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끌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2014.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나는 살고 싶습니다.” - 시민군의 일기


 작가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읽고 읽으며 글이 써지지 않는 날들을 보내며 글자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작가에게 이 소설을 마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시민군의 마지막 일기를 읽고 나서였다.

 

그때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제가 그때까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어요. 그리고 생각한 것이, 이 소설이 인간의 참혹과 폭력에서 시작했지만 인간의 존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저 거기까지만 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자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어떻게 장들을 배열해야 할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월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어요.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수상작가 인터뷰 중 -


  그렇게 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의 이야기다. 5·18 민주화운동이란 명명을 얻기까지, 그날의 역사가 재현되고 있지만 이 역시 그날을 조금 보여줄 뿐이다. 한 도시가 마비되고 고립된 그 시간들의 이야기는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을 정도의 강도로 그야말로 소설같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일들이 숨겨져 있다. 5·18. 이제 37년의 시간이 지나 이 역사적 상처를 가슴에 안은 모두가, 역사가 치유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이다. 여전히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이고 왜곡과 거짓을 넘어선 희화화를 일삼는 이들이 여전히 이 역사를 조롱하고 있다. 바로 잡힌 규명을 통해 예의없고 반성없고 잔혹한 무리들의 인식세계도 변할 수 있을까. 열다섯 소년의 혼이 여전히 떠돌고 있는 이날의 역사, 그날의 아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을.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 내 친구가, 내 가족이, 내 이웃이… 마구잡이로 얻어맞고, 총에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떠돈다. 그것은 영혼으로 떠도는 그날의 사망자의 모습과 겹친다.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살아남아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열여섯 동호의 살아남은 슬픔과 죄책감. 매일 분향소로 들어오는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을 맡으며 초를 밝혀 주검들의 혼을 위로하며 친구 정대를 찾는 동호의 괴로움이 절절히 공감되면서 아린 마음이 되는데, 결국 동호마저도 폭도인 국가에 의해 희생당하고 만다. 슬프고 안타깝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멍한.

  어린 동호조차도 그 폭격과 폭력 속에 친구 손을 놓친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시민군의 활동을 돕는데, 죄책감도 양심도 없는 존재들이 또 어찌 그리 많을 수 있을까. 절대 권력이라는 그 우스운 명칭. 왜 양심은 가진 자에게는 그토록 머물지를 않는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p57~58


  <소년이 온다>는 그날의 사건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5·18은 한순간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머리에 트라우마가 된 사건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날의 폭력과 고문으로 다친 몸과 마음을 안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삶은 진행이 되지 않는다. 그날의 충격은 목뼈가 어긋난 것과 같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어긋나 있다. 잊겠다 다짐하지만, 절대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그들의 현재 삶이 된다. 여전히 끔찍한.


 일곱 대의 뺨을 그녀는 이제부터 잊을 것이다. 하루에 한 대씩, 일주일 만에 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이 그 첫날이다.

 어떻게 잊을까 목뼈가 어긋난 건 같았던 그 충격을.


  이런 잔혹함을 자행한 이가 눈앞에 살아 번들번들한 얼굴을 디밀고 나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겹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번들한 기름기가 학살자가 살아온 모습이겠지. 양심이 내려앉지 못할 미끌거림. 그러니 아직은 죽지 마라. 그저 노안으로 죽지 마라. 미끌거린 채 마지막까지 번들번들한 그 얼굴로 사라지지 마라.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나도 이렇게 다짐한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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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30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한강 작가 최고의 작품
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시빛 2017-05-30 21:05   좋아요 0 | URL
그런 것 같아요.
소재가 주는 힘이 있긴 하지만 한강 작가도 소재를 잘 풀어낸 것 같아요..
그러니 블랙리스트로 낙인찍혔겠죠...?! 국제적인 상을 수상하고도요...
 


애도의 시간


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문예중앙, 2015.


  덥다. 달력은 지금을 봄이라 말하고 날씨는 여름이라 말한다. 소나기가 그리워진다. 쩍쩍 갈라진 논을 보면서 여름 속에 들어섰음을 실감한다. 어느덧 여름하면 무더위가 더 생각나는 걸 보면 나잇살이 주는 땀의 무게가 너무 힘들었나 보다. 지난 여름은 너무, 너무 지친 여름이었다. 그래도 겨울엔 봄을, 여름을 기다렸으니 또한번 지나갈 여름을 맞이하는 마음은 아직은 덤덤하다.

