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의 KO승


스파링, 도선우, 문학동네, 2016.12.21.

  문학동네소설상 수장작인 『스파링』은 책을 읽는 중중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가만 보니  클리셰로 가득하다. 그렇기에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작가의 서술톤은 클리셰 가득한 일들을 이끌어 가는데 시종일관 담담하고 차분하다. 언뜻 도덕교과서 같은 이야기도 많다. 그런데, 이 익숙한 클리셰를 가만 들여다보니 이 이야기는 결국 그렇게 흘러 갈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스파링』속 세계, 클리셰는 우리에게 늘 익숙한 권력과 자본이었다. 그러니 그것이 움직임이 예측가능한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가 진부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그토록 경직되어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을 것이다.

  실제, 어떻게 될지 모를 장태주의 삶이 처음부터, 시작부터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났기에 어떤 삶의 궤적인 좀 다를까 했건만, 이것은 이야기이지만 삶이니까. 이 대한민국에서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어린 아이의 삶이 전형적인 권력과 자본에 의해 비틀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저 응원이고 바램일 뿐이지, 실상은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안다. 그러니 우리의 소년 ‘장태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소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서술되는 형태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장태주의 어조는 시종일관 아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초등학생, 이제 중학생인 소년 장태주의 행동과 언어는 이미 세파에 시달린 어른의 목소리와 같았다. 맞닥뜨리는 일들에 모두, 한단계 초월한 듯한 반응을 보이는 장태주의 목소리는 그렇기에 애잔함이 가득하다.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장태주는 참 사랑스러워보였다. 이해를 품고 달리는 아이의 목소리였기에. 열일곱살 미혼모의 행동에서의 아기 버림을 충분히 이해하는 태주는, 소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이 공중화장실에 버려진 것을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장태주로 인해 어린 장태주에 대한 연민이 깊어진다.

  하지만 보육원과 학교에서의 장태주의 삶은 어떤가. 세상에 대해 ‘이해’를 품으려 해도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의 모두에게 ‘장태주’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격은 사라지고 보육원 아이라는 이미지로만 장태주를 소비한다. 그것이 이 부정의한 세상이 보육원 아이 ‘장태주’를 대하는 방식이고 클리셰다. 어린 아이를 향한 매서운 세상의 논리, 아이조차도 부모의 논리를 그대로 되뇌며 제 친구를 억압하고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면 경악을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 그렇다. 이 나라 대한민국의 부모들의 행태가 그렇더라. 제 아이만 잘나고 멋있는 줄 알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 아이들을 위한 동화는 없다. 일찍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고.


그게 이곳의 질서다. 질서라는 건 한 번 만들어지면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다. 종종 그 질서에 불만을 갖고 무너뜨리려는 인간들이 생기기는 해도 질서라는 건 본래 레고 블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하나를 이룬 거라서, 몇몇 반골들이 자기들 뜻과 맞지 않는다고 지랄들을 떨어봐야 결국 무너지는 건 자기들이지 질서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장태주의 삶은 어른들의 최악이 행동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또래의 아이들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제가 살아갈 세상에 어른의 힘과 논리를 가져와 또래들을 억압하고 우위에 선다. 아니, 이 세상의 논리는 그렇다. 돈과 힘. 돈없고 부모없는 아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모든 불운을 끌어안고 세상을 헤쳐가던 장태주에게 한줄기 빛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동 능력과 소년원에서 만난 공선생과 그 가족들이다.

  비참한 삶에서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는 내 편을 만난다는 것은 새 삶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어린 장태주의 삶은 그들로 인해 달라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여전한 클리셰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장태주에게 가족이자 권투를 가르쳐 주는 소년원 담임과, 담임의 부인, 담임의 장인은 이 이야기 속에서 시종일관 ‘도덕 교과서’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장태주가 견뎌온 이 세상의 구조와는 한발짝 떨어진 채로 그 제도와 맞서며 끊임없이 사회정의에 대해 부르짖고 그러한 삶을 실천해가는 이들이다. 그리고 여기서 권투는 상식적이고 공정한 규칙의 세계를 가르키는 방식이 된다. 그들은 권투 기술이라는 실질적인 운동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 이러한 타당한 규칙의 기술을 장태주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다.


