손택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전생애에 걸쳐 일기를 썼고 그 기록은 많다는데 이 유년과 청춘의 시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의식 강하고 지성적인 수전 손택을 만나게 된다. 아니면 그것은 그 나이 또래가 갖는 그런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까. 좀더 깊고 처절한 감수성. 낙서처럼 끄적인 글귀 하나하나가 사춘기 소녀의 고뇌에 찬 외침이겠지만 어쩐지 그의 아들 말대로 자신감에 차 보인다. 또다른 표현, 자아도취라….

 어린 시절부터 수전은 많은 문학책을 읽고 그에 관한 생각들을 기록했다. 문학에 대한 감수성, 지성, 글쓰기에 대한 열망, 자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성적 정체성과 연애, 결혼에 대한 환멸 등등등. 수전 손택의 동성애 성향을 좀더 이르게 자각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이기에 결혼에 대한 환멸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당시 17세는 이른 결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정이지만 결혼 생활이 서로의 갈등과 다툼으로 귀결되지 않았다면 수전 손택의 삶은, 생각들은 다르게 영향을 받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지성과 감수성의 홍수 속에 가득찬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안을 제시한다.”  -1957년 12월 31일


  일기가 사실적 삶의 기록이긴 하지만 그 사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수전의 이 고백엔 평생 수전에게 따라다니는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담겨 있다. 성정체성,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위해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시절의 일기 속엔 가득 차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삶의 기록이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이해이고 대안의 제시라는 고민의 기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 수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사회는 이성애자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이라 간주하니까, 어린 소녀에게 그리고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동성을 향한 연정들이 자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기들엔 그러한 언어들이 해방구처럼 쏟아져 있다.


오르가슴의 도래와 함께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야기는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더 협소해졌고 가능성들은 봉쇄되었으며 그 덕분에 대안들이 명료하고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한하지 않다. 나는 무無다.

섹슈얼리티는 패러다임이다. 예전에 내 섹슈얼리티는 수평적이었다. 무한한 분화가 가능한 무한한 선이었다. 이제 내 섹슈얼리티는 수직적이다. 위로 올라가 넘어가 버린, 어쩌면 무無. p282


  수많은 일기를 썼다는 수전 손택. 그 일기들이 대안이라면, 그녀 스스로 만든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고백하듯이 그리고 보여주었듯이 글쓰기로 나타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내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 나는 사회가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무기에 맞서기 위해 무기가 될 만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게 내 동성애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내 느낌이지만―일종의 면허를 발급해 준다. p286

 

  수전의 치열한 글쓰기가 동성애 욕망의 반동형성이라 생각한다면 약간 김이 새려 하지만 무엇이든 어떤 욕망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반하여 형성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모두 동성애로 인해서는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수전에게 있어 이 동성애에 대한 욕망이 자신을 보다 새롭게 자각하고 인식하는 힘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욕망을 사회가 바라보는 눈 사이에서 매우 적절히, 아니 그 자신은 괴로웠을지 모르지만, 조화시키고 있지 않았나 싶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성애자들이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늘 작가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측면으로 수전 손택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글의 바탕이 실패한 연애 경험이었어라고 말하면 호기심과 김이 빠지는 것이 열렬한 투쟁가들에게 느끼는 더 큰 대의를 말하리라 생각해서인지 모른다. 사실, 더 큰 대의라는 말도 웃기거니와 모든 인간은 제 삶을 살아내는 거 자채에서 벌써 치열함을 내장하고 있다.

  또한 욕망에 좌절한 수많은 이들이 반사회적인 형태로 욕망을 해소하거나 좌절된 욕망에 대한 분노를 펴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전 손택의 욕망의 해결 방법, 그 자신의 대안은 매우 긍정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그랬다. 책을 한번 쓴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수전 손택은 수없이 달라질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이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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