  그래, 지나갈 여름이다. 어떠한 삶의 경험이든 여름을 견뎌내는 이들의 감정은 격랑이다. 그리고 그 여름을 지나면 격랑의 자욱들이 또렷이 보일 것이다. 여기 조해진의 <여름을 지나가다>는 그 여름 청춘들에게 남은 자욱들을 보여준다. 민과 수의 교차적 시점으로 서술되는 6, 7, 8월의 이야기가 그들이 함께 마주치는 여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산으로부터 머물 곳을 찾지 못한 민과 수의 이야기다. 민은 감정의, 수는 재산의 파산으로 인해 여름을 넘기기가 힘들어 여름을 넘길 공간을 찾는다. 그들 마음의 위안을 얻을 장소를 발견했다고 느낀 순간, 그 순간은 여름의 절정이었을까. 여름의 끝이었을까.

  민과 수가 마주친 공간의 주인은 누구라고 해야 할까. 급매로 내놓은 버려진 가구점. 그래서 현재 아무도 머물고 있지 않은 집. 그곳을 민과 수가 찾는다. 그리고 연주, 종우. 여름을 쳐다보는 그들의 얼굴들이 하나같이 닮았다. 민이 가구점 그 공간에서 들여다보는 거울 속의 모습처럼 말이다. 흐릿한.


  민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이곳으로 거울을 보러 왔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흐릿한 자신이 흐릿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흐릿한 생애가 상상됐다. 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 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란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수많은 칸들이 연결된 기차처럼 각기 다른 생애들이 길게 이어져 전체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어제의 눈물을 기억하지 않고 내일의 포부 따위 갖지 않는.


  불안정한 터전을 삶의 피난처로 삼으며 하루를 버틸만큼, 그들의 삶엔 어떠한 아픔이 가득한 걸까. 부동산중개소에서 일하며 가구점을 드나드는 민에겐 파혼의 아픔이 있다. 그리고 종우와의 파혼의 이유가 되는 노동자의 사망이 있다. 거기에서 민은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으며 신용불량자인 채로 타인의 신분증으로 살고 있는 수. 곧 철거될 옥상 놀이공원에서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연주. 그들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삶의 힘겨움과 아픔이다.

  그들이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니, 이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게도 보이지만 그냥 제 아픔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같다. 수동적으로 여름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 보이는 그들의 여름.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p50)”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발을 뻗어본다. 타인,인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위로하며 또한 위로 받으며 그렇게 발을 뻗는다. 민이 말하듯 발을 헛딛는 것쯤이야 두려울 게 무엇있으랴. 더는, 발을 뻗는 곳에 디딜 곳이 없는 것에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다만 발을 뻗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 여름에 느끼기에, 지금 그 관성을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 머문 기차 한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들이 발을 뻗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아픔을 가진 또다른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이 뻗는 발을 그대로 받아줄 아픔을 서로 나누는 존재. 피난의 공간을 함께 한 그들의 존재. 결국 아픔은 사람에서 시작되고 사람으로부터 치유받는 모양이다. 민이 수를 돌보는 것이 진짜 삶인 듯,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그 더운 여름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했던 존재들. 또한 타인에 대한 끝없는 애도. 그 여름은 그런 애도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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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공무원이라서 행복합니다 

- 고군분투 사회복지 공무원 성장기 

함창환, 바이북스, 2017-01-15.


  5월이라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여러 가지로 분위기가 들떠있다. 착 가라앉은 것보다 나쁘지 않다 생각하지만, 이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가 훗날의 이 상태에 대해 또다른 얘깃거리를 안겨 줄 것이다. 그래도 일단, 희망과 기대를 긍정적인 선상에서 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은 ‘희망’이 긍정인지 부정이 될 지는 일의 과정과 결과가 알려주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지 너무나 오래인지라 갑작스럽게 터져 나올 일자리에 대한 전망은 기대와 우려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정부로서야 일단 공공일자리 부분의 증가를 먼저 제시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공무원이 많은 사회가 좋다, 나쁘다라는 주장이 예로부터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정부가 민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따르니까. Working poor가 되려도 Working할 곳이 없어 Working poor에도 속하지 못하는 poor한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일단 양적인 Working할 곳의 증가 소식은 반길만하다. 그리고 질적인 부분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공공일자리 창출과 연이은 공무원 증원 채용계획,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소식이 며칠 간격으로 연이어 이어지는 현상을 보면서 기분좋음과 씁쓸함이 교차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않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의 차이가 역시 농간이었음을, 가치의 의지의 문제였음을 실감하는 것은 기쁘지 않은 일이다.