살아가며 저돌적으로 인파이팅한 기억을 갖지 못하면, 언젠가 부딪히게 될 현실의 무게에 놀라 도망만 다니게 될 수도 있거든. 그래선 그 현실을 극복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수도 없으니까 살아가며 한 번쯤은, 모든 걸 다 걸고 정면승부를 겨뤄봐야 할 필요가 있어.


  상식적으로 공정이 불공정하고 맞붙으면 공정이 승리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고 상식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규칙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게 이 세상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자조를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게 슬프고 어이없지만, 결국 알게 된다. 이 세상은 수많은 일진들이 둘러싼 세계라는 것을. 일진, 그들만의 끈, 그들만의 논리, 그들의 폭력. 그것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에 저항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정의는 오히려 정의를 바라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세계를 살아가기 더 편한 인간들에게 훨씬 유용한 가치이자 신념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천천히 깨달아온 셈이었다.


  또한번 이 세상의 클리셰와 맞선, 파이팅하며 끊임없이 스파링하던 이들의 세계가 무너졌다. 위와 같은 말을 내뱉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갈 장태주를 이 세상은 얼마나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탁월한 기술과 담임과 스승이 가르쳐 준 규칙으로 멋지게 KO승을 해주기를 바랐건만, 사랑하는 모든 이를 잃은 장태규의 절규만 들려온다. 


  내가 당신들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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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공터에서, 김훈, 해냄, 2017.

 

  메말라 운동장이 된 못과 하천을 눈으로 보고 놀랐다. 그 변화의 차가 너무나 커서 제 본래의 이름, 못이나 내라는 치름을 찾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가 내리니 그 메마른 땅을 적시고 있겠지. 조금 더 세차게 내리기를. 저 달아오른 지붕에도, 폐허같은 저 공터에도.

  폐허의 터인 가정에도 단비가, 내리기를.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살아간 마씨(馬氏) 집안의 가계도에서 느껴지는 공허와 슬픔, 아픔, 분노의 모든 것들에 내리는 단비. 어쩌면 상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터에서>는 그 무대가 넓고 역사가 길다. 가장 마동수를 중심으로 한 장남과 차남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다. 그 모든 사건들은 이들에게 배경이 아닌 현실로 나타난다. 그러니, 일제시대 만주의 길림, 장춘, 상해를 오간 마동수로부터 6.25를 지나,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괌에서 돌아오려 하지 않는 장남 마장세, 언론통폐합 사건으로 신문기자 일을 할 수 없게 된 가난한 마차세의 이야기는 남일처럼이 아니라 남일같지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이 시기의 모든 사건들. 굴곡진 사건들에서 결코  비켜갈 수 없었던 이들은 그 벗어날 수 없는 사건으로 삶의 질곡을 겪으며 인생을 살아나간다. 쉽게 떨쳐 내지 못할 기억을, 상처를 만들며 맴도는 사건들이 개인을 한 가정을 차분하게 피폐함속으로 이끄는 동안, 헤쳐 나갈 수 있는 올곧은 정신은 형성될 수 있는 건가.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슨 헛것이 씌었는지 도통 밖으로만 싸지르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왜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p170


  어쩌면 이 모든 굴곡진 이야기의 근원이 누가 만들어내는지 모르는 근현대사의 ‘사건’들인 것처럼 마동수의 가정에 드리운 음산함의 이유는 ‘마동수’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 사건들을 함께 겪으며 그 역사 속에서 마동수는 끝끝내 제대로 서지 못하고 늘 회오리치기만 한다. 방어막이 되어 주지 못하고, 되려 하지 않은 채 거듭 흔들리고 방황하는 마동수와 함께 하는 삶은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에게도 두 아이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안에서 겪는 ‘사건’이 된다. 그렇게 안팎으로 달려드는 무수한 사건들에 지쳐가는 상황에선 가장 힘든 존재가 ‘가족’이라는 존재다.          


