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문학과지성사, 2016-04-15.


  아주 오래 전에 이 ‘사건’을 접했다. 파리 한 마리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결말이 끔찍스러워 잠자는 이를 깨우는 것에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프랑스 사람들이 해질녘을 표현하는 말이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 멀리서 보이는 짐승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는데, 참 탁월한 표현이다 싶었다. 우리나라엔 아마도 드라마 제목으로 유명해진, 그래서 더 널리 알려진 말로 안다. 이 멋진 표현에 끔찍한 우순경 사건이 겹쳐진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사건과는 안 어울리는 말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선 서정과 불안의 기분이 얹어지는데 우순경 사건에서와 같은 공포는 덜 느껴지니까. 선과 악이라는 프레임을 얹으려 해도 쓸데없이 꺼려지는 느낌은 악이라는 단어조차도 부족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깊어져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서야 나는 그 기이한 감정이 실은 서글픔이었음을 깨달았다. 불빛은 너무나 취약했다. 들에 핀 꽃처럼 무심한 한 줄기 바람에도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어쩌면 불가해한 어떤 악의(惡意)에 의해서도. 30여 년 전 ‘남한’의 벽촌에서 하룻밤새 동네 사람 쉰여섯을 총으로 쏴 죽인 순경은 불 켜진 집만 노렸다고 했다.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새까만 지평선에서 외로이 빛나는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전된 총을 들고 빛을 찾아가는 하나의 그림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림자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두려움 속에 자문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p330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알게 되는데 이것을 보면 왜 제목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했는지 알듯하다. 「동화처럼」을 읽은 후에 「개와 늑대의 시간」을 읽은 터라 「동화처럼」의 동화같은 연애 이야기와 실화 사건 이야기의 간극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 사람이 하룻밤새 55명을 총기로 난사하는 이 이야기는 그날의 기록이다. 한마을을 휩쓸고 간 총성이 울리기 전부터의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사실과 상상을 더해 작가가 재창조하고 있다.

  1982년 4월 26일의 사건 속에서 술만 마시면 난폭해지는 성격이자 평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우순경이 있다. 총기난사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범인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던 경찰이었다는 것이다. 낮잠을 자던 우수경의 가슴에 붙은 파리를 잡겠다고 동거녀가 가슴을 때린 것에서 싸움이 시작되고 이후 무기고를 탈취해 시간 간격을 두어 인근 4개 마을 사람들에게 총과 수류탄을 난사해 사망 56명, 부상 34명을 기록한 것이 이날의 공식적인 사건의 전모다. 우순경은 우체국으로 가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해 외부와 완전히 통신을 차단하게 하고 전깃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난사했는데, 당시 마을은 집장촌으로 대부분 서로가 친척 관계였다. 우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기사로는 알 수 없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고 있다. 일상의 삶에 들이닥친 우순경이라는 실루엣에 그날그날의 충실한 하루를 살던 사람들의 생애가 어떻게 소멸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극의 난사가 더 가속화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가 따라온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보고 체계를 가지고 따지는가 하면 나 혼자만이 살겠다고 숨어 버리는 책임자들, 반공 이데올로기가 꽉 붙들어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항상 끔찍한 사건의 뒷배경으로 자리하는 이 모든 구조는 개개인의 삶에서 필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쉽게 내쳐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사건이 발생한 1982년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2년 후, 당시의 정권은 전두환. 사건 후 민심을 두려워 해 언론 보도 역시 통제했다. 범인 27세의 청년 우순경은 청와대 근무 이력이 있는 자로 청와대에서 좌천되어 의령으로 발령받았다. 이런 좌천에도 우순경의 열등감과 불만이 쌓여 있었는데 이러한 사건이 좌천되기 전에 벌어졌다면 하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끔찍하다는 것을 알지만 ‘차라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늑대의 시간을 만든 것, 늑대를 활개치게 한 것이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그 모든 탐욕과 구조의 한 요소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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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


동화처럼, 김경욱 저, 민음사, 2010.


  어른의 마음속엔 늘 내면아이가 있다. 「동화처럼」에서 거듭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이끌어가는 내면아이의 활약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대처방식이 달라진다. 「동화처럼」은 연애담처럼 성장담처럼 이야기되지만 한편으론 지극한 현실같고 또한편으로는 정말 동화같다. 아무리 연애와 결혼이 우연과 필연의 반복이라 하지만 한여자와 한남자가 만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하고, 어쩌면 세 번의 결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란 현실적이기보다는 동화같지 않은가. 아, 여기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은 각자가 아니라 서로다. 한 사람과 두 번 결혼과 이혼 후 또다시 결혼할 것 같은 관계. 이십대에 시작한 만남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다. 우연과 오해가 만들어낸 필연이란 환상이 실망으로 이어지는 반복을 맞으며 말이다. 