  2016년 5월 28일이 1년 만에 되돌아왔다. 젊은 청년이 떠난 자리에는 꽃이 놓였고 사람들의 울분이 가득했다. 늘 반복되어 온 열악한 노동환경이 빚어낸 19세 비정규직 수리공의 사망은 요즈음 연이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소식과 맞물려 더욱 비애감을 준다.

  일을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은 오긴 오는 걸까. 직장인이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의 희망사항이라 치고 직장인의 애환 역시도 변하지 않는 현실이다. 직장인이라는 말을 떼고 오로지 업무만을 가지고 행복을 나누기도 애매하긴 하다. 결국 행복하게 일을 하는 것은 개인 차이인가. 하지만 적어도 업무의 특성과 취향을 떠나 고정적이고 안정된 수입이나 처우 등에 대한 기본적인 바탕 위에서 개인의 업무를 통한 성장과 발전, 그리고 만족감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일요일 저녁에 설문조사를 하면 당연 모두다 직장인이고 싶지 않을 것이고 월급날 설문조사를 하면 또한 대다수가 적정의 만족을 표할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긍심과 만족감을 가진 이들이 갈수록 덜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업무환경은, 만족감을 가지기에 총체적으로 부실함이 곳곳에 드러나는 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헤쳐나가는 것이 개인의 마음가짐의 몫으로 되는 것 또한 얼마나 문제인가.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제목이다. <사회복지 공무원이라서 행복합니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부러운 일이고 축하할 일이다. 그런데, 저 말이 정말이지 책의 제목으로서의 표현일까, 실제 마음속에 오래도록 자리잡은 마음의 표현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사회복지사는 대한민국에서 여러 가지로 열악한 직업의 대표격이다. 공무원이라는 점이 다른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하지만 ‘사회복지’ 분야가 이 사회에서 대접받았다는 이야긴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 업종에 관한 열정페이와 같은 노동업무가 가치와 의무, 도덕으로 가려져 있다. 적절한 노동환경과 임금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하는 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니 사회복지사든 사회복지공무원이든 과도한 업무강도로 인한 과로사나 자살 사건도 발생한다. 물론 사회복지시설 수급자나 대상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사를 행하는 이들도 있다.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살아온 저자의 삶은 1991년부터 시작되기에 어쩌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의 역사적 전개도 함께 볼 수 있다. 전남 신안군, 섬에서 시작한 저자의 사회복지 업무는 저자가 도청으로 옮기는 것만큼이나 확대되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업무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당시만 해도 일반행정직에서 사회복지업무를 진행했고 직할시 정도에서 별정직 공무원으로 선발했다. 전담 사회복지공무원 선발은 2000년에야 이루어졌으니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인식정도를 알 수 있다. 저자도 말하듯이 단지 나이가 어리고 면지역이라는 것을 떠나서 잡다한 업무를 맡았다고 하고 있다.

  저자가 사회복지공무원으로 맡은 업무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변사자 업무다. 당시 섬지역에서는 변사자가 발생하면 시신 수습 업무를 사회복지담당자가 맡았다는 것이다. 시신 수습 업무란 시신 매장까지를 포함한다. 담당자가 직접 땅을 파고 매장하였다는 데서, 그 이전 담당자는 태풍으로 인해 하루 20~30구의 변사자를 처리한 적도 있다는 경험을 얘기하는 데서,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지금은 해경에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한다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해수욕장에 쌓인 수십톤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대목에선 별거 아니라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아무리 마구 버린 부탄가스가 폭발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도 말이다.

