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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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 불안정한 혼합물


수잔 이펙트, 페터 회, 현대문학, 2017-04-20.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것 아닌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사용하며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재능없음에 좌절하기 바쁜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것을 누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쩐지 재앙같기도 하다. 어떤 재능인가가 더 중요한 것인가.

  수잔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말을 거침없이 하게 만드는 이 능력. 그리하여 그것은 ‘수잔 이펙트’라 명명된다. 이 능력의 필요성이 인정되다가도 수잔 이펙트가 내게 적용되면 그땐 또 그렇게 좋은 기분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긴 한다. 이런 능력을 가진 수잔이 심리학자라거나 상담사였다면 혹은 범죄 조사자였다면 재능에 맞는 직업을 선택했구나 하겠지만, 수잔은 물리학자다. 하긴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수잔을 붙들고 자기 속내를 마구 드러내고 있다면, 그 입장도 곤란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니 평범하지 않은 삶을 꿈꾸는 이에겐 이 수잔의 평범한 삶에 대한 욕구가 과연 진심의 욕구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너희가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인생을 살면서 꼭 이루고 싶은 게 뭐였는지 아니? 평범한 삶을 사는 거야. 내겐 그게 물리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보다, 이 효과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어. 아니, 뭘 알고 싶다는 것 자체보다 훨씬 중요했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평범한 삶을 갈구했어. 가정과 직장, 남편, 아이들, 월급 통장,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삼시 세끼, 그리고 카오스와 엔트로피가 내 삶에서가 아니라 닫힌 시스템 안에서 유효하다는 확신. 그리고 난 그걸 얻었어.


  심리 추리 스릴러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상황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세밀하다. 그럼에도 속도감이 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무엇보다 독특하고 독보적인 수잔 캐릭터의 힘, 수잔만큼이나 개성있는 수잔의 가족들의 활약상, 끝날 줄 모르고 무한히 확장되는 이야기의 끝이 궁금하여, 수잔 이펙트의 실패 사례는 혹여 나오나 싶은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는 힘이기도 하다. 물리학자인 수잔의 시선으로 사건이 전개되기에 여러 요소에 과학적인 해석이 등장한다. 그 또한 독특하고 재밌다. 안 그래도 수잔 이펙트가 인간의 솔직한 심정을 마구 노출하는 것인데 그렇게 마구 분출되는 인간의 감정을 과학적인 이야기로 살짝 정리시켜 주는 느낌도 든다.

  이야기는 수잔의 네 가족이 인도에서부터 사고 친 데서 시작한다. 인도에서 범죄자가 될 뻔한 네 명 모두가 덴마크 국가 기관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기 위해 국가 기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딱히 제안이 어려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젊은 인재들의 ‘미래위원회’의 마지막 보고서를 찾는 일이다. 이것이 자신을 강간하려 한 배우를 때려눕혀 받은 25년형보다 인도 부족장의 딸과 도망쳐 마피아에게 쫓기는 남편보다, 골동품 밀수혐의로 고소당한 아들보다, 백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승려와 도주 중인 딸의 안전보다 결코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간단히 끝이 날 거란 생각에서, 덴마크로 돌아가고 싶기에 수락한다. 그러나 예상 가능하듯 이 일은 보다 복잡하고 거대한 음모가 가득했다. 당연, 끝없는 목숨의 위협이 있고 연이어 관련된 자들의 죽음이 발생한다.