  여기, 장미와 명제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기인 시간의 동화가 시작된다. 동화작가인 장미의 동화는 여러 이야기가 섞인 동화를 만들어낸다. 눈물공주와 개구리가 된 침묵왕자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장미와 명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혼한 여자는 늘 눈물을 흘리고 결혼한 남자는 늘 입을 다물고 산다. 이것이 단지 그들의 관계에서만 형성된 그들의 ‘특징’이라면 이것을 풀어나가는 것도 그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에선 무의식이라는 것이, 영향이라는 것이 있어 이들이 동화속 마녀의 주술로 인해 겪은 끝없는 눈물과 침묵은 그들의 가정환경에서, 부모에게서 영향받는 것이다.


침묵에 길들어진 명제는 말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 그랬다. 인간이 말을 만든 것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라고. 그 말만큼은 그럴듯했다. 명제는 눈물도 믿지 않았다. 눈물은 가증스럽고 요망한 것이었다. 진실이 아니라 감정을 강요하니까. p195


  계모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하는 장미의 엄마나 엄마 없이 자란 아이에게 무뚝뚝하고 말 수 없는 명제의 아버지는 성장한 장미와 명제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원형이다. 장미와 명제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그저, 그들이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거나 뭔가 어긋남이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은 아련한 ‘첫사랑’이 서로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실망감, 다시 만나게 된 첫사랑에 대한 기대와 설렘, 이 모든 상황은 상대에 대한 단점만이 눈에 띄게 만들고 또한 그래서 상대방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는 당연, ‘우린 서로 맞지 않아, 안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동화의 해피엔딩은 늘 결혼에서 끝맺는다고, 그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진정한 해피엔딩일지 알 수 없다는 말 역시 농담처럼 이어져 왔다. 그들은 결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실제 결혼 후의 현실이 얼마나 ‘동화’와는 다른지를 알게 된 후 겪는 좌절과 분노 또한 잔혹 동화처럼 이어져 왔다. 왜, 연애와 결혼은 다른지, 결혼을 하고 나면 그토록 사랑하던 이의 모습이 개구리로 변해버리는 지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해가는 방법이 서툴거나 ‘나’의 모습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는 말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거라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자의 마음 속 아이. 네 개의 다른 별에 살건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거라고. p292


  시간이 또 흐르고 세월이 흐른다고 어른이 되었다 말하지만 어른이란 비단 몸의 성숙과 성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른의 몸속에 어른의 생각과 사고를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더구나 감추어진 저 내면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있다가 힘겨워지고 나도 모르게 답답해지고 무언가를 참을 수 없어 하는 나를 맞닥뜨릴 때. 장미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꾸 개구리 냄새를 맡게 될 때에야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용의 존재가 아니라 용도 죽는다는 사실이라고. 엄마를 계모로 의심한 게 동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동화 속 악독한 계모가 원전에서는 친모였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으니까.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안다. 모든 계모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정작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친모도 계모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p330~331


  눈물공주와 침묵왕자의 마법은 풀린 것일까. 제 안의 용을 무찔렀다면 마법은 풀린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찾게 되면 나를 이해하고 그 바탕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한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장미는, 깨닫는다. 누가 마법을 걸었는지도 마녀가 누구인지도 알아버린다. 장미와 명제가 깨닫는 시간은 짧지 않다. 정말로 한 세월이 흘러가버릴 정도로 길다. 한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는 일보다 어렵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제 속에 웅크려 숨어 있는 내면의 아이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또한 행복한 동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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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폭력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현·최은미·김금희·백수린·최은영·강화길·천희란, 

문학동네, 2017-04-07.