  저자는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수많은 업무들을 다 배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훗날에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하고 있지만, 엄연히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저자 자신의 열정적인 업무 스타일과는 별개로 관행적으로 행해지는 업무 분장이나 상사의 일 떠안기기는 일종의 업무 방해 아닌가. 맡은 일을 잘 해나가는데 장애를 주는. 그러니 상사로 인해 저자가 팔이 마비되는 상황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저자는 놀라우리만큼 사회복지공무원으로서 담당 업무를 잘 이해하고 자신만의 가치와 신념으로 업무를 수행했던 터라 그것이 무너질까 걱정되기도 했는데 저자는 의지로 극복하며, 아직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업무를 잘 수행해나가고 있다 한다. 업무를 하는 동안의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며, 또한 사회복지만이 아니라 가정복지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하며.

  많은 고난과 경험을 겪고 지난 시절을 풀어놓은 저자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겠다. 저자처럼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월요일은 여전히 출근하기 싫다고 느낀다 해도 하는 일에 만족감과 자긍심을 느끼며 일할 수 있기를, 그러한 터전이 잘 정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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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한 망상


망상,어語, 김솔, 문학동네, 2017.


  망상,어(語)를 보고 읽음에도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망상어(魚)로 전환하고 있다. 망상하는 물고기가 있을 리 없음에도 망상되는 망상이란 물고기. 망상어라는 제목에서 뜻보다 소리에 더 재빠르게 반응한 셈이다. 더구나 이 망상어라 불리는, 아니 생각한 물고기는 글을 읽는 내내 자유자재로 글 속을 뛰놀고 있었다. 망상이란 단어속 그 허황됨을 품고 있음에도 이 글에서 현실이 걷어 올려지는 건 망상이 너무나 잘 뛰노는 탓으로 봐야 하나. 아니, 그보다 작가가 뉴스에서 소재를 건져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잘, 접해보기 힘든 사건들이긴 하나 엄연히 존재했던 사건으로서의 뉴스들을.

  여러 이야기가 짧게 끊어 묶어 엮어져 있다. 36편의 이야기는 서사가 있긴 하지만 짧은 글짓기같은 이야기다. 그래도 세상에, 이런 일도라며 진짠가 가짠가 하며 넘길 이야기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수두룩한 걸 보면 세상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고 그만큼의 기이한 일도 다반사인 곳이다.

  익숙한듯 익숙하기 힘든 이야기들의 출처는 있었던 일이고 작가의 상상력과 더해져 뻗어 나가는데 신문기사로 몇단락 남은 이야기들의 이면이 작가가 그려낸 듯한 모습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만큼 이 이야기들의 길이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분량만큼, 딱 그만큼이 좋아 보인다. 더 길면 주절주절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뉴스라는 실제와 못믿을 뉴스라는 중간 그 어디쯤의 위치인 이 지점이 딱이다. 마치 아주 재밌는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딱, 그정도로. 맑고 밝은 날 들리는 천둥소리같은 기분도 간간히 느껴지는데 더러 재밌는 문장에 피식 웃음도 나고 만화같은 그림이 더해져 이야기의 재미가 좀 더 망상적으로 흘러간다.

  망상, 망상, 망상. 때론 망상은 유머의 끝에 도달하고 때론 경악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망상을 달고 다니는 물고기가 가지 못할 곳은 없어 보인다. 당연하다. 육지라고 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일찍 숨이 끊어지겠지, 뭐. 내친 김에 하늘로…? 뭐, 누군가 집어 던지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는 거지, 다시 내려오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유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이 삶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죽음의 권위를 무력화하고 그것을 대체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게 인생이다. 삶의 의지는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파동 에너지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건너오는 암흑 에너지이다. 에너지의 속도나 방향이 변할 때 사건이 일어난다. 그게 사랑이다. 그렇게 하찮기 때문에 인간에겐 너무 중요하다. 인간의 일생이 하찮지 않다면 우주는 그들을 모두 껴안고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예정보다 서둘러서 자살하고 말 테니까. p171, 연꽃


  어쩌면 망상어의 세계는 작가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일 수 있겠다. 어떤 일들은 상상속에선 벌어져도 무방하니까. 뉴스일 때의 그 황망하기 그지없는 마음을 달래는데도 약간의 망상은 필요하기도 하다. 희망의 뉴스도 불운의 뉴스도 끔찍한 뉴스도 뉴스에서 전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더 잘 느끼려면 말이다. 또한 뉴스에서 알게 된 현실이, 벌어진 사건의 참담함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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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유, 커트, 문학과지성사, 2017.