  국가 기관이 개입한 비밀스런 일은 너무 당연하겠지만 좋은 쪽과 나쁜 쪽이다. 국가라는 권력을 이용한 온갖 악행의 비리를 숨기려고 하거나 국가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으려는 형태가 대부분이라 미래위원회 보고서를 찾는 것은 핵심적인 사항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거들 뿐, 이 이야기가 이끌어가는 방향은 처음부터 짠하고 자신들만의 독특성을 알린 이 네 가족의 여정과 관계였다. 이제 헤어질 가족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으면서도, '태생부터 독불장군에 극도의 개인주의자‘인 네 명은 이 일을 해결하는데 함께 한다. 각자의 의견과 의지를 결코 굽히지 않은 채로 이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각자의 길로 나뉘는 결말로 향해 갈지, 그렇지 않은 길을 택할 지 그 역동성과 내밀한 관계의 변화가 미래위원회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이야기보다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들에겐 엄마라고 불리기보다 ‘수잔’이라 불리기 원하고 엄마들이 누구의 엄마로 명명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수잔이다. 하지만 수잔 역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눈, 머리카락, 연금, 모든 걸 내놓는 안데르센의 어머니 이야기의 어머니와 같이 행동한다. 어쨌든 자신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반쪽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수잔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서도 방황하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에서 연유한다. 또한 춤추는 것을 더 중요시하며 자신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수잔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수잔 이펙트를 떠나서도 매력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오랜 시간 스스로를 옭아매는 이 기억이 수잔과 수잔의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만들었다. 또한, 수잔의 남편 역시도 수잔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또한 어린 시절 가족에게서 부모에게서 받은 외로움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고난을 함께 하고 문제를 함께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이 독불장군의 이기적인 네 명은 서로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이해해 간다.


“그 이야기를 해줄 때 엄마는 우리에게 방을 만들어주려고 한 것 같았어요. 전 그걸 느낌으로 알았어요. 아주 환한 방을, 완벽한 방을 만들어주려고 하는구나. 엄마가 말했잖아요, 물리학은 항상 완벽한 공간을 만들어내려 한다고.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 완벽한 진공상태의 공간, 무중력의 공간, 무균상태의 공간. 엄마 아빠는 우리에게 그런 공간을 만들어주려고 했어요. 엄마가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전 그걸 가장 분명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해줬고요. 거의 그렇게 했다고 해야겠죠. 그런데 전 그 방에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만약 그 방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문제는 바로 그거예요. 정말 아픔이 없는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위험하잖아요. 왜냐면 그냥 거기 있고 싶어질 테니까.”

“엄마, 내 생각에 엄마는 물리 숙제를 고치듯 세상을 수정하려고 했어요.”


  수잔의 딸 티트의 말은 미래위원회가 벌인 일과도 연관되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어쩌면 미래위원회가 한 일들도 넓게 보면, 게다가 긍정을 끌어들여와 좋게 표현하면, 수잔과 라반이 하랄과 티트 쌍둥이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려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목적과 실행에서의 결정적인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미래위원회가 세기말의 상황에서 추진하려 했던 그들만의 공간이, 위험하다는, 권력자들 역시도 그들만의 권력과 욕망과 권위로 세상을 수정하기 위해 열심히라는, 그 방향이 어떤가를 좀더 생각지 않고 마구 달려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만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수잔이 찾아낸 ‘수잔 이펙트’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또렷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그리고 이 효과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게 뭔지 아세요?

타인이에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사는 건 바로 타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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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추리


분실물이 도착했습니다 - 다섯 개의 미스테리, 오오사키 코즈에, 생각의집, 2017-02-10.



  분실물이 도착했다.

  찾으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우연처럼 제 스스로 도착했다. 전체 다섯의 단편이 있는데 부제가 다섯 개의 미스터리이다. 추리 소설인가 했는데, 다 읽고 나서야 왜 제목이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분실물일까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여기, 다섯 개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잃어버린, 제쳐두었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결국 분실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지난날의 기억은 그때 해결치 못한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가늠케 한다. 오래 전 잃어버린 물건들이 나도 모르는 새 집으로 도착해 내 손에 쥐어진 것처럼 여기 이야기들은 모두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미스테리하다. 분실물은 어떻게, 왜 지금 도착한 것일까.

  미스터리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의 일의 파장이 무엇인지, 또 범인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소설들에 관통하는 느낌은 그러한 범인 추적이나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것보다 분위기이 듯하다.


저는 ‘살아온 일대기’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단 하루의, 아니 한 순간일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 「들장미 정원으로


  기존 미스터리물에서 볼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서늘한 느낌보다는 정제되고 깔끔한, 담백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공포와 잔인함이 가미된 미스터리가 아니라 아련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단편 속 대사처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어떤 일들이 다른 계기로 인해 이야기되면서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이야기의 전말을 가늠하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해결되지 못한 기억들은 그렇게 잔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 기억에 대한 마무리를 완결을 하고픈게 사람들 마음인 듯하다. 우연찮게 책을  들었는데 첫 번째 단편 「사라의 열매」의 인상이 괜찮아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사라의 열매」는 부동산 중개업자 코히나타 히로시가 업무일로 방문한 집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20년 전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시작된다. 결국 자신이 관계된 그날의 이야기, 그러니까 소풍날 히로시는 납치됐고 그 시간 사망한 남자가 있었던 사건. 자연적으로 가정폭력에 대해 나아가는 이 이야기에서, 상처와 죄책감의 흔적이 짙게 묻어난다. 그리고 친구….