   책을 덮고 나니 강렬하게 인상을 남긴 작품은 생각나지 않았다. 올해의 젊은작가상 작품집에서는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과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특정 몇몇의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고두」에서의 교무실에서 무릎 꿇는 연주의 모습, 「눈으로 만든 사람」의 녹아버린 눈사람, 「그 여름」 수이의 뒷모습, 「호수-다른 사람」의 호수를 어슬렁이는 불안과 공포의 기운이었다. 또한 이번 작품집에선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도 특징이 아닐까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이경은 수이의 그 말이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수이는 이미 그때 이 연애의 끝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기 직전의 연애, 겉으로는 누구의 것보다도 견고해 보이던 그 작은 성이 이제 곧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예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 최은영, 「그 여름」


  「그 여름」이 말하는 수이와 이경의 이야기는 이성애에 기준하여 ‘반대’이자 ‘특수한’, ‘비정상’인 동성애라는 ‘다름’을, 인간의 보편적인 만남과 헤어짐의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있다. 수이와 이경이라는 이름을 바꾼다면 하릴없는, 반복된 연인들의 이야기다. 연인들 자신들에게야 아름답고 슬프고 애잔한 사랑의 기억일지 모르겠으나 누군가에겐 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어쩌면 사랑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사랑이야기가 단지 이름만으로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하는지,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라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특별하게 기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성애의 시선으로 ‘동성애’를 바라보자면 마냥 다를 것 같은 그들의 연애는 전혀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특별할리 없는 보편 인간의 감정을 내세우고 있다. 끊임없이 동성애, 성소수자에 대한 반감과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가 있다면 이토록 다르지 않은 인간의 감정에 구분과 차별을 말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느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눈으로 만든 사람」은 매우 산뜻하고 아름다운 동화의 세상이 펼쳐질 줄 알았다. 시작은 그러했으나 역시 세상은 잔혹 동화와 어울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마냥 서글펐다. 일상을 잘 흘러가듯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홀로 견디며, 강박적이도록 자신을 다그칠 수밖에 없었던 강윤희의 지난날의 기억. 잔혹동화의 현장을 보는 듯했다. 이 세상엔 수많은 강윤희가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만큼의 강중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교차되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잘 살아가는 이 세상의 강중식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맞닥뜨려야만 제 잘못에 대한 반성과 후회를, 어쩌면 사과같지 않은 사과를 건넨다. 그들이 행하는 사과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제 불행을 비껴달란 하소연으로 보이는 그런 것.

  가만 생각하니 이번 작품집은 전체적으로 세상 속 폭력을 견디어 내는 ‘여성’의 삶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듯하다. 가족에게든 학교에서든 연인에게든 낯선 존재이기도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도 한 이들로부터 가해지는 폭력들. 세상은 「고두」의 선생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대로 인간은 충분히 이기적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파노라마 같다. 누가 누가 가장 이기적인가를 실현하며 한없이 폭력적이고 적당히 비윤리적인 세상에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노라 끝없는 항변을 듣고 있는 것만 같다. 산다는 건, 어쩜 이리도 비릿한 건지.


얘야, 내 말 좀 들어보렴. 인간들이란 게 말이다, 원래 다들 이기적이거든. 태생적으로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거란다. 그게 나라고 뭐 달랐겠니.  - 임현, 「고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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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앓다 - 문학은 상처에서 출발하고 상처 위에 존재한다 민음의 비평 5
강유정 지음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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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 상처


타인을 앓다, 강유정, 민음사, 2016.


  타인을 앓는 일은, 불쑥 일어난다. 의도하지 않음에도 들이닥치는 감정의 풍랑이다. 그것은 오래도록 가슴에 머물러 종내는 머리를 지배하기도 한다. 가령 외벽 작업 중 사망한 가장의 다섯 아이와 아내, 노모를 향한 모금 행동도 타인을 앓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고인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은 ‘정’이 많아 일컬어지는 한국인들에게는 더러 볼 수 있는 일인 듯하다. 어쨌든, 그렇다면 이처럼 타인을 앓는다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꽤나 중요한 힘이다.

  평론은 문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로 서 있다. 대체로 서두에 시작하는 온갖 학자들의 명언이나 문구들을 보면 늘 특정한 이의 이름과 문구가 인용되고 평론들 마다마다에 사용된다. 그러니, 문학을 읽는 방법이 학자나 타인의 문구를 통한 해설이 되어 평론은 문학을 매개로 한 비평가들의 세계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제법의 학자들을 평론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비평이 준 장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평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언어의 틀은, 오히려 소설 또는 시에 대한 이해를 저 멀리로 보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굳이 비평집을 찾아 읽은 것은 오로지 제목 [타인을 앓다] 때문이다.