1100고지 매복 진지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은 멀어서 닿을 수 없는 외계(外界)의 환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먼 존재들은 군화 속에서, 언 발가락은 아무런 감각도 없이 남의 물건처럼 멀었는데, 그 멀고 먼 발가락의 고통은 불로 지지듯이 달려들었다. 혈연은 1100고지의 발 시려움 같은 것이었는데, 휴가가 다가오면 그 혈연의 끈은 마차세를 더욱 바싹 조여왔다. p16


  마차세는 어린 시절 밖으로 더욱 떠도는 아버지가 오지 않는 이유보다 왜 집에 오는 것인지를 더 궁금해 했다. 마장세는 늘 아버지가 삶의 외곽을 겉돌고 있다 여겼다. 두 아들에게 아버지의 삶은 뚜렷이 슬퍼할 것도 그렇다고 마냥 홀가분해지지도 않을 상흔을 주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 잔잔한 보잘것없음으로 두 아들의 생을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나라의 역사는, 정책은 한 가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가정의 가장의 역사는 그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삶의 구조속에서 또 어쩌면, 그토록 틀은 정해져 있었을까. 방황하고 피폐하게 권위만을 내세우는 가장이 있고 가정을 꾸리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살아내는 모성이 있으며 아버지를 닮지 않으려 하나 결국 닮은 모습으로 생을 살고 있는 자식들이라는 것. 이 벗어날 수 없는 도식, 이 도식을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개인이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라는 사실은 매우 허망하지만 또 그 구조 속에서 기어코 답을 찾아내기도 한다. 닮은 듯 보이나 다른 마차세와 박상희의 삶이 그렇다. 아버지 마동수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가정이라는 것의 허망함과 그 무력을 발견했을 것도 같건만 끝내 ‘결혼’이라는 희망을 붙들려 한 마차세. 그에게 결혼이란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의 의미였다. 그렇게 결혼 속으로 들어간 마차세의 삶은, 마장세의 삶과 달랐나. 결혼이 답이었던가. 그 상대가 ‘박상희’가 아니었다면 마차세에게 결혼이 거점이 될 수 있었을까.

  세상의 모든 막막함과 마차세에게 드리운 이 공허함을 세밀하게 안아준 박상희가 있었기에 마차세는 마동수의 삶도 마장세의 삶도 아닌 박상희와 함께 하는 마차세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마씨네 가계에 발들 들인 박상희의 힘은 경이롭다. 그것은 마냥 마동수의 아내 이도순의 삶처럼 참고 참는 삶과는 조금은 다르다.

  어쩌면 이 ‘조금 다른’ 역할은 마차세가 바라는 ‘이상’으로 보이며 그렇기에 마차세에게는 ‘구원’의 여신과 같은 존재로 그려지는 것 같다. 이것이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이도순’과 아들 세대 ‘박상희’의 결정적인 차이가 아닌가 한다. 비슷한 역할이 주어졌지만 그 역할을 빛나게 하는 것이 마차세의 인정이라는 점이다. 마차세의 재가를 득한 후에 박상희의 역할은 빛나고 있는 것이다. 마차세가 원하는 바에 맞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 힘을 얻는 박상희의 존재. 마차세에게 무엇을 재촉하지도 않으면서 마차세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의 남다름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서, 박상희의 역할이 이 전체의 소설에서 약간 이질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쨌든 마차세의 입장에서 박상희라는 존재는 단비이다. 또한 마차세와 마장세가 가지는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과 죄책감의 내면을 생각해보도록 이끄는 역할이자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역할을 맡았다.  