원치 않게 사람을 상처 입히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방황을 하던 중 들어가 산소에서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하얀 꽃을 보게 되었어. 그는 그 꽃에 완전히 매료되어 몇 번이나 산에 왕래했고, 그러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꽃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네. 그 열매를 가지고 돌아와 하얀 꽃의 모습에서 자비를 빌며 표식을 새기였지. 자기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 자기가 자신에게 입힌 상처. 이렇게 가로로 두 줄의 상처를 내고, 그것을 봉인하기 위해 세로로 상처를 내었어. 그리고 일생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숨기겠다고 맹세하지. 그런 이야기였어. -「사라의 열매」


  히로시가 들고 다니는 두 줄의 흠집이 새겨진 노각나무 휴대폰 고리. 사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꿰맞춰보던 선생님의 숙제처럼 남은 죄책감. 힘들 때 의지할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아 아동학대에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님은 히로시에게도 그 죄책감을 덜어버리라고 말한다. 과거의 열매를 버림으로써. 그것은 히로시가 범인임을 단정하고 하는 말인가.


사라쌍수의 꽃이라고 알아?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앞부분에 ‘기원정사의 종의 소리, 제행무상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 꽃의 색, 성자필쇠의 이치를 나타낸다’라는 문장이 있잖아. 그 사라쌍수의 꽃 색깔이 하얀 색인데, 이게 그 열매야. 정말이래. 특별한 열매야. 상처가 없으면 꽃이 피지만 말이야. 심지 말고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 너에게 맡길게. 그냥 부적 같은 거야.  - 「사라의 열매」

      

  히로시는 더 이상 무겁고 괴로운 짐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노각나무 열매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 자신도 맡아 놓고 있는 것이었으니. 차 속에서 오래도록 흐느껴 우는 성인의 모습이 참으로 애잔하게 기억되는 사라의 열매다. 사라의 나무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날 때 근처에 있었다는 나무고 노각나무는 사라의 나무라 불린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각나무 단편의 이야기가 맞물려 이야기의 풍성함을 더한다. 


벚꽃 이야기를 했어. 전화를 든 채로 커다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하얀 것이 떨어지길래, 꽃잎 인가 하고 봤더니 눈이었다. 정말 예뻐서,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거미줄」


  유달리 다섯 이야기에는 꽃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이 아련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켜 주고 있는 듯하다. 「거미줄」속의 벚꽃도 이야기의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대화 속에 지나간 어느 날의 사소한 일 하나가 어떤 이에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일로 작용하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어떤 이의 생에 대한, 나의 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인생에 대한 비애를 공감하면서 그러나 헤어짐은 변함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의 날.


그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 마음 깊이 남았어. 뭐라고 할까? 땀 투성이가 되도록 동네를 뛰다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에 문득 하늘을 바라본 느낌? ‘이제 됐어’ 그렇게 중얼거리면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숨쉬기도 편해지지.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버팀목이 뚝하고 부러진 걸지도 몰라‘.’이제 됐다‘는 그 말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느껴졌어. 분명 지쳐있던 걸 거야. 나도, 선배도 너무 많은 일을 무리하게 했어. -「거미줄」


  이제 됐다. 왜 이 느낌을 알 것 같은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도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숨쉬기 힘들었던 기억들이, 아슬아슬하게 삶을 지탱하던 버팀목을 붙들고 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이 대화가 나오기까지의 두 연인들의 희극적인 상황도 블랙코미디같이 여겨졌다. 삶은 참 여러모로, 아니러니다. 참 서정적으로 다가온 미스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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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거리를 뒀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책읽는고양이, 2016-10-20.