  이 제목에서 전하는 바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라 여겼기에 어떤 학자들의 말들이 줄줄줄 이어진대도 견디어 볼 수 있다 생각했는데 굳이 견딜 필요가 없었다. 쉽고 평이하게 소설들을 비평하고 있어서 저자가 말하는 관점에 유의해서 소설을 생각해보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 비평집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문학과 사회비평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인지, 당대 소설의 주요 서사 소재지, 출판시장의 기획형 상품, 청소년 소설 장르란 무엇인지, S.F라는 장르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과 의견을 건넨다. 2부는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을 중심으로 비평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확인할 수 있다.

  31편의 평론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바탕은 제목이 함의하고 있는 것처럼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소설을 읽었을 때 ‘좋다, 재미있다’를 적극적으로 말할 때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게 공감했을 때이다. 인물에 공감하지 못하면 소설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는 듯하다. 책제목이 [타인을 앓다]인 것에 대해 저자 강유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인을 앓는 것, 문학을 읽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타인을 앓는 것, 깊은 공감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그게 바로 미련하지만 두터운 문학의 길일 것이다. 이해하고자 애쓰는 내가 먼 곳의 다른 고통과 소통하는 초월적 인식의 공간, 그게 바로 문학의 공간이다.


  문학의 공간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은 수용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속 세계는 현실의 반영이라 아무리 외면하고픈 사건의 연속일지라도 무엇 하나라도 이해의 고리를 발견하고픈 욕구가 있다. 저자는 최근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성적 도덕’이란 동시대성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근현대사의 흐름에 문학은 그 궤를 같이 했다. 그 역사를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알지 못했던 이들의 사연들을 재현하며 소설속 인물이나 그것을 읽는 독자 모두 상처를 치유하기를, 고통을 내 고통처럼 여기기를 바라는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위한 소설은 기존과는 다른 플롯과 서술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의 구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나’라는 특정한 소설적 주체가 아닌 불투명한 타인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공감하는 자가 타인을 앓는 윤리적 작가이고 시대의 보편적 감정을 목격하고 재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소설의 존재 이유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의 보편적 감정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필요하다. 저자는 최근 젊은 작가들의 소설이 “그냥”이라는 단어 사용과 인물이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인물의 직업도 명확하지 않다는 이 상황을 20대의 독특한 세대적 고민이거나 서사적 관점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들의 소설에서는 부정과 무위와 냉소와 욕망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고 파악한다.

  최근의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관점이 없다는 것이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0년대 소설 속 인물들은 한국 전쟁과 절대적 가난, 1960년대 대학생들은 4·19 세대의 정서적 박탈감과 가난,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인물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2000년대 이후의 20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면들을 발견할 수 없다. 마냥 사용되는 “그냥”과 “습관”이라는 방관의 태도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어떠한 ‘정신’ ‘상처’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작가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된다. 작가들에게 동시대의 상처없음이 결핍이 된다. 왜냐하면 문학은 타인을 공감하는 것,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상처’가 필요하니 말이다. 2000년대 이후의 동시대가 경험하는 상처의 부재가 작가들에게는 긍정의 요소가 될 수 없음이다.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2007년 젊은 작가 대회에서 한유주는 자기 세대의 특징으로 거대 담론, 대문자로 기록된 역사적 상처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공통의 상처가 없는 세대에게, 9·11 테러는 신선한 시적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고백을 덧붙였다). 중심의 상처가 부재하다는 사실에 가벼움의 향락을 느낄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환부 없는 상처의 곤란을 증언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공통의 상처를 기억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세월호라는 상처, 그리고 촛불혁명이라는 벅찬 불빛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상처…. 그러니 이제 동시대가 함께 느끼는 상처를 가졌으니,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기대해도 좋으련가. 저자가 지적하는 대로 문학은 상처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상처를 어떻게 풀어가는가는 작가의 역할이다. 거기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바탕이 흐른다면 읽는 독자는 더없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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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의 깨달음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문학동네, 2017.


  랄프 로렌이 의류 브랜드라는 걸 몰랐다. 당연 창시자도 몰랐기에 디어 랄프 로렌의 “디어” 또한 “dear”인지 몰랐다. 작가의 단편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에 대한 인상으로 이 소설을 잡았을 땐, 오로지 손보미라는 작가에 기댄 선택이었다.

  단편의 느낌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국적 이미지였다. 작가의 작품에서 분위기나 서술톤에서 번역투라고 해야 할 지, 외국 작가의 느낌이랄지, 그런 이미지를 더러 느꼈는데 이번 장편 소설은 아예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그곳의 등장인물의 삶을 쫒고 있다. 단지 배경만, 그러니까 장소만 옮긴 한국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랄프 로렌의 이야기는 실존인물과 오버랩되면서 그의 생애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기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허구가 섞인지 모른 채, 우선은 작가가 찾아가는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의 인생사가 진실인 것처럼 여겼다.