제가 결혼한 직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우연히 봤는데, 그 모습이 그때 태어나지 않은 두 아들과 똑 같았습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모두 가엾어서 눈물겨웠습니다. p262

    

  이 개별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편적인 세대의 이야기, 그러한 삶을 살았던 세대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눈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박상희’라는 진보적인 성향의 느낌을 지닌 인물의 목소리로, 시선으로.

  읽으면서는 마차세에게 연민을 느꼈는데, 왜 글은 박상희에게로 초점이 가게 되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들은 작가에 대한 논란 때문인지…. 열렬한 독자, 팬이 아니었기에 충격의 강도는 높지 않았는데 마씨 부자의 이야기에 왜 ‘박상희’만 기억에 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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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교양인, 2016-10-24.



  “아내 목 조른 남편 “징역 4년”… 납득 되나요?“

 기사를 보자 자동적으로 클릭한다. 몇몇 사건 판결을 두고 형량이 적당한지 설문조사한 결과에 관한 기사다. 대표적 보기 네 개를 본 순간, 제목에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

 ①홧김에 아내 목 조른 A씨(징역 4년)

 ②함께 도박하던 이를 흉기로 찌른 B씨(징역 7년)

 ③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한 C씨(징역 12년)

 ④한밤중 주거 침입 강도살인 D씨(징역 30년)


 ①번에 생략된 것은 “아내를 죽였다”, 첨가된 것은 “홧김에”.

  다른 사건들이 객관적인 사건을 서술했다면 ①번은 중요한 사항은 누락하고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되는 ‘홧김’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기사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이 사건에 대한 것은, “아내 목 졸라 살해한”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다른 사건은 제쳐두고 ①번에 눈이 갔는데, 물론 법정 판결이 4년인데 그 이유가 홧김이니까 저렇게 썼다고 본다. 그런데 홧김이 과연 이유인가, 홧김은 살인자의 주장이 아닌가. 이 사건을 지배하는 것이 “홧김에”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상습적인 구타와 폭력에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 사건의 경우 “계획적”이라는 말로 10년 이상이 확정된 사건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래, 그 순간엔 홧김일 수도 있겠다. 지극히 남편 혼자 주장하는 ‘홧김’. 그러나 ‘남편’ 자주, 상습적으로 ‘홧김’이 된다. 그렇다면 이 상습적인 ‘홧김’은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10대 딸 차로 치고, 별거 아내 강제 추행 `폭력남`...징역 3년”

  며칠 전 기사 때문에도 내재된 분노가 단지 이 폭력 남편때문만은 아님은 명백하다. 마침 그날의 기사는 딸을 성추행한 상담교사를 살해한 엄마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는 거였고, 그 살인은 계획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무엇보다 법이라는 제도가 있음에도 ‘사적 복수’를 행하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죄임을 명백히 했다. 

  그런데… 이 나라 법이 아내 폭력에 대해 안전망인 적이 있던가. 4년 넘게 별거한 아내도 이혼한 아내도 제 것인양 강간하고 죽일 권리를 행하는 이 사적인 화풀이의 행태는 수십년이 지나도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가. 법의 권위는, 아내 폭력 사건에 관해서는 제 스스로 차버려도 좋은가. 그것이 또다른 체제를 위함인가.

  여기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은 현실에서 늘상 경험하는 일로 분노와 학습된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또다시 현실을 깨우고, 이론적인 무장을 더해주는 책이다. 왜 ‘홧김’이라고 말하는지, 그럼에도 그것이 무방한 이유를 알려준다. 별거한 아내, 이혼한 아내에 대한 상습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를 해도 된다고 하는 남편의 이유를 알려준다.  