  기차를 타며 읽으려고 선택한 몇 권의 얇은 책이 모조리 일본 작가들의 책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다」의 제목이 좋아 책을 꺼내드니 표지가 익숙했다. 제목과 표지의 연관성이 뭔가 생각할 겨를 없이,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표지가 익숙할 만큼 알라딘에서 많이 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책과 역시 제목만 들은 ‘뭐라고’ 시리즈의 작가 사노 요코 작가의 에세이를 들고 기차를 탔는데….

  너무 거리를 뒀나. 몇 문장의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약간의 거리를 두다」는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 다가오지 못했다. 덜컹이는 기차때문이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오히려 덜컹이는 기차였기에 그 감상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과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다」와 사노 요코의 책을 기차여행에 선택한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에세이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에세이가 번역되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면 이것은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거나 작가의 유명에 달린 것이라고. 물론, 우리나라 출판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두 작가 모두 소설가라 하는데 작품이며 작가며 전혀 알지 못했고 에세이의 문장에 감흥하지 못하는 것을 여전한 ‘일본풍’이라는 취향으로 돌리기에도 함께 선택한 일본 소설은 그 일본풍에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에서 탁월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이 책들의 무엇이 여행길의 내게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성’만을 작동하게 했을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었어도 점점 가까이, 그리고 계속 머물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러니, ‘약간의’ 거리를 둔 것이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산문집은 타인의 경험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이끌어내는 작가의 통찰을 접하며 나는 왜 내 삶에서 이러한 것을 간과했나 생각하게 되고 그 시선을 돌아보기도 한다. 때론 너무나 공감하는 문장들을 만나 하염없이 빠지고 때론 전혀 생각지 못한 문장들을 만나 또 풍덩인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익숙한 경험의 나열이었다. 하긴, 어떤 에세이들은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타당한 논리를 얘기하기에 신선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신선하지, 않다가 이 책들에게서 얻은 느낌이다. 소노 아야코는 차분한 가운데 어두운 느낌으로 사노 요코는 수다스럽고 경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소노 아야코는 나답게를 위해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제시한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관한한 일본인들이 월등히 잘하고 있는 점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나 했지만 일본의 원제는 「인간의 분수」. 원제였다면 이 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일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나답게 사는법에 관한 한 어느 나라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긴 하다. 타인의 기준에 매달리지 말고 나만의 법을 찾으라는 이 조언은 굳이 일본 번역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오고 들어온 이야기다. 알지만 늘, 실천에 능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런 에세이를 통해서 또다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 또 실패하고, 또 노력하다 실패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싶다.

  소노 아야코의 「인간의 분수」 우리나라 번역본 「약간의 거리두기」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 방법에서 자주 눈에 띄는 건 익숙하게 들어온 방법이나 감정적 서가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역시도 반복적으로 들어온 수사이긴 하다. 그래서 번역본의 제목보다 오히려 원제가 가지는 「인간의 분수」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걸맞은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운명과 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가 제시하는 이 나답게 살기 위해 타인과의 거리를 두는 법에서 전하고자 하는 방법은 내게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신도 좋고, 세상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세상은 좋아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가 옳지 못하기에 신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이런 모습은 악이라고 규탄했지만 의외로 신은 ‘상관없다’라고 응답해주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신은 언뜻 봐서는 공존이 불가능한 적대관계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종교인이 아니라 ‘특정’종교가 없기에 이 반복된 메시지에 감흥이 적었음은 분명하다. 힘겨운 삶의 고민들을 종교를 통해 좀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가고, 또 제 경험을 타인에게 제시한다. 그 지점에서 소노 아야코의 방법이 내게 와닿지 않았을 뿐.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을 더욱 이기적이게 한다“라고도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를 이어가는 종교와 어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도 이 생각에 한몫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할 때 불행히도 ‘종교인’은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하면 너무 억울할 것도 같지만, 종교를 갖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종교’가 제 힘들을 제대로 못써먹고 있는가, 잘 써먹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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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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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를 아시나요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2017-03-15.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글을 읽을수록 여러 생각의 갈래로 달려갔는데 그 중 하나는 끌림이었다. 끌림의 느낌은 서늘함이었다. 싸늘함과는 다른, 왜인지 모르게 서러움 가득한 기분. 발저의 글 속으로 푸욱 파묻혀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픈 설움에 떨렸다. 작가의 생애를 먼저 알았기에 작가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을까. 물론 그렇지않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작가의 생애로 인해 글과 작가가 일치되었고 길 위의 고독가가 느껴졌다.