  자른 머리카락처럼 떨어진 머리통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이미지에 무덤덤해지는 나이. 아니, 감성. 세월은 감정을 더욱 깊게 하지만 웬만해선 감정의 노출에, 표출에는 민감해지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불행한 시대를 거쳐 오며 표정이 굳어진 채인 지도 모르겠다.  웃지 않는 묘기 대행진 마냥 웃을 거리가 없던 시대의 게임. 오래도록 이 게임의 승자가 되어 승자의 얼굴을 하고 세상을 배회하던 얼굴들인지라 그 얼굴들이 떨어져 나간 것에 무어 그리 놀라겠는가.


 나는 손을 뻗었다. 딸아이가 뭘 또 잘라놓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

다. 날카롭게 벼려진 가윗날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유연하게 휘면서 다가왔다.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가건물이 붕 떠올랐다. 가윗날에서 뿜어지는 빛이 눈앞에서 부서졌다. 잘린 머리통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다름 아닌 내 머리통이었다.

 “엄마 아파?”

 아이가 태연스레 물었다.

 “목이 잘렸는데 안 아프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온갖 잡냄새로 시달리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자 막혔던 숨이 트였다. 그렇다고 딸아이로 인해 치밀었던 화가 누그러지는 건 아니었다. p221~222, <커트>


  조금은 아플지라도 머리통을 분리할 수 있다면, 일단 굳어진 얼굴의 머리통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역시나 막혔던 숨통이 트일 수 있을까.

  이 단편집은 곳곳에 멀쩡한 길을 걷다 갑자기 튀어나온 씽크홀을 맞닥뜨리게 한다. 잃어버린 기억처럼, 이제 막 잠에서 깬듯한 몽롱함 속으로 들이민다. 현실인듯하다 갑자기 환타지가 펼쳐져 몸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세계. 의식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어디로 몸을 이끌지를 가늠하는 것만 같다.

  앞으로 더욱 전진하게끔 하는 힘이 꿈꾸는 것이라면, 꿈의 실패는 다시 꿈꾸는 것을 주저하게 한다. 그렇기에 다시 꿈꾸기까지는 현실이 아니라 환타지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속 비현실적인 요소는 실패한 꿈꾸기로 멈춤이 아니라 다시 꿈꾸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반복적으로 꿈꾸고 실패하고 다시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가 동병상련의 느낌을 들게 하는 것도. 그래서 환타지마저도 현실의 느낌이 들게 한다.

  꿈꾸기는 커다란 한덩이를 상상해 내는 것이라 그 한덩이를 이루는 작은 요소들은 꿈꾸는 당시에는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닥친 작은 덩어리들이 모여서 큰 한덩어리를 구성함을 알 때, 작은 덩어리들에 일일이 대처하는데는 다른 방법을 써야 하기에 우리는 잊고, 잘라내고, 먼 곳으로 이동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것은 내가 진정 꿈꾸던 것이 아니었다고,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꿈꾸는 것 자체로 만족하고 그것을 이뤄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여진처럼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람들 꿈이 이루어지는 게 좋은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차갑고 무뚝뚝한 말투였다.

   아니,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인 것 같아.

   필은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p135 <꿈꾸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꿈꾸기는 세밀하지 않다. 뒤따를 것에 대한 책임도 상황도 모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또한 그것 역시도 당면한 현실이 가로막은 것 아니었던가. 좀더 긴 미래를 생각하며 차분한 꿈꾸기로 표정있는 얼굴을 할 겨를도 없는 현실로 인해 마냥 도피와 같은 꿈을 꾸던 시대로 인해, 질적이지 못한 꿈들. 우리의 꿈꾸기의 바탕이 다져지지 않았다면 그 꿈의 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았을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 조금은 안정된 땅이 다져지는 현실 위에 서 있으니 이제 마냥 잘라내던 조금 길게 보는 꿈들을 그려내도 좋지 않을까. 하나의 머리통이 잘라져 이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잡냄새도 이제 덜 나는 것 같고. 그러니 꿈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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