  놀라운 건, 이 책이 작가의 대학원 논문이었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책은 수십년 전의 사례라는 것이다. 사례자들이 30~40대 초반이 많았다. 남편의 나이도 그 또래라 생각하면 가해자들 역시 여전히 이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수십년 전의 그 가해자들이 오늘날 사건의 또다른 주인공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이 사례자들의 일들이 어제, 오늘,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주위를 둘러싼 공적 영역이나 사적 관계의 생각과 느낌들 모두가, 전혀, 옛날과 이어져 있듯이 그대로다. 페미니즘 때문에 여성인권이 높아졌느니 하며 불편한 시선을 던지다 못해 여혐이 확산되고 있는데, ‘아내’는 여성이 아닌가.

  아내 폭력이 당연시되는 여전한 현실을 접하며 작가는 이 아내 폭력의 문제는 당연하게도 사회가 부여하는 남편의 권리, 가부장제도가 당연시하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한다.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관점에서 아내 폭력의 문제도 해결하는 형태로 접근하기에 폭력의 피해자인 ‘아내’에 대한 것이 전혀 없다. 폭력의 희생자를 가해자의 집안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내는 이 관대한 법의 처사는 그 둘레에 “가부장제”가 내두르고 있는 힘이다. 가족유지. 왜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 가족은 누구를 위한 가족인지가 명백하다는 점, 오랜 동안 길들여진 이 가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타당함,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 교육을 위해서 참는다는 아내들의 말, 그러나 가정폭력이 교육에 나쁘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은 왜곡된 가족주의가 아내를 얼마나 억압하는가를 보여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해결 방안은 결코 ‘가족주의’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가족주의라는 개념에 ‘아내’의 인권은 없고 아내의 권리도 없고 오로지 타당하게 희생당할 요인들을 만들어 준다. 아주 기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공동체에는 권력 관계와 갈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가족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라고 인정한다면, 가족이라고 해서 권력 관계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은 다른 사회 조직도 마찬가지다. p25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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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요즘 뉴스에 여성혐오범죄가 심심찮게 보도되더라고요. 그래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찾아 보고 있는데 왜 진작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모시빛님의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 지네요.

모시빛 2017-08-09 23:54   좋아요 0 | URL
정희진님의 글은 이론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쉽게 이해되는데 특히 이 책은 폭력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네요. 우리나라의 정서와 상황에서 얘기되니까 좋구요. 물론 읽다 보면 사례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화나긴 하지만요...
 


누가 유령소년을 만드는가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틴 피스토리우스·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푸른숲, 2017.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치듯이 제목을 지나쳐가다 흠칫 놀랐지만 이내 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책을 쓴 이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책제목은 자극적이기도 하면서 보편적이다. 원제목이 Ghost Boy임을 생각하면 제목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얼마나 다른가. 이 책의 서술톤은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담담하고 구성 자체도 기교없이 이어진다. 다만, 이야기가 실화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 있을 뿐이다. 실화의 주인공이 겪는 상황이 놀랍고 안타깝기에 그에 대한 연민과 응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눈에 띈 Ghost Boy가 이 책의 내용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단 한줄로 말하긴 너무 어렵지만 많은 시간이 건너뛴 채 세상에 눈 뜬 소년은 어느날 이유도 없이 쓰러져 세상과 단절된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열두살 소년, 마틴 피스토리우스는 퇴행성 신경증으로 사지가 마비된 채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에 의식이 깨어났다. 그리고 마틴의 의식은 열아홉살 무렵 완전히 살아난다.


나는 열여섯 살 무렵에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열아홉 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예전처럼 의식을 되찾은 듯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았고, 나의 진짜 인생을 박탈당했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이글루 안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정신이 들어 보니 빙하 속에 묻혀 있었다. 완전히 무덤 속이었다. p31 