  발저의 생애를 보다가 몇몇의 작가가 생각났는데 거리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며 국민작가라 칭송받는 보후밀 흐라발이다. 발저 역시 스위스의 국민작가라 칭송받는다 하며 독일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코스키, 흐라말, 발저의 공통점이라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글을 쓰고 주류라 불리는 분위기로부터 몇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그들의 주변에 흐르고 있었고, 물론 그것이 내면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은 그의 작품 「크리스마스이야기」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아침, 산책길,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작품 「산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걷고 걷는 이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작가의 인생에서 걷기와 쓰기가 중요한 듯 그의 인생은 걷는 것과 쓰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그의 생에 종이조각이라면 어디든 글을 썼다는 발저는, 자살을 시도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발저의 자살은 원체도 가난한 삶에 전쟁으로 인해 더 심해진 궁핍과 그로인한 우울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절대 글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글을 쓰러 간 것이 아니라 ‘미치기 위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라고. 독특한 그의 세계가 가늠이 되지만 내면 깊이 걸어 들어가는 발저의 글맛이 독특한 세계, 그런 것이 어디 있나 싶다.


고독하다는 것. 얼음과 같은, 쇠붙이와 같은 전율, 무덤의 냄새. 자비심 없는 죽음의 전조. 아, 한번이라도 고독했던 자는 다른 이의 고독이 결코 낯설지 않은 법이다.


  이 작품집으로 발저의 글을 처음 접하지만 고독이 짙게 배여 있다는 느낌과 머릿속이 복잡하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방법이 발저의 산책으로 그리고 글쓰기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끌림도 글속에 짙게 배인 이 고독과 서정의 나래였다고 생각된다. 100년도 전에 태어난 발저에 대해 책표지의 저자 소개 정도로만 알고, 단지 작품 하나 읽었다 뿐인데도 나는 그의 세계가 이해되는 듯이 굴고 있다. 나는 홀로 산책하듯 발저의 글을 읽다가 그가 내 앞에서 걸어가는 듯이 여기며 글을 읽었다. 어떤 정서나 문체에서 발저의 끌에 한없이 끌린 후 마냥 산책을 하고픈 기분에 시달렸다.


나는 언제든지 할 수만 있다면 몽상에 잠긴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하는 건 아니다. 조금도 알지 못한다! 나는 늘 생각하는데, 어디서 큰돈이 굴러 들어오면 나는 일하지 않으리라,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나를 어린아이처럼 기쁘고 들뜨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걷고 싶었고 길만이 아니라 내 내면의 길로도 끊임없이 걸어가고 싶었다. 마냥 걷는 것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탁월하고 두서없이 글을 적는 것 역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나름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글이 생각을 따라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발저의 이 산책과 함께 한 글들에 자꾸 맴돌게 되었나, 싶다. 그래서 반가운 글들과 더러는 재밌는, 그리고 아주 많이 서러운듯 느껴지는 글들을 보면서 그의 마지막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나, 아니 그의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 생에 또한 우울했던 그의 생에 대해 그 자신, 아름답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을까.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비가 오지 않는 오랜 가뭄의 날들. 발저의 글을 들여다볼수록 왜인지 서러운 울음이 나는 듯했는데 눈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이 세상에 불만도 불안도 많고 어쩔 땐 전혀 원하는 것이 없기도 어쩔 땐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한동안은 계속 그랬고, 지금도 역시 분노를 버리면 안 되겠구나, 하며 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잡고 있는 것도 없으면서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에 들 때가 있는데…발저처럼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지 않을 날이 올까. 아직, 확신할 수 없어서 더 서글픈지도 모르겠다.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움의 색 바랜 고결한 그림이여, 감미롭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이 세상과 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합당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역사의 사색에 잠겨 있는 자신의 기분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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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를 보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해냄, 2017-04-03.