  유학생활 9년차의 종수는 지도교수로부터 퇴출 통보를 받고 서랍을 부수던 중 교교시절 같은 반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한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왜 이런 편지를 보냈는지 그들 사이가 어땠는지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니 수영과는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함께 한 시절이 있었다. 수영은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쓰고자 했고 종수에게 영역해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그해 수영과 종수는 함께 만나 얘기를 나누었지만 수영이 편지를 부쳤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그해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만났던 그땐 이미 랄프 로렌은 사망한 후였고 종수는 미국에 머물며 랄프 로렌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와 관련된 자료를 찾는 과정에 랄프 로렌을 아들처럼 키운 시계공이자 권투 선수 조셉 프랭클, 조셉 프랭클의 이웃 백네살 레이첼 잭슨, 레이첼 잭슨의 입주 간호사 새넌 헤이스를 만난다. 그렇게 랄프 로렌의 생애를 쫓으며 그가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는지, 랄프 로렌과 조셉 프랭클이 숨긴, 수수께끼 같은 고리들을 계속 찾는다.

  타인의 인생을 쫒는 일이 지루한 궤적으로 흘러가리라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큰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일념으로 타인의 생을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듯 여겨졌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교차되는 수많은 서술의 흐름 속에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뒤쫓는 ‘종수’의 속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닐까 했다. 그만큼, 종수는 왜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찾으려 하는지, 보다 치밀하고 열성적인 것도 아니면서 그때 그때 생각의 조각들을 맞추어 가면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노라면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종수’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과 종수처럼 살고 있지 못하다라는 상반된 생각이 올라온다.

  전자는 종수에게서 목표한 것에 도달하지 못해 밀려난 느낌을 갖는 이의 방황과 자조적인 모습을 본 것이었다. 후자는 어떤 기억에 의지해 타인의 삶을 탐색하는 여정을 하는 이는 얼마나 많은가란 생각이었다. 그만큼 종수는 나약한 듯 의지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랄프 로렌의 삶을 쫒는 건 종수에게 지난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무력한 상태의 자신을 벗어나기 위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길 위에서의 깨달음 같은. 순례자 같은.

  궁금해 한 랄프 로렌의 삶의 부분을 명확히 알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최종적으로 랄프 로렌의 행적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이 소설에서 수수께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수수께끼가 목적이 아닌, 종수의 이야기.


삶이 축제는 아닐지언정, 그게 자신을 지치게 하더라도,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잭슨 여사는 자신의 삶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움직이게‘ 만들었다.


  동화 파랑새처럼 길의 이야기, 여정의 이야기라면 수영의 편지는, 종수에게 무엇이 될까. 오랫동안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그 기억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미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을 기억한 종수의 이야기. 그렇게 사람과 사람을 만나,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종수의 이야기. 마침내 기억한 “디어”라는 단어에 깃든 말. 그것이 종수가 찾고자 하는 것, 찾아낸 것이었다.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또하나,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다. 헤밍웨이가 쓴다는 것이 고독한 삶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 프롤로그에서부터 시작하면서 종수가 랄프 로렌의 삶을 뒤쫒는 과정에서 자신을 작가라고 지칭하듯이 이것은 고독한 글쓰기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구나. 매일 불평불만을 늘어놓지만 매일 쓰게 되는 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토록 늘어놓는 불평불만은 누군가의 삶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 위한 서투른 표현이라는 것. 그렇게 글쓰기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들을 친밀하고 따스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부고를 통해 죽은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을 간결하고 우아하고 진실된 문장으로 ‘공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이모가 죽은 후에 어머니가 왜 그토록 그녀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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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6-1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롭네요.

이방인이 미국에서 랄프 로렌의
흔적을 좇는 이야기가 말이죠.

모시빛 2017-06-16 00:05   좋아요 0 | URL
뜬금없이 사제폭탄을 만든 대학원생이 연상됐어요.....종수도 교수님께 퇴출 통보를 받고 서랍을 부수는 과격(?)한 행동을 했지요. 그리고 기억의 매개물을 쫓아 랄프 로렌을 쫒는 참 서정적인 여행을 하는데.......역시 소설과 현실은 다르구나란 생각이...교수님 꾸지람에 한달전부터 폭탄 계획을 세웠다는 대학원생 때문에 책을 읽은 뒤에 오히려 더 종수가 기억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