  의식이 깨어나 있는 그 오랜 시간 마틴은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모습을 보았고 들었지만 다른 모든 이들은 마틴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를 돌봐준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움직임없는 미묘한 변화를 알지 못했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을 두고 반복된 싸움을 벌이는 부모님과 어머니의 자살이 있었다. 어머니가 지쳐 울며 내뱉은 말,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이 말은 마틴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희귀병이나 치매, 중증질환, 장애인 등등의 병을 가진 이를 간병하고 있는 이들의 마음속 절규일 것이다. 가족 안에 치명적인 병을 가진 이가 있다는 것은 가족이 해체되는 극강의 지름길이다. 또한 가족안에서의 돌봄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은, 대체로 어머니는 다른 삶은 포기한 채 헌신적인 노력으로 돌봄을 수행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며 현실적인 절망의 상태에 있다. 이때의 마틴의 어머니가 그러했고 듣지 않아야 했을 이 말을, 마틴은 깨어난 의식으로 인해 듣고 만다. 그렇다. 듣는 마틴에게도 내뱉은 엄마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잊지 못할 고통이며 절망적인 삶을 내려놓고 싶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족이니까, 엄마니까 당연하다는 말로 내버려두기엔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이 세상의 엄마들은 살아내고 있다. 그 절망을 내뱉은 마틴의 엄마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또한 가족의 지지가 없다면 결코 마틴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의 그 절망과 지침을 이어받고 결코 마틴을 놓지 않으려 한 마틴의 아버지의 노력 역시도 잊을 수 없다. 마틴의 아버지는 직장일과 병행하며 마틴을 돌보며 마틴을 가족과 떨어지게 놔두지 않았다. 마틴이 새로운 삶을 사는데 있어 마틴을 놓지 않으려는 부모님의 강한 의지가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둘 것 같아? 아빠 여기 있다, 마틴. 내가 널 붙잡고 있어. 아무 일도 생기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나를 꽉 붙들고 있는 아빠의 팔과 나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는 아빠의 힘이 느껴진 순간, 나는 아빠의 사랑이 바다로부터 나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바다 위로 넘칠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p159 


  또한 마틴의 삶을 변하게 해준 이는 버나라는 요양시설 간병인이었다. 학대하고 방치하며 장애물, 당나귀, 쓰레기라고 취급하던 다른 간병인들과 달리 버나는 마틴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내 준 사람이다. 그렇게 마틴을 한 인간으로서 대하며 친구처럼 말을 건네며 돌봐준 버나로 인해 마틴의 의식이 깨어났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이후로 9년의 시간이었다.

  이제 마틴은 컴퓨터로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며 제 의사를 조금씩, 더 많이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다. 공포와 같은 삶에서 다른 이들에게 강연을 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되기까지 당연 다른 이들의 도움이 있었겠지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마틴의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에 맞는 적극적 의지와 실천 노력이었다. 이 책은 그런 마틴의 힘겨운 싸움과 도전의 인생을 전하는 얘기다.


나는 무엇보다 누구든 나를 좀 바라봐주길 바랐다. 나를 본다면 내 얼굴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분명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엔 공포가 쓰여 있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에게도 감정이 있었다. 나는 그저 유령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p217


  과거로 인해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마틴의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그 상상할 수 없는 시간 동안의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견뎌낸 삶에 나태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게 되는 또하나의 지점이 있다. 그것은 돌봄인들의 얘기다. 마틴은 돌봄시설을 이용하는데 그곳의 간병인들의 행태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사실 충격을 받진 않았다. 역시 그렇군이라는 말이 내뱉어지는데, 직업윤리를 떠나서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회의가 인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버나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마틴을 대하는 간병인들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이 그토록 처참한 수준이라는데 놀라고 만다. 결국 유령 소년을 만드는데 그들의 지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이런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윤리의식이 유달리 낮은 것인지, 아니면 업무환경이 이들의 의식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것인지…. 삶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사실 사무치도록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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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사카이 준코, 바다출판사, 2016.

 

  편견이 분명 있긴 하다. 일본 작가의 작품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도 아주 맘에 드는 작품도 없다는 것은 자꾸 나도 모르게 ‘일본풍’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일본풍이 뭔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나면 역시나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문체나 분위기가 유사한 것 같고 이상하게 밝고 경쾌함, 유머와 위트보다는 퇴폐미를 더 느끼게 된다. 시작이야 열린 자세로 읽지만 수렴되는 결과를 보건대, 나의 편견이 너무 깊숙한 건가. 내 취향에 맞는 책을 못 만난 건가.