  작가가 13년 만에 펴내는 단편소설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수록된 다섯편의 글을 보면서 소설과 수필 사이에서 갸우뚱했다. 마지막 수록된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2011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일 때 읽었던 것이라 단편소설상을 받은 만큼, 소설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때도 수필 느낌을 더 받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외에는 대체로 수필로 느껴졌는데 그건 특히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 여겨지는 내용과 작가의 등장 때문일 듯하다. 장르가 글을 읽는데 어떤 영향이 있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읽을 때의 느낌이나 방법에서 나름 차이가 있다고 여겨진다. 상상의 면에서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글은 상당히 속도감 있게 읽혔다. 수록된 단편이 적은 분량이긴 했지만 산문집을 보는 듯한 편집의 영향도 있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땐 고령화시대의 노인들의 연륜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거나 탄핵 사건을 계기로 노인세대에 대한 비판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성향을 보건대 후자쪽으로 더 기울었다. 막상 읽어보니, 이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는 현대 과학을 다 동원해 의사가 예측한 대로 일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돌아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숯덩이 같은 빛깔의 얼굴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할머니의 숨소리는 정신 나간 거위가 꽥꽥거리는 것처럼 커서 가끔 할머니의 용태를 확인하러 집에 들르던 친척들은 할머니 방에 얼씬하지 않고도 거실에서 느긋하게 햄과 치즈 그리고 연어 따위를 안주삼아 위스키를 마시면서 골프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곤 아마 “저 양반 참 오래 버티시네……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제 고만 가셔야지.”라고 모든 것이 할머니를 위한 생각이라는 듯, 스스로를 매우 선량하게 여기는 얼굴로 말했던 것뿐이었다.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할머니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 때 할머니는 당신 자신의 자식을, 며느리의 죽음을 겪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후에도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기다리면 어김없이 다음날 할머니는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났고 그 대신 다른 생물들이 어김없이 죽었다. 생생한 몸을 일으키며 미음을, 밥을, 갈비를 뜯어먹는 할머니에게 ‘나’는 경악하지만 ‘나’가 목격한 것은 할머니의 죽음의 순간 강렬하게 내뿜는 할머니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옭아매려던 기운에 소리쳐 반항하며 빠져나왔다. 여전히 할머니는 죽을 때가 되었다가 다른 생명의 죽음과 함께 생생히 살아나 밥을, 갈비를 먹고 있다.

  오래도록 병을 앓은 채 이제 죽음이란 문턱에 있던 노쇠한 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생생해지는 모습은, 그 사이에 ‘다른 것이 (대신) 죽었다’가 삽입된 상황을 맞닥뜨리며 할머니에게서 구미호를 겹쳐보이게 한다. 매일밤 가축들을 잡아먹으며 아침이면 인간의 얼굴을 들이밀었을 구미호.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른 것을 죽여 일상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도록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었고 생명의 본질로 여겨졌다. 용인된 것과 용인되지 않은 것의 차이, 어떤 것이든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항상 문제는 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오래전 구미호를 보며, 읽으며 구미호에게 연민을 느꼈던가. 인간이 되고자 하나 하루를 착각해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던가. 기껏해야 사람을 잡아먹는 여우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발버둥을 가소롭게 여겼던가. 여우가 인간이 됨을 타당하지 않다 여겼던가. 글쎄, 확실히 어린 날엔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가 무서워보기인 했을 지라도 결국 눈물 흘리며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 구미호에게 마냥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어떤가.


내가 아는 것은 그 힘이 분명 할머니에게서 왔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힘은, 그렇게까지 목숨 바쳐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가여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가난해서 마음을 굽혔던 것도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도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꼭 남을 해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이라는 것을……

  

  할머니가 죽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죽지 않는가, 죽지 못하는가를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쏟아 나오는 기운을 보건대는 분명 죽지 않는 것이다. 그 기운이 여전한 탐욕과 욕망이라 말한다면 자신보다 약한 생명들을 죽임으로써 살아나는 할머니의 생에 대한 욕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강자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할머니 대신 죽은 생물들은 약자라는 이 프레임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고양이가, 진돗개가, 까치가 그렇다고 치다. 할머니의 아들이, 며느리가 약자인가? 대체로 우리는 노인들을 사회적 약자로 간주한다. 그래, 분명 할머니는 사회적 약자다. 더구나 할머니는 병들었다. 이보다 더 약자인 경우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왜 할머니를 약자라 하지 않는가. 오로지 할머니가 가진 게 ‘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만 가지면 그저 세상의 강자로 바라보는구나. 이 서글프고 씁쓸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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