  저도 중년은 처음입니다.....

  제목에서 느낀 위트는 책을 읽어가면서 사라졌다. 심지어는 중년이 처음이 아닌 사람이 어딨어, 라는 회의적인 멘트로 마감을 하고 만다. 중년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 문제의식, 일본 사회의 관점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사라지고 딱히 통찰적이지 않은 반복된 수다를 들은 기분이 되었다.

  중년. 우리나라에서는 마흔의 나이라고 해야 하나. 마흔에 관한 흔들림과 반성과 의지와 성찰에 관한 글들이 원체 많으니 비교가 되는데, 그러고 보면 이미 마흔에 관한 사회학적인 통찰과 개인의 경험에 대한 글에 대해선 익숙했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바가 전혀 신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작가의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40대의 생각들.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중년이라는 자각을 강박적으로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으로 그 주제를 다루다 보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열렬한 동조의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이 냉소적이고 뜨뜨미지근한 반응을 얻자고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막상 나이가 들면 씁쓸함과 비애가 일상생활마다 마다 묻어나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 이해도 공감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읽다 보니 외모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비중이 상당히 많다. 그렇기에 너무 단순한 패턴으로 읽혀지나 보다. 개인의 방황과 고뇌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할지언정 낯섦을 느낄 터인데 그저 마흔의 나이는 이십대와는 다른 피부, 거죽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나열하며 아름다움이라는 외모로 인해 우울과 고뇌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자주 피력하니 동조가 잘 안된다. (아니, 이건 난 아직 거죽이 많이 변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인가…)

  인생 100세 시대는 70세 시대와는 다른 중년이란 나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당연, 공감한다. 하지만 작가가 바라보는 중년기의 모습은 새로운 인식의 변화와는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몇 살이 되어도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인정할 수 없는 중년 여성들이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추함과 불안함. 그것은 90세 인생시대에 중년을 맞이한 버블 세대들이 내뿜는 새로운 분비물이다. 미마녀들은 그런 분비물 따위 본인한테는 없다는 듯 상쾌하게 웃고 있지만, 내 손끝에서는 그 끈적이고 진득한 분비물이 확실히 느껴진다. p15


  이 책은 중년의 경험담인데 중년 중에서도 아줌마라는 자각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가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작가 역시도 ‘난 아줌마와는 달라’라고 외치고 있는 듯하다. 그래, 미혼이라고 하니 ‘아줌마’라고 불리는데 억울함이 있겠지.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도 제3의 성이라 불리는 ‘아줌마’라는 개념과 특성의 명명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그에 반한 “미마녀”라는 명명이 생겨난 것일 게다.

  하긴 작가는 중년기 변화의 핵심을 지속적으로 외모의 변화로 바라보니까 해결책도 그의 연장선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중년이라는 나이의 외모를 이십대와 비교하며 아줌마임을 거부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니까 추함과 불안함이 나온다는 것이 작가의 문제인식이니까. 시든, 노화가 진행되는 몸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중년기를 지나 노년기까지의 변화를 잘 받아들이고 안정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이 책은 중년에 대한 어떤 통찰과 선언의 글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미마녀”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동정과 질투섞인 조롱같기도 하다.

  어중간한 나이. 그렇게 보이긴 한다. 청춘도 아니고 노년도 아닌 어중간함. 다시 생각하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중년이라는 이미지를 한꺼번에 만들어내려는 시도만 없다면 지금의 중년은, 풍요로운 시대에 풍부한 교육과 다양한 취미를 경험한 세대답게 개개인 얼마나 다른 가치와 이미지를 창출하는 존재들인지. 적당히 안정적이고 적당히 건강한 상태로 여전히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나이이기도 한. 그런 중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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